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왜 경합에 빠질까

‘바람의 화원’에는 그림 경합이 매번 등장한다. 신윤복(문근영)이 화원 승급을 두고 ‘단오풍정’을 그릴 때도 경합이 등장하고, 청국에 보낼 그림을 두고 ‘군선도’를 그릴 때도 김홍도(박신양)와 장벽수(김응수)의 경합코드가 등장한다. 또 동제각화의 명을 받고 김홍도와 신윤복이 주막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며 이것은 어진화사 경합을 통해서도 이어진다.

어진화사 경합의 풍경을 보면 하나의 스포츠가 연상된다. 화제를 내린 왕이 있고, 그 시험을 진행하는 예조판서가 있으며, 감독관으로 홍국영이 있다. 그리고 선수들로 김홍도-신윤복팀과 이명기(임호)-장효원(박진우)팀이 있다. 예조판서가 등장해 “이번 경합은-”하고 말하는 장면은 마치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스포츠의 그것과 같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대회의 관객들은 경합장은 물론이고, 김조년(류승용)을 위시한 장사치들의 도박내기가 있으며, 소박하지만 서민들의 내기판이 있다. 물론 경기 결과에 따라 입지가 달라지는 선수(?) 주변 사람들까지 거기에는 존재한다.

이 완벽한 스포츠의 구성요소들은 이미 예전 ‘대장금’에서도 등장했었다. 장금(이영애)과 금영(홍리나)이 선수로 등장하는 이 요리 스포츠에는 스승들(한상궁과 최상궁)이 존재하고, 그 판관으로서 중종(임호)의 말 한 마디가 경기를 결정한다. 이것은 ‘이산’으로 이어지면서 이병훈 PD 사극의 색깔을 구축한다. ‘이산’에서는 특이하게도 그 선수가 정조 이산(이서진)이었을 뿐, 거기에는 판관으로서의 영조(이순재)가 있었고 상대편 선수로 노론 벽파세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닮아가는 사극과 스포츠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스포츠가 말 그대로 ‘각본 없는 드라마’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반면, 사극은 대체로 결과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바람의 화원’에서도 늘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실어주는 인물은 바로 정조(배수빈)다. 실제 역사 속에서도 뛰어난 예술가였던 정조가 그림을 놓고 하는 감동(평가)은 마치 촌철살인의 해설자가 풀어낸 경기 해설을 듣는 것만큼 묘미가 있다. 이 해설자이자 판관이 어느 한 팀을 전적으로 밀어주는 형국이 대체로 사극이 가진 스포츠와 다른 점이다.

‘바람의 화원’에서 정조는 김홍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대장금’에서 중종은 결국에는 장금의 손을 들어주며, ‘이산’에서 영조는 정조를 알게 모르게 밀어준다. 주인공은 늘 이 경쟁상황 속에 들어가서 어려움에 직면하지만 결국에는 이기게 된다. 이렇게 뻔한 결론을 대중들을 다 알면서 왜 이 경합에 빠져들까. 이것은 아마도 이 살벌한 경쟁사회 속에서 대중들이 갖게되는 환타지를 자극하기 때문이 아닐까.

점점 어려워지기만 하는 경제 상황, 그 속에서 더욱 더 경쟁 속에 뛰어들어야 하는 대중들에게 환타지 속에서나마 이 안전한(?) 게임에 빠져들고픈 욕구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사극이 점점 스포츠를 닮아 가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이 살벌한 경쟁사회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스포츠와 다른 점, 즉 예측되는 경합 결과에 대한 기대는 역시 그 경쟁하는 사회를 그대로 드라마 속에서조차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는 반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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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나를, 나만 혹은 나도

결혼하면 사랑은 어떻게 변할까. 혹은 결혼은 사랑을 구속할 뿐인가.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이 도발적인 제목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결혼과 사랑의 이중주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말은 ‘결혼한 아내가 또 결혼했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진술이 된다. 그런데 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네 관습적, 윤리적, 법적 기준에 의한 것이다. 이것을 넘어선다면 그것은 문장으로서 말이 된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바로 그 관습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판단하는 그것을 눈앞에 보여주면서 이것도 말이 된다고 주장하는 영화다.

아내 주인아(손예진)는 그 이름에서부터 역전되어 있는 남녀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남편 노덕훈(김주혁)은 그녀를 “주인아씨”라고 부르게 된다. 따라서 영화 속에서 주인아는 자유를 구가하는 여인인 반면, 노덕훈은 그 자유로운 여인에 전전긍긍하는 전형적인 소심남이다. 노덕훈은 그녀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소유하길 바라지만, 무심코 뱉은 “내 거”라는 말에 그녀는 “나 자길 사랑하지만 자기 건 아냐”하고 되받는다. “나를 사랑한다”고 여기게 된 여인을 “나만을 사랑하게” 하고픈 욕구 때문에 노덕훈은 그녀에게 결혼을 하자고 조른다. 하지만 결혼으로 ‘내 거’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그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 순간부터 그는 그녀가 ‘나도’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를’에서 ‘나만’으로 그리고 ‘나도’로 바뀌는 이 3단계의 사랑을 영화는 축구경기를 빗대서 보여준다. 서로 각자의 위치에서 사랑하던 ‘나를’의 단계에서 보여지는 축구경기는 각자의 공간에서 보는 레알 마드리드와 바로셀로나 FC의 경기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밤새 본 이 경기를 공동화제로 서로에게 다가간다. ‘나를’에서 ‘나만’으로 가는 두 번째 단계, 즉 결혼을 하게 되는 그 지점에 등장하는 건 2002 월드컵 스페인전이다. 홍명보가 골을 넣는 그 집단적인 황홀감에 젖어 있는 순간, 주인아는 노덕훈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만’에서 ‘나도’로 가는 세 번째 단계에서 보여주는 경기는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유럽에서 아내와 두 남편과 그리고 딸 이렇게 넷이 함께 보는 축구경기다.

영화가 굳이 축구를 빗대 우리네 결혼의 속살을 보여주려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단지 축구경기가 남녀 간의 사랑 행위를 상징적으로 닮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네 정서 속에 담겨 있는 결혼이라는 틀 이면의 얼굴이 담겨져 있다. 즉 2002 월드컵의 집단적인 분위기에서 주인아가 허락하는 결혼은, 결혼이라는 것이 단지 사랑의 종착지가 아니라 그렇게 사회의 집단적인 분위기에서 강요되는 어떤 것이라는 걸 암시한다. 특히 아내가 결혼한 후, 두 집 살림을 하는 주인아가 아이를 갖게되자 “우리 아이야?”하고 묻는 대목에서는 우리네 핏줄 의식에 대한 집착이 들어 있다. 주인아는 ‘우리’아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저 노덕훈이 말하는 ‘우리’와 의미가 다르다. 첫 남편과 둘째 남편 그리고 아기까지 아우르는 ‘우리’를 뜻하는 것이다.

“한국 축구의 문제점이 뭐냐”고 묻는 대목에서 그것은 “골 결정력 부족”이 아니라 “즐기지 못하는 것”이라는 대사는 사랑 그 자체보다 오히려 어떤 목표로써 자리하고 있는 결혼이라는 강박을 에둘러 말해준다. 주인아가 축구에 빗대 말하는 이 투톱 시스템(?)에 “현재 스코어는 불륜이야”하고 소리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렇지만 가끔은 이 여자를 이해하고 싶어진다”고 말하는 노덕훈은 어쩌면 이 농담 같고 게임 같은 상황 속에서 결혼이라는 구속의 틀을 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말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마음이기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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