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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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어쩌다 상투적인 게 되었을까

D.H.Jung 2009. 8. 2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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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정작 배우지도 못하고, 소처럼 일만 해온 가난한 엄마. 딸만은 다른 삶을 살게 해주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준 엄마. 냉수로 굶주린 배를 채우며 거짓 트림을 하면서 딸에게 밥을 덜어주고, 심지어 욕을 해대는 딸에게도 “나 아니면 누구에게 하소연 하겠냐”며 오히려 감싸주었던 엄마. 엄마는 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새끼, 보고 싶은 내 새끼. 너한테는 참말 미안허지만 나는 니가 내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 니가 허락만 한다믄 나는 계속 계속 너를 내 딸로 낳고 싶다. 아가, 내 새끼야. 그거 아냐?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제일 보람된 것은 너를 낳은 것이다.”

그 엄마에게 딸이 찾아온다. 암에 걸려 남은 마지막 시간을 부여잡고. 떠나기 전 딸은 그때야 엄마라는 존재를 알아채고 이렇게 말한다. “나를 제일 사랑해주는 사람. 내 맘을 제일 잘 아는 사람. 나를 제일 잘 이해해주는 사람. 나를 제일 이쁘다고 하는 사람. 내 얘기를 제일 잘 들어주는 사람. 나를 믿어주는 사람.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 바로 엄마라는 거, 나 이제야 알고 떠나요. 엄마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그리고 엄마보다 앞서간 딸은 엄마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이승을 맴돌며 이런 말을 남긴다. "다음 세상에선 제 딸로 태어나 주세요. 제게 주신 크신 사랑을 되돌려 드릴 방법은 그 길밖에 없습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을 저미는 이 단순한 스토리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것은 <친정엄마와 2박3일>이라는 2009년 상반기 최고의 히트작으로 꼽히는 연극의 한 부분이다. 강부자가 어머니 역을 전미선이 딸 역을 맡아 호연을 펼친 이 연극은, 이 땅의 무수한 엄마들과 딸들(심지어 남성들까지)의 심금을 울렸다. 막 눈물이 와락 쏟아질 것 같은 전미선의 얼굴이 찍혀진 포스터는, 연극을 보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끌어당긴다. 그 표정 하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수많은 말을 우리들에게 건넨다. 그 앞에서 눈물은 무기력할 정도로 흘러내린다. 어째서 그럴까. 눈물은 정말 이다지도 상투적인 어떤 것일까.

또 다른 풍경 하나. 한 해상구조대원이 여행 온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 여자는 남자에게 “당신은 3시 같은 남자”라고 말한다. 뭘 시작하기엔 늦은 거 같고, 뭘 끝내기엔 너무 빠르다는 뜻. 그런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억지로 끌려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게 되고, 마침 쓰나미가 몰아닥친다. 그 사실을 안 '3시 같은 남자'는 그들을 구하러 헬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고, 여자는 구했지만 또 다른 남자를 구하는 도중, 헬기 레펠이 고장이 난다. 한 사람만 올라갈 수 있는 상황. 3시 같은 남자는 시계를 그 남자에게 풀어주며 말한다.  “이거 꼭 좀 전해주이소. 그리고 괜찮아요. 아직 3시 안됐어요!”  3시 같은 남자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바다로 떨어져 죽는다.

1천만 관객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영화 <해운대>의 한 장면이다. 어찌 보면 뻔해 보이는 이 스토리는 그러나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구하는 그 행위와 사랑하는 한 여인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머 같은 유언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며 눈물샘을 자극한다. 시종일관 웃음을 터트리게 했던 영화는 후반부에 와서 쓰나미라는 죽음의 그림자를 세워두고 그 유쾌한 관계를 비극적인 스토리로 바꾼다. 객관적으로 그 스토리 구조를 살펴보면 유치할 정도로 단순하지만, 그렇다고 어쩌랴. 바보처럼 눈물이 쏟아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드라마를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나는 경험을 하고는, “나 왜 이러는지 몰라”하고 자책한 적이 있을 것이다. 눈물은 늘 그렇게 주책없는 구석이 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나, 그저 그런 시시한 유행가에도 쉽게 넘어가는 이 감상적인 놈. 그래서 어떤 눈물은 흘리게 되면 도리어 기분이 나빠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를 운운하지 않아도 눈물은, 우리 마음에 찰랑찰랑 채워지는 감정의 수위를 범람하게 하고 그를 통해 마음을 정화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신파라고 부르는, 늘 뻔한 눈물범벅의 이야기를 보면서 과거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는 어르신들이 계신 것은.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이른바 쿨한 시대다. 눈물 같은 축축함은 이 시대에서는 숨겨져야 할 그 무엇으로 치부된다. 우리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이 실생활에서는 아니다. 우리의 생활을 둘러보면, (물론 그만큼 감동 없는 안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극단의 상황에 처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예외적인 사건으로 인식하는 우리네 삶은 그만큼 안전하다. 눈물의 상황 자체를 구질구질한 것으로 여기는 우리들이 하는 것은 바로 이 타인의 상황을 회피하거나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틀로 매몰되는 것이다. 나와 남의 명확한 구분. 그리고 타인의 불행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명백한 금 긋기. 심지어는 스스로의 불행마저 불행으로 여기지 않으려는 안간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몸부림.

현실에 없는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는 문화 콘텐츠들의 판타지적 속성상, 이 현실에 없는 눈물은 이제 그 콘텐츠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영화관에서 TV 앞에서 연극을 보러 간 극장의 객석에서 콘서트장에서 그 어둠 속에 앉아 비로소 숨기고 숨겨왔던 눈물을 끄집어낸다. 무언가가 눈물샘을 건드리면 이미 수위에 도달해있던 눈물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마치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을 흘린 것에 대해 변명하듯, 그렇게 흘린 눈물의 정당성을 찾아내려 한다. 작품이 너무 감동적이었어. 이런 정당성을 얻는다면 그 눈물은 주책이 아닌 의미를 찾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 정당성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흘린 눈물에 대해 복수하듯, 작품을 저질 신파로 처분한다. 이제 눈물에도 어떤 격을 구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눈물에 격이 어디 있으랴. 그것은 작품을 평가할 때나 그런 것이지, 우리의 눈에서 실제로 떨어지는 눈물에는 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신파적이고, 식상하고, 그저 그런 시시한 이유라고 해도, 우리가 실제 생활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눈물에는 저마다 진정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현실에서조차 어떤 잣대를 내세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건 쿨한 게 아니라고. 눈물이 나와야 할 때조차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이 시대가 우리에게 음으로 양으로 강요하는 모습이다.

눈물이 버려져야 할 그 무엇이 된 것은, 또 눈물이 구질구질한 인생의 대명사로 치부된 것은 어찌 보면 과도한 긍정론이다. 슬픈데도 웃으라니! 삶이 힘겨운데도 웃으면서 버티라니! 외부에 의해 가해지는 고통을 바라보고 솔직하게 반응하기보다, 그것을 내면화하고 숨기는 것. 우리에게 눈물은 약자의 징표처럼 여겨지는, 따라서 때로는 식상해져버린 상투가 되어버렸다. 모든 이들이 웃고 있거나, 무표정하게 있는 것.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강요받은 것 같은 그 풍경. 저 밑바닥에 분명히 존재하는 눈물을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해온 생활의 훈련. 그래서 이제는 어둠 속에서나 가상의 스토리 속에서나 슬쩍슬쩍 눈물을 찍어내야 하는 얼굴. 그것이 우리네 삶의 얼굴이 아닐까.
(이 칼럼은 Yes24의 문화웹진 나비(nabeeya.yes24.com)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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