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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생활의 단상

술과 나

D.H.Jung 2005. 9. 1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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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술과 묘한 인연을 가지고 태어났나보다.
할아버지께서 어릴 적부터(취학전이었음) 주전자에 받아 마시던 막걸리 자시고
꼭 내게 남은 걸 줄 때부터 알아봤다.
할아버지는 젊어서 술 때문에 사단이 났다고 하더만...
가끔 명절 같은 날에 선산에 친척들이 모였을 때, 서로 술을 피하는 모습에서
나는 진즉부터 알아봤다.
그 술을 피하는 친척들이 사실은 엄청난 주당들이었고 각각 몇 번씩은 집을 말아먹다
풀어먹다 했다는 것을...
그래서 할아버지 산소 앞에서는 마치 자신들을 보듯 경건했던 것을...

아버지도 만만찮게 술을 자셨다.
30년이 넘게 조기축구를 나가시면서 아침 겸 반주로 시작하던 것이 술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술로 사단난 일들을 아셨던 터라,
조심에 조심을 하셨고 따라서 결국은 당신 몸만 사단을 내셨다.

나이들어 형과 술을 하면서
소주 7병을 자세한번 흐트리지 않고 마시는 걸 보고는
이 사람도 무시못할 주당임을 알아챘다.
가끔 인천 연안부두에는 이 사나이가 술을 마신 후 인천 철도파들과 벌였던
살벌한 소주병 깨기 이야기가 바람에 전설로 전해온다.
수십 명을 상대로 형은 소주 궤짝을 꿰차고(마치 취권의 소화자 같이)
술을 마시면서 다가오는 적들에게 병을 던졌다고 한다.
결국 형도 술로 사단이 났다.
몇 개 사업을 했지만 워낙 술과 친구(대체로 술을 좋아하면 친구도 좋아하게 된다)에게
퍼주는 게 많아서 실패하고 말았다.
빚쟁이들로부터 호주 사막으로 이 사내의 도망길을 열어준 나는 거기서 보았다.
원주민들을 모아 술을 마시던 위대한 주당의 모습을.

누님 역시 술에 강했던 터라 언젠가 가족들이 모여 함께 술을 마셨을 때,
나는 엠티에 온 줄 착각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살벌한 가문의 비밀을 안고 진로에 첫 직장을 잡았다.
그다지 훌륭한 회사는 아니었지만, 술 회사였기에 나는 인정받았다.
(그럼 그렇지.. 네가 어느 가문의 자식인데..)
거기서 나는 술을 다시 배웠다. 술의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만일 1년 후, 회사가 화의신청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 때 함께 술의 세계를 탐험했던
팀장과 아직도 그 신비의 세계를 넘나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나보고 먼저 나가 있으면 자신들도 금방 나오겠다고 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거기 붙어 있다. 나로서는 그 술에 대한 집념에 놀라울 뿐이다.)
그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신들을 마루타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음에 들어간 회사에는 아담이라는 요상한 인간을 만들어놓은 P박사(사장은 극구
자신을 이렇게 불러달라고 했다.)가 있었다.
회사 운영할 돈은 없어도 술은 마셔야 하는 사나이.
그 사내에게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도 술을 마시는 호연지기를 배웠다.
그 사내는 그렇게 술로 버틴 끝에 지금은 그래도 자리잡고 잘 살고 있다.

몸이 말이 아니었다.
의사를 찾아갔는데, 다짜고짜 그 의사가 연대 선배라며 잡지나 만들자고 했다.
그날 술을 엄청마셨는데, 그 첫 시작은 충무로의 낮에서부터 다음날 낮까지 마시는
술의 장사들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건강 챙기는 의학잡지 편집장인 나의 몸은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때려쳤다. 그런데...
술과 나의 인연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웬 와인?
와인샵에 친구 따라 놀러갔다가 나는 와인의 길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공짜로 와인을 마실 수 있다는 말에 눈이 뒤집혀 와인을 배웠다.
그렇게 2년이 지나자 이제 주도와 매너가 뭔지 알게됐다.

프리랜서로 가만히 있으니 이제 술이 내게 달려왔다.
와인, 진로, 의학잡지의 주당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일하자는 얘기는 술먹자는 얘기로 들렸다.

어쨌든 지금은 그 놈의 술과 인연이 되서 먹고 살게 되었다... 근근이.
글이나 쓰면서...
소설이나 써볼까 생각중이다...

물론 술 얘기가 빠질 수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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