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동거, 워킹맘, 졸혼...‘아이해’가 보여주는 가족의 변화

KBS 주말드라마는 사실상 가족드라마의 최후보루나 마찬가지다. 기본이 20% 시청률부터 시작한다는 이 KBS 주말드라마는 가족드라마의 전통적인 시청층의 충성도가 대단히 높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채널을 이 주말드라마에 고정시켜놓는 것이 당연한 주말의 풍경이 되어버릴 정도로. 

'아버지가 이상해(사진출처:KBS)'

하지만 주말드라마는 최근 들어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것은 그 가족드라마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네 가족의 형태가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1인가구가 전체 가구 수의 4분의 1을 넘어선 지 오래고, 결혼률은 물론이고 출산률 또한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현실의 가족이 가족드라마가 늘 구성하던 대가족 형태에서 이미 벗어나 있기 때문에 주말드라마의 양태들은 어찌 보면 시대와 맞지 않는 틀로 보이기 십상이다. 

지금 현재 방영되고 있는 <아버지가 이상해>를 보면 그래서 이러한 시대성을 따라가기 위한 현실적 상황들을 다수 포진시키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변미영(정소민)과 김유주(이미도) 사이를 통해 보여줬던 왕따문제, 변준영(민진웅)이라는 공시생을 통해 보여준 우리네 청춘들의 취업현실, 변혜영(이유리)과 차정환(류수영)의 동거, 계약결혼 등을 통해 보여준 현 세대들의 달라진 결혼관, 임신을 하게 된 후 겪는 경력 단절의 고충을 통해 김유주가 간접적으로 드러내준 워킹맘의 비애, 실력이 출중해도 돈이 없어 아이를 보낼 수 없는 나영식(이준혁)과 이보미(장소연)의 고충을 통해 드러낸 특목고의 문제, 그리고 차규택(강석우)과 오복녀(송옥숙)를 통해 보여준 졸혼이라는 새로운 노년의 풍경까지.

물론 <아버지가 이상해>는 이토록 많은 현실적 문제들을 담으면서도 우리가 익숙하게 봐온 가족드라마의 공식들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안전한 방식을 취했다. 즉 변라영(류화영)과 박철수(안효섭)를 통해 여전히 등장하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그렇고, 변혜영과 차정환의 결혼 과정을 통해 그려내는 혼사장애의 이야기도 그렇다. 여기에 배우 안중희(이준)가 뒤늦게 변한수(김영철)가 자신의 친부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는 ‘출생의 비밀’ 코드도 빠지지 않았다. 

즉 <아버지가 이상해>는 우리네 가족이 변화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과거의 가족 형태에 대한 여전한 향수를 가족드라마라는 틀에 녹여내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식상할 수 있는 가족드라마의 여전한 공식들을 가져오지만(그래서 주제 역시 가족애라는 틀로 많은 갈등들이 봉합되는 보수적 형태를 유지한다), 그래도 그 안에 많은 현실적인 질문거리들을 담아내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특히 변혜영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준 달라진 여성의 면면은 주목할 만하다. 기성세대는 이해하기 어려운 동거를 당당히 밝히는 모습이나, 결혼에 계약 조건을 단다거나, 시댁에 살면서도 시부모와 거리를 유지하며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모습은 지금의 결혼 세대들이 충분히 공감할만한 이야기다. 

사회 현실이 대중들의 생각만큼 변화하지 않는 것도 많다. 그래서 김유주 같은 인물이 임신을 한 후 일에서 점점 배제되고 그래서 더 무리하게 되는 그 안간힘은 달라지는 가족의 변화만큼 달라지지 않고 있는 우리네 사회의 면면을 꼬집는다. 아이를 결국 잃게 된 김유주가 뒤늦게 그것이 자신의 탓이라며 후회하는 장면은 그래서 이런 문제들이 여전히 개인의 차원에서 그들의 희생으로 덮여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드러낸다. 

물론 가족드라마는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가족의 양태가 바뀌고 있는 한 그 가족드라마의 틀이 언제까지 그대로 유지될 것인가는 미지수다. <아버지가 이상해>는 그 과도기적 성격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가족을 향수하는 보수적 틀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생각해볼만한 많은 현실적인 변화와 문제들을 꺼내놓고 있다.

‘목소리의 형태’가 들려주는 진정한 사과와 진정한 소통이란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목소리의 형태>는 그 제목이 마치 미디어 이론의 제목처럼 이색적이다. 목소리는 청각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지만, 형태란 시각 미디어를 통해 보여지는 것이란 점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담아내려는 것이 커뮤니케이션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사진출처:영화<목소리의 형태>

영화는 니시미야 쇼코라는 청각장애를 가진 소녀와 이시다 쇼야라는 왕따 경험으로 상처를 가진 채 살아가는 소년이 진정한 사과와 용서 그리고 소통에 이르는 그 과정을 담고 있다. 어느 날 전학 온 소녀 쇼코는 청각장애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그런 쇼코를 쇼야는 짓궂게 괴롭힌다. 

왕따 경험을 가진 쇼야가 쇼코를 왕따시키는 이유는 그녀가 자신을 그대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쇼야는 쇼코에게서 자신이 왕따 당하던 그 때의 경험을 떠올리고, 그래서 그런 왕따에도 늘 웃고 먼저 사과하는 쇼코를 보며 참을 수 없게 된다. 쇼코에 대한 분노는 그래서 그 무기력했던 시절의 자신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쇼코가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전학을 가게 되고 쇼야가 왕따의 주동자로 내세워지면서 그는 이제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입장이 되어버린다. 더 이상 삶의 의미 같은 걸 찾지 못하는 쇼야는 모든 걸 정리하고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래서 그 마지막 정리를 위해 쇼코를 찾아간다. 쇼코는 도망치지만 소야가 수화를 하자 쇼코는 마음이 돌아선다. 수화를 통해서 소통하려는 쇼야의 진심을 읽게 됐기 때문이다. 

<목소리의 형태>는 쇼코와 쇼야라는 두 인물의 소통이 이뤄지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두 사람은 마치 한 사람의 두 자아처럼 보이기도 한다. ‘쇼’라고 똑같이 불리는 이름 때문에 서로를 의식하게 되고, 똑같은 왕따 경험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고통(죄책감이든 상처든)에서 벗어나려 한다. 쇼야가 자살하려 했던 것처럼, 쇼코 또한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쇼야는 쇼코라는 또 다른 자신의 분신이 가진 절망감의 손을 잡아주고 그녀를 구하는 동시에 자신과의 화해에도 이르게 된다. 

<목소리의 형태>가 굳이 이렇게 딱딱한 연구 논문 같은 제목을 달고 있는 건 소통이라는 것이 단지 목소리나 시선 같은 감각에 의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하기 위함이다. 쇼코와 쇼야 사이에 놓여진 소통의 장벽은 듣지 못한다는 청각 장애를 가진 쇼코만의 문제가 아니다. 쇼야 역시 쇼코가 전하는 마음의 소리를 보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마음이 진정으로 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자신에 대해 마음을 여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걸 가로막고 있는 건 두려움이다. 처음으로 쇼야가 친구들과 함께 놀이공원에 가서 즐거움을 느끼며, “내가 이렇게 즐거워도 되는 건가”하고 자문하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는가를 말해준다. 그와 함께 롤러코스터를 탄 친구는 두려움에 대해 말한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일은 굉장히 두려웠고 지금도 두렵지만 그래도 즐기려 한다고. 그녀는 고공에서 뚝 떨어지는 롤러코스터에서 양손을 활짝 벌리고 즐거움을 만끽한다.

겉으로 나오는 목소리나 시선만으로 진정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영화는 다시 만나게 된 친구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보여준다. 쇼코는 결국 왕따 피해자였고 쇼야를 포함한 다른 친구들은 모두 왕따의 가해자였다. 그들은 모두 상처를 숨기고 또 죄책감을 숨긴 채 친구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사이에 놓인 이 과거의 기억은 결코 그런 방식으로 청산되지 않는다. 

진정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사과가 이뤄지지 않는 한 과거를 덮고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는 것이 그 무엇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걸 쇼코를 둘러싼 쇼야와 그 친구들 사이의 변하지 않는 관계가 보여준다. 쇼코를 구한 쇼야는 자신이 그녀에게 과거의 일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를 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사과를 구하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은 진정한 소통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장면은 영화 첫 도입부분에서 자살하려던 쇼야가 이제는 자신의 분신같던 쇼코를 구하고 자신을 구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목소리의 형태>는 추락의 이미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쇼야는 자살하기 위해 다리 위에서 뛰어 내리려 하다가 물가에서 누군가 날리는 폭죽을 보며 그걸 포기한다. 쇼코는 불꽃놀이를 하는 축제 때 조용히 집으로 돌아와 그 불꽃을 바라보며 난간에서 뛰어 내리려 한다. 마침 그걸 목격한 쇼와는 쇼코를 구하고 대신 자신이 떨어진다. 쇼야와 친구들은 다리 위에서 물속으로 뛰어내리고, 쇼코의 필담 노트가 다리 밑으로 떨어지자 쇼코와 쇼와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그 노트를 찾는다. 또 쇼와는 친구와 롤러코스터를 타며 그 뚝 떨어지는 순간의 두려움이 즐거움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러한 추락의 이미지가 가장 상징적으로 반복되는 장면은 쇼야와 쇼코가 늘 다리 위에서 만나 물고기에게 빵을 뜯어 던지는 장면이다. 물고기의 시각으로 날아온 빵은 물 위에 떨어지고 물고기는 그 빵을 기막히게 찾아 먹는다. 물고기는 빵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니고 그 형태를 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물 위로 떨어지는 그 진동을 느낌으로서 그걸 찾아 먹는다. 듣는다고 보인다고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 진심이 전달되면서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어떤 순간 소통의 문이 열린다. 

<목소리의 형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는 점 때문에 그 ‘가해자’의 자기변명처럼 오인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 오해일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진정한 사과와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해자에게도 그렇지만 피해자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요즘처럼 소통이 화두가 된 적도 없고, 또 냉각된 국제관계 역시 소통의 문제라는 점을 두고 보면 <목소리의 형태>는 그저 단순하게 바라볼 청춘 로맨스는 아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국가 간의 정서로 읽어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많은 소통 단절의 문제들을 그 안에서 발견하고 단지 말뿐인 사과가 아닌 진심어린 사과가 열어 놓는 진정한 관계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니 말이다.

류화영의 <청춘시대>, 어째서 공감될까

 

JTBC 금토드라마 <청춘시대>에서 강이나(류화영)는 다양한 매력을 가진 인물이다. 셰어하우스 벨 에포크에서 그녀는 다른 청춘들과는 삶 자체가 다르다. 일단 대학생이 아니고 그래서인지 연애와 일에 있어서도 다른 청춘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녀는 좋게 표현하면 연애를 일로서 하고 있고(스폰서를 받는다), 나쁘게 표현하면 그녀 스스로도 말하듯 몸을 팔아 살아간다. 그러니 청춘의 연애가 갖는 아픔이나 상처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고, 또 미래의 일자리를 위한 고군분투도 없다. 다만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가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다.

 

'청춘시대(사진출처:JTBC)'

그녀가 벨 에포크에서 일종의 왕따를 겪게 되는 건 대학생이 아니라는 걸 숨겼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쁜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예은(한승연)에게는 그녀의 자유로운 남성 관계(?)를 일종의 더러움으로 치부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그녀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강이나를 더럽다고 말함으로써 힘겨운 자신은 깨끗한 사랑을 한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 결국 술에 취한 강이나가 같이 사는 친구들에 대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게 되고 그것이 그녀가 다시 벨 에포크에서 살게 되는 이유가 되지만 그녀가 이질적인 존재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예은과 강이나의 문제는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예은의 그 나쁜 남자친구가 강이나에게까지 유혹의 손길을 뻗치자 그녀는 절망하며 강이나를 더러운 창녀로 몰아세운다. 예은은 강이나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못되게 굴지만, 결국 힘겨워 엇나가는 예은을 보호해주는 건 강이나다. ‘강언니로 불리는 강이나라는 캐릭터는 이 가녀린 청춘들 속에서 일종의 해결사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연애만이 아니다. 일에 있어서도 강이나는 청춘의 현실에 일종의 냉소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알바를 세 개나 하며 현실에 찌들어 살아가는 윤진명(한예리)에게 강이나는 왜 그렇게 어렵게 사냐쉽게 사는 방법도 있다고 말한다. 그런 생각자체가 자신을 무너뜨리는 일처럼 여기는 윤진명은 강이나의 삶이 잘못 됐다고 부정하지만, 매니저가 내미는 유혹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녀 역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강이나는 이처럼 <청춘시대>라는 드라마에서 연애와 일에 걸쳐져 있으면서 때로는 해결사 역할을 때로는 현실에 대한 냉소를 보내는 인물이다. 그녀는 이 벨 에포크의 청춘들 사이에서 방외자 혹은 왕따 같은 존재이지만 그들을 걱정하고 때로는 문제를 해결해주려 노력하며 그들을 둘러싼 현실에 온 몸으로 냉소를 던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강이나를 연기하는 류화영이라는 배우가 새삼 눈에 들어온다. 과거 왕따 사건으로 티아라에서 방출된 화영이란 이름의 가수가 이제는 어엿한 배우의 자리로서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 적어도 <청춘시대>에서 그녀는 류화영이 아니면 다른 누가 가능했을까 싶은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강이나라는 캐릭터는 그녀에게 너무나 잘 어울린다.

 

한 때 시련을 겪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일까. 그녀는 강이나를 연기하는 데 있어서 젊은 배우답지 않은 다채로운 얼굴들을 보여주고 있다. 섹시한 이미지에서 통쾌한 걸 크러시의 느낌은 물론이고 과거의 아픔을 트라우마처럼 갖고 있는 처연한 느낌까지 그 한 캐릭터를 통해 소화해내고 있는 것. 그녀에게 <청춘시대>는 그래서 남다른 작품으로 남을 것 같다. 티아라의 화영에서 이제 배우 류화영으로 돌아온.

<송곳>, 오물을 뒤집어쓴 뒤의 역설적 자유

 

돌아올 웃음이 없다는 게 명확해졌으니 웃어줄 이유가 없어졌다.’ 왕따가 되어버린 푸르미 마트의 이수인(지현우) 과장은 더 이상 갸스통(다니엘) 점장으로부터 미소 띤 칭찬을 받지 못하게 됐다. 직원들을 해고하라는 명령에 불복하면서다. 하지만 점장은 물론이고 동료 과장들도 그를 왕따로 만들어버리자 그는 오히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독자 노선을 가는 길을 선택했다.

 


'송곳(사진출처:tvN)'

보답 받을 호의가 없다는 걸 아니 애써 호의를 보일 필요도 없다.’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정민철(김희원) 부장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그를 괴롭혀도 그는 더 이상 괴롭지 않게 됐다. 애초에 호의를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면서 아예 그런 호의 자체를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JTBC 드라마 <송곳>에서는 이 역전된 상황을 흙탕물 속에서 뒹굴며 훈련을 받던 군대 이야기로 설명한다.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편안해지는 역설. 철조망에 손이 조금 긁히던 흙바닥에서 뒹굴던 그리 신경을 쓰지 않게 되더라는 이야기. 드라마는 이 상황을 오물을 뒤집어쓴 뒤에 찾아오는 역설적 자유라고 표현했다.

 

이 부분은 이 드라마가 노동운동이라는 소재를 가져와서도 어떻게 그토록 흥미진진하고 때로는 속 시원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즉 노동운동의 이야기는 고 전태열 열사의 그것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지어는 비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송곳>은 그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만 노동운동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 안에 드라마틱한 반전과 소소한 성취들을 집어넣음으로써 그 소재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서게 해준다는 것.

 

그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반전과 역설이다. 이수인이라는 캐릭터는 우리가 노동운동하면 떠올리는 그런 인물과 사뭇 다르다. 그는 한 마디로 말하면 바른생활 사나이. 물론 성인군자라는 뜻이 아니다. 그도 역시 현실에 타협하고픈 욕망을 갖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못할 뿐이다. 보통의 그런 바른생활의 인물이라면 잘 살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학교, 군대, 사회 어디든 가는 곳마다 걸림돌같은 존재다.

 

이것은 캐릭터의 역설이다. 바른생활 사나이가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걸림돌이 되고, 그런 인물을 송곳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현실. 결국은 현실이 비뚤어졌다는 역설이다. 그래서 마냥 당할 것만 같지만 웬걸? 의외로 이 바른생활 사나이가 승부욕을 보인다. 그것은 그래서 또다시 왕따의 역설로 나아간다. 왕따가 되니 오히려 저들의 요구나 기대를 따를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부당함에 보다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수인을 돕는 구고신(안내상) 부진 노동상담소 소장도 우리가 노동운동하면 떠올리는 그런 투사의 이미지가 아니다. 거리에 노동자들이 나와 사측과 대치상황을 보여주지만 그 장소로 이수인을 데려온 구고신은 그것이 좋은 현장교육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노동쟁의나 노동운동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다. 어디든 노동은 있고 노동자와 사측이 있기 마련이라면 노동분쟁도 일어난다.

 

그래서 그는 노동운동에 대한 교육을 서구에서는 어린 나이의 학생들에게 정규 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걸 역설한다. 그들에게는 일상이 우리에게는 마치 송곳같은 일이 되어있다는 것. 구고신이라는 캐릭터는 그래서 이 노동운동에 대해 지나치게 비장함에 빠져들지 않게 해주는 존재가 된다.

 

사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상황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해준다. 즉 노동쟁의를 무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처럼 금기시하는 현실에서는 마치 사측의 호의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왕따가 되어버리지만, 거꾸로 분쟁이 있을 때 그러한 노동운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수인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왕따의 역설은 그 관점을 바꿔주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면이 있다



옹달샘의 급부상과 추락, 그 후폭풍이 의미하는 것

 

왜 갑자기 2013년에 있었던 사안이 지금 현재 옹달샘에게 끝없는 논란의 샘이 되었을까. 당시만 하더라고 옹달샘은 이른바 A급 연예인으로 뜨진 못했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말의 수위가 높은 인터넷 팟캐스트 같은 공간을 통해 문제의 발언들을 쏟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세 사람이 함께 모여 수다를 떠는 과정에서 생기기 마련인 일종의 상승작용 같은 것도 있었다. 기자회견을 통해 장동민이 거론한 막말의 이유에는 그 내용이 들어가 있다.

 

'SNL코리아(사진출처:tvN)'

방송이란 틀을 벗어나 저희들이 방송을 만들어 가고 청취자들과 가깝게 소통하며 즐거움을 느꼈고, 더 많은 분들에게 큰 웃음 드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웃음만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서로가 내뱉는 발언이 세졌고, 더 자극적인 소재, 격한 말들을 찾게 됐다. 그 웃음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재미있으면 되겠지란 안일한 생각을 가졌다.”

 

그것은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진심이라고 해도 그 막말들은 용서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것은 마치 왕따를 시킨 아이들이 그 당사자가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거의 유사하다. 그들은 후에 피해자가 극단적인 일을 벌인 뒤에야 자신이 했던 일을 깨닫곤 한다. 즉 왕따를 시키는 아이들은 애초부터 악의를 갖고 있는 악의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그런 환경 속에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짓까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저 인터넷이라는 조금은 사적인 느낌을 주지만 결코 사적이지 않은 공간에 머물러 있을 때만 해도 문제는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이 막말의 이미지를 캐릭터화하여 성장하고, 지상파 같은 방송 그것도 <무한도전> 같은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에 들어오게 되면서 문제는 달라진다. 물론 수위조절을 하겠지만 대중들로서는 그 인터넷 팟캐스트 등에서 했던 B급 막말의 캐릭터들이 지상파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막말의 수위는 약자들을 지목한 언어폭력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 문제는 <무한도전> 식스맨이 촉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한도전>과는 무관한 일이다. 옹달샘은 결국 성장을 원했고 B급의 세계가 아닌 제대로 된 세계에서의 활동을 원했다. 그것은 어쨌든 지금까지와의 활동과는 전혀 다른 것을 해야 하는 것이고, 또한 책임도 그만큼 막중해진다는 걸 의미한다. 당연히 과거 자신들이 했던 발언에 대한 책임도 지고 가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옹달샘을 지지하고 동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것은 그들을 오래도록 봐오며 그 진면목을 잘 아는 관계자들이거나 가까이서 응원해온 팬층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옹달샘은 그 소규모 집단의 지지를 넘어서 더 큰 대중들 앞으로 나오려 하고 있다. 그것은 또 다른 세계다. 유세윤이 상대방의 상처와 아픔을 모르고 사태의 심각성도 몰랐다.”고 뒤늦게 사죄를 한 건 그가 여전히 이 과거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는 걸 말해준다.

 

옹달샘은 프로그램 하차에 대해서 제작진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밝혔다. 이것은 단지 책임을 프로그램 제작자들에게 넘기려고 하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갑자기 급부상하면서 너무 많은 프로그램에 발을 들여놓다 보니 모든 걸 내려놓고 하차한다고 하더라도 그 피해도 너무나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옹달샘 스스로 모든 프로그램에서의 전격하차를 선언하는 것이 또 다른 피해로 이어진다는 미안함이 거기에는 깔려있다.

 

하지만 방송 하차는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정한 휴지기를 갖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훨씬 더 좋은 선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 계속 방송을 강행한다면 과거를 떨치고 나갈 기회를 잃게 된다. 고름은 짜내고 가야한다. 그걸 안고 가다가는 고통도 고통이거니와 새 살이 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된다.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저마다 옹달샘이 괜찮은 재능을 가진 이들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하지만 요즘은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사람에 대한 호감도와 지지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제작자들도 일단은 이들을 놓아주는 게 오히려 더 큰 도움을 주는 일이다. 재능은 언제든지 다시 살릴 수 있다. 다만 한번 잃어버린 호감도와 지지는 프로그램을 통해 생겨나기보다는 이들의 선택과 삶을 통한 진정성 같은 걸 통해 회복될 수 있다.

 

옹달샘이 했던 일련의 막말만을 계속 떠올리면 도무지 이들을 이해하기가 어렵게 된다. 하지만 이번 문제에서 그 문제의 막말들이 나올 수 있는 인터넷 팟캐스트의 그 독소적인 환경에 대한 점검 또한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껏 우리는 이 방송들을 사적인 것이라 치부해왔지만 그것이 얼마나 공적일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옹달샘은 현명한 선택을 통해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터넷 문화에 대한 재점검 또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이제 옹달샘 멤버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선생도 학생도 막장인 <여왕의 교실>, 실제일까

 

이게 진짜 요즘 초등학생들의 현실일까. 아니면 일본드라마의 리메이크 과정에서 제대로 우리화하지 못한 드라마의 문제일까. <여왕의 교실>을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가지로 나뉜다. 요즘 초등학생들의 현실은 더 심하다는 쪽이 그 하나이고, 정반대로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며 마여진(고현정) 선생 같은 인물이 과연 가능할 수 있느냐는 쪽이 다른 하나다.

 

'여왕의 교실(사진출처:MBC)'

이 드라마가 문제작이 될 수밖에 없는 건 아이들이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려운 잔인한 행동들 때문이다. 친구를 지켜주려 한 심하나(김향기)는 매번 그 아이들로부터 배신을 당한다. 왕따를 당하고 있는 은보미(서신애)를 위해 마여진 선생이 제안한 축제 행사를 보이콧 하자고 주장하지만 은보미는 당일 거꾸로 마여진 선생에게 포섭되어 심하나를 배신하고 감시하는 조장이 된다.

 

또 지갑을 훔친 친구 고나리(이영유)와의 약속을 지켜주기 위해 그 비밀을 숨겨주다 본인이 도둑으로 몰린 심하나(김향기)지만, 고나리는 오히려 그런 심하나에게 이게 다 들킨 너의 잘못이라며 왕따를 시킨다. 심지어 고나리는 심하나가 지갑 주인인 수진(변승미)과 친해지게 되자 불안함을 느껴 둘을 이간질시키기도 한다. 로커에 가둬버리고 심하나가 도와 달라 애원하는 걸 장난스레 따라하는 아이들은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이게 아이들이 맞나?

 

하지만 이것은 이기적이고 되바라진 아이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마여진 선생 같은 괴물 때문에 생겨나는 일들이다. 가정형편이 아이의 잘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동구(천보근)의 불행한 가족사를 아이들 앞에 공공연히 폭로하고 “너는 친구가 없다”고 단언한다. 친구를 끝까지 믿는 하나에게 그녀는 “우정을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몰라주는 진실? 멍청하기는. 사람들이 몰라주는 진실 따윈 아무 의미 없어. 친구니 우정이니 그럴 듯한 말들이긴 하지만 결국 네 선택은 틀렸어. 진짜 진실은 말야. 다른 아이들 눈에 보이는 네 모습이야. 선생님한테 반항하면서 잘난 척 했지만 뒤에서는 친구 지갑이나 훔치는 질 나쁜 애. 그러면서 끝까지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거짓말쟁이. 이중인격자. 넌 이제 그런 아이야 알겠니?”

 

제 아무리 선생님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는 거의 아동 학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신체적인 폭력보다 더 한 것이 정신적인 폭력이니까. 진실 따위는 필요 없다는 사고방식도 문제지만, 상처받은 아이를 보듬어주지는 못할망정 거기에 대고 거짓말쟁이에 이중인격자라 몰아 부치는 건 너무 심한 일이 아닌가. 이 마여진 선생의 대사는 그 부분만 떼어내서 들어보면 도저히 아이에게 하는 이야기라고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무표정한 얼굴에 인간미라곤 하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는 또 어떻고.

 

그래서 시청자들은 이렇게 막장인 아이들과 선생 사이에서 오로지 아이다운 아이는 심하나 하나뿐이라고 여긴다. 아니 여기고 싶어진다. 친구가 없다는 선생님의 단언에 “오동구는 제가 좋아하는 친구예요”라고 말하는 아이, 진실이나 우정 따윈 필요 없다는 말에 “우정은 소중한 거고 언젠간 진실이 꼭 이길 것”이라고 말하는 아이. 심하나만이 현실적인 아이처럼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왕의 교실>이라는 드라마는 심하나를 빼고는 현실성이 없는 아이들과 선생님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혹 원작이 만들어진 일본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이 다른 데서 생기는 편차가 아닐까. 그런 면이 있다. 마여진 선생 같은 인물은 실제 현실에서 그다지 보편적인 캐릭터라고 말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학교 당국이나 학부모들이 이를 방치하고 있다는 건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제 아무리 성적 지상주의라고는 하나 학대당하는 아이들을 그대로 볼 우리네 학부모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단 1%의 가능성도 없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치부하기도 어렵다. 우리의 입시제도라는 것에 일본식 교육의 잔재가 뿌리 깊게 남아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미 입시교육의 시작점이 초등학교로까지 침범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약육강식의 현실을 던져놓은 어른들이 그 아이들에게 아이들다움을 기대한다는 것은 지나친 환상이 아니겠는가.

 

결국 <여왕의 교실>은 드라마지만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보여준다. 마여진 선생 같은 사람이 없었으면 싶지만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또 그 선생의 논리가 틀렸으면 싶지만 잘못된 현실 속에서는 그 논리가 그럴 듯하게 들리는 현실이 아닌가. 그 속에서 비뚤어지고 파괴되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게다.

 

<여왕의 교실>의 시청률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은 그것이 보기 싫은 것들을 자꾸만 우리 눈앞에 펼쳐놓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드라마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길 원치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고 위로받기를 원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여왕의 교실>은 문제작이라 할만하다. 우정이 배신되고 오히려 왕따를 당하는 이 현실을 보여주는 드라마는 그래서 드라마들 사이에서 왕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무도 바라보고 싶어 하지 않는 진실을 가진 심하나 같은.

<그것이 알고 싶다>가 파헤친 귀족학교의 반칙

 

돈이면 뭐든지 되는 세상인가. <그것이 알고 싶다>는 살인을 교사하고도 버젓이 호화병실 생활을 해 국민적인 공분을 일으켰던 ‘사모님의 이상한 외출’ 편에 이어, 이번에는 돈이면 미래도 사는 이른바 ‘귀족학교’ 국제중학교의 각종 비리와 반칙들을 다루었다. 좋은 대학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라 불리는 국제중학교에 가기 위해 줄을 서는 아이들과 그 미래가 보장된다는 얘기에 몇 천만 원에 달하는 학비에 촌지를 내는 학부모들, 그리고 그것을 공공연히 장사하는 국제중학교는 말 그대로 조폭 영화에서나 나왔을 법한 뒷거래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그것이 알고싶다(사진출처:SBS)'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이라는 꼼수가 그렇다. 누가 들어도 가난하고 소외된 학생들을 위한 전형을 떠올리고 또 실제로 그런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국제중학교에서는 그런 뜻과는 상관없이 이른바 상류층의 입학 장사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제작진이 입수한 사회적 배려 대상자 명단을 통해 확인한 결과 그 대상자들이 거주하는 곳은 몇 십 억짜리 호화주택들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기업 임원의 아들의 입학비리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국제중학교는 이른바 대한민국 1%의 상류층을 위한 학교로 변호사, 의사 같은 전문직은 알아주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렇게 위화감만 조성하는 국제중학교가 왜 굳이 필요할까. 1% 상류층을 위한 학교가 만들어내는 교육의 부패가 나머지 99%의 공분을 사고 있는 것은 돈이면 미래도 쉽게 살 수 있는 반칙들이 너무나 당연한 듯 벌어지는 것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제작진이 확보한 2013년 영훈중학교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 점수표와 추천서를 통해 확인한 결과, 제 아무리 높은 교과 성적을 받은 우수한 학생이라도 집안이 대기업 임원이나 판사, 검사가 아니라면 오히려 떨어뜨리는 ‘제 멋대로 인’ 전형이 드러났다. 학습계획서와 추천서 같은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편파적이었던 것.

 

특권층과 부유층들이 낸 이른바 ‘학교발전기금’은 수천만 원에 이르렀고 심지어 어떤 학생은 합격발표가 나기도 전에 거액을 기부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문제는 이 피해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도 이어졌다는 점이다. 어떤 학생은 격에 맞지 않는다며 왕따를 당해 거의 점심을 먹지 못하고 학교를 다니다가 결국은 전학을 결정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학부모가 아이를 위해 대출까지 해가며 매번 억지로 돈을 상납해왔지만 그 때 뿐 별 효과가 없었던 것. 이것을 과연 학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입학에서부터 돈 거래가 이뤄지고, 소외계층을 위해 만들어 놓은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 같은 제도를 저들 입맛에 맞게 바꿔 활용해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떨어뜨리고 대신 상류층 자제들을 입학시키며, 어렵게 들어온 학교에서도 학생을 볼모로 끊임없이 금품을 요구하고 그게 아니면 결국 학생의 전학을 권고하는 이 폭력과 꼼수와 반칙이 횡행하는 곳을 과연 학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국제중학교가 저질러온 비리와 반칙들에 대해 대중들이 공분하는 것은 거기에서 우리네 교육의 암담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교육이 모두에게 평등한 미래를 제공하지 못하고 그래서 잘 사는 집에 태어난 아이들은 평생을 엘리트 코스를 밟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성장과 성공의 발판마저 마련되지 않으며 그것이 오로지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마음은 참담할 수밖에 없을 게다.

 

국제중학교의 비리는 마치 우리 사회의 현실을 표본처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1%를 위한 편법들이 만드는 그들만의 세상은 나머지 99%의 눈물 위에 세워지기 마련이다. 또 이런 편법들을 당연시 여기며 특권의 삶을 살고 있는 1%들이 세울 우리 사회의 미래는 얼마나 암담할 것인가. 국제중학교의 문제는 그래서 우리 모두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대중들의 공분과 허탈감을 안다면 반드시 그 부패된 교육의 살을 도려내야 할 것이다.

무엇이 학교를 눈물 흘리게 하나

 

한 중학생 아이는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자살했다. 아이의 엄마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내용이 유서에 적혀있는 것을 보고는 심지어 “무슨 소설을 본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같은 또래 아이들이 벌을 세우고, 전선으로 목을 감고 끌고 다니고... 얼마나 그것이 고통스러웠으면 자살로 그 맞는 아픔을 더 이상 끝내고 싶었을까.

 

'학교2013'(사진출처:KBS)

<SBS스페셜>이 기획한 <학교의 눈물>은 사회면을 뜨겁게 만들었던 대구에서 벌어진 고 권승민군에게 벌어진 끔찍한 학교폭력과 자살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가족 모두가 우울증에 그냥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고, 특히 권승민군의 형은 “가해자 애들 다 죽여버리고 자기도 죽여버리겠다”며 피가 나도록 벽을 주먹으로 쳐댔다고 했다. 왜 안 그렇겠나. 자신들의 일부 같은 가족이 그런 처참한 고통을 겪고 세상을 버렸는데.

 

문제는 가해자의 44%가 피해경험이 있다고 말한 것처럼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로 둔갑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한 왕따를 심하게 당해왔던 아이는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했던 친구가 배신하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친구를 때려 가해자가 되었다. 그 아이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 행동을 후회하게 되었지만 결국 학교는 아이에게 자퇴를 권유했다.

 

한편 가해자가 되어버린 아이 역시 처음에는 아주 소소하게 시작되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무려 십여 명을 상대로 돈을 뜯어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또 여전히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며 담배 심부름을 하는 아이는 그 분노를 가족에게 풀기도 했다. 도대체 우리네 학교는 어째서 학생들이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되어 뒤늦게야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걸까.

 

다큐멘터리 <학교의 눈물>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서 드라마 <학교 2013>은 그 단서를 제공해준다. 끝없는 입시경쟁으로 학생들조차 선생님에게 입시 관련 공부만을 요구하고, 학교는 오로지 명문대에 얼마나 많이 보내는가 같은 실적에만 혈안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학생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다. 그들은 늘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분노를 품고 있거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 청소년기에 품어야 할 꿈같은 것은 꿀 여유조차 없다.

 

도대체 무엇이 이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마치 하루하루를 버텨내야할 시간으로 만들어버린 걸까. 일진이었다가 사고를 친 후 전학 와서 마음잡고 살아가려 노력하는 고남순(이종석)이나, 그의 친구였지만 피해자가 되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선수의 꿈을 포기하게 된 박흥수(김우빈)나, 그저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버린 송하경(박세영),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비뚤어져 버린 오정호(곽정욱), 치맛바람에 휘둘리는 김민기(최창엽) 같은 아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원하지 않았어도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되어버린 아이들이다.

 

<학교의 눈물>에서 학교폭력의 가해자들에게 판결을 내리던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학교폭력의 일차적 책임은 아이가 아닙니다. 사회가 만든 겁니다. 이 아이들 전부 대한민국의 아이들 아닙니까.” 결국은 도무지 이해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 아이들을 그 벼랑 끝까지 내몬 것은 결국 어른들이다. 학교가 아이들의 꿈이 되지 못하고, 아이들을 경쟁이라는 매질로 학대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학교의 눈물은 그칠 수 없을 것이다. <학교의 눈물>이 실험하겠다는 ‘소나기 학교’에 자꾸만 희망을 걸게 되고, <학교 2013>의 이상처럼만 보이는 정인재(장나라) 선생이 현실이 되기를 기대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게다.

티아라를 위해서도 시간은 필요하다

 

티아라의 은정은 결국 드라마 <다섯손가락>에서 하차하게 됐다. 항간에는 제작진의 이 결정에 대해 일방적으로 통보된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속에 담겨진 논리가 애매하다. 티아라 사태로 인해 은정이 출연하게 된 <다섯손가락>이 오히려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그래서 이제 PPL에 차질이 생긴다는 이유로 은정을 퇴출시키는 것은 마치 토사구팽을 연상케 한다는 논리다. 과연 그럴까.

 

'다섯손가락'(사진출처:SBS)

먼저 티아라 사태가 <다섯손가락>에 득(得)을 주었다는 시각은 이해될 수 없다. 물론 관심을 집중시켰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긍정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실(失)로 작용할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티아라 사태로 인해 이미지가 실추된 은정이 출연하기 때문에 드라마를 안보겠다는 시청자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 PPL이 은정 출연 때문에 어려워진다는 얘기 자체가 대중정서를 반영하고 있다는 증거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다섯손가락> 제작진은 티아라 사태로 인해 거꾸로 피해를 본 셈이다. 마치 CF를 찍은 연예인이 사회적인 구설수에 오르게 되면 해당 기업에게 그 피해가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실제로 이런 경우에 해당 기업은 그 연예인에게 피해 보상을 요구하기도 하지 않는가.

 

물론 <다섯손가락>에서 은정의 하차 과정에 문제가 없다는 건 아니다. 즉 애초에 티아라 사태가 터졌을 때, 아예 선을 그었다면 훨씬 자연스런 조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제작진들은 티아라 사태의 중대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결국 뒤늦게 그 중대성을 깨닫고 하차 결정을 한 것이 잡음이 남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제작진의 이런 둔감한 반응만큼 이해가 되지 않는 건 티아라 소속사의 행보다. 티아라 사태는 그 본질과 상관없이 소속사의 잘못된 대처로 인해 대중들에게는 왕따의 이미지로 굳어버린 게 사실이다. 즉 퇴출된 화영과 남게 된 멤버들이 보여주는 풍경은 그 자체로 당한 이가 퇴출되고, 가한 이가 버젓이 남아있는 상황으로 인식되게 된 것. 이런 상황을 이해한다면 티아라 멤버들이 버젓이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것이 어떤 이미지를 만들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티아라 소속사는 멤버들의 드라마 출연을 강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것은 어찌 보면 대중정서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무시한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대중들을 상대하는 연예 기획사가 대중정서를 읽지 않는다는 것은 직무유기가 아닐까. 게다가 같은 연예계 종사자로서 드라마 출연 강행이 드라마 제작진들이나 방송사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런 끝없는 구설수 속에서 정작 더 힘들어지는 건 티아라 멤버 당사자들이다. 심지어 티아라 왕따 놀이가 등장할 정도로 사회문제화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멤버들은 그 어떤 방송 출연도 득보다는 실이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특히 티아라 사태에서는 멤버들의 방송활동 자체가 이들의 왕따 이미지를 더 공고하게 굳혀버리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티아라 사태의 진짜 본질이 실제 왕따인지 아니면 그저 왕따설일 뿐인지는 아직도 명확히 알 수 없다. 멤버 당사자들이나 소속사 대표 그 누구도 명쾌한 해명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처럼 신뢰의 금이 간 상황에서는 그 어떤 해명도 믿음을 주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실이 무엇인가만큼 중요한 것은 대중들이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는 것일 게다.

 

대중정서를 감안해본다면 티아라에게 현재 필요한 건 방송 강행이 아니라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될 수 있을 때까지의 시간이다. 이 대중정서가 가라앉지 않는 한, 어떤 방송 강행도 티아라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는 어렵다. 소속사가 티아라를 위한다면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현재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대중문화 종사자로서의 사회적인 책무이기도 할 것이다.

티아라 사태와 왕따를 부추기는 사회

 

한 아이돌 걸 그룹의 문제로 일단락 될 수 있었던 티아라 사태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놓여진 뿌리 깊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드러난다. 그것은 ‘무한 경쟁사회’다. 누구나 자유롭게 경쟁하게 내버려두는 것을 기치로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우리 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무한 경쟁’에 접어들었다. 경쟁사회는 일련의 암묵적인 순위를 대중들의 몸에 각인시켜 놓음으로써 자체적으로 통제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티아라'(사진출처:코어콘텐츠미디어)

경쟁사회에서는 승리자가 아니면 패배자(우리가 흔히 루저라 부르며 민감해 하는)가 된다. 여기서 승리자가 사회의 다수를 지향한다면 패배자는 소수가 되어버린다. 이 다수와 소수를 나누는 사고방식은 왕따가 생겨나는 핵심적인 구조다. 다수에 적응하지 못하면 소수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이는 왕따가 되기 쉽다. 왕따라는 존재는 그래서 자신들이 소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종의 희생양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인간이 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그런 행동조차 하게 되는 것은 그 왕따와 동류가 되는 것에 대한 사회적인 공포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잘 말해준다. 결국 왕따 문제의 발원지는 경쟁사회라는 통제 시스템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놓고 보면 티아라 같은 아이돌 그룹들(이건 비단 아이돌 그룹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네 아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이 처한 상황이 이 시스템과 얼마나 잘 맞아 떨어지는가를 알 수 있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팀을 이루고, 그 팀은 언제든지 멤버를 교체할 수도 있다. 따라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면 퇴출된다는 공포는 많은 관계의 문제를 만들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소한 의견 충돌 같이 소소하게 나타날 수도 있지만 왕따 같이 심각한 양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사실 실체가 드러나지도 않은 왕따설로 문제가 일파만파 커져버렸지만 티아라 사태의 핵심적인 문제는 왕따설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다. 그 핵심은 이 기획사의 매니지먼트의 문제다. 이런 소문이 나올 정도라면 어느 정도의 다툼이나 갈등이 있었다는 얘기인데 기획사는 과연 거기에 합당한 매니지먼트를 했던 것일까. 살인적인 스케줄과 적응하지 못하면 퇴출시키는 그런 시스템 속에서 화영이나 다른 티아라 멤버는 모두 피해자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어린 아이들이 그 힘겨운 스케줄 속에서 부상당한 화영에게 그래도 무대에 오르자며 ‘의지’ 운운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그들은 왜 소속사에 좀 더 즐겁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요구하지 못했던 걸까.

 

물론 스스로도 성공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강자로 존재하는 소속사의 압박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시스템을 만들고 제시하는 자가 늘 강자인 법이다. 그래서 게임은 늘 룰을 만드는 이가 이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에도 착각은 있다. 제 아무리 소모품처럼 멤버를 갈아치우며 그 통제를 통해 성장 가속도를 유지하려 한다고 해도 이들은 결국 사람이고, 그들이 하는 일은 그래도 음악이라는 창의적인 작업이라는 점이다. 과거에는 소속사가 주도권을 가지고 팀을 만들어 내보내면 대중들은 그것을 소비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지금은 거꾸로 대중들이 주도권을 쥔 시대다. 대중음악이라는 행복 산업에서 행복하지 않은 그네들이 제대로 행복을 전파할 수 있을까. 또 대중들은 그 가짜 행복에 기꺼이 주머니를 열 것인가.

 

티아라 사태는 본래 사건보다 일파만파 커진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우리 사회가 굴러가는 무한 경쟁 시스템의 뒤안길에 놓여진 그림자를 끄집어내 보여주었다. 기획사의 멤버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제대로 된 매니지먼트가 필요하듯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역시 경쟁만이 아니라 즐거워서 일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관리 시스템이 요구된다.

 

학교에서 툭하면 벌어지는 왕따 사건들이나 그로 인한 엄청난 결과들을 그저 아이들의 문제(누군가는 가해자고 누군가는 피해자인)처럼 치부한다면 실제 이 가혹할 정도로 비정한 경쟁 시스템이라는 진짜 가해자는 가려지고 말 것이다. 티아라 사태가 왕따 문제로 또 사회 문제로까지 비화된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우리 사회의 이런 핵심적인 문제들이 분노의 형태로 그 사태에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그저 티아라의 문제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이제 표면화된 사회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거기에 맞는 근본적인 대책을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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