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연기자가 좋은 캐릭터를 만난다는 것은 '시티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티홀'은 정치 풍자가 담겨진 코미디에 멜로가 섞여 있는 드라마다. 따라서 정치적인 면을 보일 때는 가벼운 듯 하면서도 진지함을 유지해야 하고, 본격적인 멜로에 들어가면 행복감과 절망감을 오가는 웃음과 눈물 연기를 해내야 한다. 연기자로서 '시티홀'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드라마는 아니다.
하지만 차승원이나 김선아처럼 준비된 연기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오히려 밋밋한 캐릭터보다는 이처럼 복합적인 면을 소화해내야 하는 연기가 그들에게는 도전이면서도 또한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시티홀'은 그들에게 바로 그 무대를 마련해주었고,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복합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캐릭터라는 옷을 입고 마음껏 춤을 추었다. 그 결과 이 드라마를 통해 차승원은 재발견되었고, 김선아는 삼순이의 옷을 벗어버리고 신미래라는 새로운 옷을 입음으로써 건재함을 과시했다.
차승원이 연기해낸 '시티홀'의 조국이라는 캐릭터는 겉으로만 봐서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판타지남의 계보를 잇는 것처럼 보인다.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에서 '내조의 여왕'의 태봉씨(윤상현)를 잇는 인물로 조국을 거론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캐릭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국이 이들의 계보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준표나 태봉씨는 드라마 속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는 전지전능한 캐릭터지만, 조국은 그렇지 않다. 그의 앞에는 늘 난관이 겹겹이 쌓여 있고 그는 사랑하는 여인 신미래를 보호하면서 그 난관을 넘어서야 하는 입장이다.
이것은 조국이 이들 판타지남들보다는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의 계보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조국은 탁월한 정치적 능력을 갖고 있고, 신미래라는 여성을 만남으로 해서 그 힘을 낮은 자들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 즉 조국이라는 캐릭터는 그저 멜로의 판타지뿐만 아니라 서민들을 꿈꾸게 하는 판타지까지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그 특유의 카리스마를 갖게 된다. 게다가 그 카리스마는 코믹함을 가미하면서 강마에가 가졌던 괴팍하면서도 친근한 인상을 덧붙인다.
차승원은 사실 코미디와 정극 양쪽을 오간 경력의 소유자다. 코믹의 웃음은 그의 장기이고, 정극의 우수와 슬픔은 그의 특기다. 그런 면에서 '시티홀'의 조국은 이 양면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였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차승원은 지금껏 상대적으로 보여주지 못했던 카리스마를 조국을 통해 얻었다. 정치 소재가 갖는 강인한 리더십의 면모를 조국을 통해 갖게 된 것이다.
한편 김선아가 연기한 신미래는 처음 삼순이 캐릭터에서 시작했다. 10급공무원으로서 밴댕이 아가씨 대회가 나가고 거기서 조국을 만나는 과정 속에서 김선아의 연기는 여전히 삼순이에 머물러 있었다. 캐릭터가 그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미래가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 행보를 하게 되고 시장 선거에 나가게 되면서부터 김선아는 조금씩 삼순이의 아우라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신미래는 돈키호테적인 신념을 가진 순수 정치초심자로서의 강인한 모습과 함께, 사랑 앞에서는 가녀린 한 여성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다. 게다가 신미래 역시 조국처럼 코믹을 바탕에 깔고 있는 캐릭터. 그러니 이 인물의 스펙트럼은 저 삼순이가 갖는 단순함에 비할 바 없이 넓다 할 수 있다. 김선아는 신미래라는 캐릭터를 통해 굳이 삼순이를 넘어설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신미래를 통해 삼순이의 캐릭터를 가지면서도 다양한 폭의 새로운 면모들을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시티홀'이 재발견한 연기자는 차승원과 김선아에 머물지 않는다. '온에어'에서 엔터테인먼트 대표로 등장해 강인한 인상을 주었던 이형철은 이 드라마를 통해 유하고 귀여운 면모를 갖게 됐으며, 지적인 이미지의 추상미는 이 드라마를 통해 귀여운 악녀의 면모를 갖게 되었다. 이밖에도 주목할 만한 연기자는 강인한 정치인의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던 최일화, 신미래의 가장 친한 친구인 정부미를 연기한 정수영, 그리고 국장삼총사들인 류성현, 신정근, 임대일이 될 것이다. 특히 지국장으로 분했던 신정근은 코믹 연기 속에서도 독특한 개성적인 힘을 갖고 있는 연기자로 주목된다.
좋은 드라마는 좋은 연기자들을 발견해낸다. 그만큼 캐릭터가 좋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시티홀'은 좋은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믹을 바탕에 깔고 정치와 멜로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하나의 드라마를 구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티홀'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서 마음껏 준비된 연기를 보여준 연기자들에게도, 또 그 연기가 뿜어내는 행복과 슬픔을 공감한 시청자들에게도 '시티홀'은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김남주의 변신이 놀랍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보다는 CF에서 더 얼굴을 많이 보여온 탓에 김남주는 연기자보다는 CF퀸이라는 호칭이 더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마흔을 향해 달려가는 나이에 언제까지 CF에 머물 수만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연기자로의 복귀를 꿈꾸는 김남주의 행보는 사실 지금 '내조의 여왕'에서부터 시작된 일은 아니다. 이미 재작년 '그놈 목소리'에서 아이를 유괴당한 엄마 역으로 나왔을 때부터 그녀의 이미지 변신은 예고되어 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CF가 만들어놓은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그놈 목소리'에서 끝없이 유괴범의 전화를 받고 발을 동동 구르는 그 모습에서조차 그녀가 했던 집 전화 CF가 떠오를 정도였으니. 물론 '그놈 목소리'에서 그녀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깔끔하고 맑고 투명해보이던 CF속의 이미지는 그 영화 속에서는 신경쇄약 직전의 한 엄마의 모습으로 변신해 있었다. 다만 CF 속 이미지의 여운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을 뿐이다(심지어 그 영화가 상영되던 시기에 집 전화CF가 TV에서 반복되었다. 의도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햇수로 2년이 지난 지금, 김남주가 돌아온 것은 '내조의 여왕'의 천지애다. 이 드라마는 다행스럽게도 영화 '그놈 목소리'와 집 전화CF가 가져왔던 이미지들의 불협화음을 자체적으로 지워버리고 있다. 천지애라는 캐릭터는 한때 퀸카로 자신에게 넘어오지않는 남자가 없을 정도로 잘 나가던 여자였다. 하지만 온달수(오지호)와 결혼한 후, 그녀의 신데렐라 꿈은 좌절되었다. 서울대를 나왔지만 사회부적응자인 온달수(온달+백수)로 인해, 그녀는 알바 전선을 뛰어야 하고, 심지어 남편 취직을 위해 옛날 자신을 졸졸 쫓아다니던 폭탄 양봉순(이혜영) 앞에 무릎까지 꿇어야 한다.
이 천지애의 캐릭터가 가진 상황은 자연스럽게 김남주의 변신을 용인하게 만든다. CF퀸으로 잘나가던 김남주는 천지애를 입고, "카드 마그네슘이 손상됐나 보네요”, “잘난 사람들은 튀게 되어 있어. 군대일학이라고 하잖아” 하는 말을 툭툭 뱉으며 그 맹한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 병원을 전전하고, 남편을 취직시키기 위해 퀸즈그룹 사모님들 사이로 들어가 치열한 내조(?)전쟁을 벌이는 천지애의 모습은, 김남주의 과장된 코믹 연기에 힘입어 좀체 무거워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
부유층 사모님들 사이에서 여우처럼 아양을 떨다가, 그 치사함에 뾰로통해지다가, 그런 자신의 모습이 한스러워 남편을 잡아먹을 듯 달달 볶다가, 또 남편을 위해서 굴욕을 참아내는 그녀의 모습은, 자장면을 먹어도 흔적하나 없을 것 같던 그녀의 이미지에 아무렇지도 않게 자장자국을 남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녀는 CF의 프레임 속에 갇혀있던 고정된 이미지의 탈을 벗어버리게 된다.
천지애라는 캐릭터가 김남주에게 약이 되는 것은 이 드라마가 스토리 구조상 그저 천지애를 우스꽝스런 아줌마로만 놔두지 않을 거라는 점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실업가장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내조라는 이름으로 만연한 인맥 사회의 권력구조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천지애의 처절함은 그저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한 안간힘에 머물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실적 상황들을 품고 있기 때문에 천지애라는 캐릭터는 주부들은 물론이고, 취업전선에서 갖은 수모를 겪고 있을 현실의 가장들에게까지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이것은 김남주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이 드라마의 끝에서 CF퀸 하나를 잃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대신 좋은 연기자 하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입맛에 맞는 드라마가 생겼다. 바로 내조의 여왕이다. 김남주의 2년만의 복귀작이기도 하고, 예전의 패션아이콘이었던 그녀의 아줌마로 어떻게 변신했는가도 궁금하기도 했다. 김남주가 연예계 생활을 한지 15년정도 된 것 같은데, 그동안 연기력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평가가 없었다. 그녀의 서구적인 외모와 그당시 굉장히 솔직했던 성형고백은 화제가 되었지만, 정작 연기력면에서는 별다른 의견이 없었던 것같다.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so so'한 느낌이..
최근 홀연히 나타나 주말 드라마의 판도를 바꿔놓은 연기자가 있다. 바로 사극의 제왕, 유동근. 그는 갖은 비판과 혹 허우적대던 ‘연개소문’을 단박에 기대감으로 채웠다. 그의 출연과 함께 ‘연개소문’이란 사극은 지금부터 새로 시작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심지어는 지금까지의 ‘연개소문’이 걸어온 길은 그저 사족에 지나지 않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렇게도 어려웠던 시청률 25%를 손쉽게 넘기면서 수위를 지켜오던 경쟁사극 ‘대조영’을 제쳐버렸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단지 유동근이라는 대배우만의 힘이었을까. 여기에는 물고 물리면서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하는 연기자들의 부침이 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장 불리한 시간대를 지킨 ‘대조영’의 연기자들 주말드라마 삼파전에서 가장 불리한 시간대를 갖고 있는 것이 ‘대조영’이다. 9시부터 시작하는 ‘연개소문’과 10시부터 시작하는 MBC 주말극 사이인 9시30분대에 끼어있어, 양 드라마의 공격을 받는 형국이 되기 때문. 만일 ‘연개소문’의 청년시절이 좀더 존재감 있게 흘러왔다면 ‘대조영’은 맥없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시절의 ‘연개소문’은 존재감이 없었다. 그나마 그 드라마의 힘을 이어준 것은 김갑수라는 괴물 배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특유의 광기 어린 연기로 수양제역을 소화함으로써 연개소문의 공백을 채워 넣었다.
‘연개소문’과 함께 한창 ‘환상의 커플’이 상종가를 치며 앞뒤로 압박해왔을 때 ‘대조영’을 지켜낸 인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조영’의 연개소문 역을 한 김진태였다. 호랑이 같은 눈빛을 부라리며 안면근육을 떨며 호통을 치는 모습에 빨려들지 않을 시청자가 없었다. 때론 자상한 아버지처럼, 때론 광기 어린 제왕처럼 변신의 변신을 보여주는 김진태 앞에 양만춘 역할의 임동진이 가세하자 그 힘은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연개소문이 죽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이 두 카리스마의 충돌이 빚어내는 숨막히는 연기대결이 펼쳐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드라마는 제목이 ‘연개소문’이나 ‘양만춘’이 아닌 ‘대조영’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인공 대조영이 차츰 앞으로 나오고 그들은 역사 속에 사라져야할 인물들이었다. 연개소문이 죽으면서 김진태가 사라진 자리를 양만춘 역의 임동진이 채워 넣었으나 그마저 사부구(정호근 분)가 제거해버리자 ‘대조영’의 드라마적인 힘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빈 자리를 온전히 대조영 역할의 최수종이 채워놓기도 전에 유동근이 출연한 것이다.
진짜 ‘연개소문’을 만드는 연기자들
결과적으로 ‘대조영’에서 만들어놓은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기대감은 새로운 ‘연개소문’을 도와준 격이 되었다. ‘연개소문’이 새롭게 주말드라마의 강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유동근 이외에도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이 선 굵은 카리스마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의 책사 역할로 돌아온 우리의 영원한 시라소니 조상구, ‘야인시대’의 나미코 역할은 물론이고 ‘대장금’에서 장금과 열띤 경쟁을 벌였던 이세은, ‘태조 왕건’에서 견훤 역할을 했던 서인석 등이 가세하자 유동근의 절대 카리스마와 조화를 이루면서 기대감을 만들었던 것. 여기에 ‘대조영’에서 익숙해진 ‘검모잠(안승훈 분)’같은 인물의 출연은 재미를 더해주었다.
따라서 이것은 지금까지의 ‘연개소문’과는 다른 카리스마 넘치는 드라마가 연출될 공산이 크다. 적어도 연기자들만큼은 확실한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걱정되는 것은 마치 역사를 가르치는 듯한, 설명조의 지지부진한 전개로 비판을 받아온 이환경 작가가 얼마나 속도감 있게 이들 연기자들의 맥을 살리면서 긴박한 드라마를 엮어나갈 것인가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기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캐릭터의 설정이나 스토리 진행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지금 ‘연개소문’은 그 연기자만으로 충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얀거탑’의 노련한 연기자들
이 경쟁에 가세하는 것이 바로 ‘하얀거탑’의 노련한 연기자들이다. 상황으로 보면 ‘대조영’을 진퇴양난의 입장에 빠뜨린 것은 바로 이들이다. 이름만 들어도 존재감이 팍팍 느껴지는 외과과장 이주완 역할의 이정길.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상황에 따라 굴욕적인 면모 역시 거침없이 보여주는 호연에 힘입어 네티즌들에게 ‘인쇄정길’, ‘굴욕정길’로 불릴 정도다. 의국실로 프린트되는 외과과장후보 이력서를 가로채기 위해 달리는 모습과 노민국의 호텔방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으로 이런 호칭이 붙여졌다.
이정길과 손을 잡았다가 또 뒤통수를 때리는 부원장 우용길 역할의 김창완은 특유의 능구렁이 연기로 호평을 받고 있다. 그의 연기는 뒤통수를 치면서도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것. 그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그 놀라운 연기변신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물론 주인공 장준혁 역할의 김명민은 특유의 야누스적인 면모를 과시하며 악마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정이 느껴지는 쉽지 않은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 저 영화 ‘괴물’에서 주목받은 변희봉(오경환 역), ‘영웅시대’에서 천태산의 차남 역할로 나왔던 정한용(민충식 역), ‘제5공화국’에서 허문도 역할로 열연했으며 각종 사극에서 감초 역할을 확실히 해준 이희도(유필상 역) 역시 이 드라마의 힘을 만들어주는 연기자들이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이들 얼굴 요즘 주말드라마는 유독 클로즈샷이 많다. 그것도 극단적인 클로즈샷이다. 미세하게 떨리는 근육까지 보일 정도로 화면의 거의 2/3를 채우는 이들 연기자들의 얼굴. 이러한 장면들은 드라마의 성패에 얼마나 연기자들의 존재감이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드라마 속에 확실한 존재감을 주는 연기자가 있다면 그 드라마는 그 힘을 기반으로 어떻게든 흘러간다. 중요한 것은 이들 존재감을 주는 연기자가 주연이 아닐 경우, 이들 연기자들 사이에서 그 힘에 눌린다면 드라마의 중심 축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유동근이라는 확실한 중심축이 선 ‘연개소문’은 일단 기선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얀거탑’ 역시 차츰 주인공을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미 고정층을 확보한 ‘연개소문’의 아성을 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대조영’. 사실 지금의 주말드라마 판도를 가장 도와준 격이 되었지만, 가장 곤란한 시간대에 자리잡아 양측에 공격을 받는데다 아직까지 대조영으로서의 최수종이 확실히 자리매김을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이 힘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분명한 것은 그 힘을 만들어 드라마를 성공으로 웃게도 하고 실패로 울게도 만드는 이들이 연기자들이라는 것이다.
MBC 사극 ‘주몽’이 연장에 돌입한 이래, 시청률은 조금씩 반등하고 있다. 그렇지만 연장을 하면서 “완성도를 높이겠다”던 애초의 약속은 실종된 상태. 여전히 에피소드식 전개와 개연성 없는 설정이 계속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긴장감의 결여. 현재 드라마 ‘주몽’의 전개방식은 사전에 모든 정보를 누출하는 치명적인 결함을 보여주고 있다. 부분노가 부여에 있는주몽의 충실한 세작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이미 주몽이 죽었다고 판단하는 데다, 먼저 200여 명의 선발대만을 끌고 온 대소와 주몽의 전투는 보나마나한 것이 된다. 아무래도 이것은 스케일 논란을 벗어나려는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그 결과를 짐작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다.
앞으로 벌어질 부여의 봉쇄 조치로 졸본이 위험에 처한다는 설정 역시, 이미 긴장감을 잃은 상태다. 그것은 벌써 저 해적대장 부위염이 자신의 아버지 유품을 꺼내놓을 때부터 시작됐다. 아버지가 본래 다물군이었다는 것. 그래서 주몽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은 굳이 없었으면 더 좋았을 설정이다. 주몽 스스로의 설득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제를 올리고 쓰러지는 주몽을 본다해도 거기서 어떤 긴장감을 찾기 어려운 것은 이미 주몽이 보내놓은 해결책들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좀더 극적으로 끌고 가 결정적인 순간에 해결책이 제시되었다면 더 긴장도를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게다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긴장감을 한층 더 떨어뜨린다. 부분노가 고작 네 명의 별동대를 데리고 가는 장면도 이해하기가 어렵고, 화공을 한다고 하면서 불화살 몇 번 쏘고 결국에는 백병전으로 가는 장면은 아무리 주몽과 대소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 중요하다 해도 기대감을 무색하게 만든다. 더 문제가 있는 것은 바로 한 겨울의 역병이라는 설정. 봉쇄조치에 이은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장치라고는 하지만 허점이 너무 많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드라마 전개에 있어 사족이 될 뿐인 난데없는 예소야와 설란의 유리 쟁탈전은 물론이고, 금와의 지나칠 정도의 광기(유화부인을 죽이겠다고 할 정도로)는 불필요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드라마적인 완성도의 실종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주몽’이 어떤 힘을 갖는 것은 그나마 캐릭터 자체가 갖고 있는 힘과 연기자들의 호연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치 그 자신이 주몽인 것처럼 혼신의 열연을 펼치고 있는 송일국은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따뜻한 인간애까지 연기로 소화해내고 있으며, 역시 대소 역할의 김승수는 제대로 된 악역을 서릿발 넘치는 눈빛으로 연기해내고 있다. 주목할 인물로 최근 스토리에서 중요해진 부분노는 그 캐릭터 하나만으로 몇 회분의 드라마를 이끌어가고 있다. 가장 연기력이 돋보이는 인물은 금와왕 역의 전광렬. 그 억지스런 설정에도 오히려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그의 호연은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 연기자들이 호연을 해도 긴장감이 떨어지면 드라마는 힘을 잃게 된다. 빠른 전개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금처럼 확실한 호적수가 보이지 않는 ‘주몽’에서는 한 템포 늦춰야 한다. 이제 주몽을 대적할 호적수가 천재지변 같은 것이라면 미리 예견할 수 있는 장면들은 피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너무 주몽 혼자 앞으로 계속 달리는 형국이라 적으로 설정된 대소나 금와, 한나라가 뒤쫓아오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그 외의 인물들, 예를 들면 영포나 설란, 원후, 유화부인 등등이 드라마에 재미를 주지 못하고 사족이 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주몽’은 인물 전체가 움직이지 못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에피소드의 인물들이 나왔다가 주몽에게 패퇴하는 장면만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다. 연기자들의 호연에 긴장감 있고 짜임새 있는 극적인 스토리가 덧붙여진다면 시청률이라는 호랑이에 완성도라는 날개도 달 수 있지 않을까.
최근 연기력을 두고 논란이 되는 연예인들이 있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배역과 연기가 따로 노는 데서 비롯한다. 관객 혹은 시청자 입장에서는 도무지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비판받는 연예인들을 우리는 굳이 연기자라 부르기가 꺼려진다. 진정한 연기자라면 자신을 과감히 훌훌 털어 버리고 배역에 자신을 완전히 몰입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연기자들이 배역 때문에 수없이 망가지면서도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아름답고 박수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올 한 해도 망가진 만큼 아름다웠던 많은 연기자들이 있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끼, 류덕환
‘웰컴 투 동막골’에서 동구 역으로 그 가능성을 보여준 류덕환은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역시 동구 역으로 확고한 연기자로서 자리매김했다. 이 나이(1987년생)에 이처럼 깊이 있는 내면연기가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영화 속 오동구가 되기 위해 20kg을 찌우는 것은 어쩌면 내면연기보다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마돈나가 되고 싶은 천하장사’. 자칫 잘못하면 코미디에 묻혀 영화가 말하는 마이너리티에 대한 진정성을 놓칠 수도 있었던 상황. 그러나 이 여성성과 남성성이 혼재된 연기를 류덕환은 너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진짜 연기자가 아니면 난감할 수 있는 이 오동구라는 역에 기꺼이 자신을 망가뜨렸다. 그는 디렉터스 컷의 신인연기상을 받았다.
광기와 감성을 잡은 김래원
MBC 드라마, ‘넌 어느 별에서 왔니’에서 김래원은 늘 하던 그 모습을 연기했다. 도회적이면서 장난기 많은 김래원표 연기.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작년 개봉했던 ‘미스터 소크라테스’에서 살짝 드러냈던 광기를 ‘해바라기’에서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 영화는 반 이상이 김래원의 공이라 할 정도로 그의 온몸을 던지는 미친 듯한 연기가 한 몫을 해주었다.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죄의식에, 순간 순간 튕겨 나오는 광기가 어루러져 마지막 라스트 신의 폭발력을 갖게 만들었다. 김래원은 이 연기를 통해 액션연기에도 감성적인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0여 년 연기 세월의 내공, 변희봉
영화 ‘괴물’을 통해 비로소 그 진가를 알아보게 된 배우. 그러나 그의 연기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으니 40여 년 조연과 단역으로 잔뼈가 굵은 결과였다. ‘수사반장’이나 ‘113 수사본부’에서 범법자의 역할을 단골로 해오던 그는 차츰차츰 자신만의 스타일로 개성강한 단역들(점쟁이 같은)을 소화해낸다. 그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기용한 인물은 바로 봉준호 감독. ‘플란다스의 개’서부터 ‘괴물’까지 함께 작업을 해오다 드디어 ‘괴물’의 박노인이란 캐릭터로 들어와서는 그 진가를 발휘한다. 부성 가득한 할아버지면서도 어딘지 기괴하고 괴팍한 구석이 있는 연기를 연기9단답게 소화해냈다.
웃으면서 우는 연기의 달인, 유오성
KBS 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로 돌아온 유오성은 영화 ‘친구’에서의 섬뜩한 카리스마는 버렸다. 대신 그가 입은 최장수라는 옷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헌신적인 ‘우리 시대의 아버지’이다.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앓는 역할을 맡아 진짜 환자 같은 섬뜩한 연기를 보여준 유오성은 특히 웃으면서 우는 연기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웃음 끝에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과 오열하며 콧물에 범벅이 되었지만 그걸 보는 시청자들은 그것을 아름답게 느꼈다. 이미 똑같이 최장수가 되어 눈물, 콧물을 같이 흘렸기 때문이다.
솔직 대담해진 연기, 고현정
다시 돌아온 고현정은 과거 청순 이미지를 과감히 벗어버렸다. 영화 ‘해변의 여인’에서 문숙 역을 맡은 그녀는 그간의 공백기간을 단 몇 마디의 꾸미지 않은 말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채워버렸다. “차가 귀엽네요”라는 말에 “똥차예요”라고 답변하고, “키가 크다”는 말에 “잘라버리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는 신선한 충격마저 느껴졌다. TV 속으로 돌아온 고현정은 ‘여우야 뭐하니’에서 노처녀 고병희 역할을 맡아 어딘지 어리숙하면서도 솔직하고, 내성적이면서도 대담한 연기를 소화해냈다. 그녀의 거침없는 망가짐은 오히려 ‘그 속에서 더 귀여운’ 그녀만의 독특한 자신감으로 나타난다.
변신의 귀재, 김윤석 KBS 드라마, ‘인생이여 고마워요’에서 평범해 보이는 남편 역할을 보여준 김윤석. 우리는 그가 ‘타짜’의 아귀로 등장했을 때 동일인물인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평범한 얼굴은 순식간에 살 떨리는 카리스마로 변신해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약간 기우뚱한 자세로 노려보는 그는 저 허영만 만화 원작에서 보았던 그 인물, 천상 아귀였다. 사실 만화 속의 아귀는 그 이름에서부터 풍겨나듯 만화적인 인물. 따라서 영화화되면서 그 형상화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 하지만 김윤석은 오히려 이 어려움을 기회로 만들었다. 그는 온전히 아귀를 자신의 한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개성으로 승부, 유해진
유해진을 통해 우리는 연기자의 얼굴이 때로는 보통, 아니 보통 이하여야 더 유리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특히 요즘처럼 다 잘생긴 연기자들이 작품 속에 들어오는 경우, 유해진의 얼굴은 오히려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전제가 있다. 그 얼굴을 개성으로 바꿀 수 있어야 된다는 것. 영화 ‘타짜’를 통해 유해진은 바로 그것을 보여주었다. 어설프게 폼잡지 않고 완전 캐릭터에 몰입해 시종일관 입을 가만두지 않는 이 정이 가는 타짜를 보면서 유해진의 연기 공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알게 되었을 것이다.
천의 얼굴, 박용우 13년 동안 그닥 눈에 띄지 않았던 박용우는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그 진가를 보여주었다. 소심하면서도 우습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섬뜩한 느낌마저 주는 눈빛 연기가 예사롭지 않았는데 그걸 통해 박용우는 ‘달콤하고 살벌한’ 느낌을 리얼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연기에 대한 욕심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조용한 세상’의 김형사는 ‘달콤 살벌’의 대우와는 상반된 캐릭터. 일상에 찌들어 있는 유들유들한 성격의 인물이다. 코믹으로 성공한 그가 다시 코믹이 아닌 장르로 뛰어든다는 것은 모험이지만 그것은 연기자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바닥을 치고 올라온 추자현 영화 ‘사생결단’에서 마약에 취한 추자현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손을 부들부들 떨고 불안한 듯 허공을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자신을 버리고 저 바닥에 드러누운 연기자의 그것이었다. 그녀의 역할은 어찌 보면 황정민, 류승범 사이의 대결구도 속에서 그다지 큰 비중의 역할이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순간들에 자신을 버리고 혼신을 다해 연기한 그녀는 대종상 신인여우상, 대한민국 영화대상 신인여우상, 여우조연상에다 올해 감독들이 시상하는 디렉터스 컷의 신인연기상까지 거머쥐었다. 노출연기에서부터 부산사투리까지 소화해낸 그녀는 바닥에서 비로소 연기를 낚은 연기자이다.
망가짐이 아름다운 배우, 예지원
연기자가 망가질수록 더 아름답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이가 바로 예지원이다. ‘올드미스다이어리’에서 그녀는 손톱만큼도 ‘예쁜 척’을 하지 않는다. 그냥 그 캐릭터 그대로의 최미자가 된 셈인데, 술에 취해 비틀거려도, 과하게 노처녀 히스테리를 부려도, 심지어는 심한 키스로 입술이 퉁퉁 불어도 어찌된 일인지 밉지가 않다. 이 정도면 거의 빙의가 된 셈인데, 예지원이 최미자가 된 것인지, 본래 최미자가 예지원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망가짐의 미학을 기대할 수 있는 연기자다.
연기자는 매번 망가져야 한다
이밖에도 자신을 충분히 망가뜨려 작품을 살린 배우들은 많다. ‘라디오 스타’의 안성기, 박중훈, ‘왕의 남자’의 감우성, 이준기, 정진영, ‘타짜’의 조승우, 김혜수, 백윤식,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제대로 연기맛을 보여준 손예진, 드라마 ‘주몽’에서 제대로 악역을 해준 대소 역의 김승수와 굴욕을 보여준 영포 역의 원기준 등등 일일이 거론하지 못할 정도로 훌륭한 연기자들은 많다. 반면, 연기변신이나 자신을 철저히 부숴 새로운 인물을 받아들이는데 실패한 연기자들도 있다. 대부분 연기력 논란이 되는 이들 배우들이 출연해서 성공한 작품들은 보기가 어렵다.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심지어 불쾌감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연기자를 통해 작품 속의 인물에 감정이입되고 싶은 것이지, 본래의 연기자 자신에 감정이입되고 싶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연기자는 작품을 위해 기꺼이 망가져야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