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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은지심의 드라마, ‘내 사랑 못난이’

‘내 사랑 못난이’에서 신동주(박상민 분)는 잠깐동안의 인연을 맺고 헤어진(쫓아냈다는 말이 맞겠다) 진차연(김지영 분)이 자꾸 신경 쓰인다.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가는 그녀를 차마 무시하지 못하고  “넌 평생 그렇게 남 뒷바라지나 하며 살거다”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그건 아직 관심이 있다는 얘기다.

신동주의 동생, 신동현(경준 분)은 레지던트다. 그는 경계성 인격장애를 겪고 있는 최은우(박다안 분)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그녀의 병은 전부가 아니면 오히려 고통만을 겪을 뿐이라는 걸 잘 아는 신동현은, 그녀와 헤어지려 하지만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녀를 어쩌지 못한다.

사랑 없이 신동주와 결혼했다 이혼해 엔터테인먼트 사장으로 변신한 정승혜(왕빛나 분). 그녀는 스캔들을 일으키고 결국 이혼을 하게 만든 장본인인 진차연을 미워해야 할 것이지만 왠지 그녀에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 도저히 되지도 않는 진차연을 가수로 만들려한다. 그녀는 진차연을 저 가난과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고픈 욕구를 어쩔 수 없다.

자꾸 신경이 쓰이는 드라마
그들은 어찌 보면 전혀 관계가 없는(혹은 없어진) 이들에게 왜 그리도 신경을 쓰는 걸까. 물론 여기서 “신경이 쓰인다”는 말은 “관심 있다”, “사랑한다”는 말의 우회적 표현, 요즘식으로 하면 쿨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인가. 물론 이 드라마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이 사랑얘기임에 틀림없다. 잘 나가는 남자와 지지리 복도 없는 아줌마의 사랑, 로맨스, 환타지는 이 드라마의 주된 골격이다. 그것은 금요드라마의 전통과 잘 맞닿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단지 이 드라마가 갖는 힘을 사랑타령으로만 볼 수 있을까. 과거의 여타 금요드라마들처럼 자극적인 상황이나 불륜 코드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30대 이상 아줌마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젊은층까지 끌어 모으는 이 드라마 속에는 혹시 아줌마의 사랑,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는 건 아닐까. 그저 그런 사랑얘기일거야 하면서도 시청자들을 자꾸 신경 쓰이게 만드는 이 드라마의 진짜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연애드라마치고는 수상한 구조
이 드라마는 먼저 잘난 이들과 못난이들을 나누어놓는다. 잘난 이들의 대표주자가 신동주, 정승혜 같은 인물이고 못난이들의 대표주자가 진차연이다. 그들은 각자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신동주와 진차연이 계약결혼을 하면서부터 이 전혀 다른 세상사람들의 인생은 하나둘 엮이게 된다.

이렇게 보면 신데렐라의 아줌마 버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던 캐릭터들의 부딪침이다.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들 두리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는 진차연으로 대표되는 ‘못난이들’의 현실은 각박하고 눈물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대척점에 있는 신동주, 정승혜처럼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부유한 사회적으로 ‘잘난 이들’은 놀랍게도 가난한 ‘못난이들’의 행복에 끌린다.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자신들이 성공의 꼭대기에 올라오면서 잃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대척점의 맨 앞을 신동주와 진차연이 차지하고 있다면 그 맨 뒤쪽은 진차연의 아들 두리와 신동주의 할머니, 조옥자(여운계 분)가 차지한다. 그 둘은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인물들이다. 어찌 보면 가장 약자로 보이는 이들은 그러나 드라마 상에서 주인공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진차연을 비롯한 ‘못난이들’은 두리를 위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때론 비굴하기도 하고 때론 굴욕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두리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한편 신동주가 유일하게 애정을 쏟는 인물은 치매를 앓고 있는 조옥자다. 그는 결혼의 조건에서조차 상대가 조옥자를 위해 헌신할 인물인가를 먼저 살핀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조옥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진차연만을 찾는다는 것이다. “진가년이 뭐가 그리 좋냐”는 신동주의 물음에 조옥자는 말한다. “그년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고.

사람냄새 나는 드라마
이 할머니의 한 마디는 이 드라마의 구조를 빈부나 ‘잘난 이와 못난이’가 아닌 ‘사람 냄새 나는 이’와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놓는다. 신동주는 이제 알아차린다. 왜 자신이 자꾸 진차연이 신경 쓰이는지. 그것은 바로 그녀에게서 나는 사람냄새다. 그가 할머니에게 이끌리던 그 묘한 힘을 진차연에게서도 똑같이 느낀 것이다.

이 이야기는 비단 진차연과 신동주간의 얘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동생 신동현와 최은우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신동현은 우리가 흔히 현실에서 보는 이성적인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전부가 될 수 있는가’하고 그는 의문을 갖는다. 반면 최은우는 물론 병으로 포장되어있지만,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전부의 사랑’을 하는 인물로 극단화되어 있다. 신동현은 이성이니 사랑이니 하는 허울에 갈팡질팡하고 있는 반면, 최은우는 온몸을 던져(해줄 수 있는 게 안보는 거라면 그거라도 해주겠다는 식의) 사랑을 해나간다. 병자이지만 우리에게 보다 인간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정승혜는 진차연과 그의 단짝 친구인 이호태를 만나면서 ‘행복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질문한다. 그녀는 진차연에게 어떤 외면할 수 없는 인간의 예의를 발견하는 한편, 이호태를 통해 자신의 삶이 허울뿐이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인간적인 삶과 행복’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측은지심’의 드라마
작가는 아마도 양끝에 자리한 두 약자(두리와 조옥자)를 세워놓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당신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들은 막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는 것 같은 안타까움과 불쌍한 마음을 갖게 된다. 아픈 사람을 보며 자신도 아파하는 것,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우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 즉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을 우리는 이 드라마를 통해 경험한다.

물론 이 드라마는 사회적 양극화의 문제를 구조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쉽게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키고는, 사랑이란 허울로 해결하려 한 혐의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하지만 드라마에서 그걸 다룬다면 시청률 제로에 도전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은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세상에 쓰러지지 않고 당당하게 맞장을 뜨는 진차연의 ‘인간적인 모습’이 소중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Posted by 더키앙

변화하고 있는 우리네 드라마들

최근 미국 시즌드라마들의 영향은 우리네 드라마에 양으로 음으로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젊은 시청자들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즌드라마를 접하면서 ‘신파’와 ‘트렌디’로 일관하는 우리네 드라마를 ‘구리다’며 외면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종영한 ‘발칙한 여자들’은 아쉬움도 많이 남는 드라마였으나 그만큼 새로운 면모들과 가능성을 많이 보여준 드라마였다.

‘뒷바라지로 10여 년을 헌신했지만 헌신짝 버리듯 다른 여자에게 가버린 전 남편에 대한 복수극’.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소재라면 끔찍한 공포, 처절한 복수극 아니면 최루성 신파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 괴상한 드라마는 ‘깜찍 발랄한 코믹’에 ‘휴먼 드라마’적인 속성까지 갖춘 어떤 새로움을 보여주었다. 또한 우리의 선입관에 박혀있던 아줌마(생활력의 상징 혹은 가부장제의 희생자)의 이미지를 깨준 드라마이기도 했다.

신파 소재로 신파 깨기
‘발칙한 여자들’의 구도는 신파다. ‘뒷바라지 10년에 버려진 아내’, ‘홀로 아이를 키우며 치과의사가 된 여자’, ‘그녀의 복수극’. 이것은 과거 드라마에서는 신파의 공식으로 등장하던 소재들이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송미주의 10년 고통의 삶이 구체적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고 얘기할 뿐이다.

드라마는 대신 10년 후 성공해서 돌아온 송미주에서부터 시작한다. 복수의 일념으로 성공했다지만 성공한 그녀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진다. 그녀가 아이를 키워내고 그녀의 목표였던 치과의사가 된 순간, 사실 그녀의 복수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성공이 복수’라고 하지 않던가. 이러자 신파가 될 소재는 가벼운 날개를 달기 시작한다. 복수는 귀엽고 심지어는 너무나 가벼워 코믹시트콤 같은 느낌마저 준다.

아줌마로 아줌마 깨기
깜찍 발랄한 전개가 가능한 기본전제는 송미주라는 아줌마의 캐릭터 때문이다. 다 큰 아들을 둔 아줌마이지만 그녀에게서 우리가 과거 아줌마라면 선입견으로 갖고 있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만의 일을 갖고 있고 사랑에 있어서도 당당하다. 나이가 들고 결혼을 했고 이혼까지 했다는 사실은 과거의 아줌마들의 이미지에서는 부정적인 면이 더 부각되었지만 그녀에게 있어 이것들은 ‘풍부한 인생경험’이 된다.

루키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그녀가 스스로 이러한 자신의 장점들을 발산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서 아줌마들의 환타지를 자극하는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과거의 아줌마 이미지를 깨주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현대여성들은 자신의 일과 삶에 있어서 결혼을 했거나 미혼이거나에 상관없이 자신을 스스럼없이 펼쳐 보인다.

시즌드라마로서의 가능성
이러한 소재와 캐릭터의 참신성은 우리 식의 시즌드라마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최근 미국 시즌드라마들은 우리네 드라마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케이블 채널들에 의해 소개된 미국 시즌드라마들은 이제 ‘미드족(미국드라마에 열광하는 사람들)’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시즌드라마들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드라마의 맛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 우리네 트렌디 드라마들의 퇴조와도 연관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 완성도 높은 드라마에 길들여지면, ‘한류’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그 언저리에서 과거의 영광만을 논하는 우리의 트렌디 드라마는 ‘너무 뻔하고 재미없다’는 것이다. ‘발칙한 여자들’의 시즌드라마로서의 가능성은 바로 그런 트렌디 드라마의 뻔하고 재미없는 설정을 깬 그 지점에 있다.

그래도 남는 아쉬운 점들
하지만 이 드라마에도 역시 아쉬운 점들이 많다. 그것은 고상미, 양다림, 양지환, 백억년 같은 다양한 인물들이 포진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그 중심 축이 송미주와 그 주변인물들에 집중되었던 점이다. 이것은 (한 명의 주인공으로 집중되는) 과거 드라마 구도의 힘이 여전히 지금에도 미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또한 여성들의 캐릭터에 비해 남성 캐릭터들이 너무 과장되게 그려져 있다는 점도 옥에 티다. 이 드라마의 남성상은 기혼자와 미혼자가 나누어진다. 어릴수록 더 성숙된 인물로 그려져 심지어는 준이가 가장 사려 깊고 이해심 많은(그는 결국 모두를 용서한다) 인물처럼 보인다. 또한 마지막에 가서 ‘남편의 참회’와 ‘그것에 대한 미주의 용서’라는 해피엔딩의 선택 역시 과거의 구도를 그대로 따라가는 느낌이다.

이것은 모두 매회의 에피소드가 하나씩 끝나면서도 계속 연결성을 갖는 시즌 드라마와 ‘다음 회에 계속’으로 이어지는 우리 식의 드라마 구도 사이에 이 드라마가 서 있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좀 실험적일 수 있지만 애초부터 시즌드라마 형식을 취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여전히 참신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제 막 변화하고 있는 우리네 드라마들의 신호탄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네 드라마들은 이제 좀더 참신하고 좀더 새로우며 좀더 파격적인 그 어떤 것을 요구한다.

Posted by 더키앙

서민적이고 친근한 캐릭터, 시대의 요구

요즘 고현정의 변신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쌍소리는 물론이고 망가지는 연기에서부터 거친 대사를 천연덕스럽게 소화해내는 새로운 면모들까지 고현정은 싹 달라졌다. 과거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우아하고, 청순했던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고현정 스스로 그런 이미지를 깨려고 작정한 듯 하다.

‘봄날’ 이후 1년여의 장고 끝에 선택한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 역시 무엇보다 화제가 된 것은 고현정의 변신이다. 영화 속에서 고현정은 그간의 공백기간을 단 몇 마디의 꾸미지 않은 말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채워버렸다. “차가 귀엽네요”라는 말에 “똥차예요”라고 답변하고,  “키가 크다”는 말에 “잘라버리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는 신선한 충격마저 느껴졌다. 기자시사회에서 그녀의 변신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그런 건 일상용어 아니냐”고 되받아 칠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이러한 고현정의 변신은 ‘해변의 여인’이 주는 영화적 재미에서 상당부분을 차지하면서 동시에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에 일조했다. 홍상수 감독은 본인이 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려고 했던 ‘상투적인 이미지에 대한 전복’을 고현정이라는 연기자가 가진 이미지의 파괴를 통해서도 보여주었다.

‘해변의 여인’의 이미지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는 ‘여우야 뭐하니’로 다시 맨 얼굴을 내밀었다. 영화 속의 털털하고 화장기 없는 고현정이 이제는 TV로 들어온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의 고현정은 ‘해변의 여인’과 마찬가지의 파격을 보여주었다(아마도 영화를 보지 않았던 시청자라면 그 느낌은 배가 됐을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연속적인 행보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인다. ‘해변의 여인’에서 작품에 딱 맞는 연기자가 고현정이라는 인물이었듯이, 고현정에게도 ‘해변의 여인’은 자신의 이미지 변신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 분명하다.

지금 고현정이 하고 있는 작업은 귀족적이고 우아하며 청순한 과거의 이미지에서 보다 서민적인 이미지로의 귀환이다. 그것은 고현정 개인에게 의미 있는 일이다. 10년 전 정상의 자리에서 은퇴하고, 재벌가 며느리로의 변신한 그녀는 언론과의 끊임없는 숨바꼭질 끝에 결국 이혼하고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 10년 간 연기자가 아닌 고현정 개인으로서의 이미지는 서민과는 거리가 먼 상류층의 그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녀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녀를 보는 대중들의 막연한 상상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연기라는 친정으로 귀환하면서 먼저 이러한 자신의 이미지부터 부수기로 작정한 듯 하다.

이러한 고현정의 변신, 즉 청순하고 우아한 이미지의 파괴는 극중 캐릭터의 진정성이 잘 살아있는 작품 하에서만 가능하다. 다행히도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은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공감이 가는 작품 속 이야기에서 우리는 고현정의 파격을 ‘리얼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것은 드라마 ‘여우야 뭐하니’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내 이름은 김삼순’이란 드라마에서 파티쉐라는 익숙하지 않은 직업을 리얼하게 드러냈듯이 ‘여우야 뭐하니’에서도 곳곳에 이런 리얼함이 엿보인다(잡지사, 산부인과 등등). ‘성담론’이라는 자칫 오해될 소지가 많은 소재가 오히려 당당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리얼함에서 오는 진정성’이 확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고현정이 거침없이 얘기하는 속내는 마치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를 보는 듯 하다. 성 칼럼니스트로서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가 당당하고 적극적이면서도 귀엽고 발랄한 현대미국여성들이 요구하는 이미지를 잘 소화해냈듯이, 고현정이 연기하는 고병희는 우리 식의 적극적인 여성상을 통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보다 서민적이고 친근한 캐릭터는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스타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과거 ‘선망’의 대상이었던 스타는 이제 ‘질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시청자와 수평적인 관계를 요구한다. ‘비호감 연예인들의 인기’와 ‘연예인 생얼에 대한 뜨거운 관심’은 바로 스타와 시청자간의 새로운 관계를 말해주는 징후들이다. 이것은 ‘솔직함’ 혹은 ‘털털함’에 대한 시청자들의 요구와 연예인 스스로의 ‘자신감’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시청자들은 더 이상 연예인에게 ‘인형 같은 카리스마 혹은 신비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바로 내 주변에서 살아있으면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인간’을 요구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고현정의 서민으로의 귀환은 당연하고도 잘 된 선택임에 분명하다. 그녀는 한없이 망가질 것이나 여전히 귀엽고 바로 내 옆집에 사는 여자 같으면서도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더키앙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의 재미가 서 있는 지점

고구려 사극이 지금까지의 사극과 다른 점은 그 시대상이 고구려라는 것이다. 명명백백한 역사적 사료가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이렇게 같은 소재의 드라마가 거의 동시대에 방영될 수 있었을까. 역사적 사료의 빈곤함으로 인해 생겨난 고구려라는 미지의 세계는 많은 작가들의 상상력을 매혹시키는 구석이 있다. 게다가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태생과 맞닿아 있다. 그러니 전 세계적인 경향으로 등장하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한 유혹과 바람은 우리에게 있어 고구려 사극이라는 지점에서 맞닿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의 ‘고구려 사극 삼국지’라 일컬어지는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은 고구려라는 ‘역사’와 그 역사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상상력’이라는 양날의 칼을 쥐고 탄생한 셈이다.

주몽 - 상상력을 취해 인물을 살리다
40%대의 시청률을 유지하는 ‘주몽’의 힘은 바로 퓨전사극이라는 데 있었다. 상상력이 갖는 아기자기한 재미, 멜로드라마 못지 않은 멜로라인의 형성, 과거의 역사를 다루지만 현재적 의미로 재해석되어 그 코드가 맞는다는 점, 그래서 현재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게임이나 판타지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 등등 퓨전사극의 장점은 지금의 ‘주몽’을 만든 장본인이다. 물론 과거에도 퓨전사극은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퓨전사극이라 하면 ‘해신’이나 ‘다모’ 같은 비교적 규모가 작은 소품들이었다. 퓨전사극이 갖는 장점에 ‘주몽’이라는 민족적 영웅이 만나자 ‘퓨전대하사극’의 기대감이 높아졌다. 엄청난 스케일과 동시에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아기자기한 퓨전의 맛을 시청자들은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몽에서 대하사극을 기대한 것은 ‘주몽’이라는 제목이 주는 막연한 스케일과 민족주의적 욕구 탓이었다. ‘주몽’은 국가 간의 전쟁 같은 당대의 국제분쟁을 다루기보다는 인물의 탄생에 방점을 찍었다. 주몽이 비판받고 있는 ‘역사왜곡’과 ‘작은 스케일’ 문제는 주몽이 가려는 사극의 방향과 시청자들의 욕구가 부딪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역사왜곡’ 문제는 퓨전사극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고, ‘작은 스케일’은 전쟁 자체보다는 인물들 간의 갈등에 방점을 찍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에 타 사극들이 등장하면서 비판의 강도는 높아졌다. ‘연개소문’은 시작부터 안시성 전투에 엄청난 물량을 퍼부었다. 하지만 ‘주몽’의 시작은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닌 다물군의 게릴라식 전투, 그것도 한나라가 아닌 한나라의 대표성을 띄는 현토성과의 전투였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는 ‘연개소문’이 가려는 방향과 ‘주몽’의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연개소문’이 이미 성숙된 고구려라는 국가의 외세에 대한 자주적 대응, 국제정세, 정치상황 등을 다루고 있다면 ‘주몽’은 이제 저 신화 속에 가리워져 있던 주몽을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어내는데 더 주안점을 두고 있다.

주몽’은 한 인물과 국가의 탄생을 그리는 드라마이지 국가 간의 전면적인 전쟁(물론 소소한 전투들은 있지만)을 그리는 드라마는 아니다. 주둔하고 있는 한나라군을 몰아내는 것이지, 한나라와 전면전을 벌이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국가를 세우려는 주몽과 그걸 막으려는 인물들간의 시소게임이 이 드라마의 진짜 재미이다.
주몽에 대한(혹은 연개소문에 대한) 비판은 그만큼 각자의 드라마들을 보는 시청자들의 충성도가 높다는 것의 반증일 뿐이다. 세 편의 사극이 모두 같은 지점에 방점을 찍어야 할 이유는 없다(또 그래서도 안된다). ‘주몽’의 재미는 인물간에 벌어지는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들에 있다. 그것이 타 드라마와의 차별점이며 주몽만의 힘이다.

연개소문 - 멜로를 버리고 정치드라마를 살리라
‘연개소문’은 좀 안타까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시작은 엄청난 물량공세였으나 그만한 주목을 받지 못했고, 멜로 라인이 가미되었지만 어설펐다.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에는 아마도 먼저 시작해 퓨전사극으로서 주목받은 ‘주몽’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연개소문’은 정통사극을 내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퓨전사극의 ‘주몽’을 의식한 결과일 뿐이었다. 역사왜곡의 무리수를 가지면서도 ‘연개소문’을 안시성 전투에 끌어들였고, 전투라고 말하기 무색할 정도의 전쟁 신을 잡아냈다. 또한 이어진 요하와 요택에서의 전쟁 신은 그 스케일에 있어서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전쟁구경’은 있었지만 ‘인물의 탄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에서 전투영웅을 탄생시키고 그 영웅을 통해 인물의 탄생으로 연결시켜 드라마적 긴장감을 이어갔던 ‘주몽’과는 달리, ‘연개소문’은 교묘한 전략과 전술에 더 많이 시선을 잡아두었다. 초기 전쟁의 영웅은 연개소문의 아버지인 막리지, 을지문덕, 영양왕, 영류왕 고건무 등이 분명하지만 드라마 전체를 이끌어가야 할 연개소문과 이들 간에는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당대의 국제정세 속에서 고구려의 위치를 보여주는 민족주의적 가치는 있었을지 몰라도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힘을 실어주는 드라마적 가치는 별로 없었다. 게다가 초기에 너무 많은 걸 보여준 탓에 앞으로 보여줘야 할 전쟁신의 부담감만 더 높여놓았다.

막상 그 국제정세 속의 중심에 서 있어야할 연개소문은 신라에 있었다. ‘연개소문’은 정통사극의 기치를 걸었지만 결국 퓨전을 채용했다. 연개소문은 김유신의 시종이 되고 거기서 김유신의 동생과 사랑에 빠진다. ‘주몽’에서 비롯된 멜로에 대한 강박이다. 게다가 그 사랑은 전혀 현대인들의 가슴에 전달이 되지 않는 구태의연한 멜로 신파를 답습한다. 그러면서 또 한번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의 힘을 약화시켜놓는다. 하지만 주목해야할 것은 이 즈음 ‘연개소문’이 본래부터 추구했어야할 재미라는 바람이 조금씩 중국에서 불어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독고황후(정동숙 분)와 수양제(김갑수 분)라는 인물의 탄생이다. 본래 멜로가 약하고 선 굵은 사극에 강점을 가진 이환경 작가의 힘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드라마 상으로 주인공인 ‘연개소문’이 약화되고 중국의 인물들이 살아난 것은 작가의 강점이 어디에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바로 이 지점이 ‘연개소문’이 앞으로 나가야할 방향이 아닐까. ‘연개소문’이 상상력을 발휘해야하는 지점은 ‘주몽’이 했던 아기자기한 인물 관계가 아니고 국제정치드라마 속에서 이전투구하는 인물들이다. 그것이 ‘연개소문’을 보는 진짜 재미를 살릴 수 있는 길이다.

대조영 - 정석대로 가다
아직 드라마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지만 ‘대조영’은 ‘연개소문’이 주창했던 정통사극의 진정한 길을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군의 요동침략과 여기에 대항하는 양만춘(임동진 분), 대조영의 아버지인 대중상(임 혁 분)의 활약이 보인 요동성 전투 신을 보면, 스케일과 인물 양자를 꼼꼼히 잡아내는 힘이 엿보인다. 거대한 전쟁신 속에서 디테일있는 전투 신까지 엮어내면서 영웅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 힘은 아무래도 중견연기자들 몫이 가장 클 것이다. 그들은 얼굴 한 번 잠깐 들이미는 것만으로도 드라마의 집중도를 높여놓는다.

‘주몽’과 ‘연개소문’이 앞서 있어 막내의 이점을 톡톡히 보고 있는 ‘대조영’은 양 드라마의 장점을 하나로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다. ‘대조영’은 ‘주몽’처럼 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인물이다. 시작은 ‘연개소문’이 보여줬던 전쟁(물론 세밀한 전투신을 가진)이지만 이제 패망하는 고구려와 함께 ‘대조영’은 ‘주몽’이 했던 건국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대조영’의 이런 후발주자가 갖는 장점은 또한 단점이 되기도 한다. 같은 고구려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참신함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연개소문’에서 보여주었던 안시성 전투를 앞으로 ‘대조영’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낼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분명한 것은 ‘주몽’과 ‘연개소문’이 나름대로의 목적에 의해 정통 사극에서 한발씩 발을 떼고 있다는 점에서 ‘대조영’의 차별화는 바로 그 정석으로 가는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부족한 사료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간다면 말이다.

고구려사, 역사와 상상력으로 복원하라
현재의 고구려 사극들은 모두 부족한 사료를 채워 넣어야 할 상상력과 역사적 개연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에는 위아래가 없다. 다만 방식에 있어서, 강점과 약점에 있어서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주몽’을 통해 고구려의 탄생을, ‘연개소문’을 통해 고구려의 전성기를, 그리고 ‘대조영’을 통해 고구려의 패망과 그 후에도 이어지는 정신을 읽을 수 있다면 고구려 사극들의 고민은 충분히 보답 받을 수 있을 것이다.
OSEN(www.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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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여자들>에 나타난 아줌마상

‘발칙한 여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끈적임 없는 상큼 발랄 경쾌한 세상이다. 우리네 드라마 세상에서 아줌마들이란 ‘불륜’과 ‘신파’를 오가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구질구질한 관계도 궁상맞은 눈물도 안녕이다. 과거 아줌마 이미지에서 기름기와 물기를 쪽 빼내자 이제 ‘여자’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간에 잘 보이지 않던 새로운 아줌마들의 등장이다. 이름하여 ‘발칙한 여자들’이다.

드라마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시대에 따라 변신을 거듭했다. 1970년대에는 말 잘 듣고 시어머니에게 구박받는 며느리가 대부분이었다. 요즘 같은 시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한 며느리는 심지어 다른 남자와 바람났다고 모함 받기까지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 마디 없을 정도다(1972년 드라마 ‘여로’에서).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강인하고 착하게 보이긴 했지만 남성 권위주의 사회 속에서 책임과 의무에만 절어있는 그들에게서 ‘발칙한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여자들은 이제 신데렐라를 꿈꾸기 시작했다. 물론 아줌마들이 나오는 드라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트렌디 드라마들이 등장하면서 보다 환타지를 자극하는 젊은 미혼의 여자들이 브라운관을 가득 메웠다. 상대적으로 아줌마들의 문제가 소외되고 있을 때, 등장한 MBC의 ‘아줌마’라는 드라마는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킬 정도로 기존 아줌마 상에 반기를 들고 나왔다. 권위주의적인 남편과 당당히 이혼하는 원미경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충격을 넘어서 박수를 쳐주었다. ‘발칙한 여자들’의 태동을 알리는 현상이었다.

‘발칙한 여자들’의 미주(유호정 분)는 지금까지의 드라마 속 여자들의 삶을 단번에 뛰어넘는다. 조강지처였던(1단계) 미주는 정석에게 버림받으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다해가며 치과의사가 된다(2단계). 그리고 그녀는 귀국해 전 남편 정석에게 복수하기 위해 접근하고 그 과정에서 젊은 남자 루키는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3단계). 이 3단계의 변신을 보면 그녀가 저 조강지처의 70년대를 넘어서 전문직 종사자가 되고, 나중에는 아줌마지만 젊은 남자의 사랑을 받는 어엿한 여자가 되는 그 변신의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드라마 속 여성상의 변화는 그 반대 역인 악역을 들여다보면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과거의 드라마들에서 주인공 여성들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자는 남성일까, 여성일까. 언뜻 가부장적인 사회가 그네들을 핍박했다는 생각에 남성을 떠올리겠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적은 여성이었다. 70년대 착한 며느리의 대척점에는 악한 시어머니가 있었고, 90년대 이후의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성의 대척점에는 일과 사랑 둘 다를 쟁취해야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커리어 우먼들이 있었다. 이렇게 억압의 주체는 드라마 상에서 정면으로 주인공과 부딪치지 않고 오히려 여성을 내세워 대리전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직격탄을 날린 게 1999년 방영된 ‘아줌마’다. 그리고 ‘발칙한 여자들’의 대척점에 선 이들은 물어볼 것도 없이 상처를 준 남성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가정에서는 부부만 있을 뿐, 모실 부모들은 없으며, 직장에서는 각각 인정받는 전문직 종사자만 있을 뿐 라이벌 관계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발칙한 여자의 복수극이 유혈이 낭자하지도 않고, 눈물이 철철 넘치지도 않는 귀여운 장난 같다는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이전의 드라마 속 여자들처럼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사실 처절하고 질척질척한 복수극의 이면에는 아직도 남은 미련과 집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했고,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한 이 발칙한 여자는 복수조차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된 여자는 이제 다른 남자들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갖춰진 셈이다. 이로써 ‘아줌마의 사랑 = 불륜’이라는 악의적인 등식은 깨지고 당당한 ‘중년여성의 사랑’이 등장하게 된다.

경제력이 있고, 자신감이 넘치며, 인생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들의 사랑과 삶은 여유가 있다. 아마도 ‘발칙한 여자들’이 보여주는 여성상은 과거 결혼 전과 확연히 달라지는 결혼 후의 여성에서, 이제는 결혼 후에도 당당하게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요즘의 여성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희화화된 남성과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아줌마들의 환타지를 자극하는 면모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 역시 어찌 보면 그간 불륜과 신파의 대상으로서 핍박받아온 아줌마상을 염두에 둘 때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신 아줌마상, ‘발칙한 여자들’이 앞으로 드라마 속에서 꿈꿀 세상들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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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최근 드라마 최대 이슈는 아무래도 사극열풍의 주역인 ‘주몽’과 ‘연개소문’이 될 것이다. 그 중 ‘주몽’의 인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저 월드컵 시즌에도 식지 않는 열기를 과시했고 월드컵이 끝나자 마의 시청률 40%를 넘겼다. 심지어 휴가철을 맞은 지금에도 여전히 35% 전후의 시청률을 유지하는 괴력을 보이고 있다.

월드컵도 휴가철도 누르지 못한 ‘주몽’의 독주로 인해 타 방송사의 월화드라마는 아예 시작도 하기 전에 전의를 상실하고 있다. ‘주몽’의 강력한 견제자로 등장했던 ‘연개소문’ 역시 역부족이었다. 간신히 20% 정도의 시청률을 유지하던 것이 휴가철을 맞아 17%대로 떨어지는 수난을 겪고 있다. 이렇게 되자 고개를 드는 것이 주몽의 매너리즘이다.

고산국 소금산 모험에서부터 불거진 이 매너리즘의 정체는, 한 단계씩 문제를 해결하며 자신을 성장시키던 주몽의 독특한 영웅상이 과거의 영웅상으로 퇴행하는 과정에서 비롯됐다. 해모수 밑에서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하면서 스스로를 갈고 닦던 주몽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주어진 운명으로서의 주몽의 모습이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운명이 주몽에게 드리워지자 그는 살아있는 이 시대의 영웅이 아닌 과거의 무기력한 운명적 영웅으로 변질되었다.

소금산 모험에서 주몽이 한 역할이라고는 어머니 유화부인이 했던 소금산에 대한 옛이야기를 떠올렸다는 것과 그 곳 주민을 만나보고 모험을 떠나기로 결정했던 것뿐이었다.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산채로의 침입에서 그가 얻은 건 비적들에게 포획되는 것이었다. 그를 구해내는 건 소서노며, 소금산까지 가게 되는 것 역시 소서노의 역할이 컸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소금산의 소금을 얻는 과정을 그저 과거 유화부인과의 고리에서 연유된 운명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주몽이 운명적인 영웅이 되자, 그에 도전하는 다른 무리들(대소나 영포)은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운명 앞에서 도대체 그 어떤 도전이 가능하단 말인가. 유일하게 주몽에 도전할 수 있는 인물은 운명과 맞설 수 있는 인물, 신녀 여미을이다. 여미을은 과거 해모수의 운명을 꺾어놓은 전과가 있다.

그러자 드라마는 이제 여미을과 그녀가 말하는 ‘부러진 다물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부러진 다물활이 부여의 

앞길에 암운을 드러내는 하나의 신탁이자 주몽의 운명이라면, 그 사실은 금와왕을 비롯한 부여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어야 마땅했다. 금와왕이 주몽의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어야 했지만 맥이 빠진 것은 금와왕 역시 해모수와의 틀에 박힌 운명적 우정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미을과 틀어져 있다는 것이다.

대소는 이미 흔들리고 있고, 영포는 계속 헛된 짓만 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몽은 적 다운 적을 만나기가 어렵게 됐다. 그러자 드라마는 커다란 중심축을 이루는 갈등이 사라지고 소소한 인물들 간의 갈등으로 진행되면서 긴장감을 잃고 매너리즘의 늪으로 빠지게 된다.

‘주몽’이 40%라는 달콤한 시청률 속에서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사이, ‘연개소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초반 안시성 전투 촬영에 5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낸 연개소문이 얻은 것은 20여 %의 시청률과 전투 신으로 반복되는 장면들에 대한 비판, 들인 제작비만큼의 효과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난여론이었다. ‘고구려사의 재조명’이라는 민족적 사명감을 갖고 진지한 접근을 시도한 결과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시청자들 중에서는 제작비 400억 원, 투입 연기자 400명, 보조연기자 1만 5000명이라는 이 기록적인 투자가 도대체 보이지 않는다는 볼멘 소리까지 들려왔다. 연개소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10%대로 떨어졌던 시청률은 을지문덕의 출연으로 20%를 회복했으나 이 역시 무더위라는 복병을 맞아 17%라는 최악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연개소문’이 처음부터 고전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도 그중 ‘주몽’이라는 ‘퓨전사극이 가진 강한 중독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주몽’은 일찌감치 시청자들을 퓨전사극의 맛에 길들여지게 했다. 작가의 상상력이 자유롭게 발휘되는 만큼, ‘주몽속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랑과 성공’ 같은 욕망들이 포진되었다. ‘주몽’이라는 캐릭터를 영웅이 아닌 최대한 보통 사람과 비슷하게 시작한 것은 일단 친근하게 접근하고, 차차 감정이입이 되는 시기부터 시청자들의 주몽을 통한 대리충족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렇게 ‘주몽’은 월드컵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이미 많은 시청자들을 그 중독성 강한 설정 속으로 끌어들였다. 시청자들은 마음 속에서 이 어리버리한 ‘주몽’을 영웅으로 ‘키우는’ 데 온통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월드컵이라는 휴지기는 오히려 ‘주몽’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보일 듯 보일 듯 안 보이는 그 안타까움과 기다림 속에서 ‘주몽’의 주가가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 ‘연개소문’이 시작됐다. 물론 퓨전과 정통이 다르지만 같은 사극이며, 또한 소재 역시 같은 고구려사라는 점에서 ‘주몽’의 시청자들은 ‘연개소문’을 시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깊숙이 ‘주몽’이라는 게임의 재미 속에 빠져있는 시청자들을 ‘연개소문’은 만족시키지 못했다. ‘주몽’의 아기자기한 설정과 전개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은 이와는 다른 선 굵은 ‘연개소문’의 면모를 ‘디테일의 부족’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연개소문’이 결코 ‘주몽’과 비교해 떨어지는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환경이라는 굵직한 작가가 사극을 통해 늘 보여주었던 것처럼 역사 속에서의 ‘활달하고 호쾌한 사내들의 한판승부’가 때론 전쟁과 전투의 형태로, 때론 정치의 형태로 장면 장면에 잘 녹아들어 있었다. 시청자들이 느끼는 ‘디테일의 부족’은 아마도 ‘주몽’에는 있으나 ‘연개소문’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멜로 라인’이라든가, ‘성공에 대한 단계’ 같은 것일 가망이 높다.

하지만 이건 애초부터 이야기의 방향이 틀린 것이다. 어느 정도 상상력이 들어있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지만 ‘연개소문’은 역사의 흐름을 축으로 흘러가는 드라마인 반면, ‘주몽’은 역사보다는 한 ‘영웅의 탄생’을 그 주요한 축으로 잡아가는 드라마인 것이다. 만일 ‘주몽’이라는 드라마가 없는 상태에서 ‘연개소문’이 방영되었으면 어땠을까. 불을 보듯 ‘연개소문’은 거칠 것 없는 저 시청률의 국경을 넘어 중원을 달리고 있을 것이다. ‘주몽’이 미리 만들어놓은 강한 퓨전 사극의 중독성은 결과적으로 역사 중심으로 풀어 가는 ‘연개소문’을 힘겹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주몽 탓’이라고 하기에는 ‘연개소문’에도 나름의 허점이 많다. 지금 현재 ‘주몽’이 걷고 있는 매너리즘의 길을 꿰뚫고 들어갈 만한 새로운 구석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스펙터클과 민족주의에 대한 소구는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힘이 약화되기 마련이다. 기왕에 민족주의적 영웅을 그려내는 드라마라면 역경과 고난이 있어야 하며, 눈에 보이는 강력한 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에는 아직까지 그럴 듯한 적이 보이지 않는다. 수문제는 황후에게 쥐여 사는 노망난 노인처럼 그려지며, 전투에 나가면 연전연패하는 양량은 자기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려진다. 수양제는 좀더 교활한 면모를 가졌지만 아직까지 고구려의 적으로 등장하지는 못하고 있다. 1,2회에서 보였던 당태종과 같은 카리스마를 보이는 이는 아직 없다. ‘주몽’에서 주몽과 대적할 적이 없는 것처럼, ‘연개소문’ 또한 마찬가지다. 고구려는 연전연승이고 수당은 연전연패, 이제 드라마 속에서 전쟁의 승패는 운명적이 된다.

여기에 더 복잡한 것은 ‘연개소문’의 고전과 ‘주몽’의 매너리즘이 각자의 문제에서 머물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주몽’과의 차별화 전략으로서 ‘연개소문’은 계속해서 전쟁장면을 통한 민족주의적 영웅을 부각하고 있으나 이것은 도리어 ‘연개소문’의 부진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반대로 매너리즘에 빠진 ‘주몽’을 살리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본래 중독성이라 하면 새로운 자극이 계속 해서 등장해야 그 기조를 유지하며 나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주몽’에 있어 새로운 자극을 한 회도 쉬지 않고 연달아 제시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연개소문’이라는 정통사극을 통해 다시금 ‘주몽’의 중독적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심하게 빠졌지만 익숙해진 연애에서 상대방의 가치를 잊고 있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 그 가치를 다시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연개소문’이 주말에 포진하고 바로 이어 ‘주몽’이 월화에 포진한 이 기막힌 상황은 ‘주몽’에 대한 기대감을 더 키워놓는 절묘한 장치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연개소문’이든 ‘주몽’이든 각자 따로 떼어놓고 보면 기대 이상의 작품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현재 이 두 드라마가 서로에게 주는 묘한 영향력 속에서, 양자가 동반추락의 길을 걷지 않으려면 드라마라는 장르의 본질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드라마는 갈등이며, 갈등에는 반드시 주인공과 상응할만한 강력한 적을 필요로 한다. 시청자들이 보고 싶은 것은 갈등을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가는 영웅이지, 이미 운명으로 정해진 영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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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의 인물론

영웅이라는 말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다. 영웅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에 도전하는 인물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삼국지나 각종 전쟁에서 보여지듯 전쟁지도자나 정복자의 의미를 갖기도 했다. 또한 영웅이 포괄하는 범위는 넓어서 때로는 순교자, 과학자 혹은 예술가가 영웅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존재하는 것은 당대에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영웅이라는 ‘현실을 뛰어넘는 이상적 존재’에 투영하는 의미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제 영웅이라는 말은 월드컵에 나간 축구선수일 수도 있고, 기술적 발견을 해낸 과학자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심지어 연예인이 되기도 하며, 작게는 가족을 지키는 부모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영웅은 이제 저 멀리에서부터 우리 옆으로 찾아온 것이다.

‘주몽’이라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몽이라는 영웅은(본래 역사적 인물로서의 주몽과 드라마 속 주몽은 다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 시대의 영웅이라 할만하다. 역사적 사료에 보다 충실한 정통사극이 아닌 퓨전사극을 표방한 ‘주몽’은 보다 더 폭넓게 현대인들의 욕망을 사극이라는 그릇 속에 담아 넣었다. 그러자 주몽이라는 역사적 인물은 역사와 민족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버리고 현대인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영웅으로서 재탄생되었다. 민족주의 영웅이 될 것 같았던 ‘주몽’은 현대인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인물이 되었다.

드라마는 완성된 영웅에서 시작하지 않고, 소시민이었으나 차츰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에 천착한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영웅관과 상당부분 맞닿아 있다. 과거의 영웅이라면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했지만, 지금은 보다 인간적이고 친근한 영웅을 희구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영웅이 손에 잡히지 않는 존경의 수직적인 대상이었다면, 현대의 영웅은 손에 잡힐 것 같은 그래서 때로는 질투가 나기도 하는 수평적인 대상이다. 드라마는 절묘하게 초기 해모수라는 과거 형태의 전형적 영웅을 등장시켜 안심시킨 다음, 주몽이라는 현대적 영웅을 그 테두리 안에 넣고 조금씩 키워나간다.

카리스마를 걷어내자 주몽은 이제 대화와 타협을 하는 이 시대의 인간경영자가 된다.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주변을 살피면서 조금씩 주변인물들을 끌어들여 일을 성사시킨다. 주몽의 이런 주도면밀함은 때론 그를 조금 소극적인 인물로 보게 만든다. 차라리 그의 어머니 유화부인이나 그를 돕는 소서노라는 여자 영웅들은 오히려 더 주체적이다. 그럼에도 주몽이 이들을 장악하는 이유는 우위에 있는 인간경영 능력 때문이다.

주몽은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역사적 영웅이 빠질 수 있는 민족주의적 환타지라는 함정을 피해나간다. 나라를 구원하는 영웅은 보기에 속시원할 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루어낸 것 같은 환타지만 제공할 뿐이다. 드라마의 고구려 열풍이니, 영화 ‘한반도’니 하는 민족주의의 바람이 거센 요즘, 조금은 인간적인 영웅, 주몽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오히려 그 민족주의의 환타지를 깨는 영웅이기 때문이다. <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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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오성의 복합연기

유오성의 연기를 보면 참 복합적(?)이란 생각이 든다. 연기라는 것이 행복하면 웃고, 슬프면 울고, 화가 나면 화를 내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오성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수많은 감정과 심리에 따라 표정과 손짓, 행동이 어찌 다 똑같을 수 있을까. 유오성의 섬세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복합감정의 표현은 자칫 단순할 수 있는 드라마에 미묘한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투명인간 최장수’는 유오성이 가진 이런 힘이 백분 발휘되고 있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편의적인 것이지만 ‘투명인간 최장수’를 장르적으로 구분해보면 어떨까. 드라마 첫 회의 장면들은 이 드라마가 마치 조폭이 등장하는 형사액션물이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쇠파이프와 야구방망이를 든 일단의 조폭들과 대결을 벌이는 최장수의 모습은 과거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를 연상케 했다. 그런데 그 액션에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다. 심각하다기 보다는 우스꽝스런 코믹이 있었다는 것이다. 늘 얻어터지고 깨지면서도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바가지를 긁히는 최장수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좀더 드라마가 진행되자 장애를 겪고 있는 아이와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등장하며 휴먼드라마를 포함시키더니, 아내 오소영의 옛 남자친구 하준호가 등장하면서 멜로드라마로 연장된다. 물론 이 드라마의 기조는 휴먼드라마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속에는 액션과 코믹, 멜로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는 게 사실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아무래도 유오성이 가진 연기의 힘이 아닐까.

오소영을 앞에 둔 최장수의 얼굴은 웃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앞에 두고 있기에 웃는 것이다. 그런데 오소영 옆에는 하준호가 있다. 그리고 오소영은 선언한다. “난 지금껏 단 한번도 당신과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고. 그러자 최장수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찡그려지면서 폭발한다. 그는 애꿎은 하준호의 차를 부순다. 그리고는 다시 애원하는 얼굴로 바뀐다. “나 정신차리게 해주려고 그러는 거지? 거짓말이지?” 그렇게 다시 달래듯 대사를 건넨 유오성의 웃는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단 몇 분도 되지 않는 이 장면 속에서 유오성이 한 연기는 행복과 슬픔, 분노, 회유 같은 단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리의 표현이었다.

최장수가 여관방 욕조에 장미꽃잎을 뿌리는 장면은 섬뜩한 슬픔을 안겨주었다. 바보 같은 얼굴로 손에 피가 나는 지도 모르고 꽃잎을 따서 뿌리는 장면은 알츠하이머라는 막연한 병에 대한 실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장면에서도 유오성은 멍한 표정으로 바보처럼 웃다가 깨어나서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슬픔에 빠지는 연기를 선보였다.

이것은 최장수가 오소영에게 위자료라며 돈을 건네주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사를 하자”는 최장수에게 오소영이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하자, 실망스럽지만 그걸 숨기는 얼굴의 최장수가 봉투를 건넨다. 오소영은 “받지 않겠다”하고 최장수는 “단지 내가 미안해서”라고 말하며 봉투를 건네준다. 헤어지는 장면에서 횡단보도 건너편 오소영에게 최장수가 소리치는 장면은 아마도 다른 연기자가 했다면 실소가 나왔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 보면 간지러운 대사, “정말 나랑 결혼하면서부터 행복한 적이 없었어?”라는 그 외침 속에 그간 최장수가 속으로 웅크려 놓았던 수많은 감정들이 녹아들어 있었다. 고개를 가로젓는 오소영의 그 부정을 보기 위해 뛰고 또 뛰어야 하는 최장수의 모습에서 아마도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웃으면서 울거나, 울면서 웃거나 하는 연기가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실제 인간관계에서의 진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드러내놓고 그렇게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일을 겪었을 때 우리가 마음 속에 갖는 건 이러한 복합적인 것이지 단순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연기는 몸과 동작으로 그 감정들을 표현해내야 하는 것이기에, 실제로 웃으면서 울어야하는 것이다. 물론 그 장면을 통해 시청자들은 자신이 경험했던 유사한 상황에 공감하게 된다.

상황과 감정을 단선적으로 이끌어 가는 트렌디 드라마들은 이제 점점 설득력을 잃고 있다. 대신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분노하면서도 굴종하고, 군림하면서도 고뇌하는 복합적인 감정으로 진정성에 호소하는 드라마들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돌아와요 순애씨’에서 섹시하면서도 푼수 같고, 털털해 보이면서도 섬세한 연기를 펼치고 있는 박진희에 대한 극찬 역시 그 리얼함 이면에 ‘그 상황이라면 충분히 그랬을만한’ 진정성에 있었던 건 아닐까. ‘투명인간 최장수’라는 제목에서 풍기듯이 유오성이 가진 힘은 비극을 희극으로도 끌어안는, 그럼으로 해서 비극을 더 강력한 비극으로 만드는 데 있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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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출동 SOS24>가 경계해야 할 TV의 만용

폭력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법은 너무 멀다. 그래서 이제 방송사가 나선다. 카메라는 이제 폭력이 은밀히 자행되고 있는 사생활 속으로 몰래 들어간다. 그 장면들은 충격적이다. 가족관계에서의 상식의 선은 넘어선 지 오래고, 그것은 상식을 넘었기에 비정상으로 다뤄진다. 21세기에도 불구하고 노예 할아버지, 노예청년, 노예 며느리... 왜 그리도 ‘노예들’은 많은지.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이들을 위해 ‘긴급출동 SOS24’는 이른바 솔루션 위원회를 결성해 각종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다. 과연 TV가 이렇듯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TV는 이 시대에 남은 마지막 정의의 기사인 것 같다. 심지어 이런 개개인의 문제들까지 일일이 방송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는 점에서는 감동마저 온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수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방송마저 없었다면 저들의 삶을 누가 알고 도와줄 수 있었을까.’ ‘저 모래알처럼 구분하기 힘든 그래서 더더욱 보이지 않는 음지의 삶을 비추는 카메라는 이 시대 TV가 해야할 진정한 일이 아닐까.’ 실제로 이 프로그램에서 그런 순기능이 있는 건 사실이다. 시청자들은 바로 그 순기능에 보기에도 괴로운 장면들을 참아내고 그 문제의 해결을 보면서, 안도하게 된다. 저런 프로그램이 있어 여전히 세상은 살만하다고.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프로그램에 왜 논란이 일고 있을까. ‘아들의 벽’ 편에서 패륜아로 그려진 김재현(33·가명)씨는 왜 게시판에 SBS가 편파방송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혹 이 사건은 이 프로그램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사회적 문제를 잡아내는 프로그램은 ‘긴급출동 SOS24’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장수 프로그램으로 ‘추적60분’, ‘그것이 알고싶다’, ‘PD 수첩’ 등 역시 사회문제에 메스를 댄다. 그들 프로그램들 역시 간간이 잘못된 취재로 인해 곤욕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유독 ‘긴급출동 SOS24’에 그 화살이 집중되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무래도 이 프로그램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치부되어 온 사생활에 카메라를 들이댔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긴급 출동 SOS24’의 문제 접근 방식은 타 프로그램과 비교했을 때 더 직접적이다. 타 프로그램들은 개인의 문제보다는 거기서 도출되는 사회적 의미 또는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사회적 문제를 상정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문제들을 취재해 문제의 양면을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보여준다. 똑같은 충격적인 장면이 있다 해도 어느 정도 균형점을 찾으려 하는 노력(실제로 그것이 성공하는 지는 별개의 문제다)이 보인다. 하지만 ‘긴급 출동 SOS24’는 바로 개인의 문제로 접근한다. 그것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다 보니 방안에 CCTV가 설치되고 마치 몰래카메라 같은 선정적인 폭력의 장면들이 고스란히 방영된다. 카메라는 놀라울 정도로 어느 한 방향성을 갖고 접근한다. 거기 등장하는 문제는 악으로서 그려진다. 그것은 절대악이기에 균형 운운하는 잣대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TV의 이런 방향성 있는(?) 방송에는 반드시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특히 이 프로그램은 개인의 사생활을 파고든다는 점에서 만일의 사태가 가져올 파장은 더욱 커진다. 그 위험성은 방송이 가진 편집과 구성에 있다. 방송은 똑같은 내용을 다루더라도 편집과 구성에 따라 그 논지가 180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을 호도할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방영된 내용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방송은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한 TV라는 매체가 가진 일 방향성으로 인해 한 개인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죽어야만 죄를 씻을 수 있는 사형수라고 하더라도 변호의 권리는 주어진다. 하지만 지금껏 이 프로그램이 다룬 수많은 가해자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들은 대부분 어떤 주장을 펼만한 능력이 없는 알코올중독자, 정신질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김재현(33·가명)씨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방송이 보여주고 싶은 대로 자신을 패륜아로 몰고 갔다고 주장한다. 김재현(33·가명)씨의 편파방송 주장은 그 진위여부를 떠나 이 프로그램이 침묵하는 가해자들에게 가해하는 폭력의 힘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해결책으로 제시된 방송에 노출되는 그 순간부터 사생활은 파괴되는 것이다. 그간 잘못한 게 있으니 당연히 이 정도 폭력은 정당화되는 것 아니냐는 투의 방송편집은 폭력을 근절하겠다는 애초의 기획의도와도 상반되는 것이다.

방송이 해야될 역할은 문제제기가 되어야지 섣부른 결정과 해결책 제시가 돼서는 안 된다. 방송은 양면의 칼날과 같아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때, 다른 한쪽의 그림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또한 방송은 수많은 개인들의 문제를 일일이 해결해줄 수 없다. 그 중 뽑혀진 몇몇 개인들만 수혜를 입을 뿐이다(그게 진정한 수혜인지는 모르는 일이며 받고 싶지 않은 것을 받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개인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이 프로그램의 거창한 기획의도가 말하는 것처럼 실질적인 문제해결을 해주지는 않는다. 아들이 아버지를 폭행하고, 장애인을 노예처럼 부리고, 동생을 오빠가 앵벌이시키는 이러한 현상은 정상적인 사회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해놓으면 얻어질 수 있는 건,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착각뿐이다. 방송은 개인이 아닌 사회적인 시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그 해결은 정부가 떠 안는 것이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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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최장수> vs <돌아와요 순애씨>

수목 드라마가 아줌마, 아저씨들의 장이 됐다. 기혼자들의 시각을 제대로 담아낸 드라마 두 편이 호평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투명인간 최장수’와 ‘돌아와요 순애씨’다.

‘투명인간 최장수’는 이 시대에 가족에게 있어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가장의 이야기다. 드라마는 시작부터 조폭들과의 일전을 보여준다. 각목이 난무하고 피가 튀는 그 현장에 최장수는 깨지면서도 유쾌한 웃음을 짓는다. 상황은 극적이고 과장된 면이 있지만 이 장면은 우리네 가장들에게는 익숙하다. 가정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들의 사회생활은 최장수가 벌이는 사투와 다르지 않다. 그것이 아무리 전쟁 같을 지라도 그것을 가족에게 일일이 늘어놓지 못하는 처지 역시 최장수가 우리 시대의 가장들과 같은 점이다. 그래봤자 이해는커녕, 괜한 불안감만 더 만들 테니까.

가정을 위해 노력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지만 최장수가 가족에게 소홀했던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아내는 온갖 부업을 전전하면서 쥐꼬리만한 월급으로는 도저히 꿈꿀 수 없는 전원주택까지 마련한다. 아이 역시 아내의 몫인데다, 그 아이 중 하나는 성장장애를 겪고 있다. 이것이 최장수의 가족을 위한 알리바이가 도저히 인정 안 되는 사유이자 오소영의 이혼요구가 정당한 이유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한 남자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이 옳았냐 틀렸냐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 남자가 그래서 이혼을 당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드라마는 오히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다룬다. 당신은 당신 가족들에게 기억될만한 아버지로 남아 있느냐는 것이다. 돈 벌어오는 아버지가 아닌, 추억으로 남을 그런 일들을 공유한 아버지냐는 것이다. 최장수가 겪을 알츠하이머라는 병은, 인생을 길게만 이어질, 그래서 추억은 나중에 돈 벌은 다음에 해도 될 어떤 것으로 치부해왔던 이 시대의 가장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앞으로가 아닌 지금 당장, 현재가 중요하다고 드라마는 말한다.

최장수는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지만 그게 영 서툴다. 반면, 오소영의 옛 남자친구인 하준호는 그런 일에 능수능란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절망적 상황에 있지만 최장수는 활달하고 쾌활하며, 늘 웃는 모습이다. 어찌 보면 바보 같다. 그래서 더 슬프다. 무언가를 가족을 위해 열심히 하지만 그게 항상 서툴고 그러면서도 바보처럼 웃기만 하는 우리네 아버지들을 닮았다. 웃으면서 우는 연기가 물에 오른 유오성은 그런 아버지의 초상을 제대로 그려낸다. 이것이 사나이 울리는 최장수가 주목받는 이유다.

반면 한편에서는 아줌마 웃기는 ‘돌아와요 순애씨’가 상종가다. 40대 아줌마와 20대 처녀의 영혼이 바뀐다는 이 황당한 설정의 드라마는 그러나 그 전하려는 메시지에 있어서 아줌마들의 감성을 매료시킨다.

10여 년이 넘게 가정을 지키며 남편 뒷바라지를 해온 아줌마들은 어느 날 매력이 사라진 자신과 그런 자신을 등한시하며 다른 여자를 찾는 남편을 발견한다. 남편과 가족을 위해 온갖 일들을 해왔지만 정작 남편은 다른 여자를 찾는 이 아이러니 속에서 아줌마들은 분노한다. 아끼려고 쓰는 싸구려 화장품에,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자신은 챙기지 못해 늘어만 가는 살과 주름에, 이제 후회해봐야 이미 늦어버린 아줌마들은 뒤늦게 자신의 삶을 한탄한다. 그런데 만일 상황이 역전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40대의 몸이 20대로 변하고, 부엌데기가 젊은 재벌이 쫓아다니는 미모의 여인이 된다면.

설정이 아무리 황당해도 그것은 모름지기 대부분 아줌마들의 환타지 속에 있던 것이기에 드라마는 설득력을 얻는다. 이 드라마가 장르적으로 코미디를 지향한 것은 그 웃음 속에 환타지를 녹이고, 그 웃음 끝에 진한 페이소스를 달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여자들의 연대(허순애와 한초은이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남자들은 똑같다는 식의 어떤 공감을 갖는 것)에서부터, 생활력에서부터 만들어진 아줌마 속성에 대한 웃지 못할 풍자, 젊은 여자에 대해 갖는 남자들의 속물근성 등등 남녀 관계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다룬다. 그 많은 시각들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40대 아줌마에서 20대 처녀로 탈바꿈한 순애씨(모습은 한초은이지만)이다. 그녀의 거침없는 비판과, 욕망의 분출은 TV 앞에 앉은 수많은 우리 시대의 아줌마들에게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드라마에서 유독 한초은 역을 소화해내는 박진희가 주목받는 이유는 지금 드라마의 초점이 변신한 순애씨(한초은)에게 있기 때문이다. 대책 없이 씩씩한 그녀는 남편이 바람 핀 여자의 속으로 들어와 남편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게 되었다. 평상시 같으면 웬만한 것에 눈 하나 까닥하지 않을 아줌마는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쉰다. 그런데 그 눈물과 한숨이 웃음을 만든다. 박진희는 아줌마들의 때로는 뻔뻔하고, 때로는 감상적이며, 때로는 현실적인 속성을 실감나게 연기한다. 20대 몸에 40대의 행동이 주는 웃음은 그러나 그 뒤끝이 찡하다. 우리네 아줌마들의 가족을 위해 상실한 혹은 상실되고 있는 자존감을 고스란히 보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수목 드라마에서 맞닥뜨린 ‘사나이 울리는 최장수’와 ‘아줌마 웃기는 순애씨’는 이 시대의 아저씨 아줌마들에 대한 헌사다. 한쪽에서는 울고 한쪽에서는 웃지만 그 하려는 얘기는 똑같다. ‘가족과 현실’에 대한 우리시대 부모들의 자화상인 것이다. 그래서 한참 울고, 한참 웃다가 문득 서로를 보게 되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의 각박함이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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