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들에게 사극이란 어떤 이미지로 자리하고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으로 상징되는 과거의 정통사극은 그 중심이 대사에 있었다. 주로 편전에 모여 갑론을박을 하거나 누군가의 방에 모여 모의를 하고, 때로는 여인네들의 암투가 벌어지는 그 중심에는 늘 말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하사극, 퓨전사극들이 등장하면서 말의 자리만큼 위상이 높아진 건 볼거리다. 이런 시점에 ‘대왕 세종’같은 칼보다는 말의 힘을 더 믿은 성군을 다룬다는 것은 어찌 보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볼거리의 시대에 말의 사극이 갖는 한계 그렇지 않아도 현실에서의 정치는 마치 탁상공론처럼 허망하게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니 가뜩이나 정치인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이 팽배한 상황에서 본격적인 정치사극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많지 않다. 오히려 정치사극을 표방하면서 정치에 대한 환타지를 심어주는 ‘이산’같은 선택이 성공 확률은 더 높을 것이다. 거기에는 적어도 현실에서 정치를 혐오하게 만드는 명명백백한 진실의 승리나 선한 선택의 존중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왕 세종’이 선택한 진짜 정치의 세계 속에서 이런 배려는 나약함과 동일시된다.
‘대왕 세종’에서 선악구도는 순진한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취급된다. 세종(김상경)은 오히려 자신을 견제하라며 정적이었던 박은(박영지)을 집현전의 수장으로 세우고, 양녕대군(박상민)을 왕재로 세우려했던 황희(김갑수)를 최측근으로 끌어들인다. 때론 적으로 판단되었던 허조(김하균)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면서 세종에게 유리한 입장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 ‘대왕 세종’이라는 드라마의 판은 칼 하나로 반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각자 자신들의 입장을 가진 정치인들이 존재하면서, 특정한 사안에 대해 각자의 입장을 갖는데 이 미묘한 입장 차가 정치사극의 묘미를 만들어낸다.
인물의 선악구도가 아닌 정치의 대결구도 이 사극의 진짜 재미는 그 독특한 구도에 있다. 주인공인 세종의 마음은 늘 민심을 향해 있으나 아군이든 적군이든 자신의 밑에서 실제적인 정치를 수행하는 신하들은 민심 자체보다는 정책의 명분에 더 휩싸인다. 조선만의 역법을 갖겠다는 세종의 마음은 그것이 민초들의 궁핍한 삶을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 반면, 이를 반대하는 조말생(정동환)은 ‘조선의 하늘은 조선인의 것’이라는 그 발상이 중국의 반발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 판단한다. 한편 세종을 지지하는 신하들은 세종의 이상을 실현시켜줄 현실적인 명분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구도는 또한 르네상스맨으로서의 세종이 가진 과학에 근거한 민생정치와 신하들이 가진 비과학에 근거한 명분정치의 대결구도이기도 하다. ‘대왕 세종’에서 장영실(이천희)이 갖는 존재감은 바로 이 인물이 세종이 꿈꾸는 정치세계의 밑거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가 중세의 비이성의 어둠을 물리치는 이성의 빛이 되었던 것처럼, 세종은 물난리로 인한 자연재해를 하늘에 제를 올리는 것보다는 과학의 힘으로 이겨내려 한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은 입장 차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반대하는 신하들이 이 말을 ‘민심처럼 하늘마저 등을 돌렸다’고 결과론적으로 활용하는 반면, 세종은 바로 그 ‘민심을 잡기 위해 천심을 바꾸겠다’는 보다 적극적인 인간중심의 철학을 내보인다.
‘대왕 세종’은 칼의 현란함을 추구하는 시대에 말의 대결을 보여주는 정치사극이다. 이 사극이 그다지 시청률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시간대와 방송사를 옮겼다는 것에 이유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유는 이 사극이 정치의 너무 적나라한 부분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현실 정치가 우리가 생각한대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면 이 진창을 그대로 보여주는 정치사극의 묘미는 더욱 깊었을 지도 모른다. 반대로 현실 정치가 진창으로 비춰지고 있었기에 이 본격적인 정치사극은 그 반복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실제 정치의 세계에서든, 아니면 정치사극 속에서든 그 본질은 말(대사, 대화, 협상)이지 칼이 아니다.
영화에 ‘5분의 법칙’이 있다면 드라마에는 ‘첫 회의 법칙’이 있다. 첫 회에서 시선을 잡아끌지 못하면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따라서 드라마 속 하이라이트 부분을 맨 앞에서 먼저 보여줘 시선을 잡아끈 다음, 회상 신으로 돌아가 극을 전개시키는 방식은 하나의 전형이 되었다. 멜로드라마에서 해외로케를 통해 이국적인 풍광을 보여주고, 사극에서 스펙터클한 액션장면을 보여주거나, 전문직 장르 드라마에서 충격적인 사건이나 긴장감 넘치는 상황을 첫 회에 제시하는 건 그 때문이다.
사극의 첫 회, 지붕 위를 걷다 ‘일지매’는 첫 회에서 갑의를 착용한 일지매(이준기)가 전각지붕 위를 바람처럼 달려나가고 왕실의 보물창고인 내수고에 침입해 보물을 훔치는 장면을 말 그대로 스펙터클하게 보여주었다. 일지매가 담을 넘어 탈출하면서 매화나무 아래 안착한 후 카메라가 일지매의 눈으로 쑥 들어가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것은 첫 번째 시선을 잡아끄는데 성공한 ‘일지매’의 면면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제 시청자들은 그 붙잡힌 시선에 이끌려 이 멋진 일지매가 되기까지의 과정, 즉 겸이에서 용이가 되고 용이에서 일지매가 되는 그 과정을 보게 된다.
궁을 배경으로 한 액션 신으로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사극의 첫 회 공식처럼 자리잡았다. ‘이산’에서 궁중연회 도중 갑자기 영조(이순재)를 향해 총을 쏘는 군졸들에 의해 아수라장이 된 연회장을 빠져나가 도망치는 영조 앞을 사도세자가 가로막는 장면은 물론 영조의 꿈이지만 시청자들의 눈을 빼앗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이것은 저 ‘대왕 세종’의 첫 회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자객들의 궁궐 침입 시퀀스와 유사하다. 이 장면 역시 실제 상황이 아닌 궁궐 내의 훈련 상황이었던 점을 보면, 이런 첫 회의 액션 신들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송 드라마의 첫 회, 방송의 이면을 보다 최근 한 트렌드처럼 등장하고 있는 이른바 ‘방송 드라마’들이 첫 회에서 보여주는 것은 방송의 이면이다. ‘스포트라이트’는 첫 방에서 남편의 불륜사실을 알게된 앵커가 방송도중 눈물을 흘려 자칫 방송사고가 될 뻔한 상황을 보여준다. 우리가 뉴스를 볼 때 봐왔던 수면 위의 장면들, 그 아래 숨겨진 숨가쁜 발놀림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의 시선을 잡아끈다. 그 아찔한 상황 속에서 서우진(손예진) 기자는 순발력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캐릭터 선보인다.
각종 시상식은 방송 드라마의 볼거리 중 하나이다. ‘온에어’의 첫 회가 시상식의 이면을 잡아내면서 나눠주기식 시상식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그려냈던 것처럼, ‘태양의 여자’는 상해에서 벌어진 아시안TV페스티벌에서 ‘원더우먼쇼’로 상을 받는 아나운서 신도영(김지수)에 대한 장면부터 시작한다. 이 시상식이라는 시퀀스는 일단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장면과 동시에 그 이면이라는 낯선 그림을 통해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점이 있다. ‘태양의 여자’는 이 첫 회를 통해 해외로케와 시상식이라는 볼거리를 보여주면서 앞으로 벌어질 신도영의 상황, 즉 ‘원더우먼’으로서 잘 나가는 아나운서이지만, 무언가 내면적인 문제가 있는 그 정황을 모두 잡아낸다.
첫 회에 대한 집착, 문제는 없나 이 밖에도 가족드라마 같은 경우에는 대개 문제를 내포한 가족들의 면면을 일상을 훑어가며 보여준다. ‘엄마가 뿔났다’의 첫 회가 영수(신은경)와 종원(류진)이 함께 침대에서 깨어나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것은 장면 자체가 갖는 시선 끌기의 목적도 있지만 앞으로 벌어질 이 드라마 속의 갈등상황(이 사실을 안 엄마가 뿔나는)을 예고해준다. ‘행복합니다’의 첫 회 장면은 이질적인 두 집안을 병치해서 보여주는데, 준수(이훈)네 집은 침입한 도둑을 쫓는 에피소드로 우스꽝스럽게 연출된 반면, 그와 결혼할 재벌집 서윤(김효진)네 집은 연말을 보내기 위해 홍콩으로 떠나는 화려함을 대비시킨다. 이것은 후에 벌어질 계층 갈등 상황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첫 회에 대한 드라마들의 집착은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는 드라마들 속에서 시선을 잡아끌기 위해 당연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문제점도 양산한다. 최근 월화극에 대한 편성전쟁으로 그 첫 회가 월요일이 아닌 화요일에 방영되게 된 것은, 바로 이 첫 회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청자들에게 전가된다. 게다가 이 초반부에 눈길을 잡아야 승부를 낼 수 있다는 강박관념은 자칫 하이라이트를 너무 앞으로 배치해 중반부터 긴장감이 풀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물론 앞으로 어떤 새로운 에피소드들이 나올 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초반에 연쇄살인범 장진규 에피소드라는 초강수를 쓰면서 오히려 새로운 에피소드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게 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 즉 하이라이트를 앞으로 빼놓아 드라마 중반이 허전해지는 상황은 최근 드라마의 한 경향처럼 반복되고 있다. ‘일지매’도 초반부 강력한 액션 신으로 한껏 기대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만큼 다음 에피소드들의 소소함에 부담이 갔던 것도 사실이다. ‘대왕 세종’ 역시 초반의 화려한 볼거리에서 중반의 대사 중심의 정치 이야기로 들어서면서 시청률이 하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대왕 세종’은 이제 대마도 정벌이라는 아이템으로 볼거리를 잡아내려 노력하고 있다. ‘드라마 첫 회의 법칙’은 분명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드라마의 한 경향으로 자리잡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첫 회에 대한 지나친 집착 또한 드라마에는 독이 될 것이다. 첫 회가 매력적이어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만큼 중반 진행과 후반 마무리도 중요하다는 것이 간과되지는 않아야 한다.
‘이산’은 소재로 보나 특유의 시각으로 보나 훌륭한 기획의 사극임이 분명하다. 조선조 22대 임금으로 파당정치를 뒤엎고 개혁을 단행해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성군. 게다가 이 정조는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임금이다. 이런 되는 소재를 가지고 ‘이산’은 왕과 개인으로서의 정조를 모두 다루는 독특한 사극의 한 장을 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기획의 창대함을 두고 볼 때, ‘이산’이 얻은 것은 그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고 있다. 물론 초기 너무 과도한 의도를 세워놓은 것 자체가 잘못이지만, 작품은 뒤로한 채 시청률에 경도된 연장방영이나 변칙편성은 오히려 초반부 ‘이산’의 참신한 기획마저 색 바래게 만들고 있다. 도대체 왜 ‘이산’은 보다 깔끔하게 끝내지 못하는 걸까.
창대한 기획에서 빗나간 초반부 ‘이산’의 기획의도를 다시 들추어보면 그 창대한 기획의 면면들을 읽어낼 수 있다. 그 기획의도에는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가진 정조는 물론이고, 파당정치를 해소한 정치인으로서의 정조, 실물경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조선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룩한 정조, 다양한 실학파 인재들을 등용해 문화와 과학에 꽃을 피웠던 정조, 그리고 한 여인을 사랑했던 정조까지를 다루려 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산’은 그저 왕조의 정치사만을 그리려 한 것이 아니라, 정조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을 모두 한 편의 화폭에 담아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종영을 앞둔 ‘이산’이 다룬 것은 이 중 그 어느 하나도 만족시킬만한 결과를 보이지 못했다. 탕평책을 시행해나가는 정조의 에피소드도 구체적인 것이 거의 없었고, 실물경제를 살리기 위한 에피소드도 금난전권 철폐라는 발표로 그친 격이 되었다. 애초 기획의도에 들어있던 성송연(한지민)의 조상계(조선시대 상인들의 조직) 에피소드는 어찌된 일인지 아예 다루어지지도 않았고, 또한 군제 정비나 병기 연구 과정 에피소드의 하나로서 ‘무예도보통지’ 같은 무예책자 역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것은 이산이 정조가 되는 과정에 너무 많은 부분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이산이 비로소 정조가 된 것은 45회에서다. 애초 계획이었던 60회에서의 종영은 이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정조의 업적이나 애초 의도에 들어있던 정조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같은 것들은 아직 시작도 안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획이 어그러진 것은 정순왕후(김여진)를 위시한 노론벽파의 끊임없는 암살시도(이것은 거의 마지막까지 다시 반복된다)와 영조(이순재)의 시험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이산의 모습을 과도하게 반복했기 때문이다.
연장방영, 그러나 정조는 여전히 보이지 않고 이 과정 속에서 오히려 초반부 이산보다 더 주목된 것은 영조와 홍국영(한상진)이었다. 즉 이 위기의 상황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이로써 영조와 홍국영(때로는 성송연)이 부각되면서 오히려 드라마를 끌어가는 중심 힘이 위치이동을 한 것이다. 영조의 매병(치매) 설정이 그토록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것은 사실 정조를 다루기에도 벅찬 ‘이산’으로 보면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시청률이란 잣대로 보면 이 상황은 이해될 수 있다. 극의 힘을 이끌고 가는 것이 영조였기 때문이다.
중반 이상을 지나오면서 정조가 아닌 영조에 집중된 ‘이산’에 있어서 MBC의 16부 연장방영 결정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또한 시청자들의 바람이기도 했으니까. 연장 결정의 이유로서 MBC가 내세운 것도 “정조의 업적과 개혁정책을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서”와 “이산과 송연과의 멜로 라인 등 그 밖의 다루지 못한 부분으로 이산 시청자들을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연장방영 속에서도 여전히 정조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부각된 것은 홍국영이다. 홍국영의 끝없는 욕망과 그 추락에 대한 에피소드가 지속되었고, 본래 기획의도에서는 도화서에서 나와 조상계(조선시대 상인들의 조직)에도 들어가는 등 능동적인 캐릭터였던 성송연은 궁중 시집살이(?) 에피소드가 거듭되면서 수동적인 존재가 되었다. 홍국영의 죽음과 성송연의 장결병이란 불치병 에피소드로 채워지는 동안,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 인물들과 정약용(송창의)의 간간한 ‘보고’로 처리되었다.
시청률이 ‘이산’의 완성도를 떨어뜨렸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산’은 성군으로서의 정조를(특히 정치인으로서의 면모)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여러 번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이산’이 선택한 것은 완성도보다는 시청률이었다. 완성도를 생각했다면 초반부 그렇게 질질 끌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어쩔 수 없이 연장방영을 하게 되었다면 그 이유에 걸맞게 완성도를 보충해나갔어야 한다. 300회가 거듭되는 동안 이제나저제나 정조로서의 면모를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필자 같은 시청자들로서는 이 대책 없는 후반부의 허무함을 성송연의 죽음, 정조의 죽음 같은 감성적 충격 혹은 화성 원행 같은 스펙타클로 채워야 하는 입장이다.
게다가 최근 ‘이산’의 종영을 두고 벌어진 ‘오락가락 편성’은 그 마지막 끝나는 길까지 이 드라마가 시청률의 희생자이자 가해자가 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함을 남긴다. 이유야 어쨌건 두 차례의 스페셜 프로그램과 한 주에 한 번씩 띄엄띄엄 편성된 ‘이산’의 종영은 확실히 정상적인 끝맺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끝맺음을 함으로써 시청률로 보면 ‘이산’은 마지막 가는 길까지 방송사에 최대의 이익을 남겨준 드라마가 되었다.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이산’은 바로 그 시청률을 위해 완성도를 포기한 지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제 종영하는 마당에 ‘이산’의 이런 문제들을 시시콜콜 끄집어내는 것은 이것이 자칫 성공하는 드라마의 한 전형으로 굳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최근 들어 드라마들은 초반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편성 전쟁의 진짜 얼굴은 이것이다) 초반 시선잡기에 대부분의 힘을 쓰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초반의 힘이 끝까지 지속된다면야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초반의 과도한 힘주기는 대부분 중반 이후부터의 긴장감 저하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다반사다. 용의 머리만큼 중요한 것이 용의 몸통이자 꼬리다.
‘이산’은 정조라는 왕이 아닌, 이산이라는 한 인간에 더 주목한 사극이다. 어린 시절, “이름을 불러다오”하고 이산이 요청하고, 거기에 대해 어색하고 수줍은 목소리로 성송연이 “산아”하고 답하는 장면은 이 사극의 입장을 집약적으로 드러내준다. 이러한 왕이라는 공적 존재에서 이산이라는 사적 존재에 주목함으로써 ‘이산’은 조선시대라는 위계질서 속에서도 수평적 관계 같은 현대적 맥락을 가져갈 수 있었다.
왕이 되기 전까지 사적인 존재로서의 이산의 행적 자체만을 다루는 것은 별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장점이 된다. 실제로 끊임없는 암살의 위협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이산(이서진)의 몸부림과 그런 이산을 돕는 여러 인물들의 등장은 이 사극이 주는 재미의 핵심이기도 했다. 이 과정 속에서 도화서의 다모로 일하는 성송연(한지민)이 그림을 통해 이산을 돕는 설정 같은 것들은 이 사극만이 줄 수 있는 묘미가 분명하다.
이 과정에서 사극에 힘을 준 인물은 이산의 할아버지인 영조(이순재)와 홍국영(한상진)이다. 영조는 이산을 시험에도 빠뜨리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도 한다. 또한 노론 세력들의 위협이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영조의 역할만으로는 이산을 보호해줄 수 없는 입장이 되자, 급부상하는 인물이 홍국영이다. 이 착하기만 한 이산을 돕기 위해 기꺼이 진흙탕 속에 뒹굴 수 있는 홍국영은 현실적인 인물로서 주목받는다.
하지만 문제는 영조가 죽고 이산이 정조라는 왕이 되었을 때부터 불거진다. 아무리 사극이 조명하는 것이 이산이라는 개인이라 하더라도 왕은 어쩔 수 없는 공적인 존재로서 기능할 수밖에 없다. 즉 이제 정치를 해야하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는데, 정치란 사적인 행적으로는 다루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만일 정조의 정치 자체를 이렇게 사적인 얘기로 풀어낸다면 자칫 조선시대 한 성군의 치적을 정치적 개혁과 타협의 성과가 아닌 끝없는 음모론과 밀실정치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 즉 사적인 약점들을 캐내고 그걸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측면만 강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산’은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왕이 아닌 이산이라는 개인을 다루겠다고 할 때부터 ‘이산’은 정치드라마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미묘한 입장들이 서로 부딪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변수들이 나타나 실제 정치적 결과로 이어지는 복잡한 상황들은 저 ‘대왕 세종’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 정치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열광을 하겠지만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정치라는 단어 자체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이산’이 정조가 즉위한 이후부터 다루는 정치적인 이야기가 주로 경제적인 문제(예를 들면 금난전권 폐지 같은)에 더 중점을 둔 것은 바로 그러한 정치에 대한 시청자들의 혐오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이 등장하는 박제가, 이덕무 같은 실학파 인물들이 사극의 중심으로 오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들은 그저 ‘이산’이라는 사극에서 이산이 정조가 되었기에 반드시 해야할 정치적 책무들을 복잡한 정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인물들의 면면으로 쉽게 해결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 등장한 정약용(송창의)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약용은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라기보다는 오히려 발명가나 과학자의 면모로서 더 부각된다.
왕이 되었으나 사적인 얘기에 천착함으로써 ‘이산’이 사극 후반에 집중한 것은 홍국영과 성송연이다. 홍국영의 개인적인 야심을 부각시켰고, 그것이 정조와 부딪치면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에 더 집중했으며, 성송연의 의빈으로의 성장과정과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고 또 죽음을 맞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에 사극의 대부분이 할애되었다. 정조의 왕으로서의 정치적 업적은 전면에 등장하지 않으나 막연히 규장각 인물들이 하고 있거나 열심히 일하는 정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처리되었다.
‘이산’이 후반부에 와서 초반의 힘을 잃어버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산이라는 인물에만 집중하려 했다면 정조로 즉위되는 그 순간까지만을 사극으로 다루었어야 하지 않을까. 혹은 정조가 되는 그 순간부터는 이야기를 좀 다른 패턴으로 끌고 갔어야 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더라도 새로운 실학파 인물들과의 관계를 더 주목하면서 거기서 자연스럽게 정치적 업적이 드러나게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 사극의 연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아쉬움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은 이러한 결과로 ‘이산’에서 더 주목된 인물들은 정조보다는 영조, 홍국영, 성송연이 되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드라마의 완성도가 뛰어나서 성공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드라마의 장르가 그 방영요일(편성)과 잘 맞아떨어진 결과일까. 최근 드라마들의 성적표를 보면 요일별로 장르가 굳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월화의 ‘이산’, 수목의 ‘온에어’, 그리고 주말의 ‘엄마가 뿔났다’가 그 드라마들이다. 물론 예외적인 것들(예를 들면 ‘조강지처클럽’같은)이 있지만 대체로 이 구도는 꽤 오래 지속되어 왔다.
월화의 밤을 사극으로 굳혀버린 장본인은 다름 아닌 ‘주몽’이다. 34주 연속 시청률 1위라는 괴물 같은 기록을 남긴 이 사극은 타 방송사들의 드라마들을 모두 침몰시키면서 월화의 밤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것이 현재 방영되고 있는 ‘이산’이다. ‘이산’과 함께 맞불 작전을 폈던 ‘왕과 나’ 역시 수위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사극의 밤을 장식했다.
물론 수목드라마로서 방영된 사극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태왕사신기’였지만 이것은 방영시기가 계속 늦춰지면서 공교롭게도 월화에 이미 배정된 ‘이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진이’가 평균시청률 21%, ‘쾌도 홍길동’이 15% 정도에 머무르는 시청률을 수목의 밤에 장식했으나 그것은 사극으로 봤을 때는 미미한 것이었다. 물론 완성도나 작품성으로 따진다면 나무랄 데 없는 사극이었지만 말이다.
‘쾌도 홍길동’이 높은 완성도에도 주목받지 못하고 있을 때, 수목의 강자로 등장한 것은 전문직 드라마 ‘뉴하트’였다. 전문직 드라마가 수목의 장르로 부상한 것은 ‘쩐의 전쟁’, ‘개와 늑대의 시간’같은 드라마들이 있었기 때문. ‘히트’(월화)나 ‘에어시티’(주말)같은 전문직 드라마가 있었지만 시청률면에서나 완성도 면에서 모두 참패했다. ‘뉴하트’의 분위기를 이어받은 것은 ‘온에어’이며, 이 분위기가 그대로 새로 시작되는 ‘스포트라이트’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강력한 경쟁자로서 ‘일지매’가 방영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역시 수목은 전문직 드라마일지, 아니면 사극이 그 틀을 깰 지 귀추가 주목된다.
주5일 근무제로 인해 주말드라마는 한동안 침체기를 겪어오다가 최근 들어 가족드라마를 연달아 내보내면서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며느리 전성시대’, ‘황금신부’의 바통을 이어받은 ‘엄마가 뿔났다’, ‘행복합니다’같은 가족드라마들은 주말밤을 온전히 주부 시청자들의 그것으로 만들고 있다. 가족드라마의 특성상 전통적인 시청자층을 확보하면서도 달라진 시대에 맞게 끝없이 변주하는 작금의 가족드라마들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주말의 장르로 군림할 것이라 예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월화는 사극이, 수목은 전문직이, 그리고 주말은 가족극이 나누고 있는 현재의 드라마 상황은 바람직하기만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장르의 요일별 패턴화는 작품 자체보다는 굳어진 편성에 더 힘을 실어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자칫 좋은 드라마들이 어울리지 않는 요일을 만나 주목받지 못할 가능성도 생기기 때문이다. ‘사랑해’나 ‘누구세요’같은 호평 받은 드라마들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이유 속에는 이 같은 편성의 패턴이 분명 작용한 바가 있다.
또한 이것은 요일을 떠나서 최근의 되는 드라마가 사극, 전문직, 가족극 이 세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새로움을 시도하는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드라마들이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으며, 되는 드라마만 집중적으로 양산되는 이 상황은 자칫 드라마의 다양성을 해칠 위험이 있다. 물론 이것은 시청률 지상주의가 낳은 결과이다. 그래서일까. 이 수많은 패턴들(요일이나 장르)을 넘어서 시청률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새로운 실험적인 드라마가 등장했을 때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른바 마니아 드라마란 그저 시청률에 실패한 드라마에 붙이는 수식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정조의 삶과 정치세계를 조명하겠다던 ‘이산’의 야심 찬 계획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나서는 노론 벽파 세력들로 인해 뭐 하나 제대로 개혁을 진행하지 못하는 이산의 처지처럼 지지부진해지고 있다. ‘이산’이 노비개혁이라는 야심찬 계획을 선보이는 순간, 반발하는 장태우(이재용)와 노론 세력들처럼 곤두박질치는 시청률이 ‘이산’을 힘겹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산’은 점점 ‘대장금’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 같다. 거기에는 늘 대장금(이영애)이 지켜드리고픈 한 상궁(양미경)마마 같은 중전 효의왕후(박은혜)가 있고, 그녀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다. 성송연(한지민)은 어떻게든 그녀를 도우려고 발을 동동 구른다. 왕은 늘 그렇듯 중립적이면서 판관의 역할을 한다.
그 소재들만 봐도 이것은 인물을 바꿔놓은 ‘대장금’으로 읽힌다. 가짜임신 사실을 숨기려는 원빈과 홍국영(한상진)이 탕약을 문제로 삼고 나오는 것이나, 갑자기 어의의 캐릭터가 중요해지는 점, 임신과 관련된 탕약에 대한 중전의 해박한 지식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 틀에 박힌 구조 속에서 각자 캐릭터들이 하는 역할까지 ‘대장금’의 그것을 닮았다. 사실 원빈이 성송연을 불러들여 굳이 궁에서 그림을 그리게 하는 설정은 후에 성송연에게 이 사건의 실마리를 던져주기 위한 억지스런 설정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세력다툼이 정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그저 인물들 간의 선악 대결 같은 단순한 게임에 불과하다. 갑자기 왜 ‘이산’은 노비개혁 같은 복잡한 정치이야기를 버리고 ‘대장금’식의 인물게임에 2회 분량을 소모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정치이야기가 그저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구축된 캐릭터들과 정치이야기가 잘 맞아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산’의 캐릭터들은 이병훈 PD 특유의 선악구도 속에 들어가 있다. 분명한 선악구도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주인공 편(선)이 처하게 되는 어려움과 그것을 뛰어넘는 이야기(따라서 선이 반드시 이기는)의 단순함이 이병훈표 사극의 힘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이병훈표 사극이 본격 정치이야기를 꺼려했던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정치이야기는 선악구도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역학관계가 반드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산이 정조로 등극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캐릭터들이 자신의 위치를(선악의 팽팽함) 지킬 수 있었다. 그것은 현실정치를 대리하는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선을 대표하는 영조(이순재)와 악을 대표하는 정순왕후(김여진)의 대리전이다. 그 속에서 이산이나 성송연, 박대수는 상대적으로 현실정치의 복잡함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조가 죽고, 정순왕후의 힘이 약화되며 정조가 등극하자 상황은 달라진다. 선으로 대변되던 정조의 캐릭터는 현실정치 앞에서 달라져야 한다. 홍국영의 캐릭터는 더 냉혹해질 수밖에 없다(실제 역사 속에서도 그러하듯이). 문제는 이들 주변에 있는 캐릭터들이다. 성송연은 여전히 정치와는 상관없는 인물이고, 박대수 역시 그렇다. 진짜 정치를 해야할 인물들, 이를테면 정약용(아직 누가 연기하게 될 지도 결정되지 않은)이나 박제가의 캐릭터는 극의 중심부로 오지도 않았다.
이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이원화될 수밖에 없다. 현실정치의 정조와 홍국영의 이야기와, 나머지 캐릭터들의 정치 이외의(이를테면 궁내의 파워게임 같은) 이야기가 그것이다. 억지로 한 사건에 이들을 끼워 넣으면 캐릭터가 흔들리게 되고, 그렇다고 한 사건을 포기하게 되면 아예 한쪽 캐릭터가 배제되기 때문이다. ‘대장금’류의 에피소드에 이끌리는 ‘이산’은 아직까지도 이 양자의 이야기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성장드라마와 정치드라마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병훈 PD의 상황이기도 하고, 시청률과 완성도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리네 사극의 상황이기도 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자유겠지만, 적어도 ‘이산’정도의 사극이 쉬운 결정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다른 ‘대장금’보다는 새로운 사극의 가능성을 ‘이산’에서 보고 싶기 때문이다.
‘주몽’이 처음 고구려 사극의 포문을 연다고 발표됐을 때, 우리가 기대했던 건 막연하지만 민족의 시조이자 역사적 영웅인 주몽이 갈라져있는 민족들을 규합하고 한나라를 밀어내는 통치의 드라마였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본 ‘주몽’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 거기에는 평범한 철부지 주몽이 있었고, 왕이 되기까지 가야할 길은 멀었다. 그러니까 드라마의 방향성도 정해진 셈이었다. ‘주몽’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던 한 사내가 사실은 신탁을 받은 인물이었고, 그로 인해 최정점인 왕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되었다. 왕이 된 이후는?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나라를 통치하는 문제는 ‘주몽’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 기대에 대한 배반은 ‘주몽’이 성공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산’의 긴장감이 떨어진 이유 겉으로 보기에 ‘이산’이나 ‘대왕 세종’같은 최근의 사극들은 이런 경향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산’은 이미 정조(이서진)의 등극까지 험난한 과정을 끝내고 이제 통치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집중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숨 가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달려오던 ‘이산’은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는 순간부터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30%에 육박하던 시청률이 거의 20%까지 추락했다. ‘이산’은 확실히 집중력이 떨어졌다. 과거에는 성송연(한지민)과의 멜로 라인과 이산-노론 벽파 간의 대결양상은 병렬적으로 굴러가지 않고 한 가지 고리로 엮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연결고리가 흐릿해지면서, 각각의 이야기로 흩어지고 있다. 정무에 힘겨운 정조가 성송연을 가끔 그리운 얼굴로 바라보는 것 이외에, 둘을 이어주는 사건의 고리는 찾기 어렵다.
그런데 시청률의 하락과 집중도의 저하가 단지 이런 드라마 내적인 이유 때문 만일까. 그것은 혹시 왕이 된 후의 통치과정보다, 되기까지의 성장드라마에 더 ‘몰입’되는 우리네 경향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통치란 좀더 복잡한 정치의 과정이기 때문에 실제로 재미가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명박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고 시장이 되고 대통령이 됐는가 하는 과정까지는 우리의 주된 관심사이지만, 정작 그렇게 대통령이 된 후의 정치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CF였던 ‘욕쟁이 할머니’편이 전략으로 삼았던 것도 바로 이런 지점이었다. ‘뭐 복잡한 건 다 싫으니까 경제 하나나 제대로 살려라’라는 게 그 주 메시지였다. 여기서 경제란 참 불투명하고 막연한 의미다. 수백 수천 가지의 복잡함을 단순하게 만들어버리는 힘이 거기에 있다.
‘이산’이 막연히 ‘백성’이란 단어를 들고 나왔을 때는(주로 영조에 의해) 그 막연함이 시청자들의 마음에 꽂혔을 것이다. ‘복잡한 건 싫고’ 그저 성군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한 단어가 더 받아들이기 쉬웠던 것이다. 하지만 왕이 된 이후의 정치는 다르다. 여기서는 막연한 ‘백성’이란 단어가 잘 먹히지 않는다. 현실정치의 세계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노비의 폐지’라는 정책 하나는 수많은 반대논리들을 이끌어내고 거기에서 대결양상을 만들어낸다. 그 논리 속으로 들어가면 진짜 정치가 드러난다. 하지만 이것은 ‘이산’ 제작진에게는 곤혹스러운 문제다. 제작진들은 시청자들이 바로 이 복잡한 정치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좀더 단순한 필터가 필요한 상황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노론벽파의 수장인 장태우(이재용)다. 정치적인 쟁점은 캐릭터가 세워짐으로 해서 선악 구도로 단순화된다.
이런 단순화 과정을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지금껏 연승가도를 달려온 이병훈 PD가 사극에서 모두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다루고 그 정점에서 끝을 맺었던 것은 이러한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병훈 PD에게 ‘이산’은 하나의 도전인 셈이다. 게다가 왕이란 캐릭터는 더 복잡한 정치를 그것도 본격적으로 해야 한다. 이 부분을 대중들은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대왕 세종’이 말해주는 정치사극의 어려움 거기에 대한 답은 오히려 ‘대왕 세종’이 말해주고 있다. ‘대왕 세종’은 이 두 가지 면모, 즉 주인공의 성장과정과 정치적 쟁점들이 모두 자세하게 다뤄지는 드라마다. 만일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대왕 세종’은 정치인이라는 전문직을 역사적으로 다루는 역사 전문직 드라마의 한 분파라 보여진다. 모든 주인공들의 대사들은 정치적 뉘앙스를 갖고 있으며 그 뉘앙스 하나로 어떤 인물들은 정치적 죽음을 맞기도 한다. 거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조차도 없으니, 이 하드보일드한 사극은 미드의 한국사극 버전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정한 시청률을(폭발적인 시청률이 아니다) 유지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이미 자리를 잡아버린 주말사극에 대한 관성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정치적 쟁점과의 반대편 날개인 주인공의 성장과정 때문이다.
셋째인 충녕대군(김상경)이 이미 국본이 된 첫째 양녕대군(박상민)과 대결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이 익숙하게 보아왔고 또 보기를 원하는 ‘왕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대의를 앞세우는 양녕대군과 백성을 내세우는 충녕대군의 대결에서 그 결과는 이미 다 나와 있는 셈이다. 실제 정치의 세계에서도 그랬을까마는, 어쨌든 드라마가 보여주는 ‘정치 대 백성’의 대결에 있어 시청자들은 복잡한 ‘정치’보다 막연하지만 마음을 뒤흔드는 ‘백성’의 손을 들어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일까.
정치가 재미없다는 것은 정치에 대한 불신감에서부터 비롯된다. 내가 아무리 뭐라 해도 바뀌지 않는 정치의 세계, 그러니 나와는 상관없는 세계가 되어버린 정치는 괜히 골치만 아픈 천덕꾸러기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은 조장된 바가 크다. 정치적인 선택(하다 못해 투표 하나라도)은 골치가 아픈 게 아니라, 바로 우리네 삶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드라마가 주는 환타지(주인공의 성장)에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것을 뭐라 비판할 수는 없겠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동시에 다뤄지는 현실의 문제(전문직으로서의 현실성)를 외면하는 것은 자칫 드라마의 반쪽(중독적인 면)만 반복해서 보는 경향을 낳을 수 있다. 왕이 되기까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왕이 된 후의 통치과정이다. 이것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말극을 장악한 이른바 줌마렐라(아줌마 신데렐라)가 있다면, 사극에도 신데렐라는 예외가 아니다. MBC 월화 사극, ‘이산’에서 훗날 의빈성씨가 될 성송연(한지민)과 정조(이서진)의 사랑이 그렇다. 그것도 그 신분의 벽이 그저 양반과 천민의 수준이 아니다. 천민과 왕과의 사랑을 다루고 있으니 그야말로 극과 극의 만남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설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가 신데렐라 드라마에서 익숙하게 보이는 이야기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눈에 가장 잘 띄는 것이 늘 있게 마련인 반대하는 시어머니다. 이산을 위해서라면 한 목숨 기꺼이 바칠 듯하던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송연이 다모라는 그 신분 차이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의 의빈성씨는 적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사육신 중 하나인 성삼문을 배출한 조선시대 명문가의 하나인 창녕 성씨 중 찬성 벼슬에 올랐던 성윤우의 딸이다. 적어도 다모 같은 천민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산’은 드라마이기 때문에 약간의 사실의 변용이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왜 굳이 도화서 다모 같은 천민으로 의빈성씨를 설정했는지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법하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도화서 다모라는 직업이 가지는 특성 때문이다.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그림은 어진(임금의 초상화)과 의궤(행차도 같은 의식을 기록한 것)였다. 그러니 사극으로서 도화서 화원이라는 직업은 여러 모로 매력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화원은 그 그림 자체도 흥미를 끌게 하지만, 무엇보다 모든 행사에 나간다는 점, 그것도 그림으로(요즘으로 치면 사진 같은 것이다) 남긴다는 점이 그렇다. 사극의 극적인 전개를 위해서 이 그림이라는 기록은 추리극 같은 효과를 내기도 하고 때론 사건 해결을 위한 확실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 화원이 아닌 다모는 신분을 한 단계 낮추면서 또한 당대로서는 성차별을 겪기 마련인 여성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볼 때 가장 약자에 해당하는 존재가 된다. 물론 이런 설정은 성장 드라마를 만들어내기 위한 발판이다. 드라마 상에서 성송연은 남자 화원들보다 뛰어난 입지전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다분히 현대여성들의 환타지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의빈성씨를 굳이 다모로 설정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신데렐라의 사극 멜로 버전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현대극에서 신데렐라야 빈부 차이에서 거의 비롯되지만, 사극은 그 신분 차이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극이 갖는 환타지는 더 커진다. 이렇게 보면 다모라는 직업의 선택에는 두 가지 고려가 들어있다. 그것은 저 전문직 장르 드라마에서 말하는 전문직에 대한 요구가 첫번째요, 직업의 천한 신분으로 인해 생기는 보다 강력한 신데렐라 설정이 두번째다. 이렇게 보면 역사왜곡의 문제는 남겠지만, 드라마적으로 봤을 때 의빈성씨를 다모로 설정한 것은 다분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그 효과가 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는 문제는 지금부터다. 성송연은 이 다모라는 신분으로 어차피 의빈성씨까지 올라가야 하는 드라마 속의 과제를 안고 있는 캐릭터다. 그렇다면 이 과정이 더 중요해진다. 다모에서 화원의 지위까지 성장한(물론 신분상으론 여전히 다모지만) 성송연은 이제 어떻게 의빈성씨가 될 것인가. 앞부분의 성장은 성송연 혼자 가진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진 것이라 현대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충분한 공감이 된다. 허나 의빈성씨가 되는 과정 역시 그러할까. 그것은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과정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전형적인 신데렐라 멜로를 따라갈 것인가. 그것이 그저 신데렐라의 사극 버전이 될지, 아니면 능동적인 현대 여성의 사극적인 변용이 될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다.
‘왕과 나’의 조치겸(전광렬), ‘이산’의 영조(이순재), 그리고 ‘뉴하트’의 최강국(조재현)은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을까. 그들은 모두 각각의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조치겸은 우리네 사극 속에 권력형 내시라는 새로운 캐릭터로 특유의 카리스마를 선보였다. ‘이산’의 영조는 주인공인 이산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고 또 구원해주기도 하면서 지금껏 드라마의 힘을 만들어온 사실상의 주역이었다. ‘뉴하트’의 최강국 역시 마찬가지. 그는 지금껏 이 흉부외과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들을 정리하는 해결사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이들은 진정한 의미로 드라마의 주인공은 아니다. 주인공이 아니면서 왜 드라마는 이런 캐릭터들을 필요로 할까.
성장하는 주인공의 멘토 혹은 후원자 요즘 드라마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가 성장하는 주인공이라는 캐릭터 설정이다. 이것은 특히 권력과 욕망을 두고 전개되는 드라마 속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이미 성장해 권력을 잡은 무소불위의 주인공은 시청자가 감정이입할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쉽게 감정이입이 되는 평범한 주인공이 점차 권력의 정점을 향해 가는 성공의 과정은 보는 이에게 충분한 대리충족을 시켜주게 된다.
이런 성장 캐릭터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문제는 그 초반부에 있다. RPG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겠지만 캐릭터가 성장하는 과정을 바라보는 건 때론 지루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초반부 드라마 전개는 자칫 무미건조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카리스마 부재의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동시에 주인공에게 그 카리스마를 연계해줄 캐릭터들이 필요하게 된다. 즉 주인공의 멘토 혹은 후원자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조치겸이나 영조, 그리고 최강국이라는 캐릭터는 이러한 필요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이들은 주인공은 아니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드라마 전체를 휘어잡으며 시청자들의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는 특징이 있다. 드라마 초반부에 이러한 힘은 드라마 성공에 있어 절대적이라는 점에서 캐스팅에 있어 주인공 못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전광렬이나 이순재, 조재현은 누구나 그 연기력을 인정받는 대배우들이다. 이들 대배우들의 호연은 드라마에 더욱 힘을 불어넣는다.
문제는 주인공이 그 캐릭터를 넘지 못하는 것 문제는 주인공이 이제 나이가 들어 성장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들 캐릭터의 힘이 주인공에게로 넘어오지 않는 지점에 있다. ‘왕과 나’의 조치겸은 주인공인 김처선(오만석)이 성장하기까지 내시부를 이끌며, 예종 같은 왕, 한명회 같은 조정대신, 인수대비 같은 왕실인물, 노상선 같은 내시부 구세력들과 맞서며 권력형 내시의 카리스마를 보여왔다. 그 같은 상황에 김처선이 한 것이라곤 운명적인 사랑의 굴레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이었으니, 드라마의 재미는 주인공이 아닌 조치겸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결과적으로 카리스마는 김처선에게 전수되지 않았다.
‘이산’의 영조는 이산(이서진)의 가장 강력한 위협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까운 협력자로서 카리스마를 발휘해왔다. 이산을 위기에 빠뜨리는 것은 어찌 보면 노론 벽파 세력이라기보다는 영조 자신인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일까. 긴박하게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게 흘러가던 상황도 영조가 등장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이미 영조가 붕어한 상황이니 이제 그 카리스마는 온전히 이산이 차지해야 하나 그것이 효력을 발휘할 지는 미지수다. 위기에 빠뜨려 성장하게 만들었던 영조는 사라졌고, 또한 노론 벽파 역시 거의 궤멸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이산의 카리스마가 제대로 세워질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한편 ‘뉴하트’의 최강국은 이제 주인공을 도와주는 역할에서 아예 주인공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의 갈등구조가 결국 병원 내의 권력구도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최강국을 멘토로 성장드라마를 엮어가야 할 이은성(지성)은 좀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드라마의 갈등은 최강국이 풀어내고 이은성은 남혜석(김민정)과의 멜로 라인을 엮어내는 병렬적인 역할을 맞고 있는 상황이다.
배우의 문제가 아닌 작가의 문제 이것은 배우들에게도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대배우들의 그늘 속에서 주인공을 맡은 자신이 정작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 그다지 바람직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배우들의 문제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배우의 문제라기보다는 작가의 문제가 더 크다.
작가는 주인공 속에 주제의식을 심어 넣기 마련인데,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에 집중되지 않는 이런 상황은 결국 시청률 앞에 작가의 주제의식이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시청률을 올리는데 일조했던 그 캐릭터와 그 캐릭터가 만들어냈던 극적 상황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본래의 기획의도로 돌아간다는 것은, 시청률이란 잣대 위에서 보면 무모한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조치겸이나 영조, 최강국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조연들이 극 속에서 주인공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게 된 이유가 된다.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바람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속에서 꿈틀대는 시청률 지상주의라는 괴물이 엿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