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 윤균상, 사적 복수에서 공적 소명으로

“성님, 어리니를 봤소. 어리니가 임금님이 무섭다며 울고 있었소. 성님, 나 그동안 못된 짓 많이 하고 살았소. 충원군한테 복수도 하고 금주령 때 술 팔믄서 건달들 제끼느라 손에 피도 많이 묻혔소. 억울한 사람들 도와준답시고 미운 놈들 다리도 숱하게 분질러 줬소. 야, 나는 화 많이 내고 살았소. 그런디 성, 워째 지금은 화가 안 나고 맴이 슬프요. 집 뺐기고 가족 잃은 사람들 눈물이, 우리 어리니 눈물 같고, 가령이 눈물 같고, 소부리 아재 눈물 같소. 나는 툭하면 화가 나는 존재인데, 지금은 어째 화는 안 나고 눈물만 난답니까?”

'역적(사진출처:MBC)'

MBC 월화드라마 <역적>에서 드디어 길동(윤균상)이 세상에 대한 소명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지금껏 걸어왔던 길이 가족과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에 대한 사적인 복수와 비뚤어진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억울한 백성들 괴롭히는 이들을 응징해왔다면, 연산(김지석)의 폭주로 망가져가는 세상 앞에 그는 조금씩 공적인 소명의식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분노하기보다는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게 됐다. 핍박받는 이들이 세상과 싸우지 않고 울기만 한다는 것에 오히려 화를 내고 보기 싫다 했던 그가 아니던가. 그랬던 그가 이제 쓰러져 가는 백성들의 피를 보며 그 아픔이 타인의 것이 아니라 마치 가족의 아픔인 것으로 느끼게 됐다. 그의 그릇은 세상을 품을 만큼 커졌다. 처음에 그 그릇의 크기는 가족을 담는 정도였지만 그 후 익화리 사람들을 담는 정도로 커졌고 이제는 세상을 담을 정도로 커졌다. 

<역적>은 우리에게 고전의 인물로 남아있는 ‘홍길동’을 재해석한 작품. 연산군 시절 실존했던 도적 홍길동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런데 어째 그 옛 시절의 이야기가 그저 옛날이야기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연산군이라는 인물에 대한 해석이 권력자의 불통과 폭주로 그려지면서 그것이 어떻게 백성들의 고혈을 만들어내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고, 길동이라는 애기장수라는 메시아의 등장이 마치 백성들 하나하나의 소망이 만들어낸 거대한 힘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폐비되어 사약을 받은 어머니를 가진 불행한 과거사는 연산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자신을 가두게 된다. 연산의 주변에는 그래서 비선실세들이 넘쳐난다. 그의 아픔을 건드리고 그 고통을 촉발시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이들. 연산의 폭주를 막기 위해 대간에서 나서 왕의 잘못을 고하지만, 그들을 모두 처벌하는 풍경은 언론의 입을 막으려는 권력의 행태와 무엇이 다를까. 

위를 범했다는 이유로 노비들의 혀를 자르고 발목을 잘라내는 그 행태들을 낱낱이 기록한 행록과 그것을 뒤에서 조종하는 송도환(안내상)을 위시해, 충원군(김정태), 참봉부인 박씨(서이숙) 같은 이들이 바로 비선실세다. 그들은 왕을 위한답시고 충언을 말하지만, 사실은 권력 시스템을 공고히 하고 양반의 백성 수탈을 정당화해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유지하려는 인물이다. 불통하고 폭주하는 왕, 그리고 주변을 에워싼 비선실세들. 이러니 <역적>의 홍길동 이야기가 옛 이야기로 보일 리가 없다. 

길동을 잡아 힘줄을 끊고 뼈를 부숴 애기장수의 힘을 없애버린 연산은 그를 갖고 사람사냥 놀이를 한다. 연산은 스스로를 사냥꾼으로 그리고 길동을 그가 언제든 잡을 수 있는 짐승으로 다룬다. 연산은 왕이고 길동은 한갓 도적이다. 그런데 <역적>은 그 실상이 정반대라는 걸 보여준다. 과연 누가 진짜 왕이고 누가 도적이며, 누가 사냥꾼이고 누가 짐승인가. 백성들의 고혈을 빼먹는 이가 도적이고, 사람을 향해 화살을 겨눈 자가 짐승이 아닌가.

“난 인간을 믿지 않는 인간이다. 폭력만이 유일한 길이라 믿는 정치인이다. 난 오래 전부터 인간은 폭력을 써야 다스려지는 존재라는 것을 깨우쳤을 뿐이다.” 연산이 길동에게 하는 이 말이 주는 울림은 그래서 더 크게 다가온다. 인간을 믿지 않는 존재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정치의 유일한 길을 폭력이라 여기는 이는 정치인이 될 수 없다. 인간은 결코 다스려지는 존재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역적>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지금의 대중들에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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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 왜 하필 이 시점에 홍길동인가

“나는 그저 내 아버지 아들이오. 씨종 아모개(김상중). 조선에서 가장 낮은 자.” MBC 새 월화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은 광활한 평원에서 말을 타고 대치하고 있는 임금(김지석)과 길동(윤균상)의 장면을 전제로 깔아놓는다. 절박한 얼굴의 임금과 여유로운 표정의 씨종의 아들 길동. 이 장면은 <역적>이 그리려는 전체 이야기를 압축한다. 결국 임금과 역적이 똑같은 눈높이로 마주 서게 되고 도대체 누가 시대의 역적인가를 되묻는 것. 

'역적(사진출처:MBC)'

사실 우리가 <역적>이 그리려는 세계를 모르는 바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라는 거의 유행어가 되어버린 문장으로 기억되는 홍길동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적>은 이 뻔할 수 있는 홍길동 이야기에 몇 가지 새로운 설정들을 집어넣는다. 그 하나는 길동이 양반의 서자가 아니라 씨종 아모개의 아들이라는 순수 노비 혈통(?)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 길동이 아깃적부터 남다른 힘을 가진 ‘애기 장수’라는 설정이다. 

홍길동의 이야기가 서자 출신으로서 출사가 금지된 시대의 ‘적서차별’을 그 밑바닥 정서로 깔고 있다면, <역적>은 아예 양반의 핏줄과는 상관없이 온전히 태어날 때부터 종살이가 결정된 삶, 즉 ‘씨종’의 아들이 부여하는 ‘흙수저’의 정서를 깔고 있다. 하지만 남다른 힘을 가진 ‘애기 장수’ 길동은 이 ‘흙수저’가 갖게 되는 평탄치 않은 삶을 예고한다. 만일 금수저로 태어난 애기 장수라면 나라를 구할 영웅이 될 수도 있겠지만, 흙수저 애기 장수란 나라를 뒤흔들 ‘역적’의 씨앗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홍길동 이야기가 탄생하던 시기에 힘이란 그런 것이다. 가질 자에게 부여되어야 비로소 힘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절대로 부여되어서는 안 되는 어떤 것. 그래서 가진 자가 절대 갖지 말아야할 자들을 마음껏 부리는데 사용되는 것. 그것이 힘이고 권력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그렇게 부여된 힘과 권력이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들끼리 살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확인하게 되면서 생겨난 민초의식. 그 발현이 홍길동 같은 체제 전복의 서사를 탄생시켰다는 것.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하필 2016년 현재 다시 재해석되고 있다는 건 그 시국에 대한 공감이 홍길동 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공감 때문이다. 국민이 부여한 권력이지만 국민을 위해 사용되지 않고 사익을 위해 치부되었다는 걸 확인한 촛불들이 횃불이 되어 광화문 광장에 모이는 시국이 아닌가. 진정한 힘이 무엇이고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묻는 그 촛불의 질문처럼 <역적> 역시 묻고 있다. 진짜 역적은 과연 누구인가. 

이것은 아마도 우리네 민초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 어려운 시기마다 소환해와 위로받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해주었던 영웅서사의 또 다른 시작일 게다. 그래서 <역적>은 그 소재를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여기에 “그런데 말입니다” 하며 무언가 잘못된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질 것만 같은 김상중이 첫 회부터 깔아놓은 씨종 태생이 갖게 되는 그 아픈 민초들의 정서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 느끼는 현실과의 공감대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한껏 자신의 힘을 누르며 잘못된 현실 앞에 그저 고개를 숙이고 살아가는 아모개나 그의 아들 길동이 어느 순간 각성하고 그 힘을 민초들을 위해 쓰게 될 순간을 벌써부터 기대하게 된다. 고구마 현실에 길동이라는 애기 장수이자 ‘백성을 훔친 역적’은 그래서 현재의 시청자들의 마음 또한 벌써부터 훔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억눌려진 힘이 사이다처럼 터져 나올 그 순간을 기대하게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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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의 바다와 대비되는 인간의 바다

 

왜 하필 바다일까. 또 기억, 약속 같은 것들이 떠올리는 것은. 시국이 시국이어서인지 어떤 장면이나 대사들마저 그저 드라마의 한 대목으로 여겨지지가 않는다. 물론 드라마 제작자들이 이 모든 것들을 의도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나라에서 똑같이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이 시대의 공기는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작품에 스며들지 않았을까. SBS 수목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을 보다보면 세월호 참사로 인해 남다르게 다가오는 바다와 기억 그리고 약속 같은 단어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푸른 바다의 전설(사진출처:SBS)'

SBS 수목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은 어우야담의 인어이야기를 가져온 것처럼 담령과 인어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알게 되어 사랑하게 된 담령과 인어지만 사람은 뭍에서 살아야 하고 인어는 바다에서 살아야 하는 그 다른 삶의 방식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다. 바다는 그래서 이중적인 의미다. 바다에 빠져 죽을 위기에 처한 어린 담령에게는 죽음이지만, 그런 담령에게 다가와 그를 구해준 인어에게는 생명이다. 인어를 사랑하게 된 담령이 억지로 치른 혼사 첫날 밤 말을 달려 바닷물 속으로 뛰어든 건 그래서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의 표현이다. 그는 인어가 그를 구해줄 것이라 믿었고 실제로 인어는 그를 구해주었다.

 

우리에게 바다란 그 의미가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되었다. 이전만 하더라도 낭만적인 어떤 곳이고, 생명과 풍요의 의미였던 바다가 아닌가. 하지만 참사 이후 바다는 잿빛의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구해줄 것이라 믿었던 그 신뢰들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바다는 통곡의 공간이 되었다. 그렇게 된 건 사랑이니 믿음이니 하는 순수한 언어들이 그걸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인어 같은 존재가 실제로 있을 리가 있나. 하지만 그럼에도 어우야담 같은 전설로나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믿고 그걸 잊지 않으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까닭은 인어이야기가 주는 그 순수나 사랑, 믿음 같은 좋은 가치들을 지켜내기 위함이었을 게다. 그저 포획되는 물질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과는 달리 바다가 그저 착취되는 공간이 아니라 그들을 살려주는 대지모 같은 곳으로 믿으려는 그 마음.

 

<푸른 바다의 전설>은 여기에 기억을 지우는 장치 하나를 더했다. 인어가 사람에게 키스를 하면 그 사람의 기억에서 인어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다는 것.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인어공주이야기를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으로 재해석했다.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지만 동시에 망각하는 존재다. 그래서 아픈 기억들은 지워내려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기억들이 죽음의 선을 넘어서 아픈 기억으로 바뀌게 되는 순간 망각의 기제가 작동한다. 하지만 이와 달리 인어는 잊지 않고 기억한다. 아픈 기억들까지 모두 다. 그리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먼 바다를 헤엄쳐온다. 사람은 점점 아픈 기억이 지워져 가지만 바다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왜 최첨단의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인어 같은 동화적 존재를 얘기하고 있는 걸까. 그 이유는 명확하다. 인어라는 순수의 존재를 세워둠으로써 이성의 시대라고 불리는 지금을 되돌아보기 위함이다. 돈을 뜯어내는 여고생들을 보며 그걸 똑같이 따라하는 인어가 오히려 어린 꼬마 아이에게 훈계를 듣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인어란 존재가 우리 사회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 된 듯한 느낌을 준다.

 

인어의 바다와 인간의 바다가 다르다. 인어의 바다는 풍요롭고 모든 걸 품어주는 곳이지만 인간의 바다는 탐욕으로 피폐해진 곳이다. 인어의 바다는 기억하지만 인간의 바다는 망각한다. 인어의 바다는 약속을 지키지만 인간의 바다는 약속을 저버린다. 이런 대비효과는 아마도 <푸른 바다의 전설>이 인어란 존재를 굳이 도시 한 복판에 세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해준다.

 

물론 이 드라마를 보면서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는 건 분명 과잉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네 대중들의 기억의 트라우마 속에서 바다만 쳐다봐도 떠오르는 잔상을 지우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바다와 기억과 약속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런 남다른 의미들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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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뺑덕>, 제 아무리 정우성이 벗어도 안 되는 까닭

 

<마담 뺑덕>심청전을 현대적인 치정멜로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심학규(정우성)는 성추행 루머 때문에 지방으로 내려왔다가 거기서 덕이(이솜)를 만나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 ‘욕망에 눈 멀다, 집착에 눈 뜨다라는 포스터 문구가 보여주듯이 심학규는 점점 욕망에 빠져들어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이고, 덕이는 집착에 눈을 떠 파괴적인 사랑을 하게 되는 여자다.

 

사진출처: 영화 <마담 뺑덕>

심학규의 설정이 소설가인데다 영화가 그의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고 있어 영화는 다분히 문학적인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러한 문학적 표현이 너무 지나치게 인물의 심리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이 작품의 치명적인 오류다. 만남에서부터 갑자기 눈이 맞아 버리는 심학규와 덕이의 이야기에는 치밀한 심리 묘사가 빠져 있다. 그래서일까. 인물들은 살아서 움직인다기보다는 마치 감독이 정해놓은 길 위에서 역할 연기를 하는 것처럼 관객에게 몰입감을 주지 못한다.

 

그저 내레이션이 욕망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인물은 욕망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심학규나 덕이의 심정에 똑같이 동화되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영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심청전이라는 고전이 정해놓은 길을 억지로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만든다. 갑자기 심학규의 아내가 죽고, 갑자기 그가 눈을 멀어가고, 갑자기 그의 딸이 팔려가는 상황들은 만일 심청전이라는 텍스트를 우리가 모른다면 지극히 인위적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마담 뺑덕>심청전이라는 텍스트를 가져오긴 했지만 완전한 재해석이라기보다는 마치 텍스트를 이용하는 듯한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것은 굳이 <마담 뺑덕>이라는 제목을 내세워 현대적인 재해석을 하고는 있지만 그 새로운 주제의식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 것도 한 몫을 차지한다. ‘춘향전을 방자의 시선으로 재해석해낸 <방자전>을 떠올려보라. 거기에는 방자의 시선이 갖는 서민적인 시각이 현재의 관객들로 하여금 그 재해석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반면 <마담 뺑덕>은 그저 치정극에 머물렀을 뿐, 현대적 의미를 되살리지는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전반부의 정조와 후반부의 정조가 너무나 다르다. 전반부의 학규와 덕이의 빗나간 사랑은 무언가 벌어질 듯한 기대감을 한껏 만들어내지만 후반부는 급격히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미진하게 마무리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니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의 잔상에 남는 것은 어떤 정조나 정서가 아니라 정우성과 이솜의 벗은 몸뿐이다. 그것이 어떤 아련함이나 아픔, 강렬함으로 여운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동안 <색계> 같은 작품이 성공하면서 중년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노출 수위가 높은 작품들이 자주 상영되곤 했다. 송승헌이 노출연기를 선보인 <인간중독>은 물론 그 하려는 이야기는 달라도 <색계>를 다분히 염두에 둔 작품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노출 수위가 높다고 하더라도 관객들이 바로 그것 하나 때문에 영화관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노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년들에게 걸맞는 사랑과 사회에 대한 작가의 수준 높은 시각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마담 뺑덕>심청전이라는 텍스트를 끌고 와 그저 노출을 위해 활용하고 있는 듯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노출만이 이 작품의 목적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노출 이외에 그다지 남지 않는 메시지나 여운은 이 작품의 목적이 결국 그런 자극에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어디 관객들이 그리 단순할까. 영화가 무언가를 전해주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정우성이 벗어도 안 된다는 걸 <마담 뺑덕>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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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타K6>의 새로움, 곽진언이다

 

곽진언이 심상찮다. Mnet <슈퍼스타K6> 첫 회에 등장하면서부터 화제가 되었던 곽진언. 그가 만들어낸 콜라보레이션은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으며 그의 존재감을 한껏 알렸다. 대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임도혁, 김필과 함께 부른 벗님들의 당신만이, 김필과 부른 들국화의 걱정말아요는 지금 음원차트 상위권에 모두 랭크되어 있다.

 

'슈퍼스타K6(사진출처:Mnet)'

김동률과 서태지 그리고 윤하 같은 쟁쟁한 가수들의 음원이 발표된 시점에서 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콜라보레이션 곡이 이처럼 힘을 발휘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물론 그것은 임도혁이나 김필 같은 절정의 가창력을 보여주는 이들의 하모니가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김필이 갈고 닦여져 듣기 좋은 목소리로 시원스럽게 고음을 찍어준다면, 임도혁은 거기에 소울풀한 감성을 덧붙여준다. 결코 곽진언의 개성 강한 저음만으로는 나올 수 없는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체 콜라보레이션의 핵심으로 칭찬받는 이는 단연 곽진언이다. 도대체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윤종신은 그것을 곽진언이 가진 프로듀싱 능력이라고 말했다. 노래를 재해석해내는 능력이 어떤 곡이든 곽진언화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필은 11 대결 미션에서도 자신이 승자가 되었으면서도 못내 곽진언에 대한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곽진언이 만들어 놓은 판이 있어 김필의 보컬이 더 돋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곽진언의 특별함은 노래를 한다기보다는 마치 읊조리듯 이야기를 건네는 그 특유의 감성에 있다. 그가 처음 <슈퍼스타K6> 무대에 올라 부른 후회라는 곡은 단 몇 분만에 나르샤의 눈에 눈물을 맺게 할 정도로 강력한 곽진언만의 감성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원한다 해도 안되는 게 몇 가지 있지로 시작한 노래가 사랑하는 우리 엄마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룰 때 듣는 이들의 마음은 한없이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마치 김민기나 정태춘을 듣는 듯한 감성이다. 노래란 듣기 좋은 소리이기도 하지만 마음과 마음을 전하는 일종의 소통이자 교감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곽진언의 노래는 마치 얘기를 전해주듯 상대방의 마음을 뒤흔드는 힘이 있다. 이런 힘은 콜라보레이션에서도 그대로 발휘된다. 김필과 부른 걱정말아요 그대에서는 시작과 함께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하나 둘 셋을 읊조리는 곽진언에 의해 그 노래의 감성이 먼저 만들어진다. 당신만이에서도 임도혁과 곽진언이 만들어낸 그 낮은 감성 위에 김필의 하이톤의 목소리가 날아가듯 얹어진다.

 

즉 겉으로 들려오는 화음 속에는 고음들이 먼저 들리기 마련이지만 그 고음을 어떤 울림으로 만들어내는 건 곽진언의 저음이라는 점이다. 마치 베이스가 뒤로 물러나 있으면서도 음악 전체를 끌어안는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곽진언의 목소리는 낮게 읊조려도 음악 전체의 느낌을 다르게 만들어내는 매력이 있다.

 

존박처럼 중저음이 좋은 가수들이 나오긴 했지만 곽진언처럼 낮은 톤에도 고음 못지않은 감성 전달을 가진 출연자는 아마도 <슈퍼스타K>에서도 처음이 아닐까 싶다. 만일 역대의 <슈퍼스타K>가 그 시즌마다 저마다의 특색을 갖고 진화해왔다면 이번 시즌은 어쩌면 곽진언이나 김필 같은 싱어 송 라이터들의 제전이 그 특색이 되지 않을까.

 

그 중에서도 곽진언 같은 싱어 송 라이터의 탄생은 그가 우승을 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슈퍼스타K6>가 이미 어느 정도의 성과를 가졌다는 성급한 판단마저 하게 만든다. <슈퍼스타K6>의 새로움은 단연 곽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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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의 왕 연기, 어떤 점이 달랐을까

 

확실히 믿고 보는 배우 한석규는 달랐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욕하는 모습조차 인간미로 소화해낸 한석규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 사극을 통해 봐왔던 왕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글을 창제하고 배포한 세종의 그 격의 없는 왕의 모습에서는 저잣거리 백성들을 향하는 그 낮은 자세가 느껴졌다. 교과서 속에 박제되어 있던 세종은 그렇게 한석규를 통해 재해석됐고 비로소 살아있는 인물로 되살아났다.

 

'비밀의 문(사진출처:SBS)'

그리고 돌아온 <비밀의 문>은 한석규의 영조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다.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왕의 면면이 평이할 리가 없다. 따라서 한석규가 해석해낸 영조는 자상한 면과 광기어린 면이 뒤섞여 있는 왕이다. 그 광기를 <비밀의 문>은 맹의라는 비밀문서를 통해 보여준다. 노론과의 결탁을 뜻하는 그 맹의에 수결함으로써 왕이 됐다는 그 사실은 영조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걸림돌이자 두려움이다.

 

<비밀의 문>은 일반적인 사극의 시작과는 사뭇 다르게 그 문을 열었다. 짧게 맹의에 수결하는 영조의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 맹의를 없애기 위해 심지어 승정원에 불을 지르는 영조를 통해 맹의가 가진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또 그것을 덮으려는 자와 밝히려는 자의 대결구도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바로 이 맹의의 존재감은 이 사극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힘이 된다. 바로 그 힘을 드라마 초반 시작 단 몇 분만에 실어주는 것이 다름 아닌 한석규의 연기다. 그는 광기와 두려움이 교차되는 모습을 통해 맹의라는 비밀문서가 가진 무게를 만들어냈다.

 

사실 <비밀의 문><뿌리 깊은 나무>의 장르적 특성과 유사한 점이 많다. 왕을 다뤘다는 점이 그렇고, 그 안에 미스테리한 추리극 요소를 집어넣었다는 점이 그렇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사하게 여겨지는 건 한석규가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것과는 다르게 왕을 재해석해낸다는 그 지점이다. 실제로 <비밀의 문>은 아직까지 <뿌리 깊은 나무> 만큼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팽팽한 긴장감과 보는 재미를 만들어내는 건 바로 이 한석규가 해석하는 영조 덕분이다.

 

<비밀의 문>이라는 사극이 가진 근본적인 힘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조선왕조 500년의 가장 불행한 가족사에서 나온다. 뒤주에 가둬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왕, 영조. 제 아무리 광기를 보였다고는 하나 아비가 자식을 죽인다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터다. 역사는 자식을 죽인 왕의 입장에서 쓰여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식을 죽인 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자식의 광기를 좀 더 극대화해야 했을 것이다.

 

<비밀의 문>은 이 부분을 재해석한다. 역사의 내용과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것. 맹의는 그래서 영조가 이런 극단적인 일을 선택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여기서 흥미로워지는 것은 사도세자의 광기가 아니라 영조의 광기가 이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역사 왜곡의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로서 <비밀의 문>이 이 새로운 해석을 통해 현재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면 용인될 수 있는 일이다.

 

과연 영조는 어떻게 변화해갈까.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은 지금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줄까. 이 드라마에서 이 모든 궁금증을 쥐고 있는 게 바로 영조라는 인물이다. 한석규의 입체적인 왕에 대한 해석은 그 영조를 깨워내고 있다. 다른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비밀의 문>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변화무쌍한 영조를 재창조하고 있는 한석규의 연기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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