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정>, <구가의 서>, 사극의 선을 넘다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나 등장인물과 사건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픽션화 된 부분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런 문구와 함께 <장옥정, 사랑에 살다(이하 장옥정)>는 조선시대에는 있었을 법 하지 않은 공간에서 시작한다. 지금으로 치면 청담동 의상실 정도 될까. 나무를 깎아 만든 마네킹에 입혀진 색색의 한복과 장신구를 꼼꼼히 살피는 장옥정(김태희)은 누가 봐도 조선판 패션 디자이너다. 그 곳으로 훗날 장옥정과 라이벌이 될, 미래의 인현왕후 민씨(홍수현)와 최무수리(한승연)가 들어온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사진출처:SBS)

이 곳이 이 사극의 첫 번째 시퀀스로 등장하는 이유는 그 공간을 빌어 장차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옷들이 너무 화려하다는 민씨의 말에 장옥정은 “나비를 부르는 꽃들의 유혹”을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자 민씨는 “나비가 꽃을 찾는 것이지 어찌 꽃을 유혹”하냐고 되묻는다. 장옥정은 “그건 비유일 뿐이고 사내에게 사랑받는 옷을 만들고자 함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시퀀스는 훗날의 인현왕후와 장옥정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이다.

 

민씨의 이어지는 이야기는 앞으로 전개될 사극의 성격까지 보여준다. “경박해. 난 그런 거 필요 없네. 내가 필요한 옷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양의 무취 같은 색감이야. 그래서 늘 한결같고 근엄해 보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그것이 왕후의 덕목이니까. 자네 옷은 아름답지만 내가 원하는 전통이 느껴지지 않아.” 민씨가 가진 고상한 취향을 말해주는 대사 같지만 여기에는 앞으로 장옥정을 따라갈 이 사극이 품위나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심지어 유혹적이고 경박해 보일 지라도 속내를 과감히 드러내는 그런 이야기를 담을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극에 대한 도발이면서 역사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미 수없이 역사에서 악녀로 다뤄졌던 장옥정을 거꾸로 뒤집는 이야기.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장옥정은 기생들을 모델로 세우고 마님들을 부용정에 초대해 조선시대판 패션쇼를 벌인다. 한복은 색색으로 반짝거리고 그 옷을 입은 기생들은 사뿐사뿐 런웨이를 걷는다. 뒤에서는 패션디자이너 선생이 된 장옥정이 모델들의 옷을 일일이 점검하고 감독한다. 사극으로서는 파격적인 연출이다. 화려하고 유혹적인 장면들이지만 역사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이거 사극이 맞아 하고 물을 정도로 너무 과감한 건 아닌가 하는 아슬아슬함도 있는 게 사실이다. 의상실에 패션디자이너에 패션쇼까지. 현대를 사극으로 옮긴 듯한 장면들이다.

 

<장옥정>과 동시에 시작하는 MBC의 <구가의 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사실 <구가의 서>를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사극이라는 범주에 넣는다는 것은 애매하다. 이것은 차라리 과거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 자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 드라마의 공간 또한 지극히 판타지적이다. ‘그곳은 기괴하고 감히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험한 산세. 태곳적 산을 지키는 영물들만이 때때로 출몰한다는 그 곳. 이름 하여 달빛 정원.’ 이 드라마는 지리산의 어딘가에 있다는 이 달빛 정원의 수호신인 구월령(최진혁)이 억울하게 역모로 폐가하고 관비로 내쳐진 윤서화(이연희)를 사모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역사적인 사건과 연루된 이야기라기보다는 구미호라는 전설에 기댄 사랑과 복수의 이야기가 <구가의 서>가 다루는 것이다. 물론 옛 말투를 흉내 내고는 있지만 사실상 현대어를 쓴다고 해도 그다지 이물감이 없을 법한 설정이다. 사극이 <조선왕조 오백년>같은 정사에서 <허준> 같은 퓨전사극으로 이어지는 한 줄기의 흐름과, <전설의 고향>류의 야사와 전설에서 <쾌도 홍길동>이나 <일지매>를 거쳐 <아랑사또전>에 이르는 일련의 옛이야기의 흐름으로 나눠져 왔다면 <구가의 서>는 후자에 해당하는 것이다.

 

<장옥정>이 역사에 기록된 시각을 뒤틀어 장옥정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구가의 서>는 아예 역사 바깥으로 나가 마음껏 이야기의 한계를 넘어선다. 이것은 사극의 외연이 확장된 것일까 아니면 현대극이 사극을 침식해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최근 사극들은 확실히 화려해졌고 더 풍부한 이야기들을 담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와는 점점 더 결별을 고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 시점에서 역사왜곡이라는 말은 이제 구태의연한 낱말처럼 들린다. 이것은 최근 들어 왜곡의 문제가 아니라 사극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의 문제가 되었다.

 

사극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를 투영하는 그릇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역사의 변형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일 수밖에 없을 게다. 이제 중요해진 것은 역사와 맞냐 맞지 않냐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나 연출이 얼마나 완성도가 있고 극적인 개연성이 있느냐가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 남는 허전함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과거에 사극이라고 하면 우리가 느끼던 그 독특한 분위기와 아우라를 이제는 점점 느끼기 어려워지기 때문일 것이다. 민씨가 말하듯 이제 “무양의 무취 같은” 그런 사극은 존립 자체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늘 한결같고 근엄해 보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그런 사극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퓨전사극, 팩션... 상상력이 역사를 앞지르다

사극은 이제 역사책을 들춰보기보다는 역사의 빈 자리를 찾아다닐 지도 모르겠다. 2008년도에도 여전히 퓨전사극의 바람은 거셌다. 상반기를 주도한 ‘이산’과 ‘왕과 나’는 기존 왕 중심의 사극에서 ‘나’ 중심의 사극으로 위치이동을 실험했다. ‘이산’은 정조를 다루되, 왕으로서의 정조가 아닌 이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의 정조를 다루었고 ‘왕과 나’는 왕 중심이 아닌 김처선이라는 내시의 눈을 빌어 역사를 바라보았다.

이러한 시점의 위치이동은 대중들의 달라진 역사에 대한 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왕조중심의 역사만이 정사로서 인정받는 시선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아진 탓이다. 확실히 달라진 점은 과거라면 사극의 역사왜곡이라는 논란이 불거져 나왔을 상황이지만, 올 들어 이 같은 논란은 상당히 잦아들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사극이 이제는 역사와 동격의 의미에서 점점 벗어나 하나의 드라마로서 굳어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 면에서 ‘쾌도 홍길동’과 ‘일지매’는 아예 소재 자체를 허구에서 끌어들여 무거운 역사의 갑옷을 진즉에 벗어 던지고 상상력을 향해 달려갔다. 무희들이 테크노를 추며, 상투 대신 장발을 멋지게 늘어뜨리고 선글라스를 낀 주인공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쾌도 홍길동’은 젊은 시청층을 사극 속으로 끌어들였다. 사실적인 묘사가 아닌 표현주의적인 연출을 보여주면서 ‘쾌도 홍길동’은 사극 역시 모던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편 ‘일지매’는 서양류의 영웅담을 우리 식으로 해석한 사극이다. 자신만의 아지트를 갖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탐관오리들의 창고를 털어 배고픈 서민들에게 나눠주는 모습은 가히 한국형 슈퍼히어로를 떠올리게 했다. 촛불시위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을 통해 사극 속에서 현 시대의 담론까지 담아내는 모습은, 이제 사극이 어떤 옛 이야기를 넘어서 지금 트렌드에 어디까지 근접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반기에 들어 화제를 일으킨 ‘바람의 화원’은 점점 새로운 영역으로 넓혀져 가는 사극소재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고미술을 소재로 하면서도 팩션만이 갖는 추리적인 기법을 활용해 예술적인 성취는 물론이고, 재미까지 끌어낸 ‘바람의 화원’은 올 사극 중 가장 실험적이면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신윤복 신드롬까지 일으키며 사회적 파장이 컸던 만큼, 남장여자로 표현된 신윤복에 대한 학계의 반발도 거셌던 작품이다.

안타까운 건, 주말 사극 불패 신화를 이어갔던 KBS 대하사극의 고전이다. ‘대왕 세종’은 여타의 사극들과는 다르게 본격 정치사극을 표방하고 나왔지만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스펙타클한 장면들에 익숙한 시청자들의 눈에는 이 작품이 갖는 심리 게임적인 요소들이 어렵게 다가갔을 수가 있다. 게다가 방영 중간에 시청시간대와 채널을 옮기는 바람에 시청률은 더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작품성으로만 본다면 역시 KBS 대하사극다운 진지한 면모를 보여준 작품이라 하겠다.

또한 ‘바람의 나라’는 그 스케일에 비해 화제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김진 원작의 ‘바람의 나라’는 사실 고구려 사극의 원조격. 하지만 이미 여러 번 반복된 고구려 사극들로 인해 이 사극은 안타깝게도 뒤늦은 사극의 트렌드로 치부되고 있다. 아직은 그 향방을 예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어쨌든 ‘바람의 나라’가 말해주는 것은 이제 사극도 어떤 트렌드를 타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올 한 해의 사극들을 통틀어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정통사극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이다. 퓨전사극의 등장으로 역사보다는 상상력에 더 기대는 사극들이 나온 지는 꽤 되었지만 올해처럼 다양한 소재로 실험적인 시도가 이루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이제 사극의 흐름이 온전히 역사와 결별해 어떤 그 시대의 트렌드와 조우하는 상상력을 만날 것이라는 것을 예감케 하는 사건이다. 사극, 이제 더 이상 정통은 없다.

‘일지매’라는 테크노 영웅의 탄생, 그 의미

원작의 ‘일지매’는 천으로 된 복면을 썼다. 하지만 2008년 찾아온 ‘일지매’는 금속과 가죽 느낌의 재질로 만들어진 가면을 쓴다. 갑옷도 화려해졌고 무기도 다채로워졌다. 제작사측은 이 갑옷을 만드는 데만 500만원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사극의 의복으로서는 파격적일 뿐만 아니라, 비용도 만만찮은 이 갑옷에 ‘일지매’는 왜 그만한 돈을 투여했을까.

‘일지매’, 새로운 테크노 영웅의 탄생
이것은 다분히 현 세대들의 기호를 반영한 결과다. 갑옷은 게임에 익숙한 현 세대들에게는 하나의 아이템에 해당한다. 이 아이템을 입고 작렬하는 음악과 함께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화려한 가면의 영웅은, 이 시대의 청춘들의 감성이 반영되어 있는 테크노 영웅이다. 그리고 이 지금까지의 사극에서와는 전혀 다른 영웅은 이미 빨간 색안경을 끼고 산발한 머리를 한 ‘쾌도 홍길동’이 등장했을 때부터 예고된 존재다.

‘쾌도 홍길동’은 이미 사극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의상은 물론이고, 영상연출에 있어서도 도발적인 시도를 했다. 밸리 댄스를 추는 기녀들, 자가용으로 묘사되는 가마, 골프를 치는 상류층 양반이 그 속에서는 존재한다. 즉 과거라는 시점을 갖고 있지만 그 속에 현대가 공존하는 것이다. 이것은 코믹 퓨전 사극이라는 기치를 내걸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만화의 기법에 영향을 받은 바가 더 크다.

이처럼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해진 것은 이 사극들이 역사적 사실, 즉 사료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쾌도 홍길동’이나 ‘일지매’같은 사극은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허구이다. 따라서 허구를 변용하는 것은 역사 왜곡 논란에 휘말리지 않을뿐더러, 사실상 무한대로 상상력을 확장시키게 해준다. 그 안에서는 사람이 날아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일개 도적이 왕의 권위를 앞지를 수도 있다.

역사가 되려 했던 ‘장길산’, 역사에서 탈주하는 ‘일지매’
그리고 이러한 도발적인 표현은 이 시대 청춘들이 가질만한 기성문법에 대한 반항으로 읽혀질 수 있다. 그것은 역사라는 권위를 뒤집어쓴 정통사극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고, 기득권 세력들만을 위한 역사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쾌도 홍길동’과 ‘일지매’의 영웅들이 모두 도적이라는 사실은 음미해볼 문제다. 도적은 하나의 풍자이면서, 민초들 혹은 소외된 자들의 대응논리이기 때문이다. 즉 진짜 도적(탐관오리, 부패한 신료들 혹은 왕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층)은 따로 있다는 것이며, 그들은 그 도적들을 터는 도적, 즉 의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표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선택한 허구들은 그 체제 반항적이라는 면에서 청춘들이 가진 감성들과 맞닥뜨린다. 역사란 본래 기득권자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며, 따라서 약자들은 허구 속에서라도 그 갇혔던 울분을 터뜨리면서 저들만의 역사를 세우는 모반을 꿈꾸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홍명희와 황석영의 원작 소설을 각각 드라마화한 과거의 ‘임꺽정’이나 ‘장길산’도(이들도 모두 도적이다)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이 사극들은 최근의 사극들과는 역사를 대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임꺽정’이나 ‘장길산’이 민중의 역사를 새로이 쓰겠다는 의지를 품은 것이라면, ‘쾌도 홍길동’이나 ‘일지매’는 그런 거창한 의지가 없다. 오히려 역사 자체에서 자유로워지려 한다. 따라서 그 영웅의 양상들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전자가 민중의 영웅을 그리려 했다면 후자는 대중의 영웅을 그린다. 이 새로운 영웅들이 대중의 문화적 코드를 사극 속으로 고스란히 끌어들이고 그 안에서 마음껏 향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사극, ‘일지매’
사극을 하나의 진화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면 민중의 영웅을 그린 ‘임꺽정’이나 ‘장길산’이 리얼리즘에 입각해 있다면, 역사와 허구, 그리고 왕과 민초의 중간쯤에 서 있던 ‘대장금’같은 퓨전사극은 이 양쪽 사이에 낀 모던한 사극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온갖 것들이 해체되고 재결합되어 나타나는 최근에 등장한 ‘쾌도 홍길동’이나 ‘일지매’는 실로 포스트모던하다. 여기에는 시공을 뛰어넘은 문화적 충돌이 곳곳에서 무리 없이 그려진다.

점점 젊어지는 사극 속에는 이 시대 청춘들의 성향들이 녹아있다. 그들은 이념보다는 문화에, 사실이 가진 권위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에, 굳어져버린 형식보다는 파괴되더라도 새로운 형식에 더 열광한다. 이들이 이처럼 도발적인 형식으로 기득권을 부정하고 저들만의 영웅을 그리려 한데는, IMF에서부터 현재의 88만원 세대까지 자신들은 원치도 않았고 잘못한 것도 없지만 끊임없이 제기된 불합리한 도전들에서 비롯된 바가 클 것이다. ‘일지매’의 현대와 퓨전된 화려해지고 견고해진 갑옷은 역사에서 벗어나 저들만의 역사를 마음껏 그리고픈 이 땅의 청춘들의 꿈들이 더 간절해졌다는 반증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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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사극시대, 작가로 즐기는 사극

최근 드라마 중 사극만큼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는 건 없을 것이다. 이것은 과거 정사 위주의 정통사극의 틀에서 벗어나면서 가능해진 일. 이른바 퓨전사극은 역사적 사실, 혹은 역사적 텍스트에 상상력을 덧대, 사극의 외연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이제 사극은 어떤 역사적 시점을 다룰 것인가 보다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사극의 작가주의가 거론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 사극은 작가들의 상상력과 감독의 연출력에 의해 그 색채를 달리하게 되었다.

이병훈표 성장 사극, ‘이산’
월화의 밤을 평정한 MBC 사극 ‘이산’은 이병훈표 사극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매 2회 정도 분량으로 주어지는 미션과 해결을 통한 캐릭터의 성장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전형적인 선악구도가 극명한 대결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이병훈 PD의 색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정조라는 왕을 주인공으로 세운 점이 과거 주로 평민이었던 주인공과 다른 점이지만, 차라리 평민으로 살아가는 게 나을 법 싶은 정조의 상황을 보면 그다지 달라진 것도 아니다.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는 영조 캐릭터 또한 ‘대장금’의 왕과 오버랩되며, 묵묵히 뒤에서 주인공을 돕는 성송연(한지민) 역시, ‘대장금’의 민정호(지진희)를 빼닮았다.

이렇게 비슷한 구조에 비슷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여전히 힘을 발하는 것은 이병훈표 성장 사극의 틀이 내포하고 있는 저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적 시점을 다루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현대인들의 욕망들이 다양하게 투영되어 있다. 성군을 바라는 백성들의 마음이나, 신분과 남녀 차별을 뛰어넘는 성공담은 지금 시대의 환타지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왕으로 서게 될 정조 이산(이서진)이 나갈 방향성이다. 지금까지 이병훈표 성장 사극 속의 주인공들은 그 꼭대기에 서는 순간 미션 완료하며 끝났지만 ‘이산’은 앞으로도 한참 더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홍자매표 패러디 사극, ‘쾌도 홍길동’
수목의 밤을 웃게 만드는 홍미란, 홍정은 작가의 ‘쾌도 홍길동’은 패러디 사극이다. 그간 여러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패러디를 통한 웃음을 선사했던 홍자매는 ‘쾌도 홍길동’에 와서는 고전인 ‘홍길동’ 자체를 패러디 한다. 사극이라 하기엔 역사적 시공간이 부재한 이 드라마는 따라서 ‘홍길동’이란 고전의 현대적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사극 속에서 웨이브춤과 골프 장면은 물론이고 주인공들의 펑키한 패션 스타일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드라마가 사극 자체를 패러디해 현재를 풍자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무협지의 틀과 만화적 상상력이 홍길동이란 텍스트 위에서 작가들의 상상력과 만난다. 작가에 의해 새롭게 재해석된 등장인물들은 저 마다 현대인들의 그것을 표상하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운명론이나 태생적 결정론 같은)과 부딪치면서 그 전복을 꿈꾼다. 나라를 훔친 도적과 맞서 그들의 재물을 훔치는 도적, 홍길동은 이 시대의 가치관들과 조우하면서 새로운 수퍼히어로로 부각된다. 홍자매의 발칙한 상상력이 사극에서도 고스란히 발현되는 순간이다.

윤선주표 본격 정치사극, ‘대왕 세종’
주말 밤을 장악한 ‘대왕 세종’은 본격 정치사극의 가능성을 엿보게 만든다. 그 원동력은 다름 아닌 윤선주라는 작가에서 나온다. ‘불멸의 이순신’으로 주목을 받고 ‘황진이’로 자기 색깔을 굳혀온 윤선주는 ‘대왕 세종’에서 본격적인 정치의 세계로 뛰어든다. 윤선주 작가가 써온 작품의 특징은 그 주인공의 행보에서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신분이나 서열로 인해 내적인 한계 상황을 가진 주인공이 그 열등감과 차별을 이기고 가장 높은 자리에 서는 과정을 그린다.

이순신은 우리가 위인전에서 보아왔던 완벽한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깊은 열등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며 그럼에도 그것을 뛰어넘어 불멸로 달려가는 실전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국어 교과서에 등장하는 시조 몇 편으로 기억되는 황진이 역시 드라마 속으로 들어와서는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대왕 세종’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한글 창제로서 각인된 세종대왕은 이 작품을 통해 치열한 정치세계 속에서 생존해나가는 현실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의 이러한 주인공의 내적 갈등에 대한 탐구는 역사적 사실에만 박제되어 있던 위인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로 재탄생시킨다. 윤선주 작가의 이 같은 인물 탐구를 통한 치밀한 심리묘사는 ‘대왕 세종’이 그리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정치적 입장을 다각적으로 표현하면서 거기서 발생하는 화학반응의 재미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그 정치적 입장이 너무나 다양하고 대사의 중의적인 의미들이 너무 깊어 이해가 쉽지 않은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그 어려움이 진짜 복잡한 정치의 세계라는 점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혹은 연출자들의 역량이 더 중요해진 퓨전사극 시대에, 물론 역사왜곡의 문제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사극은 기본적으로 역사 자체가 아니라 창작의 산물인 드라마라는 점에서 이러한 작가의 탄생은 환영받을 만한 일이다. 오히려 ‘사극은 역사 자체’라는 사고방식을 뒤집어 ‘사극은 드라마’일 뿐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 후, 사극의 좀더 자유로운 실험이 이루어지고, 한 편으로는 그로 인해 환기된 진짜 역사에 대한 논의들이 병렬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작가가 사극을 말해주는 사극의 작가주의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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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홍길동인가

경제개발을 통한 고도성장 시대 끝에 맞이했던 IMF까지, 숨가쁜 20세기를 살아온 우리네 아버지들과는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 청춘들은 지금 이 다른 시대를 어떻게 보고 살아가고 있을까. 겉으로 보기엔 유쾌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지만 아버지 세대와는 전혀 다른 4차원 사고방식의 그네들은 혹 ‘저런 놈이 어디서 나왔나’하는 서자 취급을 받거나, 혹은 적자 대우를 받으면서도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 놓은 부조리하지만 굳건한 현실의 시스템 앞에서 울분을 터뜨리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그 울분의 끝에 자신들만의 활빈당을 만들어 세상에 대한 변혁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 왜 지금 ‘쾌도 홍길동’이냐는 질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 같지만 같은 그들의 처지
‘쾌도 홍길동’의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물들이다.
청춘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아픔을 속으로 숨기면서 겉으론 과장된 명랑함을 보여준다. 주색잡기에 저자거리에서도 악명 높은 날건달인 홍길동(강지환)은 늘 잘난 척을 해대지만 그것이 자신의 아픔을 숨기는 고도의 위장술이라는 것이 이내 드러난다. 그 아픔은 적서차별에서 비롯된다.

반면 창휘(장근석)는 왕위에 오를 적자였지만 서자인 형 광휘(조희봉)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궁 밖에서 복수의 나날을 보내는 인물이다. 자신이 오를 자리에 광휘가 앉아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지만, 홍길동은 그런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왕위에 오르려는 이유가 그저 적자이기 때문이냐는 것이다. 즉 두 사람은 적자와 서자이지만 밀려나 있다는 점에서 그 처지는 같다.

한편 허이녹(성유리)은 본래 병조판서의 외동딸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허노인에게서 자라나 저자거리에서 약을 팔며 떠도는 신세다. 그녀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늘 밝고 명랑하게 살아간다. 그녀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서은혜(김리나)는 조선 최고의 권세가의 딸로서 모든 걸 가졌지만 자신은 정작 새장 속에 갇혀 지내는 인물이다. 그녀는 그녀가 갖지 못한 저자거리의 자유를 꿈꾼다. 두 사람은 모든 걸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이지만 둘 다 자유를 꿈꾼다는 점에서 그 처지는 같다.

무엇이 그들을 아프게 하나
이들의 아픔은 따라서 그저 고전 ‘홍길동’이 보여주는 적서차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운명에 의해 구획되는 인생에 관한 것이다. 서자로 태어나면 서자로서 살아가야만 하고, 적자로 태어나면 그 이유로 왕이 되어야 하며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면 그 신분에 걸 맞는 부자유스러운 체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대한 불만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일탈을 꿈꾼다. 무언가에 의해 규정되기보다는 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삶을 꿈꾸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 청춘들이 겪는 적자의식 혹은 서자의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또 그 이유 때문에 사회에 안착하지 못하는 청춘들의 서자의식은 물론이고, 그 반대의 경우 즉 좋은 간판을 따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사회 속에 안착한 청춘들 역시 맞닥뜨리게 마련인 부조리한 삶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그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매겨지지 않고 그 사람의 외부적 조건으로 가치판단 되는 사회 속에서는 무수한 홍길동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청춘들의 눈에 비친 기성세대들의 세계는 부조리한 세계다. 역사적 시공간이 불분명한 ‘쾌도 홍길동’이 그려내는 세계는 도둑들의 세계이다. 홍길동과 창휘는 모두 자신의 삶을 도둑맞은 자들이다. 홍길동은 적서차별 아래 자신의 삶을 도둑맞은 인물이고, 창휘는 형에 의해 왕위를 도둑맞은 인물이다. 그들은 도둑맞은 것을 되찾기 위해 사회와 맞선다. 이것이 홍길동이 도둑을 터는 도둑이 되는 이유이고, 창휘가 찬탈 당한 왕위를 되찾으려 모반을 계획하는 이유이다.

도둑을 도둑질하는 사회, 그들이 잃은 것
재미있는 것은 ‘쾌도 홍길동’이 그리고 있는 상반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다. 홍길동의 아버지 이판(길용우)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길동의 물음에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한다. 또한 은혜의 아버지인 서윤섭은 스스로를 권력의 핵심이라 일컫는 부패한 관료로 대변된다. ‘쾌도 홍길동’에서의 아버지는 거부해야하고 맞서야 하는 부정적인 존재들이다.

반면 어머니는 등장인물들의 어린 시절에 도둑맞은 가장 소중한 존재로 대변되는데 홍길동과 창휘는 모두 그 어머니를 잃고 거리로 내팽개쳐진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자리는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되는데, 홍길동의 의붓어머니인 김씨부인(이덕희)이 그렇고, 창휘를 어린 시절부터 도와온 노상궁(최란)이 그렇다. 그들은 그러나 모두 홍길동과 창휘를 모성으로 대하지 않는다. 김씨부인은 자신의 아들 인형(김재승)을 위해 홍길동을 도둑으로 몰아 사지로 밀어 넣는 인물이며, 노상궁은 창휘를 위해 어떤 짓이든 하는 인물이지만 그것은 비뚤어진 자신의 욕망일 뿐이다.

따라서 이 결핍된 두 인물 사이에 서는 허이녹이란 존재는 바로 이들이 찾는 모성을 대변한다. 홍길동과 창휘가 그녀에게 빠져드는 이유는 그녀가 가진 한없는 순수의 세계다. 저자거리의 아픈 아이를 그저 지나치지 못하는 그녀는 등장인물들의 아픔을 모두 품어주는 모성의 존재다. 따라서 ‘쾌도 홍길동’이 그리는 세계는 바로 이 모성이 사라진 세상, 그리고 아버지로 대변되는 권력 혹은 현실에 눈먼 도둑들의 세상에 남겨진 청춘들의 사모곡이다. 그것은 청춘들의 사랑으로 그려지지만 그 사랑이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사모곡에 가깝게 읽혀진다. 이러한 부정적인 부성과 긍정적인 모성의 대립은 남성과 여성의 대립이라기보다는, 남성중심사회가 만들어놓았던 수직적 권력 시스템과 여성성으로 대변되는 작금의 수평적 시스템의 대립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고전 ‘홍길동’은 ‘쾌도 홍길동’으로 재해석되면서 그 안에 이 부조리한 사회 속에 던져진 이 시대 청춘들의 방황과 사랑을 포착해낸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해 사회생활은 고사하고 몇 년째 취업의 문턱도 넘지 못하는 청춘들,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어떠한 기회조차 박탈해 가는 사회 속에서 고개 숙인 청춘들, 자신을 부유하게 만드는 조건이 저 부조리한 사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청춘들까지 이 드라마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쾌도 홍길동’이 그려내는 홍길동이라는 인물은 이 변화되어가고 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굳건한 시스템과 맞서야 하는 우리네 청춘들의 자화상이다.

연기력 논란? 남장을 하라!

네모난 세상/명랑TV 2008.02.02 22:58 Posted by 더키앙
남장여자 캐릭터, 왜 성공의 공식이 됐나

작년 가장 많은 관심과 애정을 불러일으켰던 ‘커피 프린스 1호점’은 윤은혜라는 연기자를 재탄생시켰다. 그간 윤은혜는 가수 출신 연기자로서 수많은 연기력 논란을 불러일으킨 전적이 있다. 베이비 복스 멤버로서 첫 연기 도전을 했던 ‘궁’은 그 자체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유독 윤은혜의 연기력에 대한 논란은 꺼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 후에 출연한 ‘포도밭 그 사나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왜 가수 출신 연기자에게 연기력 논란이 많을까
연기력 논란은 연기자보다는 가수출신 연기자들에게 더 많은데, 그 이유는 이들이 연기력으로서 검증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타 연기자들보다 그 잣대는 더 냉정할 수밖에 없다. 조금 엇나가는 대사만 해도 “가수나 하지”라는 비아냥이 터져 나온다. 게다가 캐릭터가 특징적이지 않고 전형적일 경우에는 잘 소화해내고 있어도 연기자가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연기자의 성격에 맞췄다는, 따라서 연기하는 게 아니라 본래 성격이 그렇다는 섣부른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윤은혜는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이란 남장여자 캐릭터를 만나면서 달라졌다. 먼저 짧게 머리를 커트 한 그녀는 자신의 이미지에서 여성스러움을 버렸다. 자장면 다섯 그릇을 거침없이 먹어대고 사내 한 명 정도는 너끈하게 둘러업을 수 있는 괴력을 발휘하며 때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도 하는 털털 그 이상의 이미지를 선보였다.

‘궁’과 ‘포도밭 그 사나이’에서도 털털한 이미지를 보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연기력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 이미지가 동일했고, 그만큼의 파격적인 변화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남장여자는 ‘털털한 척 하며 예쁜 척 하는 듯 보이는’ 그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어버리기에 충분히 강한 캐릭터였다.

허이녹은 고은찬을 닮았다
이것은 ‘쾌도 홍길동’에서 허이녹이란 캐릭터를 연기하는 성유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연기를 하기 시작한 ‘어느 멋진 날’과 ‘눈의 여왕’에서의 그녀 역시 청순가련형의 과거형 캐릭터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캐릭터로는 그녀의 가수로서 누려온 이미지의 연장일 뿐, 연기자로서의 발판을 마련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허이녹은 저 고은찬과 유사하게도 먹는 것을 무지하게 밝히며, 남자들처럼 건들대기도 하고, 때론 바보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캐릭터다. 우는 장면에 있어서도 예쁘게 우는 것이 아니라 눈물 콧물이 뒤범벅되면서 마구 울어버리는 그런 캐릭터. 여기서 ‘예쁜 척’이란 발목을 잡는 여성스러움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다지도 여성스러움을 버리는 것일까. 그것이 단지 가장 파격적인 변화를 통한 연기력 검증을 받기 위한 선택일까. 그렇지 않다. 여성 캐릭터의 여성스러움은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더 거부감이 많기 마련이다. 게다가 멋진 남성 캐릭터 옆에서 예쁜 척하는 캐릭터는 여성 시청자들에게는 거부감을 넘어 비호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남장여자는 다르다. 일단 보이시한 매력이 여성들에게도 어필하는 면이 있다. 예쁘다기보다는 그 털털한 면이 귀엽게 다가가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 시청자들을 ‘남장’이란 장치로 충분히 감정이입 하게 만든 상태에서는 이제 그 드라마 속의 본래 역할 ‘여자’로 돌아가도 그것은 하나의 매력으로 변한다. 고은찬이 드라마 후반부에 여성스러움을 드러내면서도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남장여자 캐릭터 또한 넘어야 할 산이다
이것은 연기하는 당사자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고은찬 역할로 보이시한 매력을 어필했던 윤은혜가 드라마가 끝나고 섹시한 이미지의 사진을 선보였을 때 나오는 반응은, 과거처럼 ‘또 예쁜 척 하네?’가 아니라 ‘이런 면도 있었어?’라는 호의적인 반응이다.

국민여동생이란 이미지로 굳어져 있어 연기변신에 난항을 겪고 있는 문근영이 남장여자로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도 바로 이 캐릭터의 이런 장점들을 활용하기 위함이 분명하다. 영화 ‘사랑 따윈 필요 없어’에서 성숙한 역할을 선보였지만 어필하지 못한 것은 그 역할 또한 국민여동생이란 이미지를 뛰어넘기에는 너무나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연기력 논란이나, 이미지 변신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성 연기자가 있다면 ‘남장을 하라’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남장여자로 문제를 해결했다면 그 후에는 그에 필적하는 강한 캐릭터에 도전하거나, 남장여자 캐릭터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남장여자 캐릭터 또한 연기자라면 깨고 넘어야 할 또 다른 산이기 때문이다.

멜로도 진화해야 산다

네모난 세상/명랑TV 2008.01.25 01:33 Posted by 더키앙

멜로, 현대물보다 사극에서 빛나는 이유

멜로가 사극과 바람이 났다. 전통적으로 현대물과 조우하던 멜로드라마는 좀처럼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정통 멜로의 부활을 예고했던 ‘못된 사랑’은 출연진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틀에 박힌 설정과 스토리로 오히려 ‘못된 드라마’라는 오명을 쓰고있고, ‘불한당’은 애초에 기획했던 휴먼드라마보다는 멜로드라마의 성격을 보이면서 여전히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반면, 현대물들이 성공적으로 그려내지 못하고 있는 멜로는 오히려 사극 속에서 더 빛나고 있다. ‘이산’의 이산(이서진)과 성송연(한지민) 그리고 효의왕후(박은혜)의 삼각 멜로가 그렇고, ‘쾌도 홍길동’의 홍길동(강지환)과 허이녹(성유리) 그리고 이창휘(장근석)의 삼각 멜로가 그렇다. 무엇보다도 이런 변화가 감지되는 것은 현대물에서 보여지는 멜로가 식상한 느낌을 주는 반면, 사극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멜로드라마는 왜 늘 식상하다 욕먹나
멜로드라마는 그 성격상 사랑을 중심에 두고 그 빗나감과 마주침을 연속적으로 만들어가면서 극을 발전시켜나간다. 중요한 것은 이 흐름 속에 웃음과 눈물을 교차시켜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공식 같은 것이 생겨버렸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눈물이 터져 나온다는 것을 감지해버린 작가들은 의도적으로 그 상황을 처음부터 만들어가거나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못된 사랑’의 처음 1,2회는 이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나인정(이요원)의 몰락의 과정을 보여준 이 2회분에는 사실상 작품 전체가 앞으로 어떻게 굴러갈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는 모든 단서들이 놓여져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부분이 꽤 빠른 속도로 진행되며 보여졌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이 예측된 흐름 위에 새로운 어떤 틀이 마련되지 않고 예측한 대로 흘러갔을 때, 드라마는 식상한 것이 되어버린다. ‘못된 사랑’이 가진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사실상 이런 문제는 대부분의 멜로가 가미된 현대물들이 안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시청률을 확보한 ‘뉴하트’같은 작품에도 마찬가지다. 이은성(지성)과 남혜석(김민정)의 멜로가 이미 의학드라마 속 멜로의 전통 속에서 익숙한 구도이기 때문에 ‘뉴하트’는 긴박한 병원이야기가 돌아갈 때는 참신함을 느끼다가(물론 이것이 ‘뉴하트’의 경우는 익숙한 스토리가 많다), 멜로로 돌아올 때는 무언가 축축 쳐지는 느낌에 빠져들게 된다. 멜로와 전문직의 봉합이 이루어졌을 때 ‘무늬만 전문직’이란 비아냥이 등장하게 되는 이유는 전문직의 디테일을 잘 못 살려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멜로 또한 천편일률적인 구도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사극 속의 멜로가 다른 이유
하지만 이러한 멜로도 사극을 만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먼저 몇 가지 제한점이 생겨난다. 사극은 기본적으로 멜로드라마 자체로는 만들어지기가 어렵다. 시청자들의 인식 자체가 사극은 역사적인 이야기의 재미를 가진 드라마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 이야기는 양념이 될지언정 본 재료는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사건이 된다. 이러한 사극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제한점으로 인해 사극의 멜로는 스토리와 함께 굴러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산’의 성송연과 이산 사이에 벌어지는 멜로가 이를 정확하게 잘 보여준다. 이 둘은 신분상의 거리만큼이나 서로 만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니 그 사랑의 감정을 전하기 위해서 보여지는 것들은 직접적인 대사보다는 사건 속에서 인물의 행동으로 처리된다. 이산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면서 미거한 힘이지만 그 일을 해결하려 성송연이 뛰어다닐 때 그 멜로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또한 성송연이 이국 땅으로 떠났을 때, 이산이 말을 달려 그녀를 쫓아간다거나, 그 먼 길을 오로지 이산만을 생각하며 걷는 성송연은 그 자체로 시청자들에게 사랑의 강도를 전한다. 그 둘은 서로 만나지 않아도 멜로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막상 만난다 하더라도 신분상의 차이가 있기에 하는 대사 또한 우회적이다. 성송연이 돌아와 죽을 고비를 넘겨 깨어났을 때, 이산이 그녀에게 말하는 “네가 가고 나는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더냐”는 대사는 직설어법이 아닌 간접어법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점은 ‘쾌도 홍길동’에서 홍길동과 허이녹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코믹이라는 장르적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직접적으로 서로를 향해 애정행각을 벌이는 낯간지러운 대사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홍길동이 허이녹에게 ‘멍청이’이라고 말할 때, 먼 길 떠나는 길에 어머님의 무덤가 흙을 조잡하게 수놓은 주머니에 허이녹이 퍼담아 줄 때 그 사랑의 마음이 전해진다.

무엇보다도 사극이 멜로를 제대로 품어줄 수 있는 것은 멜로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운명적인 사랑이 현대의 가치관으로는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사극은 그 시점을 과거로 돌려 운명적 사랑의 시대에 맞춰준다. 물론 지금의 가치에는 맞지 않지만 어느 정도는 ‘사극이니까’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멜로, 그 진화의 길들
이러한 사극과 멜로가 만나는 것은 멜로드라마의 입장에서 보면 또 하나의 진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멜로드라마가 처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운명적인 사랑에 호소하는 순전한 멜로드라마에 공감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멜로드라마는 그 순혈주의를 고집하지 않고 타 장르와 몸을 섞는 실험이 필요하며 그것은 사극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면 이것은 사극만 가능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멜로드라마가 현대물로서 진화의 몸부림과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이른바 휴먼드라마이다. 작년 ‘고맙습니다’가 그 첫 번째 길을 열었고, 그 이후 ‘인순이는 예쁘다’가 그 계보를 이었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불한당’ 역시 휴먼드라마를 표방했지만 그 진화의 계보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휴먼드라마가 가진 가능성은 멜로드라마의 구도가 가진 남과 여의 만남을 사회적인 이슈로까지 확장시켜나간다는 점이다. ‘고맙습니다’의 영신(공효진)과 기서, 그리고 ‘인순이는 예쁘다’의 인순이(김현주)와 상우(김민준)의 만남은 멜로드라마로서의 남녀의 만남이기도 하지만, 몰이해와 편견을 넘어서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멜로드라마는 미스테리와 몸을 섞어 전혀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은 사랑을 넘어 사람을 포착하는 멜로드라마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사극이 끝없이 진화의 길을 걸어오는 것처럼, 장르드라마가 늘 새로운 도전을 하려 하는 것처럼 이제 멜로드라마도 변화하지 않으면, 실험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것이 장르적인 퓨전이든 아니면 전혀 새로운 방식이든지 간에 분명한 점은 멜로드라마도 진화해야 산다는 것이다.

선호세대 다른 드라마와 시청률

방송 3사 드라마의 나이는 어떻게 될까. 이것은 물론 각 방송사별로 성공하는 드라마를 만든 주력 세대가 누구냐는 질문이다. 천편일률적으로 세대를 나눌 수는 없지만 대체로 MBC는 3,40대가 주 시청세대이며, SBS는 4,50대로 그보다 시청세대가 높다. 반면 KBS는 3,40대에서부터 5,60대까지 고른 시청층을 보유하고 있다. 어느 방송사의 드라마이건 10대와 20대는 이제 TV 시청률에서 그 중요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른바 ‘닥본사’보다는 TV 이외의 다른 매체를 통해 보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현재 방송사별 드라마들의 나이에 따라 주중과 주말에서 시청률의 희비쌍곡선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주중에는 주로 3,40대의 시청층이 드라마 시청률을 좌우하고 있는 반면, 주말에는 그 보다는 윗세대인 4,50대의 시청층이 그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주중에 ‘이산’이나 ‘뉴하트’ 같은 MBC 드라마들이 인기를 끌고, 반면 주말에는 SBS ‘황금신부’나 KBS ‘대왕 세종’같은 드라마들이 인기를 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중 드라마 3,40대가 좌우
주중 드라마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MBC 드라마들의 최근 특징은 그 타깃을 3,40대 여성에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AGB 닐슨의 세대별 시청률 백분율 자료(1월1일∼1월20일)에 의하면 주중 드라마를 이끌고 있는 ‘이산’과 ‘뉴하트’ 모두 3,40대 여성의 분포도가 가장 높았다. ‘이산’은 3,40대 여성이 30%(30대 16%, 40대 14%)였고, ‘뉴하트’는 31%(30대 17%, 40대 14%)였다. 여기에 같은 세대 남성들까지 포함하면 ‘이산’은 총 51%(30대 남성 11%, 40대 남성 10% = 21%), 즉 반 이상의 시청자가 3,40대라는 얘기가 된다. 마찬가지로 ‘뉴하트’도 총 48%(30대 남성 9%, 40대 남성 8% = 17%)로 반 수에 육박한다.

SBS의 ‘왕과 나’는 이에 비해 시청층이 더 높은데, 최근 들어 완성도에 대한 비판이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청률이 14% 내외를 유지하는 비결은 이 드라마가 사극이라는 점도 있지만 장년층 시청자들의 충성도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SBS의 ‘불한당’ 역시 주 시청층이 4,5,60대 여성으로 이 시청세대가 41%(남성까지 포함하면 무려 61%다)나 되는 반면, 30대는 10%(남성 포함해도 16%)에 불과했다. 역시 주중 드라마를 이끄는 주 시청층이 3,40대라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한편 주중 드라마로서 MBC의 아성을 공략하는 유일한 드라마는 KBS의 ‘쾌도 홍길동’이다. 이 사극의 세대별 시청률은 특이한데, 남성 시청층은 적은 반면(40대 10%가 최고치), 여성 시청층은 30대부터 60대까지 고루 분포(30대 12%, 40대 12%, 50대 9%, 60대 9%)하고 있다. 여러 모로 사극의 진화와 맞물려 시청층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주말 드라마 4, 50대 이상이 좌우
주중 드라마에서 3,40대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수위를 차지한 MBC 드라마. 하지만 주말 드라마의 성적표는 그다지 좋지 않다. 주말에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무한도전’이 드라마만큼의 시청률을 얻고 있는 것에 반해, 정작 드라마는 시청률 경쟁에서 멀어져 있다. 과거에 주말 드라마 하면 MBC를 떠올릴 정도로 강세였지만 그것은 옛말이 되었다. ‘깍두기’가 종영한 ‘며느리 전성시대’에 눌려 빛을 보지 못했고, ‘겨울새’는 조기종영 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을 정도다.

반면 주중에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던 SBS는 주말 드라마에서 활짝 웃고 있다. 대표적인 드라마가 ‘황금신부’. 이 드라마의 주 시청층은 4,5,60대(전체의 38%)여성으로 이 세대의 남성 시청자까지 합치면 59%나 된다. 한편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는 KBS 대하사극 ‘대왕 세종’은 주 시청층이 40대 이상 남성(33%)으로 여성 시청층까지 합치면 61%를 차지하고 있다. ‘대왕 세종’ 의 특이한 점은 시청률의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60대 시청자들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남 11%, 여 10%)이다.

시청률과 달라진 생활 패턴의 상관관계
이처럼 주중 드라마와 주말 드라마의 선호 세대가 다르고, 각 방송사별 드라마의 나이가 다른데서 현재의 시청률 등락을 이해할 수 있다. 주중 드라마를 이끄는 3,40대 시청층과 잘 맞아떨어진 주중 MBC 드라마들의 나이는 시청률 수위를 차지하게 하는 힘이며, 상대적으로 드라마 나이가 높은 주중 SBS 드라마들이 고전하는 이유가 된다. 반면 이런 상황은 주말에 와서는 역전된다. 그만큼 달라진 주말 생활 패턴과 맞물려 주말 드라마 시청층의 주 세대가 장년층이 되었다는 걸, SBS 드라마나 KBS 사극이 말해준다.

방송사의 드라마 성격이 특정 세대를 공략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 방송사의 이미지를 만들기도 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한 세대에 국한되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이것은 어떤 면으로 보면 특정 세대에 대한 쏠림 현상을 말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깃 세대가 고정되면 당장은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향후에는 비슷비슷한 톤의 드라마들이 등장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한 방송사에서도 여러 세대들이 향유할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드라마가 다양하게 포진되길 기대한다.

퓨전사극? 시대극? 아니면 제3의 무엇?

‘쾌도 홍길동’을 사극으로 볼 수 있을까. 흔히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과거이기에 이를 사극으로 생각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극이라 말할 때 그 범주 안에 이 드라마도 포함될 수 있는 것일까. 요즘은 참 쉬운 말이 퓨전사극이란 말이다. 역사를 다루되 사료와는 달리 상상력이 개입된 사극을 지칭하는 이 말은, 대충 정통사극이 아닌 것을 모두 지칭하는 개념처럼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정통사극에서 한참 멀어져 있는 ‘쾌도 홍길동’도 퓨전사극으로 부르면 무방한 것일까.

‘쾌도 홍길동’에는 역사적 시점이 없다
그럴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사극이라고 지칭할 때 그것은 주로 TV드라마를 말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최소한의 역사적 실제 사건이 들어 있을 때 그렇게 불린다. 하지만 ‘쾌도 홍길동’에는 역사적 시점이라는 것이 없다. 다만 원전인 허균의 ‘홍길동전’이 임진왜란 이후의 달라진 사회분위기를 담고 있다는 데서 그 시점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드라마 상의 왕인 광희(조희봉) 또한 실제 조선의 왕을 지칭하지 않고 있으며 훗날 왕위에 오른다는 광희의 동생 창휘(장근석) 또한 그 실제인물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역사적 시점만이 아니다. 국내 최초의 코믹사극을 주창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유로운 의상과 머리 스타일, 게다가 현대화된 사회의 풍경들은 이 드라마 속의 이야기를 역사적 공간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밸리 댄스를 추는 기녀와 골프채를 든 양반, 새로 뺀 가마라며 자랑하는 인물들은 물론 그 자체로 충분한 웃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사극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한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경우, 일본에서 주로 사용하는 시대극이나, 코스튬 드라마(costume drama)라는 용어가 적합할 지도 모른다. 일본에서의 시대극이란 사극과는 달리 역사적 상황만 드라마 속으로 가져오고 나머지는 다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드라마를 말하며, 코스튬 드라마는 실재했던 사건을 다루지는 않고 말 그대로 당대의 의상, 관습 같은 것을 살려 현실감을 넣는데 더 무게를 둔다. 이 드라마는 또한 중국의 무협드라마와도 궤를 같이 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협지 속의 인물들처럼 날아다니고 놀라운 내공을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 드라마 자체가 전하려는 메시지나 스토리의 재미에 더 천착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네 토양에서 만들어진 ‘쾌도 홍길동’을 일본의 시대극이나 중국의 무협드라마의 연장선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만이 갖는 만화적 상상력과 풍자의 세계가 공존하면서 동시에 퓨전사극의 영향을 보이는 긴장감 넘치는 전개가 엿보인다. 최근 만화적 상상력을 앞세운 젊은 세대의 감성을 적극 반영하고 있는 현대극의 또 다른 버전으로 읽히기도 하는 이 드라마는 우리네 사극의 뉴웨이브가 아닐까.

기존 사극에 대한 형식적 도발
중요한 것은 용어가 아니라 왜 이런 형식을 도입했는가 하는 점이다. 어쩌면 그 속에 이 엉뚱하고 발칙한 상상력을 가진 드라마의 존재이유가 숨어있지 않을까. ‘홍길동전’이라는 원전이 가진 도발적이고 세태 풍자적인 시선은 실로 당대로서는 분명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바로 이 혁명적인 시선은 지금 시대에 다시 만들어진‘쾌도 홍길동’에게도 똑같이 변화를 요구했을 터. ‘쾌도 홍길동’은 그저 웃기기만을 위해서 사극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배꼽춤과 섹시춤을 연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존 사극에 대한 형식적인 도발이다.

이 드라마는 천편일률적인 사극 속의 멋진 척, 예쁜 척 하는 캐릭터들을 전복시킨다. 홍길동(강지환)은 주색잡기에 빠진 한량이며(물론 이것은 다 위장이지만), 허이녹(성유리)은 덜떨어진 듯한 말괄량이다. 스승은 전혀 스승처럼 보이지 않고 제자도 전혀 제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왕이란 자는 색주가처럼 차려진 별궁에서 기생들과 놀아나고 도적들과 기생들은 웬일인지 사연 있는 착한 사람들처럼 그려진다. ‘권력의 핵심’이라 스스로 일컫는 서윤섭(안석환)은 오히려 도적처럼 보이며, 그 사대부가의 딸은 자신이 기생으로 오인되어도 홍길동을 만날 수 있다면 기꺼이 수긍하는 당대로서는 놀라운 인물이다.

이러한 캐릭터들의 행보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 현대적인 영상 연출 때문이다. 분할화면으로 홍길동과 그의 사부인 해명스님(정은표)이 각각 허이녹과 허노인(정규수)에게 자신들의 사제지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장면은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형식 실험이 주는 유쾌함과 통쾌함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기존 사극들이 가진 엄숙주의를 한껏 풍자하는데서 비롯된다. 한없이 무겁고 비장하기까지 한 사극들에 대한 발칙한 상상력의 도전장을 내미는 이 드라마는 그래서 한참 보다보면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왜 좀 다르게 생각하고 상상하면 안 돼?” 물론 거기에 대한 대답은 “된다”는 것이다.

‘뉴하트’ vs ‘쾌도 홍길동’ vs ‘불한당’

작년부터 유난히 뜨거웠던 수목 드라마 경쟁은 올해 새해 벽두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MBC는 일찌감치 ‘태왕사신기’의 여파를 몰아 ‘뉴하트’를 20%대의 시청률로 올려놓은 상태다. 여기에 새로운 도전장을 내미는 KBS와 SBS는 각각 퓨전사극 ‘쾌도 홍길동’과 휴먼드라마를 표방하는 ‘불한당’을 내놓았다. 그 강점과 약점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뉴하트’, 의드불패 혹은 의드도 식상
작년 ‘하얀거탑’의 뜨거운 반응을 이어 ‘뉴하트’는 시작부터 관심을 끌어 모으면서 일각에서는 ‘의드불패’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확실히 의학드라마는 여러 모로 보나 유리한 점이 많다. 먼저 인간의 생과 사가 오가는 병원이라는 공간이 가진 다이내믹함이 드라마의 극적인 전개를 쉽게 만들어낸다.

게다가 ‘하얀거탑’에서 시청자들을 열광케 만들었던 병원 내의 권력다툼은 ‘뉴하트’에서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최강국(조재현)이란 캐릭터는 바로 그 권력다툼의 재미를 끄집어내게 만드는 천재의사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김없이 멜로가 등장한다. ‘뉴하트’는 현재 이은성(지성)과 남혜석(김민정)의 멜로 라인에 이동권(이지훈)이 끼여들면서 본격 삼각 구도가 만들어진 상태이다.

이렇게 요소 요소들을 보면 ‘뉴하트’의 ‘의드불패’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속단하기는 어렵다. 드라마는 단순한 조합으로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위의 요소들은 부정적으로 말하면 ‘하얀거탑’류의 권력다툼과, ‘외과의사 봉달희’가 보여준 인간으로서 고뇌하는 의사의 모습에, ‘그레이 아나토미’류의 애정라인이 뒤섞여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의드불패’라는 말은 이제 우리의 의학드라마도 하나의 장르로서 특정한 시추에이션과 요소들을 조립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장르는 그 자체에 충실할 때 재미를 주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너무나 뻔한 설정으로 반복될 때 식상함을 주기도 한다. ‘뉴하트’가 가진 강점이자 약점은 바로 이 장르화 되어가는 의학드라마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쾌도 홍길동’, 신선한 시도 혹은 낯선 실험
‘쾌도 홍길동’은 작년부터 내내 주중드라마에서 고배를 마셨던 KBS로서는 절치부심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KBS가 전통적인 강점으로 가진 사극을 선택했다는 점은(‘황진이’나 ‘한성별곡’ 같은) 특이할만한 사항은 아니지만, 그 스타일 면에서 퓨전 사극 그 이상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파격이다.

첫 회를 통해 보여진 바로는 이 사극은 역사적인 시점을 다룬다기보다는 ‘홍길동’이라는 텍스트 자체를 지금의 시점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보여진다. 따라서 거기 등장하는 시대가 과거인 것은 ‘홍길동’의 본래 텍스트가 그렇기 때문이지 그것이 역사적인 어떤 의미를 갖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극 속의 배경은 역사가 아닌 한 가상의 시공간을 연상케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홍길동’이라는 고전을 똑같이 드라마로 구성하는 것은 이 시대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누구나 아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는’ 홍길동의 이야기는 따라서 누가 봐도 다른 새 옷을 입을 필요가 생긴다. 이 퓨전사극이 무협과 코믹을 모두 끌어안고 현대적인 연출을 가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 사극의 강점은 바로 이 부분에 있으며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신선한 시도로서 다가갈 것이 자명하다. 아직까지 역사 자체를 탈피한 퓨전 사극은 시도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낯설음이 또한 이 사극의 약점이 된다. 과거 KBS 드라마들 중 많은 것들이 호평을 받았으나 시청률은 낮았던 마니아 드라마가 된 것은 바로 그 낯설음의 강약조절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만화 같은 설정의 퓨전사극에 전통적인 사극의 주시청층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느냐가 이 사극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불한당’, 참신한 휴먼드라마 혹은 똑같은 멜로드라마
‘불한당’은 겉으로만 보면 여자 등이나 치며 살아가는 천하의 잡놈, 불한당인 권오준(장혁)과 싱글맘이지만 밝게 살아가는 진달래(이다해)의 사랑이야기로 읽힌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표방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휴먼드라마다. 멜로드라마가 남녀간의 사랑타령에 머무른다면, 휴먼드라마는 그 이상을 넘어 사람에 대한 사랑을 담아낸다. 작년 한 해 우리를 따뜻한 훈풍에 휩싸이게 했던 ‘고맙습니다’나 ‘인순이는 예쁘다’ 같은 드라마가 그 예이다.

실제로 진달래의 뒤에는 모녀처럼 지내는 시어머니인 이순섬(김해숙)과 그녀의 딸의 이야기가 있고, 권오준의 뒤에는 그의 누이인 권오순(윤유선)과의 사연이 숨겨져 있다. 사랑이야기 뒤편에 사람의 이야기가 포진되어 있는 셈이다. 부잣집 아들인 김진구(김정태)가 끼어 들지만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로 간다기보다는 오히려 부자가 알게되는 진달래의 진심에 더 무게중심이 쏠리는 느낌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가 휴먼드라마로 가기 위해서는 권오준과 진달래의 앞모습이 아니라 그 뒷모습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거기서 어떤 진정성을 끄집어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가 사회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던질 것이냐는 것이다. ‘고맙습니다’가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건드렸고, ‘인순이는 예쁘다’가 우리네 냄비근성에서 기인되는 사회적 편견과 허영을 꼬집었던 것처럼, ‘불한당’이 어떤 부분을 조명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남녀 간의 틀을 넘어 사람에 대한 사랑을 그리는데 있어서 사회적인 이야기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바로 이 춥게만 느껴지는 세상에 따뜻한 훈풍을 전해줄 수 있는 휴먼드라마라는데 강점이 있지만, 또한 거기서 어떤 사회적 공감을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그저 비슷한 멜로드라마에 머물 수도 있다는데 약점이 있다.

방송 3사가 연초부터 각자의 독특한 색깔을 드러내며 다양한 드라마를 선보인다는 것은 이제 우리네 드라마가 그만큼 풍성해졌다는 방증이다. 또한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새로운 분야를 노리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도 높게 사야할 대목이다. 모쪼록 그 초심이 드라마 끝까지 이어지길 바라며, 그 초심이 또한 올 한 해 동안 방송 3사 드라마에서도 계속 이어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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