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끼줍쇼’, 사람냄새 물씬 나는 이 프로그램의 정체

나이가 들어도 어쩌면 저렇게 신사일 수 있을까. 신사동에서 한 끼 함께 할 집을 찾아 나선 JTBC 예능 <한끼줍쇼>에 출연한 배우 김용건은 아마도 ‘신사’로 정평이 난 그 면면 때문에 섭외된 인물이 아닐까 싶었다. 아재개그가 입에 철썩 달라붙은 김용건이 여러모로 신사동의 신사로는 딱 어울릴 것 같기 때문이다. 

사실 영하 10도를 오가는 겨울 날씨에 골목길을 떠돌며 한 끼 밥을 청하는 일은 젊은 사람들도 쉬운 일이 아닐 게다. 하지만 김용건은 연거푸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시종일관 유쾌함을 잃지 않았고, 무엇보다 여러 사유로 거절하는 집 주인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했다. 이렇게 알아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것이다. 

<전원일기>에 20년을 출연했고, 최근에는 <품위있는 그녀>에 출연해 남다른 존재감을 뽐냈던 배우지만, 자신을 잘 모르는 분들에게는 기꺼이 “하정우 아버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였다. 어딘지 쓸쓸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는 그러면서도 “그게 기분이 나쁘지가 않다”고 말해 자식에 대한 남다른 마음을 드러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 계단을 오르내리며 마지막까지 시도를 멈추지 않았지만 결국 실패해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워야 하는 처지에서도 김용건은 “이것도 좋다”며 긍정적인 말을 내놓았다. 물론 그게 너무나 슬퍼 보인다는 이경규의 한 마디가 진심일 수 있지만, 김용건은 신사로서의 면모를 끝까지 지키는 ‘품위 있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한편 누나와 두 남동생이 지내는 집에서 한 끼를 함께 하게 된 강호동과 황치열은 남다른 이 남매들의 정 앞에서 뭉클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사연인지 부모 없이 남매 셋이 지내고 있는 그들은 냉동 아구찜에 베이컨 버섯볶음으로 조촐하게 저녁을 차려냈지만 누나가 요리를 하고 동생들이 저마다 저녁차림을 돕는 모습은 그 어떤 집보다 따뜻한 가족의 정 같은 것이 느껴졌다. 

평소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이 남매들에게 불쑥 서로에 대한 마음을 물어보자 조금은 쑥스러워하면서도 누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동생들 앞에서 늘 굳건한 ‘제2의 엄마’ 역할을 해온 누나도 순간 울컥하는 모습을 보였다. 삶의 궤적이 비슷해 남다른 공감대를 보이는 황치열과 늘 유쾌함을 잃지 않던 강호동도 어리지만 어른스러운 아이들 앞에서 조금은 숙연해졌다.

<한끼줍쇼>에 나온 김용건에게 이경규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들 하정우에게 영상편지를 보내라며 자신의 영화에 출연해달라고 요청하자 김용건은 선선히 “해줄 때 확실히 도와주라”고 말했고, <한끼줍쇼>에도 나와 달라는 요청에서는 “사람 냄새 사는 프로그램”이라며 여기 나와 한 끼 하는 것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나이 들어도 어른임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 진짜 어른 김용건이나, 어느 집의 너무나 어른스러운 아이들이 보이는 남다른 남매의 정에서 느껴지는 ‘사람냄새’. 바로 이것이 <한끼줍쇼>가 주는 훈훈한 재미의 실체가 아닐까.(사진:JTBC)

<터널>, 재난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건

 

<터널>이라는 영화의 예고를 잠깐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 대해 어떤 선입견을 가질 지도 모른다. 무너진 터널에 갇힌 사람의 처절한 사투를 담은 영화라니! 그잖아도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에 이런 선입견은 영화 <터널>에는 하나의 커다란 진입장벽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단언컨대 <터널>은 그런 퍽퍽한 고구마 같은 영화가 아니다.

 

사진출처:영화<터널>

물론 <괴물>에서부터 현재의 <부산행>까지 관통하는 우리네 재난 영화의 공식과 메시지가 <터널>에도 여전히 깔려 있다. 재난 상황보다 우리를 더 절망적으로 만들어내는 콘트롤 타워의 부재와 선정적인 언론, 경제적 논리를 내세워 구조를 기다리는 생존자를 저버리는 공직자들, 생존자의 구출보다는 자신이 언론에 어떻게 비춰질 것인가만을 생각하는 정치인들 등등.

 

하지만 <터널>은 흥미롭게도 이러한 재난 영화의 공식처럼 등장하는 절망적 현실의 이야기에 매몰되지 않는다. 재난 영화에서 터널에 갇힌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며 웃음이 터져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또한 그렇게 갇힌 생존자를 구해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119 대원들의 이야기도 그 절실함과 간절함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 곳에서도 역시 훈훈한 웃음이 피어나고 유머 역시 멈추지 않는다. <터널>에 갇힌 답답한 이야기? 오히려 <터널>은 그런 폐쇄적인 공간에 갇힌 이를 구해내는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감동적이고 희망적인 웃음을 멈추지 않는 영화다.

 

이것이 가능해진 건 매몰된 터널에 갇힌 주인공 정수(하정우)와 그를 구하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소방대원 대경(오달수)의 독특한 캐릭터 덕분이다. 정수는 자동차 영업사원으로 굉장히 낙천적인 성격이다. 처음 터널이 무너져 내리고 간신히 살아남아 스마트폰으로 119와 연결됐을 때 그는 당연하다는 듯 언제 자신을 구하러 올 거냐는 낙관적인 질문을 던진다. 물론 그 구조작업은 의외로 지난한 사투로 돌변하지만 그 때마다 그는 절망하기보다는 그래도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것은 대경도 마찬가지다. 그는 구조작업에서는 자신들이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며 반드시 정수를 구하겠다고 단언한다. 기자들이 취재를 명목으로 특종만을 노릴 때, 정치인들이 도룡뇽 하나 때문에 건설이 멈춰져 입은 경제적 손실 이야기를 하고 터널 붕괴로 멈춰버린 제2 터널 공사 재개를 얘기할 때, 대경만은 거기 묻혀 있는 존재가 다름 아닌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

 

이처럼 답답한 터널 속에서도 훈훈한 웃음이 피어나올 수 있게 해준 장본인은 하정우와 오달수라는 배우들의 저력이 한 몫을 차지한다. 이미 <테러 라이브>에서 두 시간 가까이 그 얼굴만 쳐다봐도 쫄깃한 긴장감과 재미를 줄 수 있다는 걸 알려줬던 하정우의 연기는 단연 돋보인다. 물론 신스틸러의 차원을 넘어서 이제는 국민배우가 되어가는 오달수의 웃음과 감동을 넘나드는 천연덕스런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마치 결코 시원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무더위처럼 실로 <터널> 같은 현실이다. 하지만 영화 <터널>은 그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터널을 빠져나오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다. 무더위에 답답할 것 같다는 건 선입견이다. 오히려 무더위 때문에라도 그 답답함을 어떻게 이겨내는가를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영화다

'아가씨' 김민희와 김태리, 그녀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영화 <아가씨>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어느 곳에 지어진 대저택이다. 하필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일제강점기로 삼은 이유는 명백하다. 그건 이 시대를 다룬 무수한 영화들이 많이 보여주던 민족주의적인 관점과는 무관하다. 다만 그 시기가 가진 혼종적 성격, 즉 문을 지나고 나서도 한참을 차를 타고 들어가 세워져 있는 대저택이 일본식과 영국식 그리고 우리식으로 한 공간에 지어져 있는 모양새와 무관하지 않다. 공간이 그러하듯이 그 공간에 살아가는 이들도 혼종적 성격을 띤다. 일본어를 쓰는 조선인이 있고 조선어를 쓰는 일본인이 있다.

 

사진출처: 영화 <아가씨>

영화가 담는 시공간이 이처럼 혼종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건 <아가씨>에서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수한 경계와 구분들이 이 혼종적 시공간에서는 어딘지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그 느슨함은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대저택에 거의 감금되듯이 살아온 아가씨 히데코(김민희)는 부모를 잃고 막대한 유산을 받았지만 그 후견인인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의 손아귀에서 자라난다. 그런데 이 코우즈키와 히데코의 관계가 애매하다. 친인척 관계지만 코우즈키는 히데코에 대한 변태적인 애정을 갖고 있다. 외부에는 그것이 코우즈키가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기 위함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건 영화의 말미에 가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아가씨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려는 가짜 백작(하정우)이 그녀에게 좀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해 숙희(김태리)를 하녀로 넣는 일종의 작전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연기를 한다. 혼종적 공간에서의 연기는 이들이 도대체 그 진심이 무엇이고 실체는 무엇인지를 더욱 오리무중으로 만들어버린다. 3부로 나뉘어 구성된 영화는 그래서 그 시점이 매 부마다 달라지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의 반전을 보여준다. 연기를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연기가 아니었고, 진짜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연기였다는 것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한 장면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의 변주만으로도 <아가씨>는 꽤 흥미롭다.

 

하지만 영화가 지향하는 점은 그간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보여줬던 모호함이 아니라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폭력적인 남성성의 세계로부터 두 여성이 유쾌한 탈주극을 벌이는 것이다. <아가씨>에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하고 그들이 모두 두 명의 남성에 포획된 존재들이라는 설정은 그래서 이 영화가 가진 상징성을 보다 명쾌하게 보여준다. 가짜 백작에 의해 작전에 투입된 숙희가 그렇고, 코우즈키에 의해 대저택에 감금된 채, 신사차림으로 가장한 남자들 앞에서 더럽고 도착적인 소설 강독을 하며 살아가는 히데코가 그렇다.

 

아가씨와 하녀라는 관계 설정은 아마도 남성성을 드러내는 무수한 성애 영화가 보여주곤 했던 기묘한 상상을 자극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직접 보기 전에는 <아가씨>라는 영화가 일종의 동성애 영화가 아니냐는 편견을 갖게 되는 건 이 영화가 주는 반전에는 오히려 더 효과적인 면이 있다. 남자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묻는 아가씨의 질문에 하녀가 그 속살을 만지고 성 행위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1부에서는 말 그대로 남성성의 시각을 그대로 재연하는 듯 보이지만, 2, 3부에서 다시 보는 그 장면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코르셋처럼 남성성에 의해 짓밟히고 옥죄던 육체들이 아가씨와 하녀라는 서열 구조까지 한껏 벗어던진 채 서로를 온몸으로 위무하는 듯한 장면으로 치환된다. 두 여성이 첫 설렘을 갖게 되는, 골무로 날카로운 이빨을 갈아주는 장면 역시 다시 보게 되면 여성들의 연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이 대저택 지하실로 상정되는 남성성의 세계는 점점 더 도착적인 느낌을 준다.

 

섹스는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저 성행위가 아니다. 여기 등장하는 남성들은 이상하게 삐뚤어진 성의식을 갖고 있다. 마치 여성들을 위압적으로 짓눌러야 여성들이 더 좋아할 거라는 사고방식. 그런 폭력적인 생각들은 지하실 가득한 무수한 성애 소설들의 판타지로 남겨져 여성들을 그 폭력의 대상이 되게 만든다. 뒤늦게 이 지하실에 가득 채워진 성애 소설들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 숙희는 그래서 히데코와 함께 그 집으로부터 탈주하며 소설들을 발기발기 찢어버린다. 그리고 마치 발기된 성기처럼 세워져 위압적으로 그녀들을 억압하던 상징물 뱀 대가리를 잘라버린다.

 

그렇게 여성들이 탈주해버린 대저택에서 남겨진 남성들은 그 폭력적인 성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대신 탈주한 여성들은 블라디보스톡행 배를 타고 자유의 항해를 한다. 그간 남성성의 억압을 상징하던 옷들을 남김없이 벗어버리고 폭력적인 성행위가 아닌 행복한 성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 코우즈키가 히데코를 훈육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구슬은 온전한 쾌락의 도구로 바뀐다.

 

사실 이렇게 선명하게 메시지를 담아내면서도 매번 반전에 반전을 이어가고 그리고 박찬욱 감독 특유의 탐미적인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가씨>는 놀라운 성취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장면을 바라보던 카메라가 갑자기 느릿느릿 뒷걸음질을 치면서 그 장면의 진짜 이야기를 보여주는 듯한 영상 연출은 그래서 이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다음에 벌어질 상황들이 못내 궁금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갖고 있던 편견들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그 장면에서는 어떤 쾌감마저 느껴진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혼종적 성격을 띠던 영화의 모호함은 보다 선명해진다. 가짜는 가짜임이 판명되고 진짜는 진짜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모두가 연기를 하는 듯 보였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면 그 연기의 끝장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폭압적인 상상력과 기획으로 강요되던 연기들이 벗겨지고 대신 진실 된 알몸이 드러날 때의 카타르시스는 그 어떤 섹스보다 강렬하다. 남성성이 내포하고 있는 폭력적인 양태들이 무너져 내리고 저 편 들판을 향해 달려 나가는 두 여성의 자유를 지지하게 될 때, 영화는 한없이 유쾌해진다. 성 의식에 대한 논제들이 그 어느 때보다 쏟아져 나오는 시기여서 일까. <아가씨>는 특히 더 흥미로운 동지의식을 갖게 만드는 영화다

<암살>, 상업성과 역사 사이의 절묘한 줄타기

 

일제강점기를 오락물로 풀어내는 건 가능한가. 사실 영화는 어떤 시기든 소재로 담을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즉 이 시기를 다루는 방식은 대부분 민족주의적인 입장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반일감정을 자극하고 애국주의적인 시선을 담아내는 방식. 그러니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하는 콘텐츠는 비장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사진출처:영화<암살>

하지만 <암살>은 일제강점기라는 시기를 가져오지만 그것을 암울하고 비장하게만 다루지는 않는다. 나아가 이 영화는 케이퍼 무비(Caper movie. 범죄 영화의 하위 장르 중 하나로, 무언가를 강탈 또는 절도 행위를 하는 모습과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는 영화)의 장르적 성격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도둑들>을 통해 케이퍼 무비의 성공방정식을 보여준 최동훈 감독의 장기이기도 하다.

 

조선주둔군 사령관인 카와구치 마모루와 친일파 강인국(이경영)을 암살하려는 독립군의 이야기. 하지만 이 이야기 속에 마치 만주 웨스턴의 캐릭터들을 보는 듯한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이나 속사포(조진웅),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같은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은 저마다의 욕망과 목표를 갖고 이 암살의 과정 속에 뛰어들어 이야기를 다채롭게 만들어낸다.

 

케이퍼 무비의 특성 중 하나인 배신 역시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배신은 사적 관계의 배신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배신이라는 점에서 다시금 일제강점기가 갖는 비장함과 맞물린다. 그래서 이 케이퍼 무비가 갖는 유쾌함은 일제강점기의 비장함과 얽혀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암살>이라는 영화가 가진 가장 빛나는 지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상업적인 지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철저히 상업적인 지향을 보여준다. 그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사뭇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시기를 끌어오면서도 그 안에 오락적인 재미를 펼쳐놓는 최동훈 감독의 연출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밑바탕에는 당대의 독립군들이 가졌을 그 암담함과, 초개처럼 자신을 던지는 그 비장함이 주는 먹먹함 역시 느껴진다. 그것을 가장 짧게 인상적으로 그려낸 건 암살 미션을 받고 떠나기 전 안윤옥과 속사포 그리고 황덕삼(최덕문)이 함께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그들은 마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처럼 카메라 앞에서 비장하다. 하지만 카메라 셔터가 눌려지기 직전, 그들은 애써 웃음을 짓는다. 어딘지 어색하면서도 진심이 느껴지는 그 장면은 영화 전체가 케이퍼 무비의 오락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도 마음 한 구석에 이물감처럼 남는다.

 

배신과 처단은 물론 케이퍼 무비 특유의 장르적 재미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일제강점기가 끝나고도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네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물론 케이퍼 무비의 오락적 요소들을 극점까지 보여준 후, 이렇게 역사적인 문제로 마무리하는 것 역시 상업적 선택이다. 그것은 과거 민족주의적인 관점으로 일제강점기를 다루던 콘텐츠들이 대중들을 격동시키던 그 이야기방식을 닮아있다.

 

<암살>은 또한 다분히 중국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전지현이라는 배우를 전면에 내세운 건 우연이 아니다. 이미 <별에서 온 그대>로 중국에서 열풍을 만들어낸 전지현이 아닌가. 게다가 영화는 일제와 싸우다 스러진 독립군의 이야기를 담는다. 상하이를 배경으로 일제와 싸우는 액션이란 중국의 관객들에게도 충분히 어필될 수 있는 이야기다.

 

이처럼 <암살>은 잘 계산된 상업적인 영화의 모범답안 같은 면면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재미에만 치우쳐 일제강점기와 현재를 바라보는 의미를 놓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찌 보면 <암살>은 그 상업성과 역사 사이의 절묘한 줄타기를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일제강점기를 오락물로 풀어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암살>은 그 가능성을 놀라운 균형감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대, 세대, 국적을 뛰어넘는 '허삼관'의 아버지

 

한때 콘텐츠에 사용되는 무국적이라는 수식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적이 있다. 영화에 있어서 특히 어느 나라 얘긴지 모르겠다는 평가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우리나라에서 상영되는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평가는 상업적으로도 성공하기 힘든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우리 영화는 역시 우리나라라는 국적을 담아낼 때 그 힘이 발휘할 수 있다고 믿어졌다.

 

사진출처 : 영화 <허삼관>

하지만 적어도 <허삼관>이라는 영화에서만은 이 무국적이라는 표현이 단지 부정적 의미로만 다가오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알다시피 96년에 출간된 중국 3세대 소설가인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가 원작이다. 원작의 이야기와 인물(이름도 그대로다)을 거의 가져왔지만 영화는 전후 5,60년대 우리나라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다.

 

즉 중국의 이야기를 한국화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국적을 알 수 없는 애매한 지점들이 나온다. 지명도 대전, 수원, 용인, 서울 같은 우리의 지명을 쓰고 있지만 어딘지 마을 풍경은 중국의 한 시골 같은 느낌을 준다. 중요한 것은 중국과 한국이 걸쳐져 있는 듯한 이러한 애매한 국적성이 영화에 그다지 장애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시대를 얘기하려 하지 않고, 대신 허삼관이라는 초국적이며 보편적인 아버지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허삼관>이 아버지를 그리면서도 시대를 얘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최근 <국제시장>의 아버지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국제시장>은 덕수(황정민)라는 아버지를 통해 시대를 훑어내는 영화다. 그러다보니 생겨난 선택과 집중은 시대를 재단하고 세대를 재단한다. 과거의 시대는 아버지들의 희생으로 점철된 것이고, 그 피땀 어린 희생이 있어 후세대가 이만큼 살게 됐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국제시장>이 논쟁적인 부분은 이 덕수가 살아낸 국가의 문제를 보는 시각이 현저하게 양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삼관>은 국가나 시대 나아가 세대를 얘기하지 않는다. 대신 어느 나라나 시대, 세대를 불문하고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부성애를 얘기한다. <허삼관 매혈기>라는 원작 제목이 말해주듯이 자신의 피를 팔아 가족을 부양하는 아버지 허삼관은 지금 이 시대의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라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피를 판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상징적이다. 그것은 이 땅의 아버지들이 지금도 생계를 위해 고혈을 짜내듯 일을 하고, 윗사람들의 모욕을 참아내며 기꺼이 무릎을 꿇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아버지들은 누구나 가족을 위해서라면 지금도 피를 판다. 가족이 한 때의 만두 한 그릇과 붕어찜의 행복을 느끼며 웃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말이다.

 

<허삼관>은 기묘하게도 모든 것들의 경계를 무화시킴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긍정하게 만드는 영화다. 중국이든 한국이든 국적이 다르다는 게 무슨 상관일까. 과거와 현재의 삶의 양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뭐가 다를까. 심지어 내 친 자식이냐 아니냐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옛 세대의 아버지와 지금 세대의 아버지라고 해서 다를 건 뭔가. <허삼관>의 아버지는 이 모든 것들을 무화시켜버리는 보편적인 힘을 발휘한다.

 

흥미로운 건 <허삼관>을 연출하고 또 주인공으로 연기를 한 하정우 역시 마찬가지의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가 감독이건 배우이건 무슨 상관일까. 어쨌든 이 영화의 허삼관이라는 인물은 생색내지 않고도 감동적이니 말이다. 만일 영화를 통한 국가와 시대와 세대의 소통을 이야기한다면 경계를 해체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아버지와 또 누군가의 아버지인 아들이 함께 봐도 충분한.

 

<군도>, 민란을 웨스턴처럼 보는 즐거움 혹은 불편함

 

역대 최고 오프닝 기록을 갈아치우며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군도 : 민란의 시대>는 제목이 주는 선입견이 있다. ‘군도민란이라는 단어는 분명 우리가 처한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그것이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이라고 해도 그것이 상영되는 건 지금 현재 우리가 사는 이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나 지금의 막막한 현실이 투영된 것으로 군도민란이라는 단어를 읽게 된다.

 

사진출처: 영화 <군도:민란의시대>

실제로 영화가 갖고 있는 이야기 설정 또한 지금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탐관오리가 등장하고 정경유착이 나온다. 그리고 지리산 추설이라는 의적들이 내뿜는 세상을 바꾸자는 목소리에도 현실의 울림이 들어가 있다. ‘뭉치면 백성 흩어지면 도적이라는 반복되는 대사만을 생각해보면 영화는 심지어 민중봉기의 의미를 담은 영화처럼 오인된다.

 

하지만 제목과 이런 이야기 설정들이 주는 선입견을 갖고 <군도>를 보게 되면 100% 실망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군도>의 소재일 뿐, 이 영화가 하려는 스토리텔링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군도>는 철저히 오락영화를 지향했다. 그래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말을 타고 떼 지어 달리며 한 사람 한 사람 스틸 컷으로 캐릭터가 설명되는 장면에서는 이 영화가 전형적인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를 그리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바로 이 부분에서 호불호는 갈라진다. 만일 <군도>를 여러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웨스턴 오락영화로 받아들인다면 그 안에 펼쳐지는 활극의 묘미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민란이 상기시키는 핍박받는 백성들의 무게감을 떨쳐낼 수 없다면 이런 소재를 이렇게 오락으로 그려도 되나 하는 불편함까지 가질 수 있다.

 

마카로니 웨스턴 장르는 인물이 가진 아픔이나 고통에 집중시키지 않는다. 대신 그렇게 만들어진 캐릭터로 어떤 재미를 보여줄 것인가에 집착한다. <황야의 무법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가 왜 그렇게 떠돌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심지어 그는 영화 속에서 이름 없는 자로 불린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총을 쏘고 머리를 써 상대방을 속이는가 하는 트릭의 재미를 보여줄 뿐이다.

 

이런 사정은 <군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찌 어찌 해 지리산 추설이라는 의적 집단에 들어오게 된 인물들은 그들이 왜 그렇게 됐는가를 정서적으로 공감하게 해주기보다는 짧게 캐릭터를 설명하듯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정서적 공감보다 중요한 건 그들이 각자 가진 능력으로 대변되는 캐릭터다. 천보(마동석)는 힘을 대변하고, 금산(김재영)은 빠른 속공을 대변하며, 땡추(이경영)는 전략가를 대변하는 식이다.

 

이처럼 가볍게 캐릭터화된 인물들이 조윤(강동원)이라는 절대 악인이자 고수와 대결하는 과정은 그래서 절절함이 느껴진다기보다는 액션 활극이 보여주는 재미에 더 치중되어 있다. 심지어 인물의 죽음조차 그다지 슬프게 다가오지 않는다. 마카로니 웨스턴을 보면서 인물의 죽음에 감정이입이 과도하게 되지 않듯이 <군도> 역시 액션 활극으로 그려지면서 인물의 감정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게 만든다.

 

사실 핍박받는 민중의 봉기를 소재로 한다고 해서 모두 절절한 드라마를 깔아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핍박받는 민중들의 죽음이 절절하게 다가오지 못하고 액션 활극의 소재처럼 활용되는 부분은 지금의 대중들의 정서에는 상당부분 부딪치는 면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군도>는 그래서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영화일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액션 활극이거나 혹은 불편한 민중 봉기 소재의 영화거나.

 


한석규에서 최민식까지, 신들린 연기 전성시대

사진출처:'범죄와의 전쟁'

드라마든 영화든 요즘 이 맛에 본다. 바로 연기의 재발견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그 팽팽한 대본과 군더더기 없는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지만, 무엇보다 두드러진 건 연기자들의 '신들린 연기'였다. 송중기는 꽃미남 이미지에 연기자 이미지를 확실히 부각시켰고, 한석규는 한 가지 장면에서도 계속 변화하는 섬세한 감정 연기로 보는 이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브레인'의 신하균은 야비하게 느껴질 정도로 욕망에 충실한 역할을 보여주면서도 한 편으로 그 인물에 공감하게 만들었다. 하균신이라고까지 불린 신하균과 팽팽한 대결양상을 보여준 정진영 역시 인술을 행하는 명의에서부터 그 껍질을 하나 벗겨낸 가식어린 모습까지 드러내줌으로써 연기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한편 '해를 품은 달'에서는 여진구와 김유정이라는 놀라운 아역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섬세한 멜로 연기는 초반부터 이 사극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미 30%를 넘어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게 된 데는 전적으로 이 두 아역이 남겨놓은 강한 여운이 한 몫을 하고 있다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도 '신들린 연기'들이 주목을 받았다. '부러진 화살'에서 안성기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이 오히려 강한 효과를 남겼고, 판사 역할로 나온 김응수, 이경영, 문성근의 보는 이를 치 떨리게 만드는 연기가 흥행에 한 몫을 차지했다. 아쉽게도 흥행에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페이스메이커'의 김명민은 역시 메소드 연기의 또 한 차원을 보여주었다. 완전히 페이스메이커에 빙의된 그의 연기는 그 앙상한 몸과 발만으로도 보는 이를 찡하게 만들었다.

'범죄와의 전쟁'은 그 '나쁜 놈들 전성시대'라는 부제가 '신들린 연기 전성시대'로 보일 지경이다. 최민식은 이 작품에서 나쁜 놈들 중의 나쁜 놈 역할을 연기하지만, 그 안에 진한 페이소스까지 담아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나쁜 놈의 전형 속에서 가장의 고단함까지 느껴지는 이 작품은 최민식 특유의 광기어린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에 하정우라는 든든한 아우라가 덧붙여지고, 최근 '뿌리 깊은 나무'로 주목받은 조진웅이 빛을 발하니 그 연기력 대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현란할 지경이다.

최근 들어 확실히 연기는 재발견되고 있다. 물론 그간 연기력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논란은 늘 있어왔다. 특히 드라마에서 툭하면 벌어지는 '연기력 논란'은 이제 대중들이 얼마나 연기에 민감해 하는가를 잘 말해준다. 사실 영화계에서 최민식이나 하정우 같은 배우들의 연기력은 늘 인정받아왔다(물론 영화에서도 겉멋든 배우들에 대한 논란은 계속 있어왔다). 반면 드라마에서 연기력이란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만큼 엄밀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감히 이 영역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연기자들이 잘 생긴 얼굴 하나로 투입 되었던 것은 이제 시대착오적인 일로 여겨질 정도다. 최근 들어 러시를 이루는 가수들의 연기 영역 진출은 그 상업적인 목적은 알 수 있지만, 연기자로서의 진정성을 느끼기 어렵다는 점에서 큰 문제로 지적된다. 하지만 한석규나 신하균이 보여준 것처럼 이제 드라마에서의 연기력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감도 한껏 높아져 있는 게 사실이다. 드라마든 영화든 연기라는 영역이 가진 가치가 재발견되고 있다는 얘기다.

한 편에서는 신들린 연기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는 마당에 다른 한 편에서는 끊임없이 연기력 논란이 쏟아지는 것이 현재 연기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이다. 그만큼 겉멋이나 외모가 아니라 진정한 연기를 보고 싶은 대중들의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이 정도 되면 연기자들도 각자 작품을 대하면서 '나는 연기자다'라고 스스로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온 몸을 던져야 하는 상황이다. 연기가 어디 장난인가. 어쨌든 연기의 재발견, 요즘 이 맛에 드라마든 영화든 보게 된다.

유사가족, 팀(team)이 보여주는 ‘히트’

“대외홍보용인가요?” 히트(H.I.T. : 강력특별수사팀)의 팀장이 된 차수경 경위(고현정)의 질문에 경찰청장(조경환)의 답변은 정치적이다. “자네가 성과를 낸다면 그건 우리 경찰의 승리고 자네가 실패를 한다면 그건 여성의 실패가 될 테지.” 그리고 이어지는 차경위의 요청. “팀원들 바꿔주세요.” 하지만 완고한 경찰청장의 발언. “그 사람들을 데리고 임무를 완수해!” 이 짤막한 대사들 속에는 이 드라마가 앞으로 보여줄 이야기의 전조들이 모두 숨겨져 있다.

그것은 경찰사회라는 완고한 남성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그것도 마이너리티로 치부되는 인물들을 데리고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여성 강력반 팀장의 이야기다. 드라마는 연달아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과 그것을 풀어가는 퍼즐 같은 재미를 줄 것이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 기대감이 커지는 것은 바로 캐릭터다. 마치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진한 사연 한 가지씩 가졌을만한 인물들. 그래서 경찰 외부에 따로 지어진 히트 사무실에서 지내는 것이 특권이라기보다는 소외로 느껴지는 인물들. 게다가 총칼이 난무하는 살벌한 현실 속에서 심지어는 유사가족의 형태를 띄게 될 팀의 캐릭터들이니 기대감이 커질 밖에.

차수경, 그녀 속에 남자 있다
무엇이 가녀린 그녀를 연쇄살인범에 집착하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그녀의 애인이었던 한상민(정호빈)이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그 후 죽은 한상민은 한 여자이기만 했던 차수경 속으로 들어와 자리한다. 한상민과 접신한 그녀는 그래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한상민과 차수경이 만나는 지점, 즉 오로지 연쇄살인범을 쫓는 상황에서야 이 분열된 자아는 비로소 하나가 된다.

여성으로서의 형사는 이 드라마에서처럼 ‘대외홍보용’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란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남성을 내세운 여타의 형사물들과 차별점을 이루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현장에서 강인하고 털털해 보이는 그녀가 집으로 돌아온 시간에서야 제대로 차별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여성으로서의 차수경이 보이는 것. 그러나 그 시간에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픈 기억뿐이다. 한 남자의 여자로서 사랑 받으며 살고 싶었던 기억. 하지만 부서진 기억.

김재윤, 그녀가 자꾸 눈에 밟힌다
그 기억 속으로 들어오는 남자, 김재윤(하정우)이다. 우연히 가게된 그녀의 집에서 그가 발견하는 것은 곰 인형과 하이힐로 대변되는 그녀의 본모습(여성성)이다.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고 복잡하게 사는 걸 싫어하는 김재윤에게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은 호기심 이상의 그 무엇으로 다가간다. 안전한 삶을 희구하던 김재윤에게 부서질 것 같은 차수경의 모습은 자꾸만 변화를 요구한다. 그녀 밖의 남자였던 김재윤은 차수경 속에 있는 남자(한상민)를 밀어내고픈 욕구를 갖게될 것이 분명하다.

남 일 상관하기 싫어하는 귀차니스트 김재윤이 검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민초들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할 그가 그럭저럭 버티다 나중에는 편안하게 변호사나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다는 건 이 드라마에서 김재윤과 차수경의 갈등과 사랑이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를 예감하게 한다. 차츰 차수경의 안간힘에 눈이 밟히는 김재윤은 지금까지 ‘남 일’이었던 사건들이 차츰 ‘내 일’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용하-김일주, 전형적 형사물의 구도
형사물을 보면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형사. 베테랑에 경험도 많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무 것도 갖지 못한 폐인에 가까운 형사가 장용하(최일화)다. 승진보다는 범인 잡는 데 삶을 바친 이 같은 전형적 형사 캐릭터의 존재이유는 형사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잠복수사같은 현장중심의 수사방식에서 과학수사로 넘어오면서 차츰 공룡이 되어버린 존재들이다. 하지만 어디 수사가 과학만으로 되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실전 경험이다.

그런 그에게 도전하는 인물. 과학수사를 내세우는 원칙주의자 김일주(정동진)다. 장용하가 임의동행을 하려는 것을 피의자가 거부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막는 김일주는 과거식의 수사방식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대표격인 장용하와 부딪칠 수밖에. 실력으로만 인정받고픈 그에게 무능함의 대명사로 보이는 장용하는 그가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점은 역시 경험과 열정. 그러니 이 둘의 만남은 묘한 균형감각을 갖게 된다. 이것이 현실적인 판단이 부족한 장용하와 경험이 부족한 김일주가 파트너가 된 이유다.

남성식-심종금, 투캅스의 부활
영화 ‘투캅스’의 재미는 서로 다른 캐릭터의 부조화에 있다. 닳고닳은 타락한 고참형사와 세상물정 모르고 정의만 부르짖는 신참형사의 만남. 그러나 차츰 닮아가고 나중에는 심지어 청출어람(?)을 보이는 신참의 모습에 오히려 고참이 훈계(?)하는 형국으로의 전환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드라마 ‘히트’의 남성식(마동석)과 심종금(김정태)은 바로 그런 인물들이다.

생각은 좀 모자란 듯 하지만 완력과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남성식은 이름에서도 느껴지지만 여성 강력팀장인 차수경의 빈 구석을 꽉 채워주는 인물이다. 그녀의 완벽한 수족이 될 그는 그러나 여성적인 내면(?)까지도 갖추고 있다. 머리가 나쁘다는 콤플렉스와 외모가 조폭인 그의 섬세한 면모들은 한편으로 그럴듯한 외모에 머리만 굴리며 살아가는 세태를 꼬집는 묘미가 있다. 그와의 대척점에서 심종금의 면모가 교활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투캅스’에서 안성기가 타락한 형사가 된 것은 사실 사회의 부조리함을 뒤집어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심종금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밝혀질 즈음, 보여질 그의 진면목에서 우리는 동정심과 애정을 예감하게 된다.

전문직, 멜로, 가족드라마의 경계에 서다
이 밖에도 이 드라마에는 전직형사이자 선술집 주인인 김영두(김정민), 수사본부의 부지휘자로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서 그 넉넉한 허리가 되어주는 조규원(손현주), 과학수사의 진면목을 보여줄 정인희(윤지민)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꿈틀거린다. 이들 캐릭터들은 처음에는 외인부대처럼 버려지거나 외면될 위기에 처한 상태로 서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보여주려는 것은 그들이 살인사건을 해결해가며 팀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여러모로 미국 드라마 ‘CSI’를 연상케 하는 전문직 드라마지만 ‘히트’의 전개양상은 이러한 캐릭터 설정으로 인해 저네들의 드라마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 분명하다. 스타일은 따왔으되 하려는 이야기는 저네들의 쿨한 관계보다는 좀더 끈끈한 팀 간의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정두홍이라는 걸출한 무술감독으로 인해 깨지고 부서지는 우리 식의 액션이 선보여지고 있는 것처럼, ‘히트’가 서는 지점은 형사물로 대변되는 전문직드라마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그리고 팀으로 대변되는 가족드라마의 경계에 서게 되지 않을까. 따라서 이 드라마의 성패는 바로 그 적절한 배합과 균형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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