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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바' 강마에, 문화현실과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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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 바뀌면 문화도 다른 길을 걷게 된다는 건 우리나라 문화계의 비극이다. 문화적 소양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느 한 구획을 책임지게 될 정치인에게는 실로 중요한 문제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강마에(김명민)는 문화적 소양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새로 취임한 시장을 불러 자신이 들려주는 음악의 느낌을 다섯 가지 말하라고 한다. 시장은 아름답다, 좋다는 식으로 그것을 단순히 표현한다. 강마에는 거기에 대해 수많은 표현들이 가능한 그 음악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본인의 자유지만, 그걸 모든 시민들에게 강요하지는 말라고 말한다. 문화에 대해 모를 수는 있지만 그것을 자기 식으로 마음대로 재단하지는 말라는 말이다.

그 새 시장은 자신의 취임식을 빛나게 할 목적으로 시향을 불러 자신의 애창곡인 ‘마이 웨이’를 연주하라고 했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 군부독재 시절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자기 취향을 위해 문화를 굴종시키려는 것. 거기에 대해 강마에가 한 것은 존 케이지의 ‘4분33초’다. 이 전위음악은 4분33초 동안 침묵함으로써 그 즉흥적인 반응으로 들려지는 소리들을 음악으로 전화시킨 곡이다. 즉 이 4분33초 간의 침묵 속에서의 자신의 반응은 자신 스스로 연주한 음악이 되는 셈. 새 시장은 침묵으로 꺾어지는 자신의 욕망에 화를 냄으로써 자신의 음악, 즉 음악적 소양의 조야함을 드러낸다. 여기서 강마에의 선택이 보여주는 것은 문화 그 자체가 어떤 잘못된 정치적 선택에 대한 저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새 시장이 시향의 존폐를 결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한 정치인은 이렇게 말한다. “먹고살기가 힘든데 그깟 시향이 뭔 소용입니까 그 돈으로 길이나 하나 더 내세요.” 경제가 어려운데 문화가 다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다. 그러자 반박이 날아든다. “아무리 어려워도 밥만 먹고삽니까? 향기가 있어야죠.” 그 논박이 오고가는 자리에서 강마에는 귀에 헤드셋을 끼고 클래식을 듣는다. 이 말 저 말 다 듣기 싫다는 무언의 반항인 셈이다. 이 돈을 벌어주는 것도 아니고, 길을 내주는 것도 아닌 음악의 무모성에 대한 시퀀스는 이미 희망을 잃어버린 수재민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만 같은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 진짜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에피소드에서 이미 나왔던 대목이다. 클래식으로 대변되는 문화는 불황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고상한 취미처럼 여겨져 왔지만, 실상은 그것이 오히려 힘겨움에 빠진 서민들을 위무하고 희망을 주는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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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마에는 이 가녀리고 우리의 현실과 유리되어 보이는 문화(클래식으로 대변되는)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 하고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니 석란시향의 지휘자를 그저 5급 공무원으로 생각하는 새 시장과 맞설 수밖에. 이러한 인식은 강마에가 이 오합지졸 오케스트라를 끝까지 마음 한 구석에 세워두고 보이지 않게 도움을 주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 오합지졸 오케스트라들은 이 어려운 경기와 현실 속에서도 희망과 꿈을 잃지 않는 존재이며, 그래서 실제 현실과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해 밤잠도 설쳐가며 연습을 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모습은 경제를 내세워 문화나 생태 같은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식의 경제 강박증을 가진 정치인들보다 훨씬 건전하고 건설적이다. 이들은 백도 없고 학벌도 별로 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특히 클래식이라는 세계에서 보면 애송이들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이 애송이들은 클래식 즉, 문화의 힘이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 꿈은 우리네 서민들의 꿈과 맞닿아 있다. 전문가 입네 하면서 꿈은 이미 버린 지 오래인 그들과는 대립되는. 강마에가 그들을 보며 안타깝게 생각하고 또 지켜주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그 꿈이다. 그 꿈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강마에는 저 스스로도 그러했듯 때로는 냉혹한 현실이 되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재능도 있고 열정도 넘치며 근성도 있는 강건우(장근석)를 현실 앞에 몰아세우면서도 “독해져라”하고 조언을 해준다. 또 클래식계에 아무런 프로필도 없는 강건우가 더 이상 연주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못나서”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를 껴안아주며 “아니야. 넌 훌륭해. 대단해.”하고 말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 강건우에게 하는 강마에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울림은 고스란히 어려운 시기를 마치 단원들이나 강건우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전달된다. 강마에가 껴안은 건 강건우뿐만이 아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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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았지만 닮아서는 안 되는 것, 개그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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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와 정치는 냉소적으로 보면 닮았다. 이른바 “웃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그 프로그램에서 종종 정치는 훌륭한 풍자개그의 소재로 사용된다. 그래서일까. 허경영 총재의 연이은 대선 출마는 투표장을 향해 가는 사람들의 답답한 마음에 한 바탕의 웃음으로 기억된다. 황당한 공약과 주장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그 자체가 기존 정치에 신물이 난 사람들에게는 정치풍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투표를 하는 세대와 미디어 환경이 달라지면서 허경영 총재를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는 점이다. 허경영 총재의 정치적인 이야기는 분명 황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그적인 재미를 갖추면서 지지를 받게 되었다. 분명 달라야 하는 정치와 개그가 같은 맥락으로 만나는 순간이다. 도대체 허경영 신드롬이 왜 지금 일고 있느냐고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면 그 신드롬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재미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개그맨 뺨치는 인기를 통해 놀라울 것도 없는 행보지만, 정치인으로서 등장한 허경영 총재가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은 따라서 이미지의 혼동을 주게 된다. 그것이 늘 개그 같은 공약을 세워왔던 정치인으로서의 허경영 총재인지, 아니면 개그 프로그램에 나왔으니 어쨌든 재미를 주기 위해 개그를 하는 허경영 총재인지 불분명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지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 이미지는 결국 둘 다 허경영 총재의 실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웃고 넘기겠지만.

정치인이 시사 대담 프로그램이나 뉴스가 아닌 개그 프로그램, 혹은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으로 공공연히 자신의 인기도를 얘기할 때, 그것은 정치인으로서의 인기도일까, 연예인으로서의 인기도일까. 문제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만들어진 이미지의 힘이 자칫 정치적 권력과 맞닿으면서 생겨나는 부작용이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면 이제 더 이상 예능 프로그램이 아닌 시사고발 프로그램에 등장하게 될 판인데, MBC ‘PD수첩’에서 방영한 ‘허경영 신드롬의 함정’으로 우리는 실제 그 상황까지 목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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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치유능력이 있어 ‘눈빛 하나로 환자를 고친다’는 허경영 총재가 정작 자신은 콧물 감기에 걸려 약을 사 먹는 장면 정도는 애교로 봐줄 만하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 이외에 사업적 목적으로 운영 되서는 안 되는 정당의 사업에 당당한 모습과, 비례대표제 공천을 미끼로 노골적인 액수를 들먹이며 국회의원 뺏지를 운운하는 건 법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중대한 사안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PD수첩’에서 허경영 총재가 자신의 인기도를 말하면서 언급한 시청률이다. “자신이 나가면 시청률이 두 배로 오를 정도”라는 것. 결과적으로 따지면 KBS ‘폭소클럽’이나 ‘연예가 중계’ 그리고 각종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에서 무분별하게 경쟁적으로 허경영 총재를 출연시킨 것은 바로 그 시청률이란 괴물 때문이었다. 하지만 되묻고 싶은 것은 아무리 재미있다손 치더라도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또한 정치적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왜 몰랐던 것일까. 혹 모른 게 아니라 그저 재미있으면 끝이라는 스스로 자신들 프로그램의 영향력에 대한 비하적인 관점을 가진 채 무시했던 것은 아닐까.

허경영 신드롬은 우리네 정치가와 연예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그만큼 정치가 그동안 참 재미가 없었다는 반증이며, 게다가 일부 정치인들의 개그맨 뺨치는 행보에 대한 냉소적 시선들은 정치인의 위상을 개그맨과 거의 같은 위치로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것은 연예가의 시청률 지상주의가 때론 재미만 있으면 다 된다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을 말해주기도 한다. 정치와 개그는 정말 닮아 보이지만, 실로 이 둘은 닮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허경영 신드롬은 바로 이 두 지점이 만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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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근같은 입, 백성을 자식처럼 보는 마음

MBC 월화 사극 ‘이산’에서 앞으로 정조가 될 세손 이산(이서진)은 할아버지 영조(이순재)가 준 전권을 갖고 개혁을 시도한다. 그간 호시탐탐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들과 싸워왔던 이산으로서는 그 갑작스런 전권이 부담스러울 수 있었겠지만 절치부심 칼날을 집어든다. 제일 먼저 칼을 대는 곳은 시전상인들이 틀어쥐고 있는 경제다. 

정치란 사실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말만 무성하고 실제 백성은 곤궁함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만큼 방향은 제대로 잡은 셈이다. 그들과 부패한 신하들의 정경유착은 난전상인들과 같은 백성들의 상업을 뿌리째 흔들어왔다. 게다가 백성들에게 가야할 경제적 혜택이 부패한 신하들에게 가면서 그렇게 얻어진 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자신을 압박하는 상황이니 이산으로서는 이것이 일거양득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명분도 확실하고 백성들의 마음도 이산에게 기울어진 상황, 그러나 그 속에서 영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영조는 이미 이산이 시도하는 개혁이 어려울 것이란 점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이산은 시전상인들이 자신들의 물건을 태워버리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을 매점매석 해버리자 난항에 빠진다. 경제가 돌지 않는 것이다. 백성을 위한다고 했던 일은 백성을 더욱 곤궁에 빠뜨리고 결국 이산은 모든 전권을 영조에게 다시 돌려주게 된다.

그 때 영조가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 이야기의 요지는 ‘자신도 시전상인들이 깡패 같은 자들이라는 걸 잘 알지만, 정치란 무릇 백성을 자식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러니 그 깡패 같은 자들도 또한 자식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나쁜 자식도 저마다의 능력은 갖고 있는데 그 나쁜 짓을 나무란다고 능력까지 빼앗는 것은 부모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조의 시전상인들이 가진 금난전권 혁파 시도와 실패 그리고 거기에 대한 영조의 대사는 작금의 정치가 보여준 개혁이라는 명분과 현실과의 괴리를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무수히 많은 개혁에 대한 이야기들과 염원이 있었지만 실상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있으며, 설사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이 진정으로 국민들의 곤궁함을 풀어주었던가. 혹 못 가진 자들을 위한 개혁의 대의명분이 앞서 가진 자들의 숨통만 조였던 것은 아닌가. 대선을 치르는 현재, 가지고 못 가지고를 떠나 모든 이들의 입에서 경제를 제일 우선으로 내세우게 된 것은 그 여파가 국민 모두에게 미쳤음을 방증한다.

물론 이런 상황이 연출된 데는 개혁을 하려는 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거기에 만만찮은 반대가 있었고, 그것은 ‘이산’에서 보이듯이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산의 상황과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결국 이 어려운 상황을 만든 것은 이 끝을 알 수 없는 대결구도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정작 있어야할 국민의 자리는 사라지고 당의 이익만을 위해 ‘반대를 위한 반대’, ‘찬성을 위한 찬성’으로만 점철된 ‘저들만의 리그’가 만들어낸 결과가 아닐까.

영조는 늘 백성들을 그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정치를 펴나간다. 신하들의 감언이설에 잘 넘어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백성이 상전이다 보니 정치적으로 적과 아군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백성을 위하는 것이면 어느 쪽이든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는 말 그대로 ‘깡패 같은 아들까지 보듬는 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는 또한 섣불리 가볍게 입을 열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명령하기보다는 신하들이 스스로 얘기하게 만드는 화법을 구사한다. 영조가 보여주는 일련의 정치적 행보가 하려는 말은 이런 것이다. ‘임금이란 참으로 무서운 자리이다.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수많은 백성들이 사지로 몰릴 수 있으니.’ 이 말은 지금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누가 당선되든 국민들을 진정 자식처럼 여길 수 있는 영조 같은 정치인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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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극에서 배워라

네모난 세상/명랑TV 2007/11/27 10:10 Posted by 더키앙

사극만도 못한 정치판, 민생은 어디로

MBC 월화 사극‘이산’의 이산(이서진)은 노론 벽파의 강한 저항 앞에서도 결코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이산이 보는 조선의 정치는 썩었다. 조정대신들은 금난전권이라는 특혜를 시전상인들에게 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정치자금으로 활용한다. 금난전권(난전을 금할 권리)을 가진 시전상인들은 생계를 위해 난전을 차릴 수밖에 없는 상인들을 핍박한다. 이러니 양극화 현상이 가중된다. 조정대신들과 시전상인들의 곳간은 넘쳐나고 난전으로 살아가는 백성들은 배를 곯는다.

영조(이순재)에 의해 전권을 위임받은 이산이 그 첫 번째 개혁으로 금난전권을 폐하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전상인들과 조정대신들의 검은 고리를 끊어 정적들의 돈줄을 죄는 한편, 백성들에게 편하게 장사할 수 있는 권리를 주기 위함이다. 사정이 이러니 여기에 가만히 있을 시전상인들과 조정대신들이 아니다. 자신들이 쌓아놨던 물품들을 불태우고 상점을 문닫아버리며 도성으로 물건들의 유입을 막자, 난전은 활기를 잃는다. 이를 틈타 조정대신들은 영조 앞에 나아가 난전의 허가를 물리라는 압력을 넣는다.

‘이산’이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들의 일면들은 몇 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대기업의 정관계 로비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 요즘, 정경유착과 특혜비리의 고리는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민생들만 곤궁한 삶을 살게되는 그 시스템 속에서 개혁을 해달라며 뽑아놓은 정치인들이 오히려 검은 돈과 유착해 자신들을 뽑아준 국민들을 곤궁에 빠뜨리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런 상황은 비단 ‘이산’에서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왕과 나’에서 수렴청정을 벗어난 성종(고주원)이 맞닥뜨리는 현실도 마찬가지다. 뇌물과 비리와 청탁이 오가는 조정대신들과 유착된 내시부의 개혁을 먼저 하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부패한 내시부 수장들과 원로내시들의 결탁으로 이루어진 조치겸(전광렬) 판내시부사의 탄핵과 거기에 맞서는 하급내관들의 충돌은 몇 년 전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연상시킨다. 비리를 파헤쳐야 할 감찰부가 원로내시들의 명분과 근위부의 무력을 쥐고 전횡을 일삼는 것 역시 어딘지 낯설지 않은 그림들이다. 성종이 김처선(오만석)을 앞세워 이런 개혁을 진행하는 이유 역시 바로 이런 전횡 속에서 곤궁해진 백성들을 보듬기 위함이다.

대선의 막바지에 있는 현재,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서 국민들은 암담하기만 하다. 일찌감치 선두권을 확보한 후보는 각종 부정시비에 휘말렸고, 그를 견제해야할 다른 진영은 아직까지 누가 그 후보가 될지 정해지지 조차 못했다. 이런 와중에 이미 몇 차례 국민의 냉정한 평가를 받고 고배를 마셨던 후보가 슬그머니 등장했다. 다양한 공약들이 쏟아져야할 판에 정치공세가 난무하는 오리무중 정국 속에서 국민들의 관심은 저만치 밀쳐진 지 오래다. 국민들은 그런 정치가 지겹고 피곤하다. 적어도 자신들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주는 정치인이란 사극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민생뿐이다.

수시로 궁을 빠져나와 도성을 직접 살피는 이산의 백성을 향해 내미는 손이 따뜻하고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의 이권만을 챙기며 그 헤게모니를 놓지 않으려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는 대신들 앞에서 조목조목 준비한 논리의 칼을 내세우는 이산이 속시원한 건 그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암살기도가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직접 그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이산이 진정한 백성들의 지도자로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가장 낮은 자를 두려워하고 긍휼히 여기는 이산이 더 높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과연 이런 사극 속의 정치인들은 환타지에서나 존재할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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