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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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생활의 단상

[생활의 단상] 손바닥 상처가 덧나다

D.H.Jung 2007. 10. 11.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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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아이 우산을 펴주다 손바닥에 작은 상처가 났다.
상처는 대수롭지 않았다.

비가 온다는 것을 빼고, 하루는 평상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책을 읽다가 글을 쓰다가 때가 되면 밥을 챙겨먹고...

비가 오기에 간혹 창밖을 쳐다보았다.
아주 어린 시절 생각이 떠올랐다.
콘크리트가 아닌 맨 흙바닥이었던 옛날 시골집에
살 때는 비가 오면 특유의 냄새가 났다.

시멘트에 물이 부어질 때 나던 것 같은 그 텁텁한 냄새는
잘은 모르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빗방울과 함께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콘크리트로 뒤덮여진 서울로 오면서
그 냄새는 향수가 되었다.
그래도 흙먼지 알갱이들이 만들어내는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운동장이었다.

아이의 학교를 찾았다.
그 곳에서 한참을 서서 운동장으로 떨어져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아이와 함께 집으로 와서는 늘 그렇듯 간식을 챙겨주고
학원가는 아이를 바래다주고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그날 밤, 욱신거리는 손바닥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비는 그쳐 있었고 손바닥에 난 작은 상처는 덧나 있었다.
퉁퉁 부은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또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며칠이 또 지났다.
작은 상처였지만 손바닥의 상처는 낫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다 갑자기 어머니가 떠올랐다.

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밥을 차려주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면서
늘 물에 젖어 있는 손을 하고 있던 어머니.
거기 그렇게 있는 지 조차 몰랐던,
그래서 때론 마치 저 바닥의 흙먼지처럼
때론 저 무심히 내리던 비처럼,
때론 늘 젖거나 상처나도 묵묵히 일을 해주던 손처럼,
의식하기 어려웠던 어머니.
내 삶의 타자가 아닌 일부였던 어머니.

세상에는 그렇게 존재감을 느끼기가 어려울 정도로
삶의 일부가 된 것들이 있었다. 이 상처처럼.

손바닥의 상처는 나을 기미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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