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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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가 만들어낸 불가사리, 북핵과 양극화

D.H.Jung 2006. 10. 2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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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과 양극화가 불가사리 이야기로 읽히는 이유

괴물이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 탄생과정 속에 분명한 목적의식을 드러낸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의 탄생이 미군부대에 포름알데히드를 무단 방류한 사건에서 비롯된 것은 이 영화의 목적의식이 바로 미국과, 미국의 이런 행동을 방치하고 자기 이권만 밝히는 정부에 대한 비판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괴물은 에둘러 말하기 위한 장치인 셈인데, 괴물담의 파급력은 ‘에둘러 말한다’는 그 장점에서 비롯한다.

이런 괴물담 중에 우리네 민담으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이 ‘불가사리’란 괴물 이야기다. 쇠를 먹고, 먹으면 먹을수록 몸집이 커지는 이 괴물이야기는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대중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온 ‘불가사리’란 이야기는 그 괴물이 그랬던 것처럼, 조금씩 변용되어 구술된다.

당연한 것이지만 이 변용은 구술자의 목적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작품으로 보자면 기획의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가 처한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북핵과 관련한 전쟁공포의 확산’과 ‘부동산으로 대변되는 양극화 현상’이 될 것이다. 최근 ‘불가사리’라는 텍스트가 다시 읽히는 것은 북핵이라는 것이 실제의 물리적인 핵 이외에도 불가사리와 같은 알레고리로 읽히기 때문이며, 한쪽은 한없이 작아지고 다른 한쪽은 한없이 커져만가는 양극화 현상이 불가사리 같은 헛된 미망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반전을 담은 불가사리
먼저 간략한 불가사리 그 본래의 이야기에 대한 환기. 때는 조선 초, 태조 이성계는 숭유억불정책을 내리고 이 때문에 승려들은 피신을 하게 되는데, 그 중 한 승려가 처남집 다락방에 며칠을 숨어 지내게 된다. 심심해서 밥알 찌꺼기를 뭉쳐 만든 괴물모양 인형이 처음엔 바늘을 먹더니 점점 못, 숟가락, 젓가락 등등 쇠붙이를 먹기 시작하고 그럴 때마다 점점 덩치가 커져만 간다. 괴물은 급기야 이 집을 뛰쳐나가 전국을 돌며 쇠붙이를 먹는다. 병사들의 창과 칼도 모두 먹어버리니 그 때문에 ‘불가사리(不可殺 : 죽일 수 없다)’란 이름을 갖게 된다. 이러자 왕이 명을 내려 불가사리를 없애는 자에게 벼슬을 내리겠다고 한다. 처남은 문제가 생겼을 때 펴보라며 승려가 남겨놓은 쪽지를 열어보는데 거기에는 불가살이(불可殺, 즉 불로 죽이는 게 가능하다)라 적혀 있었다. 결국 처남은 불가사리를 유인해 불을 지펴 그 몸을 녹여 없애 벼슬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본래의 이야기는 구전되거나 설화집으로 묶여 나오다가 1998년, 두 가지 서로 다른 편역을 한 동화로 탄생한다. 1998년은 북한이 NPT를 탈퇴한지 4년 만에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날렸으며, 우리는 1997년 맞은 IMF경제위기가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한쪽에서는 전쟁에 대한 위기감이, 또 한쪽에서는 자본주의의 위기감이 드러나고 있었던 이 시점에, 불가사리는 그 두 얼굴로 나타난다. 그 둘의 차이점은 괴물 불가사리의 탄생배경에서 극명하게 대비된다.

정하섭씨가 엮은 ‘쇠를 먹는 불가사리(길벗어린이)’에서 괴물은 한 아주머니가 밥풀로 인형을 만들어 불가사리라 이름짓고는, ‘죽지말고 모든 쇠를 먹어 치우라’는 소망을 통해 탄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주머니가 남편과 아이들을 모두 전쟁에서 잃었다는 것이다. 즉 이 이야기는 ‘반전’에 포인트가 맞춰져 있다. 그 후 이 불가사리는 아주머니의 바람대로 쇠란 쇠는 다 먹고 치우고,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그 무기까지 다 먹어 치워 전쟁을 막는다. 인기가 높아 가는 불가사리가 불안해진 왕이 아주머니를 잡아 놓고 불가사리가 오길 기다렸다 불을 지른다. 그런데 불가사리는 녹아 내리는 몸도 아랑곳 않고 아주머니를 구해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 편역 속의 불가사리는 인간을 돕는 영물이며, 인간의 탐욕에 경종을 울리는 존재이다.

북한의 불가사리, 계급투쟁 이야기가 아니다
북한에서 만들어진 ‘불가사리’란 제목의 영화는 정하섭씨의 편역과 비슷한 반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하섭씨의 편역에서 등장하는 아주머니 대신 농기구를 무기로 만들라는 명을 어기는 대장장이와, 그가 옥사하면서 만든 불가사리에 피를 떨어뜨리는 딸이 등장할 뿐이다. 고 신상옥 감독이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1985년 12월에 완성되었지만 외부에 공개된 것은 1998년 일본에서였다.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당시 헐리우드 괴수영화였던 ‘고질라’의 흥행을 앞질렀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기운을 타고 국내에도 상륙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당시 고 신상옥 감독은 “많은 사람들이 북한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며 “대부분의 남한 사람에게 북한 영화는 빨간 영화, 이상한 영화, 살벌한 영화, 촌스러운 영화 등의 느낌으로 남아 있다”는 김영훈의 ‘북한 영화 어떻게 볼 것인가’의 내용을 언급했다.

2000년 당시 화해무드가 조성되었지만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가 처음 공개된 1998년만 해도 북한은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날리며 긴장감을 조성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작에 북한을 비롯해,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까지 참여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이 영화는 우리의 고 신상옥 감독이 만들었고, 일본에서 특수촬영의 1인자인 나까노 감독과 고지라 역을 맡았던 배우까지 참여했다.

고 신상옥 감독은 당시를 회고하며 쓴 칼럼에서 ‘불가사리를 평론가들은 주로 계급투쟁의 측면에서 해석하려 하는 것 같다’며 그러나 “자신이 말하려던 것은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강대국들의 핵무기 경쟁에 대한 경고였다”고 밝힌 바 있다. 지금의 북핵 정세를 보면 아이러니로 느낄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러한 영화의 제작이 말해주는 것은 도리어 북핵을 바라보는 북한의 시각과 외부의 시각이 그만큼 다르다는 것이다. 전쟁도 핵도 원하지 않지만 북핵이라는 필요악, 불가사리가 점점 몸집을 불린 것은 외부의 제재와 압박, 전쟁의 공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당대의 희망 섞인 우려의 목소리를 담은 북한의 ‘불가사리’는 외부의 창과 칼을 먹고 지금까지 그 몸집을 불려온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 불가사리는 지금 남한으로 남하하고 있는 중이다.

욕망의 헛됨을 담은 불가사리
북한이 경제적인 피폐와 외부의 제재로 인해 북핵이라는 최악의 괴물을 만들어낸 반면, 남한은 급격한 경제 몸집 불리기의 끝자락에서 맞은 IMF 경제위기를 구조조정이라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넘어보려 했으나, 결과는 한쪽 몸을 더 키운 기형적인 불가사리를 만들어냈다. 1998년 같은 해 나온 김중철씨의 ‘불가사리(웅진출판)’는 이러한 남한의 문제를 알레고리화한다.

김중철씨가 엮은 ‘불가사리’에서 괴물의 탄생은 어떠한 원한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엉뚱하게도 어느 산 속에 사는 할머니의 때에서 비롯된다. 할머니가 뭉쳐놓은 때 뭉치가 방안을 굴러다니면서 바늘을 먹고는 괴물이 되는 것이다. 불가사리는 마을로 내려가 난장판을 만든다. 농기구를 다 먹어버리니 사람들은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밥도 먹을 수 없다. 관군이 나서 불가사리를 죽이려 하나 불가사리는 오히려 관군들의 창과 화살까지 먹어버린다. 구덩이를 파고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이나 불가사리는 구덩이를 빠져나와 온 동네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해결책이 또한 엉뚱하다. 할머니가 마을로 내려와 “장난이 심하구나!”하면서 부채로 불가사리의 등을 툭툭 치는 것이다. 그러자 불가사리는 먹었던 쇠붙이들을 다 토해놓고는 다시 때 뭉치가 되어버린다. 할머니는 그 때 뭉치를 갖고 산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그 후로 할머니를 본 사람은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 편역 속에 등장하는 불가사리는 탐욕스럽게 쇠붙이를 먹어치워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괴물이다. 그렇다면 이 편역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자본, 돈, 욕망의 헛됨에 대한 것은 아니었을까.

김중철씨가 편역한 ‘불가사리’는 좀더 불교적이며 심지어는 도가적인 색채까지 띠고 있다. 할머니가 부채로 불가사리의 등을 툭툭 치는 장면은 마치 인간들에게 부질없는 미망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우린 때 뭉치 만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김중철씨의 불가사리에 대한 해석은 여러모로 당대 버블경제의 끝자락에서 만난 IMF 경제위기라는 괴물을 떠올리게 한다. 경제개발로 마치 불가사리처럼 집어삼키며(이 불가사리가 먹어치운 것은 아마도 과거의 가치들이 될 것이다) 빅뱅해온 나라의 미망이 모두 헛된 부질없는 것이라는 질책으로 읽힌다. 그 징후들처럼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1998년)는 불가사리의 그 모습처럼 허망하기만 하다. 여기서 불가사리는 두 가지 뜻, 즉 ‘불+가살(可殺 : 불로써 죽일 수 있다)’과 ‘불가살(不可殺 : 죽일 수 없다)’중, 후자를 채택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자본주의의 욕망이라는 것이 채워질 수 없는 무한대의 증식을 예고하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욕망은 그 자체가 허망하다는 인식, 즉 내부에서의 자성을 통해 없어지는 것이지 외부적인 조건으로는 없앨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불가사리는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가. 참여정부 이후 난항을 겪고 있는 부동산 대책을 두고 볼 때 규제와 통제를 통해 줄이려 하는 불가사리는 도통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과거에 비해 불가사리는 약한 자의 것을 빼앗아 더 몸집을 불려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정부는 부동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지 못했다.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접근이 아닌 그 때 그 때의 임기웅변적인 정책으로 정부에 대한 불신만 더 커지면서 불가사리는 이제 통제불능의 크기를 예고하고 있다.

불가사리를 없애는 유일한 길
북핵이든, 양극화 현상이든 그 기저에는 반드시 공포가 자리잡는다. 이 두 문제는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비롯되는 운명적인 전쟁의 공포와, 그 공포가 양산해내는 마구잡이식 성장이라는 포름알데히드를 먹고 자란 괴물이다. 괴물의 성장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공포를 걷어내는 일이다. 공포가 만들어내는 것은 외부에 대한 불신이며, 내부에 저 스스로 만드는  헛된 미망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저 스스로 공포에 휩싸이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모두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들이다. 그 공포를 조장하는 그 누군가를 정확히 직시하는 것, 그것이 불가사리라는 괴물을 없애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