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소재는 독특한데 어째서 이리도 어색할까

비행기를 탄 강하람(고아라)이 갑자기 옆에 탄 아이의 뒤편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는 경악하고, 기내의 많은 승객들에게도 그림자들이 있는 걸 알고는 미친 듯이 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은 OCN <블랙>이라는 드라마에 시선을 집중시키게 하기에 충분했다. 죽음을 보는 소녀가 타인의 죽음을 알면서 막지 못하는 그 능력을 ‘저주’라고 여길 때 그의 앞에 나타난 형사 한무강(송승헌)이 그건 ‘축복’이라고 말해주는 장면에서는 이 두 사람이 누군가의 죽음을 막기 위해 함께 노력하며 벌어질 사건들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다. 

'블랙(사진출처:OCN)'

이처럼 <블랙>은 최근 들어 특히 많아진, 타임리프 같은 장르적 장치를 가진(타자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재의) 드라마의 참신한 변주처럼 다가왔다. 그 많은 타임리프들이 그러하고 최근 방영되고 있는 <당신이 잠든 사이에>가 예지몽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 ‘다가오는 죽음’을 막기 위한 노력을 담은 드라마들과는 또 다른 색깔을 가진 드라마. 게다가 한무강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죽은 줄 알았던 그가 다시 살아나는 대목은 향후 저승사자가 빙의된 그와 타인을 죽음을 보는 강하람과의 또 다른 모험담을 예고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살아난 한무강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속옷도 입지 않은 채 속이 다 보이는 환자복에 잠바 하나를 걸친 채 거리를 활보하는 장면은 그 장르적 애매함으로 인해 드라마가 만들어놓은 긴장감을 흩어 놓았다. 마치 속을 다 보이겠다는 듯 쩍벌을 하고 앉거나 롱코트만 걸친 채 바바리맨처럼 여자화장실에서 옷을 열어젖히는 장면은 코미디를 의도한 것이지만 죽음이라는 무게감을 가진 이 드라마의 장르적 긴장감과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즉 어느 정도의 유머는 괜찮을 법 했지만 이런 식의 ‘화장실 유머’가 가진 가벼움은 드라마의 성격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니 가뜩이나 연기로 해석하기 힘든 이 낯선 캐릭터 역시 어색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연기 변신을 의도한 듯 작정하고 뛰어든 모습이 역력한 송승헌이지만 그 장면들이 어떤 매력을 드러내기보다는 그저 망가진 느낌을 준 건 아쉬운 대목이다.

연기에 대한 아쉬움은 고아라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 비행기 신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 경악하고 오열하는 그 장면이 주는 충격파는 충분했지만, 그 후로 이 캐릭터는 너무 울거나 자책하는 장면들이 반복됐고, 때때로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응답하라 1994> 이후 늘 보였던 익숙한 모습들이 보였다. 이건 연기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캐릭터의 문제도 적지 않다. 한무강이나 강하람의 캐릭터가 시청자들이 몰입할 만큼 충분히 매력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저승사자가 등장하는 <블랙>이 독특한 소재의 드라마인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소재가 독특할수록 캐릭터는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면이 있어야 시청자들에게 그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코미디와 스릴러가 상생하지 못하고 있는 장르적 혼재와 매력적인 캐릭터가 제시되지 못해 어색하게 느껴지는 연기. <블랙>이라는 괜찮은 소재의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결해야할 숙제가 아닐까.

<낭만닥터 김사부>, 유연석과 강동주의 평행이론

 

잘 되는 드라마에는 좋은 캐릭터들이 많기 마련이고, 좋은 캐릭터들은 그걸 연기하는 연기자들의 잠재력을 깨워준다. SBS 월화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의 강동주라는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유연석이 그렇다. 드라마 속에서 강동주의 성장이 놀라운 것처럼, 그걸 연기해내는 유연석이란 연기자의 성장 또한 놀랍다.

 

'낭만닥터 김사부(사진출처:SBS)'

아버지가 수술을 받지 못한 채 돌아가신 것에 대해 울분을 터트리던 강동주라는 아이는 어느 새 훌쩍 자라 의사가 되었고, 힘이 있어야 진실도 밝힐 수 있다며 성공을 꿈꾸었다. 하지만 기회를 잡기 위해 무리하게 한 수술의 실패로 인해, 거대병원에서 돌담병원으로 좌천된 그는 김사부(한석규)를 만나게 되면서 의사의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된다.

 

<낭만닥터 김사부>가 갖고 있는 강동주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연기자 유연석이 걸어온 길과 맞닿는 면들이 있다. 유연석은 여러 작품을 해왔지만 그다지 빛을 보지는 못했었다. 그러다 tvN <응답하라 1994>에서 칠봉이 역할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꽃보다 청춘> 같은 예능에서는 확실한 존재감을 보였지만, <맨도롱또똣>에서는 그리 성공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다.

 

당시 유연석에게서 느껴지는 건 연기자로서의 욕심과 야심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연기자로서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지는 못했다. 그러던 그가 <낭만닥터 김사부>의 강동주 역할을 하게 되면서 조금 다른 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잘 보이지 않던 훨씬 복합적인 내면의 연기를 훨씬 자연스럽게 해나갔던 것.

 

그가 연기하는 강동주라는 인물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야심이 가득했던 자신이 돌담병원 같은 작은 병원에서 일한다는 것을 못내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지만, 김사부가 과거 자신이 의사의 길을 걷게 만들어준 계기를 주었던 부용주라는 걸 알고는 그의 밑에서 배우기로 결심한다. 물론 그 시작은 의술을 배우겠다는 욕망이 더 컸지만 차츰 강동주는 단지 의술이 아닌 진짜 의사의 길을 배워나간다.

 

그토록 인정욕구가 강하던 강동주가 신 회장(주현)의 수술을 앞두고 라이벌로 생각해 왔던 도인범(양세종)에게 함께 수술을 하자고 제안하는 대목은 이 인물의 성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거대병원과 싸워 이기기 위해 의사가 됐던 그가 온전히 환자의 생명을 우선적으로 바라보게 됐다는 것.

 

또한 그는 자신이 넘어야 할 마지막 산으로서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 또한 의사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받아들이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이 VIP 환자에게 밀려 수술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고 복수하려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지만, 그 수술 결정이 김사부가 내렸던 것이고 그것은 또한 VIP 환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로서의 당연한 결정이라는 걸 의사가 된 그 역시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의사가 된 입장에서 김사부의 결정이 옳았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아버지의 죽음이 야기하는 억울한 감정과 증오 같은 걸 어쩔 수 없어 하는 강동주의 복합적인 심리는 유연석의 연기를 통해 제대로 시청자들을 몰입시켰다. 그 아픔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그의 성장이 느껴졌다. 그는 드디어 진정한 의사로서 서게 되었던 것이다.

 

강동주가 김사부를 만나 진정한 의사가 되어가는 드라마 속 이야기는, 마치 유연석이 한석규라는 대선배를 만나 진정한 연기자가 되어가는 그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의 연기에서 어떤 안정감이 느껴지는 건 이 성장 과정을 제대로 거쳐 온 연기자가 얻은 결실일 게다. <낭만닥터 김사부>는 그래서 연기자 강동주에게는 진짜 사부 같은 작품으로 남지 않을까

<응사>20대, <응팔> 40대, 세대를 뛰어넘은 김성균

 

도대체 이런 연기가 어떻게 가능할까. tvN <응답하라1988>에서 김성균은 44년생으로 45세 아버지 역할을 연기한다. 현재 나이로 치면 72세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김성균은 실제로는 80년생으로 만 35세다. 무려 10살이 더 많은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것. 더 놀라운 건 <응답하라1994>에서 그는 75년생 스무 살의 김성균을 연기했다는 점이다. 20대부터 40대까지 세대를 훌쩍 뛰어넘는 연기라니. 도대체 이런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그의 자연스런 연기는 어떻게 가능한 걸까.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시도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물감 없이 소화해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응답하라1988>에서 라미란의 남편이자 정봉(안재홍)과 정환(류준열)의 아버지 역할로서 김성균의 연기는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처음에 그가 40대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웃음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노안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결코 우습지 않다. 연기로서 그 역할에 확실히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응답하라1988>에서의 김성균 역할이 기성의 아버지들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권위의식이 별로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연기한다. 입만 열면 유행어를 하려고 하는 그는 아들의 친구인 덕선(혜리)과도 반갑구만 반가워요-”를 하며 즐거워하는 어른이다. 어딘지 가벼움이 느껴지는 어른이지만 그렇다고 진중함이 없는 건 아니다. 어머니의 기일에 한없이 우울해지고 표현 없는 아들의 무뚝뚝함 앞에 쓸쓸함을 느끼는 아버지다.

 

아내인 라미란에게는 철딱서니 없는 남편이지만 의외로 닭살 행각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권위를 내보이기도 하는 그런 남편이기도 하다. 라미란의 실제 나이가 만 40세다. 그러니 김성균하고는 다섯 살 연상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어딘지 라미란에게 김성균이라는 남편은 누나에게 의지하는 동생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것은 이 독특한 부부 캐릭터와도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응답하라1994>에서 김성균은 무려 열 살이 넘게 어린 스무 살 청년 삼천포의 연기를 시도했다. 거기에도 역시 신원호 PD가 의도한 웃음의 코드가 들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시골에서 상경한 촌놈 캐릭터로서 노안의 김성균은 그 자체로 웃음을 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때도 역시 드라마가 진행되며 그의 이런 나이에 대한 이물감은 사라져갔다. 조윤진(도희)과의 러브 라인은 그래서 의외의 설렘을 만들어내며 그에게 포블리라는 닉네임을 선사하기도 했다.

 

<응답하라1994>의 포블리에서 <응답하라1988>은 이제 균블리라는 닉네임을 그에게 선사하고 있다. 10년 정도의 세월은 훌쩍 뛰어넘어, 처음에는 웃음을 주다가 차츰 그 캐릭터가 주는 새로운 매력에 빠져들게 만드는 힘. 그것은 아마도 김성균의 녹록치 않은 연기 공력에서 비롯되는 일일 게다. 20대부터 40대까지 넘나드는 연기가 어디 쉬울 수 있겠는가.

 

20대들에게는 친근함과 웃음을 주고, 40대들에게는 어떤 짠함까지 선사하는 가장의 모습은 김성균이 가진 폭넓은 연기의 결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이제는 그의 향후 캐스팅이 어떤 나이에 어떤 인물로까지 나아갈 지가 못내 기대된다. 세대 차이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훌쩍 뛰어넘어 버리는 그 모습에서 서로 다른 세대들은 그를 통해 어떤 공유점을 발견하고는 뿌듯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대가 달라도 충분히 소통 가능한.



스타 없이 스타 만든 <응답하라1994>, 조연들의 전성시대

 

스타가 없어 스타가 탄생할 수 있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응답하라1994>가 그렇다. 생각해보라. 이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까지 우리가 정우라는 배우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를. 또 꽤 많은 작품에 조연으로 나왔었지만 그에 대해 대중들이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KBS <최고다 이순신>에 출연했을 때부터였다. 빵집 사장으로 등장한 정우는 대중들에게 괜찮은 인상을 남겼지만 그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키지는 못했다.

 

'응답하라1994(사진출처:tvN)'

하지만 <응답하라1994>는 달랐다. 첫 회부터 쓰레기라는 강렬한 캐릭터로 등장하다더니 어느새 여심을 쥐락펴락하는 무뚝뚝하지만 때론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정우라는 배우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실로 꽃미남이라 부를 수는 없는 외모지만 정우의 투박하고 서글서글한 이미지는 그저 비슷비슷한 꽃미남들과는 차별화된 그만의 개성을 부여했다. 특히 그의 투박한 사랑법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공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남녀 모두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응답하라1994>가 끄집어낸 정우의 가능성이다.

 

조연들의 재발견은 어쩌면 <응답하라1994>의 핵심적인 캐스팅 전략이라고도 여겨진다. 김성균은 대표적이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이웃사람> 등에서 보여준 미친 존재감은 분명했지만 어찌 보면 악역에 어울리는 외모를 심지어 사랑스럽게까지 보이는삼천포라는 캐릭터로 만든 건 놀라운 일이다. 그의 강한(?) 외모는 촌놈의 어눌함으로 바뀌면서 웃음 코드로 전환되었고, 그 어눌함이 찾아낸 사랑의 감성은 타이니지의 도희라는 새로운 인물과의 조합으로 더 아기자기해졌다.

 

칠봉이로 나온 유연석은 어떤가. 그 역시 <건축학개론><늑대소년>을 통해 주로 악역으로 등장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 드라마에서는 여주인공 나정(고아라)을 짝사랑하는 순애보를 보여준다. 해태 역할의 손호준이나 빙그레 역할의 바로 역시 드라마에서의 존재감을 그다지 드러내지 못했던 인물들이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정이 가는 캐릭터로 부각되었다. 조연들, 특히 그 중에서도 악역으로 이미지화된 배우들을 끄집어내 멜로를 그려낸다는 발상은 결국 주효했다. <응답하라1994>가 캐스팅으로 보여준 건 조연들의 전성시대였던 셈이다.

 

특히 연기자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고아라에게 있어 이 작품은 커다란 전환점이 되어줄 것으로 보인다. 결코 꾸미지 않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 고아라는 예쁘장한 외모가 오히려 가려버리는 연기의 폭을 이번 작품을 통해 확실히 넓혀 놓았다고 보인다. 이렇게 된 데는 이 작품 속 여성 캐릭터들이 여성적인 면으로만 지나치게 매몰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킨 데 있다. 방송 전까지는 누군지도 몰랐던 도희가 구수한 사투리에 시원시원한 욕을 얹어 곱상한 외모와는 정반대의 매력을 드러냈던 것도 마찬가지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흔히들 드라마를 얘기할 때 누가 주인공이냐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선택기준이 될 때가 많다. 하지만 스타 캐스팅은 때로는 그 자체로 드라마에 한계를 지우기도 한다. 스타가 갖고 있는 이미지가 크면 클수록 드라마 속 캐릭터와의 조합에는 그만한 이미지의 부딪침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스타라는 인지도를 통해 드라마의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드라마는 드라마를 통해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무수히 많은 스타 캐스팅 드라마들이 스타의 이름값도 못한 채 빛이 바랬던 일들을 우리는 이미 많이도 봐왔지 않은가.

 

흔한 일은 아니지만 때로는 스타 파워가 제작진을 좌지우지 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스타가 자기 배역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대본을 고치게 함으로써 결국은 작품을 망가뜨리는 경우도 종종 생겨난다. 또한 몇몇 스타 캐스팅에 집중된 비용은 고스란히 제작진과 스텝들이 떠안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즉 스타 캐스팅은 작품의 성패와도 점점 관계가 없어지고 오히려 부담만 가중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응답하라1994>가 던진 조연들의 재발견은 드라마 제작 관행에 있어서 이 드라마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대안으로 여겨진다. 먼저 탄탄한 대본과 연출력이 갖춰졌다면 차라리 대중들에게는 백지상태인 발견되지 않은 배우들을 쓰는 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드라마의 새로운 캐스팅 성공방정식에 앞으로 여타의 드라마들이 얼마나 응답할 것인가. 실로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1> 유호진 PD가 말하는 <응답> 신원호 PD

 

예능 PD가 어떻게 이런 드라마를 연출했을까. <응답하라 1994> 신원호 PD에는 일종의 편견과 선입견이 있다. 어딘지 드라마 PD보다 예능 PD를 평가절하하거나, 혹은 이 두 분야가 전혀 달라서 연출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모험이자 도전이라는 것.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응답하라1994(사진출처:tvN)'

<응답하라 1994>의 이우정 작가나 <주군의 태양>의 홍자매,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박혜련 작가 같은 예능작가 출신들이 드라마작가로 전업해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것처럼, 예능을 연출하다가 드라마 PD로 이름을 날린 경우도 적지 않다. 현재 <기황후>를 연출하고 있는 한희 PD도 예능 연출 출신이고, <파스타>, <골든타임> 등으로 스타PD 반열에 오른 권석장 PD 역시 <일밤> 조연출 출신으로 <테마극장> 연출로 잔뼈가 굵었다.

 

<응답하라> 시리즈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신원호 PD 역시 <여걸식스>, <남자의 자격> 등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본래 본인은 영화 연출에 뜻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런 남다른 신 PD의 성향은 고스란히 <응답하라> 시리즈의 연출에도 묻어나고 있다.

 

<응답하라 1994>가 특별한 느낌으로 전달되는 이유는 그저 정보 전달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진 감성이나 정서를 묶어내는 신 PD만의 연출력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응답하라 1994>에서 쓰레기(정우)와 빙그레(바로)가 비오는 날 가게 앞 평상에 앉아 소주를 마시는 장면이 그렇다. 정보적으로는 그냥 술을 마시는 장면이면 족하겠지만, 이 장면에서 정우는 평상에 앉아 맨발을 쭉 뻗어 빗물에 내놓은 채 소주를 마신다. 이런 디테일한 연출에는 당시 상황이 주는 특유의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느낌들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12>의 새 매거폰을 잡은 유호진 PD는 신원호 PD가 가진 정서적인 연출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신원호 PDCJ로 이적하기 전 마지막으로 <남자의 자격>을 연출할 때 유호진 PD는 인사차 편집을 하고 있는 신 PD를 찾은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남자의 자격> 아이템은 아저씨들이 호주 사막을 여행하는 것이었는데, 그냥 원샷으로 편집해도 되는 자동차가 달려가는 장면을 굳이 중간에 끊어서 나뭇가지 흔들리는 장면 같은 것을 인서트로 넣더란다. 왜 그렇게 하냐고 묻자 신 PD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더 아련한 느낌 같은 게 묻어나잖아.”

 

사실 연출이라고 하는 분야를 그저 그 장면이 갖는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신원호 PD의 경우 연출이란 다만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안에 어떤 정서나 심리상태까지를 담아내는 것이란 얘기다. 이것은 어쩌면 <응답하라 1994>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정서가 바로 이 연출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는 걸 말해주는 대목일 것이다. 똑같은 장면도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잡아내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달라진다.

 

유호진 PD<12>에 있어서도 그저 스토리나 상황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PD가 연출을 통해 보여주는 그런 정서를 잡아내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 얘기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12>이 시즌2를 통해 추락하게 됐던 것이 바로 이 특유의 정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저 여행가고 복불복 게임을 하고 벌칙을 수행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진 데는 똑같은 그림 안에서도 그 속에 담겨진 인물들의 심리나 정서적인 느낌 같은 것이 잘 연출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확실히 요즘은 예능과 드라마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는 시대다. 예능은 언제부턴가 스토리텔링을 하기 시작했고, 드라마는 스토리텔링 속에서 예능에서 두드러지던 캐릭터에 대한 집중력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다른 것 같아도 이 두 장르가 하나로 맞닿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스토리텔링이라는 영역이다. 스토리(이야기)는 물론 중요하지만 거기에 텔링(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가)이 담기지 않으면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가 쉽지 않다. 신원호 PD가 추구하는, 또 유호진 PD가 배우고 싶은 그 정서까지 담아내는 연출은 어쩌면 앞으로 예능이든 드라마든 그 성패를 가늠하는 필요조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신데렐라 없어도 더 쫄깃한 '응답1994'의 멜로

 

멜로는 신데렐라가 있어야 된다? 적어도 <응답하라 1994>에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상속자들> 같은 드라마가 초거대 재벌가들 사이에 들어간 신데렐라 이야기로 너무 뻔하다는 비판을 받는 반면, <응답하라 1994>는 신데렐라 없고 심지어 촌스럽게까지 보이는 멜로만으로도 오히려 시청자들의 호평을 이끌어내고 있다.

 

'응답하라1994(사진출처:tvN)'

과거 <시크릿 가든>의 현빈과 하지원이 그랬고, <최고의 사랑>의 차승원과 공효진이 그랬듯이 잘된 멜로의 연기자들이 주목받는 건 당연한 일. <응답하라 1994>의 멜로는 정우라는 배우에 대한 신드롬을 만들고 있고 또한 늘 연기력 논란에 시달리던 고아라까지 매력적인 연기자로 재탄생시켰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처럼 촌스런 멜로의 주인공들이 이토록 주목받게 된 것은.

 

<응답하라 1994>는 <응답하라 1997>이 그랬듯이 현재의 여주인공이 과거 1994년의 어떤 인물과 결혼을 했는가를 찾는 다소 단순한 멜로를 그린다. 그런데 이 단순해 보이는 멜로가 의외로 힘을 발휘한다. 누가 누구와 만났고 어떤 일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어떻게 관계가 발전됐는가 하는 점은 마치 첫사랑의 추억담처럼 우리를 아련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친오빠처럼 다가와 점점 가슴 뛰게 만드는 오빠로 느껴지게 되는 쓰레기 정우나, 그저 하숙집을 들락거리다 점점 가까워지게 되는 칠봉이 유연석은 그 설정 자체가 신데렐라 멜로와는 다른 <응답하라 1994>의 특별한 멜로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은 연세대라는 괜찮은 학벌의 소유자에다 직업적으로도 향후 의사가 될 의대생이거나 프로야구의 에이스가 될 야구선수다.

 

이것은 나정이(고아라)네 하숙집에 들어와 그녀와 장차 결혼할 지도 모를 다른 후보군들도 마찬가지다. 해태(손호준)는 순천시 버스회사의 막내아들이고, 빙그래(바로)의 부모는 충북 최대 규모의 양계장을 운영하며, 삼천포(김성균)는 한번 나가면 기름 값 1500은 드는 배를 가진 집의 아들이다. 물론 이들은 초재벌도 아니고, 드라마는 오히려 이 ‘잘사는 촌놈들’이라는 설정을 신데렐라 이야기로 활용하려 들지도 않는다. 유머 코드라면 모를까.

 

이들 촌놈들이 상경해 벌이는 멜로는 특별할 것 없는 당대 대학생들의 그것이다. MT를 가고 미팅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팬클럽 활동을 하며 하숙방에서 술내기 게임을 하는 식이다. 그러면서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그들이 보여주는 멜로란 오지 않는 삐삐를 밤새워 기다리거나 게임을 빙자해 뽀뽀를 하거나 혹은 아플 때 꼭 껴안아주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에 등장하는 그 흔한 결혼 반대하는 부모들도 보이지 않고 백화점을 통째로 쇼핑하듯 과시하는 남자의 모습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하라 1994>의 멜로가 그 어떤 신데렐라 스토리보다 쫄깃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멜로 속에 존재하는 평등한 시선과 특유의 공감대 덕분이다. 이 드라마에는 1994년의 공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어딘지 촌스럽고 능숙하지 못한 인물들의 행동들이 오히려 멜로를 더 아련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나정이를 좋아하면서도 표현은 친오빠처럼 무뚝뚝하게 던지는 쓰레기가 그렇고, 또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애써 속내를 감추려는 칠봉이가 그렇다. 해태와 조윤진(도희)의 관계를 보라. 그들은 대부분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면서 가까워진다.

 

<응답하라 1994>가 신데렐라 이야기 없이도 더 아련한 멜로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은 1994년이라는 과거의 한 지점이 가진 힘 때문이다. 현재가 아닌 과거, 그것도 첫 사랑의 추억이 있는 그 청순의 한 기억이란 현실적인 것과 일정부분 거리가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첫 사랑의 설렘에 집안 형편이나 학벌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것은 또한 어쩌면 1994년만 해도 지금처럼 극심한 양극화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할 것이다. 초재벌이 남자 주인공으로 나와 거의 하녀처럼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을 보호해주는 이야기는 그것이 판타지를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치졸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돈이 많으면 많았지 그것이 사랑도 넘을 수 없는 계급이 되는 현실, 얼마나 치졸하고 치사한가.

 

그래서 이러한 양극화로 인한 수직적인 계급구조가 잘 보이지 않는 나정이네 하숙집에서 벌어지는 수평적이고 평등한 멜로는 이 시대에는 오히려 더 큰 판타지로 다가온다. 돈이나 현실이나 집안이나 학벌과 상관없이 누군가에 대해 진정으로 가슴 설레며 하는 사랑.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 사랑은 그러나 심지어 치사한 신데렐라 스토리에마저 빠져들게 만드는 요즘 같은 세상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랑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요즘 청춘들은 학비 마련하랴 취업 준비하랴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조차 사치로 여겨지는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응답하라 1994>가 보여주는 이 너무나 편안하고 때로는 낭만적으로 여겨지는 청춘과 사랑이 왜 판타지가 되지 않을까. 이것은 양극화를 더 첨예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멜로의 극성을 만들어내는 신데렐라 스토리보다 <응답하라 1994>의 평범한 멜로가 더 강력한 이유다. 양극화 자체를 지워버린 완전한 평등의 멜로라니. 대단히 매력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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