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는 왜 500회 특집을 좀비로 마무리 지었을까

 

어쩌다 보니 좀비를 등장시키게 된 걸까 아니면 500회 특집에 맞게 의도한걸까. MBC <무한도전>500회 특집으로 마련한 무도리go’ 게임의 마지막 라운드는 지금은 텅 비어있는 여의도 MBC사옥에서 벌어졌다. 이른바 꼬리잡기형식을 따온 무도리잡기게임.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각 층에 한 명씩 내려놓고 시작한 게임은 갑자기 좀비들이 출현하면서 좀비 특집이 되었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부산행>의 좀비 연기를 했던 연기자들이 직접 참여함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 실감나는 좀비들의 출현은 출연자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고, 깜짝 놀라고 쓰러지고 무서워하는 모습만으로도 큰 웃음을 주었다. 특히 산만한 덩치를 갖고 있는 정준하는 시종일관 말을 더듬을 정도로 긴장하며 좀비들이 나타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으로 역시 리액션 왕 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결국 이 게임은 하하가 이겼지만 전체 무도리go’ 게임의 우승은 유재석에게 돌아갔고, 그에게 부상으로 1000회 출연 프리패스가 돌아갔다. 500회를 넘어 1000회까지 계속 쭉 가자는 김태호 PD의 뜻이 담긴 센스 있는 포상(?)이었다. 그런데 궁금해지는 건 왜 하필 이 게임의 마지막을 좀비 특집으로 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건 진정 우연이었을까.

 

이번 500회를 맞아 <무한도전>이 한 무도리go’ 게임은 사실상 그간의 많은 특집들을 회고하고 추억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래서 그 게임을 하며 자연스럽게 장기프로젝트로 했던 조정경기나 에어로빅, 댄스스포츠 등을 다시 상기할 수 있었고, 63빌딩에서 했던 무한알바나 역대급의 몰래카메라를 선보였던 퍼펙트센스게다가 <무모한 도전> 시기에 시도했던 오리배로 유람선 따라잡기같은 도전들을 추억할 수 있었다.

 

이런 콘셉트를 가진 <무한도전> 500회가 가장 아프면서도 레전드로 남은 좀비 특집을 빼놓았을 리가 없다. 무려 400명의 좀비 연기자들을 동원했고 카메라만 48대를 설치했으며 예산 자체가 평시에 2배 정도를 썼으나 박명수가 혼자 살겠다고 사다리를 밀쳐내는 바람에 단 28분 만에 실패로 돌아간 미션. 이 아이템은 <무한도전>의 대표적인 실패사례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만의 고유의 성격, 이를테면 실패해도 그 과정은 성공이라는 그 특징을 상징하는 사례가 되었다.

 

아마도 500회 특집의 마무리에 좀비를 등장시킨 건 그래서 다분히 의도가 깔려 있다고 읽히기에 충분하다. 그 좀비 특집의 실패사례가 보여주는 가치는 다름 아닌 <무한도전> 무려 500회를 달려올 수 있었던 초심이자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늘 도전에 실패하고 나서는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라고 외치며 다시 도전하던 그들이 아닌가.

 

김태호 PD는 좀비 특집의 실패에 대해 묻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도전의 결과는 성공 혹은 실패예요. 성공하면 성공했으니 좋은 거고 실패하면 다시 한 번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거니 더 좋은 거죠.” 즉 안 되도 될 때까지 계속 도전하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500회 특집 마무리를 좀비로 세운 건 아마도 그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좀비들처럼 1000회까지 쭈욱-

연상호 감독의 <서울역>, <부산행>보다 더 독하다

 

<부산행>에서 시작해 <터널>로 이어지고 <서울역>으로 마침표를 찍는 것만 같다. 올 여름 영화 시장을 뜨겁게 달군 키워드는 다름 아닌 재난이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이 좀비 영화로서 천만 관객을 돌파한 건 기적 같은 일이지만, 세월호 참사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우리네 현실을 떠올려보면 왜 이런 신드롬이 일어났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좀비만도 못한 우리네 현실에 대한 서민들의 공감이다.

 

사진출처:애니메이션<서울역>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서울역><부산행>의 프리퀄의 성격을 갖지만 훨씬 더 독한 현실 비판을 바탕에 깔고 있다. 아마도 애니메이션이라는 본래 연상호 감독 자신의 영역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현실의 디스토피아를 가감 없이 그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연상호 감독은 이번 <서울역>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곳의 현실이 어떤 지옥을 만들고 있는가를 여실 없이 드러내주었다.

 

서울역의 한 켠을 채우고 있는 노숙자 중 한 사람이 좀비의 시작점이라는 건 이 애니메이션이 하려는 이야기를 압축한다. 그들은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들이다. <부산행>은 막연하게나마 부산이라는 목적지가 제시되지만(물론 그게 해결점은 아니겠지만) <서울역>은 애초에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 섬뜩하다. 그들은 좀비들이 출몰하는 서울역 주변을 도망 다니며 헤매다 좀비가 되거나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집 나온 소녀 혜선은 남자친구인 기웅과 동거하며 근근이 살아가기 위해 몸을 팔기도 하는 그런 처지에 놓인 주인공이다. 어느 날 기웅이 인터넷에 하룻밤 파트너를 찾는다며 혜선의 사진을 올리고 그걸 본 아빠 석규가 좀비들이 득시글대는 서울역 근처에서 그녀를 찾아다니는 게 이 애니메이션의 줄거리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의 줄거리보다 더 흥미로운 건 좀비들이 출몰하는 상황들 속에서 펼쳐지는 우리네 현실을 아프게도 드러내는 장면들이다. 좀비들에 쫓겨 서울역 근처를 탈출하려 하지만 이미 전경들에 의해 봉쇄되어 시위대 취급을 받게 된 생존자들 속에서 갑자기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한 사내가 나서는 장면이 그렇다. “난 나라를 위해 일한 애국자야. 아마도 빨갱이 놈들이 저지른 짓 같은데 난 너희들 같은 쓰레기들과 같이 죽을 그런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외치는 사내의 모습은 어디선가 본 듯해 섬뜩하게 다가온다.

 

가까스로 도망쳐 나와 지하철 철로를 걸어가던 혜선이 같이 탈출한 노숙자에게 아빠가 절 찾고 있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울며 말하자 그 노숙자가 난 갈 집이 없어.”라고 울먹이는 장면이나, 마지막 시퀀스에 혜선이 종착점처럼 당도한 곳이 으리으리하게 꾸며진 모델하우스라는 것도 연상호 감독의 날카로운 현실 인식을 드러낸다. 돌아갈 집이 없는 그들에게 모델하우스는 진짜 집이 아니지만 너무나 환상적인 공간처럼 다가온다. 물론 그곳은 결코 그들의 집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이 애니메이션의 결말이지만.

 

<서울역>은 그래서 비극적인 우리네 삶의 밑바닥을 그려내고 거기서 현실의 비정함을 끝까지 담아내는 결코 해피엔딩 따위를 기대하게 만들 수 없는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구마만 만 개 먹는 것 같은 무거움만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우리네 삶이 좀비만도 못하다는 걸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외의 통쾌함을 주는 면이 있다. <부산행>보다 더 독하고 끔찍한 상황이 펼쳐지지만 우리네 답답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갖고 있다면 충분히 흥미로워질 수 있는 작품, 바로 <서울역>이다

만화와 영화의 공조, 새로운 콘텐츠 전략 자리잡나

 

영화 <부산행>이 천만 관객을 넘어선 가운데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서울역>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애니메이션이지만 <서울역>이 이토록 관심을 받는 이유는 그것이 <부산행>의 프리퀄 성격을 갖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부산행>은 갑작스레 부산행 KTX에 들어온 좀비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었지만, <서울역>은 그 같은 사건 이전에 생겨났을 이야기를 서울역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사진출처:애니메이션<서울역>

<부산행>을 봤던 관객이라면 당연히 <서울역>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산행>의 이야기는 KTX라는 공간을 뚝 잘라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서울역>은 서울이라는 좀 더 폭넓은 함의를 가져올 수 있는 공간이 직접적으로 다뤄지기 때문에 좀 더 심층적인 이야기가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도 <부산행>이 영화적 재미에 더 많이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반면, <서울역>은 더 사회성을 드러낼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흥미롭게 보이는 건 <부산행><서울역>의 순차적 상영이라는 새로운 방식이다. 이것은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콜라보라는 점에서 그 결과에 대한 궁금증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사실 국내에서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반응은 뜨겁지만 흥행은 그리 크게 되지 않았다. <돼지의 왕>19천여 명, <사이비>22천여 명 들었을 뿐이다. 물론 상영관이 그리 많지 않았던 두 애니메이션에서 이 정도 관객도 적은 건 아니다. 하지만 해외 애니메이션이 거둬가는 흥행성적을 보면 턱없이 적은 수치다.

 

여기에는 일련의 연상호 감독 애니메이션이 모두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해야 돈이 된다는 국내 시장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역>은 어떨까. 일단 등급이 15세 이상 관람가라는 점에서 다른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보다는 확실히 유리하다. 게다가 <부산행>이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사실은 <서울역> 또한 기본 이상의 흥행을 담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일단 <서울역>은 개봉관이 대폭 늘어날 전망이다. 그만큼 관심이 집중되는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다.

 

먼저 만들었던 <서울역><부산행> 이후에 개봉한 것은 이런 점에서 보면 신의 한수였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성공이 애니메이션의 성공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애니메이션도 대중의 관심이 적어 개봉관이 적게 잡히게 되면 그만한 흥행을 거둘 수 없는 게 우리네 극장가의 시스템이다.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웹툰이 영화와 공조해 이런 성과를 낸 사례는 이미 영화 <내부자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은 영화로 만들어져 그 결말을 영화를 통해 공개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줬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내부자들>은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에도 불구하고 감독판을 합쳐 9백만 관객을 동원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내부자들>이 웹툰과 영화의 새로운 공조를 통해 시너지를 만들어냈고, 만일 이번 <서울역><부산행>과의 순차적 상영을 통해 그만한 시너지를 만들어낸다면 이건 영화와 만화업계의 새로운 제작 방식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웹툰이나 만화를 영화화하는 건 익숙한 제작관행이지만 웹툰으로 시작해 영화로 끝내거나,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연작으로 내놓는 방식은 새로운 시도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웹툰, 만화의 시대라고 하지만 그것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건 지금 현재 극장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내부자들>에 이어 <서울역>이 어떤 성과를 낼지 관객들은 물론이고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건 그래서다

마동석 전성시대의 비밀

 

영화 <부산행>이 칸느에서 상영됐을 때, 마동석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고 한다. 그가 나올 때마다 관객들이 빵빵 터졌다는 것. 이런 사정은 국내 팬들도 마찬가지다. <부산행>이라는 영화에서 마동석을 빼놓고 얘기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 그는 주인공 그 이상의 존재감으로 <부산행>을 압도했다.

 

사진출처:영화<부산행>

그가 <부산행>에서 주목될 수 있었던 건 그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카리스마 덕분이다. 좀비들이 쏟아져 나오는 열차 속에서 그 두려움을 한 순간에 일소해 버리고 때로는 피식 웃음이 나오게도 만드는 그런 존재. 그래서 <부산행>의 상화라는 캐릭터는 마동석이라는 배우에 의해 압도된다. 영화가 캐릭터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저 마동석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관객들은 어떤 기대감을 갖게 된다. 이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른바 마동석 전성시대다. 그런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기존의 연기자들이 전성시대를 맞이하는 그런 방식과 마동석은 정반대의 흐름을 보여준다. 즉 연기자들은 어떤 역할을 맡느냐가 자신들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 그래서 작품이 잘 되고 그 작품의 캐릭터가 매력적이라면 연기자는 상당부분 그 캐릭터의 이미지를 가져가 인기를 누리는 그 흐름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송중기가 전성기를 맞이한 건 물론 전작들부터 보여온 일관된 매력이 쌓인 결과이긴 하지만, 결정적인 건 <태양의 후예>의 유시진이라는 캐릭터를 만나면서다. 현빈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건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다. 마찬가지로 유아인이 대세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베테랑>의 조태오라는 캐릭터와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 같은 캐릭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동석은 다르다. 마동석은 그가 갖고 있는 터질 듯한 근육과 어딘지 살벌한 인상 그러면서도 귀여운 면면이 묻어나는 연기자 자신의 이미지를 거꾸로 작품 속으로 갖고 들어온다. 예를 들어 <나쁜 녀석들>이란 작품에서 우리는 박철웅이라는 캐릭터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 그 캐릭터를 연기한 마동석을 기억할 뿐이다. 이것은 <38사기동대>의 백성일이라는 캐릭터에서도 동일하다. 이 작품에서 마동석은 이중적인 면을 보여주는데 마치 헐크처럼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시청자들이 그에게 원하는 모습, 즉 폭발적인 액션 히어로의 모습을 드러내준다.

 

어찌 보면 살벌하게 보이는 마동석이라는 연기자의 존재감이 이토록 빛나게 된 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 비밀은 그가 맡아온 캐릭터들에서 발견된다. 그는 굉장한 완력의 소유자이고, 결코 작품 속에서 선한 인물이라고만 말하긴 어렵지만 더 나쁜 놈들 앞에서 그들을 제압함으로써 어떤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이웃사람>에서 사채업자지만 연쇄살인마를 두들겨패는 장면이 주는 통쾌함과 유머, <나쁜 녀석들>에서 말 그대로 나쁜 놈이지만 더 나쁜 놈들을 혼내주는 시원함, 그리고 <부산행>에서도 어딘지 껄렁대지만 좀비들을 때려눕힐 때 느껴지는 매력은 마동석이 아니면 도무지 기대하기 어려운 면면이 아닐까.

 

마동석은 그렇게 연기자가 고유의 캐릭터가 되어버린 전례 없는 사례다. 이제는 귀여움까지 덧붙여져 심지어 마블리라고도 불리는 마동석. 우리네 영화, 드라마 같은 작품들은 이제 마동석이라는 연기자를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그려낼 지도 모를 일이다. 대체불가 한 그만의 매력이 콘텐츠에서 그만큼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

<부산행>이 좀비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우리 현실

 

영화 <부산행>의 주인공은 좀비들이다라는 말은 그저 하는 빈 말이 아니다. 이 영화는 확실히 그 어떤 좀비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역동적인 좀비들을 보여준다. 만일 약간의 유머 코드를 통해 읽어내는 관객이라면 이 좀비들을 보면서 다이내믹 코리아를 연상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부산행>의 좀비들은 엄청나게 다이내믹하다.

 

사진출처:영화<부산행>

물론 느릿느릿 걷던 좀비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한 건 이미 다른 좀비 영화들에서부터였다. 최근 좀비 영화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던 <월드워Z>의 좀비들은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모습으로 관객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부산행>이 좀비들은, <월드워Z>의 좀비들이 더 스케일도 크고 숫자도 천문학적으로 많지만, 훨씬 무시무시하고 생생하다.

 

그건 아마도 CG에 너무 의지하기보다는 100여 명의 연기자들이 연습을 통해 직접 뛰어다니며 만든 좀비 연기의 결과일 것이다. <월드워Z>CG로 만들어진 좀비들이 어딘지 게임적인 느낌을 줘 오히려 공포감을 상당부분 덜어내 준다면, <부산행>의 좀비들은 직접 몸으로 뛰는 노동에 의해 만들어져서 어딘지 인간적인 느낌이 묻어나 더욱 공포스럽다.

 

우리나라에서 시도된 좀비물이라는 점을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노동으로 만들어진 좀비들은 그 자체로 <부산행>이라는 영화에 우리 식의 정서를 만들어낸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재미있거나 의미를 확장해서 해석할 수 있는 많은 여지들을 담고 있다. 일단 부산까지 시속 3백킬로로 달려가는 KTX라는 이 영화의 공간이 그렇다. 그건 다름 아닌 속도로 대변되는 우리네 사회를 고스란히 표징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 발병자가 열차에 타고 그 후 물고 물리는 아비규환이 순식간에 벌어지면서 도저히 그 열차의 좁은 공간을 견뎌내기 힘들 정도라는 듯 앞으로 치고 나오는 좀비들의 양적 증가는 누가 봐도 이른바 다이내믹 코리아라고 불리는 우리 사회의 속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어떤 집중이 생겨나면 군중들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몰려들고 소비하는 그 모습을 <부산행>의 좀비들로부터 연상하는 건 그래서 어렵지 않다.

 

중간에 유머 코드로 들어가 있는 오 필승 코리아같은 월드컵 송과 그 노래에 맞춰 달려드는 좀비들의 장면에 관객이 웃음을 터트리는 건 그래서다. 또한 남자 주인공인 석우(공유)가 펀드매니저이고 그의 입으로 개미들을 언급하는 대사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도 <부산생>이 좀비물이라는 장르적 틀을 가져와 전반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우리네 사회라는 걸 부지불식간에 관객들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비들은 공포감을 주는 존재들이기는 하지만 영화에 점점 몰입하기 시작하면 그들에 대한 공포감은 조금씩 사라진다. 대신 어떤 연민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공포를 만드는 존재들은 좀비가 아니라 혼자만 살아남겠다고 이기적으로 돌변하는 사람들이다. 즉 속도와 엄청나게 불어나 한쪽으로 쏠리는 군중을 닮아있는 좀비들이 우리네 사회의 근원적인 불안감을 그려내지만 진짜 공포는 그 불안감 위에서 좀비보다 더 이기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에서 생겨난다.

 

여기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건 세월호 참사 같은 것들이다. 아이들이 그렇게 두려움에 떨 동안 혼자 살아남은 어른들이 주는 섬뜩한 공포. <부산행>의 석우가 오로지 가족만을 챙기고 타인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인물이라는 건 이 영화가 세우고 있는 문제의식을 제대로 드러낸다. 그는 주인공이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를 정확히 드러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부산행>의 주인공은 공유지만 영화에서 관객들이 마동석을 지지하고 그가 마치 진짜 숨겨진 주인공처럼 보이는 건 그래서다. 펀드 매니저라는 그럴싸해 보이는 직업을 가진 석우보다 더 사람들을 챙기고 구하려 온몸을 던지는 상화(마동석)가 서민들의 영웅으로 다가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괜히 머리 쓰지 않고 몸과 몸으로 부딪치는 그 모습은 관객들을 웃고 울고 통쾌하며 비통하게 만든다.

 

좀비물이라는 장르가 가진 특징일 수 있지만 <부산행>은 유독 우리네 사회 현실에 대한 풍자적인 면면들이 많이 투영된 작품이다. 영화는 좀비물의 장르적 재미(그것도 우리식의 해석이 주는 재미들)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이런 영화 곳곳에 숨겨진 풍자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이토록 빛날 수 있었던 것도 그 안에 숨겨진 풍자와 그의 캐릭터가 기막히게 조우하는 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태후>, 새드엔딩 싫지만 그래도 불사신 주인공이라니

 

불멸의 유시진’, ‘좀비 유시진’, ‘불사조 유시진’. KBS <태양의 후예>의 유시진(송중기)을 지칭하는 표현들이다. 유시진은 이제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신이 되어가고 있다. 교전 중 총에 맞아 의식을 잃었고 원대복귀 하지 못했으며 사망 통지까지 날아온 그지만 1년 후 알바니아에 의료봉사를 간 강모연(송혜교) 앞에 그는 멀쩡히 살아있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태양의 후예(사진출처:KBS)'

그렇게 돌아온 유시진에게 강모연이 말도 안돼라고 말하는 대목은 아마도 시청자들의 마음 그대로였을 게다. 이미 죽은 줄 알고 깊은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1년을 지낸 그녀가 아닌가. 그런 그녀 앞에 다시 돌아온 유시진은 그녀에게 그 어려운 걸 또 내가 해냈습니다라고 말하는 여유를 보였다.

 

사실 유시진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강모연에게 전해지고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고 해도 그가 진짜로 죽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것은 이 드라마의 시청자들 모두 바라는 엔딩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껏 수차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그였기 때문이다. 그는 우르크에서 강모연이 납치되었을 때도 그녀를 구하다 총에 맞은 바 있고, 국내에서 벌어진 총격전에서도 총에 맞았던 전력이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툭툭 털고 돌아와 여전히 농담을 날렸다. 그러니 그가 전장에서 총에 맞아 쓰러져도 다시 돌아올 거라는 걸 누구나 예상했을 것이다. 만일 살아 돌아오지 않고 끝난다면 그건 지금껏 그 어려운 걸 해내는 유시진이라는 캐릭터의 일관성(?)에서도 벗어나는 일이다.

 

유시진이 이렇게 죽을 고비를 끝없이 겪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것이 이 달달한 멜로드라마에 긴장감을 유발하고 몰입을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태양의 후예>는 삼각, 사각의 멜로 구도를 쓰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멜로드라마에서 삼각, 사각 구도를 사용하는 이유는 긴장감을 만들기 위함이지만, 이 드라마는 대신 전쟁, 재난, 전염병 같은 것들이 사랑의 장애물로 활용된다. 따라서 유시진이나 강모연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긴장감은 높아진다.

 

특히 유시진이 불사조가 된 까닭은 그가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이라는 직업적 특수성 때문이다. 강모연이 일하는 병원이라는 공간보다 유시진이 뛰어들어야 하는 전장이 훨씬 더 위험하다. 그러니 멜로의 장애로서 그가 끝없이 위험 속에 들어가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되자 문제가 생긴다. 삼각, 사각 멜로의 장애라고 해봐야 남녀의 마음이 돌아섰다 다시 돌아오는 정도로 그럴 듯한 이야기의 개연성이 만들어지지만 죽음의 문턱을 넘는 장애라면 계속 해서 살아 돌아온다는 것이 그럴 듯한 개연성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알바니아의 어느 풍광 좋은 곳에서 추모의 꽃다발을 내려놓는 강모연 앞에 갑자기 나타난 유시진의 몰골은 방금 어딘가에서 탈출해 돌아온 듯 초췌해 있었다. 아무리 극적인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라지만 바로 유시진이 강모연에게 달려온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물론 김은숙 작가는 <태양의 후예>판타지라고 못 박은 바 있다. 하지만 판타지도 어느 정도의 개연성은 갖춰져야 공감이 가지 않을까. 그 누구도 새드엔딩을 바라지 않지만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신이 되어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자칫 지금껏 잘 달려온 이 드라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나쁜 녀석들>, 순간 <미생>보는 느낌을 받았다면

 

이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는 이에겐 정규직 채용의 기회와 대폭 연봉 인상을 약속드립니다.” <나쁜 녀석들>의 이 대사를 들으며 순간 <미생>을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대사는 나쁜 놈들 잡는 나쁜 놈들이라는 기발한 설정의 드라마 <나쁜 녀석들>에 나오는 것이다. 이 대사를 던지는 황여사(이용녀)라는 인물은 인신매매는 물론이고 멀쩡한 사람의 장기를 빼내 팔아먹는 이른바 회사의 대표 정도 되는 인물이다.

 

'나쁜 녀석들(사진출처:OCN)'

이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비리 형사를 가장해 들어온 나쁜 녀석들은 그러나 정체가 들통 나면서 수십 명의 칼든 이 회사의 사원들에 둘러싸인다. 출입구는 통제되고 인터넷 사내전화 핸드폰을 비롯한 모든 통신기구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 게다가 이들을 도와줘야할 후위의 타격대들 역시 황여사에 월급(?) 받는 나쁜 놈들이다.

 

오구탁(김상중)은 황여사를 인질로 해서 회사를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칼든 회사원들은 끝없이 나타난다. 이것은 마치 좀비물의 새로운 해석처럼 보인다. 밀폐된 공간은 공포감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멀쩡한 사람의 장기를 빼내는 수술대는 좀비 영화가 갖고 있는 컬트적인 느낌마저 준다. 게다가 이 회사에는 아이들마저 그 끔찍한 현장 속에 붙잡혀 있다.

 

나쁜 놈들의 끝장. 이것이 좀비물과 유사하게 여겨지는 건, 좀비라는 제거해야할 당위성을 두고 가장 잔인하게 그들을 제거하는 이 드라마의 방식이 좀비물을 빼다 박았기 때문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괴물들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건드리기만 해도 사람이 날아가는 박웅철(마동석)의 폭력은 시원시원한 액션으로 돌변한다. 이정문(박해진)의 사이코패스적인 치밀함은 그 괴물들을 제거하는데 맞춤이고 마치 칼날 같은 날카로움을 보여주는 정태수(조동혁) 역시 저들 편이 아닌 우리 편으로서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돈이면 사람 장기든 뭐든 빼내는 이 괴물 같은 집단을 황여사의 회사로 비유해내는 장면은 <나쁜 녀석들>이 왜 그토록 대중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회사의 비정규직 문제와 사람 등골 빼먹는 노동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지시 하나면 좀비처럼 달려드는 회사원들의 이야기와 맞아 떨어지며 이 만화 같은 드라마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사실 이 이야기가 어떤 정서를 담아내지 못하고 그저 보여주기 위한 폭력으로만 흘러갔다면 이런 대중들의 열광을 가져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쁜 녀석들>은 그 안에 샐러리맨이 봐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현실적인 상징들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조직폭력배에 연쇄살인범과 살인청부업자로 구성된 나쁜 녀석들에 자꾸만 동조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동조 끝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쩌다 우리는 이토록 <나쁜 녀석들>에게 마음을 열게 된 걸까. 바로 그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번뜻 떠오르는 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괴물처럼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쁜 녀석들에게 갖게 되는 정서적인 지지와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살풍경한 현실. <나쁜 녀석들>을 보며 느껴지는 마음 한 구석의 시원스러움과 끔찍함의 정체다.

 

타자에 대한 시선, 공포에서 공감으로

"들어가도 돼?" 뱀파이어의 운명을 타고난 소녀가 소년에게 묻는다. 소년은 망설인다. 그 소녀가 뱀파이어임을 알기 때문이다. "꼭 그렇게 물어야 해? 그냥 들어오면 되잖아." 하지만 소년의 허락을 받지 않고 들어온 소녀는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온 몸에서 피를 쏟아낸다. 그러자 소년이 소녀를 꼭 껴안는다. 이 짧은 장면은 '렛미인'이라는 영화가 서 있는 공포와 공감 사이의 어느 지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문지방 하나, 벽 하나의 차이일 뿐이지만, 뱀파이어 소녀와 왕따 소년이 서 있는 거리는 그만큼 멀다. 소년은 소녀를 두려워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소녀의 처지를 공감한다.

'렛미인'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이 이 영화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그 가운데 그어진 어떤 선을 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간의 피를 빨아야 살 수 있는 뱀파이어 소녀의 운명은 그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한 왕따 소년을 만난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공감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인간들의 사회에서 타자로 내몰려진 뱀파이어와 학교에서 따돌림 당하는 왕따 소년을 같은 선 상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 서로를 사랑하게 된 그들은,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이루어질 수 없어 더 절절한 사랑을 하게 된다. 타자에 대한 공포가 공감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좀비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 공포는 차이에서 비롯된다. 인간이라면 살아있거나 죽어야 하는데, 좀비는 그 중간에 걸쳐져 있다. 즉 시체지만 살아 움직이는 존재인 것. 따라서 이 인간과 다르다는 차이는 좀비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든다. 게다가 이 좀비들은 인간들을 자신들과 같은 종족(?)으로 만들려 한다. 물어뜯긴 인간이 그들과 같은 좀비가 된다는 이 설정은 마치 인류의 종말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더욱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이것은 인간의 형상을 지녔으나 피의 욕망 앞에 흡혈귀로 변신하는 뱀파이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공포의 존재들은 파괴되고 제거되어야할 대상으로 그려진다. 심지어 로베르토 로드리게스 감독의 '플래닛 테러'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황혼에서 새벽까지' 같은 영화에서 좀비와 뱀파이어를 때려 부수는 장면들은 유희적인 성격까지 띤다. 어찌 보면 좀비와 뱀파이어라는 인간이 아닌 존재를 세워두는 것으로(그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구 도륙하는 장면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근의 콘텐츠들의 시각은 이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띤다. 일찍이 뱀파이어 신드롬을 일으켰던 '트와일라잇'은 인간과 뱀파이어 그리고 늑대인간 같은 전혀 다른 존재들이 함께 공존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심지어 서로를 사랑하면서.

'렛미인'은 이렇게 타자에 대한 시선이 공포에서 공감으로 바뀌어가는(혹은 공존하는) 최근 경향을 이어받고 있는 작품이다. 타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질성을 보던 것에서 동질성을 보는 방향으로만 흘러온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도 이질성보다는 동질성을 바라보는 콘텐츠들이 존재했다. 예를 들면 'E.T.' 같은 영화가 그렇다. 그 전까지 외계인 하면 공포의 존재로 그려졌던 것이 이 영화에서는 지구인의 친구처럼 그려진다. 이것은 아마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2차 세계대전에서 대학살을 경험한 유태인의 후예였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자신과 타인을 다른 존재로 분리하는 시각이 가져온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그의 핏 속 깊이 각인되었을 테니까. 즉 20세기에도 이런 동질성을 찾는 콘텐츠들이 등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문화의 경향은 하나의 흐름이 되고 있는 건 최근의 일이다.

이것은 단지 해외의 문화 콘텐츠들만의 경향이 아니다. 최근 드라마화 된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처럼, 구미호라는 이질적인 존재와 인간은 이제 대결하기보다는 사랑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들 중에서 최근 연재되고 있는 강풀의 새로운 만화 '당신의 모든 순간'은 흥미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어느 날 갑자기 좀비 세상이 되어버리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이 만화는 이들 좀비와 싸워나가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주인공은 어느 날 그 좀비들 틈에서 자신의 형을 발견하고는 그들 역시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주인공은 좀비들에게서 인간과 다른 점을 바라보기보다는 인간의 흔적을 찾아내려 애쓴다.

같은 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전쟁을 치르고 여전히 그 대치국면으로 서 있는 우리들에게 타자에 대한 공포와 공감은 늘 뒤얽혀있다. 반공교육이 한창이던 시절에 우리는 저네들을 마치 피에 굶주린 뱀파이어 보듯 생각하지 않았나. 하지만 이산가족이 만나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저들 역시 우리의 형제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연평도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진 한 시간 여의 포격은 우리를 다시 혼란 속에 빠뜨린다. 이들과 우리는 과연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공존을 생각하는 시대에 여전히 대결국면으로 되돌리려는 이 역행을 우리는 어떻게 또 넘어서야 할 것인가. 뱀파이어 소녀 앞에 서 있는 소년처럼 당혹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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