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보다 인물 판타지, 마동석이라는 캐릭터는

마동석 현상이다. ‘흥행보증수표’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항간에는 ‘원빈을 넘어섰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청불영화로서 역대 흥행 3위인 <아저씨(628만여명)>를 <범죄도시(636만여명)>가 넘어섰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후속작으로 방영중인 <부라더> 역시 첫 주에 73만 관객을 동원하며 이대로 가면 100만 관객 돌파는 시간문제라고 한다. 무엇이 이런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

사진출처:영화<부라더>

액면대로 얘기하면 <범죄도시>는 굉장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잘 만든 오락영화다. 특히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가진 이미지를 가장 잘 끌어와 작품에 녹여냄으로써 흥행에 성공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부라더>는 <범죄도시>에 비교하면 소품이고, 작품 내적으로 봐도 그다지 성취가 보이지 않는 영화다. 

안동 문중의 보물을 찾는 형과 그 땅에 고속도로를 내기 위해 문중사람들을 찾아가 허가서를 받아내는 동생이 그 안동에 내려가 벌어지는 사건을 다뤘다. ‘가보도 팔아먹는 형 vs 집안도 팔아먹는 동생’이라는 홍보문구가 거의 다라고도 할 수 있는 코미디다. 물론 대학로 스테디셀러 뮤지컬인 <형제는 용감했다> 원작을 가진 작품이지만 영화로서는 어딘지 밋밋한 이야기에 중간 정도 지나고 나면 결말까지 대충은 감이 잡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 역시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가진 그 캐릭터를 적극 활용한다. 산만한 덩치에 어딘지 건들대는 그 모양새가 안동의 유서 깊은 집안사람들과 부딪칠 때 나올 수밖에 없는 웃음. 특히 동생 역할을 한 이동휘와 사사건건 부딪치는 모습에서는 어딘지 유치해도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물론 뒤로 가면 이 덩치가 눈물을 흘리는 반전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래서 결과적으로 보면 <범죄도시>의 놀라운 성적도 그렇고, 그에 이은 <부라더>의 선전도 그 연원은 결국 마동석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미 작년 <부산행>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관객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이 배우는 놀랍게도 올해 두 작품의 성공요인이 되었다. 작품이 가진 부족함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마동석이라는 이름 석 자 때문에 관객들이 영화관을 찾았다는 것. 

물론 마동석처럼 작품 속 캐릭터를 연기한다기보다는 자기 이미지를 오히려 작품 속으로 가져오는 배우는 적지 않다. 특히 성룡이나 아놀드 슈와제네거, 빈 디젤 같은 액션 배우들의 경우 이런 특징이 두드러진다. 그들의 작품을 볼 때 우리는 그 작품이 가진 내용을 그리 눈여겨보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보여줄 액션에 더 관심이 간다.

마동석은 그런 점에서 보면 외형적으로 이런 액션배우들의 틀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고 보인다. 터질 듯한 근육은 오리모양이 수놓아진 티셔츠 하나만 입고 있어도 웃음을 터트리게 만들고, 살벌한 조직폭력배들이나 심지어 좀비들 앞에서도 어딘지 든든함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동석의 액션은 성룡이 하는 현란한 동작이 아니고 그렇다고 아놀드 슈와제네거가 보여주는 화력 강한 액션도 아니다. 맞으면서 싸우는 이 캐릭터는 남다른 완력으로 상대방을 압도한다. 어딘지 칼을 맞아도 버텨낼 것 같은 그런 인상이다. 우리네 액션 장면들이 가진 정제되기보다는 치고받는 현실감을 이만큼 잘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가 있을까.

하지만 마동석이 우리네 관객들에게 어필하는 가장 큰 지점은 훨씬 더 사회적인 정서와 관련이 있다. 그는 너무나 견고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공공의 적들 앞에서는 강력한 힘을 보여주지만, 보호해야할 약자들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마블리로 변신한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우리 사회의 비정함을 마동석은 그 캐릭터를 통해 뒤집는다. 이런 점은 관객들이 마동석의 액션에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잘 말해준다. 현실의 비정함을 뒤틀어버리는 강력한 힘에 대한 요구다.

그렇지만 마동석 현상에 대해 과도한 평가를 내릴 필요는 없다. 그건 굉장한 연기력이나 작품의 성취도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기보다는 마동석이라는 인물 자체가 가진 캐릭터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마동석이 스스로 배우로서 성장해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하는 걸 말해준다. 물론 이런 액션스타가 우리에게도 존재한다는 건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지만.

어딘가 부족한 <럭키>, 유해진의 엄청난 저력

 

영화 <럭키>의 진짜 행운은 유해진이 아니었을까. <럭키>는 개봉 4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례적인 일이다. 정우성, 황정민, 주지훈, 곽도원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한 <아수라>가 개봉한 지 20일이 다 되어가지만 고작 250만 관객에 머물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결과다.

 

사진출처: 영화 <럭키>

영화에 들어간 공력을 보면 <아수라>가 압도적이다. 제작비도 <아수라>가 홍보비를 포함해 110억 정도가 들어간 반면 <럭키>40억이 투입됐다. 무엇보다 쟁쟁한 주연급 배우들만으로도 화제가 됐던 <아수라>의 캐스팅은, 지금껏 조연으로만 주로 서 왔던 유해진이라는 배우에 기대하고 있는 <럭키>와 너무나 비교된다.

 

그렇다고 객관적으로 말해 <럭키>라는 작품이 굉장한 완성도를 갖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전형적인 코미디 장르로서 기억상실이 된 킬러가 무명배우로 희망 없이 살아가는 청년의 삶을 대신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았다. 조금은 과장된 코미디 설정들이 웃음을 주며 후반부에 이르면 어떤 따뜻함 같은 걸 느낄 수 있는 영화.

 

물론 소소한 재미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대단할 것 없다 여겨지는 <럭키>라는 작품이 이만큼의 관객 수를 기록하며 화제가 되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요소는 결국 유해진이라는 배우다. 이 배우가 단독 주연으로 선 영화라는 점은 <럭키>에 대한 막연한 지지 같은 걸 하게 만든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와중에도 그다지 크게 웃기다고 생각할 수 없는 장면에서조차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다.

 

그건 아마도 영화 속 캐릭터 때문이라기보다는 유해진이라는 이미 우리에게는 <삼시세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잘 알려진 인물이 주는 친근함 때문이 아닐까. 유해진이 얼굴에 잔뜩 힘을 주고 인상을 쓰는 첫 장면의 비장함이 관객들에게는 먼저 웃음이 터져 나오게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배우가 가진 시골스러운 면면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효과일 것이다.

 

물론 <럭키>라는 영화 자체가 전혀 흥행에 기여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작품에는 특이하게도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편에 깔려 있다. 즉 무명배우의 삶을 대신 살게 된 유해진이 구박받던 엑스트라에서 점점 주연에 가까운 인물로 성장하는 과정은 우스우면서도 통쾌함을 준다. 어떤 배역을 맡느냐에 따라 멸시받기도 하는 무명배우들의 삶이 마치 우리네 삶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해진이라는 배우가 <럭키>를 통해 그 무명배우의 삶을 연기한다는 점은 여러모로 영화와 현실 사이를 잇는다는 점에서 특별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건 어쩌면 <주유소 습격사건>의 단역으로 등장해 지금의 톱스타가 된 유해진이라는 배우의 진짜 이야기를 코믹하게 풀어놓은 듯한 착시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럭키>는 제목 그대로 유해진이라는 행운이 있어 성공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물론 굉장한 기대는 금물이다. 하지만 유해진이라는 배우의 친근하고 따뜻하며 본인이 진지할 때조차 웃음을 줄 수 있는 인물을 온전히 주인공으로 들여다보는 그 시간은 충분히 재미를 준다. 어딘지 부족한 영화지만 유해진이라는 배우의 아우라는 그 부족한 부분을 제대로 채워주는 행운이 되어 주었다

<귀향>의 소녀들과 <동주>의 청년들

 

영화는 이미 자본의 경제가 된 지 오래다. 제작비가 얼마나 들었는가 하는 점은 그 영화의 성패와 무관하지 않다. 극장에 얼마나 걸어주는가가 흥행의 관건이 되는 상황이다. 그러니 배급사가 투자사인 우리네 상황에서 투자규모가 큰 영화는 그만큼 극장에서 더 오래 많은 관을 내주게 된다. 그러니 작은 규모의 영화들은 설 자리 자체가 없다. 자본에 따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영화 산업에 극명하게 나타나는 건 그래서다.

 


사진출처: 영화 <귀향>

그런데 여기 이런 자본 시스템을 거스른 두 영화가 있다. <귀향><동주>. <귀향>은 국민 75270명이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비 12억을 모아 겨우 제작될 수 있었다. 물론 손숙 같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재능기부도 빼놓을 수 없다. 보통 배급사에서 관심을 갖는 제작비 규모가 최소 20억 수준(홍보 마케팅비 포함)이라고 한다. 그러니 거기에 한참 못 미치는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개봉관이 50개 정도로 얘기가 됐던 건 그래서다.

 

하지만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개봉일 이 영화는 500여개가 넘는 개봉관을 확보했고 그 후로도 계속 개봉관 수를 늘려나갔다. 지난 7일 현재 267만 관객을 돌파했다. 작은 영화의 반란인 셈이다. 산업적인 논리로서는 도무지 벌어지기 힘든 일이지만 이 영화에 대한 공감대가 이런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냈다. ‘위안부문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그 공감대가 기억하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으로 이어졌던 것.

 

윤동주 시인의 청춘을 다룬 <동주>는 고작 5억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다. 사실 이 정도의 제작비로 이런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기획부터 연출까지 유기적으로 움직여 빈틈없이 제작된 결과다. 5억 원의 규모이니 역시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개봉 당일 개봉관 수는 370개 남짓. 하지만 이 영화 역시 입소문이 나면서 개봉관수도 점점 늘어갔다. 지난 224일에는 467개 스크린으로 확대됐다. 관객 수는 90만 명을 훌쩍 넘어 이제 곧 100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귀향><동주>의 이 같은 선전에는 20대 청춘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과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 지금의 청춘들이 일제강점기라는 한참 이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들에 호응한 걸까. 그 키워드는 결국 청춘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귀향>에서 무고하게 지옥으로 끌려간 소녀들과 <동주>에서 부끄러운 세상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다가 산화한 청춘들이 지금의 혹독한 취업 현실 속에서 힘겹게 버텨내고 있는 청춘들을 공감하게 했다는 것이다. <귀향><동주>를 보며 흘리는 청춘들의 눈물에는 그래서 당대의 소녀들과 청춘들의 아픈 역사는 물론이고 지금 현재의 현실에 부대끼는 자신들의 아픔도 들어 있다.

 

너무나 작은 규모라서 설 자리조차 찾기 힘든 <귀향><동주> 같은 작은 영화들은 그래서 지금의 청춘들을 그대로 닮아 있다. 모든 게 태생부터 결정되고 진짜 내용이 아니라 스펙에 의해 모든 미래의 성패까지 달리는 현실. 그것이 지금의 청춘들이 처한 현실이 아닌가. 그래서 <귀향><동주>에 대한 청춘들의 호응은 당연해 보인다. 그 영화가 처한 현실 또한 청춘들이 처한 현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귀향><동주>의 이례적인 성공은 그래서 반가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기적이라 불리는 현실에 대한 씁쓸함이 남는다. 왜 이런 일들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지 못할까. 왜 작은 영화들은, 또 청춘들은 거대한 영화들과 기득권자들에 의해 항상 희생되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때로는 이런 현실도 긍정적으로 바꿔낼 수 있다는 희망도 이 두 영화의 사례가 보여주었다. 결국 많은 대중들의 관심과 지지만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소중한 본보기를 보여준 것이라는 얘기다

<내부자들>, 더러워 보기 싫다면서도 기꺼이 보는 까닭

 

영화 <내부자들>6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로서 600만 관객 돌파란 기록은 놀라운 일이다. 이 흐름이라면 <아저씨(617)>, <킹스맨(612)>의 기록도 갈아치울 기세다.

 


사진출처: 영화 <내부자들>

<내부자들>이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가 된 것은 이 영화의 폭력성과 선정성이 상상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저 조폭들이 치고 박는 수준의 폭력성이 아니라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장면도 버젓이 나오고, 그저 베드신이 아니라 난잡하다 못해 더럽게까지 느껴지는 섹스 파티가 등장한다. 그러니 청소년 관람불가 딱지를 달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은 그래서 두 가지 반응을 보낸다. 너무 더러워 생각하기도 싫다는 반응이 그 첫 번째다. 폭력성이야 차치하고라도 나이 지긋한 재벌 총수와 언론인, 정치인, 법조인이 홀딱 벗고 나와 나체의 여성들의 시중을 받으며 파티를 벌이는 장면은 정말 볼썽사납다. 성기로 맥주잔 위에 놓인 위스키 잔을 때려 폭탄주를 제조하는 장면은 여성 관객들이 본다면 대단한 혐오감을 줄만한 장면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600만 관객을 돌파한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것은 이 영화의 두 번째 반응, 즉 폭로의 통쾌함에서 나온다. 이 영화는 거의 끝나기 직전까지도 너무도 단단해 결코 깨지지 않을 재계와 언론, 정계, 법조계의 카르텔을 보여준다. 그 카르텔은 물리적인 힘이면 힘, 정치력이면 정치력, 여론을 쥐고 흔드는 언론 권력, 그리고 불법조차 덮어버리는 사법의 부당한 권력까지 보는 이들이 절망적일 정도로 공고하다.

 

그래서 관객은 그 카르텔이 무너지는 것을 간절히 바라면서 보게 마련이지만 사실 그 결과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이 영화가 주목하는 건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기 힘든 그 판타지적 결말이 아니라 그들의 더러움 자체를 폭로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내부자들>인 것은 그 권력의 내부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다. 도대체 그 안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신문지상이나 뉴스를 통해 나오는 재벌총수나 언론인, 정치인, 검사의 모습은 단정하기 이를 데 없다. 물론 그 모습이 진짜인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부자들>은 비리에 연루된 그들의 진면목에 천착한다. 그들이 하는 짓이 얼마나 추악한가를 폭로한다.

 

그래서 <내부자들>에 등장하는 권력자들은 마치 괴물처럼 그려진다.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행동들을 하고 심지어 누군가를 살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이 벌이는 파티는 마치 악마들의 파티처럼 보인다. 물론 그 내부는 단단히 봉인되어 있는 것이지만 <내부자들>은 영화의 권리로서 그 내부를 들여다본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그 봉인된 내부가 외부에 폭로되는 그 자체에 어떤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혹 청소년 관람불가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애초에 과한 폭력과 선정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 의미 자체도 퇴색되는 영화다. 그 폭력과 선정성이 내부의 더러움으로 그려지고 그 더러움이 외부에 폭로되는 순간. 그 때가 <내부자들>이 폭발력을 갖게 되는 순간이다.



미국 영화 <인턴>이 우리나라에서 소비되는 방식

 

영화 <인턴>은 생각 외의 흥행을 거뒀다. 지난 7일 현재 <인턴>의 관객 수는 170만 명에 육박했다. 소소한 휴먼드라마, 게다가 우리네 정서도 아닌 미국식 정서가 담겨진 영화에 이처럼 우리네 관객들이 많이 찾은 건 이례적인 일이다.

 


사진출처: 영화 <인턴>

물론 로버트 드니로에 앤 헤서웨이의 조합이 주는 기대감은 분명히 있다. <인턴>의 홍보 포인트가 꽃할배 로버트 드니로를 인턴으로 둔 젊은 여사장 앤 헤서웨이라는 건 확실히 그림이 된다. 무수한 작품에서 놀라운 연기력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드러냈던 로버트 드니로. 게다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그 신입이었던 앤 헤서웨이가 이제 젊은 CEO로 나온다니 어찌 기대가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만으로 17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 동원을 한 <인턴>의 의문은 좀체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가진 낸시 마이어스 특유의 따뜻한 휴먼드라마의 힘일까. 그런 점이 없지는 않다. 이 영화는 인턴으로 들어온 70세 벤(로버트 드니로)이 인터넷 쇼핑몰로 단 몇 년만에 큰 성공을 거둔 줄스(앤 헤서웨이)에게 일종의 인생 상담을 해주는 영화다. 즉 회사에서는 벤이 줄스의 인턴이지만, 인생에서는 줄스가 벤의 인턴이라고 말해주는 영화.

 

그 안에는 우리에게도 잘 통하는 아날로그 정서가 깔려 있다. 즉 줄스가 운영하는 회사의 대부분은 컴퓨터와 네트워크를 통해 굴러간다.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하는 지시도 이메일로 전달되고 고객들도 직접 대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고 불만사항도 인터넷으로 통해 전해지고 수정된다. 이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온 벤은 다른 인턴이 컴퓨터 주변기기와 스마트폰을 꺼내놓는 장면에, 오래된 가방에서 노트와 펜, 계산기를 꺼내놓는다. 디지털로 어딘지 쿨해 보이지만 차갑게 느껴지는 회사에 벤은 따뜻한 아날로그적 인간관계를 풀어놓는다.

 

이러한 아날로그 정서를 바탕으로 사장을 보필하는 충직하고 경험 많은 벤 같은 비서(혹은 친구나 동료)에 대한 판타지도 있다. 워킹맘의 입장인 줄스는 그래서 일과 가정생활 모두를 잘 해내고 싶은 직장여성들과 공감하는 면이 있다. 벤은 정서는 아날로그지만 마인드는 혁신적인 사람이다. 능력 있는 여성이 가정사 때문에 집안에 주저앉는 것을 그는 안타깝게 바라본다.

 

<인턴>의 성공에는 연기자들에 대한 믿음과 그 내용이 담고 있는 아날로그적인 정서의 훈훈함이 분명 깔려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이만한 성공의 이유를 모두 말해주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 이유의 빈 구석을 채워주는 건 <인턴>이라는 제목에서 찾아지지 않을까.

 

이 영화는 미국의 기업들이 일종의 사회 기여 차원에서 하는 시니어 인턴제를 소재로 하고 있다. 즉 은퇴한 시니어들을 기업이 인턴으로 채용하는 일이다. 물론 이 영화에는 젊은 인턴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 속에서의 인턴이 우리나라에서의 인턴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에게 인턴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저 <미생>의 장그래(임시완) 같은 인물이거나 현재 방영중인 MBC 드라마 <그녀는 예뻤다>의 김혜진(황정음)일 것이다. 정규 채용이 되기 위해 시키는 일이면 뭐든 하는 존재. 그렇게 죽어라 일해도 정규채용은커녕 쫓겨나기 일쑤인 그런 존재.

 

즉 이 영화의 인턴이라는 제목은 기묘하게도 일종의 착시현상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인턴으로 들어갔지만 CEO와 거의 대등한 위상을 보여주고 심지어 그녀의 일은 물론이고 삶까지 인생 상담을 해주는 인턴. 우리네 인턴과는 너무나 달라서 하나의 판타지가 되는 그런 인턴이 이 영화에는 존재한다.

 

젊은 관객들이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인턴이라는 착시효과의 판타지를 보게 된다면, 중년 이상의 관객들은 영화가 말해주는 아날로그 정서와 은퇴해도 여전히 강력한 능력으로 남아있는 경륜이 효용가치가 있다는 판타지를 보게 된다. 물론 워킹맘들은 줄스라는 인물을 통해 일과 가족을 모두 지켜내는 판타지를 들여다볼 것이다.

 

이러니 기묘하게도 <인턴>이라는 영화는 우리네 인턴제와는 너무나 다른 미국식 인턴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우리 정서와 판타지를 자극하는 요소들이 다 들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젊은 세대의 인턴판타지와 실버 세대의 인정 욕구 그리고 워킹맘들의 판타지가 그것이다. 영화는 미국에서 만들어졌지만 우리네 관객은 이 영화를 우리식으로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여름 성수기에 어울리지 않는 <협녀>의 부진

 

영화의 성패는 개봉시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겨울방학 시즌과 여름 성수기는 영화를 찾는 관객들의 기대치가 다르다. 겨울방학 시즌이 조금 무거운 영화라도 영화적인 완성도가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시기라면, 여름 성수기는 말 그대로 블록버스터가 대결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 과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영화는 어울리지 않는다.

 


사진출처:영화 <협녀, 칼의 기억>

<협녀, 칼의 기억(이하 협녀)>이 겨우 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4위를 차지한 건 그 영화적인 완성도라기보다는 그 개봉시기가 영 어울리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낫다. 이 영화는 여름 성수기에 보기에는 너무 무겁다. 끝없이 이어지는 독백과 마치 연극처럼 비일상화되어 있는 대사들, 그리고 유려한 영상미는 충분하지만 역시 반복되는 슬로우 액션은 영화를 한없이 무겁게 만들었다.

 

<협녀>는 웃음의 포인트를 거의 찾기 힘들다. 두 시간짜리 영화가 쉬지 않고 비장함으로 흘러가는 건 마치 피서하듯 영화관을 찾는 여름 성수기 관객들이 바라는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예고편으로 보기에는 마치 <와호장룡>이나 <동사서독> 같은 느낌의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실로 <협녀>는 그 영상 연출만 놓고 보면 마치 한 편의 무용을 보는 것처럼 우아하고 스펙터클하다.

 

하지만 그런 영상미도 이야기의 무거움을 이겨내지는 못한다. <협녀>는 사사로움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이라고 설명하며 원죄를 가진 부모를 자식이 처결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즉 대의를 위해 가족 관계의 사사로움을 뛰어넘는 비극적인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욕망에 의해 덕기라는 이름을 버리고 유백(이병헌)이 된 사내와 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형을 죽인 월소(전도연) 두 사람 사이의 애증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마치 그리스의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보는 듯한 비장미는 너무 과도하게 무거워 자칫 실소가 나올 정도지만 그나마 그 무게를 버텨내는 건 연기자들이다. 이 영화는 실로 이병헌과 전도연,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확실한 자기 색깔을 드러낸 김고은 같은 배우들에 깊은 몰입에 의해 겨우 그 비장미를 유지하는 작품이다.

 

50억 협박 사건으로 인해 그 불편한 사생활이 공개되면서 이병헌에 대한 대중적인 정서는 결코 좋지 않지만 연기자로서 그가 갖는 아우라가 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면 <협녀>의 부진은 이병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연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사생활 문제로 인해 개봉시기가 겨울에서 여름 성수기로 들어오게 되면서 생긴 일이다.

 

<베테랑><암살>, <미션 임파서블> 같은 여름철 더위를 날려버릴 블록버스터에 딱 어울리는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협녀>는 그 무겁고 과한 메시지와 비장함 때문에 오히려 더 더워지는 영화다. 만일 이병헌 논란이 터지지 않고 그대로 지난 겨울에 개봉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큰 흥행을 거두기는 어려운 작품임에 분명하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고 나오는 그 찜찜함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았을까



<그레이>, 엄마들의 포르노? 로맨스가 더 세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붙은 엄마들의 포르노라는 캐치 프레이즈는 확실히 강렬하다. 주로 남성들에 의해 소비되는 것으로 치부됐던 포르노라는 단어에 엄마들이 수식어로 붙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 포르노는 남성들의 그것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뉘앙스가 이 표현 속에는 담겨 있다. 그것은 도대체 뭐가 다를까.

 

사진출처 :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그것은 단지 육체적인 성적 쾌감만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물리적이기보다는 화학적인 반응들이 더 많이 전제된다. 즉 처음 순수한 영문학도인 아나스타샤가 억만장자인 그레이를 만나 나누는 대화에서조차 그런 성적인 느낌이 묻어난다. 무언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듯한 신비로운 인물 그레이에게서 아나스타샤는 살짝 묻어나는 우울과 자책 같은 것들을 읽어낸다. 그 말 몇 마디와 눈길을 주고받는 과정에 생겨나는 설렘 같은 화학작용은 아마도 여성들에게는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성적 쾌감보다 훨씬 더 자극적일 수 있다.

 

게다가 이 그레이를 둘러싼 매끈하고도 우아하며 귀족적으로 잘 정돈된 세계는 여성들의 로망을 자극한다. 그레이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아나스타샤에게 토마스 하디 쪽이냐 아니면 제인 오스틴 쪽이냐를 물을 정도로 감성적인 면모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감성은 그가 아나스타샤에게 토마스 하디의 <테스> 초판본을 선물해줄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통해 더욱 부각되는 면이 있다.

 

그는 뭐든 해줄 수 있는 인물이다. 원한다면 시애틀의 밤 풍경을 전용 헬기를 태워보여 줄 수도 있고 자동차 하나쯤은 졸업선물로 줄 수도 있는 능력자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경제적 조건과 잘 생긴 외모, 그리고 감성과 지성을 겸비한 인물이 사실은 어린 시절의 깊은 상처를 안은 채 자기만의 제국에서 은밀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건 묘한 동정심과 모성애를 일깨운다.

 

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인물이 가진 치명적인 성적 취향은 그래서 이 로맨틱이 심지어 포르노같은 파국과 갈등하고 긴장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즉 이 로맨틱한 그레이의 겉면과 어찌 보면 짐승 같은 본능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포르노같은 성적 세계는 마치 존립이 불가한 이율배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로 묶여져 있다는 것이다. 로맨틱을 전제하지만 성적 본능은 때론 포르노 같은 세계로 관계를 이끌어간다.

 

흥미로운 건 도무지 그 포르노같은 가학-피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던 아나스타샤가 기꺼이 그 세계로 들어가려 하게 되는 것은 단지 그 쾌감을 경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레이가 겪었던 그 어린 시절의 상처를 똑같이 공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포르노의 세계로 들어가지만 그것을 감당해내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그런 점에서 보면 포르노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로맨스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원작 소설은 훨씬 더 엄마들의 포르노에 적합한 자극들이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시각보다는 청각, 혹은 문학적 상상력이 오히려 여성들의 성감대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상당 부분을 시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학작품이 그려내는 감각적 묘사들의 우아한 자극을 영상을 통해 100% 구현해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 영화가 지나치게 성적인 영상으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남녀 간의 로맨틱한 화학작용에 치중한 건 그래서일 게다. 어쨌든 로맨스에 포인트를 맞춰 본다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로서의 흥행성공으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

 

<군도>의 평가와 다른 흥행돌풍, <명량>에 미칠 효과

 

영화 <군도 :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의 평점은 6점대까지 떨어졌다. 이례적으로 관객과 평단의 평가가 거의 비슷하다. 항간에는 격한 목소리로 <군도>를 비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만큼 기대가 컸다는 얘기겠지만 실상 <군도>의 기획은 엇나간 부분이 없지 않다. 너무 스타일로 폼을 잡다 보니 정작 <군도>의 핵심이랄 수 있는 민중의 정서가 빠져버린 탓이다.

 

'사진출처:영화 <명량>'

만일 민중의 적으로 묘사된 조윤 강동원과 그와 맞서 싸우는 의적 도치 하정우의 스타일리쉬한 액션이 아니라 봉기하는 민중의 한 사람이었던 장씨 역할의 김성균이 좀 더 부각됐으면 어땠을까. 만일 이 스타일이 잘 빠진 액션 활극을 민중들의 분노와 좀 더 끈끈하게 엮어냈다면 이 작품은 더 놀라운 결과를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마케팅적으로 보면 4일 만에 2백만 관객 돌파 같은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입소문을 타고 그 흥행이 유지되느냐가 더 중요하다. <군도>는 그런 점에서 불리한 입장이다. 보고 나온 관객과 평단 모두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평가가 좋지 않은데도 흥행속도가 빨라지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것은 이 영화가 적어도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건드린다는 점이다. ‘민란의 시대라는 거대한 타이틀이 걸려 있는데다 포스터를 뚫고 나올 듯한 하정우의 강렬한 인상과 칼날처럼 날카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강동원을 보고 나면 왜 이렇게 평가가 안 좋지?”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드라마라면 계속 이어보는 것이기 때문에 낮은 평가는 다음 시청률에 반영돼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기본적으로 직접 확인해봐야 그 결과를 평가할 수 있는 장르다. 또 누군가 재미없다고 해도 또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재미있을 수 있는 게 영화다. 그러니 더더욱 타인의 평가가 자신의 기대치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해 오히려 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군도>가 이번 우리네 블록버스터의 첫 발을 끊은 것도 흥행돌풍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방학이 시작되는 시점이고 영화관으로 사람들이 발길을 모으는 블록버스터의 계절이 막 열리는 그 시기에 <군도>가 그 첫 번째 갈증을 풀어주는 영화로 개봉된 것은 마케팅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상황이다. 물론 <트랜스포머3><혹성탈출2> 같은 만만찮은 경쟁작들이 이미 포진했지만 우리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감은 조금 더 높은 편이다.

 

<트랜스포머3>가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듯한 인상이 짙고, <혹성탈출2>도 작품은 좋지만 전편만 못하다는 평가도 <군도>에게는 좋은 결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군도>에게도 앞으로 똑같이 해당되는 문제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다. 즉 곧 개봉할 <명량>이 이미 만들어진 기대감 위에 관객과 평단의 좋은 평가까지 갖게 된다면 대중들의 시선은 금세 <명량>쪽으로 기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도>를 보고 어떤 실망감을 느낀 관객이라면 그 보상욕구로서 <명량>을 찾아볼 가능성도 높다. 올 여름 개봉을 앞둔 우리네 영화들이 블록버스터인데다가 같은 역사극이라는 점은 이런 상관관계를 만들어낸다. <군도>를 보며 액션활극의 장쾌함은 느꼈을지 몰라도 정서적인 울림을 갖지 못한 관객은 <명량>의 이순신의 대사 한 마디가 엄청난 끌림으로 다가올 수 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이 대사가 만들어내는 정서적 울림은 과연 <군도>의 흥행돌풍을 압도할 수 있을까. <명량>의 폭풍전야가 기대되는 시점이다.

 

<트랜스포머4>의 중국, <어벤져스2>의 한국

 

<트랜스포머 : 사라진 시대(이하 트렌스포머4)>에는 홍콩에서 시드를 갖고 도주하던 조슈아 박사(스탠리 투치)가 엘리베이터에서 괴한들의 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이를 막는 인물이 중화권 배우인 리빙빙이다. 리빙빙의 격투실력을 본 조슈아 박사는 갑자기 그녀에게 빠진 듯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기도 한다.

 

'사진출처:영화 <트랜스포머:사라진 시대>'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더 나온다. 그것은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한 중국인 청년이 괴한이 리빙빙을 가격하는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쿵푸 실력으로 괴한을 물리치는 장면이다. 어찌 보면 이 장면은 사족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국인들이라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 즉 이 장면은 누가 봐도 중국인 관객을 염두에 둔 서비스 장면이라는 점이다.

 

<트랜스포머4>의 주요 배경은 중국 상하이와 홍콩이다. 트랜스포머의 재료가 되는 트랜스포뮴을 생산하기 위해 시드를 투하시키려는 곳이 중국의 사막이고, 선사시대에 공룡을 모델로 트랜스포머가 된 다이노봇이 깨어나는 곳도 홍콩이다. 다이노봇을 타고 싸우는 옵티머스 프라임의 모습은 기묘하게도 중세 유럽의 용을 탄 기사 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동양의 용을 탄 전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국 상하이와 홍콩은 트랜스포머들의 전장이 되어 초토화된다. 좁은 공간에 밀집된 고층 건물들을 마구 부숴버리며 싸우는 오토봇과 디셉티콘 그리고 그 사이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다이노봇은 압도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중국인들에게는 새로운 감회를 만들어낼 것이다. 거기 배경이 자신들이 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중국을 다분히 염두에 둔 이러한 로케이션 덕분인지 <트랜스포머4>는 중국에서만 단 3일 만에 910억 원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이 수치는 전체 수입인 2천여억 원의 절반에 달하는 액수다. <트랜스포머3>가 중국에서 약 18백억 원의 수입을 올린 걸 생각해보면 이번 <트랜스포머4>가 그 수입을 뛰어넘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중국 로케이션이 가진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트랜스포머4>가 상기시키는 건 우리나라에서 촬영된 <어벤져스2>. 당시 2주간 교통을 통제하면서까지 진행된 이 로케이션으로 국내에서는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관광공사가 이 <어벤져스2>의 서울 촬영으로 4천억 원의 홍보효과와 2조 원의 국가브랜드 가치 상승이 이어질 것이라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지만 회의적인 시선들이 많았던 것. 즉 파괴되는 공간으로서 활용되는 서울시의 장면들이 해외 관광객을 끌어 들일만큼의 유인이 될 수 있겠냐는 의문이 일었다.

 

<트랜스포머4>의 중국 로케이션을 두고 보면 이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이 중국에 매력을 느끼고 관광을 하러 찾아올 가능성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는다. <트랜스포머4>의 중국 흥행을 통해 드러나듯이 오히려 관심을 끄는 쪽은 중국인들이다. 자신들이 사는 공간이 <트랜스포머> 같은 블록버스터 공간으로 어떻게 그려질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어벤져스2>의 서울 로케이션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인다. 내용보다는 압도적인 볼거리가 중심이 되는 <트랜스포머4>가 그러하듯이, <어벤져스2> 역시 그 볼거리 속에 들어가 있는 서울의 모습이 우리네 관객들의 호기심을 잡아끌 것이라는 점. 결국 <어벤져스2>의 서울 로케이션은 관광공사의 국가브랜드 이미지 제고보다는 할리우드의 마케팅 차원이 훨씬 강력할 거라는 점이다. 중국 로케이션이 만들어낸 <트랜스포머4>의 중국 열풍은 <어벤져스2> 서울 로케이션의 진면목을 새삼 바라보게 해준다.

'천안함' 상영 중단 미스테리 왜 커질까

 

어쩌다 이런 촌스러운 일마저 벌어지게 됐을까. 이미 개봉된 영화이고 개봉 첫날부터 다양성 영화 박스오피스 1위, 전체 박스오피스 11위를 차지할 정도로 대중적인 관심을 모은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프로젝트>는 상영 중이던 26개 메가박스 개봉관에서 내려지게 됐다. 상업적으로도 충분히 흥행에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었던 것.

 

(사진출처 :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

이렇게 된 것에 대해 메가박스 측에 의하면 ‘일부 단체의 강한 항의 및 시위에 대한 예고로 관람객 간 현장 충돌이 예상돼 일반 관객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상영 취소는 배급사와 협의 하에 이뤄졌다고 말했지만 구체적인 협박 내용 등에 대해서는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영화를 기획 제작한 정지영 감독은 메가박스의 일련의 조치들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첫째, 일부 단체가 압력을 행사했다고 해도 즉각 영화 상영을 취소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상식적인 행동은 그 압력을 행사한 단체를 오히려 고발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지당한 말이다.

 

둘째, 제작 배급사와 협의 하에 상영 취소가 이뤄졌다고 발표했지만 정지영 감독측에서는 그 어떤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멀티플렉스 체인 영화관 중에서 상영관을 열어준 메가박스에 고마운 마음까지 갖고 있었다는 것. 이런 상황에 아무런 협의 없이 이뤄진 메가박스의 상영 취소 조치가 단순히 일부 단체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건 역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셋째, 왜 이런 사상 초유의 결정을 내리는 일에 메가박스측은 그 단체가 어디인지 또 그 단체가 한 협박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느냐는 점이다. 만일 이것을 밝히지 않는다면 메가박스가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뒤집어쓸 위험도 있다. 이것은 대중들을 상대하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서는 치명적인 영업의 오점이 될 수 있다. 영화관이 가진 이미지는 그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천안함 프로젝트>는 이미 법원이 유족과 사회 일각에서 낸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영화다. 즉 사법부가 상영이 정당하다 판결한 영화가 일부 단체의 협박과 압력으로 뒤집혀진다는 것은 역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일부 단체의 힘이 사법부보다 더 크다는 얘기일까.

 

영화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이런 식의 영화 상영을 둘러싼 잡음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촌스러운가를 말해준다. TV라면 모를까 영화관은 각자 선택에 따라 돈을 내고 보는 곳이 아닌가. 즉 제 아무리 소수의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또 어떤 사안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는 주어져야 한다.

 

9.11 테러를 음모론적인 시각으로 다루며 부시 정부를 맹공격했던 마이클 무어의 다큐 영화 <화씨 911>은 그 누구의 제동도 받지 않고 상영되었고 평단과 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이라크 참전 유가족들에게는 민감한 문제일 수 있었지만 표현의 자유에 있어서 그들은 관대했다. 심지어 지난 미국 대선 때는 오바마 행정부를 비난하는 <2016 오바마의 미국>이라는 다큐 영화가 개봉되었고 흥행에도 성공했지만 이 영화의 상영을 제지하려는 움직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영화는 영화고 표현은 표현이며 정치는 정치라는 쿨한 이런 면모는 실로 부럽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영화 한 편 보는 게 실로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영화가 정치나 이념적인 이유로 상영 금지에 휘말리기도 하고 심지어 상영되던 영화가 일부 단체의 협박에 의해 내려지기도 한다. 그저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와도 진보냐 보수냐의 편 가르기의 시선을 느끼는 게 우리네 사회의 현실이다.

 

이것은 영화 한 편의 힘이 그렇게 대단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런 영화 한 편에도 화들짝 긴장하는 그 무언가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반증일까.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천안함을 둘러싼 공방들이 환기시키는 미스테리만큼, <천안함 프로젝트>라는 영화 상영을 둘러싼 미스테리 또한 증폭되고 있다. 실로 안타깝고 촌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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