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인반수 영웅으로 재탄생된 이승기의 구미호

 

왜 <구가의 서>가 다루는 우리네 민초들의 영웅은 반인반수로 태어났을까. 이승기에 의해 재탄생된 구미호는 우리가 <전설의 고향>에서 보던 “서방님 하루만 더 참았어도...”하며 원망의 눈길을 보내던 그 구미호가 아니다. 우리네 전설에서 구미호라는 존재가 한이 내면화된 민초들의 억압에서 탄생한 존재라면, <구가의 서>의 반인반수 최강치(이승기)는 안으로 꼭꼭 숨겨두는 한보다는 겉으로 터져 나오는 분노에서 탄생한 존재다.

 

'구가의 서'(사진출처:MBC)

확실히 지금은 조선시대의 수동적인 구미호의 신파가 감흥을 잃은 시대다. 아마도 70년대 가부장적인 가족체계 내에서라면 이른바 고부갈등과 시집살이에 꾹꾹 눌려진 억압이 구미호의 신파적인 변신만으로도 눈물로 풀어져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라진 시대는 달라진 구미호를 요구한다. 최강치가 그려내는 구미호 이야기는 그래서 신파가 아니라 활극에 가깝고, 내면화된 욕망을 풀어내는 공포가 아니라 좀 더 겉으로 드러내는 판타지에 가깝다.

 

“다 죽여버릴거야!”라고 외치는 분노의 최강치는 그래서 그 최대의 적이 바로 자신이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도무지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지만, 바로 그런 엄청난 반수의 힘은 어느 쪽으로 사용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마치 핵을 가지고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최강치는 지금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거북선을 만들려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유동근)과 백년객관을 빼앗고 왜구들과도 결탁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희대의 간웅 조관웅(이성재) 사이에서 줄다리기가 되고 있는 존재다.

 

조선시대의 구미호 전설을 재해석하고 있지만 <구가의 서>는 그래서 무수한 현대의 영웅담과 판타지물의 흔적들이 들어있다. 분노하면 반수로 변신해 자신도 모르게 모든 적을 살상하는 그 모습은 헐크를 닮았고, 다른 존재로서의 외로운 영웅의 모습은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을 닮았으며, 영웅의 인간적인 고뇌는 배트맨을 닮았다.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전라도는 배트맨의 고담시처럼 고립된 인상이 짙고, 그걸 장악하는 조관웅은 고담시나 뉴욕을 꿀꺽 삼키기 위해 테러를 일삼는 악당을 닮았다.

 

물론 여기에는 영웅담 이외에 판타지물의 흔적도 담겨 있다. 지리산을 지키는 신수 구월령(최진혁)과 소정법사(김희원)는 <반지의 제왕>의 요정과 마법사를 떠올리게 하고, 담여울(수지)과 최강치의 관계 설정은 일본 만화 <이누야사>를 닮았다. <구가의 서>는 이처럼 그간 <전설의 고향>이 다루던 전통적인 구미호와는 확연히 다른 캐릭터다. 우리만의 특수성을 가진 구미호라는 캐릭터를 전 세계 보편적인 변신 캐릭터들(이를테면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에서 현대적인 슈퍼히어로에 이르는)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달라진 구미호 최강치는 민초들에게 어떤 영웅일까. 과거의 구미호 텍스트들은 구미호보다 더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으로 당대의 신분구조가 주는 억압을 해체시켰다. 양반과 상놈의 신분구조는 인간과 구미호로 치환되었고, 구미호는 공포의 존재가 되어 인간을 깨우치는 이야기로 그려진다. 2000년대가 넘어 재탄생된 구미호 이야기들은(이를 테면 <여우누이뎐>같은) 구미호보다 심지어 더 공포스런 인간들을 비판한다. <구가의 서>가 그리는 구미호도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인간이지만 반인반수보다 못한 조관웅이 등장한다.

 

하지만 최강치라는 새로운 영웅이 하려는 것은 조관웅을 죽이는 사적인 복수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굳이 등장한 이유다. 이 반인반수의 영웅은 임진왜란과 무적의 이순신이라는 존재 옆에 생겨난 판타지다. 그런 점에서 <구가의 서>의 구미호는 사회적 억압이 만들어낸 공포의 캐릭터가 아니라, 사회적 분노가 만들어낸 영웅에 가깝다. 권세에 기대 뭐든 갖고 싶은 것을 취하려는 조관웅은 그래서 사회적 분노를 일으키는 공공의 적이 된다.

 

최강치라는 새로운 구미호는 현대인들의 분노가 응축되어 만들어진 캐릭터다. 분노에 의해 만들어진 그의 강력한 힘은 이미 신분체계의 벽을 넘어선다. 하지만 괴물과 싸우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스스로가 괴물이 되지 않는 일이다. 최강치에게 남겨진 문제는 그래서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된다. 현대인들이 갖고 살아가는 분노가 그러한 것처럼.

728x90

영웅보다 인간을 선택한 ‘돌아온 일지매’

‘홍길동전’이나 ‘전우치전’ 같은 우리네 고전들의 영웅들을 보면 그 대결의 대상이 왕이거나, 체제 자체가 되는 과감성이 엿보인다. 탐관오리들을 징벌하고, 적서차별에 대항하고, 왕마저 탄복시키는 그 영웅들은 심지어 자신만의 나라를 세우기까지 한다. 당대 서민들의 억압된 정서를 속 시원히 풀어주는 그 이야기들이 얼마나 힘이 되었을 지 짐작해보는 건 어렵지 않다. 이준기가 분했던 ‘일지매’는 바로 이 계보를 잇고 있다.

하지만 ‘돌아온 일지매’에서 일지매는 이런 영웅들과는 색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물론 탐관오리로서 김자점(박근형)을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의 재물을 빼앗아 민초들에게 나눠주고, 그가 내통하는 청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은밀히 화포를 제작하기까지 하지만 그것은 왕과 대항하기보다는 왕의 밀서를 받고 은밀히 일을 진행중인 최명길(정동환)을 돕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일지매는 그것이 왕을 위해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결국 민초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하는 일(전쟁이 나면 가장 고통받는 건 그들이라며)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지매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과거 고전들의 영웅들이 보여주었던 체제 전복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돌아온 일지매’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적서차별이 국가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 시스템 자체와 대항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김자점을 해하려는 일지매에게 그것이 결국에는 나라에 큰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며 제지하는 열공스님(오영수)의 대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돌아온 일지매’의 이런 ‘체제 내에서의 싸움’이 캐릭터로 잘 드러나 있는 인물은 구자명(김민종)이다. 그는 관원으로서 자신이 해야할 책무와 나라가 민초들에게 가하는 고통 사이에서 번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일지매란 존재는 그에게는 딜레마다. 일지매는 탈법적인 일을 하지만 그것이 결국 민초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은 구자명이란 캐릭터를 비극적인 인물로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똑같이 일지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를 시스템 안에서 해결하려는 그의 노력은 “민초들에게 행복을 주기보다는 고통이라도 덜어주는” 소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지매의 이런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돌아온 일지매’가 영웅담류의 소재를 갖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우울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이 이야기가 이처럼 무거운 현실을 벗어나 호쾌한 세계를 그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사극에서 일지매는 공적인 문제보다는 사적인 문제에 더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출생과 함께 버려진 일지매는 꽤 오랜 시간을 어머니의 그림자를 찾으며 방황하며 보냈고, 그 그림자 속에서 달이와 월희(윤진서)를 만나고 사랑해왔으며 지금도 그것은 진행형이다. 구자명이 가진 딜레마는 그가 평생을 사랑해온 일지매의 모친인 백매(정혜영)와의 사적인 이야기로 환원된다. 가끔씩 영웅담을 표명하는 이 사극이 멜로 드라마의 연장선으로 비춰지는 것은 일지매가 취하고 있는 이 자세에서 비롯된다.

결론적으로 보면 ‘돌아온 일지매’는 영웅을 그렸다기보다는 한 인간을 더 조명한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늘 깨지고 다치는 일지매의 모습은 그가 초인적인 영웅이 아니라 그 또한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을 자꾸 상기시킨다. 이것은 어쩌면 고우영 화백이 원작만화를 그렸던 당대 현실의 억압적인 검열 탓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만화 같은 영웅보다는 좀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영웅을 그리려 했던 의도 탓일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들이 ‘돌아온 일지매’가 촘촘한 스토리에 실험적인 연출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대중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드라마를 만든 것은 아닐까. ‘돌아온 일지매’는 분명 인간미 넘치는 인물들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국에 대중들은 어쩌면 황당하더라도 좀더 초인적인 판타지를 제공하는 영웅을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