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이동욱, 이렇게 슬프고 악동같은 저승사자라니

 

우리에게 저승사자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검은 도포 차림에 갓을 쓰고 파리한 입술을 한 채 망자들을 인도하는 모습. 거기에 인간적인 느낌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세상과의 인연은 끊어버리는 냉정한 역할을 하는 그들이니. 하지만 이제 그 굳건했던 저승사자의 이미지는 깨져버릴 것 같다. tvN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가 그려내고 있는 저승사자(이동욱) 덕분이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사진출처:tvN)'

물론 이 저승사자도 처음 등장했을 때는 저 <전설의 고향>에 나오던 그런 모습처럼 차가웠고 섬뜩했다. 하지만 도깨비 김신(공유)과 동거하기 시작하면서 이 저승사자는 때론 귀엽고 때론 아이 같으며 때론 깊은 슬픔을 숨기고 있는 듯한 쓸쓸함 같은 것들이 묻어났다. 물론 전생의 기억을 못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는 어딘지 모든 게 지워져버린 백지상태의 존재처럼 그려졌다.

 

<도깨비>에서 저승사자는 없는캐릭터다. 그는 이름이 없고 명함이 없다. 그간 어떻게 지내왔는지 집도 없어 보인다. 그는 도깨비의 집에 얹혀산다. 가족은 당연히 없고 친구도 있을 리 없다. 그에게 있어 보이는 건 동료들(저승사자들)인데, 그 동료들도 그와 그리 친해보이지는 않는다. 동료들은 그저 회식 때 돈을 내는 존재로 그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없는캐릭터가 하는 일은 망자들의 기억을 지우는 일이다. 이승을 떠나기 전 따뜻한 차 한 잔으로 그는 망자들을 떠나보낸다. 저승사자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슬픔 같은 것들은 그가 누군가의 기억을 지우고 또 그들을 떠나보내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지만 모두가 그를 떠난다. 기억조차 남기지 않은 채.

 

없다는 건 모든 것이 없는상태에서는 자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없는캐릭터가 써니(유인나)를 만나면서 비로소 그 없다는 것이 자각된다. 그래서 그는 삼신할미 앞에서 그녀를 보고는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이런 일은 또 벌어진다. 김신이 갖고 있었던 과거 왕비의 초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 기억이 없던 그가 써니와 김신을 만나면서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그건 그가 그간 자각하지 못했던 슬픔 같은 감정들이 그의 안에 응축되어 있다는 걸 알게 해준다.

 

이름도 없고 명함도 없고 직업도 없고 하다못해 핸드폰 하나 없어 전화번호도 교환하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저승사자지만, 그런 없는 것이 하나 중요하지 않은 듯 써니는 그의 가슴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다. 써니에게 명함이 있냐고 묻는 저승사자에게 그녀는 예쁜 얼굴이 명함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저승사자의 취미가 어느새 써니가 된 까닭이다.

 

아무 것도 없는 백지 상태 같은 존재여서일까. 저승사자의 사랑은 그래서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취미가 뭐냐고 묻는 써니의 질문에 그는 써니씨가 취미라고 말하고 써니씨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동에 맹목적으로 끌린다.”고 한다. 새로 생긴 써니씨라는 취미가 신의 계획 같기도 하고 실수 같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저승사자가 슬픈 캐릭터로 탄생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을 포함해 사실상 인연을 끊는 일을 하고 살아가는 그가 주변 인물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다. 그는 도깨비 김신과 마치 형제 같은 브로맨스 관계를 만들었고 지은탁(김고은)에게는 마치 오빠 같고 삼촌 같은 관계가 되었으며 무엇보다 써니와는 연인 관계가 되어버렸다. 죽음을 통해서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 운명의 그가, 함께 살고픈 관계를 맺는다는 건 그래서 비극을 내포한다.

 

<전설의 고향> 속의 천편일률적인 저승사자 캐릭터 이미지는 확실히 깨져버렸다. 인간적인 면들을 부여한 <도깨비>의 저승사자는 그래서 이제는 공포와 두려움의 존재가 아닌 어딘지 쓸쓸하고 슬픈 존재로 재탄생했다. 이것은 김은숙 작가의 새로운 캐릭터 해석에 의해 가능해진 일이지만 또한 이동욱이라는 배우가 드디어 제 몸에 맞는 인생 캐릭터를 입음으로서 구체화됐다.

 

이미 <아이언맨>을 통해 슬쩍 드러난 것이지만 이동욱은 어딘지 겉으로는 차갑고 냉정한 이미지에 안으로는 뜨거운 열정 같은 걸 갖고 있는 배우다. 그래서 무표정한 얼굴로 있으면 한없이 냉정한 느낌을 주지만 그런 그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때는 마치 그 얼음이 녹아들어 흘러내리는 물 같은 처연함을 느끼게 해준다. <도깨비>의 저승사자 캐릭터는 더할 나위 없이 이동욱의 이러한 진가를 드러내준다. 이토록 슬프고 처연하면서도 악동 같은 저승사자라니

반인반수 영웅으로 재탄생된 이승기의 구미호

 

왜 <구가의 서>가 다루는 우리네 민초들의 영웅은 반인반수로 태어났을까. 이승기에 의해 재탄생된 구미호는 우리가 <전설의 고향>에서 보던 “서방님 하루만 더 참았어도...”하며 원망의 눈길을 보내던 그 구미호가 아니다. 우리네 전설에서 구미호라는 존재가 한이 내면화된 민초들의 억압에서 탄생한 존재라면, <구가의 서>의 반인반수 최강치(이승기)는 안으로 꼭꼭 숨겨두는 한보다는 겉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에서 탄생한 존재다.

 

'구가의 서'(사진출처:MBC)

확실히 지금은 조선시대의 수동적인 구미호의 신파가 감흥을 잃은 시대다. 아마도 70년대 가부장적인 가족체계 내에서라면 이른바 고부갈등과 시집살이에 꾹꾹 눌려진 억압이 구미호의 신파적인 변신만으로도 눈물로 풀어져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라진 시대는 달라진 구미호를 요구한다. 최강치가 그려내는 구미호 이야기는 그래서 신파가 아니라 활극에 가깝고, 내면화된 욕망을 풀어내는 공포가 아니라 좀 더 겉으로 드러내는 판타지에 가깝다.

 

“다 죽여버릴거야!”라고 외치는 분노의 최강치는 그래서 그 최대의 적이 바로 자신이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도무지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지만, 바로 그런 엄청난 반수의 힘은 어느 쪽으로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마치 핵을 가지고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최강치는 지금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거북선을 만들려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유동근)과 백년객관을 빼앗고 왜구들과도 결탁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희대의 간웅 조관웅(이성재) 사이에서 줄다리기가 되고 있는 존재다.

 

조선시대의 구미호 전설을 재해석하고 있지만 <구가의 서>는 그래서 무수한 현대의 영웅담과 판타지물의 흔적들이 들어있다. 분노하면 반수로 변신해 자신도 모르게 모든 적을 살상하는 그 모습은 헐크를 닮았고, 다른 존재로서의 외로운 영웅의 모습은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을 닮았으며, 영웅의 인간적인 고뇌는 배트맨을 닮았다.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전라도는 배트맨의 고담시처럼 고립된 인상이 짙고, 그걸 장악하는 조관웅은 고담시나 뉴욕을 꿀꺽 삼키기 위해 테러를 일삼는 악당을 닮았다.

 

물론 여기에는 영웅담 이외에 판타지물의 흔적도 담겨 있다. 지리산을 지키는 신수 구월령(최진혁)과 소정법사(김희원)는 <반지의 제왕>의 요정과 마법사를 떠올리게 하고, 담여울(수지)과 최강치의 관계 설정은 일본 만화 <이누야사>를 닮았다. <구가의 서>는 이처럼 그간 <전설의 고향>이 다루던 전통적인 구미호와는 확연히 다른 캐릭터다. 우리만의 특수성을 가진 구미호라는 캐릭터를 전 세계 보편적인 변신 캐릭터들(이를테면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에서 현대적인 슈퍼히어로에 이르는)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달라진 구미호 최강치는 민초들에게 어떤 영웅일까. 과거의 구미호 텍스트들은 구미호보다 더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으로 당대의 신분구조가 주는 억압을 해체시켰다. 양반과 상놈의 신분구조는 인간과 구미호로 치환되었고, 구미호는 공포의 존재가 되어 인간을 깨우치는 이야기로 그려진다. 2000년대가 넘어 재탄생된 구미호 이야기들은(이를 테면 <여우누이뎐>같은) 구미호보다 심지어 더 공포스런 인간들을 비판한다. <구가의 서>가 그리는 구미호도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인간이지만 반인반수보다 못한 조관웅이 등장한다.

 

하지만 최강치라는 새로운 영웅이 하려는 것은 조관웅을 죽이는 사적인 복수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굳이 등장한 이유다. 이 반인반수의 영웅은 임진왜란과 무적의 이순신이라는 존재 옆에 생겨난 판타지다. 그런 점에서 <구가의 서>의 구미호는 사회적 억압이 만들어낸 공포의 캐릭터가 아니라, 사회적 분노가 만들어낸 영웅에 가깝다. 권세에 기대 뭐든 갖고 싶은 것을 취하려는 조관웅은 그래서 사회적 분노를 일으키는 공공의 적이 된다.

 

최강치라는 새로운 구미호는 현대인들의 분노가 응축되어 만들어진 캐릭터다. 분노에 의해 만들어진 그의 강력한 힘은 이미 신분체계의 벽을 넘어선다. 하지만 괴물과 싸우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는 일이다. 최강치에게 남겨진 문제는 그래서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된다. 현대인들이 갖고 살아가는 분노가 그러한 것처럼.

<장옥정>, <구가의 서>, 사극의 선을 넘다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나 등장인물과 사건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픽션화 된 부분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런 문구와 함께 <장옥정, 사랑에 살다(이하 장옥정)>는 조선시대에는 있었을 법 하지 않은 공간에서 시작한다. 지금으로 치면 청담동 의상실 정도 될까. 나무를 깎아 만든 마네킹에 입혀진 색색의 한복과 장신구를 꼼꼼히 살피는 장옥정(김태희)은 누가 봐도 조선판 패션 디자이너다. 그 곳으로 훗날 장옥정과 라이벌이 될, 미래의 인현왕후 민씨(홍수현)와 최무수리(한승연)가 들어온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사진출처:SBS)

이 곳이 이 사극의 첫 번째 시퀀스로 등장하는 이유는 그 공간을 빌어 장차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옷들이 너무 화려하다는 민씨의 말에 장옥정은 “나비를 부르는 꽃들의 유혹”을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자 민씨는 “나비가 꽃을 찾는 것이지 어찌 꽃을 유혹”하냐고 되묻는다. 장옥정은 “그건 비유일 뿐이고 사내에게 사랑받는 옷을 만들고자 함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시퀀스는 훗날의 인현왕후와 장옥정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이다.

 

민씨의 이어지는 이야기는 앞으로 전개될 사극의 성격까지 보여준다. “경박해. 난 그런 거 필요 없네. 내가 필요한 옷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양의 무취 같은 색감이야. 그래서 늘 한결같고 근엄해 보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그것이 왕후의 덕목이니까. 자네 옷은 아름답지만 내가 원하는 전통이 느껴지지 않아.” 민씨가 가진 고상한 취향을 말해주는 대사 같지만 여기에는 앞으로 장옥정을 따라갈 이 사극이 품위나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심지어 유혹적이고 경박해 보일 지라도 속내를 과감히 드러내는 그런 이야기를 담을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극에 대한 도발이면서 역사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미 수없이 역사에서 악녀로 다뤄졌던 장옥정을 거꾸로 뒤집는 이야기.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장옥정은 기생들을 모델로 세우고 마님들을 부용정에 초대해 조선시대판 패션쇼를 벌인다. 한복은 색색으로 반짝거리고 그 옷을 입은 기생들은 사뿐사뿐 런웨이를 걷는다. 뒤에서는 패션디자이너 선생이 된 장옥정이 모델들의 옷을 일일이 점검하고 감독한다. 사극으로서는 파격적인 연출이다. 화려하고 유혹적인 장면들이지만 역사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이거 사극이 맞아 하고 물을 정도로 너무 과감한 건 아닌가 하는 아슬아슬함도 있는 게 사실이다. 의상실에 패션디자이너에 패션쇼까지. 현대를 사극으로 옮긴 듯한 장면들이다.

 

<장옥정>과 동시에 시작하는 MBC의 <구가의 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사실 <구가의 서>를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사극이라는 범주에 넣는다는 것은 애매하다. 이것은 차라리 과거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 자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 드라마의 공간 또한 지극히 판타지적이다. ‘그곳은 기괴하고 감히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험한 산세. 태곳적 산을 지키는 영물들만이 때때로 출몰한다는 그 곳. 이름 하여 달빛 정원.’ 이 드라마는 지리산의 어딘가에 있다는 이 달빛 정원의 수호신인 구월령(최진혁)이 억울하게 역모로 폐가하고 관비로 내쳐진 윤서화(이연희)를 사모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역사적인 사건과 연루된 이야기라기보다는 구미호라는 전설에 기댄 사랑과 복수의 이야기가 <구가의 서>가 다루는 것이다. 물론 옛 말투를 흉내 내고는 있지만 사실상 현대어를 쓴다고 해도 그다지 이물감이 없을 법한 설정이다. 사극이 <조선왕조 오백년>같은 정사에서 <허준> 같은 퓨전사극으로 이어지는 한 줄기의 흐름과, <전설의 고향>류의 야사와 전설에서 <쾌도 홍길동>이나 <일지매>를 거쳐 <아랑사또전>에 이르는 일련의 옛이야기의 흐름으로 나눠져 왔다면 <구가의 서>는 후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장옥정>이 역사에 기록된 시각을 뒤틀어 장옥정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구가의 서>는 아예 역사 바깥으로 나가 마음껏 이야기의 한계를 넘어선다. 이것은 사극의 외연이 확장된 것일까 아니면 현대극이 사극을 침식해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최근 사극들은 확실히 화려해졌고 더 풍부한 이야기들을 담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와는 점점 더 결별을 고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 시점에서 역사왜곡이라는 말은 이제 구태의연한 낱말처럼 들린다. 이것은 최근 들어 왜곡의 문제가 아니라 사극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의 문제가 되었다.

 

사극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를 투영하는 그릇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역사의 변형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일 수밖에 없을 게다. 이제 중요해진 것은 역사와 맞냐 맞지 않냐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나 연출이 얼마나 완성도가 있고 극적인 개연성이 있느냐가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 남는 허전함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과거에 사극이라고 하면 우리가 느끼던 그 독특한 분위기와 아우라를 이제는 점점 느끼기 어려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민씨가 말하듯 이제 “무양의 무취 같은” 그런 사극은 존립 자체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늘 한결같고 근엄해 보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그런 사극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귀신이 귀여울 정도로 인간은 무서웠다

 

여름철 납량특집 하면 딱 떠오르는 건? <전설의 고향> 같은 귀신 나오는 공포물이 아닐까. 하지만 최근 들어 이건 옛말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공포물 자체가 방영되지 않는 상황이고 그 중에서도 귀신 얘기는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물론 올해는 런던 올림픽이 있었기 때문에 자정부터 새벽까지 납량특집이 편성될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작금의 공포물을 찾아보기 힘든 원인은 이런 시의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공포물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달라진 시선이 존재한다.

 

'아랑사또전'(사진출처:MBC)

한국형 공포물의 대명사였던 <전설의 고향>은 1977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12년 간 578회를 방영하다가 종영했다. 그러다 1996년에 다시 방영이 재개돼서 1999년까지 방영되었고, 그 후로는 여름 시즌 납량특집으로 2008년에 8편, 2009년에 10편이 방영되었다. 이렇게 장구한 세월동안 명맥을 이어왔던 ‘전설의 고향’이 2009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방영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현재의 TV 공포물이 처한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확실히 시대는 바뀌었다. 귀신은 그 자체로 더 이상 우리에게 무서운 존재가 아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아랑사또전>은 본래 <전설의 고향>에서도 자주 다루어졌던 이야기다. 어느 고을에 사또가 부임하면 바로 죽어버리는 사건들이 반복되고 나중에 담이 센 사또가 부임해 알고 보니 원한을 가진 처녀귀신의 사연을 듣게 되는 이야기. 결국 사또가 억울한 원혼을 달래주고 고을은 평화를 찾는다는 그런 얘기다. 이 <전설의 고향>에서 공포물로 다뤄졌던 소재가 <아랑사또전>에서는 코믹으로 다뤄진다. 귀신 아랑은 무섭긴 커녕 귀엽고 웃기기까지 한 캐릭터다.

 

이러한 귀신 캐릭터의 변화는 <전설의 고향>이 내세웠던 공포의 대명사인 구미호가 최근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내 여자 친구는 구미호>나 최근 방영되고 있는 시트콤인 <천 번째 남자>에 등장하는 구미호들은 코믹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등장한다. 본래 공포물이란 그 안에 사회의 억압된 부분을 담기 마련이다. 그 억압이 귀신이나 이상한 존재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인데 구미호도 그런 존재다.

 

1970년대에 고부갈등 속에서 초창기 구미호가 열렬한 환호를 받았던 것은 당대 여성들의 억압과 해방이 그 특별한 공포 속에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구미호는 알다시피 맘만 먹으면 누구라도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런 구미호가 왜 굳이 사람이 되려 할까. 그것도 한 사람의 아내가. 이것은 다분히 전통적인 사회의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다. 당대의 구미호는 이런 식으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의 여성들을 그대로 대변하기도 했다.

 

즉 당대의 며느리들은 구미호를 통해 잠시 억압의 탈출을 경험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부장적 사회의 단면이 고부갈등으로 표출되던 1970년대가 아니다. 그러니 '구미호'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2010년도에 재해석된 '구미호 여우누이뎐'에서는 구미호보다 더 무서운 인간이 등장한다.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구미호의 간을 빼먹으려는 인간이 등장하는 것. 즉 21세기 가장 무섭고 억압적인 존재는 더 이상 귀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다 이제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같은 작품으로 와서는 이런 억압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와 다른 존재의 대변자로서 구미호와 인간이 공존하는 이야기가 다뤄진다. 이것은 구미호의 새로운 해석이다. 다양한 종족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는 지구촌화된 세상에 새로운 가치로 등장한다. 구미호 이야기는 이제 서로 다른 인종과 국가를 가진 이들이 서로 공존의 길을 찾는 그 보편적인 가치의 이야기로 재해석된다.

 

그렇다면 이제 달라진 시대에 공포물이란 더 이상 불필요한 것이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다만 귀신같은 황당한 이야기로서의 공포물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인 공포를 다루게 될 거라는 얘기다. 즉 이야기로서의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회적 공포라는 것을 대중들은 이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올 상반기 드라마에서 대중들을 열광시켰던 ‘추적자’나 ‘유령’ 같은 드라마는 그 기저에 공포물의 감성을 담고 있다. 즉 사회 권력에 의해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되는 개인의 공포를 다룬 것이 바로 ‘추적자’다. 또 ‘유령’은 개인 사찰의 문제라든가, 사이버 테러가 주는 공포를 다뤘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사회적 공포는 권력과 관련을 맺는다는 점에서 사회극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공포물이 사회극과 이란성 쌍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여고괴담’류의 귀신 이야기는 여전히 섬뜩하지만 그것이 섬뜩한 진짜 이유는 귀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여고생들이 처한 현실 상황이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최근의 공포물들은 이야기 자체의 공포가 아닌 사회적인 공포에 더 많이 천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즘의 공포는 확실히 사건 사고가 주는 공포가 더 크게 되었다. 워낙 끔찍한 사건 사고가 현실에 많다 보니 귀신 이야기 같은 것은 오히려 너무 약한 이야기로 여겨지게 된 것. 씁쓸한 현실이다.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묻지마 폭행, 비정규직이라는 위치를 악용해 벌어지는 성폭력, 마치 장난처럼 벌어지는 왕따 놀이, 그로 인해 생기는 비극들... 이것이 우리를 귀신이야기쯤은 귀여운 것으로 여겨지게 만드는 사회적 공포다. 이것이 작금의 달라진 공포물 얘기를 하다 보면 귀신보다 무서운 게 인간이라는 씁쓸한 현실을 발견하게 되는 이유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 인간 사회를 이토록 공포스럽게 만들어버린 걸까. 귀신이 오히려 귀여워지고 공포물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로 채워지는 이 경향은 우리네 현실의 살풍경을 잘 말해준다. 안타까운 일이다.

'천사의 유혹'과 '전설의 고향', 그 유사점과 차이

'천사의 유혹'에는 억울한 영혼들이 등장한다. 그 첫 번째 인물은 주아란(이소연)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무런 보상조차 받지 못한 그녀는 어린 동생과 함께 거리로 내몰려,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삶을 살아내고 결국 어린 동생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이 과거의 억울한 사정을 가진 영혼은 당시 그녀를 구렁텅이에 빠뜨린 신우섭(한진희) 가족에게 접근한다. 복수를 위해 그의 아들인 신현우(한상진)와 그녀는 결혼까지 하게 되고 그 후로 신우섭의 집은 그들이 알 수 없는 우환에 빠지게 된다.

신현우는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버리고, 결국 그가 치료받던 별장에 불이 나면서 죽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신현우의 어머니, 조경희(차화연)는 자기 자식을 죽인 사람이 되어버리고, 신현우의 동생은 갑작스런 형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술로 인생을 보낸다. 신우섭은 밤마다 괴문자를 받는데, 그 내용은 과거 주아란의 아버지 죽음에 대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 괴문자를 보낸 이는 어이없게도 조경희로 밝혀지면서 가족은 파탄지경에 이른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주아란이 주도면밀하게 꾸민 일들이다. 주아란이 하나하나 행하는 복수의 장면들은 공포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 앞에서 생글생글 웃던 그녀가 갑자기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마의 모습으로 돌변하고, 그렇게 악마 같던 모습으로 남편을 사지로 몰아넣고는 신우섭의 가족 앞에서는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오열을 해대는 그 끔찍한 변신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살아 돌아온 억울한 영혼과 그 영혼이 가족 속으로 들어와 그 가족을 파탄내는 복수의 이야기는 우리가 '전설의 고향'에서 흔히 보아왔던 것들이다. '전설의 고향'이 이런 이야기 구조를 갖고 대중들을 사로잡은 것은 그 시대가 갖는 억압을 공포물이라는 장르를 통해 풀어냈기 때문이다. 불합리한 가족제도의 틀 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원혼이 그 가족을 파탄내는 내용은, 공포물이 가진 금기를 넘어서는 짜릿함을 선사한다.

'천사의 유혹'이 가진 복수극의 틀도 이 '전설의 고향'의 틀과 다르지 않다. 다만 원혼의 이야기가 현대식으로 재해석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가 대중들에게 주는 재미의 차원 역시 '전설의 고향'의 그것과 유사하다. 즉 가족이라는 금기를 넘어서는 파격적인 내용이 그것이다. 갑자기 등장한 악녀 주아란을 통해 가족은 해체된다. 그리고 그것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 죽은 줄만 알았던 신현우가 얼굴을 싹 고치고 안재성(배수빈)이 되어 다시 돌아와 복수를 하는 것. 신우섭에게 밤마다 날아오는 괴문자가 '전설의 고향'의 원혼이 보내는 신호 같이 느껴지는 것처럼, 신현우가 안재성이 되는 이 현대의 의학기술은 '전설의 고향'으로 치자면 원혼의 변신술 정도로 보인다.

'천사의 유혹'이 '전설의 고향'이 가진 이야기틀을 갖고 있지만 물론 여기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전설의 고향'이 공포물이라는 안전한 장르 속에서 가족의 해체를 꾀하는 반면, '천사의 유혹'은 복수극이라는 다소 불안정한 틀 속에서 가족의 해체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공포물 속에서의 가족의 해체는 그것 자체가 리얼리티일 수가 없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우화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복수극 속에서의 가족의 해체는 어느 정도의 리얼리티를 담보함으로써(이를테면 과학기술이나 사건전개의 논리성을 통해) 오히려 현실적인 느낌을 주게 된다. 이것이 똑같은 가족 해체의 금기를 넘어서는 재미를 갖고 있지만 '전설의 고향'이 안전한 반면, '천사의 유혹'이 위험한 이유다. 이런 점에서 '천사의 유혹'이 갖고 있는 얼개의 느슨함은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이러한 위험성을 상당부분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개연성이 떨어지지만 빠르게 진행되는 전개는 마치 이 모든 상황을 게임처럼 만들어버리는 속성이 있다. 극적 장면에서 실소가 터지기도 하는 것은 바로 그 몰입을 방해하는 전개 때문이다.

'천사의 유혹'은 이런 면에서 보면 그저 막장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이 작품만의 특유한 재미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진지함을 버리고 게임처럼 구사되는 가족 해체극 정도랄까. '전설의 고향'이 그 공포극이라는 틀을 가져와 가족해체라는 금기를 넘어섰던 것처럼, '천사의 유혹'은 게임이라는 틀을 가져와 같은 묘미를 추구하려는 것은 아닐까. '천사의 유혹'이 현대판 '전설의 고향'으로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귀신보다 무서운 건 시대의 억압이다

돌아온 ‘전설의 고향’의 귀신들은 과거와 비교해서 달라진 점이 없다. 그럼에도 그토록 무서웠던 귀신들이 무섭지 않고, 오히려 예쁘고 심지어는 슬프게 보여진 이유는 무얼까. 그것은 귀신이 태어났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설의 고향’의 귀신들의 면면을 보면 저마다 탄생의 이유를 갖고 있다. ‘구미호’는 당대 가부장적 사회에 대해 도발로써 탄생한 것이며, ‘아가야 청산가자’의 아기를 억울하게 읽게된 어미 귀신은 가진 자에 의해 아기마저 빼앗기는 못 가진 자의 처지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어미의 모성애와 연결시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진검의 저주’는 왕권을 지탱하기 위해 핍박받은(인신공양의 제물이 된) 자가 귀신으로 탄생하고, ‘오구도령’은 어찌할 길 없는 전염병 앞에 억울하게 죽었을 민초들이 귀신으로 환생한다. ‘기방괴담’은 여성, 그것도 기생이라는 신분이 가진 사회적 억압이 귀신으로 화하며, ‘환향녀’는 여성들에게 강요되었던 순결과 정조에 의해 살아 돌아온 자들을 다시 죽음으로 내모는 상황이 귀신을 탄생하게 한다.

따라서 ‘전설의 고향’의 귀신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인 억압의 대상들이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사연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그 억압을 풀어헤치려 하고 그 안전한 방법은 귀신을 선택하게 된 것. 귀신의 행위 하나하나는 그저 표피적으로 누군가를 무섭게 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억압된 감정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 표현을 누군가 듣고 이해하게 됐을 때, 귀신의 저주는 끝이 난다.

귀신들이 무섭지 않은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귀신들은 누군가를 해코지하기 위해 무차별적인 보복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 억울함을 토로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뿐이다. 바로 이런 귀신에 대한 이해는 그 공포의 존재를 동정의 대상으로 바꾸어놓는다. 이는 거꾸로 뒤집어 생각하면 귀신이 그토록 두려운 것은 그 불가해한 존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설의 고향’이 탄생했던 70년대 말과 21세기는 그만큼 시대적인 간극이 넓다. 현대이지만 여전히 가부장적 가치체계가 그대로였던 70년대 말, 사회적 억압은 여전했고 그 속에서 귀신은 공포의 존재일 수 있었다.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그 귀신들은 억압하는 자들의 내부 속에 감춰진 죄의식을 끄집어내기에 충분했고, 억압된 자들의 한을 위무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이 귀신들의 억압은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과거 억압의 기억을 갖고 있는 중ㆍ장년층이라면 향수 어린 시선으로 그 귀신들의 통쾌 살벌한 이야기 속에 빠져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들에게 이 귀신들의 사연은 옛이야기 속의 하나일 뿐, 현재진행형의 울림을 주지는 못한다. 따라서 ‘전설의 고향’은 더 이상 ‘무서운 귀신 이야기’의 대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말 그대로의 전설, 즉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머문다. 굳이 ‘전설의 고향’을 가지고 공포극이라 규정지을 필요가 있을까. 공포가 아니라도 귀신이야기가 아니라도 전설은 그 자체로 옛이야기의 재미를 선사할 테니 말이다.

‘전설의 고향’, 재해석이 필요한 이유

너무 무섭고 엽기적인 것들에 익숙해져서일까. 다시 돌아온 ‘전설의 고향’이 하나도 무섭지 않은 것은. 아마도 수없이 많아진 공포의 코드들에 자극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우리에게 ‘전설의 고향’이 보여주는 전통적인 공포의 이야기 구조는 싱겁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1편으로 방영된 ‘구미호’가 현대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구미호 이야기를 가져온 것은 의미가 있다. 갖은 고생 끝에 사람이 되려는 전통적인 ‘구미호’의 이야기는 억눌린 자의 두 가지 얼굴(아내와 요물)이 공포의 핵심이다. 즉 구미호가 공포의 주인공인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해석된 ‘구미호’에서 공포의 주체는 구미호가 아니다. 물론 꼬리 아홉 달린 기괴한 모습으로 나오지만 이 사극의 진짜 공포는 인간이다. 구미호의 내단과 피를 먹으면서까지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인간의 욕망이 더 공포스럽다는 이 해석은 전통적인 구미호가 주는 공포의 재미는 주지 못하지만, 현대적인 의미에는 잘 부합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금은 귀신보다는 사람이 더 공포의 대상이 되는 시대다.

2편 ‘아가야 청산가자’는 좀더 정통적인 ‘전설의 고향’ 특유의 공포를 선사했다. 이것은 우리네 귀신만이 가지는 특징을 잘 포착했기에 정통적이면서도 공포스러울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네 귀신의 특징이란 원한이 가족애와 맞닿는 지점에 있다. 자신의 아기를 살리기 위해 다른 아기를 죽이는 것이나, 그 죽은 아기 때문에 귀신으로 나타나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하는 것은 모두 어긋난 가족애의 하나다. 이 모성은 시대가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 ‘아가야 청산가자’는 바로 그 부분을 잘 포착하면서 전통과 현대를 이었다.

반면 3편 ‘사진검의 저주’는 현대적인 해석이 들어있지도 않았고, 또 그렇다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가치관에 천착하지도 않았다. 만일 억울하게 희생양이 된 귀신과 그 딸 사이의 절절한 모정을 좀더 부각시켰거나, 아니면 살인사건을 추격하는 별순검류의 접근방식을 통해 미신 앞에 비정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야장들을 좀더 중심에 두고 그렸다면 이야기는 좀더 공포스러웠을 지도 모른다.

그저 알 수 없는 살인이 벌어지고, 그걸 누군가 추적하며, 알고 보니 귀신의 짓이었고, 그 추적하는 자가 귀신의 사연을 알게되고, 귀신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식을 향한 모정 때문에 복수를 포기하게 되며, “네 아픔, 고통, 한을 이해한다”는 말에 마음을 움직인 귀신이 자신이 갈 자리인 저승으로 떠나는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는 지금 시대와는 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복수를 하지도 못하며, 이승과 저승으로 나뉘어져, 한을 토로하는 소극적인 저항을 하다가 결국에는 저승으로 가게 되는 이 마음 착하고 체제 순응적인  지금 시대에 횡행하는 어떤 얘기도 통하지 않는 괴물 같은 살인자들보다 더 무서울 수 있을까. ‘전설의 고향’이 무섭지 않은 것은 그 이야기 구조가 낡아서가 아니라, 어쩌면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이 현실(인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현대적인 해석은 이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지금의 ‘구미호’들은 어떤 변신욕구를 갖고 있을까

드디어 21세기 식으로 재해석된 ‘전설의 고향’이 베일을 벗었다. 그 첫 타자는 ‘전설의 고향’의 상징이 되어버린 ‘구미호’. 여전히 아홉 개의 꼬리를 달고 소복을 입고 산발한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뭔가 느낌이 확 다르다. 물론 1970년대의 구미호와 2000년대의 구미호가 같다면 구태의연한 재연에 불과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재해석에 있어서 원전의 기본 틀이나 전제, 즉 전통에 대한 존중은 필요한 법이다.

본래 ‘구미호’의 백미는 착하고 순하기만 한 아내가 순간적으로 끔찍한 구미호의 얼굴로 변신하는 그 장면에 있다. 흐릿한 호롱불 아래, 남편과 아내의 평범한 저녁의 일상이 보인다. 아내는 바느질을 하고 있고,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불현듯 떠오른 듯 옛날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구미호를 만났던 이야기를 해준다. 해서는 안 되는 그 얘기를 하는 순간, 카메라는 살짝 남편 뒤쪽으로 가려졌던 아내를 비춘다. 거기에는 아내는 사라지고 분노와 한에 서린 구미호가 앉아있다.

이 초창기 구미호가 열렬한 환호를 받았던 것은 당대 여성들의 억압과 해방이 그 특별한 공포 속에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구미호의 캐릭터는 무엇보다 그 변신능력과 사람의 간을 빼먹는 두려움으로 구성된다. 변신하기 위해 재주를 폴짝폴짝 뛰어넘기만 하면 되던 구미호가 왜 사람이 되려 하며, 또 한 사람의 아내가 되려 하는지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다분히 전통적인 사회의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다. 따라서 한 남편의 아내로서 사람행세를 하기 위해 긴긴 세월을 참으며 살아가는 구미호의 모습은 가부장적 세계관에서 억눌려온 우리네 며느리들을 대변한다.

중요한 것은 이 아내로서 사람으로서 살려 했던 구미호가 결국은 그것을 포기하고(이것은 남편의 저버린 약속 때문이다), 다시 여우로 떠나간다는 설정이다. 이 부분에서 당대의 시집살이하던 며느리들은 공포라는 장르 속에서나마 억압의 탈출을 경험한다. 떠나간 구미호를 뒤늦게 그리워하며 아쉬워하는 남편의 뒤늦은 후회는 ‘구미호’가 인간이 되기 위해(며느리가 사람대접 받기 위해) 겪은 천 년 동안의 힘겨운 시집살이에 대한 소극적인 위안이 된다. 자유로운 한 인간이 보수적인 사회 속에서 아내라는 변신을 강요받고, 또 그 아내가 다시 자유로운 인간으로 변신하고자 하는 이 욕구의 반복은 ‘구미호’가 가진 핵심적인 재미를 구성한다.

하지만 사회가 바뀌어서일까. 새로 재해석된 ‘구미호’에는 남편의 비밀얘기와 그 순간 변신하는 아내의 모습이 들어가 있지 않다. 즉 변신욕구는 이 새로운 ‘구미호’에서는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현대적인 여성의 가치관이 더 많이 투영되어 있다. 혼례를 치르는 것이 사실은 죽음을 은폐하기 위한 의식이 되는 부분에서 ‘결혼은 죽음이다’라는 현대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건 그 때문이다.

사회는 개화되고 있지만(시대적 배경이 근대 초이다) 남성들은 여전히 부귀영화를 누리고 무병장수 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하는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전통에 빠져 있고, 여성들은 그 전통 속에서 여전히 신음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것은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권리가 주어지고 있다 말해지는 지금 사회가 여전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남성들의 암묵적인 불합리의 전통에 싸여있다는 것을 강변하는 것만 같다.

‘구미호’의 공포는 그 억압의 강도가 높고 따라서 변신의 욕구가 강할수록 더 강렬해진다. 이렇게 착하던 얼굴의 그녀가 사실은 그 속에 끔찍한 여우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는 그 사실이 공포의 고갱이가 되는 것이다. 만일 이 ‘구미호’가 과거의 틀, 즉 변신욕구를 충만히 가진 구미호의 모습을 재연했다면 공포는 더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지금 달라진 사회에서 그다지 의미가 없는 향수 어린 억압의 기억에 머무르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새로운 ‘구미호’에서 아쉬운 것은 지금의 구미호들(?)이 어떤 변신욕구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좀더 깊은 연구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돌아온 ‘전설의 고향’, 그 재미요소와 관전 포인트

하얀 소복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그 속으로 핏빛 한으로 이글거리는 두 눈. 마치 TV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실 “지나갔어?”하고 물어보던 그 귀신이 돌아왔다. 다름 아닌 ‘전설의 고향’의 재림이다. 77년부터 무려 12년 간 매주 570여 편을 방영했고, 96년부터 99년까지 70여 편이 방영되었으며 이제 2000년대 들어 다시 방영되고 있으니, 이 드라마는 세대를 뛰어넘는 고전 중의 고전인 셈이다.

‘전설의 고향’의 특별한 공포
이렇게 된 데는 ‘전설의 고향’이라는 형식이 가진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드라마는 각 지방마다 하나씩은 꼭 있게 마련인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傳說)를 극화한 것이다. 거기에는 특이한 자연물에 대한 유래나 인물에 얽힌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다. 이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재미있는데다가, 지방의 연원이나 특색을 담고 있고, 또한 적정한 교훈도 갖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 컨텐츠로서 그만일 수밖에 없다.

‘전설의 고향’의 상징이 된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나, “내 다리 내놔”란 유행어로 잘 알려진 ‘덕대골’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이 드라마의 기본 힘은 공포에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공포물이면서도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끔찍한 피와 살점이 튀는 요즘의 공포물들과 비교해보면 ‘전설의 고향’의 영상은 그저 밋밋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뇌리 속에 오래도록 남는 그 공포감은 직접적인 장면의 잔혹함보다는 간접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스토리의 무서움에서 비롯된다.

게다가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의 한 속에는 저마다 복수의 이유들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결국 이 스토리들이 권선징악의 보편 타당한 교훈들을 갖게 만든다. 따라서 마지막에 가서 “이 이야기는 ○○○에서 전해져오는 것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라는 정리 멘트로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퓨전사극 시대, ‘전설의 고향’은?
초창기의 ‘전설의 고향’이 이런 모든 장점들을 다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조악했던 특수효과와 영상기술 덕분이다. ‘전설의 고향’만이 갖는 공포에는 사실 어색한 분장이나 연출 같은 것에서 비롯되는 촌스러움의 미학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마치 처음 봤을 때는 화들짝 놀라고 나서, 다음에는 ‘내가 이런 어설픈 것에 놀랐어?’하는 안도감으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과거 조악했던 괴기전의 공포와 유사하다. 90년대에 새롭게 제작된 ‘전설의 고향’은 CG효과를 너무 쓰다가 오히려 이러한 ‘전설의 고향’만의 특별한 공포체험을 잃게 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새롭게 시작하는 ‘전설의 고향’은 어떨까. 일단 컨텐츠는 과거의 것들 속에서 나온 것이라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본래 전설이란 그 화자의 이야기 방식에 따라 전혀 새로운 재미를 주게 마련. 공포와 액션과 스릴러와 해학까지 겸비한 ‘전설의 고향’의 새로운 버전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과거와는 달라진 사극 그 자체다. 이제 사극은 좀더 현대적인 퓨전사극의 시대로 가고 있다. 이 새로운 사극을 주도한 ‘한성별곡-正’의 곽정한 PD(구미호 편 연출), ‘쾌도 홍길동’의 이정섭 PD(오구도령 편 연출)의 연출이 기대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편 최수종, 안재모, 이덕화, 이민우 같은 걸출한 사극 연기자들이 등장하는 것도 새로운 볼거리 중의 하나이다.

다시 돌아온 ‘전설의 고향’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한 여름의 킬러 컨텐츠가 분명하다. 거기에는 우리 식의 토속적인 공포와 해학이 있고, 권선징악의 보편타당한 정서가 있다. 이 기본 골격 위에 새로운 뉴웨이브 사극 감독들이 펼치는 연출의 묘미와 걸출한 사극 지존들의 연기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관전 포인트가 된다. 어쩌면 ‘전설의 고향’ 같은 컨텐츠는 스토리에 목말라하면서, 사극에서조차 고증보다는 상상력을 더 요하게 만드는 지금 같은 시대에 더 잘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설의 고향’이 다시 전설이 될 것인지, 아니면 그저 과거의 전설로만 남게 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BLOG main image
더키앙
문화 속에 담긴 현실을 모색하는 곳
by 더키앙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4494)
블로거의 시선 (96)
네모난 세상 (4283)
SPECIEL (19)
문화 코드 (1)
생활의 발견 (23)
술술 풀리는 이야기 (4)
스토리로 떠나는 여행 (10)
책으로 세상보기 (8)
문화 깊게 읽기 (4)
스토리스토리 (24)
사진 한 장의 이야기 (4)
드라마틱한 삶을 꿈꾸다 (7)
대중문화와 마케팅 (9)

달력

«   2018/08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13,088,927
  • 154569
textcubeget rss

더키앙

더키앙's Blog is powered by Tistory. / Supported by TNM Media.
Copyright by 더키앙 [ http://dogguli.tistory.com/ ]. All rights reserved.

Tattertools TNM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