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별이 된 김영애, 마지막까지 보여준 연기투혼

“묵은 빚은 돈으로 갚는 거 아이다. 눈으로 발로 갚는 기다.” 아마도 영화 <변호인>을 봤던 분들이라면 고 김영애가 연기한 국밥집 아줌마의 이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국밥 한 그릇 먹을 돈이 없어 도망쳤던 송 변호사(송강호)가 성공해 돌아와 그 때의 빚을 갚겠다며 돈을 내밀자 아줌마가 했던 그 대사. 

사진출처:영화<변호인>

이제 그렇게 찰진 대사를 더 이상은 들을 수 없게 됐다. 김영애는 지난 9일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고인이 된 그녀의 소식이 특히 놀랍게 다가왔던 건, 최근까지도 우리의 기억 속에 선연히 남은 작품들 때문이다. 유작이 된 KBS <월계수 양복점>에서 우리는 전혀 그녀가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뒤늦게 알려진 것이지만 끝까지 진통제 투혼을 보이며 펼친 연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김영애가 얼마나 치열한 배우였는가를 각인시켰다. 

김영애만큼 극과 극의 이미지를 연기한 배우가 있을까. <로얄패밀리>나 <황진이> 같은 작품에서 그토록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줬지만, <변호인>은 물론이고 <닥터스>나 <판도라>, <카트> 같은 작품에서는 서민들의 정이 느껴지는 따뜻한 연기를 보여줬다. 이제는 고인이 되었다는 소회 때문일까. 그래도 특히 기억이 남는 건 한 그릇의 국밥 같은 따뜻함이 묻어나는 서민적인 모습이다. 

<변호인>이나 <닥터스> 그리고 <판도라> 같은 작품을 보면 김영애라는 배우가 그 작품 전체에 어떤 정서를 만들어냈는지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물론 주인공의 역할은 아니지만 작품의 어떤 색깔을 부여하는 역할. 이를 테면 대사 한 마디로도 느껴지는 <변호인>에서 국밥집 아줌마의 그 따뜻함이 주는 서민적 정서는 속물이었던 송 변호사가 인권변호사가 되는 계기가 된다. 

<닥터스>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유혜정(박신혜)이 엇나가지 않고 잘 자라 당당한 의사가 되는 그 배경에는 역시 강말순 할머니(김영애)라는 존재가 자리했다. “밥 먹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해? 숨 달려 있으면 먹으면 되는 거지.” 거기서도 이 할머니는 유혜정에게 따뜻한 밥을 차려준다. <판도라>에서 사지로 아들을 보내며 오열하는 모습이나, <카트>에서 차츰 노동자들과 연대해가는 모습 역시 서민으로서의 아픔과 따뜻함 같은 걸로 기억된다. 

즉 원로배우로서 작품의 뒤편에 늘 서 있었지만 그 존재가 만들어내는 온기나 때로는 차가움마저 작품 전체의 중요한 정서를 담는 역할을 해줬다는 점이다. 이 점은 아마도 같이 작업을 해온 배우들로서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고인이 되었다는 소식에 함께 작업했던 제작진들이나 배우들이 진심어린 애도의 뜻을 표하는 건 그래서다. 

김영애가 췌장암을 발견한 건 이미 2012년 <해를 품은 달>을 촬영하던 도중이었다고 한다. 힘겨운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책임을 다한 후에야 비로소 9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유작이 된 <월계수 양복점>을 촬영하면서도 고인은 아픈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고 대사 하나하나를 잊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작품 속에서 그 작품의 정서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고인은 아마도 배우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는 모습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 모습은 대중들에게 어떤 열정과 따뜻함으로 기억될 것이다. <변호인>에서 보여줬던 영원히 식지 않을 국밥집의 온기처럼.


대중을 잡아끄는 하지원만의 특별함

'더킹투하츠'(사진출처:MBC)

역시 하지원이다. 단지 연기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서는 무언가 대중들을 잡아끄는 특별함이 있다. 아마도 치열하게 벌어진 방송3사의 수목극 대전에서 '더킹 투하츠'가 기선제압을 할 수 있었던 힘은 다름 아닌 바로 이 하지원만이 가진 특별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모'에서부터 '발리에서 생긴 일', '황진이', '시크릿 가든'에 이르기까지 드라마에서의 성공 보증수표가 된 하지원만의 그 특별함, 그것은 도대체 무얼까.

그 첫 번째는 우리가 여배우하면 흔히 떠올리는 그런 이미지를 가차 없이 깨고 들어오는 하지원의 특별한 연기투혼에 있다. 물론 최근 들어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투혼을 발휘하는 여배우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주인공이라면 전형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말로만 씩씩한 캔디형 신데렐라다. 하지원 역시 '시크릿 가든' 같은 작품에서 캔디형 신데렐라 캐릭터인 길라임을 연기했지만, 그녀가 달랐던 점은 대사만이 아닌 행동으로 그것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 몸으로 보여주는(?) 진정성은 '다모'에서부터 '황진이', '시크릿 가든'까지 계속 이어지는 하지원만의 차별점을 만들어냈다. '시크릿 가든'에서 스턴트우먼으로서의 멋진 액션 연기를 통해 그녀만의 매력을 드러냈던 것처럼, '더킹 투하츠'에서도 북한특수부대 여자1호 교관 김항아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그녀는 강렬한 액션으로 시선을 끌어 모았다. 바로 이 여배우로서 몇 안 되는 액션 연기가 자연스럽다는 점은 하지원만의 온몸을 던지는 연기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은 그녀의 연기에 진정성을 더해준다.

액션 연기가 더해진 하지원이라는 존재는 그래서 단지 예쁜 여배우가 아니라 멋있는 여배우로 자리매김한다. 이 점은 하지원이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 팬층까지 폭넓게 확보할 수 있는 유리한 지점이 된다. 하지원만의 두 번째 특별함, 즉 중성적인 매력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더킹 투하츠'에서 데이트를 나간 하지원이 남자와 키스를 하려다 못하게 되는 장면은 그녀의 이 중성적 매력을 잘 드러낸다. 다가오는 남자를 기다리는 하지원의 얼굴은 소녀 같은 설렘을 던져주지만, 한 순간 무의식적으로 남자의 턱을 잡아채는 그녀의 동작에서는 소년 같은 털털함이 묻어난다. 이 여배우가 뿜어내는 중성적 매력은 여성 시청자들이 주도권을 쥐게 마련인 드라마 시청에 있어서 중요한 유인 포인트가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때론 이 과격하게까지 느껴지는 털털함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한없이 여성스럽게 변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외강내유형 캐릭터는 하지원의 멜로 연기가 특별해지는 세 번째 이유가 된다. 겉이 단단할수록 속의 부드러움이 더 빛나는 법.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입을 앙다물고 투혼을 드러내던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말 한 마디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때 그 감정이 전하는 강도는 더 커지기 마련이다.

바로 이 하지원의 멜로가 갖는 힘은 그녀와 연기한 남자 연기자들이 모두 주목받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흐름은 '다모'의 이서진, '발리에서 생긴 일'의 조인성, '시크릿 가든'의 현빈에 이어서 '더킹 투하츠'의 이승기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승기와 그가 연기하는 이재하라는 인물과의 궁합도 잘 맞는데다가, 하지원의 리드가 돋보이기 때문이다.

온 몸을 던지는 연기투혼, 남녀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중성적인 매력, 게다가 상대 배우마저 빛나게 해주는 연기의 조합. 이것이 하지원이라는 배우만이 가진 특별함이다. 여기에 이미 '다모'를 통해 호흡을 맞췄던 이재규 감독과 '베토벤 바이러스'를 쓴 홍진아 작가의 탄탄한 대본까지 가세했으니 그녀의 캐릭터가 빛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더킹 투하츠'가 기대되는 건 어쩌면 이 하지원이라는 특별한 배우가 거기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가 절을 한다. 방귀 깨나 뀐다는 부잣집 양반님네들 앞에서도, 세 치 혀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를 가진 사또 앞에서도, 글 깨나 읽었다며 위선 떠는 선비 앞에서도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던 그녀가 절을 한다. 그녀가 절을 하는 곳은 하녀들이 매일 닦아 반짝반짝 빛나는 마룻바닥이 아니다. 신음과 고열에 젖은 피비린내와 땀 냄새 심지어는 똥 냄새, 오줌 냄새 그것이 뭉뚱그려진 죽음의 냄새가 배어나는 옥사의 맨바닥이다. 그녀가 절을 하는 대상은 가장 천하디 천한 ‘놈이(유지태)’란 남정네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놈이는 저잣거리 왈자패, 색주가의 기둥서방, 그리고 화적 두목으로 살아가는 그 시대, 이 놈도 되고 저 놈도 되는 대부분의 천민들이 그러했던 양반네 눈에는 그저 잡놈인 비천한 사내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가슴속에 “사람 사는 곳 어딘들 못 가겠냐”는 호기 하나를 품고 살아간다.

그 놈은 양반집 아기씨로 자라온 황진이(송혜교)의 태생을 밀고해 하루아침에 그녀를 천한 기생으로 만들어버린 놈이다. 빗나간 사랑으로 비롯된 그 일로 인해 그녀는 한없이 낮아지게 된다. 반면 그 놈은 낮아지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몸둘 바를 몰라하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가장 낮은 사람들을 돕는데 남은 인생을 건다. 높은 데서는 몰랐던 낮은 자들의 처지를 알게된 황진이의 마음 속으로 점점 놈이가 들어온다.

낮은 사람들을 돕는 화적패 두목 놈이와 천한 기생으로 살아가는 황진이는 지체 높은 양반네들에겐 가슴속에 칼 하나씩을 품고, 낮은 자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삶에 매진한다. 그래서 양반들조차 건드리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그런 그들이 무릎을 꿇는다. 누굴 위해서? 이름마저 비천한 괴똥이(오태경)를 위해서다. 황진이는 그를 볼모로 잡고 있는 사또에게 몸을 허락하고, 놈이는 기꺼이 자신의 목을 허락한다. 그런 그들이 옥사에서 마주 보며 눈물을 흘린다. 황진이는 처음이자 마지막 잔을 건네고, 가장 비천한 놈이란 놈에게 절을 한다.

장윤현 감독의 ‘황진이’는 이처럼 신분의 정점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황진이를 그려낸다. 그리고 결국엔 저 서화담(김응수)이 화두처럼 던졌듯이 신분도 귀천도 없는 자연의 일부로 끝을 맺는다. 황진이란 인물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먼저 했던, 드라마 ‘황진이’와는 정반대의 길이다. 드라마에서는 낮은 신분의 황진이가 점차 예인의 정점으로 올라가는 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진이라는 인물에 있어서도 드라마 속의 양반들을 농락하는 카리스마보다는 삶을 탐구하는 듯한 진중함이 묻어난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의 메인 카피, ‘16세기에 살았던 21세기의 여인’이란 문구는 영화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드라마 속의 황진이라면 모를까,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황진이는 20세기적 가치였으나 지금은 찾아볼 길 없는 혁명가의 모습이다. 21세기 여인은 희생보다는 행복을 꿈꾸는 좀더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 묘한 부조화는 그래서 21세기 여인들이 보기에는 좀 낯선 것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진이의 한없이 낮아지는 혁명가의 모습에 관객들이 눈물을 훔치는 것은 아직도 그 때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기 때문일까. 놈이 같은 비천한 놈을 향해 절을 올리는 황진이의 모습이 좀체 잊혀지지 않는 것은. 황진이가 내뱉는 수많은 대사들이 이제는 오래된 향수처럼 느껴지는 문학으로 읽히는 것은.

하얀거탑’, 드라마 진화 완성시킬까

‘하얀거탑’에 대한 칭찬일색은 그 동안 우리 드라마들이 얼마나 부족했던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구태의연한 뻔한 스토리를 가진‘트렌디 드라마’, 짜여진 스토리와 영상으로 승부하지 않고 편법에만 기대는 ‘시청률 성공, 드라마 실패인 사극’, 어떤 외피를 입어도 늘 멜로에만 집착하는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가 그 대표 삼인방이다. 물론 아예 시청률을 의식해 욕먹기로 작정한 ‘논란 드라마’는 얘기할 가치도 없다. 이런 드라마들에 식상한 시청자들은 비로소 ‘하얀거탑’이라는 제대로 된(well made) 드라마를 보면서 탄성을 질렀다. 오죽 제대로 된 드라마가 없었으면 ‘웰 메이드 드라마’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하지만 ‘하얀거탑’이란 웰 메이드 드라마는 그냥 우연히 탄생한 것이 아니다. 사실 시청률이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식상한 드라마를 넘어서 그 징후를 보였던 드라마들이 있었다.

‘연애시대’, 트렌디 드라마와 이혼하다
‘연애시대’가 기존 트렌디 드라마의 공식을 깰 수 있었던 것은 그걸 만든 이들이 영화인들이었다는 데 있다. 사전제작을 시도한 첫 번째 드라마였지만 100% 사전 제작이 어려웠던 이 드라마는 영화와는 다른 호흡으로 영화인들을 당혹스럽게 했지만 그들은 노련했다. ‘이혼 후에 시작된 연애’라는 도발적 소재에도 불구하고 진지함을 잃지 않았으며, 탄탄한 캐릭터를 가진 주연이 드라마를 끌고 가는 힘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매몰되지 않았다. ‘연애시대’만큼 출연한 거의 대부분의 조연들이 드라마 말미까지 사랑스러운 드라마는 많지 않다. 스토리면 스토리, 연출력이면 연출력, 영상이면 영상, 연기면 연기까지 도무지 딸리는 것이 없는 이 드라마를 두고 우리는 드디어 ‘웰 메이드 드라마’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이 호칭이 과장이 아닌 것은 기존 트렌디 드라마들이 해왔던 관행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재벌가 남자와 신데렐라형 여자 캐릭터가 만나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는 기존 트렌디 드라마에서 도발적 소재는 있을지 몰라도 진지함은 찾기 어려웠고, 조연은 물론이고 주연조차 식상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며, 공식으로 만들어지는 스토리와 연출 속에서 영상미는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니 ‘연애시대’는 식상한 기존 드라마들과 이혼한 시청자들이, 그 후에 새롭게 연애를 시작하게 만든 드라마로 기억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웰 메이드 드라마’에 대한 가능성을 알게 된 드라마 폐인들이 제대로 된 드라마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황진이’, 사극을 갖고 한바탕 놀다
‘황진이’에 ‘웰 메이드 드라마’라는 호칭을 부여하게 만드는 것은 그만큼 기존 사극이 기본을 지키고 있지 않았던 탓이 크다. 퓨전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출현은 사극과 역사 사이의 간극을 더 넓혀놓았다. 그 사이를 차지하고 들어간 것은 상상력. 정통사극이다 퓨전사극이다 하며 서로들 주장을 해대지만 사실 고구려 사극들은 모두 정통사극으로 보기가 어렵다. 다만 그 정도의 차이가 존재할 뿐. 역사에 그래도 조금 가까운 것이 ‘대조영’이며 그 다음이 ‘연개소문’, 그리고 역사에 가장 멀어 오히려 환타지나 무협에 가까운 것이 ‘주몽’이다. 이들 사극들이 치열한 경쟁에 들어가면서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억지 설정이 남발되었고, 사극의 기본이랄 수 있는 전투 장면의 부실이 도마 위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20%에서 45%에 이르는 높은 시청률을 이들 사극들은 갖게 되었지만 완성도는 현저히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 칼바람이 쌩쌩 부는 시기에 가녀린 한복을 입고 나타난 ‘황진이’는 칼 대신 거문고를 메고, 전장 대신 연무장에 올라 그 화려한 몸짓을 선보였다. 사극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미(자연, 의복, 고건물)를 느끼게 된 것은 여타의 사극과 달리 ‘황진이’가 거둔 최고의 성과가 아닐까. 미학이라고 해봐야 고작 중국식 무협동작의 아름다움 정도였던 우리네 사극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이다. 상대적으로 짧은 횟수로 인해 역시 많은 아쉬움이 있는 사극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충분한 캐릭터와 그것을 소화해낸 아낌없는 연기, 그리고 이야기성에 연출력까지 돋보인 사극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이 저 고구려사극들과 한바탕 걸판진 승부를 벌인 ‘황진이’에 ‘웰 메이드 사극’이란 호칭을 붙이는 이유다.

‘하얀거탑’, ‘무늬만 전문직’ 도려낼까
작년부터 슬슬 불기 시작한 것이 제대로 된 ‘전문직 드라마’에 대한 요구. 외국의 시즌제 드라마들에 익숙한 시청자들이 많아지고 우리네 멜로 드라마들이 식상해지면서 생겨난 수요이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전문직 드라마’는 포장만 그럴 듯했을 뿐, 막상 뜯어보면 멜로 드라마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형사나 의사, 변호사가 등장해도 그들의 직업적인 특성이 드라마의 갈등 요인을 작용하는 것이 아닌, 여전히 트렌디 드라마의 삼각, 사각관계만이 드라마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 결국에는 다 그럴 것이라는 예상을 깬 것이 ‘하얀거탑’이다.

이 드라마 속 캐릭터들은 일단 대부분이 기혼자들이다. 그러니 삼각 구도 같은 건 애초에 기대하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손에 땀을 쥐고 보게 만드는 요인은 따로 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의사라는 집단이 가진 막강한 권력과 그 이면을 움직이는 욕망들이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권력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고 그 대결구도 속에서 신분상승 욕구를 기도하는 보편적인 인간 욕망의 정서를 의사라는 캐릭터 속에 제대로 녹여놓은 것이 그 성공 요인이다. 요컨대 의사는 사람을 살려야 하는 가장 인간적인 직업이면서도 동시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 이 드라마 캐릭터들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이다. 김명민을 비롯한 이정길, 김창완의 야누스를 방불케 하는 연기와 수술대를 중심으로 긴박한 상황을 잡아내는 연출력이 잘 맞물려, 멜로 없이도 성공 가능한 ‘웰 메이드 전문직 드라마’를 예고하고 있다.

드라마들은 꾸준히 진화하고 있다. 그 진화에는 반드시 선결되어야 하는 것이 실험이다. 트렌디 드라마와 사극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난 마당에, 이제 남은 전문직 드라마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우리네 드라마 지평은 더 넓어질 것이 틀림없다. 관건은‘리얼리티’다. 얼마나 달라진 시청자들의 감성을 따라잡고, 얼마나 치열하게 드라마의 정밀도를 높여 실감나게 만드느냐가 그 성공의 척도가 될 것이다. 트렌디 드라마는 좀더 트렌드를 정확히 읽어야 하고, 사극은 사료에 충실해야 하며, 전문직 드라마는 그 전문분야에 정통해야 할 것이다. ‘하얀거탑’을 끝으로 진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모든 드라마들이 '제대로 만들어지는' 그 날, 더 이상 ‘웰 메이드 드라마’란 호칭은 불필요해질 것이다. 이것이 ‘하얀거탑’의 성공을 기대하게 하는 이유다.

역사 속에서 찾아낸 현대적인 여성상, 황진이라는 시의적절한 소재, 칼 없이도 빛나는 카리스마, 가장 한국적인 풍경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영상미, 무엇보다도 시청자들의 시선을 잔뜩 잡아끌었던 치열한 대결구도와 멜로라인. ‘황진이’, 종방에 즈음해 떠오르는 문구들이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과했던 탓일까. 아쉬움 또한 많이 남는 것이 사실. 마지막 주 방영된 2회분에 이르러 무언가 허전함이 남는 건 왜일까.

사랑의 길vs인간의 길 - 멜로vs성장
24부작.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황진이’의 애초 기획의도를 보면 최종적인 목표로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사랑할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싸웠고, 고통받았으며, 잠시 사랑을 얻어 지리한 장마 끝에 보이는 푸른 하늘을 보듯 삶의 희열을 맛보았을 황진이. 오늘 그녀의 삶과 만나 ‘사랑의 길’ 나아가 진정한 ‘인간의 길’을 보고자 한다. ”

여기서 ‘사랑의 길’이란 다름 아닌 드라마 내내 지속된 멜로라인이다. 은호도령, 김정한, 벽계수 그리고 호위무사 이생까지 이 드라마의 골격을 이룬 것은 이들의 밀고당기는 사랑에 있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기녀 황진이가 예인 황진이를 거쳐 인간 황진이가 되는 성장드라마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황진이’라는 소재가 매력적인 것은 이 멜로드라마와 성장드라마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에 있다. 기녀로서의 멜로가 예인의 예술로 승화되고 그러면서 황진이를 성장시킨다는 그 구조가 매력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드라마 속 황진이에서 인간 황진이를 발견한 것은 후반부 몇 회분에 있어서였다. 그것은 마지막 2회분에서 드디어 서화담을 만나며 잠깐 언급되었을 뿐이다. 사실 황진이가 걸어갈 ‘인간의 길’은 마지막회에서 그녀가 서화담 앞에 앉아 나레이션으로 읊조리듯이,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황진이’의 아쉬움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멜로에 너무 많은 힘을 배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전쟁사극보다 더 많은 사상자들(?)
드라마 ‘황진이’의 정서는 눈물이다. 그녀의 삶 자체가 기구한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은호도령의 죽음부터 비롯된 눈물바다는 동기 기녀인 섬섬이의 죽음으로 이어졌고, 황진이의 스승인 백무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혼절지경에 달했다. 게다가 김정한은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려서야 살아났고, 마지막회에서는 황진이의 어

머니인 현금의 죽음으로 눈물을 이어갔다. 중요한 인물들의 죽음으로 치면 전쟁사극보다 더 많은 인물들이 죽은 셈이다. 그 죽음은 모두 황진이의 눈물로 이어졌다. 그녀는 꽤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 셈.

그러나 그렇다고 시청자들이 보고 싶은 게 눈물만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사실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해도, 겉으로는 예술의 힘으로 그걸 깨치고 일어난 한 예인, 큰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황진이’는 분명 ‘웰 메이드 사극’의 가능성을 가졌지만, 너무 멜로드라마의 눈물쪽으로 흐르면서 그 힘이 약화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황진이’에 힘을 부여한 것은 눈물보다는 경연장에서 보여준 그녀의 카리스마가 아니었을까.

너무 울어서 더 이상 울 수만은 없다
끝나기 마지막 몇 개의 시퀀스들은 이 드라마가 보여준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 드러내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현금의 죽음은 사실 드라마 진행에 있어서 그닥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다만 경연장의 팽팽한 대결이 무난하게 해결되면서 자칫 벌어질 수 있는 허전한 결말(박수치며 끝나는)을 막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현금의 죽음은 예인으로서의 성공으로 끝나버릴 ‘황진이’가 다시 슬픔에 젖어 서경덕을 찾게 하려 의도했다는 혐의가 짙다. 그리고 황진이는 ‘울기 위해’ 찾아간 서경덕 앞에서 ‘울 수만은 없다’는 그 마지막 대사를 읊게된다.

‘황진이’ 스스로도 이 드라마의 정조를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울지 않는 황진이’의 모습이 아쉽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저자거리에서 활짝 웃으며 서민들과 춤을 추는 황진이의 모습이다. 마지막 한 장면에서야 겨우 기녀에서 예인을 거쳐 성장한 인간 황진이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 현금의 죽음이 울던 그녀를 웃게 한 사건이 되었을까. 그건 분명 아니다. 사실은 어머니의 죽음과 저자거리의 ‘황진이’ 사이에는 엄청난 축약이 들어있다. 멜로에 들어갔던 많은 시퀀스들을 줄였다면 그 축약 속에서 비로소 저 물을 먹고 활짝 피어나는 찻잔 속의 꽃처럼, 웃는 인간 황진이를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멜로 때문에 축약되어버린 많은 이야기들의 가능성들이 못내 아쉬운 것은 그만큼 이드라마가 많은 기대를 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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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24부작이 짧다

네모난 세상/명랑TV 2006.12.21 12:14 Posted by 더키앙

웰 메이드 사극, ‘황진이’

KBS 수목드라마 ‘황진이’가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총 24부작에 이제 3부만을 남겨놓은 ‘황진이’. 그런데 왠지 그 24부작이 짧게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물론 그렇다고 조금 시청률이 된다는 드라마들이 으레 해버리는 연장방영이 아쉽다는 말은 아니다. 24부작이 짧다는 것은 저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 올해의 좋은 드라마로 뽑았던 ‘연애시대’에서 보았던 ‘웰 메이드 드라마’의 징후를 ‘황진이’에서 보기 때문이다.

사극의 핵심은 아무래도 그 대결구도에 있다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신화와 설화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영웅이 되는 주인공이 있고 그 주인공이 걸어갈 길에 고난이 자리잡는데, 그것을 드라마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쟁자가 있어 대결구도를 이루기 때문이다. ‘황진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처음 황진이는 주변에 적이 산재해 있다 할 정도로 많았다. 매향(김보연 분)과 부용(왕빛나 분)은 물론이고, 벽계수(류태준 분), 심지어는 스승인 백무(김영애 분)까지 적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황진이’의 후반부에 이르러 이 대결구도가 지향하는 바가 그들 개인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백무의 죽음을 통해 황진이는 스승과 화해하고, 또한 그 죽음은 매향의 마음을 열게 만든다. 김정한(김재원 분)의 죽음을 막아보려는 황진이의 노력 속에서 이제는 부용과 벽계수까지 조금씩 얼었던 마음이 녹게된다. 대부분의 사극들이 권선징악의 구도로 적의 패배를 그 끝으로 여기지만, ‘황진이’의 끝은 이렇듯 굴복이 아닌 화해이다. 황진이가 이러한 인물들의 화해를 통해 결국 싸우려는 것은 조선시대 예인, 기녀에 대한 편견과 핍박이다. 그것은 마음의 전쟁을 통해 벌어진다는 점에서, 황진이라는 마음 수도자에게는 해볼만한 대결이 되었다.

드라마의 본질이, 이 마음들이 부딪쳐 일어나는 갈등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황진이’에서 보여주는 마음싸움은 볼만해진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황진이가 벽계수를 찾아가 김정한을 살리는 것이 진정한 복수가 된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황진이는 저 밖에서 벽계수를 격동시키고, 부용의 애틋한 마음을 빌어 김정한에게 자신의 처소를 알려주었다. 이것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는 권력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싸움의 문제다. 마음 줄이 가는 길을 유도하여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너무 단순하게 접근하면 유치한 드라마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황진이’의 드라마가 남다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황진이’가 ‘웰 메이드 사극’으로 불릴만한 것은 비로소 사극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그저 과거의 의복과 배경, 이야기를 담으면 사극이라 했던 것에서, ‘황진이’는 미려한 미장센으로 포착된 전통의 미와, 우리네 자연적 배경의 아름다움(백무가 마지막 학춤을 추던 벼랑끝 같은)에, 울긋불긋 피어난 꽃처럼 도드라진 인물들을 집어넣음으로서 사극에서 우리 식의 미를 찾아내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여전히 ‘황진이’에 남는 아쉬움이 있다. 그것은 이 잘 만들어진 드라마가 이제 막 시작을 하려는 지점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황진이가 탄생되는 과정이지 황진이의 본격적인 행보라 하기엔 어딘지 아쉬운 구석이 있다. 춤과 시, 그리고 음악에 출중했던 예인으로서, 또 인간의 길을 알고자 했던 구도자로서 황진이의 진짜 모습을 잡아내려 했다면 지금부터가 그 본격적인 시작이 되었어야 했다.

아마도 보다 드라마틱하게 ‘황진이’의 모습을 그리려다 보니 초기의 성장에 너무 힘이 집중되었던 것은 아닐까. 황진이의 인간적 조명보다 사랑에 더 무게중심을 두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24부작은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을 것이다. 자꾸 시즌2를 기대하게 되는 것은 황진이의 사랑 이야기에 덧댄 인간적 모습이 그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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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눈물이 많은 두 카리스마

사극전성시대. 금요일을 빼곤 일주일 내내 사극이 TV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그 중 ‘사극은 역시 KBS’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목받고 있는 사극이 ‘황진이’와 ‘대조영’. 이 두 사극은 특히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어 흥미를 끈다. 주인공들은 무엇 때문인지 독기 어린 카리스마를 보이다가도 눈물을 펑펑 흘리는데 그것이 시청자들의 맘을 짠하게 만든다. 여자의 눈물과 남자의 눈물, 그 진가를 보여준 황진이와 대조영,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카리스마의 눈물은 더 짠하다
백무로 인해 정인을 잃은 황진이는 신분의 높은 벽과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속에서 시대와 맞선다. 그녀의 카리스마는 우리가 도저히 넘을 수 없다 여겼던 백무를 능가할 정도로 강력하다. 그런데 앙다문 입과 빛이 나갈 정도로 노려보는 눈빛, 입만 열면 가시가 뻗어나가는 독설을 보이던 그녀. 그러나 예판 김정한 앞에서 잠시 또르르 떨어뜨리는 눈물 한 방울은 시청자들의 애간장을 녹여버린다. 그토록 몰아세우던 백무의 죽음 앞에 넋 나간 황진이의 눈물은 말할 것도 없다.

대조영 역시 마찬가지. 그는 유난히도 눈물이 많은 영웅이다. 같은 고구려 사극이지만 저 ‘주몽’과 ‘연개소문’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을 보지는 못했다 자식처럼 키웠으나 종으로 대하던 연개소문 앞에서 울었고, 생사의 기로에서 만난 어머니 앞에서 울었으며, 뒤늦게 만나게된 아버지 앞에서 울었고, 죽기 직전 아버지라 불러보라던 연개소문 앞에서 또 울었다. 그러나 대조영은 그렇게 유약한 인물이 아니다. 심지어 시청자들로부터 슈퍼맨이라 비판받을 정도로 모든 일을 해결하는 카리스마의 절정. 그의 눈물은 보통 인물의 눈물보다 더 짠할 수밖에 없다.

눈물의 원천은 태생적 한계
황진이의 눈물은 기녀라는 운명적 삶에서 비롯된다. 예인으로서 당대의 여느 여성들보다 몇 배의 자유로움을 구가하지만, 또한 어느 누구의 마음도 받을 수 없는 기녀라는 삶이 주는 기막힘은 황진이라는 한 인물이 왜 이다지도 매력이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물이면서, 그 위에서 모든 걸 해나가는 삶을 보여준다. 속으로는 멍투성이, 상처투성이지만 겉으로는 세상과 맞서는 그녀에게 어찌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돌아와 가끔씩 피곤한 듯 눈물을 흘리는 그녀 앞에서는 아무리 굳은 갑옷을 마음에 걸친 자도 무장해제되게 마련이다.

대조영 역시 그 눈물의 원천은 태생의 문제이다. 제왕지운이라는 역모의 주홍글씨를 갖고 태어난 그는 개동이라 불리며 연개소문의 하인으로 자라난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천하를 태우고도 남을 야망이 숨겨져 있으니, 이렇게 추락한 인물이 하나하나 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눈물겨운 화해의 과정이 된다. 게다가 대조영의 눈물 속에는 가장 원초적인 부모자식간의 정이 숨겨져 있다. 특히 대중상과 카리스마의 눈빛을 나누며 스테레오로 울어버리는 장면에서는 남자의 눈물, 그 힘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재미있는 건, 이 사극들 속에서 이것은 비단 황진이와 대조영만의 눈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드라마 ‘황진이’는, 황진이를 비롯하여 백무, 매향, 기방사람들 모두가 여자의 눈물을 보여주고, 드라마 ‘대조영’ 역시 대조영을 비롯해 연개소문, 양만춘, 대중상 같은 걸출한 장수들이 남자의 눈물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여자의 눈물이든, 남자의 눈물이든 카리스마 넘치는 그들의 눈물 바다는 지금 사극폐인들의 눈을 즐겁게 적시고 있다.

퓨전사극 속 사제간의 인생은 반복된다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퓨전사극, ‘황진이’와 ‘주몽’에서는 사제간의 반복되는 인생유전이 독특한 재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주인공에게 카리스마를 부여하고, 극의 대결구도를 만들어주며, 주인공이 성취해야할 일에 대한 목적의식을 부여하기도 한다.

황진이-백무 vs 부용-매향 :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
부용(왕빛나 분)은 황진이에 대해 칭찬을 하는 스승 매향(김보연 분)이 밉기만 하다. 그런 부용에게 매향은 말한다. “그렇게 명월이가 이기고 싶으냐? 내가 그 맘을 잘 안다. 천재는 늘 노력하는 준재를 가슴아프게 만드는 법이지.”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그것은 ‘황진이는 천재며 부용은 준재’라는 것과 ‘그런 마음을 매향은 잘 안다’는 것. 매향 역시 저 백무에게 같은 감정을 가졌었다는 말이다.

백무-황진이와 매향-부용의 사제관계는 천재와 준재라는 개념으로 반복된다. 이것은 마치 저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를 보는 것만 같다. 매향은 스승이 백무를 총애했다고 생각하면서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에게 가졌던 질투심과 증오심을 키우며 그것은 바로 부용에게도 이어진다. 재미있는 건 황진이가 백무에게 복수하려 매향의 수제자로 들어오면서다.

황진이를 통해 매향은 자신의 질투심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스승은 편애를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춤을 전수해주었던 것을 알게된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자 매향은 부용의 질투심에 동병상련의 측은지심을 가지면서도 또한 그것이 부질없다는 걸 알게된다. 백무가 황진이를 매향에게 선뜻 보낸 것은 황진이에게 춤을 새로 추게 하려던 뜻도 있지만, 매향에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한 뜻도 있었다는 말이다.

황진이-김정한 vs 백무-익환 :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 운명
황진이가 자신에게 가진 증오심을 이용해 춤을 추게 한다는 뜻이 있다 해도 어떻게 자신의 적이라 볼 수 있는 매향에게 백무는 선뜻 애제자를 보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황진이가 백무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백무는 시종일관 자신과 동일한 상황(기녀라는 상황)에서 기예의 길을 가는 황진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황진이와 백무의 인생유전은 또한 황진이-김정한 그리고 백무-익환의 관계 속에서도 반복된다.

장악원의 부제조 영감 익환(현석 분)이 황진이를 시켜, 떠나려는 예판 김정한(김재원 분)을 잡으라고 한 사실을 알게된 백무(김영애 분)는 익환을 나무란다. 그러다 또다시 마음의 병을 앓을까 걱정되는 마음 때문이다. 그러자 익환이 백무에게 말한다. “명월이는 자네를 여러모로 닮았어. 내가 자네보고 기예의 길을 버리고 오라면 자네가 왔겠나?” 이 말에도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황진이 역시 백무처럼 기예의 길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점과 ‘익환 역시 정한처럼 백무를 사모했으나 그녀가 거절했다는 것’이다.

주몽과 해모수 vs 금와 : 동료와 경쟁자의 관계
드라마 ‘주몽’에서도 이러한 사제간의 인생유전이 드러나 보인다. 주몽의 스승은 다름 아닌 아버지 해모수. 해모수가 초기에 부여의 왕자, 금와와 다물군을 함께 이끌다, 후에 부득불의 함정으로 위기에 처하고 감금되는 상황은, 최근 주몽의 행적과 유사하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들여 다물군을 이끈다는 점과, 아버지가 어머니와 떨어져 지낸 것처럼 자신도 예소야와 떨어져 지내는 점, 또한 가까웠던 금와와 적이 되어버리는 상황 등은 정확히 해모수와 주몽 그리고 금와 사이에서 벌어지는 반복이다.

이러한 반복이 되는 이유는 바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 살아있는 금와의 존재 때문이다. 금와는 복합적인 성격의 캐릭터다. 명분상으로는 해모수와 함께 다물군을 이끌고 한나라를 치고 싶지만 부여가 처한 상황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겉으로 해모수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여미을이 말한 대로 오히려 그것을 바라는 경쟁자로서의 마음도 갖고 있다. 해모수가 새로운 나라를 새우는 것은 부여에게 위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 역시 해모수에 대해 저 살리에르와 같은 질투심을 속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스란히 주몽에게도 연결된다. 사실 금와는 주몽을 보호하고 키웠다기보다는 그 잠재성을 부여라는 감옥 안에 가두고 있었던 셈이다. 주몽이 해모수를 따라 대업을 이루려고 나서자 상황이 반복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전설적인 존재의 카리스마를 이어받다
이러한 퓨전 사극에서 사제간의 반복되는 인생유전이 보이는 것은 드라마 상의 주인공에게 강력한 카리스마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이다. 철부지였던 ‘주몽’에게 카리스마를 부여하는 건 그의 아버지가 전설적인 존재인 해모수였다는 점이다. 그의 예사롭지 않은 탄생은 ‘지금은 저렇지만 앞으로는 대단한 일을 할 것’이란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또한 ‘황진이’라는 인물의 카리스마는 전설적인 무보, 학춤을 물려받은 백무가 그녀를 유일한 수제자로 지목하는데서 비롯된다. 황진이는 여기서 더 나아가 백무의 라이벌이었던 매향의 군무까지 이어받으면서 독무와 군무 양쪽의 재능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주인공이 이어받는 건 재능만이 아니다. 그들의 경쟁자까지 똑같은 인생유전을 통해 주인공 앞에 나타난다. 1회전보다 2회전이 더 치열할 수밖에 없는 경쟁의 생리 상, 2회전을 치르는 주인공들의 대결구도는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 치열한 대결구도 속에서 그들은 또한 대업 혹은 운명을 이어받는다. 그렇기에 반복되면서도 그 반복 속에서 스승을 뛰어넘어 큰 일을 이루어내는 주인공의 길은 더 드라마틱하게 되기 마련이다.

여성적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황진이

과거에 흔히 카리스마를 말하면 우리는 남성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건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KBS 드라마 ‘황진이’가 보여주는 카리스마가 그 어떤 남성들의 그것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칼만 든다고 카리스마가 생기는 건 아니다
‘황진이’는 전개상 세 단계의 변신을 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것은 첫째, 첫사랑과 그 실패를 겪는 황진이, 둘째 그로 인해 세상에 독을 품는 황진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독이 세월에 녹아 한 커다란 인간으로 거듭나는 황진이가 그것이다. 지금 두 번째 단계를 지나고 있는 황진이에게서 그 카리스마가 물씬 풍겨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단계적인 변화의 원인으로 볼 때, 그녀가 뿜어내는 카리스마의 원천은 바로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한(限)에 근거한다. 그 한은 자신의 운명과 그런 운명을 만든 세상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다. 은호(장근석 분)의 죽음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자신의 연약한 마음가짐으로는 세상과 싸워 백전백패라는 뼈아픈 결론이다. 그래서 그녀는 마음 속에 칼날 하나를 품는다.

그 칼끝은 바로 저 조선 사내들의 위선을 향해 있다. 그녀는 부드럽고 아찔한 웃음을 지으며 이른바 세도가라는 자들의 본색을 드러내게 만들고는, 거침을 뽑아들고 그네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것이 단지 사내가 아닌 ‘조선 사내’의 이중성을 꼬집는다는 데서 그녀의 칼은 조선 자체를 향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녀는 당대로 보면 일개 기녀이다. 천출의 운명을 타고난 그녀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조선 전체를 향해 마음 속의 비수를 뽑아드는 그 지점이 그녀의 카리스마가 불을 뿜는 순간이다.

무예만 출중하다고 카리스마가 생기는 건 아니다
그녀의 카리스마는 이러한 대결구도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저 백무와 매향에서부터 비롯되어 황진이와 부용의 대결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황진이와 세상(여기에는 사대부집 양반네들을 비롯해 명나라의 사신까지를 포함한다)의 대결로 연결된다. 그녀는 세상과 겨루기 전 교방에서 그 무기를 키워왔다. 그것은 바로 시와 음악, 춤과 같은 재주(예술)이다. 이 재주를 얻기 위해 그녀는 저 무예를 수련하는 사극 속의 남성 캐릭터만큼 혹독한 시간들을 보냈다.

향악을 폐하려는 명나라 사신 앞에 거문고를 들쳐 메고 나타나는 황진이의 모습은 전쟁터에 나가는 그 어떤 캐릭터보다 더 카리스마가 넘쳐난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한 것은 거문고 연주가 아니다. 그녀는 ‘마음의 거문고 연주’라는 무기를 들고 나온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 그녀는 겉으로 보이고 들리는 재주는 헛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상대방을 제압한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카리스마가 겉으로 드러나는 호화로운 의상과 신들린 듯한 연주, 날아갈 것 같은 춤사위에 있지 않다는 걸 말해준다. 무술 동작 몇 개만으로 얻어지는 카리스마란 실상 너무나 관습적이며 장면이 지나고 나면 잊혀지게 마련이다. 허나 마음에서 비롯된 이 강렬한 카리스마는 외상을 넘어서 내상을 입히기 마련이다.

갑옷만 입는다고 카리스마가 생기는 건 아니다
여기에 하나 더 황진이의 카리스마의 원천을 덧붙인다면 그 유려한 미장센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최근 들어 사극의 복장들은 과거보다 더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패션쇼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 볼거리가 그저 화면을 왔다 갔다 밋밋하게 움직이고 있는 느낌을 주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황진이’의 화면들은, 그 어떤 화려한 CG 전투장면이나 색색의 갑옷보다도 더 아름답고 다이나믹한 영상을 만들어냈다. 우리네 한복이 제대로 빛을 발하고 동작 하나하나에서 힘이 느껴지는 것은 그러한 볼거리들을 진정 볼거리로 만들어주는 영상 미학에 있다. 타 사극에서 보여주는 나란히 장수들이 서서 화면 쪽을 바라보며 적의 동태를 얘기하는 화면 같은 관습화된 장면들은 극의 긴장감을 그만큼 흐트러뜨리기 일쑤다.

황진이는 사극이 포기한 유려한 미장센을 끌어들이면서 캐릭터와 극의 긴장감을 되살렸다. 카메라는 밑에서 위로, 또 위에서 아래로, 때론 극단적인 클로즈업에서부터 롱샷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로 변화하며 인물들의 감정선을 잡아낸다. 그 아름다운 장면들 속에 마치 칼처럼 흐르는 감정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사극이라고 다 같은 사극이 아니다
사극전성시대라고 한다. 흥미를 끌만한 소재와 캐릭터를 갖고 잔재주를 통해 시청률만 올린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사극은 아니다. 진정한 메시지와 함께 동시에 흥미로운 전개, 절제되면서도 강력한 대사들, 영상미학이라 해도 좋을 만한 화면 구성, 연기자들의 혼이 느껴지는 연기, 이 모든 것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훌륭한 사극이 탄생한다. 저 ‘대장금’의 힘은 바로 이런 모든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이다.

극에서 우리가 느끼는 카리스마란 사실 극의 긴장감과 집중도와 다른 말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대결구도를 갖는다고 해서, 칼을 들고 휘두른다고 해서, 굉장한 무예를 갖고 있다고 해서, 화려한 갑옷을 걸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드라마 본연의 힘인 드라마성(갈등구조와 진정성 그리고 실험정신)에 충실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주몽’이 ‘황진이’에게 배워야할 점이다.

인간의 길을 알고자 했노라

사극 전성시대에 홍일점처럼 빛을 발하는 드라마가 ‘황진이’다. 칼과 화살이 날아다니고 성벽을 오르는 군사들과 그걸 저지하려는 군사들간의 피 바람이 부는 사극의 현장에서, 오색이 눈을 현란하게 만드는 화려한 한복에 나풀나풀 돌아가는 춤사위, 입만 열면 달콤한 향내가 날 것 같은 풋풋한 연인들의 부드러움으로 등장한 ‘황진이’가 눈에 띄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 단지 그 남성적인 사극과 여성적인 사극이라는 이분법에 의해 ‘황진이’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일까. 그 속에는 무언가 다른 아름다움의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역사가 발견한 현대여성 혹은 한 인간
이것은 수많은 남정네들을 갈아치운 ‘색녀’의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한에 사무쳐 남정네들을 자신의 치맛폭에 쥐락펴락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한 악명 높은 기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운명이라는 굴레 속에 세워진 마음의 줄 위에 올라 한바탕 최고의 연희를 벌였던 한 여인, 예술가, 혹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이 운명에 맞서는 여인의 모습은 당찬 현대여성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

여기에 하지원이라는 카드는, 아주 여성적이면서도 그 안에 남성성을 누를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카리스마가 존재하는 황진이 캐릭터에 힘을 부여했다. 하지원의 등뒤에 든든히 선 김영애(임백무 역)와 전미선(황진이 모역)은 황진이 속에 존재하는 두 성격의 모태가 될 만큼 특징적이다. 그 양분을 먹고 자라난 황진이는 여성적인 카리스마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보다 현대적인 여성 캐릭터를 기대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황진이가 운명과 벌이는 싸움은 다분히 예술가의 삶을 닮았다. 그녀는 가슴속에 생긴 커다란 상처를 예술로서 풀어낸다. 이러자 이 이야기는 단지 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인간의 보편적 아름다움으로 확장된다. 칼날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그 칼을 가슴에 품어 만신창이가 된 마음을 갖고도 당당히 서서 제 갈 길을 가는 한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현대적인 미적 가치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마음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드라마
그 사랑과 운명 사이에 세워진 마음 줄은 그저 장난스런 유희가 아니다. 자칫 발 하나를 잘못 디뎌 균형을 잃는 날에는 살 판이 죽을 판이 되는 그런 줄이다. 사실 칼과 화살만 없다 뿐이지, 조선시대 기생이라는 황진이가 처한 삶은 피비린내 나는 마음의 전쟁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

기녀는 교방에 발을 디디는 그 순간부터 삶이 결정된다. 그것은 법도라는 사회적 굴레 속에서 사랑도 할 수 없고, 혼례 또한 치를 수 없는 그런 삶이다. 그들은 재주를 익히고, 미색을 키우며 그 재주와 미색을 무기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황진이가 처한 상황이다. 그러니 황진이의 어미인 현금이 그녀를 어린 시절 절로 보낸 것은 바로 그런 세습되는 굴레를 벗어나게 하고자 함이었다. 현금의 마음 한 가운데 자리잡은 것은 바로 자식이 겪을 마음 고생에 대한 회피이다.

이 드라마에서 절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상당한데, 그것은 저 마음과 욕망의 전쟁터인 세속으로부터의 해탈이란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것이 이 드라마 황진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황진이가 절을 빠져나와 교방에서 재인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마치 자기완성을 위해 속세로 뛰어드는 불승과 유사하다. 황진이의 마음은 사랑에 이끌리나 사랑을 얻지 못하고, 운명을 거부하려 하나 벗어나지 못한다. 차라리 전쟁이라면 싸워 이기거나 지면 끝날 것이지만 이 마음의 전쟁은 그 운명을 이겨내고 벗어나서 자유로워져야 끝나는 것이다. KBS 드라마 ‘황진이’는 바로 그 마음 줄 위에 서서 줄의 굴레를 넘어서 오히려 자유로워진 한 영혼을 노래한다.

한복만 입히면 다 사극인가
굵직한 캐릭터와 예사롭지 않은 메시지를 무기로 가진 황진이는 아름다운 화면으로 옷을 입는다. 최근 들어 사극에 등장하는 복식은 점점 역사라는 굴레를 벗어나 화려해지고 다양해지고 있다. 그것이 분명한 볼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건 왜일까. 그것은 우리네 복식을 화면구성이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황진이’가 방영되기까지 사극은 그 화려한 CG 전투장면을 빼고는(이것도 그다지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는다) 이야기 전개에 급급한 화면처리를 해왔다. 나란히 장수들이 서서 화면 쪽을 바라보며 적의 동태를 얘기하는 화면은 너무나 연극적이어서 드라마가 과거로 퇴행하는 느낌마저 준다. 또한 누가 누군가를 찾아가고 인사를 하고 앉기를 권하고 앉아 대사를 처리하는 장면도 너무나 관습화되어 있다. 말이 달려가고 기습을 하고 사로잡히고 하는 모든 사극의 장면들은 이제 영상미학을 포기한 지 오래다.

황진이는 드물게도 이들이 포기한 유려한 미장센을 다시 끌어들였다. 춤사위에 살짝 움직이는 손끝과 발끝에도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것은 화려한 복식의 색 때문이 아니다. 꽃잎이 떨어지는 길을 걸어오는 황진이의 모습은 부감으로 잡혀 우리네 담장과 조화를 이루며 한국적인 미를 보여준다. 정자 끝에 걸린 파란 하늘과, 정자 아래로 언뜻 보이는 연꽃들의 장관 역시 마찬가지다. 황진이와 백무가 탄 배가 화면 좌측에서 우측으로 움직이는 장면은 동양화 속으로 한발 들어갔다 나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아름다운 한복이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그것을 잡아내는 섬세한 카메라만이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교방 이야기로 인간의 길을 조명
또한 이 드라마가 가진 미덕은 그 흥미진진한 대결구도의 교방생활과 조선시대의 연애 풍경이라는 호기심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벼운 소재들을 엮어 ‘인간의 길’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향해 간다는 것이다. 그저 단순하게 기생의 삶을 그렸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교방 풍경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교방생활은 수련자와 구도자, 그리고 예술가의 길과 다르지 않게 그려진다. 그들은 호흡을 길게 하려고 물 속으로 잠수를 하고, 손끝 발끝의 선을 살리기 위해 줄에 매달려진다. 걸음걸이 하나를 만들기 위해 줄타기를 하며, 가야금에서부터 거문고까지 밤낮 없이 연습에 몰두한다. 또한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조선시대의 연애풍경을 그림에 있어서도 그 절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만남과 이별과 그리움 같은 것들이 고풍스러운 멋으로 잘 포장되어 보여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드라마가 호기심 충족과 자극적인 재미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황진이는 재주와 미색과 더불어 한 가지 무기를 더 갖는다. 그것은 바로 ‘마음을 부릴 줄 아는 힘’이다. 이 힘은 그녀의 스승인 백무의 표현대로 ‘고통’에서 나온다. ‘고통과 벗해야 진정한 기녀이자 예인’이라 할 수 있다는 백무의 말은 사실 ‘인간의 길’과 다르지 않다. 허태휘가 한 “당신의 삶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에, 황진이가 했다는 그 말, “인간의 길을 알고자 했노라”고 답한 그 말과 일맥상통한다. 황진이가 처한 삶이 주는 고통은 예술을 통해 승화되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사랑 저 너머에 있는 인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 ‘황진이’는 전하려는 메시지와 그걸 담는 영상문법이라는 그릇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보기 드문 작품이다. 그 아름다움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지만, 그 궁극적인 길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황진이’가 앞으로 보여줄 인간의 길이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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