‘손 더 게스트’를 만든 빙의 연기자들, 윤종석, 전배수, 유승목...

한 마디로 올해 최고의 역대급 스릴러가 아니었나 싶다. ‘한국형 엑소시즘’을 표방한 OCN 드라마 <손 더 게스트>가 종영했다. ‘무서워 못본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공포와 스릴러를 넘나들며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빙의라는 소재를 가져와 공포 스릴러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내면서도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들까지 끄집어내려 했던 시도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수훈갑은 그 모든 것들을 진정으로 가능하게 한 빙의 연기자들이었다. 

박일도라는 큰 귀신에 빙의된 인물들을 연기한 연기자들은 진짜 말 그대로의 ‘빙의된’ 연기를 보여줬다. 어린 화평의 삼촌 역할로 출연해 시작부터 확실한 몰입감을 만들어냈던 한규원, 최신부 역할로 소름 돋는 빙의자의 끔찍함을 보여준 윤종석이 이 드라마의 색깔을 확실히 보여줬다면, “박일도-”하고 외치는 모습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전배수는 이 배우 자체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KBS <오늘의 탐정>에서도 소름 돋는 연기를 보여준 전배수는 아마도 향후 주목받는 배우가 될 거라 여겨진다. 

폐차장 주인으로 등장해 동생이 빙의자인 줄 오인하게 만들고 결국 빙의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시청자들을 오싹하게 만든 이중옥, 임산부 빙의자 역할을 놀랍게 해낸 김시은, 귀신을 보는 영매 역할을 연기한 명불허전 아역배우 허율, 윤화평의 아버지로 빙의된 부마자로서의 끔찍함과 부성애의 뭉클함을 동시에 선사한 명품 조연 유승목, 강길영(정은채)의 파트너로 따뜻한 형사지만 빙의되어 그를 공격하는 장면으로 소름 돋게 만들었던 박호산 등등. <손 더 게스트>는 그 빙의 연기를 해낸 많은 연기자들의 놀라운 연기가 빈틈없이 채워진 드라마였다. 

그 중에서도 뒤통수를 때리는 역대급 연기를 보여준 인물들은 빙의된 것도 아니지만 빙의자 그 이상의 사이코패스 연기를 보여준 박홍주 역할의 김혜은과, 처음부터 최윤의 옆에서 그를 지켜주는 줄 알았지만 악마가 들어온 모습으로 ‘어둠의 미사’를 주관하는 연기를 보여준 양신부 역할의 안내상, 결국 박일도였다는 것이 드러난 윤화평의 할아버지 역할의 전무송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박일도를 받아들여 봉인해버린 윤화평 역할의 김동욱이 그들이었다. 

이중에서도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박일도임을 드러내는 결코 쉽지 않은 연기를 소화해낸 전무송과, 그 귀신을 받아들여 봉인하려 하지만 오히려 박일도에게 지배당하기도 하는 모습을 오가는 연기를 해낸 김동욱은 역대급 엔딩을 가능하게 해준 장본인들이다. 끝내 최윤(김재욱)을 지켜내며 혼자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장면과, 한쪽 눈을 잃었지만 그래도 살아남아 재회하는 장면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돌아보면 <손 더 게스트>는 좋은 드라마 한 편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기자들이 숨은 공헌을 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그 많은 빙의자들은 진짜 말 그대로의 ‘빙의 수준의’ 연기 몰입을 해냈다. 그리고 이것은 <손 더 게스트>는 해외의 그 어떤 엑소시즘 장르나 스릴러와도 차별화되는 지점이었다. 그 어떤 물량 투입이 만들어내는 스릴러와는 확실히 다른 ‘역대급 인력 투입을 통한’ 스릴러의 완성. 어쩌면 여기에 우리네 스릴러의 강점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그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사진:OCN)

‘손 더 게스트’가 그리는 분노가 지배한 사회의 혼돈

갈수록 충격적이다. 한 사람씩 빙의되어 벌어지는 사건들을 하나씩 다루던 OCN 수목드라마 <손 더 게스트>는 이제 한 마을을 뒤덮어버린 빙의자들이 마치 좀비 떼처럼 창궐하는 이야기로 그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그 최종 목적지는 박일도 큰 귀신이 처음 빙의자를 낳았던 바닷가 마을 계양진. 구마의식을 하며 점점 몸도 영혼도 어둠에 피폐되어가는 신부 최윤(김재욱)과 정직 징계를 받게 된 형사 강길영(정은채) 그리고 부상을 입은 채 할아버지를 찾아 나선 윤화평(김동욱)은 함께 그 계양진을 찾았지만 이미 마을을 뒤덮어버린 양신부(안내상)의 어둠이 사람들을 부마자로 만들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하고 있었다. 

슬쩍 최종회에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깔린 복선에는 최윤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구마의식을 하려할 거라는 것과, 그를 구하기 위해 영매인 윤화평이 스스로 자신의 몸에 박일도를 봉인한 채 죽음을 택함으로써 영원히 그를 제거하려 할 거라는 암시가 담겼다. 결국 좀비 떼처럼 변한 부마자들 하나하나를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양신부를 해결하는 것만이 마을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됐다는 것. 

거의 공포에 가까운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 전개 때문에 시청자들 역시 계속 벌어지는 사건에 빙의된 채 볼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한 걸음 물러나 <손 더 게스트>가 무얼 이야기하려 했는지를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손 더 게스트>는 이 한국형 리얼 엑소시즘을 표방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어떤 문제들을 건드린 걸까.

그 단서가 되는 건 여기 빙의된 자들이 벌인 일련의 충격적인 사건들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한 집안의 가장이 “돈” 얘기만 하는 아내와 딸들 앞에서 갑자기 변해 골프채를 들고 폭력을 휘두른 사건이나, 약자들을 지켜야할 경찰이 오히려 창문을 깨고 들어와 폭력을 저지르는 장면, 주유소에서 툭하면 구박하고 손찌검을 하는 사장을 죽인 아르바이트생이나, 고장 난 버스를 고치는데 짜증을 내며 비하하기까지 하는 손님들을 모조리 죽인 관광버스 운전기사 같은 이들을 촉발시킨 ‘어둠’은 무엇일까. 

그건 우리가 가끔씩 신문 사회면에서 “어떻게 저런 짓을 저질렀지”하고 다시 보게 되는 사건들 속에서 발견되곤 하는 것들이다. 갑자기 툭 터져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건의 이면 속에는 우리네 사회 속에서 보이지 않게 조금씩 누적되며 쌓여온 ‘분노’의 감정들이 어느 비등점을 넘어 폭발하며 생겨난 일들이다. 너무 끔찍한 일들이라 인간이 한 일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그 사건들을 <손 더 게스트>는 그래서 ‘빙의’라는 상징적인 소재로 풀어내려 했던 것이다. 

최종회가 펼쳐질 계양진 마을의 좀비 떼처럼 들고 일어난 빙의된 부마자들의 모습은 그래서 꽤 상징적인 장면들이다. 분노가 지배한 우리네 사회가 맞닥뜨릴 수 있는 혼돈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마지막 회에 담겨지게 되겠지만 분노는 제압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누군가의 사랑이 전제된 숭고한 희생 같은 것들이 오히려 해결책이 된다. 분노와 악의 화신이 된 양신부를 막기 위해 제 한 몸 기꺼이 던지려는 윤화평과 최윤 그리고 강길영의 희생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말하려는 주제의식에 해당하지 않을까. 충격적인 이야기 속에서도 <손 더 게스트>가 담은 메시지가 만만찮게 다가온다.(사진:OCN)

‘무법변호사’, 사이다에 대한 갈증 알지만 어딘지 아쉬운 건

어쩌면 애초 기획부터 tvN 주말드라마 <무법변호사>는 고구마 현실 속에서의 사이다 드라마를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돈 있는 자가 이긴다’는 ‘법’에 대해 서민들의 감정을 이미 기획에서 끌고 온 것이고, 그래서 ‘무법(無法)’ 천지인 현실을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뒤집어보겠다는 것. <무법변호사>는 ‘무법(無法)’에 법으로 싸운다(武法)는 판타지를 동력으로 삼은 드라마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배경으로 삼은 기성은 우리네 고구마 현실을 환기시키는 여럿 장면들이 등장한다. ‘법꾸라지’가 떠오르기도 하고, ‘문고리 3인방’이 떠오르는 인물들도 등장한다. 깡패에서 시장이 된 안오주(최민수) 같은 인물이나, 겉보기엔 기성을 위해 헌신하는 판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부패한 기성시의 정점에 서 있는 차문숙(이혜영) 같은 인물, 그리고 거기 붙어 문고리 역할을 하다가 뒤통수를 맞는 남순자(염혜란) 같은 인물이 그렇다. 

<무법변호사>는 그래서 이들 악역들을 전제로 세우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고구마 상황들을 통해 시청자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후, 이를 뒤집는 봉상필(이준기) 변호사의 사이다 반격이라는 마치 공식적인 전개를 이어가고 있다. 이를테면 봉상필의 눈앞에서 그를 키워준 최대웅(안내상) 같은 인물이 죽음을 맞게 되는 회차에서 시청률이 높게 나온 건 그 고구마 전개가 가진 힘이다. 

하지만 위기가 만들어내는 고구마와 그를 뒤집는 전형적인 복수극의 사이다를 반복하고 있는 <무법변호사>는 그래서 어딘지 뻔한 틀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준다. 하재이(서예지)의 엄마인 노현주(백주희)가 차문숙(이혜영)의 안마사로 잠입하고 있다 붙잡혀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는 상황에서 그만한 긴박감이나 긴장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 건 반복된 이야기 틀 때문에 그것 역시 봉상필의 반전으로 쉽게 해결될 것이라 예측되기 때문이다. 

노현주가 드럼통에 넣어져 강물에 던져질 위기에 처한 순간, 마침 봉상필의 이야기를 듣고 그 곳을 안오주(최민수)가 찾아오고, 그래서 잠시 태광수(김병희)가 자리를 비운 순간 봉상필과 손을 잡은 전갈(김용운)에 의해 노현주가 탈출하게 되는 시퀀스는 그래서 너무나 우연적이면서 또한 예측 가능한 전개가 된다. 또한 그렇게 두 번 노현주를 죽이라고 사주한 남순자(염혜란)가 그 사실 때문에 검거되는 과정도 너무 쉽게 그려진다. 

하지만 이런 우연의 반복과 단순한 틀을 반복하는 데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굴러가는 이유는 개연성이나 신선한 이야기 그 자체보다 단지 ‘고구마-사이다’라는 그 효과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어딘지 어색해도 그간 꾹꾹 고구마로 눌러놓았던 전개 속에서 하나씩 풀어주는 사이다에 그럭저럭 갈증을 풀어낼 수밖에 없다. 

언제부턴가 드라마가 고구마 혹은 사이다로 단순 구분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희극이냐 비극이냐로 한 드라마를 재단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그 중간 지점에 놓여진 다양한 드라마의 결들을 놓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드라마들은 아예 고구마와 사이다를 기획 포인트로 삼기도 한다. 그것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단지 고구마-사이다가 주는 효과에만 기대게 된다면, 이야기는 퇴행될 수밖에 없다. 

<무법변호사>가 만들어내는 사이다에 대한 시청자들의 갈증은 당연히 이해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 효과에만 기대 어딘지 이야기의 촘촘함이나 섬세함 혹은 신선함을 찾기가 어렵게 된다면 사이다 전개를 보면서도 그만한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단계를 맞을 수 있다. 이제 몇 회 남지 않은 <무법변호사>가 사이다지만 뻔한 결말이 아닌 시청자들을 놀랍게 만드는 반전을 제시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사진:tvN)

‘그사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가족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자식을 먼저 보낸 사고 현장을 보는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끔찍할까. JTBC 월화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에서 문수(원진아)의 엄마 윤옥(윤유선)은 멀찍이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 손이 떨렸다. 시간이 한참 흘렀지만 그에게 사고는 마치 어제 벌어진 일인 양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러니 그 떨리는 손에 애써 술병을 쥐고 의지했을 터다.

그런 아내를 보는 남편 하동철(안내상)의 마음은 또 얼마나 참담할까. 무너진 건물 잔해더미에서 겨우 찾아낸 딸의 시신을 확인한 그는 못내 아내에게 그 마지막 모습을 보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만 확인하고 딸을 떠나보냈지만 아내인 윤옥은 그게 끝내 후회로 남았다. 그 마지막 얼굴을 못보고 떠나보낸 것이. 하지만 남편은 자신도 후회한다고 했다. 그 마지막 모습을 본 것이. 

피해자의 가족은 그렇게 뭘 해도 후회할 수밖에 없는 회한 속에 살아간다. 어찌 보면 사고는 저 밖에서 났고 그래서 그들은 모두가 피해자지만 그 가족들마저 서로를 의지하기가 쉽지 않다. 서로를 보는 것이 그 아픈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힘겹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아픈 말들을 독하게 쏟아낸다. “참 속 편해 좋겠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멀쩡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 누구도 멀쩡한 사람은 없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 애쓰고 있을 뿐이다. 멀쩡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그 아픈 상처들이 계속 끄집어내질 것으로 알고 있으니. “자네 눈에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멀쩡해 보여? 이 사람아 자식 잃고 멀쩡한 부모가 어딨나. 그런 일을 당하고 멀쩡한 사람이 어딨냐고?” 하동철의 이 아픈 호통은 그래서 단지 드라마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많던 사고 피해자들의 절규가 담겨져 있다. 시간이 흐르고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것도 멀쩡한 건 없다. 

그 사고 현장에서 동생을 보내고 자신만 혼자 살아남은 문수의 마음은 오죽할까. 그는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또 죄책감과 미안한 감정을 버리지 못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술에 빠져사는 엄마와 집 나와 가게를 하며 지내는 아빠에게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가 툭 던진 그 사고가 있던 날에 대한 회한 섞인 한 마디가 못내 그 상처를 드러내게 만든다. “그 날도 그래. 그렇게 연수랑 같이 있으라고...”

동생과 꼭 같이 있으라고 했던 엄마의 그 말은 동생을 먼저 보낸 문수에게는 가장 큰 아픔으로 남았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 말은 비수처럼 문수의 상처를 헤집는다. 그래서 끝내 꺼내지 말아야할 말이지만 속 깊숙이 담겨져 있던 말이 튀어나온다. “같이 있었음 나도 죽었어. 그게 더 나았겠어? 아님 연수 대신 내가 죽었으면 했어?...그 날 나랑 연수 거기로 보낸 건 엄마야. 그럼 엄마가 미안해야지? 왜 자꾸 내가 미안하게 하는데?” 그는 그 긴 시간을 미안한 감정 속에 살아오며 자신의 아픔은 저 밑으로 꾹꾹 눌러 놓았던 거였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가 그리는 ‘사랑’은 어쩌면 강두(이준호)와 문수와의 남녀 간의 사랑만을 뜻하는 건 아닐 게다. 그건 어쩌면 문수네 가족 이야기를 포함하는 것일 게다. 가족이라면 그냥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관계지만, 사고는 이 가족에게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사고 현장에서 먼저 보낸 가족의 일원이 남긴 상처가 피할 수 없는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 시간이 지나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상처. <그냥 사랑하는 사이>가 꺼내놓는 이 남은 가족들의 상처는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에게는 계속되는 일일 것이다. 결코 우리도 잊어서는 안 되는.(사진:JTBC)

‘역적’ 윤균상, 사적 복수에서 공적 소명으로

“성님, 어리니를 봤소. 어리니가 임금님이 무섭다며 울고 있었소. 성님, 나 그동안 못된 짓 많이 하고 살았소. 충원군한테 복수도 하고 금주령 때 술 팔믄서 건달들 제끼느라 손에 피도 많이 묻혔소. 억울한 사람들 도와준답시고 미운 놈들 다리도 숱하게 분질러 줬소. 야, 나는 화 많이 내고 살았소. 그런디 성, 워째 지금은 화가 안 나고 맴이 슬프요. 집 뺐기고 가족 잃은 사람들 눈물이, 우리 어리니 눈물 같고, 가령이 눈물 같고, 소부리 아재 눈물 같소. 나는 툭하면 화가 나는 존재인데, 지금은 어째 화는 안 나고 눈물만 난답니까?”

'역적(사진출처:MBC)'

MBC 월화드라마 <역적>에서 드디어 길동(윤균상)이 세상에 대한 소명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지금껏 걸어왔던 길이 가족과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에 대한 사적인 복수와 비뚤어진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억울한 백성들 괴롭히는 이들을 응징해왔다면, 연산(김지석)의 폭주로 망가져가는 세상 앞에 그는 조금씩 공적인 소명의식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분노하기보다는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게 됐다. 핍박받는 이들이 세상과 싸우지 않고 울기만 한다는 것에 오히려 화를 내고 보기 싫다 했던 그가 아니던가. 그랬던 그가 이제 쓰러져 가는 백성들의 피를 보며 그 아픔이 타인의 것이 아니라 마치 가족의 아픔인 것으로 느끼게 됐다. 그의 그릇은 세상을 품을 만큼 커졌다. 처음에 그 그릇의 크기는 가족을 담는 정도였지만 그 후 익화리 사람들을 담는 정도로 커졌고 이제는 세상을 담을 정도로 커졌다. 

<역적>은 우리에게 고전의 인물로 남아있는 ‘홍길동’을 재해석한 작품. 연산군 시절 실존했던 도적 홍길동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런데 어째 그 옛 시절의 이야기가 그저 옛날이야기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연산군이라는 인물에 대한 해석이 권력자의 불통과 폭주로 그려지면서 그것이 어떻게 백성들의 고혈을 만들어내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고, 길동이라는 애기장수라는 메시아의 등장이 마치 백성들 하나하나의 소망이 만들어낸 거대한 힘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폐비되어 사약을 받은 어머니를 가진 불행한 과거사는 연산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자신을 가두게 된다. 연산의 주변에는 그래서 비선실세들이 넘쳐난다. 그의 아픔을 건드리고 그 고통을 촉발시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이들. 연산의 폭주를 막기 위해 대간에서 나서 왕의 잘못을 고하지만, 그들을 모두 처벌하는 풍경은 언론의 입을 막으려는 권력의 행태와 무엇이 다를까. 

위를 범했다는 이유로 노비들의 혀를 자르고 발목을 잘라내는 그 행태들을 낱낱이 기록한 행록과 그것을 뒤에서 조종하는 송도환(안내상)을 위시해, 충원군(김정태), 참봉부인 박씨(서이숙) 같은 이들이 바로 비선실세다. 그들은 왕을 위한답시고 충언을 말하지만, 사실은 권력 시스템을 공고히 하고 양반의 백성 수탈을 정당화해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유지하려는 인물이다. 불통하고 폭주하는 왕, 그리고 주변을 에워싼 비선실세들. 이러니 <역적>의 홍길동 이야기가 옛 이야기로 보일 리가 없다. 

길동을 잡아 힘줄을 끊고 뼈를 부숴 애기장수의 힘을 없애버린 연산은 그를 갖고 사람사냥 놀이를 한다. 연산은 스스로를 사냥꾼으로 그리고 길동을 그가 언제든 잡을 수 있는 짐승으로 다룬다. 연산은 왕이고 길동은 한갓 도적이다. 그런데 <역적>은 그 실상이 정반대라는 걸 보여준다. 과연 누가 진짜 왕이고 누가 도적이며, 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짐승인가. 백성들의 고혈을 빼먹는 이가 도적이고, 사람을 향해 화살을 겨눈 자가 짐승이 아닌가.

“난 인간을 믿지 않는 인간이다. 폭력만이 유일한 길이라 믿는 정치인이다. 난 오래 전부터 인간은 폭력을 써야 다스려지는 존재라는 것을 깨우쳤을 뿐이다.” 연산이 길동에게 하는 이 말이 주는 울림은 그래서 더 크게 다가온다. 인간을 믿지 않는 존재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정치의 유일한 길을 폭력이라 여기는 이는 정치인이 될 수 없다. 인간은 결코 다스려지는 존재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역적>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지금의 대중들에게 전하고 있다.

혁명가 홍길동, ‘역적’의 재해석이 흥미로운 까닭

“상전나리 나리께선 아내를 죽인 남편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이 나라의 법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나 같은 일자무식 무지랭이도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겠는데 똑똑하신 웃전들께선 진정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걸 모르신단 말입니까?”

'역적(사진출처:MBC)'

MBC 월화드라마 <역적>에서 홍길동(윤균상)은 상전 김자원(박수영)에게 그렇게 묻는다. 간통했다며 아내를 살해한 정중부에게 죄를 묻기는커녕, 그에게 복수를 한 장인 김덕형을 한성부 서윤 조정학(박은석)이 오히려 신문을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부당함을 되묻는 질문이다. 

헬조선. 남편이 아내를 때려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 세상이다. 양반은 양인을 때려죽여도 죄를 묻지 못하는 세상. 그것이 바로 대명률에도 들어있는 헬조선의 법도란다. “해서 간통한 아내는 임금을 저버린 신하를 벌주듯 남편이 벌주게 해야 하는 것이지요. 여자라는 것은 본시 집안에서는 아비를 따르고 시집을 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르는 것이지요.” 충원군 이정(김정태)은 이것이 나라가 바로 서는 길이라고 강변한다. 

충원군의 그런 생각의 뒤에는 사실상 유자를 내세워 국정을 농단하는 송도환(안내상)이라는 비선실세가 존재한다. “어찌 인간에게 높고 낮음 크고 작음이 없겠습니까.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 남편과 아내 그리고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의 구분이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죠. 이런 구분이 없는 세상이란 무질서이고 무질서란 곧 뭐다? 혼란을 불러오게 되는 것입니다. 해서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을 부리고 천한 사람은 귀한 사람을 따라야 하는 것이오. 이러한 이치가 이루어지면 나라는 저절로 다스려질 것이고 이러한 이치가 이루어지면 집안은 저절로 다스려질 것이며 임금은 임금다워지고 신하는 신하다워지고 남편은 남편다워지고 아내는 아내다워지는 것입니다.”

송도환의 요설은 신분사회, 차별사회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런 반상의 계급 안에서 질서가 유지되어야 나라가 저절로 다스려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건 결국 ‘다스린다’는 표현 안에 이미 숨겨져 있듯이 권력자들이 말하는 ‘통치의 기술’을 교묘한 유자의 논리를 통해 풀어낸 요설일 뿐이다. 

홍길동은 한성부에 억울하게 끌려간 김덕형을 구해내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고전소설 속에 등장하는 홍길동이야 복면 쓰고 당장 한성부 감옥을 공격했겠지만 그러는 대신 그는 김자원에게 부탁해 연산(김지석)을 활빈정에 오게 하고는 그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억울하게 죽어간 이야기를 듣게 만든다. 폐비 윤씨의 억울함을 통해 김덕형의 딸의 죽음에 동정심을 갖게 만들기 위함이다. 

결국 홍길동의 이런 마음을 흔드는 지략으로 연산은 신하들에게 묻는다. “정중부가 아내를 죽인 것이 마땅하다 이 말인가. 진정 그대들 모두 그리 생각하는 것인가.” 그리고 마침 자신과 함께 수학해온 조정학이 자신의 집안을 풍비박산 낸 조참봉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길현(심희섭)은 분연히 나서 사건의 부당함을 피력한다. 

“허나 아내 김동이 이미 죽어 참으로 남편을 배신했는지 알 수 없지 않사옵니까. 헌데 아내를 죽인 후에 그 아내가 투기하였다 간음하였다 빠져나간다면 죽은 아내의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하겠나이까. 그럼에도 한성부 서윤 조정학이 정중부의 죄상은 밝힐 생각도 하지 않고 외려 딸을 잃은 김덕형만을 신문하고 있나이다.” 길현의 이 말에 동조한 연산은 김덕형을 풀어주고 정중부의 죄를 낱낱이 밝히며 한성부 서윤 조정학을 다른 직으로 좌천시키라는 명을 내린다. 

억울하게 남편에게 맞아죽은 한 처자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 것이지만, 이 안에는 <역적>이 재해석하고 있는 홍길동의 흥미로운 면면이 드러난다. 물론 괴력을 사용하는 홍길동의 모습이 간간히 등장하고는 있지만 <역적>은 그렇다고 홍길동은 그런 의적으로만 해석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의적이라기보다는 사업가의 외피를 쓴 혁명가에 가깝다. 

그가 혁명가로 보이는 까닭은 이른바 ‘삼종지도’ 운운하며 임금과 신하가 아비와 자식이 또 남편과 아내가 차별받는 세상에 반기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큰 어르신으로도 불리고 길동이로도 불리며 또 발판이라도 불렸던 홍길동은 이러한 수직적인 계급구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남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채수빈)에게 “여자라 하여 밥을 지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길동이 아닌가. 

<역적>이 단순히 홍길동을 탐관오리 혼내주는 의적으로 그리지 않고 헬조선의 잘못된 시스템과 대적하는 혁명가로 그리고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더 이상 탐관오리 혼내주는 의적이 보여주는 판타지가 지금의 대중들에게는 그다지 속 시원한 해결책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바뀌지 않으면 그깟 탐관오리 몇을 혼내 준다한 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지금의 대중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적>이 그리고 있는 의식 있는 혁명가로서의 홍길동이라는 캐릭터가 흥미로운 이유다.

박보검과 김유정, <구르미>의 어른 아이들

 

사실 대본만 놓고 보면 KBS <구르미 그린 달빛>이 왜 이토록 화제가 되는 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남장여자 코드의 사극 버전 멜로는 이미 <성균관 스캔들>이나 <바람의 화원>을 통해 충분히 익숙해진 스토리다. <구르미 그린 달빛>의 스토리는 여기서 그다지 새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남장여자로 자신을 숨긴 채 내시로 궁에 들어온 홍라온(김유정)이 왕세자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구르미 그린 달빛(사진출처:KBS)'

멜로 이외에 사극이 갖기 마련인 정쟁 구도도 그리 신선하다 여겨지지는 않는다. 왕이 있지만 모든 실세를 쥐고 있는 세도가 김헌(천호진)이 그 정쟁의 중심에 서 있다. 대리청정을 받아들인 왕세자 이영(박보검)은 그 김헌과 대립한다. 이미 뽑힐 사람이 정해져 있는 말 뿐인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겠다던 이영은 정약용(안내상)의 조언으로 시험은 치르되 다른 시제를 냄으로써 시험의 초심을 공명정대하게 지켜낸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사실 너무 소소해 보여 이 사극이 보여주는 멜로와 견줘보면 그리 집중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이 사극의 이야기는 이영과 홍라온 사이에 벌어지는 밀고 당기는 멜로가 거의 대부분이다. 남장여자라는 콘셉트는 내시와 여인 사이를 오가는 홍라온을 통해 이영과의 멜로를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장치다. 물론 홍라온이 홍경래의 여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 멜로구도는 정치적 사안과 맞물려 긴장감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 사극의 특성상 그 이야기 역시 정치적인 흐름을 따라가기보다는 멜로적 긴장으로 갈 가능성이 더 높다.

 

결국 이야기는 익숙한 것들이 어느 정도는 그 향방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구르미 그린 달빛>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그리고 그 뜨거운 반응의 중심에는 박보검과 김유정이 있다. 이 두 사람의 연기에 한 마디로 심쿵하고 있다는 얘기다. 도대체 이들의 연기가 무엇이 특별하길래 이토록 마법을 부리는 걸까.

 

사실 박보검은 매직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을 정도로 그가 들어가는 프로그램마다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응답하라1988>에서 그 연기가 주목받았다면 <꽃보다청춘>, <12>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그의 심성이 시청자들의 마음에 닿았다. 연기력과 심성. 이 두 요소는 요즘 드라마와 예능에서 가장 요구되는 자질들이다. 어린 나이지만 그는 <스틸사진>의 아역에서부터 <각시탈>, <원더풀 마마>, <참 좋은 시절>, <내일도 칸타빌레>를 거쳐 <응답하라1988>까지 꽤 많은 작품들에서 연기공력을 쌓았고, 파산으로 어려운 형편 때문에 쉽지 않은 청소년 시절을 겪었다.

 

어린 나이에 많은 연기 경험을 했던 것과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은 점은 결과적으로 보면 연기자 박보검에게는 큰 자산이 됐다고 보인다.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이영을 연기하는 박보검은 여전히 아이 같은 순수한 눈빛을 갖고 있지만 어딘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슬퍼 보이고 그러면서 때론 서슬 퍼런 왕세자의 눈빛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어려보이지만 어른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래서 그것이 꽤 슬픈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김유정 역시 이런 관점으로 보면 박보검과 비슷한 점들이 있다. 그녀는 아주 어린 나이에서부터 연기를 하며 성장해왔다. 2006년부터 현재까지 거의 30여 편에 달하는 작품에 출연한 그녀는 벌써 연기경력이 10년이 되는 셈이다. 아역의 이미지가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지만 그녀는 그것을 깨기 위해 최근 무던한 노력을 해왔다. <우아한 거짓말>이나 <앵그리맘>에서의 연기변신은 단적인 사례다.

 

아역이 성인역으로 넘어가는 성장통은 의외로 깊을 수밖에 없지만 놀라운 건 김유정은 아역 시절부터 벌써부터 성인역에 가까운 감정과 내면 연기를 선보였다는 사실이다. <구미호 여우누이뎐>에서 구미호와 인간 사이의 반인반수인 연이 역할을 연기하는 김유정이 그랬고, KBS단막 스페셜 <곡비>에서 기생 역할을 연기하는 그녀가 그랬다. 그녀에게도 박보검처럼 아이 같은 면면과 동시에 어른스러움이 갖는 아련한 슬픔 같은 게 느껴지는 건 이런 남다른 필모그라피 덕분이다.

 

그러니 아이들의 면면을 갖고 있지만 어른들의 세계에 서서 어른들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박보검과 김유정의 눈빛이 더 아련한 느낌을 주는 건 당연하다. 특히 <구르미 그린 달빛>은 살벌한 어른들 세계에 온전히 아이 둘이 서 있는 듯한 느낌마저 주지 않던가. 두 사람이 서로 애절한 눈빛을 나누는 장면이 시청자들의 애간장을 더 쥐어짜는 건 그래서다. <구르미 그린 달빛>이 이토록 시청자들을 설레게 하고 또 찾아보게 만드는 것도.

<송곳>에서 중간관리자 지현우의 역할

 

JTBC <송곳>은 노동운동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 외국계 유통체인점인 푸르미 마트에서 벌어지는 비정규직 정리해고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주인공으로 당사자라기보다는 관리자인 이수인 과장(지현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왜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정규직 그것도 사원도 아닌 관리자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을까.

 


'송곳(사진출처:JTBC)'

사실 이 부분은 <송곳>에서 이수인 과장이 부신노동상담소를 찾아갔을 때 구고신(안내상) 소장이 그의 의도를 의심하는 장면에서 이미 거론됐던 이야기다. “이수인씨 관리자잖아요. 당신이 해고당한 것도 아닌데 왜 나서는 거요?” 그것이 구고신이 이수인 과장에게 던진 의구심이었다. 즉 자기 일에 나서는 것과 그저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나서는 건 다르다는 걸 구고신이 지적했던 것.

 

그렇다면 정작 <송곳>이라는 드라마는 왜 이수인을 주인공으로 세운 걸까. 그것은 드라마를 좀 더 객관화하려는 작가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해고노동자 당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면 드라마는 감정적으로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들의 감정에 동일시하게 되고 그것은 드라마를 생각하게 하기 보다는 감정적으로 불을 지르는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 수 있다.

 

<송곳>은 해고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을 다루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드라마다. 너무 깊게 빠져 들어가면 드라마가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다. 물론 현실은 더 무거운 이야기다. 하지만 <송곳>이 추구하는 건 노동자들만 공감하는 노동자들만의 드라마가 아니다. 이것은 지금 이러한 현실을 당면하지 않은 보통사람들 또한 공감하기를 원하는 드라마다. 결국 달라지지 않는 시스템 안에서는 그런 현실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수인 같은 앞뒤 꽉 막힌 듯한 캐릭터는 그래서 <송곳>이라는 드라마의 중요한 가이드 역할을 해준다. 즉 한 발 물러서 있지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노동자들의 입장에 다가가는 인물. 그래서 그들의 입장을 객관적이면서도 타인의 관점에서 공감하게 해주는 인물이 바로 이수인이다. 노동지부장 선거에서 지부장이 이수인이 아닌 푸르미의 직원인 주강민(현우)이 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실제로 길거리에 천막을 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구고신이 항상 얘기하듯 남일이다. 심지어 푸르미의 노동자들도 자신에게 해고 통지 같은 부당한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노동조합에 가입하려 들지 않는다. 결국 내 앞에 떨어진 일 앞에서야 그것이 내 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수인은 그런 점에서 보면 독특한 캐릭터다. 오지랖이 넓다기보다는 무언가 부당한 일을 하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그런 인물. <송곳>이라는 제목에 딱 어울리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송곳>이 지목하고 있는 건 결국 현실에서 싸워야 하는 노동자들의 각성을 위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직접 관련은 없지만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 말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잠재적 송곳들을 일깨우는 이야기다. 이수인이라는 중간관리자의 시선을 통해.



<송곳>, 오물을 뒤집어쓴 뒤의 역설적 자유

 

돌아올 웃음이 없다는 게 명확해졌으니 웃어줄 이유가 없어졌다.’ 왕따가 되어버린 푸르미 마트의 이수인(지현우) 과장은 더 이상 갸스통(다니엘) 점장으로부터 미소 띤 칭찬을 받지 못하게 됐다. 직원들을 해고하라는 명령에 불복하면서다. 하지만 점장은 물론이고 동료 과장들도 그를 왕따로 만들어버리자 그는 오히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독자 노선을 가는 길을 선택했다.

 


'송곳(사진출처:tvN)'

보답 받을 호의가 없다는 걸 아니 애써 호의를 보일 필요도 없다.’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정민철(김희원) 부장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그를 괴롭혀도 그는 더 이상 괴롭지 않게 됐다. 애초에 호의를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면서 아예 그런 호의 자체를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JTBC 드라마 <송곳>에서는 이 역전된 상황을 흙탕물 속에서 뒹굴며 훈련을 받던 군대 이야기로 설명한다.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편안해지는 역설. 철조망에 손이 조금 긁히던 흙바닥에서 뒹굴던 그리 신경을 쓰지 않게 되더라는 이야기. 드라마는 이 상황을 오물을 뒤집어쓴 뒤에 찾아오는 역설적 자유라고 표현했다.

 

이 부분은 이 드라마가 노동운동이라는 소재를 가져와서도 어떻게 그토록 흥미진진하고 때로는 속 시원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즉 노동운동의 이야기는 고 전태열 열사의 그것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지어는 비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송곳>은 그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만 노동운동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 안에 드라마틱한 반전과 소소한 성취들을 집어넣음으로써 그 소재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서게 해준다는 것.

 

그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반전과 역설이다. 이수인이라는 캐릭터는 우리가 노동운동하면 떠올리는 그런 인물과 사뭇 다르다. 그는 한 마디로 말하면 바른생활 사나이. 물론 성인군자라는 뜻이 아니다. 그도 역시 현실에 타협하고픈 욕망을 갖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못할 뿐이다. 보통의 그런 바른생활의 인물이라면 잘 살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학교, 군대, 사회 어디든 가는 곳마다 걸림돌같은 존재다.

 

이것은 캐릭터의 역설이다. 바른생활 사나이가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걸림돌이 되고, 그런 인물을 송곳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현실. 결국은 현실이 비뚤어졌다는 역설이다. 그래서 마냥 당할 것만 같지만 웬걸? 의외로 이 바른생활 사나이가 승부욕을 보인다. 그것은 그래서 또다시 왕따의 역설로 나아간다. 왕따가 되니 오히려 저들의 요구나 기대를 따를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부당함에 보다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수인을 돕는 구고신(안내상) 부진 노동상담소 소장도 우리가 노동운동하면 떠올리는 그런 투사의 이미지가 아니다. 거리에 노동자들이 나와 사측과 대치상황을 보여주지만 그 장소로 이수인을 데려온 구고신은 그것이 좋은 현장교육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노동쟁의나 노동운동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다. 어디든 노동은 있고 노동자와 사측이 있기 마련이라면 노동분쟁도 일어난다.

 

그래서 그는 노동운동에 대한 교육을 서구에서는 어린 나이의 학생들에게 정규 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걸 역설한다. 그들에게는 일상이 우리에게는 마치 송곳같은 일이 되어있다는 것. 구고신이라는 캐릭터는 그래서 이 노동운동에 대해 지나치게 비장함에 빠져들지 않게 해주는 존재가 된다.

 

사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상황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해준다. 즉 노동쟁의를 무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처럼 금기시하는 현실에서는 마치 사측의 호의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왕따가 되어버리지만, 거꾸로 분쟁이 있을 때 그러한 노동운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수인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왕따의 역설은 그 관점을 바꿔주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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