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 송강호가 왜 최고의 배우인가를 증명하다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서 송강호라는 배우가 차지하고 있는 지분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연기하는 이정출이라는 인물이 처한 상황, 즉 일제에 붙어 경무부장으로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하는데 앞장서는 인물이면서 의열단을 와해시키기 위해 밀정으로 투입되면서 겪게 되는 심적 변화가 이 영화의 거의 모든 메시지나 재미를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영화<밀정>

이정출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을 잡기 위해 상하이로 보내진 밀정이면서, 동시에 의열단원의 핵심요원으로 이정출에게 접근해 경성으로 폭탄을 실어 나르는 일에 그의 도움을 얻어내려는 김우진(공유) 사이에 서 있는 경계인이다. 사실 이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많은 관점들 중에서 경계인이라는 관점은 중요하다.

 

지금의 시선으로야 분명히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를 명쾌히 구분해낼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그들조차 어느 쪽이라 애매모호한 입장에 서 있는 인물들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독립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가 모호한 상황에 처한 당대의 인물들은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조차 모호하게 느끼는 그림자같은 경계인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영화의 첫 시퀀스인 이정출이 일본군에 쫓기다 궁지에 몰린 의열단원인 김장옥(박희순)과 마주하는 장면은 이 인물이 가진 갈등을 잘 드러낸다. 이정출과 김장옥은 과거 친구였지만 이렇게 일제와 의열단원이라는 새로운 경계로 만나게 된다. 총에 맞아 잘려진 발가락을 보며 이정출은 생각보다 너무 가볍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 존재할 안타까움이나 슬픔 같은 것들이 살짝 묻어난다.

 

이정출이라는 경계인을 주인공으로 세우기 때문에 영화는 우리가 <암살> 같은 작품에서 봤던 그런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나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영화의 애초 목적이 그런 장르적 즐거움이 아니라 이정출이라는 경계인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 내면은 때론 어두웠다가 때론 밝아지고 때론 한없이 아파했다가 분노하며 폭발하기도 한다. 분명한 적와 아군의 편을 나누고 그 대결을 그렸다면 포착하기 힘든 영화적 재미가 바로 이 이정출이라는 인물로부터 나오게 된다.

 

사실 역사책을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의열단같은 조직의 활동을 우리는 좀체 실감하지 못한다. 그들이 항일투쟁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밀정>은 이정출이라는 조금은 경계에 서 있기 때문에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 가까운 인물을 통해 그 의열단이라는 존재의 실체에 접근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에게 요구되는 삶은 복종 아니면 죽음이라는 총독부 경무국장의 진술처럼 복종을 거부한 의열단원들은 사실상 죽음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처연하기 그지없다.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하고 그럼에도 배신하지 않기 위해 혀를 물거나 아예 곡기를 끊어버리는 그들의 표정은 의연하면서도 쓸쓸하다. 다만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 막연한 강령이 그들을 그토록 끝까지 나가게 하는 힘이 되어줄 뿐이다.

 

경계에 선 이정출은 죽음을 딛고도 또 앞으로 나가는 그들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 감정은 고스란히 지금의 관객들과 맞닿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에 카타르시스란 애초부터 기대할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 복잡하게 바뀌어가는 경계인의 모습을 영화는 유려한 영상과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 속에서 포착해낸다.

 

송강호는 역시 최고의 배우답게 그 미세한 감정의 변화들을 온전히 관객들에게 설득시킨다. 속물적인 욕망들을 지워내지 못한 지독한 현실주의자의 면면을 담아내면서도 동시에 그의 앞에서 스러져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약해지는 휴머니스트의 면모 또한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의 섬세하게 표현되는 인물의 내면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움을 주는 영화다. 물론 그를 통해 느끼게 되는 건 결국 의열단원들의 경외로운 삶에 대해 절로 숙연해지는 마음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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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외전> 강동원, 복수극 속에서 그가 빵빵 터트린 이유

 

<검사외전>은 어떻게 설 명절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무려 5백만을 훌쩍 넘기는 관객을 동원하고 있을까. 사실 이 스토리는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흔하디흔한 복수극.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된 검사가 그 안에서부터 치밀한 계획 하에 복수를 하는 이야기다.

 


사진출처: 영화 <검사외전>

장르적 유사성이나 이야기 구조상으로 보면 <베테랑>이나 <내부자들>과 크게 다른 느낌이 아니다. 거기에는 부패한 권력이 있고 부조리한 법 정의가 있으며 무고한 희생자가 있다. 사회 현실의 답답함을 영화 속으로 끌어와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 <검사외전>은 거기에 충실한 오락영화다.

 

아무리 좋은 것도 여러 번 보게 되면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야기 구조나 정서에 있어서 <베테랑>이나 <내부자들>과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검사외전>은 만일 그것 만이었다면 쉽게 성공하기 어려웠을 영화다. 하지만 <검사외전>에는 강동원이 있었다. 그저 살 생긴 강동원의 팬덤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가 연기하는 재욱이라는 귀여운 사기꾼 캐릭터가 <검사외전>만의 독특한 재미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재욱은 사기꾼이다. 돈 많은 여자나 후려내는 그렇고 그런 인물이지만 그가 보여주는 특유의 허세는 강동원이라는 연기자와 맞아 떨어지면서 관객들에게 시원한 웃음을 선사하는 캐릭터로 거듭난다. 잘 생긴 외모로 한껏 허세를 부리는 모습도 우습지만, 그런 그가 주먹이 무서워 찌질한 모습을 드러낼 때는 더욱 웃기다. 사기꾼이기는 하지만 어딘지 속내는 착해 보이고 어떤 면에서는 당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점은 그가 밉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 정치인과 검사가 맞붙는 이 거창한 복수극 속에서 그가 위치한 어딘지 방관자적인 태도다. 그는 물론 억울하게 감방에 들어온 변재욱(황정민)을 돕는 입장에 서지만 사회 정의라던가 부조리에 대한 고발 같은 거창한 목적 따위는 그에게 없다. 그저 돈이 앞서고 그것이 아니라면 살아남기 위해 뛰는 것이며, 그저 가끔씩 인간적인 정 때문에 일에 뛰어들 뿐이다.

 

재욱의 위치는 정확히 서민들의 시선을 만들어낸다. 도대체 저 사회 정의고 어쩌고 하는 거대담론이 중요한 건 알겠는데 그게 우리네 서민들에게 어떤 희망을 준 적이 있는가 하고 그는 되묻는 듯하다. 그런 거대담론과 대결하기 보다는 그저 눈앞의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 더 갈급한 일이라는 걸 재욱이라는 캐릭터는 대변하고 있다.

 

그러니 복수극이라는 무거운 틀 속에서, 그것도 썩은 정치와 검은 돈과 유린되는 법 정의라는 어마어마한 사건들 속에서 일종의 냉소를 날리는 듯한 재욱의 캐릭터는 그 자체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잔뜩 긴장한 대치 상황 속에서 그가 등장하기만 하면 빵빵 터지는 건 그래서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정의가 이기기를 바라는 재욱의 모습에 관객들도 자연스럽게 빙의되어간다.

 

<검은 사제들>이라는 영화가 결코 대중적일 수 없으면서도 흥행에 성공한 이면에 많은 이들이 강동원의 존재감을 얘기한다. 다른 이도 아니고 강동원이 사제복을 입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관객들의 마음이 움직였을 거라는 것이다. <검사외전>도 마찬가지다. 강동원이 과거 <전우치>에서 보여줬던 그 냉소적이면서도 허세가 가득하고 그것이 기분 좋은 유쾌함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그 면면들이 <검사외전>에서도 빛을 발한다. 흔히들 강동원은 늘 옳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왜 그런가를 확인시켜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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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 단순한 카타르시스가 아닌 성찰을 택한 까닭

 

영화 <대호>는 그 제목이나 포스터만으로도 압도적이다. 포스터 한 가득 얼굴을 채운 최민식에게서 느껴지는 카리스마는 영화 속 대호와 그 이미지가 절묘하게 겹쳐진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호랑이라는 문구는 그 압도감에 비장미까지 흐르게 만든다. <대호>라는 영화에서 어떤 강력한 액션과 스펙터클 그리고 포스와 맹수 사이에 오가는 긴장감을 기대하는 건 그래서 당연한 일일 게다.

 


사진출처:영화<대호>

하지만 생각만큼 <대호>는 관객들에게 쉽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일본군들이 마치 전쟁을 치르듯 대호 한 마리를 잡겠다고 산으로 진군하고 그들을 성난 호랑이가 궤멸시키는 장면은 잠깐의 카타르시스가 제공하지만 이야기의 서사는 그 시각적인 쾌감이나 액션의 장쾌함에 맞춰져 있지 않다. 대신 이야기는 인간과 자연의 대결과 공존이라는 진중한 문제의식을 담아낸다.

 

지리산 깊숙이 살고 있는 산군(山君)이라 불리는 대호를 최고의 전리품으로 가져가기 위해 일본군 고관 마에조노(오스기 렌)는 열을 올리고 지리산은 삽시간에 일본군들의 군화발로 짓밟힌다. 도포수 구경(정만식)은 그 대호를 잡는 데 앞장서지만 조선 최고의 명포수인 천만덕(최민식)은 자신의 오발로 아내가 죽게 된 후 사냥에 나서지 않고 약초를 캐며 근근이 살아간다. 이야기는 결국 이 천만덕이 대호 사냥이라는 사건 속에 어떻게 휘말려 들어가게 되는가를 다루고 있다.

 

즉 영화 속 지리산이라는 공간은 일제 치하의 우리 땅을 표상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파괴적인 자본과 인간에 의해 짓밟히는 자연을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필요하면 올무라도 놓아 무조건 잡으려는 구경이라는 사냥꾼과, 사냥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선별적으로 해야 한다고 믿는 천만덕이라는 사냥꾼의 대결구도 역시 자본화된 세상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직업의식의 문제를 담아낸다.

 

대호와 천만덕은 그래서 동일시된다. 이 두 서로 다른 존재는 똑같이 사냥을 하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한 것 그 이상이 아니다. 게다가 이들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 입장을 공감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법칙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가치를 밀어버리고 들어오는 이들이 구경과 일본군들이다. 그들은 생존과 상관없이 욕망에 의해 상대를 포획하고 죽이려 한다. 조선을 침범하고 있는 일본군들처럼.

 

이러한 명쾌한 대결구도와 주제의식을 갖고 있지만 <대호>는 그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보다는 다양한 해석을 열어놓는다. 즉 일본군을 물리치는 조선 마지막 호랑이 같은 단순한 그림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영화는 통쾌함보다는 진지함이 더 많이 묻어나고 그 스러지는 생명들에 대한 처연함 감정들이 피어난다.

 

아마도 이 부분을 공감하는 이들이라면 <대호>는 꽤 먹먹함을 안겨줄 수 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해 막연한 카타르시스만을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적잖은 실망감을 느낄 수 있다. 그 성찰적인 시선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더 대중적인 면들을 부각시켰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이 마지막 호랑이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마지막 포수가 주는 공감은 충분하다고 여겨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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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 때문에 안 본다? 그러기엔 <내부자들>이 너무 아깝다

 

이병헌 때문에 안 본다? 여전히 대중들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이병헌이다. 그래서 그가 출연하는 영화마다 그런 얘기가 나온다. <터미네이터 제네시스>가 방영됐을 때도 그랬고 <협녀>가 영화관에 걸렸을 때도 마찬가지 목소리가 나왔다. 결과적으로 보면 <터미네이터><협녀>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 안 좋은 성적에는 크든 작든 어떤 식으로든 이병헌의 이미지가 작용했을 수밖에 없다.

 


사진출처:영화<내부자들>

그렇다면 <내부자들>은 어떨까. 이병헌에 대한 대중들의 좋지 않은 이미지를 떼놓고 보면 꽤 잘 만들어진 영화다. 대본도 촘촘하고 연기도 나무랄 데가 없다. 우리네 현실의 암담함을 부패한 정계와 재계 그리고 언론과 법조계까지를 망라해 싸그리 그 추악한 맨얼굴을 드러내 보이는 영화이니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소 과장되게 엽기적인 일들을 벌이면 벌일수록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영화다.

 

그 느낌은 이렇다. 우리가 신문지상이나 방송을 통해 접하듯, 짐짓 정의를 부르짖고 또 너무나 신사적인 행동과 지적인 말들을 번지르르하게 하던 그런 인물들이 시종잡배들처럼 쌍욕을 섞어서 얘기하는 장면을 볼 때의 느낌이다. 그건 그 자체로 폭로의 성격을 띤다. <내부자들>은 그런 영화다. 착한 인물 찾기가 어려운 이 영화는 그 더러움을 더욱 더럽게 그려내는 것으로서 숨겨진 실체를 폭로하는 쾌감을 선사한다.

 

이 영화에서 이병헌이 맡은 역할은 정치깡패 안상구라는 인물이다. 잔혹하기가 이를 데 없고 몰디브와 모히또를 헷갈릴 정도로 무식하다. 결코 착한 인물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상구라는 인물은 처음 볼 때는 살벌한 깡패였지만 차츰 동정적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된다. 그 이유는 나쁜 놈들보다 더 나쁜 놈들이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상구는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해 보이는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건 복수심이다. 안상구의 복수심은 그래서 관객들이 이 영화 속의 추잡한 정재계언론에 있는 권력자들의 행태를 보며 갖게 되는 증오와 잘 맞아떨어진다. 절대 좋은 인물은 아니지만 공동의 적을 갖게 되면서 일종의 동지의식 같은 걸 느끼게 된다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보면 이병헌과 안상구라는 인물의 만남은 기막힐 정도로 주효했다고 여겨진다. 대중들이 갖고 있는 이병헌에 대한 불편함은 이 영화 속 안상구라는 인물이 주는 불편함과 기묘하게 어우러진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더 큰 악당들과 마주하면서 조금씩 상쇄되고 급기야는 시시껄렁해도 그나마 인간적인 안상구라는 인물에 마음을 열게 되는 과정을 영화가 그리고 있다는 건 배우 이병헌으로서는 굉장한 기회가 아닐 수 없었을 게다.

 

물론 연기를 기가 막히게 했다고 해도 그걸로 대중들의 마음이 쉽게 풀어질 것 같지는 않다. 연기는 연기고 남는 불편함은 불편함이다. 하지만 연기자로서 자신의 이미지 때문에 괜찮은 영화조차 망가지게 할 수도 있다는 그 불안감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불거진 사건 때문에 아마도 이병헌은 순수한 이미지나 고고한 이미지의 역할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연기자는 물론 연기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그의 평상시 이미지와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몰입을 방해하는 역할은 응당 피하는 게 대중들에 대한 예의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내부자들>의 안상구라는 인물은 꽤 이병헌에게는 맞춤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걱정 마시라. 이병헌은 이 영화에 기능적으로 잘 어우러져 있고 그것이 불편한 느낌을 주지도 않으니. 그 때문에 영화를 안 보기엔 <내부자들>이 너무나 아까운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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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진실, 요즘 대중들의 갈망

 

센 놈들 잡으려면, 뭐가 필요한지 아냐. 다른 힘센 놈의 허락이다.” <오만과 편견>의 문희만(최민수) 부장검사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사를 강행하려는 구동치(최진혁)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이 대사 속에는 우리네 검찰이 처한 쓰디쓴 현실이 묻어난다. 정의를 구현해야할 검찰이 사실은 권력에 의해 휘둘리는 모습을 <오만과 편견>의 문희만(그래서 이름이 의미심장하다) 부장검사는 보여준다.

 

'오만과 편견(사진출처:MBC)'

검사는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외부에 공표할 수 없다. 죄송하다.” <펀치>에서 검찰총장의 인사청문회에 서게 된 신하경(김아중)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총장의 비리를 폭로하지 못했다. 전 남편이 자신이 데리고 살고 있는 딸 예린이(김지영)의 양육권을 갑자기 들고 나오며 그녀를 협박했기 때문. 이 장면 속에는 검찰이라는 조직이 가진 권력적인 속성이 묻어난다. 쟁취하기 위해서는 딸까지 볼모로 내세우는 것.

 

누군가 그러더군요. 사람들은 피노키오가 진실만 말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또 사람들은 기자들도 피노키오처럼 진실만을 전한다고 생각합니다. 피노키오도 기자들도 사람들이 자기 말을 무조건 믿는다는 걸, 그래서 자기 말이 다른 사람들 말보다 무섭다는 걸 알았어야죠. 그걸 모른 게 송기자님의 잘못입니다... 13년 전 그런 일을 겪고도 아직도 임팩트를 운운하시는 걸 보니 송기자님은 13년 전과 똑같은 기레기시네요.”

 

<피노키오>에서 국민의 알권리 운운하며 자신은 기자로서 할 일을 했다 말하는 송차옥(진경)기자에게 그녀의 딸인 최인하(박신혜) 기자는 기레기라는 강한 표현을 쓴다. 여기에는 과잉 취재 경쟁 속에서 팩트보다 임팩트가 더 중요해진 우리네 언론의 현실이 묻어난다. 바로 그 임팩트는 어떤 경우에는 한 가족을 풍비박산 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하다.” <힐러>의 정의로운 기자 김문호(유지태)는 노조파업 현장에서 분신한 노동자의 병원을 찾아 그렇게 말했다. 귀 기울여주지 않는 세상에 분신이라도 해서 자신들의 말을 들어달라고 했던 것이지만 아무도 병원을 찾지 않았다는 노동자의 이야기에 김문호가 기자로서 사과한 것. 물론 김문호라는 인물은 판타지에 가깝다. 그 판타지 속에는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서민들의 갈증이 느껴진다.

 

최근 주중 드라마들은 왜 이렇게 연달아 검찰과 기자를 드라마의 소재로 다루고 있을까. 드라마가 대중들의 정서를 반영한다고 보면 이 두 직종이 환기하는 건 정의와 진실에 대한 서민들의 갈망이다. 언젠가부터 정의를 구현하기보다는 권력기관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검찰에 대한 서민들의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다. <오만과 편견>이나 <펀치> 모두 검찰의 비리 척결을 주요 주제로 다루는 건 그래서다.

 

한편 검찰만큼 믿지 못하게 된 것이 바로 언론이다. 팩트보다는 임팩트를 강조하고, 때로는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언론을 대중들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니 <피노키오><힐러>가 다루는 언론의 문제는 자기반성으로 가득 차 있다. 잘못된 언론의 뉴스나 조명하지 않는 사건들이 누군가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자각이 그 밑바닥에는 깔려 있다.

 

검찰과 기자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에서 대중들이 기대하는 건 정의와 진실의 승리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이들 드라마들이 과거와 달리 손쉽게 정의와 진실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현실은 더 변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대중들이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같은 허구 속에서나마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도 버거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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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녀석들>, 순간 <미생>보는 느낌을 받았다면

 

이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는 이에겐 정규직 채용의 기회와 대폭 연봉 인상을 약속드립니다.” <나쁜 녀석들>의 이 대사를 들으며 순간 <미생>을 떠올렸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대사는 나쁜 놈들 잡는 나쁜 놈들이라는 기발한 설정의 드라마 <나쁜 녀석들>에 나오는 것이다. 이 대사를 던지는 황여사(이용녀)라는 인물은 인신매매는 물론이고 멀쩡한 사람의 장기를 빼내 팔아먹는 이른바 회사의 대표 정도 되는 인물이다.

 

'나쁜 녀석들(사진출처:OCN)'

이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비리 형사를 가장해 들어온 나쁜 녀석들은 그러나 정체가 들통 나면서 수십 명의 칼든 이 회사의 사원들에 둘러싸인다. 출입구는 통제되고 인터넷 사내전화 핸드폰을 비롯한 모든 통신기구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 게다가 이들을 도와줘야할 후위의 타격대들 역시 황여사에 월급(?) 받는 나쁜 놈들이다.

 

오구탁(김상중)은 황여사를 인질로 해서 회사를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칼든 회사원들은 끝없이 나타난다. 이것은 마치 좀비물의 새로운 해석처럼 보인다. 밀폐된 공간은 공포감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멀쩡한 사람의 장기를 빼내는 수술대는 좀비 영화가 갖고 있는 컬트적인 느낌마저 준다. 게다가 이 회사에는 아이들마저 그 끔찍한 현장 속에 붙잡혀 있다.

 

나쁜 놈들의 끝장. 이것이 좀비물과 유사하게 여겨지는 건, 좀비라는 제거해야할 당위성을 두고 가장 잔인하게 그들을 제거하는 이 드라마의 방식이 좀비물을 빼다 박았기 때문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괴물들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건드리기만 해도 사람이 날아가는 박웅철(마동석)의 폭력은 시원시원한 액션으로 돌변한다. 이정문(박해진)의 사이코패스적인 치밀함은 그 괴물들을 제거하는데 맞춤이고 마치 칼날 같은 날카로움을 보여주는 정태수(조동혁) 역시 저들 편이 아닌 우리 편으로서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돈이면 사람 장기든 뭐든 빼내는 이 괴물 같은 집단을 황여사의 회사로 비유해내는 장면은 <나쁜 녀석들>이 왜 그토록 대중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회사의 비정규직 문제와 사람 등골 빼먹는 노동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지시 하나면 좀비처럼 달려드는 회사원들의 이야기와 맞아 떨어지며 이 만화 같은 드라마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사실 이 이야기가 어떤 정서를 담아내지 못하고 그저 보여주기 위한 폭력으로만 흘러갔다면 이런 대중들의 열광을 가져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쁜 녀석들>은 그 안에 샐러리맨이 봐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현실적인 상징들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조직폭력배에 연쇄살인범과 살인청부업자로 구성된 나쁜 녀석들에 자꾸만 동조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동조 끝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쩌다 우리는 이토록 <나쁜 녀석들>에게 마음을 열게 된 걸까. 바로 그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번뜻 떠오르는 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괴물처럼 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쁜 녀석들에게 갖게 되는 정서적인 지지와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살풍경한 현실. <나쁜 녀석들>을 보며 느껴지는 마음 한 구석의 시원스러움과 끔찍함의 정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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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과 <남영동>, 영화가 해줄 수 있는 것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영화는 과연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무고한 시민이 정부에 의해 고문당하고 심지어 백주 대낮에 무자비하게 학살당하는 일이 자행되었던 80년대. 영화는 그 시대를 불러와 무엇을 환기시킬 수 있을까. <26년>과 <남영동 1985>는 그 시대의 상처를 애써 들춰낸다. 모든 게 시간에 의해 덮여져버린 듯한 그 아픔과 고통을 굳이 2013년을 사는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놓는다.

 

사진출처: 영화 '26년'

영화는 고통스럽다. <남영동 1985>는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 불법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2일 간 고문을 당한 사실을 다룬다. <26년>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잔인하게 희생당한 유족들이 모여 당시 모든 걸 진두지휘했던 ‘그 사람’을 단죄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적으로 각색된 부분은 있지만 이 두 영화의 근거로 제시되는 상처는 사실 그대로다.

 

그런데 특이한 건 이 두 영화 모두 그다지 시원스런 복수극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남영동 1985>는 시종일관 고문에 시달리다 결국은 살려 달라 애원하고는 거짓말을 한 자신을 탓하며 그 진술을 번복하고 또 고문을 당하는 한 남자를 바라봐야 한다. 역사가 증언하듯 그 남자는 후에 존경받는 정치인이 되지만 그를 고문한 사내는 교도소에 수감된다. 상황이 역전되어 두 남자가 만나게 되지만 그렇다고 고문당했던 남자의 토로나 시원스런 주먹다짐 하나 나오지 않는다.

 

<26년>도 마찬가지다. 광주를 겪으며 살아가는 유족들의 아픔은 끝없이 반복되어 보여지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경호를 받으며 교통신호등 하나 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복수의 순간 앞에서도 진심을 담은 사죄를 요구하는 이 유족들의 총구는 심하게 흔들린다. 결국 영화는 차가운 총성과 함께 암전 처리되고 여전히 경호를 받고 살아가는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끝을 맺는다. 답답한 결말이다.

 

모두 80년대의 아픔을 다뤘고, 또 죽이고 싶은 당대의 가해자들을 세우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두 영화의 연출은 상이한 차이점을 보인다. <남영동 1985>는 극적인 스토리 전개 자체를 극도로 자제한 인상이 강하다. 고문 장면에 있어서 더 가학적인 일들이 당시 대공분실 안에서 벌어졌지만 영화는 그런 부분들조차 단순화해서 보여준다. 당연한 선택이다. 이 영화는 고문 그 자체를 목적으로 다루는 영화가 아니니까.

 

반면 <26년>은 상당히 극화된 장르적 스토리를 갖고 있다. 거기에는 조폭의 이야기도 들어있고 스나이퍼의 이야기도 들어있으며 형사물의 클리쉐도 들어가 있다. 실제 1980년 광주의 그날은 애니메이션으로 처리되어 있고, 그 후에 상상으로 재구성된 26년의 이야기는 실사다. 거짓말 같은 현실과 진짜 같은 가상이다. 이 연출 역시 당연해 보인다. <26년>은 그 날 이후 지워질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이들의 염원이자 갈망이 담겨진 상상의 소산이니 말이다.

 

<남영동 1985>와 <26년> 그 어디에도 속 시원한 복수극은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당대의 아픔이 ‘살아남은 자들’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제공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대신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그 지독한 아픔이며, 여전히 가시지 않는 고통과 부채감이다. 그래서 보기 힘겨운 그 장면들을 꾸역꾸역 바라봐야 한다. 그 미진한 아픔을 나눠 가진 채 영화관을 나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이 두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영화관 안에서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영화관 밖에서의 ‘선택’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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