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이젠 <휴먼다큐사랑><눈물>시리즈도 못 보나

 

오랜만에 찾은 MBC 교양국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PD들은 의욕을 잃은 지 오래고 심지어 환멸이 느껴진다며 자청해 타 부서로 가는 이들까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정권서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행해진 MBC 사측의 시사교양에 대한 탄압은 이제 교양의 해체라는 막장에까지 이른 상황이기 때문이다. 교양 PD들에게서는 사측에 대한 분노를 넘은 체념을 느낄 수 있었고 향후 거취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사진출처:MBC

MBC의 교양국 축소는 최근 나온 조직개편안을 통해 이미 기정사실화되어가고 있다. 시사교양국을 시사제작국과 교양제작국으로 찢어놓은 뒤, 이제는 MBC 교양을 해체시키는 수순에 들어간 것. 이 조직개편안이 현실화되면 MBC의 다큐 프로그램은 사실상 외주제작으로 전환되고 교양국 PD들은 예능국으로 편입되게 된다. 결국 이렇게 되면 MBC 고유의 색깔을 내는 PD들의 교양 프로그램을 영영 볼 수 없게 된다.

 

한 때 언론의 기수로서 상징화되기도 했던 <PD수첩>이 그 존재감을 잃어버린 건 이미 오래 전이다. <시사매거진 2580>도 마찬가지다. <MBC 뉴스데스크>는 심지어 비난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토록 대중들을 주목시키던 MBC의 시사프로그램들이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되는 데는 단 4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결국 경영이 인사권에서부터 편성권을 휘둘러 제작을 바꿔놓은 것이다.

 

이제는 MBC의 교양 프로그램들이 그 차례를 맞고 있다. 한때 <MBC스페셜>이 금요일 밤 대중들의 시선을 잡아끌던 시절은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특별한 것들을 포착해내던 <MBC스페셜>만의 그 색깔은 사라져버렸고 대신 그 빈자리는 최근 <SBS스페셜>이 채워주는 형국이다.

 

또한 <MBC스페셜>이라는 중심으로부터 뻗어 나온 <북극의 눈물>, <아마존의 눈물>, <아프리카의 눈물> 그리고 <남극의 눈물>까지 이어진 일련의 눈물 시리즈, 해마다 대중들에게 감동의 시간을 제공했던 <휴먼다큐 사랑> 역시 그 존재감이 어느 새부턴가 점점 희석되어가고 있다. 당시 눈물 시리즈는 다큐로서는 이례적으로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냈던 효자상품이기도 했다. 그런 성과들이 깡그리 무시된 채 MBC 교양을 해체시키는 건 경영적으로 봐도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이런 난도질을 하는 것일까. 시사나 교양은 본 것을 그대로 전하고 그 의미를 찾아내는 일을 할 뿐이다. 거기에 왜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잣대를 씌워 사지를 잘라놓으려 한단 말인가. 이것은 단지 MBC의 시사교양의 문제만이 아니다. 결국 방송이란 그걸 바라보는 대중들의 눈과 귀를 대신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이건 대중들의 눈과 귀를 막는 일이기도 하다.

 

정직, 감봉, 징계, 강제전출. 이것이 지금 MBC 교양국에서 지난 몇 년 간 일어난 일들이다. 그리고 그 끝은 해체다. 과연 이래도 괜찮은 걸까. 모든 걸 양보하고라도 이것이 과연 MBC라는 방송국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일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김재철의 MBC, 그 잃어버린 3년의 의미

 

3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토록 공고하게 세워둔 MBC라는 방송사의 위상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것은. 그 중심에는 이명박 정권과 함께 낙하산 인사로 내려온 김재철 사장이 있다. 이전에는 MBC 사장이 도대체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면서 방송을 즐겼던 대중들도 이제 김재철 사장이 누구인지 알 정도로 그는 MBC 프로그램의 추락을 초래했다. 그 전까지는 잘 몰랐던 사장 한 명의 위력을 실감하던 시간이었다.

 

'뉴스데스크'(사진출처:MBC)

가장 큰 문제는 공정방송 회복을 위해 무려 170일 동안의 파업을 벌였지만, 이로 인해 2백여 명의 MBC직원이 해직되거나 징계되었다는 것이다. <PD수첩>의 최승호 PD, 박성제, 박성호 기자, 정영하 노조위원장, 이상호 기자 등 8명이 해고되었고, 파업 관련자들을 본래 직종과 무관한 부서로 전보 처리하는 등 보복성 인사와 징계가 이어졌다. 대중들에게 친숙했던 MBC의 얼굴들이 일거에 사라져버린 것. 서울남부지법은 이러한 전보 처리 등이 무효라는 결정을 내렸지만 아직까지 이들은 제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MBC의 얼굴들이 해고되거나 주변으로 밀려난 상황에서 방송 프로그램의 질적 저하는 당연할 수밖에 없다. 가장 눈에 띄게 망가진 것은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이다. MBC 하면 먼저 떠오르던 <뉴스데스크>나 <PD수첩>의 날선 비판의식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뉴스의 정부 편향성은 대중을 위한 뉴스가 아니라 정부를 위한 홍보에 머물렀고 당연히 시청자들은 채널을 돌렸다. <PD수첩>은 PD의 해고에 이어 작가 8명 전원이 해고당하고 대신 시용PD들이 배치되면서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100분 토론> 또한 손석희가 빠지면서 급격히 신뢰도가 떨어졌고 결국 대중들의 기억에서조차 멀어진 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전문 인력들이 빠져나가자 뉴스 프로그램의 방송 사고도 줄을 이었고 몇몇 아나운서들의 적절치 못한 발언과 실수로 연일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뉴스에 대한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 그저 시청률에 목매달면서 <뉴스데스크>를 8시 대로 옮긴 것은 MBC 전체 프로그램의 틀을 뒤흔들었다. 시간대를 옮겼지만 여전히 시청률은 지상파 방송3사 꼴찌의 수모를 피하지 못했고, 9시 대에 <구암 허준>이라는 일일사극 파격 편성 또한 그다지 시청률을 가져가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뉴스데스크>의 시간대 변경은 8시부터 10시까지 두 시간의 공백을 가져온 셈이다.

 

시청률에 대한 집착은 MBC 주말드라마의 막장으로 이어졌다. <메이퀸>은 아동학대에 가까운 자극적인 전개로 시작해 개연성 없는 인물들의 변화와 극악스러운 캐릭터들을 세움으로써 시청률을 가져갔지만 대중들의 냉랭한 비판을 받았고, 그 바톤을 이어받은 <백년의 유산> 또한 비상식적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등장해 막장 논란을 이어가고 있다. 오로지 시청률 지상주의가 가져온 MBC 드라마의 비극이다.

 

시청률 지상주의의 그림자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그대로 드리워졌다. 시청률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8년 장수한 예능 프로그램인 <놀러와>가 떠난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종영되었고, 그 자리를 채웠던 <배우들>이라는 토크쇼 역시 시청률 난항으로 갑작스런 폐지를 맞았다. 아예 이제 MBC는 월요일 저녁 예능 프로그램을 빼고 <MBC스페셜>을 편성함으로써 사실상 예능 포기선언을 한 셈이다.

 

이 월요일 저녁 시간대를 때우고 있는 <MBC스페셜>도 그 위상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것은 마찬가지다. 과거 참신한 기획으로 다큐프로그램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금요일 밤의 최강자로까지 자리했던 <MBC스페셜>은 끝없는 편성 변경으로 인해 한없이 망가져버렸다. 눈물 시리즈와 <휴먼다큐 사랑> 같은 좋은 아이템들이 즐비했던 <MBC스페셜>의 추락은 MBC의 교양 프로그램으로서는 뼈아픈 상처가 아닐 수 없다.

 

사장 한 사람의 전횡으로 인해 방송사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그것이 전체 프로그램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을 떨어뜨리는 그 일련의 과정이 지난 3년 동안 MBC에서 벌어진 일이다. 방송의 성패가 프로그램의 질만큼 대중들이 그 방송사를 바라보는 정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 3년이 준 뼈아픈 교훈이다. 해고 노동자 복직, 변방으로 밀려난 직원들의 원대복귀 등등 해야 할 일들은 산적해 있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김재철 사장이 물러난 자리를 누가 채우느냐는 문제다. 이 하나의 선택은 앞으로 MBC가 잃어버린 3년을 되돌려 다시 대중들을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대중들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인가를 가름하는 일이 될 것이다.

때론 고립을 즐기자

스토리스토리 2011.03.14 18:31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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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배령에 대한 첫번째 기억은 'MBC 스페셜'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카메라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그 프로그램은 우리가 평소에 발견하지 못하는 것들까지 세세하게 우리 앞에 던져 놓았다. '곰배령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그 다큐멘터리는 나를 단박에 매료시켰다. 그래서 나는 "우리 한 번 곰배령 가볼까?"하고 물었고 아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휴식년제에 들어간 곰배령은 사람들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만 그래도 가려면 갈 길은 있다. 그 해에는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가 곰배령 안에 사는 분의 이름을 가르쳐주면서 입구에서 그분을 만나러 왔다고 얘기하고 들어가라고 일러줬다. 우리 가족은 그 패스워드를 정확히 불러주었고, 그 입구를 막고 있는 관리인은 들어가라고 해주었다.

참 이런 자연이 없었다. 사람 발길이 없어서 그런지 모든 게 생생한 야생이었다. 산을 잘 오르지 않는 성격이지만 그래도 그 날은 꾸역꾸역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중간에 비가 내리는 바람에 아내와 막내는 낙오했지만, 나와 딸내미는 꼭대기에 올라 사진도 찍었다. 곰이 누워 있는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 곰배령. 그 느낌만큼 편안함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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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기억이 워낙 좋아서였던 지 다시 곰배령에 가자는 내 얘기에 가족들은 모두 들떠 했다. 그래도 겨울인데 눈이라도 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면 또 눈을 즐기면 되지 않나 하는 호기까지 생겼다. 묵을 펜션은 '강선산방'이라는 곳으로 아예 곰배령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 30분 정도 걸어야 닿는 곳이었다.

차를 세우고 들어가니 녹지 않은 눈길이 별천지 같았다. 펜션도 좋았고 주인 내외도 친절했다. 그 날 밤 누운 자리에서는 하늘의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넘쳐났다. 그걸 가슴 한 가득 품으며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야호 했다. 그런데 눈이 계속 내렸다. 그치지 않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눈사람을 만들고 삽으로 눈을 파서 눈썰매도 타면서 아이들은 신나했다. 그런데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렸고 거의 1미터에 가깝게 쌓여 버렸다. 마침 주인 내외는 딸내미가 대학을 졸업한다며 출타중이었고, 그 외진 집에는 우리 가족만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눈을 보고 밥을 먹고 산방이(그 곳을 지키는 멍멍이다)에게 밥을 주는 일이었다. 핸드폰이 되지 않는 지역이라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느낌이었다. 다음날 아침 밥을 챙겨먹고 여전히 그치지 않는 눈을 맞으면서 길을 나서려는데 옆집 총각이 산방이 밥을 주겠다며 집을 찾아왔다. 그 총각에게 "와도 너무 눈이 많이 오네요." 했더니 글쎄 이 총각이 해맑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좋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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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렵게 곰배령을 탈출했다. 푹푹 빠지는 눈 덕에 주차장까지 걸어오는 길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고, 주차장을 가득 뒤덮은 눈은 도저히 차를 빼낼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을 주었다. 어찌 어찌 차를 빼고 비포장길을 달리는 그 순간순간은 생과 사를 오가는 아찔함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빠져나와 비로소 눈을 다 녹여놓은 도로로 올랐을 때, 내 머릿 속에는 계속해서 그 총각의 "좋잖아요!"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사실 뭐 불안할 게 있었을까. 조금 고립되더라도 조금 고생하더라도 그 자체를 사실은 좀 즐기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곰배령을 빠져나오면서 그동안 막혀 있다 뚫린 댐처럼 휴대폰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메시지들의 홍수를 들으며 한편으로는 좀 아쉬워 했었다는 거. 늘 저쪽과 연결되어 있기를 욕망하면서도 때론 완전한 고립을 꿈꾸는...

하긴 그런 기억이 또 있다. 어느 해 산사에 가서 겪었던 그 기억.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 고립은 너무나 달콤한 것으로 남게 되었다.

월정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다. 어둑해진 밤에 도착한 나는 스님께 하룻밤 묵을 수 없겠냐고 물었다. 하루 방세로 대신 시주를 하고 스님이 안내해준 방에 들어갔다. 방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장롱도 없고 소파도 없는 그 방에는 덩그러니 이불 한 채만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것이 차츰 익숙해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뭐였을까. 있는 것으로 특징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으로 특징되는 그 방이 주는 편안함. 산사의 밤은 고요했다. 불을 끄자 하늘에 별이 지천이었다. 모든 게 꺼진 듯한 그 기분. 완전한 어둠과 고요 속에서 나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온 것처럼 깊고 단 잠을 잤다. 그 때 내 머리 위에 늘 곤두세워져 있던 안테나도 꺼졌다. off. - '가끔은 꺼두셔도 좋습니다'(숨은 마흔 찾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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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배령 대탈출..ㅎ)

'MBC 스페셜'이 전한 진정한 행복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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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스페셜'(사진출처:MBC)

지리산 동래마을에 사는 버들치 시인 박남준은 자장면 하나를 먹으면서 말한다. "사람이 어떻게 고생만 하면서 사냐"고. "이런 호강도 가끔은 가져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지리산 중기마을에 사는 낙장불입 시인 이원규는 말한다. "몇 십 억씩 가진 사람들 많지만 자기가 가장 행복한 것 같다"고. 저기 섬진강이 내려다보이고, 친한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란다. 최도사로 불리는 최현은 목욕을 하면서 "4500원 주고 이렇게 행복한 게 없잖아"하고 말한다. 이런 호사가 없다는 얘기다.

아마도 도시의 욕망에 찌들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장면 한 그릇과 내려다보이는 섬진강 풍경이나 친한 친구들, 그리고 4500원짜리 목욕을 가지고 호사라고 표현하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최도사가 겨울 한 복판에서 햇볕 한 자락을 맞으며 겨울에 빨리 지는 햇볕을 아쉬워하는 모습은 우리에게는 낯선 풍경이 되었다. 아마도 욕망 없이 가벼워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도사의 삶'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그런 까닭일 게다.

'MBC 스페셜-지리산에서 행복을 배우다' 편이 지리산에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에게 건네는 말은 진정한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일간지 기자로 살다가 시인의 길로 들어선 이원규 시인은 "최저로 조금 벌어도 도시에서 사는 것보다 10분의 1 정도로 살 수 있다"며 심지어 "가난함을 견디는 재미"도 있다고 말한다. 박남준 시인은 "도시에서 살다보니 삭막하고 황폐해져 가는 자신을 느꼈다"면서 "돈을 쓰지 않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면 돈을 벌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젊은 날엔 외항선도 타보고 안 해본 일이 없다는 최도사 최현은 "마음이 비워지면 힘들게 없다"며 "힘들다는 건 뭐냐면 욕심 때문에 힘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근원은 욕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담아낸 공지영 작가는 더 많이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이 행복해지기를 위해서 고민하는 이 사람들의 "얽매이지 않는" 삶이 너무나 부럽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고립되어 얻는 그런 행복이 아니다. 박남준 시인의 집 보일러가 고장 나자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뚝딱뚝딱 고쳐주고는 막걸리 한 사발에 그 수고로움을 나누는 삶이 주는 공동체적 행복감처럼, 그들의 행복은 세상과의 고리를 끊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을 세상과 나누어 함께 행복해지는 삶이다. 지리산 학교와 동네 밴드는 바로 그런 그의 실천이 담겨진 문화운동의 일환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MBC 스페셜' 역시 그들의 행복 나눔을 영상으로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하고 싶은 걸 다하고 갖고 싶은 걸 다 갖는 게 행복은 아니다.-박남준 시인" "지금 행복하고 내일 불행한 게 낫다-최도사" "내가 내 자신을 밀어붙이다 보면 시는 발자국처럼 남을 것이다-이원규 시인" 도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들의 가난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삶이 전하는 울림은 크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터진 보일러를 고쳐주고는 갑작스런 사고로 저 세상으로 떠난 고 안차종씨의 부음 앞에 오열하던 박남준 시인이 봄바람에 복수초 새싹이 피어난 걸 보고 누가 밟을까 저어하며 푯말까지 만들어 세우는 그 소박한 삶이 깊은 여운을 주는 건 어쩌면 거기서 진정한 행복의 한 자락을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MBC 스페셜-지리산에서 행복을 배우다' 편은 그 가난하지만 부자인 행복을 전해주었다.

박찬호는 아직도 우리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는 도대체 얼마나 힘든 길을 홀로 걸어왔던 걸까. 우리나라 최초의 메이저 리거. 코리안 특급. 아예 이름보다는 코리안이라고 불렸던 사나이, 박찬호. IMF로 고개를 떨군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또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그 강속구를 던지던 손이 이제 딸 애린이의 앙증맞은 발을 씻긴다. 그러면서 그는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최고의 시간들과 최악의 시간들을 거쳐,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에서 다시 도전을 하고, 그것으로 다시 마운드에 설 수 있게 용기를 준 이는 다름 아닌 바로 그들, 잘 웃는 아내와 아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96년 IMF 시절, 박찬호는 메이저 리그의 거구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5년간 845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계약. 박찬호에게는 최고의 시절들이었다. 하지만 부상과 부진의 연속으로 트레이드를 거쳐 결국 마이너리그까지 내려간 그는 은퇴를 생각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올라가는 것만 배웠지 내려오는 걸 배우지 못한 박찬호에게 그것은 지옥 같은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인표가 술회하는 것처럼 박찬호는 그 시간 속에서도 은퇴를 생각하기 보다는 재기를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메이저 리그 마운드에 섰다. 과거의 영광은 아니지만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박찬호. 'MBC스페셜-박찬호 편'이 보여준 것은 젊은 시절 박찬호라는 이름이 아니라 코리안이 되었던 박찬호가, 이제 자신의 이름으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그 코리안으로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한 달에 한 통 정도씩 날아오는 고국에서의 팬레터에 기분이 좋아지고, 집으로 찾아오는 지인들에게는 한국음식을 대접하며 한국에 대해 알려주는 그는 바로 그 한국이 던진 질타와 비난으로 죽고 싶은 지경에 이르기도 했었다. 잘 할 때는 잘 해주던 그 한국이 잘 안될 때는 마치 사라져줬으면 하는 것에 그는 화가 날 법도 했다. 그런 그였지만 그는 늘 한국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그래도 여전히 남아있는 한결같은 팬들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그의 라커룸 서랍 안에 놓여진 작은 태극기처럼, 그는 드러내진 못해도 늘 마음 속에 한국을 담고 있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본선도 아닌 예선에 오키나와까지 날아왔다. 사실 뛸 필요도 없는 그런 경기였다. 그는 주장으로서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마지막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지난 1월, 185센티, 95킬로그램의 거구인 그는 눈물을 흘렸다. 국가대표 은퇴. 그것은 아쉬움과 회한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짊어지게 된 한국이란 이름의 거대한 멍에가 그를 영광스럽게도 했고, 힘겹게도 했을 테니까.

박찬호의 성공과 추락과 재기는 마치 우리나라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거의 비슷한 곡선을 그려온 박찬호와 우리나라는 그래서 서로를 응원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IMF 시절, 처음 박찬호가 당당히 메이저 리그의 마운드에 섰을 때 우리는 그를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박찬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응원가이기도 했다. 그가 추락의 길을 걸을 때, 우리는 박찬호를 더 이상 응원하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MBC스페셜', '박찬호는 당신을 잊지 않았다'편이 보여준 것은 이 어려운 시기에 또 우리를 응원해주는 박찬호의 모습이었다.

다큐 속의 명사, 예능 속의 명사

다큐멘터리와 예능 프로그램이 명사와 사랑에 빠졌다? 명사(名士).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란 뜻이다. 여기에는 스타들은 물론이고 예술가들, 스포츠 스타들 같은 이름난 유명인들이 모두 포함된다. 물론 예술가들 같은 유명인들은 다큐멘터리에 심심찮게 등장했지만 최근 들어 다큐멘터리는 그 명사의 대열에 연예인들과 스포츠 스타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한편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정반대의 경향이 일어나고 있다. 연예인들의 출연보다는 그간 잘 보이지 않던 스포츠 스타나 예술가들의 출연이 대중들의 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MBC 스페셜'은 일찍부터 대중적인 스타들의 일상적인 얼굴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선보이며 호평을 받아왔다. 스타 이영애는 물론이고 여자 역도선수 장미란, 배우 김명민, 프리미어 리거 박지성, 그리고 이번 주에 조명될 박찬호까지 'MBC 스페셜'은 명사 다큐라는 한 형식을 구축해낸 셈이 되었다. 물론 처음 다큐멘터리가 스타를 다루는 것은 낯설었다. 따라서 그런 시도가 단지 스타의 인기를 등에 업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비판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이 명사들을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단지 그들의 개인적인 면면을 소개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보편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에 방영되었던 '김명민은 거기 없었다'는 김명민이라는 한 배우의 조명을 넘어서 배우라는 직업이 갖는 존재의 문제까지도 포착해냈고, '당신은 박지성을 아는가'에서는 제목대로 우리가 몰랐던 인간 박지성의 면면을 볼 수 있었다. 이번 주 방영될 '박찬호는 당신을 잊지 않았다'에서는 우리네 최초의 메이저리거인 박찬호의 평범한 일상에서부터, 그가 슬럼프일 때 그를 도와주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현재 여전히 마운드에 오르는 박찬호의 모습을 통해, IMF시절에 우리에게 희망이 되어주었고, 여전히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한 스포츠인의 자화상이 그려진다. 끝없는 슬럼프 끝에 이제 재기에 성공한 박찬호의 끈질긴 노력은 마치 우리의 현재를 말해주듯 공감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이른바 명사다큐의 경향은 'MBC 스페셜'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는 다큐멘터리의 한 경향으로 드러나고 있다. 지난 주 '히트곡의 비밀코드'를 다룬 'SBS 스페셜'에는 국내의 작곡가들, 중견가수, 아이돌 그룹들이 등장해 일련의 히트곡에 존재하는 특별한 요소들을 이야기했다. 아이템 자체도 신선했지만, 무엇보다 유명 스타들이 늘 보여지던 프로그램이 아닌 다큐멘터리에 조명된다는 점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에 방영되는 '매력 DNA, 그들이 인기 있는 이유'에서도 이어질 전망이다. 매력 DNA라는 명제 하에 히딩크나 인순이 같은 대중적인 스타들이 가진 매력의 요인을 포착해낼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무릎팍 도사'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연예인보다는 예술가나 스포츠 스타를 게스트로 출연시킴으로써 더 큰 호응을 얻어내고 있다. 첼리스트 장한나가 출연해 특유의 호탕한 웃음과 유머감각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에 대한 열정과 대중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 것은 토크쇼의 진면목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이밖에도 이종격투기 선수 추성훈, 발레리나 강수진, 세계적인 성악가 조수미, 소설가 황석영, 이외수 등등 '무릎팍 도사'가 초빙한 명사들은, '무릎팍 도사'가 펼쳐놓은 한바탕 신명나는 토크의 굿판을 통해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인 매력을 선보였다. 이것은 '1박2일'에서 박찬호와의 하룻밤을 통해 얻어냈던 공감과 궤를 같이하는 것들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처럼 연예인이 아닌 명사를 섭외하기 시작한 이유는 연예인에 집중되는 프로그램 자체가 어떤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흔히 '저들끼리 노는 걸 우리가 왜 봐야 하느냐'는 한탄조의 말들은, 프로그램이 대중들과 나누려고 하는 어떤 공감이 이제는 연예인들만의 이야기로는 한계에 부딪쳤다는 것을 말해주는 단적인 대목이다. 예능 프로그램이 공감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그만큼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해 다양한 이야기를 해줄 때 가능한 일이 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탈신비주의화 되고 있는 연예인들과 마찬가지로, 명사들 역시 어떤 친근함을 통해 대중들과 더 소통하려 하는 욕구가 서로 잘 맞아떨어져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큐멘터리와 예능 프로그램이 모두 명사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은 유사하지만 이 두 프로그램의 지향점은 약간 다르다. 다큐멘터리의 명사 출연이 그 엄격한 형식에서 좀 더 대중적인 것을 향해 있다면, 예능 프로그램의 명사 출연은 지나치게 낮아져 있는 형식에 어떤 격을 더하고 게스트의 외연을 넓히기 위함이다. 하나는 내리려 하고 다른 하나는 올리려 한다. 어찌 보면 이것은 현재의 프로그램들이 장르를 불문하고 어떤 중간지점을 향해 균형을 맞추려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장르만을 들어서 어느 것이 격이 높고 어느 것이 낮다고 인식하는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버렸다. 따라서 그 자신의 위치에서 대중들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노력은 의미가 있고 가치도 있는 일이다. 물론 본연의 형식이 갖는 본질적인 틀은 깨서는 곤란하겠지만, 대중들과 좀 더 소통하기 위한 퓨전은 어쩌면 시대의 요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큐와 예능 속으로 들어오는 명사들은 그 변화의 징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 스타란 무엇일까. 젊은 시절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연인이자, 언제나 피곤한 몸을 기댈 수 있는 넉넉한 어깨를 가진 친구 같은 존재일까. 우리와는 다른 별세계에 있으면서 가끔 우리에게 그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꿈의 존재일까. 아니면 도무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우리와는 다른 신적인 아우라를 가진 존재일까. 그저 냉정하게 바라봐 자본주의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만들어낸 신을 대체하는 인간상품의 하나일까.

스타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처럼 극에서 극으로 달린다. 한없이 찬사의 대상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끝없는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한없이 동경의 대상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그곳에는, 또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충격적인 자살 소식과 거의 폭력에 가까운 근거 없는 끔찍한 루머들이 떠다닌다. 스타와 소속사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면 종종 발견되는 노예계약의 징후들은 대중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 신적인 존재가 노예였다니. 신과 노예의 사이. 지금 스타가 서 있는 자리다.

그들은 실제의 삶과 비춰지는 삶이 다르다. 그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콘텐츠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따라서 그 콘텐츠가 캐릭터로 구현해내는 판타지나 가상성은 사실상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들의 실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실제 삶과는 유리되어 있다. 드라마 속에서 누구나 꿈꾸는 신데렐라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속사에 계약되어 하기 싫은 일이라도 웃으면서 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을 수도 있다. 이 실제의 삶과 비춰지는 삶 사이에 혼란이 오게 되면 그 존재는 파탄으로 몰릴 위험이 있다. 자살은 꿈꿔왔던 삶과 현실 삶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스타란 기본적으로 이 극한의 정체성의 혼란과 존재의 괴리감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다.

이렇게 된 것은 스타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통해 물질화된 상품인간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삶과 상품으로서의 삶. 이것은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단지 스타만이 겪는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들은 저마다 집에서는 한 아이의 부모이고, 한 부모의 자식이며, 한 아내의 남편이자, 한 남편의 아내이지만, 집을 나서서 자본의 세상으로 출근하게 되면 연봉 얼마로, 회사 이름으로, 또 직함으로 구획되는 상품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 스타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의 삶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상하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스타에게서 갖는 동경과 동정은 사실상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갖는 감정과 다르지 않다. 스타는 우리에게 그것을 대리하는 존재로 서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타를 꿈꾼다. 그것이 딱히 저 TV 속의 인물들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스타가 되기를 누구나 바란다. 주목받고 싶고,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문제는 그 가치를 평가내리는 기준이 돈으로 수치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질적인 가치가 양적인 가치로 등급 매겨지는 그 지점에 현대인들의 비극이 있다. 질적인 가치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양적 가치가 부여되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주목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양이 질을 담보하는 시대다. 일단 양을 채워라! 그러면 질은 따라올 것이다!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한 희구는 우리의 본능이다. 이미 주목받고 있는 스타들은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드러나지 않는 삶 속에 묻혀 있는 이들은 거꾸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스타를 꿈꾼다. 변신 욕구는 우리의 본능이지만 팍팍한 현실에서 변신은 그다지 용이하지 않고 때론 용납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대체하는 존재로서 스타를 희구하게 된다. 스타에 대한 열광과 현실에 대한 낙담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렇다면 스타를 희구하는 우리네 삶은 늘 그 자리에 머물러 현실을 낙담하면서 변신욕구를 스타를 통해 자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스타와는 다른 배우라는 존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 시대가 낳은 명배우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김명민의 목소리부터 들어보자. “제 이름이 아니라 캐릭터만 쭉 올라오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 작품을 했던 사람이 이 작품을 했다는 게 의심 갈 정도로 캐릭터의 차별화가 확실했으면… 사람들이 제 이름을 제대로 모르고 못 알아봐도 제가 배우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하죠.”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저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아무리 스타라는 딱지를 갖다 줘도 저는 그거 거절하려고 그랬어요. 저는 그냥 배우로 불리고 싶었고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도 ‘저놈은 정말 연기 잘하는 놈’ 이렇게 인정받고 싶은 게 제 꿈이었어요.”

김명민은 이미 스타다. 하지만 그는 왜 그다지도 스타를 거부하고 배우를 고집하는 것일까. 스타와는 달리 배우란 실체이기 때문이다. 김명민이라는 연기자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MBC스페셜'의 타이틀은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에 김명민은 없었다'이다. 아마도 이 표현은 연기자라면 최고의 찬사라고 여겨질 것이다. 작품 속에서 연기자가 배역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이름을 지움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들, 바로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다. 그러니 김명민이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작업은 그 직업이 가질 수 있는 스타로서의 욕망을 덜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온전히 실체로 세워둘 수 있는 배우라는 길을 걸어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한 인간의 존재로 봤을 때, 양적 가치의 세상에서 질적 가치를 고집함으로써 그 존재를 실체로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김명민의 경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이미 스타로서의 삶을 욕망하도록 강요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끝없이 수치로서 환산되는 자신의 양적 가치를 높여나감으로써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새 물질적 욕망으로서 우리 속에 들어와 있다. 이것이 생존이기에 우리는 경쟁을 해야 하고, 누군가 스타가 될 때, 누군가는 낙오되어 그 위를 부러움의 시선으로 올려다봐야 한다. 낙오되면서도 그 시스템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탓하며 오히려 자신을 밟고 성공한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스타라는 존재를 통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교육시켜온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타는 허상이다. 그래서 그 존재는 좀체 변신하려 하지 않는다. 스타로 만들어준 그 신적 이미지를 왜 스스로 부수려 하겠는가. 그들은 스타로 군림하며 가짜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지우는 짐 또한 혹독하다. 실체를 잃어버린 삶이나, 실제와 가상을 혼동하는 삶은 늘 파탄으로 우리를 내몰기 마련이다. 하지만 배우들은 다르다. 스타가 가진 고정된 가짜의 신적 이미지는 배우라는 무한히 변신을 해야 하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거꾸로 부담으로만 작용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변신함으로써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낸다.

우리는 각자의 삶이라는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들이다. 우리는 그 위에서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을 꿈꾼다. 스타라는 자본주의가 마련한 시스템 위의 허상을 좇을 것인지, 아니면 배우라는 본연의 실존을 좇을 것인지는 모두 우리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흔히 가십 정도로 치부하며 입에 오르내리는 스타 혹은 배우. 이 두 존재가 우리네 삶에 던져주는 질문은 이처럼 의미심장하다.
(이 칼럼은 Yes24의 문화웹진 나비(
nabeeya.yes24.com)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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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팬을 따라가니 사회가 보이네

그녀들은 왜 자신보다 한참 어린 아이돌에 열광할까. 'MBC스페셜'이 던지는 질문은 최근 들어 새로운 팬덤의 하나를 형성하고 있는 일명 이모 팬들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한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비나 이민호, 김현중 같은 어린 친구들에 열광하고, 그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거의 외듯이 보며, 팬 사인회나 콘서트장에 어김없이 찾아가는 것을 주변에서는 주책으로 바라볼 수도 있는 일. 하지만 'MBC스페셜'이 포착하려 한 것은 단지 그 기이한 아줌마들에 대한 호기심어린 시선만이 아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모 팬들의 인터뷰를 따라가면서 이들이 그렇게 스타에 열광하는 이유를 들여다 보다 보면 차츰 이 사회의 모습이 다시 그려지고, 그 사회 속에서 스타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도 다시 포착된다. 무엇보다도 이 사회 속에서 아줌마로 살아간다는 것이 갖는 무게감이 다큐멘터리를 자못 진지하게 만든다. 이것은 'MBC스페셜'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다큐의 방식이다. 사회의 현상을 다루되, 그 속에 있는 인간에 집중하는 방식.

이모 팬들은 저마다 "왜 이렇게 좋은 걸 이제야 알게 됐나"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 반응 속에 숨겨진 것은 그동안 삶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그저 그 삶을 버텨내기만 해왔지 뭔가 돌파구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는 후회다. 점점 자기 자신에 집중하기보다는 누구의 엄마이자 누구의 며느리이자 누구의 아내로 자리하다 보니 차츰 자신에 소홀해진 것에 대한 한탄이다. 그러니 이모 팬들이 가진 젊은 그들에 대한 열광은 그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일과 무관하지 않게 된다.

엄마도 아니고 며느리도 아니고 아내도 아닌 한 여성으로서 자신을 위치지울 수 있다는 것은 스타라는 존재가 가진 힘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제시될 수 없어도 어떤 위안을 주고 변화의 계기가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미 지나간 청춘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은 팬으로서 스타에 열광하는 그 순간 현재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프로그램에 소개된 이모 팬들이 저마다 팬클럽 활동을 하면서 보다 밝아진 자신의 삶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에드가 모랭은 스타라는 존재를 분석하면서 '스타신화는 신앙과 오락 사이에 양자가 혼합되어 있는 지대에 위치'한다고 했다. 과학이 신을 몰아낸 현대사회에서 그 신의 위치를 대리해주는 건 다름 아닌 스타라는 것이다. 과거 종교의 시대에는 힘겨운 현실에 위안을 주고 희망을 던져주는 기능을 한 것이 종교였지만, 이제 그 시대는 저물었다. 이모 팬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모습들, 위안을 얻고, 희망을 갖고, 변화를 겪고, 심지어 누군가를 위한 봉사의 손길까지 내미는 그 모습들이 어떤 면에서는 종교를 대체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MBC스페셜"이 보여준 이모 팬이라는 현상은 그 이면에 남겨진 우리 사회의 아줌마들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사회의 버팀목이랄 수 있는 그녀들의 침묵을 다시 듣게 해준다. 이것은 힘겨운 삶 속에서 어떤 위안과 희망을 얻는 그네들의 활동을 그저 주책으로 치부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물론 신적인 존재로서의 스타 이면에 또 하나의 얼굴로 상품으로서의 스타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작은 위안이 갖는 생각보다 큰 변화를 생각해본다면 이모 팬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는 결코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MBC스페셜'은 자칫 이론적으로 접근했을 때 놓치기 쉬운 이런 감성적인 의미들을 인간에 집중함으로써 잘 포착해주었다.

감동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MBC 스페셜’의 다큐멘터리

‘MBC 스페셜’의 ‘목숨 걸고 편식하다' 편은 꽤 도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습관적으로 말하는 “건강을 위해 골고루 먹으라”는 그 상식을 뒤집고 있기 때문이다. 고혈압 환자에게 혈압약을 끊게 하는 대신 식이요법을 시키고, 대장암으로 시한부인생 판정을 받았지만 식습관을 고쳐 삶을 되찾고, 신장이식 수술을 받아서 반드시 먹어줘야 하는 면역억제제를 끊고 대신 금욕적인 삶과 먹거리로 살아가는 이야기는 그 강도로만 보면 어느 르뽀보다도 고발 프로그램보다도 강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과영양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편식하라’는 말은 과영양 시대의 역설을 담고 있다.

하지만 ‘MBC 스페셜’은 이 소재를 르뽀나 고발 프로그램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 집중하는 것으로 모든 메시지에 대한 강변을 대신한다. 대신 이야기는 마치 ‘인간극장’이나 ‘휴먼 다큐 사랑’처럼 일상 속의 특별함 정도를 말해주는 것 같은 편안함과 친근함을 갖게 된다. 이처럼 강변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나타내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다큐의 진짜 미덕인지도 모른다. ‘MBC 스페셜’의 다큐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중심에 늘 사람을 놓기 때문이며, 또 메시지를 스스로 강변하기보다는 다큐 속의 인물들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만드는 것 때문이다.

‘MBC 스페셜’의 연중 기획이랄 수 있는 ‘휴먼 다큐 사랑’은 바로 이런 점이 폭발력을 가지게 만드는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루면서도 적절한 감정적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는 인물에 대한 집중과 거리두기가 꽤 잘 균형을 잡고 있다. 실제 메시지는 따라서 늘 뒤편에 서 있게 마련이지만(예를 들면 워킹맘을 다루면서도 그걸 전면에 세우지는 않았던 ‘풀빵엄마’처럼)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그 메시지야말로 진정한 공감에 이르게 하는 묘책이 되기도 한다.

‘MBC 스페셜’이 다루어왔던 일련의 셀러브리티(celebrity) 다큐 또한 연예인이나 스포츠맨 같은 유명인사들의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진솔함을 포착함으로써 호평을 받아왔다. 김명민 편이 그렇고 박지성 편이 그러했다. ‘최민수, 죄민수 그리고 소문’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억울한 근거 없는 소문으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버린 최민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포착하면서도, 동시에 소문에 대한 사회심리학적인 객관적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 ‘MBC 스페셜’은 특별한 보통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늘 보여왔다. ‘곰배령사람들’에서는 도시에서 살다가 곰배령에 들어와 살게 된 사람들의 특별한 삶을 포착함으로써 거꾸로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 같은 것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마지막 해녀’는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는 해녀들의 삶과 애환을 들여다봄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라는 두 측면의 메시지를 모두 담아냈다.

인물에 집중함으로써 그 인물이 처한 환경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 기법은 종종 환경 다큐멘터리로서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인물 대신 북극곰을 카메라의 중심에 놓고 관찰하는 것만으로 지구온난화로 인한 환경문제를 드러낸 ‘북극의 눈물’이 그 대표작이 될 것이다. ‘북극의 눈물’은 이로써 시리도록 아름다운 북극의 자연을 보여주면서도 감동적으로 환경의 문제를 환기시키는 새로운 환경 다큐멘터리의 한 지점을 그려냈다.

‘MBC 스페셜’은 7월3일 밤 ‘노견만세’라는 제목으로 죽기 전까지 누워 지낼 수밖에 없는 은퇴견들과 그들과 삶의 한 부분을 함께 해온 사람들 간의 눈물겨운 마지막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것은 역시 지금까지 인간-자연(동물)에 집중해온 ‘MBC 스페셜’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찌 보면 ‘휴먼다큐 사랑’의 동물 버전처럼 여겨지는 이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이 큰 것은 지금까지 ‘MBC 스페셜’이 걸어온 그 길이, 강변하지 않으면서도 늘 우리에게 어떤 감동으로서 메시지를 전해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영상시대의 다큐는 아무리 사소해도 역사가 된다

우리네 TV에는 현재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집중도가 너무 높다. 반면 다큐멘터리는 그 영상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뒤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TV의 비중으로 보자면 다큐멘터리를 포함한 시사교양 프로그램은 TV의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드라마와 예능이 대중들을 끌어들이는 재미와 오락을 선사한다면 다큐멘터리 같은 프로그램은 매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 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껏 다큐멘터리가 주목되지 못했던 건, TV의 오락적 기능에 우리가 편향되어 있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큐멘터리도 어떤 변화를 모색하고 있고 그 성과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다큐에 대한 달라진 인식
변화의 한 축은 대작 다큐멘터리들의 잇따른 등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EBS에서 제작한 '한반도의 공룡', MBC의 '북극의 눈물', KBS의 '누들로드'는 모두 명품다큐라 불리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중 특히 '북극의 눈물'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도 수출됐고, 극장판으로도 제작되어 환경영화제 개막작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이러한 특집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된 다큐 프로그램들의 시청률이 반등하고 있다는 것이다. 'MBC스페셜'은 꾸준히 1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고, KBS '다큐3일' 역시 참신한 포맷으로 주말 밤 10%대의 시청률을 올리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은 다큐멘터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워낭소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다큐멘터리가 충분히 대중적인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워낭소리'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과거 '비상'이라는 축구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역시 4만여 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그만큼 극영화 같은 허구가 아닌 리얼 스토리인 다큐멘터리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대중들의 리얼리티와 진정성에 대한 요구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이것은 또한 대중들의 영상에 대한 리얼리티와 진정성에 대한 욕구가 더 커졌다는 걸 말해주기도 한다. 흔히들 TV에서는 리얼 버라이어티쇼다, 리얼 토크쇼다 하면서 너나없이 리얼리티를 부르짖고 있는데 이것은 그만큼 과거처럼 짜여진 틀 안에서의 영상이 대중들에게 소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TV는 이미 일찍부터 리얼리티 영상에 대한 추구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말이다. 리얼 버라이어티를 주창하고 나선 '무한도전'이나 그 영향으로 등장한 여행 버라이어티 '1박2일'은 모두 이 TV의 리얼리티 경향에 영향받은 프로그램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박2일'은 사실상 다큐멘터리를 추구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길에서 만나는 우연적인 사건들을 웃음의 코드로 엮어내는 방식은 다큐멘터리가 갖게 되는 진정성의 울림을 전해주기도 한다. 또한 '라디오 스타'나 '무릎팍 도사' 같은 일련의 리얼 토크쇼를 표방한 프로그램들 역시 다큐적 영상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토크쇼는 예정된 질문과 답변이 아니라 의외의 질문에 걸려드는 답변에서 리얼리티를 뽑아낸다. 심지어 TV의 리얼리티 경향은 드라마에서도 나타난다. 이른바 '전문직 장르 드라마'가 그것이다. 과거에는 대충 찍어냈던 의학드라마의 수술 장면을 지금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드라마의 리얼리티 경향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리얼리티에 대한 요구는 그러한 전문성까지 드라마로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무엇이 대중들을 리얼리티에 집착하게 했나
대중들이 과거와 달리 이렇게 리얼리티에 집착하는 이유는 영상의 대중화 때문이다. 과거의 영상이란 그 제작기술을 갖고 있는 특정 전문인들의 것이었다. 그만큼 기술도 복잡했고, 기술을 안다고 하더라도 방송장비가 어마어마한 고가였다. 다 찍는다 해도 편집이 또 장난이 아니었고, 그렇게 영상을 찍어냈다고 해도 그걸 방영할 플랫폼을 갖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전문가들에게만 부여되었던 특권이 영상기술의 발달로 인해 대중들에게 대부분 넘어간 상황.

우리는 누구나 조그마한 HD급 캠코더로 영상을 찍어서 프로그램으로 편집하고 인터넷에 게재할 수 있다. 이 사용자가 제작자의 역할을 함께 하게 되는 상황은 영상이 가진 신비적인 부분을 벗겨 내버리고 그 진면목을 드러나게 한다. 이제 모든 게 빤히 다 보이는 것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방송이 과거와 같은 영상을 대본에 맞춰 찍어낸 것을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리얼리티에 대한 집착은 방송이 살아남기 위한 한 몸부림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런 영상에 대한 리얼리티 요구가 지금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몇 년 전부터 등장한 것이라면, 왜 그 동안 그 핵심이랄 수 있는 다큐멘터리는 영상의 중심에 자리하지 못했고, 이제야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대중들의 시선이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던 탓에 다큐멘터리의 변화가 그만큼 늦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는 늘 그 고매한 위치에 진중한 무게를 갖고 누가 뭐라든, 하긴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별로 없긴 하지만, 같은 모습을 고수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하면 뭔가 대작이거나 가르치려는 듯한 뉘앙스, 그런 것들이 시대가 변하고 있는데도 여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큐멘터리에 대중들의 눈길이 닿기 시작하면서 그 변화는 좀 더 빨라지고 있다.

다큐멘터리에 부는 변화의 바람, 그 가능성
'인간극장' 같은 경우, 소소한 일반인들의 일상들을 잡아내면서 대중들의 호응을 끌어냈는데, 그것은 다큐멘터리 영상이 이제 과거처럼 어깨에 힘을 잔뜩 주는 바로 그 거품을 걷어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미 영상을 체험한 대중들에게 너무나 진지한 다큐멘터리의 시선은 부담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시대착오적으로도 느껴지게 마련이다. 최근 호평을 받았던 '휴먼다큐 사랑'의 경우, 바로 그 낮은 시선으로 바라본 보통 사람의 위대함을 끌어냈기에 대중적으로도 성공했고, 사회적인 반향도 컸다.

한편 다큐멘터리의 접근방식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다큐 3일' 같은 프로그램은 통상적으로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수개월의 제작기간이 걸린다는 단점을 새로운 프로그램 형식으로 차용해 그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 단 3일 간의 취재영상을 통해 보여지는 세상은 어쩌면 수개월 동안 취재해 찍은 영상이 보여주지 못하는 순간적인 진실을 담아내기도 하니까. 게다가 최근에는 '30분 다큐'라는 프로그램이 등장해 일일 다큐멘터리 시대를 열었다. 사실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는 PD들에게 큰 부담이다. 하지만 30분이라는 시간은 무언가 소소한 모든 것들을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포획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지금의 다큐멘터리는 대중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 어깨에 힘을 좀 빼고, 시선을 한참 낮추고 있다고 보여지고, 이것은 향후 다큐멘터리가 TV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러한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실로 영상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방송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이 일상의 다큐멘터리들이 하나하나 모여 하나의 역사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다큐 3일'과 'MBC스페셜'이 찍은 생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상은 연일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되면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문자시대의 역사란 글이 그 매체가 되는 것이지만, 이미 영상시대에 접어든 우리에게 역사란 영상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소소한 일상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큐멘터리의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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