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가요대제전’의 오프닝 컨셉트가 스마프의 공연 컨셉트와 같다는 데서 불거져 나온 표절 논란은 MBC측의 “표절이 아닌 패러디였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유야무야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다. 누가 봐도 이해될 수 없는 패러디라는 면죄부는 결국 스스로가 자신에게 준 셈이다.
게다가 연달아 터져 나온 ‘무한도전’의 표절 논란으로 슬그머니 화제에서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 표절논란도 금세 방향을 틀어 ‘라인업’ 표절 논란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또한 잘못된 팬덤 문화와 결합하면서 ‘라인업’ 조작방송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치 정치적 사건들이 연달아 터질 때, 점점 본질이 흐려지고 정치적 무관심을 가져오는 것처럼 이 논란도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논란 속에서 정작 논란을 제공한 제작진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느냐는 점이다. ‘가요대제전’의 담당PD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말로 침묵하고 있고, ‘무한도전’의 김태호PD는 “거론할 가치조차 없다”며 그 불똥을 경쟁 프로그램인 ‘라인업’으로 날렸다. “‘무한도전’ 컨셉트 자체를 따라하는 국내 프로그램은 ‘무한도전’과 경쟁한다고 하면서, 단지 몇몇 장면이 비슷하다고 ‘무한도전’은 표절이라고 말한다”고 했던 것.
이 인터뷰 내용은 ‘김태호PD 발끈, 무한도전은 표절이고 라인업은 경쟁인가’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되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 기사에 대해 ‘라인업’의 박상혁PD는 자신의 프로그램이 무한도전의 어디를 따라했는지를 해명하라고 하면서 “‘무한도전’의 표절 시비에 대한 해명을 하는데 왜 상대 프로그램을 걸고넘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공방의 양상을 보면 해당 프로그램의 제작진들은 모두 표절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왜 표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들 프로그램들에 대한 표절 논란이 인터넷을 들쑤시고 있는 것일까. 때지도 않은 굴뚝에 왜 연기가 나느냐는 말이다. 경쟁 프로그램을 무조건 비하하고 욕하는 일부 잘못된 팬덤 문화에서 나온 억울한 누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수긍할만한 이야기다. 현재 지나친 프로그램에 대한 비방이 오가는 이른바 '빠 문화’는 그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대한 제작진들의 대응은 그다지 시청자들을 위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표절이 아닌 우연의 일치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대한 분명한 해명을 하는 것이 그저 억울하고 화가 난다는 식의 감정적 대응보다는 납득할만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이런 대응은 표절 논란을 뒤로 밀어버리고 문제를 잘못된 팬덤 문화로만 몰고 가는 경향이 있다. 리얼리티쇼 전성시대에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에 보다 높은 신뢰성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똑 부러지는 명료함이 있어야 비로소 의혹을 벗어내고 리얼리티쇼로서의 신뢰성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오락 프로그램들이 버젓이 해외의 프로그램들을 노골적으로 베껴올 수 있었던 것은 지금 같은 공론과 검증의 장으로서의 인터넷 환경이 구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라진 환경을 너무나 잘 알고, 오히려 그런 환경을 적극 활용하여 프로그램에 반영하는 PD들이 이런 정도의 구설수에 휘말리게 되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그것이 실제 표절이든 아니든 제작진들이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서 여전히 과거의 마인드를 갖고 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한편 네티즌들은 수없이 쏟아지는 영상의 홍수 속에서 끝없이 유사한 영상들을 찾아낸다. 그것은 때론 실제 표절의 징후를 포착해내는 훌륭한 장치가 되기도 한다. 물론 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훌륭하고 놀라운 능력은 때론 비뚤어진 팬덤 문화와 만나면서 눈에 불을 켜고 경쟁 프로그램의 흠집을 찾아내는데 활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모든 것의 진위가 드러나는 인터넷 환경 속에서 리얼리티쇼 전성시대를 요구했던 네티즌들이 영상의 신뢰성에 극도로 민감한 반면, 표절이 나와도 패러디라 변명하며 덮어버리는 제작진들의 마인드는 상대적으로 둔감해 보인다. 이 간극이 결국 표절과 조작 공방의 밑그림을 제공한 셈이다. 모든 문제가 잘못된 팬덤 문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MBC ‘가요대제전’의 오프닝 무대에 대한 표절 논란이 거세다. 아기로 등장한 무한도전 여섯 멤버들이 밀림에 떨어진 후 동물에 쫓겨 도망 다니다가 어른으로 변한 후 공연장을 뛰어들어오는 오프닝 컨셉트 자체가, 일본의 인기그룹 스마프의 ‘018 팝-업 스마프’투어의 오프닝과 유사하다는 것. 논란이 거세지자 MBC측은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 표절이 아니라 패러디라는 것이다.
사실 연예계에서 표절 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하는 카드가 패러디다. ‘무한도전’이 한 네티즌의 인터넷 글을 통해 일본 후지TV의 ‘스마스마’, TBS의 ‘링컨’, 일본TV의 ‘가끼노츠까이’ 등에 등장한 장면과 일치하거나 흡사하다는 주장이 나왔을 때도 MBC 최영근 예능국장은 표절 논란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네티즌이 지적한 유사한 장면은 “여느 오락프로그램에서나 유행에 따른 패러디 정도의 수준으로 허용되는 것”이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또한 가수 아이비의 ‘유혹의 소나타’ 뮤직비디오가 일본 게임 ‘파이널 판타지7’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일었을 때 소속사가 꺼낸 카드도 패러디였다. 하지만 정작 ‘파이널 판타지’의 저작권자 측에서는 이 뮤직비디오에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을 걸었고 결국은 법원이 아이비 뮤직비디오를 표절로 판정하기도 했다. 도대체 표절과 패러디는 어떤 차이가 있길래 같은 사안에 대해 한쪽은 표절이다 다른 한쪽은 패러디라 주장하는 것일까.
패러디는 본래 문학작품의 한 형식으로서 사용되던 용어였으나 최근에는 음악, 광고, 영화, 코미디, 드라마, 뮤직비디오 등등 거의 대부분의 대중문화매체에서 활용되는 문화 코드가 되었다. 표절이 사전동의 없이 무단으로 몰래 베끼는 것이라면, 패러디는 기존에 나와 있는 유명한 컨텐츠를 풍자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똑같은 내용이 들어간다 해도 전체 맥락 속에서 다른 의미를 내포할 때 그것은 패러디라 불릴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표절과는 다르다.
이렇게 정의로만 두고 보면 사실상 표절과 패러디를 구분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하지만 구분할 수 있는 좀더 쉬운 방법은 존재한다. 먼저 그 패러디한 대상에 풍자와 웃음이 있느냐는 점이다. 이 점을 두고 보면 ‘가요대제전’의 오프닝은 확실히 패러디의 성격을 갖고 있다 할 수 있다. 스마프 멤버들의 진지한 영상을 ‘가요대제전’의 무한도전 멤버들은 비틀어 가벼운 웃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패러디로서 원본의 내용을 짐작 가능한 형태로 표현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스마프의 팬들이나 그쪽 관계자라면 ‘가요대제전’의 오프닝 동영상을 보면서 누구나 스마프의 오프닝을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들도 그랬을까. 국내의 공중파 같은 유력한 매체를 통해서 보여진 적이 없는 스마프의 오프닝을 일반인들이 잘 알고 있었을까. 사실상 논란이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면 ‘가요대제전’의 오프닝은 패러디가 아닌 순수 창작으로 오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패러디가 패러디로서 기능하려면 사전에 패러디의 원전이 되는 내용을 시청자들이 알고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가요대제전’의 오프닝 패러디는 대단히 이상한 패러디가 아닐 수 없다. 원전을 잘 모르는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원전을 풍자하는 것을 노린 패러디가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 예능 프로그램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상황들을 보면 ‘가요대제전’의 표절논란이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다. 과거에는 주로 해외의 프로그램들을 베끼는 수준의 오락 프로그램들이 양산되다가, 최근 들어 인터넷 등을 통해 그 표절 논란이 가속되자 아예 판권을 사는 경우가 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고 방송사가 굳이 그 포맷이 해외 프로그램의 것임을 공지하지 않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해외 프로그램과 같다는 표절 논란이 나왔을 때야 비로소 슬그머니 그 포맷을 샀다고 공식 표명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점점 다양화되고 글로벌화 되는 사회 속에서 원전이 가진 가치는 크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라와 나라를 넘어서 소개되지 않은 새로운 포맷을 자유롭게 사오거나 그것을 패러디해 자국민에게 재미를 제공한다는 것 역시 가치 있는 일이다. 다만 이제는 좀더 당당해지는게 좋지 않을까. 남이 알았을 때서야 비로소 슬그머니 사실을 밝히거나 혹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이 시대의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기 어렵듯 손바닥으로 네티즌들의 눈을 가리기는 더더욱 어려운 시대다.
작년 완성도 높은 ‘웰 메이드 드라마’를 꼽으라면 누구나 ‘연애시대’를 얘기하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올 들어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하얀거탑’은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웰 메이드 드라마’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모두 그 원작을 일본에서 들여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연애시대’는 노자와 히사시의 일본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고, ‘하얀거탑’역시 야마자키 도 요코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다.
일본에서 ‘하얀거탑(원제 白い巨塔)’은 이 소설로 1978년에 드라마화 되었고 2003년 다시 리메이크되었다. 게다가 다시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30여 년에 걸쳐 3번이나 드라마화된 셈이다. 원작의 힘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반증이며, 동시에 ‘좋은 원작은 시공을 뛰어넘어 사랑 받는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시장은 점점 글로벌화되고 리메이크는 하나의 세계적 조류가 된 상황에서 원작이 갖는 부가가치는 그만큼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아마 재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장밋빛 미래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한류’는 어디에나 있었고 뭐든 한국인이 만들면 세계가 좋아할 거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모든 걸 낙관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드라마의 수출은 뚝 끊긴지 오래고 국내에서 신드롬에 가까운 성공을 일궈낸 영화들은 거의 모두 해외에서 고배를 마셨다. 여기에 최근 국내 드라마들의 경향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더 어둡게만 보인다.
작금의 사극 붐은 그 자체의 재미에서 비롯된 부분이 있지만, 또한 사극 이외의 현대물들이 전혀 새로운 재미를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한 반사이익도 크다. 퓨전사극이라는 새로운 재미가 시도되는 동안, 현대물들은 여전히 과거 멜로와 스타를 적절히 버무리는 ‘한류의 공식’에만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치열한 창작의 소산물이라기보다는 기획물에 가까웠다. 당연히 문화소비자들은 외면했다. 최근의 일본 원작들이 대거 국내에서 리메이크 붐을 타고 있는 것은 이제 적당한 기획물로는 어렵다는 자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리메이크는 물론 베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창작이다. 제대로 된 해석과 토착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리메이크는 성공할 수 없다. 일본 원작을 영화화했으나 실패한 ‘사랑따윈 필요없어’와 성공한 ‘미녀는 괴로워’는 그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 리메이크는 이제 세계적인 조류이다. 좋은 리메이크는 오히려 그 원작을 수입해온 나라로 역수출도 가능해진다. 다만 그것이 탐탁잖게 보이는 것은 어려운 원작 생산보다 성공이 쉬워 보이는 리메이크에 올인하는 상황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로또식으로 너도나도 뛰어들어 만들어내는 리메이크는 자칫 문화계의 지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
여기에 국내 순수 창작물로 만들어진 작품들에 대해 계속되는 표절 시비는 상황을 더 어둡게 보게 만든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그레이 아나토미’에 대한 표절 논란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달자의 봄’ 역시 일본 드라마 ‘아네고’에 대한 표절 논란이 불거졌다. 인물 설정은 물론이고 드라마 소재까지 따왔다는 것. 이 정도 되면 뭔가 새롭고 재밌는 드라마는 ‘리메이크 아니면 표절’이란 말이 나올 법도 하다.
리메이크 붐과 일련의 표절시비는 드라마 제작자들이 앞선 문화소비자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문화소비자들은 인터넷이나 여러 경로를 통해 이제 일본드라마, 미국시즌드라마를 이미 섭렵하고 있다. 그러니 과거처럼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은 통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상황이니 완성도 높은 드라마들에 익숙해진 그들이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우리네 드라마가 시시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리메이크된 작품을 놓고 원작과 비교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건 그만큼 외국드라마의 저변이 넓다는 말도 된다.
이제 ‘국경 없는 컨텐츠 제작’이 하나의 조류로 자리 잡아가는 시대다. 일련의 합작영화들이 나오는 상황에 합작 드라마 역시 하나의 가능성으로 자리한다. 하지만 여기서 명심해야할 것은 ‘국경이 없다’는 말이 단지 ‘자유로운 제작 풍토’같은 장밋빛 뉘앙스의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그것은 그만큼 ‘전장의 구분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 저기 얽히고 설키면서 앞으로는 더더욱 그 국경이 희미해질 상황이기에 원작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 상품의 기반이 되어줄 소설이나 연극, 만화 같은 기초분야에 대한 발굴과 지원이 절실한 시점이다. 작년 우리 원작의 가능성을 보여준 연극 ‘이(爾)’ 원작의 ‘왕의 남자’, 허영만 만화 원작 ‘타짜’의 성공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