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이 담아낸, 청춘과 부조리 그리고 예술

(본문 중에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저는 뭐를 써야 될 지 모르겠어요. 세상은 수수께끼 같거든요.” 문득 벤(스티븐 연)이 무슨 소설을 쓰고 있냐고 묻자 종수(유아인)는 그렇게 답한다. 그는 알 수 없는 혼돈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느끼는 혼돈과 분노에 맞닿아 있다. 혼란스럽고 화가 나지만 도대체 왜 그런지는 잘 보이지 않는 안개 자욱한 길을 헤매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이 청춘들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과 그 감정을 만들어내는 부조리한 세상,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술은 얼마나 가녀리면서도 또한 희망을 주는 것인가를 담았다.

<버닝>의 첫 장면은 트럭으로 보이는 차 뒤에서 조금씩 피어나오는 담배연기로 시작한다. 누군가 그 뒤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 다만 한숨처럼 피어나는 담배연기가 그 존재를 증명하는 듯한 종수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트럭에서 짐을 꺼내들고 인파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시장통으로 보이는 그 곳에서 그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 그 곳에서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다. 바로 한 가게 앞에서 춤을 추며 호객을 하고 있는 나레이터 모델 해미(전종서)다. 어린 시절 종수와 파주의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해미. 그들은 그렇게 만나 그날 밤 함께 술을 마신다.

술자리에서 해미는 이야기를 하며 손으로 귤을 까먹는 듯한 마임 동작을 해보인다. 그냥 재미로 배우고 있다는 마임. 해미는 마임을 잘 하려면,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귤이 없음을 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건 해미라는 존재와 그가 살아가는 삶을 압축해서 설명한다. 그는 가진 게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고, 카드빚에 쫓겨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는 아프리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그 곳에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를 춤추는 원주민을 만나겠다는 것. ‘리틀 헝거’가 배고픈 자들이라면,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대한 허기를 느끼는 자들이란다. 그는 ‘리틀 헝거’지만 ‘그레이트 헝거’를 추구한다.

아프리카로 떠나 집이 빈 동안 해미는 종수에게 보일러실에 버려져 ‘보일이’라고 부르며 그 집에서 키우고 있다는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달라고 부탁한다. 상처가 깊이 방에 있다고는 하지만 모습을 보이지 않는 보일이. 그리고 북향이라 하루에 단 한 번 남산타워에 반사되어 빛이 들어오는 그 방은 모두 해미를 또 종수를 닮았다. 존재가 있지만 존재가 보이지 않고, 마치 청춘이기에 없는 희망을 꿈꾸긴 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손에 쥐지는 못하는 그들이다.

해미가 없는 사이 그 집에서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 보일이에게 밥을 주는 종수의 헛되어 보이지만 희망을 꿈꾸는 그 손짓은 그래서 처연하다. 아무도 없는 그 집에서 저 편에 거대하게 압도하듯 발기한 채 서 있는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자위를 하는 종수의 모습은 허망하다. 해미나 보일이처럼 그도 방 같은 세상에 누군가 던져주는 밥 한 끼가 없어 배고픈 이들이지만, 청춘이라는 아직도 한참을 더 살아야 하는 나이에 삶의 의미에 대한 헛된 허기를 느낀다. 그 간극은 너무나 커서 아직 세상의 이 비정함과 부조리함을 온통 이해하지 못한 이들을 알 수 없는 분노의 불길로 들끓게 만든다.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불꽃이 그 속에서 타들어간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해미가 거기서 만난 벤(스티븐 연)을 알게 되면서 종수는 점점 더 세상이 수수께끼 같다고 여긴다.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도 않고 번듯한 직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지만 포르쉐를 끌고 다니며 럭셔리한 집에서 비슷한 동류의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하고 클럽에서 춤을 추는 그들의 삶은, 북한의 대남선전방송이 들려오는 파주에서 소똥을 치우며 법정에서 선고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집나가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자신의 빚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를 마주하는 종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나라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다”는 말은 그래서 이 청춘이 마주하고 있는 단단한 세상의 벽을 실감하게 만든다.

그 파주에 있는 종수의 집을 어느 날 해미와 함께 찾아온 벤은 그 포르쉐가 주차되어 있는 냄새나는 집 마당에서 와인을 마시며 지는 해를 바라보는 언발란스한 풍경을 보여준다. 문득 대마초를 꺼내 함께 피운 벤은 자신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엄염한 범법행위가 아니냐고 종수는 말하지만, 벤은 그건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 어떤 선악의 의미가 들어있는 행위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곳에 온 것도 비닐하우스 하나를 태우기 위한 사전답사라고 말한다.

해미는 문득 그 파주에 있었던 자신의 집과 그 집 근처에 있던 우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은 사라져버렸지만 그 우물에 자신이 빠졌었고, 종수가 자신을 발견해 구해줬었다는 것. 종수는 그런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는다. 마치 지금 해미가 벤을 만나 처한 사정이 바로 그 우물에 빠진 상황과 같다고 느끼며 그를 자신이 구해냈으면 하는 욕망을 갖게 된다.

벤이 그렇게 말하고 떠난 후, 종수는 비닐하우스에 그리고 사라진 우물에 집착한다. 버려진 비닐하우스 하나가 불타버려도 경찰이나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그 말은 마치 종수 자신의 ‘있지만 없는 존재’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사라진 우물의 존재가 원래 없던 것이 아니라, 본래는 있었던 것이라는 걸 발견하는 일이 그 ‘있지만 없는 존재’인 자신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 날 벤과 함께 온 해미가 술에 취해 대마초에 취해 마당에서 지는 노을을 보며 상의를 벗고 저편 날아가는 철새들처럼 춤을 췄을 때, 그것은 도취된 해미에게는 하나의 마임 같은 ‘행위예술’로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음악이 사라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에 깨어난 해미는 그 갑작스런 현실에 당혹스러워하고 슬퍼한다. ‘없는 것을 잊으며’ 자신은 삶의 의미에 허기를 느끼는 사람이라 치부하며 살아온 그에게 갑자기 현실이 닥쳐온다. 사실은 그저 배가 고픈 청춘일 뿐이라는 것. 그런 그에게 종수는 아픈 말을 한다. 그렇게 옷을 마구 벗는 건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그 아픈 현실을 꺼내 놓은 후 종수 앞에서 해미는 마치 있지만 없는 보일이처럼 사라져버린다. 그것이 벤에 의한 것이라 의심하는 종수는 그를 미행하며 해미를 애타게 찾는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해미는 나타나지 않고, 대신 해미 같은 또 다른 배고픈 청춘이 벤의 옆에 나타나 해미가 걸어갔던 그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종수는 목격하게 된다.

가진 자들은 있는 것을 마치 제물처럼 즐기며 살아가고, 못 가진 자들은 없는 것을 잊으며 마치 있는 것처럼 살아가려 몸부림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알 수 없는 분노를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버닝>은 날카롭게도 우리네 청춘들이 처하고 있는 ‘없지만 있는 것처럼’ 치부하며 버텨내는 그 안간힘을 포착해낸다. 유아인이 당혹스러운 그 얼굴로 표현해내는 청춘의 초상이 못내 아프게 다가온다.

충격적인 엔딩은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 아니면 이 종수라는 인물이 또한 ‘없지만 있는 것처럼’ 그려낸 상상 혹은 소설의 일부분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엔딩이 담고 있는 예술의 허망함 혹은 그나마 존재하는 희망의 양면은 역시 이창동 감독다운 예술에 대한 깊이있는 시각을 드러낸다. 예술은 ‘없지만 있는 것처럼’ 하는 행위이고, 그래서 허망해보이지만 때론 그것이 세상을 인식하게 해주고 그래서 변화하게 해줄 수도 있는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이다. <버닝>이라는 영화가 그러하듯이.(사진:영화 '버닝')

‘시카고’, 시청률 아쉬웠어도 더할 나위 없는 수작인 이유

tvN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가 종영했다. 물론 시청률은 만족스러울만한 수치가 아니다. <시카고 타자기>는 한때 1%대 시청률까지 떨어지기도 했지만 평균적으로 2% 시청률대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단순히 시청률만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작품의 완성도를 두고 볼 때 <시카고 타자기>는 최근 방영된 어떤 작품보다 높은 수준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타자기에 깃든 유령 유진오(고경표), 그리고 그 유령이 작가 한세주(유아인)와 함께 써나가는 소설, ‘시카고 타자기’. 그리고 그들 사이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지와 사랑으로서 운명처럼 들어와 있는 전설(임수정). 일제강점기라는 전생의 이야기가 2017년 현생의 이야기와 교차되며 어떻게 역사와 기억이 조응하는가를 ‘소설’이라는 틀로 보여준 진수완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 게다가 더할 나위 없는 연기로 이 상상의 작품에 생명력을 부여한 유아인, 임수정, 고경표라는 배우들의 아우라까지. <시카고 타자기>는 한 마디로 더할 나위 없는 수작이었다. 

<시카고 타자기>는 한 베스트셀러 작가의 소설 집필기로 시작하지만 그 이야기의 끝을 보면 놀랍게도 일제강점기에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한 청춘들에 보내는 헌사를 담고 있다. 그 소설이 사실은 전생에 독립투사들이었던 자신들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이었던 것. 당시 조국을 위해 싸우다 비극적인 끝을 맞이했던 그들은 통일된 조국의 후생을 기약했고, 그렇게 환생한 이들이 잊혀져 가는 당시 청춘들을 기억해나간다는 설정은 지금 현재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시카고 타자기>는 그래서 일제강점기라는 역사를 현재의 관점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역사적 시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들의 아프고 찬란했던 사랑 이야기까지 담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판타지 설정의 이야기들은 많았지만, 이처럼 재미적 요소만큼 의미 또한 남달랐던 작품도 드물 것이다. 

무엇보다 <시카고 타자기>의 완성도가 높다고 여겨진 건, 이 판타지가 그저 재미를 위한 인위적 설정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아가 문학적 상징으로까지 이해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작품은 그 안에 전생을 기억해나가고, 유령과 대화하고 교감하는 판타지를 담고 있지만, 그것은 ‘소설’을 쓰는 작가의 상상력을 상징화하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었다. 즉 이 작품 전체가 한세주라는 작가가 일제강점기의 청춘들을 상상하며 받은 영감으로 쓴 소설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카고 타자기’라는 소설을 끝내고 그 소설 속에 유진오를 영원히 봉인시킨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흥미롭다. 소설가들이 자신의 작품 속 인물을 마치 실제 인물처럼 몰입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영감을 주는 인물이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소설가 같은 창작자들에게는 마치 신비 체험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일이기도 하다. 

작품은 전생과 현생을 넘나들었던 것처럼, 새드엔딩과 해피엔딩을 동시에 묶어냈다. 즉 전생의 삶들은 결국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이었지만, 그 비극은 현생의 삶으로 이어지며 궁극적인 해피엔딩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카고 타자기>의 종영은 그 느낌이 독특하다. 새드엔딩과 해피엔딩이 겹쳐져 어딘지 쓸쓸하면서도 위로를 받는 듯한 행복감 또한 그 안에 담겨진다.

되돌아보면 현생과 전생을 넘나드는 청춘 멜로에 소설과 현실을 뛰어넘고, 판타지와 실제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내면서 하나의 굵직한 주제의식을 잃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인 <시카고 타자기>라는 드라마의 탄생은 실로 놀라운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전생과 현생의 인물들을 넘나들며 사실상 1인2역을 해낸 연기자들의 공적 역시 박수 받을 만하다. 시청률은 아쉬웠지만 그것만으로 평가받는 건 더욱 아쉬운 작품이 바로 <시카고 타자기>였다.

‘시카고 타자기’ 유아인이 그려낸 또 다른 청춘의 초상

일제강점기, 거사를 앞두고 청년들은 저마다 해방된 조국에서 꿈꾸는 행복에 대해 말한다. 일제에 빼앗긴 논마지기를 찾아 시골에 계신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게 행복이라고 말하고, 순사가 꿈인 아들이 일본의 순사가 아니라 조선의 경찰이 되는 게 소원이라 말한다. 누군가는 어릴 적 첫사랑을 만나 신나게 연애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고, 이제 막 딸아이의 아빠가 된 청춘은 그렇기 때문에 하루빨리 해방된 조국이 되어야 하기에 거사를 위해 달려왔다고 말한다.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tvN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의 전생으로 그려지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청춘들이 말하는 해방된 조국에서 꾸는 꿈은 실로 너무나 소소하고 조촐하다. 목숨을 거는 그들이지만 꿈이란 것들은 대부분 그저 평범한 일상을 자유롭게 누리고 싶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보는 이 청년조직의 수장 휘영(유아인)은 거사를 앞두고 마음이 착잡해진다. 그들을 사지로 내보내야 하고 그들 중 대부분은 돌아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휘영의 동지인 신율(고경표)이 그에게 묻는다. 해방된 조국에서 아니 다시 환생해 태어난다면 무엇이 하고 싶냐고. 휘영은 말한다. “낚시나 함께 갈까?” 물론 그건 그의 진짜 소원이 아니다. 그는 수연(임수정) 앞에서도 속내를 숨긴다.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무수한 동지들의 수장으로서 그는 그런 사적인 감정이 사치라 생각한다. 그런 그의 냉랭함 앞에서 수연 역시 마음을 접었다고 말한다. 조국을 상대로 투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고. 

대신 그녀는 다음 생을 이야기한다. 해방된 조국에 다시 태어나면 그때는 자신을 여자로 봐달라고. “괜히 망설이지 말고. 철벽치지도 말고. 거짓말 하지도 말고 혼자 아프지도 말고 나한테 솔직하게 다 말해 달라고요. 이번 생에 못해준 거 다 해준다고 약속해.” 자꾸만 다음 생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에 휘영은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음의 표현을 수장의 목소리로 말한다. “꼭 살아 돌아와. 수장의 명령이야.”

거사를 앞둔 이 청춘들이 현생에서의 꿈과 소원이 아니라 다음 생에서의 그것을 얘기하는 부분은 아마도 <시카고 타자기>가 전생과 현생을 넘나드는 판타지로 그려지게 된 모티브가 아니었을까. 그들은 당장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그 생에서의 찬란한 청춘의 행복을 유예하고 있었다. 그저 옆에 있는 사람과 마음껏 사랑하고 싶은 마음마저 철벽을 치며 살아가야 했고 그렇게 산화해야 했던 청춘들. 그들은 그래서 다음 생 해방된 조국에서 행복을 맞이했을까. <시카고 타자기>는 이 전생과 현생으로 이어지는 두 부류의 청춘들의 현실을 더듬는다. 

<시카고 타자기>라는 낯선 제목은 그래서 일제강점기의 휘영 같은 청춘들을 설명하는 자화상처럼 느껴진다. 마치 타자치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었다는 톰프슨 기관총의 별칭으로 불린 ‘시카고 타자기’. 글을 쓰는 지식인이지만 그 글은 또한 톰프슨 기관총 같은 무장투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글과 총을 동시에 들었어야 했던 당대 청춘들의 초상이 그래서 ‘시카고 타자기’가 아닐까. 

그리고 이 일제강점기 청춘들이 해방된 조국의 다음 생에서 했으면 했던 소망과 꿈들은 고스란히 현생의 청춘들의 삶을 되묻게 한다. 과연 지금의 청춘들은 그들이 유예했던 그 소망과 꿈들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어쩌면 조국은 해방되었어도 여전히 그 현실의 많은 무게들을 청춘들에게 부담지운 채, 그 현재의 행복들을 유예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카르페 디엠’이라는 당대의 카페 이름에 담긴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는 의미는 그래서 그 때나 지금이나 슬픈 정조를 담고 있다. 미래를 꿈꿀 수 없기에 지금 현 순간이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전생의 독립운동을 하던 청춘인 휘영과 현생의 베스트셀러 소설가인 한세주라는 두 청춘을 연기하는 배우가 유아인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유아인은 유독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청춘의 자화상을 그려냈던 배우다. <밀회>에서의 이선재라는 청춘이 그랬고, 영화 <사도>에서의 사도세자라는 청춘이 그랬으며, <육룡이 나르샤>에서의 이방원이란 청춘도 그랬다. 그래서 <시카고 타자기>에서 유아인이 그려내는 전생과 현생의 두 청춘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현재를 유예하지 않고 미래를 마음껏 꿈꿀 수 있는 그런 청춘들의 시대는 언제나 올까.

‘시카고 타자기’에는 먼저 간 청춘들의 넋이 어른거린다

“니가 틀렸어. 너 때문에 내가 죽을 뻔 한 게 아니라 내가 죽을 뻔 한 위기의 순간마다 니가 날 살려줬던 거야. 니가 없었으면 나는 사제 총에 맞아죽고, 차 사고로 죽고, 오토바이에 치어서 죽었을 지도 몰라. 당연히 작가로서의 생명도 끝났을 지도 모르고. 우리가 만난 건 우연이 아닐 거라고 했잖아. 내가. 그 이유 이제 알 것 같아. 전생에 못 지켰으니까. 이번 생에 지키라고. 그리고 또 아마도 전생에 내가 너를 사랑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닫았던 것 같은데 내가. 해방된 조국에서 만나 마음껏 연애하라고. 죗값이 아냐. 면죄야. 그래서 내가 오늘 조국을 위해 뭔 짓 좀 해보려구.”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tvN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에서 한세주(유아인)가 전설(임수정)에게 하는 이 말은 자못 비장하고 절절하다. 전생과 후생으로 얽힌 인연. 아마도 자신이 전생에 그를 쐈을 거라는 자책감으로 인해 현생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 역시 그 악연이 이어지고 있는 거라 믿는 전설. 하지만 그녀에게 한세주는 그것이 악연이 아니라 인연이고, 그 때 지켜주지 못한 걸 이번 생에 지키라는 뜻이며 따라서 죗값이 아니라 면죄라고 말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그들은 죽음을 맞이했다. 전설이 보게 되는 전생의 장면들은 자신이 그를 향해 총을 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 그게 어떻게 된 것인지는 나중에 밝혀질 것이지만, 생각해보면 그 비극적인 사건은 그들의 의지에 의해 비롯됐다기보다는 누군가의 조작이나 함정에 의해 빚어진 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모두 독립운동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었고, 그래서 사적인 사랑의 감정조차 그 대의 앞에 접어두고 있었다. 

그러니 한세주와 전설, 그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당시 밀정으로 활동했던 백태민(곽시양)이나 전생에 카르페디엠의 마담이었던 현 전설의 엄마(전미선)와 관련된 어떤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비극적인 삶은 그래서 일제강점기 그 시대의 총칼에 맞서 싸우다 스러져간 이름 없는 청춘들을 떠올리게 한다. 한세주와 전설의 멜로가 그저 현대식 사랑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훨씬 절절해지고 비장해지는 이유는 이처럼 전생으로서 일제강점기의 청춘들의 넋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즈음에서 한세주와 가까워진 걸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전설이 말하자 친구인 방진(양진성)이 독립운동을 한 이들은 오히려 더 어렵게 살게 된 현실을 꼬집으며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고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은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이 떵떵 거리며 살고 있지만 젊은 청춘을 희생해 독립운동을 하던 그들은 곤궁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전생에 이어 후생까지도 죗값을 받고 있다고 자기 탓으로 돌리는 삶이라니. 

이러한 시대적 안타까움과 비장함이 담겨있기 때문일까. <시카고 타자기>에 깔리는 OST 중 SG워너비가 부르는 ‘우리의 얘기를 쓰겠소’라는 곡은 마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듣는 것처럼 듣는 이들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여기 우리의 얘기를 쓰겠소. 가끔 그대는 먼지를 털어 읽어주오.’로 시작하는 그 목소리는 그대로 <시카고 타자기>라는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를 말해주는 듯하다.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못한 채 청춘의 그 어떤 즐거움도 유예하고 싸우다 스러져간 이들의 이야기를 다시 쓰고 기억해달라는 것. 심지어 전생과 후생을 이어 붙여서라도, 나아가 전생에 죽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청춘의 유령의 입을 통해서라도 그 먼지 덮인 얘기를 다시금 할 것이라고. 그러니 그 얘기를 들어달라고 <시카고 타자기>는 말하고 있다. 그것이 한세주와 전설이 엮어가는 사랑이야기가 특별한 무게감으로 가슴에 와닿는 이유다.

‘시카고 타자기’, 전생과 현생으로 그려낸 역사의 기억, 기록

과연 일제강점기 경성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tvN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 이야기의 관심은 온통 이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독립운동을 하는 청년단체의 수장 휘영(유아인)과 그의 절친 신율(고경표) 그리고 그 신율에 의해 저격수로 키워진 수현(임수정)은 알 수 없는 인연의 고리로 묶여져 있다.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수현은 휘영을 그리고 신율은 수현을 사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수현이 휘영과 신율 중 누군가에 총을 쏘았다.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이 전생의 인연은 현생으로 이어져 수현은 전설(임수정)이 되어 베스트셀러 작가 세주(유아인)와 다시 사랑으로 얽히고 갑자기 유령이 되어 나타난 신율(현생에서는 유진오, 고경표)은 세주와 함께 그 전생의 기억들을 소설로 써나간다. 한세주와 유진오가 소설로 과거를 기억하고 기록한다면, 전설은 그 소설을 읽으며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다. 

사실 전생과 현생을 잇는 사랑이야기를 할 것이었다면 <시카고 타자기>가 굳이 일제강점기까지 시간을 되돌려 그 때를 전생의 시점으로 삼을 이유는 별로 없었을 게다. 그리고 그들이 독립운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비극적인 어떤 사건을 겪었다는 것을 드라마의 중요한 모티브로 삼을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 어떤 식으로든 <시카고 타자기>의 이야기가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시점과 당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시간의 장벽 같은 것들이 있다. 그래서 간헐적으로 전생의 부분들이 떠오르지만 그 전부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유령인 유진오 역시 그들 인연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걸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다. 시간과 기억이 만들어내는 장벽. 그래서 이들은 그 기억을 되찾아가는 여행을 소설이라는 방법의 틀을 통해 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시카고 타자기>의 초반 이야기들은 베스트셀러 작가 한세주를 중심으로 그가 겪는 창작의 고통과 가족인 줄 알았던 백태민(곽시양) 가족으로부터의 배신 같은 개인사 그리고 무엇보다 유령이 깃든 시카고 타자기와 그가 얽히는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전생과 연관된 현생의 이야기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전개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것이 이 본격적인 전생과 현생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일종의 포석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시카고 타자기>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전생과 현생, 그것도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지점을 끌어온 것일까. 이런 질문을 통해 떠오르는 건, 이 드라마가 역사라는 것이 어떻게 기억되고 기록되는가를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전생처럼 지워져버린 일제강점기의 기억들. 그래서 사료들이 남아 있다고 해도 교과서에 박제된 것이거나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것들로 채워져 있는 기록들. <시카고 타자기>는 그것을 소설 혹은 드라마라는 틀을 통해 생생한 살아있는 역사로 담아내려는 노력 자체를 이야기의 모티브로 쓰고 있다. 

그것은 한세주와 전설 그리고 유진오가 얽혀진 개인적인 사랑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우리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기억을 유예시킨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역사적인 시간들이었으면 전생처럼 지워버린 기억으로나 남게 되었을까. 게다가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당대의 권력과 재력을 가진 이들이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져왔다는 아픈 현실은 당대의 역사가 우리 손으로 왜곡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전설처럼 전생을 기억하는 그녀의 어머니는 20년 만에 그녀 앞에 나타나 세주와 엮여 전생의 비극을 반복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자 전설은 자신은 “어머니처럼 전생이 두려워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것을 직시하고 극복하겠다는 뜻이다. 세주와 유진오가 기억을 되새겨 다시 쓰는 일제강점기의 기록과 그것을 읽으며 전생의 잊혀진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가는 전설의 이야기.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역사란 무엇인가를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출생의 비밀 시대는 갔어도, 관계의 비밀은 계속

도대체 저 관계는 본래 무엇이었을까. OCN 주말드라마 <터널>에서 스릴러만큼 관심을 집중시키는 건 박광호(최진혁)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 간의 관계다. 30년 시간의 터널을 통과해 현재로 온 박광호는 제일 먼저 과거 화양경찰서의 막내였던 전성식(조희봉)을 만난다. 현재 팀장인 전성식이 새로 온 막내 박광호가 과거 자신이 존경해왔던 선임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과정은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따뜻한 웃음을 짓게 만든 이야기였다. 

'터널(사진출처:OCN)'

하지만 관계의 비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박광호와 파트너가 된 김선재(윤현민)가 과거 자신이 뒤쫓던 연쇄살인범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여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또 범죄심리학자인 신재이(이유영)가 바로 박광호의 아내가 남긴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연쇄살인범 정호영(허성태)에 의해 살해될 위기에 처했을 때 신재이가 분 호각으로 박광호는 그녀가 자신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장면은 아마 부녀지간이라는 설정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극적인 상황으로 연출되긴 어려웠을 게다. 

과거 이른바 막장드라마의 공식으로 ‘출생의 비밀’ 코드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었던 건 핏줄이라는 관계로 얽혀져 다시 만나는 당사자들의 상황이 그만큼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타임리프나 전생, 판타지가 접목된 장르물들은 이 ‘출생의 비밀’ 코드는 세련되게 변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관계의 비밀’이다. 

종영한 드라마 tvN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는 현재의 도깨비 김신(공유)과 저승사자(이동욱)의 브로맨스 관계가 과거에는 연원관계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극적 갈등을 만들었다. 저승사자가 현재 사랑에 빠진 써니(유인나)가 과거 그가 죽게 한 왕비였고 바로 김신의 여동생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갈등이 전개됐던 것. 전생과 후생 사이에 놓여진 차단막을 활용함으로써 이 드라마는 그 관계의 비밀을 통한 극적 전개를 추구했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tvN <시카고 타자기> 역시 이 관계의 비밀 코드를 활용한다. 베스트셀러 작가 한세주(유아인)와 그에게 나타난 유령작가 유진오(고경표) 그리고 뮤즈 전설(임수정)의 관계는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한 그들의 관계들이 병치되면서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만든다. 어떤 이유에 의해 유진오가 환생하지 못하고 타자기의 유령으로 빙의되어 살아가게 된 사실은 일제강점기 이들의 관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지는 것. 

타임리프, 전생, 판타지를 동원한 이들 작품들은 모두 시간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러한 ‘관계의 비밀’ 코드가 제대로 작동하게 된다. 물론 그 기저에 있는 건 우리가 현재 만나는 모든 관계들이 그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전생이든 과거이든 어떤 인연의 고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설’이다. 

이 ‘관계의 비밀’ 코드는 저 ‘출생의 비밀’처럼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장르물에 익숙하지 않은 시청자들까지 끌어들일 수 있는 장치가 되어준다. 또한 ‘출생의 비밀’ 코드처럼 자극을 위한 자극으로만 흘러가지 않고 장르물의 이야기 전개에 일종의 양념 역할을 해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관계의 비밀’은 한때 가족주의 시대에 가족에 집착하며 만들어진 ‘출생의 비밀’ 코드를 가족 바깥으로까지 확장해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특히 어떤 이유에 의해 ‘헤어졌던 이들이 다시 만나는 이야기’는 강렬하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산’의 경험을 뿌리 깊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가족주의에 특히 집착하며 살아왔던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출생의 비밀’ 시대는 지나갔지만 ‘관계의 비밀’이라는 새로운 코드로 그 힘은 여전히 장르물 속으로까지 파고들고 있다.

 '시카고 타자기', 임수정에 더 집중해야 산다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 초라해져가는 시청률이다. 2.4%(닐슨 코리아)로 시작한 tvN <시카고 타자기>. <해를 품은 달>과 <킬미 힐미>의 진수완 작가의 신작인데다, 유아인이 출연했다는 소식만으로도 기대감은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 수준이었다. 하지만 2회에 잠깐 2.8% 시청률로 정점을 찍은 후 줄곧 시청률이 빠지더니 5회에는 1.9%까지 떨어졌다.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작품의 완성도나 유아인, 임수정, 고경표의 연기 모두 명불허전인 건 사실이다. 특히 이 작품은 소설이라는 지금껏 드라마 소재로는 잘 다뤄지지 않은 세계를 담는 실험을 하고 있다. 1920년대 경성과 현재를 넘나들고 타자기와 회중시계가 일종의 판타지 장치처럼 활용되며 작가인 한세주(유아인)와 진짜 유령인 유령작가 유진오(고경표)라는 존재의 관계는 상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마저도 흐릿하게 만들고 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가상과 현실을 말 그대로 ‘종횡무진’하는 <시카고 타자기>는 그래서 굉장한 야심작이다. 그 안에는 스릴러에 판타지 로맨스 같은 다양한 장르들의 편린이 녹아 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일반 시청자들에게 이 드라마는 ‘종을 잡을 수 없는’ 드라마처럼 다가온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하는 그 목표의식이 5회가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어서다.

이건 5회에 이르러 유진오가 그저 유령작가가 아니라 실제 유령이었다는 사실을 깜짝 밝히는 반전을 보여주는 그 장면에 잘 드러나 있다. 드라마는 지나치게 반전에 집착하며 어떤 이야기로 튈지 알 수 없게 현재 상황을 숨기고 있지만 시청자들은 그것이 궁금하기보다는 다소 복잡하고 나아가 답답하게 여겨진다. 드라마에서 반전 장치란 터트릴 때는 효과가 있지만 터지기 전까지 숨길 때는 이야기 전개의 원활한 흐름을 오히려 막아 시청자들을 답답하게 만들 수 있다. 

게다가 유진오가 유령일 거라는 추측은 이미 대부분 시청자들이 알고 있었던 사안이다. 이러니 반전의 효과는 줄어들고 대신 반전을 보이기 위해 그간 숨겨놓고 눌러놓았던 이야기 전개만 더 복잡하게 보이는 역효과가 생길 수밖에.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 시청자의 몰입 포인트를 드라마가 제대로 콕 집어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한세주라는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세워져 있지만 일반 대중들 입장에서 소설가가 겪는 창작의 고통이라는 지점은 그다지 큰 공감대를 만들지 못한다. 물론 창작자들에게는 이 드라마의 문제의식이 흥미롭게 다가올 테지만 말이다. 

대신 이 드라마에서 대중들이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인물은 바로 한세주의 뮤즈로 나타난 전설(임수정)이라는 평범 속에 비범을 숨기고 있는 인물이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지만 어째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는지’ 늘 하던 일이 어그러지는 그런 인물. 그러면서도 끝까지 한세주 작가의 초심을 믿고 신뢰함으로서 그를 진정한 창작자로 살게 하는 존재. 

한세주와 전설의 관계는 그래서 창작자와 독자의 관계가 지금 현재 어떻게 역전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과거의 창작자와 독자의 관계는 창작자에서 독자로 향하는 일방향적 힘이 더 우세했지만, 지금은 거꾸로 독자가 창작자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는 뮤즈가 되기도 한다는 것. 

<시카고 타자기>가 좋은 실험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렇다 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이 ‘몰입의 대상’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고 있어서라고 생각된다. 창작자의 고민은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시청자들이 관심을 갖는 사항은 아니다. 대신 시청자들이 더 주목하는 건 독자의 확장된 역할이 아닐까. 전설의 활약이 중요해진 이유다.

유아인, ‘시카고 타자기’라는 현실과 판타지의 미로를 읽는 법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판타지인가. 또 무엇이 소설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tvN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는 그 모호한 경계 사이에 놓여 있다. 슬럼프에 빠진 베스트셀러 작가 한세주(유아인), 어느 날 시카고에서 보게 된 미스터리한 느낌을 주는 타자기, 그 타자기를 배달하며 그와 가까워진 전설(임수정) 그리고 슬럼프에 빠진 그에게 전속출판사 대표 갈지석(조우진)이 은근히 제시한 유령작가 유진오(고경표). 이들의 이야기는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 걸쳐 있어 모호한 느낌을 준다.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슬럼프에 글이 써지지 않는 한세주가 마감 스트레스에 차를 몰고 나왔다가 사고를 당하고, 그를 마침 전설이 구해주는 이야기는 현실적인 느낌이 별로 없다. 그런 큰 사고를 당하고도 살아있는 게 놀라운 데 마침 그 시각에 하필이면 아버지 기일에 맞춰 별장을 찾은 전설이 그를 발견해 구해내는 것도 지나친 우연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러고 보면 한세주의 첫 번째 팬이었던 전설이 그 미스터리한 타자기를 다름 아닌 한세주에게 직접 배달하게 되는 상황도 우연이다. 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세주의 집 앞에서 커다란 개를 만나고 그 개로 인해 그의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전설의 이야기 역시 개연성이 아닌 우연적인 사건이다. 

드라마는 이런 우연적 사건들을 계속해서 터트리면서 코미디를 통해 그 우연을 봉합하려 한다. 즉 전설이 한세주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는 시퀀스는 개가 소설파일이 있는 USB를 먹는 상황이 만드는 왁자지껄하고 과장된 코미디로 처리되어 있다. 또 자동차 사고를 당한 한세주를 전설이 구해내는 장면 역시 영화 <미저리>의 패러디를 덧씌워 우스운 장면들로 연출된다. 

이런 우연적 사건들의 반복은 그 비현실성 때문에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현실인지 아니면 한세주의 판타지거나 상상 혹은 환상인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즉 한세주와 전설 사이에 계속 벌어지는 우연은 마치 오래 전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엮어진 운명처럼도 이해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슬럼프에 빠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작가 한세주의 환상이나 판타지처럼도 보인다. 

유령작가 유진오의 등장 또한 마찬가지다. 사고를 당해 마감을 할 수 없었던 한세주 대신 유진오가 ‘시카고 타자기’의 첫 회 소설을 내보내지만 한세주는 그것이 자신이 쓴 것이고 자신은 잠시 단기기억상실을 겪은 것이라 합리화한다. 물론 갈지석이 유령작가 이야기를 운운한 건 맞지만 그것이 실제 유진오를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호하다. 결국 한세주는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그 의문의 타자기로 소설을 쓰고 있는 유진오를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 역시 실제인지 아니면 한세주의 환상인지가 애매하다. 

그것은 한세주가 문득 문득 보게 되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전설과 유진오가 엮어가는 어떤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진짜 한세주와 전설 그리고 유진오가 과거부터 엮어진 어떤 운명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한세주의 환상이며 그가 지금 쓰고 있는 ‘시카고 타자기’의 소설 내용일 수도 있다. 

이런 현실과 환상 사이의 애매함은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안개처럼 시청자들의 시야를 가린다. 시청자들은 그 안개 속에서 호기심을 느끼며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상인가를 궁금해 하지만, 동시에 그 낯선 이야기의 미로 속에서 머리가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것은 <시카고 타자기>가 가진 신선함이면서 동시에 대중성의 한계로 지목된다. 

사실 이 안개 같은 흐릿한 미로의 끝이 어디로 갈지 전혀 종을 잡기가 어려운 드라마가 바로 <시카고 타자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애매모호한 걸음을 앞으로 나가게 하는 건 다름 아닌 한세주라는 인물과 그를 연기하는 유아인이라는 배우의 몰입 덕분이다. 사실 논리적으로 접근해 해석해보려 하면 이 드라마는 한없이 복잡한 미로를 들이밀지만, 한세주라는 캐릭터가 가진 심리적인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다. 

그가 갖고 있는 자존심과 막막함 그리고 창작에서 오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그럼에도 창작자이기에 어디서든 튀어나오는 뮤즈 같은 창작의 단초들. 그런 의식의 흐름들은 현실과 환상 사이에 걸쳐져 있지만 그래도 한세주라는 인물에게는 모든 것이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일 수 있으니.

‘시카고 타자기’, 이토록 문학적 상징들이 가득한 드라마라니

독특한 드라마. 아마도 tvN 새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런 표현이 적당하지 않을까. 총소리가 타자기 치는 소리를 닮았다고 해서 톰프슨 기관단총에 붙여진 별칭에서 따온 <시카고 타자기>라는 제목은 이 드라마가 어떤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일종의 문학적 해석이 가능한 상징들을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한세주(유아인)가 시카고에서 발견한 한 타자기는 그에게 기묘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타자기는 1930년대 경성에서 글을 쓰던 자신과 친구인지 동료인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인물 유진오(고경표), 그리고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듯한 전설(임수정)이 함께 어울렸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실제로 벌어졌던 일인지 아니면 한세주라는 작가의 상상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 타자기를 구입하려 하지만 팔지 않겠다던 주인은 타자기 스스로 자신을 한세주에게 보내달라고 찍어대는 기이한 광경에 놀라 결국 한세주에게 타자기를 보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타자기를 한세주에게 배달해주는 인물이 바로 전설이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우연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드라마가 이를 허용해주는 건 다름 아닌 한세주라는 작가의 존재 덕분이다.

이 모든 우연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은 어쩌면 한세주라는 상상력이 넘쳐나지만 지금은 무슨 일인지 슬럼프에 빠져들어 점점 미칠 지경이 되어가는 작가가 재구성한 일들처럼 보여진다. 그것이 한세주의 욕망에서 비롯된 상상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즉 슬럼프에 빠진 그에게 전설과 시카고에서 배달된 타자기는 마치 동격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뮤즈’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전설이 계속해서 한세주에게 날리는 메시지는 “삼류소설 쓰지 말고 위대한 작품을 쓰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세주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은 했지만 스스로에게 느끼는 어떤 자책감과 그래서 더 커지는 욕망의 목소리일 수 있다. 자신의 소설을 그대로 따라해 모방범죄를 저지른 스토커의 등장은 그를 더욱 혼란에 빠뜨린다. 자신의 소설은 마치 시카고 타자기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톰프슨 기관단총처럼 누군가에게 무시무시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심지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만큼. 

게다가 그 스토커가 한 말, 한세주가 자신에게 살인의 영감을 주었듯이 자신이 그에게 문학적 영감을 주었다는 말이 그에게는 날카로운 가시처럼 박힌다. 그래서 한세주에게는 너무나 상반된 영감을 제공하는 두 인물이 양편에 서 있는 셈이다. 하나는 장르 소설 속에서 누군가 살인을 저지르는 인물을 그려내게 하는 영감을 주는 스토커 같은 인물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삼류소설 쓰지 말고 위대한 작품을 쓰라며 영감을 주는 전설 같은 인물이다. 

소설이 잘 써지지 않는 한세주를 끝없이 몰아세우는 건 전속 출판사인 황금곰 대표 갈지석(조우진)이다. 그는 소설을 작품이 아닌 상품으로 본다. 소설의 성공을 게임과 영화 등등으로 멀티유즈하여 엄청난 비즈니스로 만들어내려 한다. 그래서 슬럼프에 빠진 한세주에게 유령작가를 쓰자는 은밀한 제안을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유진오다. 그런데 드라마는 유진오라는 인물을 진짜 유령 같은 미스터리한 존재로 연출하고 있다. 어쩌면 그 역시 한세주가 만들어낸 상상 속의 인물일 가능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시카고 타자기>는 이처럼 창작자와 뮤즈라는 영감을 주는 관계를 멜로와 미스터리 등의 장르를 통해 흥미롭게 풀어내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해지는 건 전적으로 한세주라는 작가가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많은 판타지적 설정들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용인되고 이해되는 지점은 다름 아닌 성공은 했지만 어딘지 불안하면서도 해소될 수 없는 욕망을 가진 작가 한세주의 상상일 수도 있다는 문학적 개연성이 있어서다. 

이처럼 문학적인 상징들로 가득 차 있는 작품을 대중적으로 설득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스러운 건 이런 상징들을 인물들의 밀고 당기는 멜로와 스릴러가 덧붙여진 장르적 긴장감 그리고 판타지까지 동원해 흥미진진하게 만들어내는 진수완 작가와 김철규 감독의 공력이 있고, 이를 제대로 받쳐주는 유아인이나 임수정, 고경표 같은 믿고 보는 배우들이 있다는 점이다. 

<시카고 타자기>는 지금껏 이런 형태의 드라마가 국내에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제작진에게도 또 시청자들에게도 결코 쉽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 독특함 안에서도 어떤 대중적인 공감을 이끌어가는 작가와 연출자 그리고 배우들의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바로 이런 도전적인 시도 그 자체에 이 드라마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유아인의 성장기를 보면 군 입대 의지가 읽힌다

유아인은 현역을 고집한다. 벌써 세 차례에 걸친 신체검사를 받았다. 이를 두고 ‘병역기피’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박사모 카페에서는 그가 촛불을 들었던 사실을 적시하며 그런 그가 ‘병역기피’를 하기 위해 수를 쓰고 있다는 비난의 글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과 사실은 정반대다. 유아인이 세 차례나 계속 재검을 받았던 건 기피가 아니라 현역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유아인(사진출처:UAA)'

유아인이 재심을 받게 된 건 지난 2013년 <깡철이> 촬영 중 오른쪽 어깨 근육이 파열되면서 갖게 된 골종양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2015년 12월 1차 신체검사에서 등급보류 판정을 받았고, 2016년 5월에 2차 보류, 지난해 12월에 3차 보류 판정을 받았다. 유아인은 오는 3월 4차 판정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유아인은 현역 복무에 대한 의지를 내비쳤다. 낭종이 양성이기 때문에 그리 심각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유아인은 의지가 확고하지만 병무청은 정상적으로 엄밀하게 검사와 판정을 해야 한다. 만일 그의 의지에만 기대 이를 허용했다가 입대 후 문제라도 생기면 그건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배우이고 특히나 지금은 세간의 이목이 더욱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병무청의 등급 판정은 공평해야 한다. 

사실 어찌 보면 유아인의 현역 입대 고집은 일반인들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일이다. 만일 일반인이 이런 몸의 이상을 분명히 갖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부분의 경우는 진단서를 첨부해 거기에 합당한 판정을 받으려 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몸을 위해서도 상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연예인들의 군 입대는 어느새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다. 군대를 갔다 왔는가 아닌가가 중요했던 차원을 넘어서 이제는 군대를 다녀와도 현역을 다녀왔는가 아닌가가 중요해졌다. 겉으로 보기에(연예인들은 직업상 여러 이미지를 실체처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굉장히 건강해 보이는데 현역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그것이 영원히 그 연예인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이러니 유아인이 아니라 어떤 전도 창창한 배우들이라고 해도 현역을 다녀오려 안간힘을 쓴다. 현빈부터 송중기, 유승호처럼 현역 복무가 더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 

결국 이렇게 재검에 재검을 거치는 시간은 유아인에게는 그 자체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언제 판정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덜컥 작품에 들어가기도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우로서는 많은 기회들을 놓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로서는 괴로울 수밖에 없는 시간인데, 그래서 빨리 결정이 나서 군 복무를 마치고 싶은 마음인데, 이것이 오히려 와전되어 엉뚱한 악플이 달리는 건 더더욱 힘겨운 일일 게다. 

유아인은 지금껏 매번 작품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온 배우다. 물론 대부분의 배우들도 그럴 것이다. 작품 경험이란 그 성공도 실패도 모두 배우를 성숙시키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유아인이 해왔던 일련의 선택들을 보면 무모할 정도로 도전적인 자세를 유지해왔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건 그와 함께 대결하듯 연기한 상대역들을 열거해보면 단박에 드러난다. 영화 <완득이>의 김윤석, <베테랑>의 황정민, <사도>의 송강호, 드라마 <밀회>의 김희애, <육룡이 나르샤>의 김명민... 기라성 같은 대선배 연기자들과 연기하며 자신의 색깔을 만들어왔다는 것. 

아마도 유아인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을 만들어낸 가장 큰 동인은 바로 이 상처를 입더라도, 또 깨지더라도 부딪쳐 자신을 성장시키겠다는 배우로서의 의지가 느껴졌던 점이 아닐까. 유아인에게 있어서 군 복무 역시 그 연장선일 것이다. 피하기보다는 부딪쳐서 자신을 또 한 차례 성장시키고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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