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스>, 다채로워진 박신혜 자연스러워진 김래원

 

섬세하고 따뜻했던 드라마 덕분인가. SBS <닥터스> 종영에 즈음해 되새겨보면 박신혜와 김래원에게 이 작품은 한 뼘 더 성장하게 해준 고마움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의학드라마지만 의술에 머물지 않았고, 멜로드라마지만 사적인 사랑을 넘어 휴머니즘까지를 담아낸 <닥터스>. 자칫 그 섬세함이 드러나지 않으면 밋밋해질 수 있는 관계와 구도들을 생생하게 만들어낸 건 다름 아닌 연기자들의 공이다.

 

'닥터스(사진출처:SBS)'

박신혜가 연기한 유혜정은 결국 복수의 감정을 사랑으로 이겨낸 인물이다. 그러니 이 내적 갈등을 시청자들에게 납득시키는 건 이 연기가 가진 중요한 지점이다. 그녀는 과거 할머니의 죽음 때문에 진명훈 원장(엄효섭)에 대한 증오심을 갖고 있지만 의사라는 직업으로서 그를 살려내는 길을 택한다. 그녀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홍지홍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홍지홍(김래원)과 함께 수술실에 들어가 진명훈 원장의 위험천만한 종양수술을 성공시키는 장면은 이 작품의 주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만일 홍지홍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진명훈 원장의 수술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은 그녀 안에 자리한 과거의 부채감과 증오를 극복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 장면은 그래서 <닥터스>가 가진 멜로구도와 복수극 그리고 의학드라마라는 다채로운 장르적 이야기들이 하나로 묶여지고 또한 풀어내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의사로서의 프로페셔널한 냉철한 모습과 할머니의 죽음 앞에 오열하고 분노하는 한 서민의 모습 그리고 홍지홍 앞에서는 사랑스런 여자로 변모해가는 그 모습들이 박신혜라는 연기자를 통해 다채로운 결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것은 확실히 지금껏 그녀가 해온 캐릭터들에서 진일보한 면모다. 어딘지 여전히 소녀 같고 교복을 입어야 잘 어울릴 것 같은 이미지지만 이제 그녀는 그 위에 프로페셔널한 전문직 여성의 카리스마와 사랑에 빠진 여성의 달콤함을 얹었다. <닥터스>는 그녀의 이런 연기자로서의 성취가 아니었다면 결코 잔잔하지만 묵직하며 따뜻한 그 감동을 전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이 작품을 통해 박신혜라는 연기자가 다채로운 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김래원은 훨씬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대중들 앞에 서게 됐다. 본래 <넌 어느 별에서 왔니><러브스토리 인 하버드> 같은 풋풋한 청춘 멜로가 잘 어울리던 연기자였지만 언젠가부터 김래원은 하는 역할들이 너무 무거웠던 게 사실이다. <천일의 약속>의 지형이나 <펀치>의 박정환은 그래서 그에게는 너무 힘이 들어간 듯한 모습으로 그려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닥터스>의 홍지홍은 마치 그간의 무거움을 털어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훨씬 편안해지고 자연스러워진 김래원의 면면들을 제대로 끄집어내줬다. 어찌 보면 선생과 제자의 결코 나이차가 적지 않은 설정의 사랑이지만 김래원 특유의 풋풋함과 능글맞음이 적절히 조화된 모습은 그 어색함마저 설렘으로 바꿔놓았다.

 

좋은 작품은 연기자들 또한 성장시킨다. <닥터스>는 그래서 연기자로서의 박신혜와 김래원의 성장점이 될 만한 작품이다. <닥터스>가 보여줬던 그 따뜻함과 유쾌함과 진지함이 모두 연기자들이 잘 소화해낸 캐릭터들로부터 나왔다는 것이 그걸 증명해주는 것이니 말이다. 좋은 작품이었고 좋은 캐릭터였으며 좋은 연기자들이었다

<닥터스>의 박신혜-김래원, <운빨>의 류준열-황정음

 

지상파들의 드라마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해졌다. tvN 드라마의 급성장이 주는 자극은 지상파들의 위기감을 높이고 있고 이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리게 되면 끝없이 추락할 거라는 공포감마저 생겨나고 있다.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오고 경쟁도 치열해지면서 그만큼 중요해진 것이 있다. 바로 캐스팅이다. 누가 캐스팅되었고, 그 연기자가 얼마만큼의 연기력을 보여주며 또 팬덤을 갖고 있는가는 드라마의 성패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닥터스(사진출처:SBS)'

월화드라마에서 압도적으로 앞서나가고 있는 SBS <닥터스>는 박신혜와 김래원이라는 두 배우의 힘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2003<천국의 계단>에서 아역으로 시작해 2009<미남이시네요>로 확실한 한류스타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넌 내게 반했어>, <상속자들>을 거치면서 배우로서의 색깔을 점점 채워나간 박신혜는 이번 <닥터스>에서는 조금은 반항적이면서 여성들도 선망할 멋진 걸 크러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혜정이란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그간 착하고 밝은 소녀로서의 이미지만 보여왔던 그녀의 이런 변신은 <닥터스>라는 어찌 보면 전형적일 수 있는 의학 성장드라마를 매력적으로 만든 중요한 요인이다.

 

한편 상대역으로 등장한 김래원은 <천일의 약속><펀치> 같은 다소 무거운 캐릭터의 옷을 벗어버리고 따뜻하고 자상한 이미지의 홍지홍 역할을 선보이고 있다. 교사이자 의사 역할인 극중 홍지홍의 모습은 김래원의 훨씬 더 자연스러운 연기의 면면들을 끄집어내주기에 충분했다. 선생과 제자로 만나 서로에 대한 연정을 키워가는 쉽지 않은 이야기일 수 있지만, 박신혜와 김래원이라는 두 배우가 가진 그 자체의 매력은 이 멜로에 대한 시청자들의 몰입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닥터스>와 경쟁작으로 동시에 시작된 <뷰티풀 마인드>는 그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나쁘지 않다 여겨지지만 아쉽게도 장혁과 박소담의 힘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장혁이 하는 공감 제로의 의사 역할은 쉽지 않은 것이다. 때론 카리스마가 느껴지지만 때론 아픔이 느껴지는 그 면면들을 연기해내야 한다. 하지만 장혁에게서는 여전히 <추노> 대길이의 이미지가 느껴진다는 목소리들이 많다. 또한 드라마가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영화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박소담의 연기는 어딘지 어색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배우에 대한 호감도나 몰입은 <닥터스>와의 대전에서 <뷰티풀 마인드>가 힘을 좀체 발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고 있다.

 

이런 사정은 수목드라마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실 지상파 수목드라마의 성적은 전반적으로 추락해 있다. 지상파 드라마에서 미니시리즈 편성시간대로 자리해있는 수목드라마가 이처럼 10% 시청률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지상파 드라마가 처한 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BC <운빨로맨스>가 그마나 수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류준열과 황정음이라는 두 배우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운빨로맨스>의 스토리는 너무나 단순하다. 초반의 을 중심으로 이어가던 이야기들도 중반으로 들어오면서 상당부분 사라져버렸고, 대신 심보늬(황정음)와 제수호(류준열)의 달달한 로맨스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 이것은 스토리의 힘이라기보다는 황정음과 류준열이라는 배우들의 팬덤과 그들 팬덤이 요구하는 장면들을 충족시켜주는 데서 나오는 힘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캐스팅의 힘이라는 것이다.

 

종영한 <국수의 신>이나 새롭게 시작한 <원티드> 모두 스토리의 힘을 강조한 작품들이지만 캐스팅의 힘만으로 보면 <운빨로맨스>를 이기기가 어렵다. <국수의 신>은 주인공 천정명보다 악역인 조재현의 힘이 더 많이 느껴진 드라마로 종영했고, <원티드>의 김아중은 엄마 연기에 대한 몰입도가 그리 강하게 어필되지 못하고 있다. <운빨로맨스>의 선전은 그나마 황정음과 류준열에게서 기대되는 캐릭터들이 작품을 통해 보여지고 있고, 그들이 또한 연기자로서의 열정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생겨났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캐스팅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까닭은 작품의 편차가 압도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어느 정도는 평준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렇게 팬덤을 갖고 있는 배우들의 작품 선택이 그만큼 신중해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는 그래서 갈수록 더 드라마의 성패에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천일'의 긍정론, '브레인'의 부정론

'브레인'(사진출처:KBS)

공교롭게도 월화극 두 편이 모두 뇌 질환을 다뤘다. 종영한 '천일의 약속'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서연(수애)과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지형(김래원), 그리고 그녀를 이해하고 같이 아파하는 주변인물들을 통한 인간애를 다뤘다. 반면 '브레인'은 어린 시절 뇌수술을 받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로 뇌수술 전문의가 된 이강훈(신하균)이 역시 뇌종양에 걸린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그 죽음을 바라봐야 하는 과정을 다뤘다.

두 사람 다 죽음을 맞이하거나 목도해야 했지만, 바로 그 죽음을 다루면서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시선을 사뭇 다르다. '천일의 약속'이 서연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그래도 인간적인 세상은 살만하다'는 것이고, '브레인'이 죽은 어머니 앞에 오열하는 이강훈을 통해 보여주는 건 '현실은 그렇게 만만한 판타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연은 점점 기억이 사라져가고 결국에는 먼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참혹한 상황을 겪지만 이것을 '새드 엔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드라마는 결국 죽음이 아니라 기억의 문제를 다룬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지형의 기억 속에 살아남아 있는 서연은 비극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진짜 현실이라면 어땠을까. 물론 '천일의 약속'이 제시한 서연의 삶이 전혀 현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토록 담담하고, 예의 있는 주변인물들의 모습들은 분명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다는 걸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즉 '천일의 약속'은 비극적인 사랑을 다루지만 그것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브레인'은 다르다. 이 도무지 웃음이라는 걸 잊어버린 듯 잔뜩 찡그리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살아가는 이강훈은 지독한 현실을 아무런 판타지 없이 드러내는 인물이다. 자신이 연구한 치료제로 어머니가 살아나는 '기적' 같은 것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다. 만일 의사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더 담담했을 수 있었겠지만, 스스로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기에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봐야 하는 무력감은 더 컸을 것이다. 그는 심지어 아버지의 죽음과 연루되어 있다 여겨지는 김상철(정진영) 교수 앞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를 살려 달라" 애원하는 인물이 아닌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 "수술해 달라"고 애원하며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이강훈의 아픔이 드러나는 장면이 더 슬픈 건 그 때문이다.

'천일의 약속'이 죽음 속에서도 남긴 긍정적인 미소보다, '브레인'의 이 처절한 눈물이 더 슬프고 공감되는 건 아마도 작금의 현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디 지금 우리가 밟고 사는 세상이 긍정적인 미소로 바뀌어질 수 있는 세상인가. 그런 긍정론마저 사치로 여겨지는 세상이 아닌가. 그래서 '브레인'의 이 처절할 정도로 무너지고 부서지는 이강훈이란 캐릭터에 우리의 마음이 빼앗기는 것을 게다. 그의 독기 오른 모습에서 우리는 그를 그렇게 만든 이 지독한 세상을 읽어내는 것이니까.

'천일의 약속'보다 '브레인'이 더 공감되고 더 슬프게 여겨지는 건 바로 이 현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이다. 한 사람이 기억을 통째로 잃어가는 치매와 그것을 주변사람들이 이해하고 희생해주는 삶의 이야기는 분명 아름다운 것이지만,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아등바등 뛰어다니는 아들에게 "그냥 가게 내버려 둬"라고 말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한 가난한 어머니가 주는 생생한 현실의 느낌은 느끼기 어렵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과연 그렇게 아름다운 것인가. '브레인'은 이강훈을 통해 그걸 질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천일', 드라마의 상투성과 실제 현실의 충돌

'천일의 약속'(사진출처:SBS)

'천일의 약속(이하 천일)'에서 작중인물들은 대사를 통해 '드라마'를 자주 거론한다. "그런 드라마 주인공 되기는 싫거든." 서연(수애)이 지형(김래원)이 곧 결혼한다는 사실을 듣고 이별을 통보하며 했던 말끝에 '드라마'가 거론된다. 지형의 엄마 강수정(김해숙)도 종종 '드라마'를 언급한다.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시어머니 역할 하기 싫다고 아들 지형에게 말한다. 서연이 다니는 출판사 직원들도 드라마 얘길 하며 그 인물의 현실성에 대해 논하곤 한다. 사실 이 드라마는 대사 속에 '드라마'의 비현실성을 꼬집는 얘기가 너무 많이 들어있다. 아이러니가 아닌가. 드라마가 드라마의 비현실성을 꼬집고 있다는 것이.

이러한 드라마의 상투성을 꼬집는 것은 '천일'의 대사에만 나오는 게 아니다. 작중 인물들은 모두 기존 드라마의 상투성에서 벗어나 있다. 강수정은 우리가 드라마에서 늘 봐왔던 아들을 둔 전형적인 시어머니가 아니다. 그녀는 모든 상황을 어그러뜨리고 결혼을 강행하는 아들 지형의 여자에게 달려가 머리를 쥐어뜯거나, 헤어진다는 전제 하에 위로금(?)조로 돈을 건네거나, 혹은 얼굴에 물을 끼얹으며 "감히 너 까짓 게..."라고 말하는 그런 시어머니가 아니다. 그녀는 결혼은 반대하지만 여성으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서연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다.

서연 또한 보통의 드라마에서 사랑을 구걸하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당당하게 강수정 앞에서 또박또박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얘기하고는 "제 마음이 어머니 마음과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여자다. 그녀는 오히려 아들을 걱정하고 있는 강수정을 깊이 이해한다. 이 짧은 공감의 순간에 전형적인 드라마 속의 시어머니와 며느리(물론 예비지만) 캐릭터 구도는 깨진다. 관계는 해체되고 대신 남는 건 인간으로서 서로를 이해하는 그 시점이다.

향기(정유미)라는 캐릭터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현실성 없는 캐릭터로 지목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드라마 속에서 익히 봐왔던 캐릭터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해바라기였던 지형이 파혼을 선언했을 때, 지형의 여자인 서연을 찾아가 뺨을 올려붙이거나 배신을 곱씹으며 애증으로 복수를 꿈꾸는 그런 전형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그녀는 곧 결혼을 한다는 얘기를 할 때조차 지형만을 바라보고, 지형이 만나는 서연을 궁금해한다. 서연이 알츠하이머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심지어 눈물을 흘리며 "오빠가 너무 불쌍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과 지형의 사랑이 닮아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왜 그토록 자신이 지형을 사랑했는가를 이제야 알았다고 말한다. 지형의 아픈 선택에서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지형의 입장을 더 생각하며 공감하는 그 지점에서 향기라는 캐릭터는 기존 상투적인 캐릭터를 벗어난다. 향기는 심지어 "그분한테 기적이 일어나라고 매일 기도"하는 인물이다. 이것은 기존 드라마에 대한 도발이다. 늘 설정된 캐릭터 속에서 일어날 일이 반복되며 일어나는 그저 그런 드라마에 대한 도전 말이다.

강수정과 향기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들 말한다. 그래서 비현실적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캐릭터가 '비정상적'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과연 정말 우리 주변에는 강수정과 향기 같은 사람이 없을까. 그렇게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 아름다운 선택을 하는 이들을 과연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게 합당한 일일까. 혹 이것은 드라마의 그저 그런 똑같은 상투적인 캐릭터들이 우리에게 똑같은 선택을 정당화하고 학습시킨 건 아닐까. 혹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드라마에서라면 "저런 인물은 저렇게 행동해야 현실적"이라고 우리 스스로 금을 그어놓고 있었던 건 아닐까.

'천일'이 그리고 있는 풍경은 분명 낯설다. 그 소재와 설정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심지어 상투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래서 쉽게 다음 상황을 예측하고 기대하게 만드는데, 이 놈의 드라마는 그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계속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천일'은 그래서 김수현 작가가 지독히도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드라마의 틀을 갖고 와서, 오히려 그 상투성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드라마처럼 보인다. 멜로는 늘 그렇게 결정된 결혼이 목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멜로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의 차원으로 바라보는 멜로드라마 한 편쯤 괜찮은 것이 아닐까. 김수현 작가는 아마도 이 작품을 통해 상투적인 드라마들과, 그것들이 학습시킨 상투화된 사고방식과 전쟁을 벌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천일', 멜로를 넘어 인간을 담다

'천일의 약속'(사진출처:SBS)

"제 마음이 어머니 마음과 같습니다." 아들이 급하게 결혼을 서두르는 모습에 아이를 갖게 된 줄 아는 엄마 강수정(김해숙). 그래서 찾아온 그녀에게 임신이 아니라 알츠하이머임을 밝히고, 그러기 때문에 절대로 결혼 같은 건 할 수 없다 말하는 서연(수애). 강수정은 서연의 상황을 안쓰러워하고 안타까워 하지만 아들 입장에 설 수밖에 없는 자신을 용서하라고 한다. 그러자 서연은 말한다. 자기 마음이 어머니 마음과 같다고.

어찌 보면 흔하디 흔한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 같지만 이 장면이 깊은 감흥을 주는 건 왜일까. 상황은 뻔해도 그 속에 있는 두 인물, 남자의 엄마와 남자의 여자가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하고 대립하기보다는 서로를 깊게 이해하고 오히려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 때문일 게다. 강수정이 "어쩌면 그렇게 침착할 수 있냐"고 물을 정도로 차분한 모습을 보이는 서연은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하마터면 1년만 아드님을 저에게 주세요'라고 말할 뻔 했던 속내를 내레이션을 통해 털어놓는다. 이것은 강수정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안쓰러운 서연의 모습이 못내 눈에 밟힌다.

이 짧은 장면 속에는 '천일의 약속'이 하려는 이야기와 그것을 담아내는 이 드라마만의 방식이 잘 드러난다. 무모한 결혼을 하려는 아들을 반대하는 엄마가 그 아들의 여자를 찾아오는 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장면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모든 관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인간애'다. 아들의 여자가 아니라면 아마도 꼭 껴안아주었을 강수정과, 남자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한 여자로서 이해를 구하고 그 넉넉한 품에 안겼을 서연. 그들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 거리를 두고 머뭇거린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을 숨기지는 못한다. "손 한 번 잡아 봐도 돼요?" 이렇게 조심스럽게 물으며 서연의 손을 잡아주는 강수정의 모습은 그 따뜻한 마음을 드러낸다.

이것은 흔히 가족이기주의에 의해 '빗나간 모성'이 드라마의 갈등을 만들어내는 멜로드라마나 가족드라마의 틀에서 벗어난 이야기다.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멜로와 가족드라마의 틀 속에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앓게 된 한 여자(아니 한 인간)를 세워두고 이 가족들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를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이제 모든 기억을 서서히 잃어버리는, 어쩌면 죽음보다 더 아픈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인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그 인간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그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자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녀를 위해 정해진 결혼마저 깨버린 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실 지극히 현실적인 잣대로 바라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식상할 정도로 뻔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보다는 자신의 혹은 자기 자식이 겪을 고통을 더 생각하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인지상정이 아닌가. 따라서 '천일의 약속'의 강수정 같은 엄마는 현실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최소한 모성과 인간애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으니까. 보통의 엄마들이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위한 선택에는 면죄부가 성립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러니 이 이상적인 강수정이라는 엄마가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건,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했던 그 많은 일들에 대한 참회가 섞여있을 법도 하다.

우리는 강수정 같은 엄마를 김수현 작가의 전작인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본 적이 있다. 바로 그 작품에서 김해숙이 엄마 역할을 했던 김민재나, 그 아빠였던 양병태(김영철) 같은 인물들이다. 동성애자인 아들을 받아들이는 그 모습이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은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지만,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모성과 부성으로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일의 약속'은 여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모성애와 가족애를 넘어서는 인간애를 잡아내려 한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의 판타지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자식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드라마라는 판타지를 통해 우리는 그 '인간에 대한 이해'의 자세가 갖는 위대함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제 마음이 어머니 마음과 같습니다"라고 서연이 말할 때 느껴지는 그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이해는, '결혼'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틀 따위는 벗어던진 인간 대 인간 사이에 흐르는 따스한 온기를 담고 있다. '천일의 약속'은 그래서 지금 알츠하이머라는 소재를 통해 멜로를 넘어 인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천일', "나는 고장 나고 있어"

'천일의 약속'(사진출처:SBS)

두 여자가 운다. 한 여자는 갑자기 생긴 존재의 허기를 채우겠다는 듯, 한 바구니 사온 꽈배기, 도넛을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으며 울고, 한 여자는 무언가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모두 뱉어내겠다는 듯이 끊임없이 토해내며 눈물을 흘린다. 한 여자는 채우면서 울고 한 여자는 비우면서 운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눈물 흘리게 하는 걸까. 드라마 '천일의 약속'이 그려내는 기막힌 풍경이다.

존재의 허기를 느끼는 여자는 이서연(수애)이다. 그녀는 알츠하이머다. 그녀의 사라져가는 기억은 점점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다. 그녀는 그 떠나가는 기억을 부여잡으려 작가들 이름을 줄줄이 외우고 수첩에 빼곡하게 기억해야 할 것들을 적어 넣는다. 그런 그녀지만 떠나 보내야할 기억도 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박지형(김래원)이다. "당신의 삶까지 삼켜버릴 수는 없어." 그녀의 사라져가는 기억이 그의 삶마저 삼켜버리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빼내려는 듯 토하고 또 토하는 여자는 노향기(정유미)다. 그녀는 아무런 삶의 질곡 없이 말끔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 인생 위에 오롯이 박지형이라는 남자만을 주름으로 채워 넣은 채. 그녀의 삶의 기억은 온통 그 남자다. 그런데 그가 떠나려고 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는 것이 그녀가 하는 사랑의 방식인지라, 그녀는 그를 보내주려 한다. 그래서 자신 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기억마저 토해내려 한다. 그럴수록 더 깊어지는 것이 기억의 주름이 남긴 상처일 것이지만.

'천일의 약속'은 두 여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네 삶에서 기억이 가진 이중성을 드러내는 드라마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만큼 잊고 싶은 존재다. 기억은 달콤한 삶의 추억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독한 고통의 악몽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똑같은 사랑의 기억이라고 하더라도. 하지만 기억이란 놈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사라져가는 기억이나 잊혀지지 않는 기억, 그 무엇도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누구나 다 잊게 되고 누구나 다 잊지 못하게 된다.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삶의 기억으로 남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그래서 '천일의 약속'은 그 상투적일 수 있는 사랑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사랑을 표피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삶의 잣대로 바라본다는 것이 큰 차이다. 삶이 결국 하나의 짧은 기억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 기억을 누구와 함께 나누고 누구의 기억으로 채우며 누구의 기억 속에 남게 되는가는 실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갑자기 파혼선언을 해버리는 남자 박지형을 이해할 수가 있다. 박지형의 선택은 결혼식이라는 그 짧은 순간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양가 가족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미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인생 전체를 두고 바라본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의 삶의 기억일 수 있는 여자의 마지막 기억 속에 남고 싶고, 그녀의 마지막을 자신의 기억 속에 남기고 싶은 그 삶의 욕망.

'천일의 약속'은 제목처럼 시간(천일)과 기억(약속)에 관한 김수현 작가의 진중한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와 함께 피자를 먹고, 콜라를 마시고, 트림을 하며 밀어를 나누던 이서연의 그 일상적인 기억들은 지극히 소소한 것들이지만, 그녀의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아련하고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한 장면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직업이 책을 만드는 출판이라는 사실은 이 지극히 한 개인의 이야기를 우리네 삶의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그 기억을 잡고 싶고 남기고 싶은 욕망. 책이라는 인간의 욕구.

"나는 고장 나고 있어."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이미 '고장 난' 것도 아니고. 아직 멀쩡하지만 '고장 날' 것도 아닌, 현재 '고장 나고' 있는 상황. 이 한 줄의 대사는 우리네 삶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서연은 알츠하이머라는 특수한 상황을 통해 기억의 관점에서 이 '고장 나고' 있는 인생을 깨달았던 것뿐이다. 사실 그 누구도 '고장 나고' 있지 않은 인생은 없지 않은가. '천일의 약속'이 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 '고장 나고' 있는 우리네 삶의 운명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삶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기억을, 추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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