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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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턴, 가족주의 종언의 징후인가

D.H.Jung 2014. 1. 9.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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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보다 더 우선되는 개인의 시대, 싱글턴

 

최근 가족드라마를 보면 흥미로운 경향들이 두드러진다.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그리곤 했던 가족드라마는 언젠가부터 파탄 일보 직전의 이른바 막장이 되거나, 불륜 혹은 이혼에 직면한 가족의 위기를 다루고 있다. 문영남 작가의 <왕가네 식구들>이 소재로 내세운 것은 시월드(시댁)가 아닌 처월드(처가)지만 여기서 왕가네가 보여주는 진면목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거나 가족 윤리가 파탄 난 가족의 모습이다. 김수현 작가의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제목처럼 아예 재혼한 한 여성이 엄마로서의 삶마저 포기하고 개인의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아마도 김수현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결혼과 이혼이 부쩍 많아진 현 세태 속에서 행복의 문제를 질문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가족주의라는 사회적 틀이 가진 한계처럼 보인다. 이제 따뜻하고 힘겨우면 늘 찾던 그 가족의 양태는 과거의 시대로나 가야 만나 볼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김정수 작가의 <맏이>는 그래서 시간을 60년대까지 되돌린 후에 다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속에서 가족은 물론 여전히 아련함을 남기지만 그것은 추억이나 회고일 뿐 현재를 얘기해주는 것은 아니다.

 

 

가족드라마가 가족의 해체를 드러내는 요즘, ‘싱글턴(singleton)’이라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 대중문화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도대체 싱글턴이란 뭘까. 단언적으로 말해 싱글턴은 독신주의나 노총각, 노처녀와는 다른 개념이다. 독신주의나 노총각, 노처녀 모두 결혼을 전제로 해서 결혼을 안 하는(혹은 못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싱글턴은 결혼과 상관없이 혼자 사는라이프 스타일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젊은 나이에 부모와 혼자 떨어져 사는 이들이나,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사는 이들, 또 나이가 들어 부양하는 가족이 없이 혼자 사는 노인들까지 모두 포함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싱글턴은 독신주의나 노총각, 노처녀 같은 단어가 갖고 있기 마련인 수동적이거나 부정적인 뉘앙스도 있지만 동시에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뉘앙스도 포함하고 있다. 이를 테면 과거 <결혼 못하는 남자>라는 드라마에 등장했던 혼자 사는 삶을 즐기는 남자 주인공처럼.

 

라이프 스타일에 특히 민감한 대중문화는 싱글턴을 앞 다투어 다루고 있다. MBC <나 혼자 산다>는 아예 대놓고 혼자 사는 남자들의 다양한 삶을 예능의 코드로 품어냈고, 올리브 채널의 <마트를 헤매는 당신을 위한 안내서>는 대형마트의 가공식품을 재가공해 맛볼 수 있는 노하우를 전하면서 그 타깃을 혼자 밥 먹는 것이 어색한 1인 가구에 맞췄다. KBS의 특이한 오디션 프로그램인 <슈퍼독>이나, 반려견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온스타일 <펫토리얼리스트>는 싱글턴의 라이프 스타일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또 최근 시작한 tvN <식샤를 합시다>1인 가구들이 곤란을 겪는 두 가지 문제, 즉 식사와 안전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물론 싱글턴의 라이프 스타일을 다루는 프로그램은 아직까지는 주로 먹거리 문제 정도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혼자 영화 보러 가는 건 쉬워도 혼자 밥 먹는 게 어려운 1인 가구들에게 먹는 문제가 최대의 고민인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점심시간 혼자 맛집을 찾아갔다가 왠지 미안해서 발길을 돌린 경험은 싱글턴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이야기일 테니 말이다.

 

<SBS 스페셜>싱글턴, 혼자 살아서 좋다!?’라는 제목으로 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전문가들은 현재 우리나라의 1인 가구 비율이 네 집 건너 한 집에 육박하고 있고 2030년에는 세 가구 중 하나가 1인 가구가 될 것이라며 싱글턴은 이미 확정된 미래라고 말한다. 즉 과거의 대가족이 핵가족을 거쳐서 결국은 싱글턴의 삶의 방식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 이렇게 확정된 미래라 단언하는 데는 그만한 사회적 토대의 변화가 근거로서 깔려 있다.

 

<고잉 솔로 싱글턴이 온다>의 저자 에릭 크라이넨버그는 여성들의 지위가 향상되면서 점점 결혼의 틀로 들어가기 보다는 일하며 혼자 살아가는 삶이 늘고 있고, 통신혁명으로 가족이 아닌 다른 커뮤니티를 통한 소속감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대도시의 형성은 전통적인 가족주의를 해체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삶을 만들어내고 있고, 무엇보다 혁명적인 수명연장은 어쩔 수 없이 혼자 사는 삶을 인생에서 누구나 겪게 만든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가족주의에 여전히 몰두하고 있는 사회에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가정적 결합을 촉진하는 무익한 캠페인에 에너지를 적게 투입하고, 이미 혼자 사는 사람들이 더 잘살도록(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고, 사교활동도 활발하게 하도록) 돕는 데 집중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지만 가족주의 형태를 거의 유일한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온 사회가 갑작스레 싱글턴의 라이프 스타일을 모두 소화해내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혼자 살아서 좋다고 외치는 이들은 그 혼자 사는 삶을 마음껏 영위할만한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 혹은 선망하는 직업 같은 제반 조건들이 갖춰진 싱글턴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즉 잘 사는 이들에게는 싱글턴이 하나의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외롭게 버텨내야 하는 불안한 삶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화려한 싱글은 그들을 받쳐줄 수 있는 공적 시스템이 갖춰졌을 때 골고루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지금껏 유지해온 시스템이 온통 가족제도에 맞춰져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이 변화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싱글턴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은 머릿속으로는 이미 진행형이지만 현실이 받쳐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자칫 더한 상대적 박탈감이나 양극화로 치달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단적으로 고독사나 고독한 노년의 삶은 이미 사회문제로까지 제기되고 있다. 고독사 문제는 싱글턴의 삶이 이미 우리네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이 변화된 삶에 대해 사회가 아직까지 아무런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인 가구 비율이 이미 50%에 육박하고 있는 스웨덴의 경우 공동주택이라는 새로운 주거형태를 통해 혼자 살면서도 이웃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삶을 영위하게 해주기도 하고, 또 저소득층에게는 안정된 주거생활이 가능하도록 주택보조금을 주기도 한다고 한다. 싱글턴의 삶이 고립으로 이어지는 것을 국가와 사회가 나서 막아주고 있다는 것.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아직 요원하기만 한 일이다.

 

우리네 대중문화에서 다뤄지는 싱글턴의 삶은 주로 화려한 면만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대중문화가 일종의 선망을 주로 다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막연히 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따라하다가는 오히려 불행한 상황에 놓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화려하건 불행하건 싱글턴은 앞으로 새롭게 등장할 사회유형이라는 점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든,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그것도 아니라면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이 새로운 사회유형에 대비하지 못한다면 그 파장과 사회적 비용은 훗날 더 톡톡한 대가를 요구하게 될 수도 있다.

 

오랜 가족주의의 전통 속에 살아온 우리에게 가족이란 여전히 불변의 가치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래서 TV를 켜건, 영화관을 가건, 아니면 흘러간 가요 한 자락에도 우리는 가족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 가족주의가 늘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가족주의는 때론 가족 이기주의로 변질되기도 했고, 나아가 혈연, 지연, 학연 하는 가족주의의 또 다른 부정적 결과로 확장되기도 했다. 싱글턴의 라이프 스타일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이 개인주의적 삶은 때론 가족주의의 부정적인 면들을 상쇄해주는 대안적 가치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늘어난 수명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된 싱글턴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유리하지 않을까. 어쨌든 가족주의 시대의 황혼은 점점 저물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