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 스트리트>, 존 카니의 음악영화는 늘 옳

 

<싱 스트리트>라는 영화에 있어서 존 카니 감독이라는 존재감은 가히 압도적이다. 이미 <원스><비긴 어게인>으로 음악영화의 묘미를 관객들에게 전한 바 있는 감독이니 이번 <싱 스트리트>에 대한 기대감은 굳이 여러 이유를 댈 필요가 없을 게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역시 존 카니 감독의 음악영화는 늘 옳다는 만족감으로 돌아온다. <싱 스트리트>는 이전의 음악영화들이 준 감동 그 이상이다.

 

사진출처: 영화 <싱 스트리트>

<싱 스트리트>는 시간을 80년대로 되돌렸다. 사실 이 영화의 정서를 만들어내는 당대의 아하, 듀란듀란, 홀 앤 오츠 등의 곡만으로도 어쩌면 반색하는 관객들이 있을 법 하다. 그저 음악이 아니라 어떤 스피릿(Sprit)’이 느껴지던 그 때의 음악들. 지금 보면 웃음이 빵 터지는 뽕 들어간 의상과 폭탄 머리지만 그것이 하나의 시대 정서로까지 느껴지는 그 때의 아티스트들과, 그들을 흉내 내면서 스스로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보이 밴드 싱스트리트의 매력이라니.

 

존 카니 감독은 역시 음악이 어떤 순간 우리를 매혹시키는 지 정확히 알고 있다. 85년 더블린. 경제상황이 어려워진 현실 때문에 학비가 싼 싱스트리트로 전학 온 코너(퍼디아 월시-필로)가 라피나(루시 보인턴)라는 뮤즈를 만나게 되면서 밴드를 하게 되면서 성장해가는 이야기. 거의 음치에 가깝게 노래하던 코너가 사랑을 알게 되면서 그 마음을 담아 가사를 쓰고 거기에 밴드의 만능 악기 연주자인 에이먼(마크 맥케나)의 도움을 받아 곡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신비로울 정도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음악은 지독한 현실을 뚫고 더 아름답게 피어난다. 더블린의 어두운 경제, 지독한 현실 속에서 꿈을 포기한 채 버텨내는 삶을 살아가는 그들이다. 부모로부터 학대받는 아이, 알코올 중독 때문에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둔 미래의 음악가, 부모가 없는 편이 오히려 낫다며 항상 그곳으로부터 탈출하려 하는 청춘들... 그들의 고뇌와 방황은 고스란히 음악으로 승화된다.

 

코너의 음악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건 그것이 기술적으로 기교적으로 완벽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거칠지만 그 안에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담아내고, 그것을 음악으로 당당하게 전하는 그 모습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음악은 완전히 새롭게 들린다. 존 카니 감독은 바로 이 음악이 가진 마법적인 순간이 그 음악 자체의 소리가 아니라 거기 담겨진 음악을 만든 이들의 진심이라는 걸 영화를 통해 말해주고 있는 듯 보인다.

 

<비긴 어게인>을 통해 깊은 감동을 받았던 관객이라면 <싱 스트리트> 역시 충분히 만족할만한 영화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음악의 본질적인 면들을 훨씬 잘 드러냈다는 점에서 <싱 스트리트>는 존 카니가 만든 음악영화들의 근간을 보여줬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게다. 음악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음악의 마법 같은 탄생 과정과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그 과정까지를 담아낸 이야기는 영화를 보고난 뒤에도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코너가 그저 그런 아이에서 차츰 아티스트가 되어가는 과정은 이 아픈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하는 영화의 메시지로 승화된다. “너는 파괴할 줄만 알지. 뭔가 만들어낼 줄은 모르잖아.” 집에서 학대받으며 자라 학교에서 폭력을 일삼는 친구에게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이렇게 말하는 코너의 모습은 예술이 어떻게 그들에게 구원이 되어주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부분은 80년대 더블린이라는 곳에서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깊은 감흥을 주는 이유다. 코너와 그가 만든 싱스트리트 밴드의 성장기는 지금 우리의 청춘에게는 큰 용기와 위안으로 다가올 만하다

최고였던 <응팔>, 남편 찾기는 결국 독이 됐다

 

도대체 왜 이런 아쉬운 결말을 맺게 된 것일까. tvN <응답하라 1988>18회까지 모두가 최고의 드라마라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가족드라마로서 최근 몇 년 동안 <응답하라 1988>만큼의 성취를 보여준 드라마는 없었다. 지상파의 가족드라마들과 비교해보라. 늘 비슷비슷한 패턴에 묶여 어딘지 식상해지거나, 패턴을 벗어나려 자극적인 갈등만을 보여주는 막장이거나. 그것이 작금의 지상파 가족드라마의 현실이 아니던가.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응답하라 1988>은 지금까지 안이하게 제작되어 왔던 가족드라마도 다른 방식으로 다른 스토리텔링으로 엮으면 참신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80년대의 추억과 감성, 가족 이기주의가 아니라 이웃 가족들이 한 가족처럼 지내는 공동체적인 정, 부모 자식 간에 세대 갈등보다는 소통을 보여주었던 것이 <응답하라 1988>이라는 가족드라마였다. 어딘지 가족드라마라고 하면 식상해 보이는 느낌들을 이 드라마는 경쾌한 구성과 연출로 세련되게 만들었다.

 

이것은 <응답하라 1988>이 평균시청률 17.6%(닐슨 코리아)라는 케이블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낼 수 있었던 이유였다. 가족드라마답게 중년 시청층에서부터 젊은 세대들까지 저마다의 소구점들을 찾을 수 있는 드라마가 바로 <응답하라 1988>이었기 때문이다. 성동일과 김성균, 최무성, 류재명으로 대변되는 아버지 세대를 위한 헌사가 있었고, 라미란과 이일화, 김선영으로 대변되는 어머니 세대를 위한 헌사도 있었으며, 당대를 살았던 청춘들을 통해 지금의 젊은 세대들과의 소통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기적 같은 시청률과 화제성이 가능했을 게다.

 

하지만 재미 요소로서 빼놓을 수 없다던 남편 찾기는 결국 독이 되어 돌아왔다. 애초에 신원호 PD<응답하라 1988>는 가족의 이야기를 담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지금껏 <응답하라> 시리즈가 빼놓지 않고 해왔던 남편 찾기콘셉트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재미 요소라고는 해도 이만큼 시청자들의 마음을 빼앗는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환(류준열)과 택이(박보검)를 사이에 두고 어느 쪽이 덕선(혜리)의 남편인가에 대한 궁금증은 과열 양상을 보일 정도로 뜨거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어남류(어차피 남편은 류준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드라마 초반부터 정환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어차피라는 표현 속에는 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일찌감치 덕선의 미래 남편으로 그를 점찍게 했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다.

 

그런데 후반부로 가면서 택이가 점점 전면으로 나오면서 멜로의 흐름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혹남택(혹시 남편은 택이)’라는 말이 나오더니 나중에는 어남택(어쩌면 남편은 택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혹시어쩌면이라는 표현 속에는 택이에 대한 기대감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환이 미래 남편이 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한 주를 쉬고 돌아온 19회에서 결국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물론 사람의 관계란 알 수 없는 것이고 어떻게 변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의 관계란 그렇게 마음대로 변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작품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들과의 공감대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응답하라 1988>이 해피엔딩이 아니라 새드엔딩으로 갈 것이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그동안 가슴앓이를 줄곧 해온 정환이 그 주인공이 아니고, 늘 보살핌을 받았던 택이가 주인공이라는 건 시청자들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가족드라마로서의 <응답하라 1988>은 더할 나위 없는 드라마로서 해피엔딩을 보여줬다. 하지만 멜로드라마로서의 <응답하라 1988>은 아쉬움이 남는 새드엔딩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택이 입장에서는 해피엔딩일 수 있으나, 줄곧 시청자들의 감정 선은 정환에게 맞춰줘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정환이 왜 그렇게 선선히 물러났는가에 대한 이유라도 밝혀주길 바라던 시청자들은 그것조차 사라진 마지막회에서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드라마였던 <응답하라 1988>. 어쩌다 이런 아쉬운 결말에 이른 것일까.



<응팔>의 가장 강력한 판타지, 쌍문동 골목

 

우리에게 골목이란 어떤 공간인가. 골목이 존재하려면 일단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집과 집들이 이어져 다닥다닥 붙어있어야 하고, 그렇게 이어진 집들이 두 줄 이상 있어서 그 사이에 공유공간을 두고 있어야 한다. 바로 그 공유공간이 다름 아닌 골목이다. 골목은 그래서 집과 집 사이를 수평적으로 연결해주는 기능을 한다.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아마도 80년대를 살았던 이들이라면 방과 후 집에다 가방을 던져놓고 그 골목으로 뛰쳐나온 동네 아이들이 함께 다방구 같은 놀이를 했던 걸 기억할 게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골목에서 함께 놀던 아이들은 나이 들어 학교가 달라져도 여전히 그 골목을 매개로 친구이자 이웃처럼 지내기도 했다.

 

어디 아이들뿐인가. 저녁 준비 하다 양념이 미처 떨어진 걸 깜박했다 치면 아이들 시켜 이웃집에서 빌려오는 건 일쑤고, 때때로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마치 제 자식 문제나 되는 듯 이웃들이 함께 걱정해주기도 했다. 공간은 사람이 점유하기 마련이지만 그 공간은 거기 점유한 사람들의 일상을 규정하기도 한다.

 

알다시피 80년대 이후 아파트들이 도처에 들어서고 부동산 과열로 인해 그것이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라 사야하는 공간으로 바뀌어나가면서 골목이라는 공간은 점점 사라져갔다. 수평적 공간을 이어주던 골목 대신, 어느 곳에 있는 어느 아파트 몇 평이 그 사람의 지위를 표징하는 수직적 지표가 되는 사회의 도래.

 

<응답하라1988>이라는 드라마에서 가장 큰 판타지는 이렇게 사라져가는 골목이 아닐까. 이 드라마가 특이한 건 대단히 큰 사건을 다루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산타클로스를 믿는 한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온 이웃들이 반상회를 거듭하고 함께 얼음으로 된 눈사람을 만드는 그런 것이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물론 인물들의 끈끈함이 있지만 친구들이 함께 모여 마니또를 하고 어른들은 비오는 날 소주 한 잔을 기울이는 그런 장면들이 대단한 사건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신 이 드라마는 그들의 아주 일상적이고 소소한 일들을 툭툭 던져 놓는다. 이를테면 선우(고경표)가 팔목이 안 좋다는 엄마 대신 병뚜껑을 따주는 장면을 옆에서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는 라미란의 시선 같은 것이나, 엄마 없이 자라온 택이(박보검)에게 한없는 미안함을 소주 한 잔으로 토로하는 택이 아빠(최무성)의 이야기를 앞에 들어주며 세상에 택이 아빠 같은 사람이 어딨냐고 얘기해주는 선우 엄마(김선영)의 뭉클한 시선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선하고 착하며 타인을 배려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로는 함께 모여 한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는 이웃들이 있는 곳. <응답하라1988>의 골목은 그래서 한참을 보다보면 그런 곳에서 살고픈 마음이 새록새록 들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저런 이웃이 있고 저런 친구들이 있고 저런 언니와 누나와 동생과 형들이 있는 곳이라면 얼마나 사는 맛이 날 것인가.

 

이 판타지를 <응답하라1988>은 쌍문동 골목이라는 공간 안에 채워 넣는다. 물론 그것은 너무나 이상적이라 현실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복고라는 것은 결국 기억의 왜곡을 통해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그러니 이미 싹 다 밀어져 빌딩과 아파트가 세워진 곳에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골목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일 게다. 우리 눈앞에서는 사라졌지만 마음 속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골목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그것이 <응답하라1988>의 가장 강력한 판타지가 아닐까.



<응팔>, 무엇이 80년대까지 우리를 되돌렸나

 

도대체 <응답하라1988>의 무엇이 우리를 그 시대로 눈 돌리게 했을까. 97년과 94년이라는 시점과 88년이란 시점은 사뭇 다르다. 많은 이들이 1988년이라는 시점에 의구심을 갖게 된 건 그럴만한 일이다. 97년과 94년은 그나마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익숙할 수 있는 시대다. 97년을 기점으로 디지털문화, 팬 문화가 시작됐고, 무엇보다 IMF 이후의 장기불황이 이어져왔기 때문에 당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도 그 기점이 흥미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하지만 1988년은 다르다. 80년대 문화를 이해하는 이른바 386세대들에게는 아련한 향수지만 젊은 세대들과 그것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애매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우려가 기우였다는 것이 <응답하라1988> 2회만에 증명되었다. 첫 회에 평균시청률 6%를 간단히 넘긴 이 작품은 2회에는 7.4%(닐슨 코리아) 시청률을 기록했다. 고무적인 건 10대부터 50대까지 전 연령층에 고루 소구하는 시청률 분포를 보였다는 점이다. 무엇이 이런 힘을 발휘하게 했을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주효했던 건 신원호 PD가 왜 굳이 1988년까지 시간을 되돌린 것인가에 대한 이유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 <응답하라1988>은 신원호 PD의 말대로 가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가족의 모습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엄마가 없는 바둑천재 택(박보검)이 바둑대회 우승을 하자 이웃인 라미란의 가족이 그걸 축하해주기 위해 비빔국수 같은 스파게티를 나눠먹는 풍경이 그 시대의 가족이다. 갑자기 귀가한 남편의 밥 한 공기를 빌릴라 치면 각자의 집에서 저녁에 만든 반찬이 이웃으로 배달(?)되어 결국은 비슷비슷한 저녁을 먹는 이웃이라니.

 

이웃집 딸이 88올림픽 피켓걸로 나온다고 하면 마치 자기 딸인 양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를 해주는 그런 풍경을 지금 우리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학교 점심시간이면 서로가 싸온 반찬을 꺼내놓고 친구들끼리 함께 둘러앉아 먹던 그런 풍경. 맛없는 도시락이라도 애써 싸준 엄마가 미안해 귀갓길에 남은 반찬을 다 먹는 그 따뜻한 마음. 골목길 한 켠에 놓여진 평상에서 수위 높은 부부생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마치 자매들처럼 환한 웃음을 채워놓는 이웃들.

 

876.10 이후 6.29 선언이 이어지고 그해 말에 치러진 대선이 직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했던 그 시점부터 198888올림픽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대책 없는 낙관론 속에 있었다. 하지만 <응답하라 1997>이 보여줬던 것처럼 88년부터 97년 사이에 있었던 낙관론이 실로 대책 없는 거품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도시는 재개발되었고 다닥다닥 붙어 있던 집들은 아파트로 재정비되었다. 정치적 이슈들을 저 경제논리 속에 묻혀져 갔고 세계화를 부르짖던 기업들은 대마불사를 꿈꿨지만 결국은 무너져버렸다.

 

88년부터 97년 사이의 10년은 그래서 세계로 뻗어나간 경제 성장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허물어진 10년이 되었다. 우리는 번지르르한 아파트들이 세워진 그 10년 사이 많은 걸 잃어버렸고 결국은 그것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IMF를 통해 확인했으며 그 여파를 지금껏 겪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신원호 PD가 왜 굳이 1988년까지 시간을 되돌린 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대책 없는 낙관론으로 모든 것이 뻥튀기되기 직전 실로 진솔했던 우리네 삶에 대한 그리움. 부유하진 않았어도 많은 걸 갖고 있었던 그 시절이 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야 비로소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응답하라1988>은 지금의 자극적인 삶을 담아내는 살풍경한 드라마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어찌 보면 너무 밋밋하고 소소한 느낌마저 갖게 된다. 거품 없는 세상의 진짜 사람 간의 정과 삶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다. 88년을 경험한 세대든, 아니면 그걸 경험한 적 없는 그 이후의 젊은 세대든 이 드라마에 막연히 끌리는 이유는. 경제적 수치는 올라갔다고 하지만 너무나 많은 걸 잃어버린 채 각박해진 우리네 현재의 삶. 그것이 88년의 한 골목이웃들에게서 벌어지는 소소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하는 힘이다.



<픽셀>, 덕후도 일반인도 재밌어질 수 있었던 까닭

 

<픽셀>80년대 아케이드 게임에 푹 빠졌던 이들에게는 대단히 특별한 영화다. 그들은 PC 게임 이전, 오락실에서 동전을 넣어가며 했던 갤러그나 동키콩, 팩맨을 기억할 것이다. 50원 짜리 동전을 집어넣고 한 시간 넘게 게임을 하면 마치 구경이라도 난 듯 아이들이 모여 감탄사를 흘리고, 주인아저씨는 동전을 되돌려주며 다신 오지 말라고 했던 그 기억. <픽셀>은 그 기억을 회고하는 것을 넘어서 그 게임 속으로 들어가는 영화다. 어찌 열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진:영화<픽셀>

물론 이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다. 홍보용 영상을 보면 마치 <인디펜던스 데이>같은 외계인 침공의 액션 블록버스터처럼 오인될 소지가 있다. 만일 그런 영화를 기대했다면 <픽셀>은 실망감만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80년대 아케이드 게임의 감성을 자극하는 가벼운 코미디 영화라고 본다면 빵빵 터지는 웃음 코드와 함께 꽤 유쾌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물론 <픽셀>이 그리고 상상하는 세계는 꽤 철학적이다. 현실 세계로 게임 캐릭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 캐릭터들에 의해 도시가 파괴된다는 이야기는 얼토당토않은 유치한 상상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거기에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져가는 작금의 디지털 세계의 단면이 들어가 있다. 이미 현실 위에 가상의 이모티콘과 표식들을 집어넣는 증강현실은 점점 우리의 실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가상과 현실의 차이는 진짜냐 가짜냐 같은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실제에 가까운가 아닌가 하는 양적인 차이(픽셀의 차이)라고 얘기한 빌렘 플루서의 이야기를 <픽셀>은 농담처럼 던지고 있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픽셀>이 굉장히 무거운 주제를 메시지로 던지는 영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이러한 가상과 현실에 금을 긋고 있는 관객들에게 그걸 사정없이 깨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코미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게 이 영화의 묘미다. 즉 팩맨이 도시를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대통령서부터 국방부 장관까지 심각해지는 상황들이나, 무수한 훈련으로 단련된 군인들이 지네게임의 지네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것이 어쩔 줄 몰라 할 때, 이 한때는 아케이드 덕후로 살다 이제는 루저가 된 이들이 광선총으로 지네들을 일망타진하는 상황이 그렇다. 우습지 않은가. 한 도시와 국가의 미래가 게임 덕후이자 루저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이.

 

이것은 게임 같은 것을 가상으로 여기며 쓸데없는 짓으로 치부해온 기성세대들의 뒤통수를 때린다. 가상이 더 이상 가상이 아니라 현실로 들어왔을 때 그 달라진 현실의 영웅은 다름 아닌 가상에서의 영웅들이다. 게임을 좋아하고, 인터넷에 푹 빠져 현실보다 더 그 가상의 세계가 익숙한 중년들은 물론이고 디지털 네이티브인 젊은 세대들이라면 이 이야기가 주는 풍자적인 웃음이 통쾌함마저 줄 수 있는 이유다.

 

<픽셀>은 그러나 굳이 게임 덕후가 아니라도 즐거울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 틀을 갖고 있다. 즉 루저들의 성공기가 그것이다. 한때는 잘 나갔었지만 성장하며 변방으로 밀려난 그들이 어떤 계기를 맞아 영웅이 된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즉 루저가 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계기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

 

또한 이 영화는 아케이드 게임을 즐겼던 중년들이 이제 앱 게임에 빠져있는 아이들과 함께 보며 어떤 덕후적(?)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픽셀>은 한때는 모두가 그랬을 덕후들을 추억하는 영화면서 동시에 어딘지 소외되어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을 한바탕 웃게 해주는 영화다



'힐러', 지창욱의 사랑, 유지태의 성장

 

<힐러>에 출연하는 박상원은 과거 송지나 작가의 <모래시계>에서 강우석 검사로 나왔었다. <모래시계>80년대 격동의 시절을 태수, 혜린, 우석 같은 젊은이들의 사랑과 우정으로 그려내면서 당시로서는 귀가시계라고 불릴 만큼 사랑받았던 드라마다.

 

'힐러(사진출처:KBS)'

그 때의 번듯했던 박상원은 그러나 <힐러>에서는 김문식이라는 악역이다. 겉보기엔 성공한 사업가 정도로 보이지만 그는 지금의 아내를 얻기 위해 과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그 아내의 아이를 내다버린 것. 그 때의 고통으로 심적 트라우마를 갖고 성장한 영신(박민영)을 김문식의 동생인 김문호(유지태)가 찾아내고 보호하려 한다. 그 사이에 김문호가 영신을 찾고 보호하기 위해 고용한 힐러 정후(지창욱)는 그녀에게 점점 빠져든다.

 

<힐러>에는 80년대 독재 타도를 외치던 젊은이들의 과거가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 성장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간다. 과거 벌어졌던 어떤 사건이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발목을 쥐고 있다. 힐러 정후나 영신은 모두 과거의 어른들에게서 버려져 외롭게 자라온 청춘들이다.

 

드라마의 과거가 되고 있는 80년대 젊은이들의 이야기에서 언뜻 과거 <모래시계>의 뉘앙스가 풍겨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그 때 그렇게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이상을 외치던 젊은이들은 이제 나이 들었다. 그 중에는 김문식처럼 당시 그토록 혐오했던 권력의 심층부에 들어와 있는 인물도 있다. <모래시계>의 박상원이 <힐러>의 박상원으로 나이든 모습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캐스팅이 아닌가 생각된다.

 

80년대의 정서를 살짝 담고 있기 때문인지 드라마의 구도 역시 익숙한 옛 구도를 재연하는 느낌을 준다. 사랑하게 됐지만 돈 받고 의뢰받아 접근하게 된 힐러 정후의 사랑은 그래서 <모래시계>의 보디가드로 이름 높였던 이정재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숨어서 사랑하는 것. 이것은 확실히 요즘처럼 대놓고 키스 먼저 하는 사랑법과는 사뭇 다르다.

 

정후가 <힐러>의 사랑법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김문호는 <힐러>의 여주인공인 영신의 성장을 이뤄주는 인물이다. 일과 사랑은 역시 여성들에게는 판타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김문호를 통해 한 단계씩 성장해가면서 정후와 조금씩 사랑을 알아가는 영신은 여성 시청자들의 판타지를 건드린다.

 

조금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가 반복되어 나오는 듯한 느낌과, 요즘 숨 가쁘게 몰아치는 드라마들과는 달리 조금은 유유자적하는 한가로움이 단점을 다가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그 80년대식 정서를 여전히 담고 있다는 점이 은근한 매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슈퍼맨적인 힐러 설정과 권력자들의 비리를 파헤치는 언론의 이야기는 마치 <인간시장>의 장총찬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물론 <힐러>는 요즘 드라마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도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죽음의 위협까지 겪은 인물이 한가롭게 <영웅본색>의 한 시퀀스처럼 공중전화 부스에서 남자와 달달한 전화통화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낯설게 다가오는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금은 구닥다리의 정서가 주는 따뜻함과 편안함이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힐러>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현재의 팍팍한 삶의 치유로서 과거적인 정서를 끌어오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응답3> 제작 가능성과 당면한 문제들

 

신원호 PD는 과연 <응답하라> 시즌3를 제작할 것인가. <응답하라> 시리즈에 열광을 보냈던 시청자라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이 관심을 증명이라도 하듯 최근 보조작가를 모집한다는 공고로 인해 <응답하라> 시즌3 제작이 마치 정해진 것 같은 뉘앙스의 기사가 나오자 대중들은 반색했다. 하지만 곧바로 신원호 PD는 이를 부인했다. 새로운 작품을 준비 중인 건 맞지만 그것이 <응답하라> 시즌3일지 아닐지는 아직 모른다는 것이다.

 

사진출처:tvN

왜 신원호 PD는 부인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PD라면 새로운 콘텐츠에 도전해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연거푸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거기에 안주하고 싶은 PD는 아마 없을 터다. 게다가 이 시리즈의 특성상 특정 연도를 소재로 해야 하는데 19971994만큼 확실한 이야깃거리를 가져올 수 있는 연도가 과연 있는가 하는 점도 미지수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가능했던 것은 참여한 이우정 작가를 비롯한 후배작가들이나 신원호 PD 당사자들이 대학시절 겪었던 실제 경험이 그 속에 자연스럽게 묻어있기 때문이다. 예능 출신 작가와 PD가 선뜻 드라마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시기에 대해 분명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다. 하지만 다른 연도는 어떨까. 이를테면 민주화 운동이 있었던 80년대의 이야기나 2002년 같은 월드컵 시즌의 이야기는 소재로는 괜찮지만 이들의 경험이 거기서 어떤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또 시즌3를 제작한다고 해도 중요한 당면과제는 이전 시즌과는 다른 느낌을 줘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다. 시즌2촌놈들의 전성시대를 전면에 내세워 시즌1과 다른 느낌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즌1에 이어 시즌2로도 이어지는 향후 배우자 찾기 같은 장치는 시즌3에서 또 사용한다면 식상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당면과제들이 남아 있어 시즌3가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걸 예감케 하면서도 그 제작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응답하라> 시리즈가 버리기에는 아까운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응답하라> 시즌3는 아마 제작된다면 그 성취와 상관없이 마케팅적으로는 이미 성공한 프로그램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tvN, 아니 나아가 CJ라는 회사 차원에서 보면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카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신원호 PD도 수긍하는 입장이다. PD이기에 앞서 한 회사의 직장인으로서 그는 회사의 입장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굳이 시즌3를 거부하고 다른 작품을 시도했다가 실패할 경우 이중으로 오게 될 부담감도 결코 적지 않을 터다. 그러니 신원호 PD 입장에서는 열린 마음으로 <응답하라> 시즌3를 포함한 다양한 아이디어와 의견을 끌어 모으는 상황이다. 그러니 그 어떤 섣부른 단정도 오히려 그에게는 부담감으로 작용할 것이다.

 

꿈을 위해 현재의 작은 행복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신원호 PD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최근 청춘은 무조건 아파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에 대한 반론일 것이다. 하지만 이 안에도 그의 지극히 현실적인 성향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런 성향은 그가 지금껏 그 자리에 오기까지의 행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영화감독을 꿈꾸었지만 방송국에 들어와 본인이 원하지 않던 예능 PD로 시작해 성공하고 드라마 PD로서도 입지를 마련했다. 최근에는 영화판에서도 심심찮은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현실적인 성향을 통해 봐도 <응답하라> 시즌3의 제작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이 될 지 아니면 다른 작품을 한 연후에 제작될 지는 알 수 없다. 또 그것이 반드시 신원호 PD가 전담해서 해야 할 작품인지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그는 필자에게 늘 그렇듯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모든 게 열려진 상태에서의 기획회의를 마치 휴식처럼 즐기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바로 그런 열린 자세에서 <응답하라> 시리즈가 탄생했듯이.

<26년>과 <남영동>, 영화가 해줄 수 있는 것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영화는 과연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무고한 시민이 정부에 의해 고문당하고 심지어 백주 대낮에 무자비하게 학살당하는 일이 자행되었던 80년대. 영화는 그 시대를 불러와 무엇을 환기시킬 수 있을까. <26년>과 <남영동 1985>는 그 시대의 상처를 애써 들춰낸다. 모든 게 시간에 의해 덮여져버린 듯한 그 아픔과 고통을 굳이 2013년을 사는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놓는다.

 

사진출처: 영화 '26년'

영화는 고통스럽다. <남영동 1985>는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 불법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2일 간 고문을 당한 사실을 다룬다. <26년>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잔인하게 희생당한 유족들이 모여 당시 모든 걸 진두지휘했던 ‘그 사람’을 단죄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적으로 각색된 부분은 있지만 이 두 영화의 근거로 제시되는 상처는 사실 그대로다.

 

그런데 특이한 건 이 두 영화 모두 그다지 시원스런 복수극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남영동 1985>는 시종일관 고문에 시달리다 결국은 살려 달라 애원하고는 거짓말을 한 자신을 탓하며 그 진술을 번복하고 또 고문을 당하는 한 남자를 바라봐야 한다. 역사가 증언하듯 그 남자는 후에 존경받는 정치인이 되지만 그를 고문한 사내는 교도소에 수감된다. 상황이 역전되어 두 남자가 만나게 되지만 그렇다고 고문당했던 남자의 토로나 시원스런 주먹다짐 하나 나오지 않는다.

 

<26년>도 마찬가지다. 광주를 겪으며 살아가는 유족들의 아픔은 끝없이 반복되어 보여지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경호를 받으며 교통신호등 하나 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복수의 순간 앞에서도 진심을 담은 사죄를 요구하는 이 유족들의 총구는 심하게 흔들린다. 결국 영화는 차가운 총성과 함께 암전 처리되고 여전히 경호를 받고 살아가는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끝을 맺는다. 답답한 결말이다.

 

모두 80년대의 아픔을 다뤘고, 또 죽이고 싶은 당대의 가해자들을 세우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두 영화의 연출은 상이한 차이점을 보인다. <남영동 1985>는 극적인 스토리 전개 자체를 극도로 자제한 인상이 강하다. 고문 장면에 있어서 더 가학적인 일들이 당시 대공분실 안에서 벌어졌지만 영화는 그런 부분들조차 단순화해서 보여준다. 당연한 선택이다. 이 영화는 고문 그 자체를 목적으로 다루는 영화가 아니니까.

 

반면 <26년>은 상당히 극화된 장르적 스토리를 갖고 있다. 거기에는 조폭의 이야기도 들어있고 스나이퍼의 이야기도 들어있으며 형사물의 클리쉐도 들어가 있다. 실제 1980년 광주의 그날은 애니메이션으로 처리되어 있고, 그 후에 상상으로 재구성된 26년의 이야기는 실사다. 거짓말 같은 현실과 진짜 같은 가상이다. 이 연출 역시 당연해 보인다. <26년>은 그 날 이후 지워질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이들의 염원이자 갈망이 담겨진 상상의 소산이니 말이다.

 

<남영동 1985>와 <26년> 그 어디에도 속 시원한 복수극은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당대의 아픔이 ‘살아남은 자들’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제공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대신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그 지독한 아픔이며, 여전히 가시지 않는 고통과 부채감이다. 그래서 보기 힘겨운 그 장면들을 꾸역꾸역 바라봐야 한다. 그 미진한 아픔을 나눠 가진 채 영화관을 나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이 두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영화관 안에서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영화관 밖에서의 ‘선택’이라는 것을.


'써니'(사진출처:토일렛픽쳐스)

우리에게 80년대란 무엇일까. 매캐한 최루탄 냄새와 일렬로 도열해 있는 전경들. 그들과 대치해 있는 학생들, 시민들. 일촉즉발의 상황. 그리고 급기야 뒤엉켜버리는 그들. 수배되어 쫓기는 대학생과 그 와중에도 안타깝게 싹트던 청춘의 사랑.... 이들이 그려내는 풍경들일까. 강압적으로 통제된 세계 속에서 저마다 숨통이라도 트기 위해 어두운 지하 카페에서 술과 음악에 빠져들거나, 혹은 억압에 반항하듯 밤새도록 방탕(?)한 춤을 추었던 기억일까. 광주 민주화 운동을 초반에 겪은 80년대는 시대적으로만 보면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에게는 돌아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참담하기까지 한.

그러나 이것은 사진처럼 찍혀진 현실이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기억을 통과해 덧붙여지고 각색된 추억의 그림이 아니다. 기억이란 우리가 겪었던 그 힘겨운 삶과 고통스런 시간들마저 달콤한 추억으로 바꾸어놓는 기묘한 생물이 아닌가.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찾아간 나이든 중년이 막상 그 첫사랑을 대하고 추억을 늘어놓자, 상대방이 그건 내 얘기가 아니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인간의 기억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왜곡현상을 잘 말해준다. 기억은 생존을 위해 우리의 기억을 바꾸고, 심지어는 지워버리기도 한다. 삶이 기억의 연속이라고 볼 때, 절대로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고통스런 기억은 삶 자체를 고행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의 기억은 이를 절묘하게도 바꿔버린다. 기억을 추억으로.

추억이 하나의 상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몇 년 전 광주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했던 '화려한 휴가'에서 전경들과 시민들의 긴장된 대치상황과 이어진 끔찍한 참상이 과거 그대로의 현실이라면, 영화 '써니'의 그것은 현재의 주인공에 의해 재구성되고 재해석된 추억이다. 그래서 전경들과 시민들의 대치상황 속에 배경음악으로 엉뚱하게도 Joy의 'Touch by touch'가 흘러나오고, 그 뒤엉킨 아비규환 속에 난데없는 써니파 7공주와 소녀시대파 7공주의 패싸움이 겹쳐지는 장면들이 가능해진다. 살벌했던 과거의 기억은 이 달콤한 시간의 왜곡을 거쳐 발랄한 추억이 된다. 80년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이 잿빛 기억의 시대를 순식간에 바꿔놓는 이 장면에서 터져 나오는 통쾌한 웃음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당시 청춘들의 숨통을 틔워주던 고고장에서 단골메뉴로 올라왔던 그 음악, 'Touch by touch'라니. '써니'가 위치한 유쾌한 지점은 바로 이 장면 속에 거의 모두 압축되어 있다.

영화는 현재 중년이 된 나미(유호정)가 여고시절 써니파 7공주의 리더였던 춘화(진희경)를 병원에서 만나면서 시작한다. 말기암인 춘화는 죽기 전에 써니파 7공주들이 보고 싶다 말하고 나미는 그녀들을 찾아 추억의 여행을 떠난다. 특별할 것 없는 뻔하디 뻔한 '영화는 사랑을 싣고'류의 스토리인 셈이다. 하지만 '써니'는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당대를 살아왔다면 겪었을 만한 공감대 가는 이야기들을 줄줄이 풀어놓는다. "설마 불치병은 아니겠지?"하는 물음에 "얼마 못산대."하는 드라마의 클리쉐 앞에 병실이 온통 뒤집어지는 풍경은 위안 없던 시절 드라마에 푹 빠져 살던 서민들의 씁쓸하지만 우스꽝스런 삶을 공감가게 포착하고, 패싸움에서 기가 눌리자 뒤돌아서며 괜스레 "젊음의 행진 보러 안가냐?"하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당대의 코드들이 우리의 추억을 자극한다.

특히 80년대라면 꼭 있었을 법한 캐릭터들은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이다. 늘 고등학교라면 존재하던 18대1의 신화로서 진덕여고 의리짱 춘화(강소라)가 있고, 외모에 집착하는 쌍꺼풀에 목숨 건 못난이 장미(김민영), 욕으로 싸우는 욕쟁이 진희(박진주), 문학소녀 금옥(남보라), 미스코리아를 꿈꾸는 복희(김보미) 그리고 누구나 꿈꾸었을 하이틴 잡지 표지모델 수지(민효린)가 있다. 영화는 이 어디선가 누구나 한번쯤 봤음직한 캐릭터들에, 당대의 코드들인 나이키, 교복자율화, '젊음의 행진'이나 '영11' 같은 TV 프로그램, 당대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소피 마르소 등등 추억의 그림들을 덧붙여 영화를 풍성하게 만든다. 이처럼 굳이 새로운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는 이 코드들만으로 관객들이 저마다 자신의 추억을 끄집어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써니'는 타자의 이야기에서 이제 관객들 자신의 이야기로 전화된다. 물론 추억이라는 필터를 낀 청춘의 달콤 상큼한 이야기로.

무엇보다 '써니'에 깔리는 음악은 이 영화가 전해주는 추억 불러내기 효과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Joy의 'Touch by touch'는 물론이고, 나미의 '빙글빙글'이나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보니엠의 ‘Sunny'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 또 소피 마르소가 주연했던 영화 '라붐'의 주제가로 리차드 샌더슨의 'Reality'가 이 영화를 오마주해 흘러나오는 장면은 '써니'라는 추억 열차를 타는 마법의 열쇠 역할을 한다. 음악만큼 즉각적으로 추억과 접점을 만들어주는 장르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음악은 또 얼마나 이성을 무장해제시키며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드는가.

입소문을 타고 점점 흥행을 향해 달려가는 '써니'의 성공은 추억이 어떻게 하나의 달콤한 상품으로 만들어지는가를 잘 보여준다. 굳이 어떤 특정한 스토리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그저 공감할 수 있는 소재와 아이디어를 던져주는 것만으로 추억은 저 스스로 상품을 구성해낸다. 즉 추억 상품은 물론 과거라는 부품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모든 게 만들어져 나오는 완제품이 아니라, 저마다 자기 것으로 재조립되는 조립품이란 얘기다. 또한 이 상품의 저변은 완제품일수록 줄어들고 조립품일수록 늘어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써니'는 이 저변을 넓히기 위해 심지어 '7공주'가 가질 수 있는 여성들만의 공감대라는 틀마저 깨버린다. 여성의 시선이 아니라 남녀를 떠난 인간이라는 보편적 시선을 담아놓은 것이다. 그래서 '써니'는 출연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여성이지만 남성들도 공감할 수 있는 추억 상품이 된다.

물론 추억 상품은 늘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지만, '써니'가 보여주는 것처럼 최근 들어 더 늘고 있는 추세다. 이것은 아마도 새로운 구매계층으로 중년층이 부각되고 있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세시봉' 열풍이 확인한 것처럼 이 시대의 중년층들은 각박한 청춘의 시기를 지나 중년에 접어들면서 이른바 '잃어버린 자신들의 문화 찾기'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런데 이 중년층은 세대적으로 보면 기묘한 위치에 서 있다. 개발시대를 살았던 장년층과는 달리 젊은 생각과 교류하려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추억상품에는 과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공존한다. 'UV신드롬 비긴즈'가 80년대 풍의 음악과 현재의 페이크 스토리 문화를 공존시키듯, '써니' 역시 추억과 현실을 동시에 병치해서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이 독특한 문화상품의 세대적 접점이 생겨난다. 과거의 세대에게는 향수를 주지만 현재의 세대에게는 '(과거와 접목된) 새로움'이 제공된다는 점이다. 기억의 재조립으로서의 추억은 그래서 세대를 뛰어넘는 폭넓은 타깃을 갖는 문화상품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추억의 트렌드가 상품으로서나 소구층으로서나 시사하는 바는 단지 대중문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대중문화에 부는 80년대 복고 트렌드, 그 이유

'써니'(사진출처:토일렛픽쳐스(주))

'과속스캔들'로 830만 관객을 기록했던 강형철 감독이 이번에는 '써니'로 일을 낼 모양이다. 벌써 2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써니'는 중년의 나이에 우연히 만나게 된 친구를 통해 여고시절 7공주로 지냈던 추억을 찾아가는 영화. 특히 80년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요소들이 곳곳에 가득 채워져 있다. 교복 자율화로 어딘지 촌스러워 보이는 옷차림에서부터 음악다방에서 차 마시며 음악 듣던 그런 풍경들, 또 '젊음의 행진', '영11' 같은 그 때를 떠올릴 수 있는 TV프로그램들은 물론이고, 그 때 최고의 스타였던 소피마르소를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관객들을 80년대의 추억으로 안내한다. 그 무엇보다 압권은 음악. Joy의 'Touch by touch'나 이 영화 제목이기도 한 보니엠의 ‘Sunny', 소피 마르소가 주연했던 영화 '라붐'의 주제가였던 리차드 샌더슨의 'Reality' 등이 OST로 등장해 당대의 추억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4월에 개봉했던 '위험한 상견례' 역시 80년대를 배경으로 다뤄 흥행에 성공한 영화. '위험한 상견례'는 사실 모두가 그렇게 흥행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작품이다. 하지만 막상 개봉하고 나니 4월 비수기 영화가에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 모은 최고의 영화가 되었다. 거기에는 역시 80년대 배경의 복고 코드가 자리한다. 경상도 출신 여자가 전라도 출신 남자와 만나 결혼에 성공하는 비교적 단순한 스토리지만, 지역감정은 물론이고, 프로야구 열풍, 롯데와 해태의 대결구도 등등 80년대 추억 코드들이 관객들을 사로잡으면서 흥행에 성공했다.

이러한 복고 분위기는 영화가만이 아니라 TV를 통해서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옛 노래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것도 그 대표적인 복고의 흐름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가 '나는 가수다'의 박정현과 '위대한 탄생'의 정희주에 의해 불려지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고, 변진섭의 '너에게로 또다시', 윤복희의 '여러분', 이선희의 '나 항상 그대를' 같은 노래들이 재발견되었다. 이른바 '과거 음악의 재발견'은 요즘 예능의 한 트렌드가 되었다. 한편 이제 곧 방영될 '불후의 명곡' 시즌2는 이런 옛 가수들의 노래를 현재의 아이돌들이 경연식으로 부른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개그맨 유세윤과 뮤지가 듀오로 부른 '이태원 프리덤'이 주목받고 있는데, 그 음악적인 코드 역시 80년대 디스코 풍을 그대로 담고 있다.

KBS에서 방영을 준비중인 중년판 '1박2일', '낭만을 부탁해'역시 복고 트렌드다. 이 7080 버라이어티에는 가수 전영록, 김정민, 배우 최수종, 개그맨 허경환, 정주리, KBS 가애란 아나운서 등 6명으로 구성된 '낭만원정대'가 출연하는데, 매주 특별한 주제로 1박2일 여행을 떠나는 과정을 담는다고 한다. 7080세대의 추억과 낭만이 서린 장소를 방문해 당시 유행하던 음악, 게임 등을 소개하고, 그 시절의 '로망'도 재연한다는 것.

그렇다면 도대체 왜 7080을 겨냥한 복고 트렌드가 주목받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무래도 현재 새로운 문화 구매층으로 등장하고 있는 중년세대들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이들이 향수할 수 있는 시대가 바로 80년대라는 것. 사실 이 중년세대들은 IMF를 겪으면서 어떤 문화 소비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최근 들어 자신들만의 문화를 찾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직장인 밴드 열풍이라든가, 인디문화부터 팬덤에까지 젊은 층의 문화에 동참하려는 모습들, 각종 아웃도어 활동을 통해 여가문화를 만들어가려는 움직임들이 그런 사례들. 이렇게 문화적인 욕구가 생겨나고 있는 중년세대들이 있기 때문에 대중문화 콘텐츠들도 이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복고 트렌드라고 해서 7080세대들만 향유하는 것은 아니다. 복고 콘텐츠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점에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지금의 관점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똑같은 노래라고 해도 지금의 가수들에 의해 재해석되는 과정을 거치면 그 향유하는 세대도 폭넓어지게 되기 마련. 즉 중년 세대들은 그 노래를 통해 과거 추억을 떠올리지만, 젊은 세대들은 그 자체를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즉 이러한 복고 콘텐츠의 또 다른 특징은 세대 통합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젊은 세대부터 나이든 세대까지 나란히 앉아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추억은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추억이 진짜 기억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추억이란 지금 현재 시점에서 되돌아본 과거이고, 그렇게 재구성된 과거를 말한다. 즉 추억은 고통스러운 현실조차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바꿔놓는 힘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추억 코드가 대중들을 사로잡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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