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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의 해모수와 예수

MBC 특별기획 드라마 <주몽>을 보는데 갑자기 거기 예수가 보였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해모수(허준호 분). 해모수는 본래 신화의 인물로 ‘하늘의 아들’이라 일컬어져 왔다. 그런데 그 해모수가 두 눈을 잃은 채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 밑에는 마치 막달라 마리아처럼 유화가 서서 눈물 흘리고 있었다. 물론 그는 그렇게 죽을 것이고 후에 예수처럼 부활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누가 봐도 이제 신이 아닌 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해모수의 뒤를 이어 곧 등장할 주몽 역시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니다. 주몽은 신화처럼 알에서 태어난 인물도 아니고, 활만 쏘면 백발백중인 신궁도 아니며, 마술에도 능통한 신동도 아니다. 신화에서 등장하듯 그를 없애려는 왕자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엄수가 가로막자, 물고기와 거북이 달려와 등을 나란히 해 만들어준 다리로 건넜다던 그 주몽이 아니다(이 장면은 마치 모세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드라마 <주몽>에서 주몽은 성장하면서 영웅이 되고 고구려를 건국하게 되지만 그건 역시 인간의 드라마다.

그런데 예수를 다룬 영화 <다빈치 코드>를 보니 여기에도 신이 아닌 인간 예수가 보였다. 신화는 누가 봐도 ‘상징화된 이야기’로 읽을 수 있었지만, 종교는 말이 달랐다. 물론 소설과 영화 속의 일이지만, 수천 년에 걸쳐 신으로 믿어진 인물들이 네모난 세상 속에서 인간의 반열로 내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를 보는 시각의 변화
<다빈치 코드>의 상영을 가지고 논란이 불거진 것은 그 내용이 종교의 신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 핵심은 단 하나. 예수가 신이 아닌 인간이며, 그 아내가 막달라 마리아였고, 그 사실을 숨기려 후손을 없애려 했지만 아직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오락성이 짙은 영화라 하지만 신의 역사를 인간의 역사로 환치시켜놓은 이 시각은 종교에 대한 전복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다빈치 코드>의 역사관은 푸코 식의 ‘권력으로서의 역사’를 그대로 수용한 것 같다. 역사는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자의 것으로 실제 사실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승자의 권력 유지에 대한 욕망은 많은 사실들을 이단으로 몰아 피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피 위에 쓰여진다는 것이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절대적인 신의 존재가 살해당한 후, 이제 남은 건 인간뿐이다. 신비와 종교는 과학으로 역사로 재해석된다. 서구의 역사가 기독교의 역사와 맞닿는다는 점에서 보면 <다빈치 코드>의 시각은 대단히 불온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인간으로 되살아난 주몽, 그렇다면 예수는?
신화적 존재였던 주몽이 인간으로 되살아난 것은 흐릿했던 역사에 구체성을 더해준다는 점에서 대단히 고무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삼국시대 이후의 역사들이 사료를 통해 제대로 정돈되어 있는 반면, 그 이전의 고대사는 우리에게 신화적인 이야기로서만 존재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네 역사의 폭은 상대적으로 좁아졌다. 신화를 역사로 복원하는 작업을 대중매체인 TV 드라마가 한다는 것은 요즘처럼 민족주의로 돌아가고 있는 동북아 국제정세에 있어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몇몇 정치적인 제스처보다도 더 강한 것은 문화의 침투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인간으로 탄생한 예수는 어떨까. 사정이 다르다. 물론 <다빈치 코드>가 소설로서, 영화로서 대성공을 거두며 전 세계에 돌풍으로 일으키고는 있지만, 그 문화가 살포하는 이야기는 서구 역사에 대한 부정이다. 예수가 인간이 되는 그 순간, 수많은 성스런 전쟁의 역사는 용서될 수 없는 마녀사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 민족주의는 요즘 시대의 화두가 아닐 수 없다. 민족주의 시대에 우리는 민족과 종교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들을 치러왔다. 따라서 그러한 해체된 권위주의 역사관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다빈치 코드>가 전 세계 대중의 호응을 얻은 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고수하고 있는 <주몽>의 역사화가 긍정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혹시 서구라는 이름으로 늘 가해해 왔던 가해자와, 늘 피해자의 입장에 서 있던 우리들이 갖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아닐까.
혹시 문화 속에서 우리들이 신이 아닌 인간을 원하는 것은, 신처럼 군림해왔던 서구 열강들에 대한 부정이면서 동시에, 인간조차 되지 못해 상징으로만 떠돌던 우리네 영웅들을 인간으로 복원하기 위한 노력은 아닐까.

Posted by 더키앙

우리말 퀴즈 프로그램 참여기

우여곡절 끝에 <우리말 겨루기>에 출연했다. 무려 스무 번도 넘게 낙방한 끝에 올라간 자리였지만 실력이 부족했는지 1단계에서 맨 꼴찌로 떨어졌다. 기분이 좋았던 것은 방송을 만드는 분들의 진지함 때문이었다. 그 진지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줍잖은 방송출연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필자는 우리말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TV속 네모난 세상을 둘러보니, 요즘 방송에는 ‘말이 올라야 시청률이 오른다’고 해야할 만큼 우리말에 대한 프로그램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영상의 물결이 봇물을 이루는 이 시대에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프로그램이 많아지는 이유는 도대체 왜일까.

TV매체와 인터넷 세대
인터넷이라는 쌍방향 미디어의 탄생은 TV의 전망을 불투명하게 할거라는 막연한 추측과는 정반대로, 최근 TV와 인터넷 사이는 신혼부부처럼 따끈따끈하다. TV가 가진 영향력과 인터넷의 양방향성이 만나면서 그 폭발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SBS <야심만만>은 MSN의 사용자 ‘만 명에게 물었습니다’를 통해 그 소재를 발굴해내고 있고, 최근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KBS <상상플러스> 역시 포털사이트 네이트의 설문조사 및 검색을 활용하고 있다. 이것은 수동적인 시청자가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인터넷 세대들을 적극 끌어들이려는 TV의 노력과, TV라는 거대매체에 자사의 간접광고효과를 노리는 인터넷 매체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실생활에 깊게 들어와 있는 ‘TV와 인터넷(요즘은 이 말을 거의 한 단어처럼 같이 사용하는 것 같다)’의 영향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젊은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TV 프로그램인 경우가 많고, 그 TV프로그램에 대해 가장 격렬한 말이 오고가는 곳이 바로 인터넷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니 ‘의견을 받아들여 방송을 한다’는 형식은 여러모로 유용한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있다. 네티즌들이 알게 모르게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의견을 개진하면서 민감해진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언어’이다. 소위 말하는 댓글, 악플, 노플 등은 네티즌들에게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양식(糧食)인가 하는 것을 말해준다.

영상세대들은 글을 멀리할거라고?
한때 영상세대니 뭐니 하면서 이제 그들에 의해 문자는 버려지고 영상만 남을 거라는 오해를 심어줄 만한 신문사설들이 줄을 이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건 매체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처사다. 매체는 신문 같은 문자매체와, 방송의 영상매체, 그리고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전자매체가 있는데 당시에 죽게된 것은 문자매체였을 뿐, 문자 그 자체는 아니었다. 글, 말, 문자는 고스란히 영상매체 속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전에 없는 수많은 글들을 읽어가며 영상을 보게 되었다. 신문의 기능은 그대로 인터넷 신문으로 넘어오면서 보다 역동적(interactive)으로 변모했다. 오히려 영상세대들은 문자에 더 민감해졌다. 신문이 일방적으로 문자를 던졌을 뿐이라면 이들은 그 문자가 던져지는 동시에 수많은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영상세대들이 문자를 멀리할 거라는 기존의 통념을 뒤엎고 오히려 문자에 민감하게 된(문자메시지의 범람을 보라!) 전후 사정이다.

말이 오르는 프로그램이 잘 나갈밖에
그러니 언어를 다루는 프로그램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말 겨루기>는 KBS가 아마도 공영방송이라는 취지를 갖고 시작한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2003년 정재환이 진행하던 이 프로그램은 이제 한석준 아나운서로 바톤을 이어가고 있다. 초창기에 이 프로그램이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말에 대한 비상한 관심들은 그대로 이 프로그램의 인기에 불을 붙였다. 같은 월요일 연예오락프로그램인 <야심만만>이 16%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하는데, 시사교양프로그램인 <우리말 겨루기>가 14%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은 경이적인 일이다. 이 프로그램의 인기비결은 첫째 인터넷을 통해 시청자들이 직접 참여하는(방송까지) 프로그램으로 매니아층이 두텁다는 것이고, 둘째는 정통 퀴즈프로그램이 갖는 긴박감이 시청자들에게 손에 땀을 쥐는 재미를 준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특정한 지식이 아닌 우리말 겨루기라는 특성이 있어 누구나 참여가 가능하고, 거기서 잘만 하면 꽤 많은 상금을 얻을 수도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에 대한 정보냐? 오락이냐?
하지만 <우리말 겨루기>와는 다른 <상상 플러스>의 ‘올드&뉴’와,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MBC에서 야심 차게 기획한 사투리 퀴즈쇼 <말 달리자>는 시청률 상승의 요인이 조금 다른 곳에 있다. 당연한 것이지만 연예 오락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우리말 겨루기>가 추구하는 정보의 즐거움보다 오락에 더 치중한다는 것이다.

<상상 플러스>의 ‘올드&뉴’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바로 이거다!’ 하고 손뼉을 쳤을 것이다. ‘세대간의 벽을 허문다’는 취지에 많은 사람들이 동감했고, 그 재미있는 진행에 빠져들었다. 노현정이라는 재치 있는 아나운서의 전격기용은 프로그램의 균형(재미와 정보)을 유지하는 역할을 해주었다(적어도 처음에는). 하지만 ‘혹시나’는 ‘역시나’로 흐르고 있다. 명분을 어느 정도 쌓고 시청률이 본 궤도에 오르자 본격적으로 재미를 추구하게 됐고 그러자 정보성은 퇴색되었다. 그러자 올바른 말을 추구한다던 이 프로그램의 취지가 무색하게도, 출연자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바로 네티즌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 시작한 MBC의 <말 달리자>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주는, 사투리를 알자는 좋은 취지로 일단 초기의 합격점을 받은 듯 하다. 사투리로 일반인이 설명하고, 그 문제를 푸는 연예인들의 답답함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면서도 우리 사투리를 다시 보게 하는 힘이 있다. 이 프로그램에는 연예인들(가수, 배우, 개그맨을 망라한)은 물론, 아나운서, 국립국어원에서 나온 전문가까지 실로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만큼 각계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역시 재미와 함께 정보성(교육성)을 최대한 가미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저 <상상플러스>가 초기의 뜻과는 달리, 개봉하는 영화나 신보의 홍보마당이 되는 현상을 보면서, 그 뜻이 얼마나 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소통부재의 세상, 유쾌한 웃음의 장이 되길
우리말에 관련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등장해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소통부재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세대간의 언어장벽은 그렇지 않아도 깊은 세대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어 버린다. 사투리는 이제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지만 이 아름다운 지역색은 상호간의 깊은 이해가 없이는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따라서 서로의 사투리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그 지역 간의 골을 없애는 길이다.

굳이 ‘말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하고 거창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단지 우리말을 가지고, 지역을 불문하고 남녀노소가 함께 웃고 즐길 수 있는 장이 펼쳐지길 기대할 뿐이다. 아쉬운 것은 시사교양 프로그램으로서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말 겨루기>가 그나마 세대간의 장벽을 넘어서 누구나 쉽게 즐기는 프로그램인 반면, 다른 오락 프로그램들은 젊은 세대들만 공감하는 프로그램인 것 같다는 점이다. 부디 이 좋은 ‘말의 잔치’가 그들만의 ‘말잔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Posted by 더키앙

<굿바이 솔로> vs <크래쉬>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이 다중스토리 구조이다. 하나 혹은 둘의 주인공 캐릭터가 나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전통적인 스토리 구조가 아닌, 여러 인물들이 똑같은 가치를 갖고 등장해 각자의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전체적인 울림을 만들어내는 구조이다. 아마도 우리는 <러브 액추얼리>나 <숏컷> 같은 영화를 통해 그 구조를 친숙하게 느꼈을 것이다. 최근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굿바이 솔로>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크래쉬>로, 이제 이 실험적인 구조는 더 이상 실험적이지 않은 하나의 관습이 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이렇게 주인공들이 많은 걸까
이 구조가 하나의 관습이 되고있는 이유는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는 현대인들의 드라마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전통적 스토리 구조가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가족 간의 고리마저 희미해진 현대인들은 각기 하나의 섬처럼 사회 속에 존재하는데 그들의 얇기 만한 관계를 그려내는데 있어 어느 한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것은 자칫 독선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등장하는 <시리아나>, <뮌헨> 등 일련의 영화들이 의도적인 드라마 엮기가 아니라, 인물들 간의 부딪침을 그저 보여주는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는 것 역시 의도적으로 작가의 손길을 배제함으로써 복잡다단한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노력에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크래쉬>와 <굿바이 솔로>가 같은 다중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으며 또 둘 다 현대인들의 문제를 다룬 것이지만, 이 두 스토리는(영화와 드라마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제작된 곳의 거리만큼 하고자하는 이야기의 거리도 멀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크래쉬>
<크래쉬>는 어느 교통사고 현장에서부터 시작한다. 왜 사고가 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할 즈음, 영화는 하루를 되돌려 그 사고의 이유에 모든 주인공들이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것을 ‘집착적’으로 잡아낸다.

요로병에 걸린 아버지 때문에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 있는 라이언 경관은 흑인부부 카메론과 크리스틴에게 굴욕감을 안겨주고, 두 명의 흑인사내인 피터와 앤소니는 검사의 차를 강탈하고 도망치다 한국인 조진구를 치게 된다. 이란인 파라다는 가게가 털린 것을 열쇠수리공 대니얼의 탓으로 돌리고, 결국 가게를 지키기 위해 사들인 총으로 열쇠수리공 대니얼에게 들이댄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면서 상대방에 대한 과잉방어로 일관한다. 그러다 이야기는 급반전을 하게 되는데 교통사고를 당한 크리스틴을 이번에는 라이언이 구하게 되고, 파라다가 열쇠수리공 대니얼에게 총을 쐈을 때, 그것을 막기 위해(?) 뛰어든 대니얼의 딸(딸은 대니얼의 말을 믿고 자신은 불사신이라 생각했다)을 파라다는 천사로 여기게 된다(본래 그 총의 총알은 공포탄이었다).

이 영화는 911테러 이후, 어떤 사고가 일어난 후 겪는 극도의 스트레스인,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는 미국사회를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그 부딪침을 사실은 ‘서로에 대한 느낌이 그리워서, 서로를 느끼기 위해서’ 충돌하는 것이라고 화해시킨다. 이러한 강박적인 화해는 아마도 작가인 폴 해기스 스스로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찌 보면 억지스런 화해와 관계(LA가 그렇게 좁은 동네인 지 몰랐다! 인물들이 그렇게 극적인 순간에 다 만나게 되다니!)를 받아들이고 이 작품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준 미국은 아마도 똑같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동병상련 속에서 그 이야기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섣부른 화해의 제스처가 가져올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인종차별주의자로 보여지는 라이언이 직권을 남용해 성폭력을 했던 크리스틴을 사고현장에서 구했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란인 파라다가 운 좋게도(?) 공포탄을 쏴서 대니얼의 딸을 살릴 수 있었고 그래서 그녀를 천사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의 살인미수가 덮어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작가의 바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반전은 이미지적으로 관객들에게 이미 해결점을 보여주어 어떤 문제에 대한 논의를 덮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만다. 사실은 뒷짐 지고 캐릭터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면서 부딪침을 만들도록 작가는 내버려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작가의 강박은 그걸 허용하지 못해 결국 인물들을 인형으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이 좋은 소재의 스토리는 하나의 교훈적인 우화가 되고 말았다.

<굿솔>, 사회에 대한 비판과 인간에 대한 신뢰
반면 노희경 작가의 <굿바이 솔로>에는 이야기 흐름에 있어서 작가의 개입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가 드라마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인물 속에 자생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상처) 철저히 숨겨두었기 때문이다. 폭력남편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한 딸과의 약속을 저버린 자책감에 말을 하지 않는 미영 할머니(나문희 분), 어린 시절 지긋지긋했던 가난으로 병져 누운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을 갖고 살아가는 영숙(배종옥 분), 뒤늦게 자신의 아버지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집을 뛰쳐나온 민호(천정명 분), 복수심으로 민호의 집으로 들어와 살면서 민호의 사정을 알게되고 괴로워하는 지안(이한 분), 장애가 된 한 여인에게 순정을 갖는 깡패 호철(이재룡 분) 등등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애초부터 문제를 갖고 출발한다.

이 인물들이 <크래쉬>에서와 다른 점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명확히 알고 있으며 또 그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문제를 피해서 달아난 인물들로 드라마는 시작하지만, 결국 이들은 자신의 문제들을 직면하고 이겨낸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아파하지만 그렇다고 도망치지는 않는다. <크래쉬> 등장하는 인물들의 문제를 아는 것은 그 영화를 만든 작가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지, 등장인물들이 아니다. 그러니 그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가지지 못한다. 그들은 인형처럼 수동적인 반면 <굿바이 솔로>의 인물들은 대담할 정도로 능동적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능동성과 수동성은 작품의 방향성에 있어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낸다. <크래쉬>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작가에 의해 주어진’ 한 방향성을 갖고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지만, <굿바이 솔로>에서는 능동적으로 각자의 문제에 부딪친다. 그들은 잃은 만큼 얻어간다. 작가의 작품과의 거리가 이러한 차이를 만든다. 이로써 <굿바이 솔로>는 <크래쉬>가 억지로 얻으려 했으나 얻지 못한, 다중스토리가 그 구조적으로 얻어야할 주제를 얻어낸다. 각자의 군상들이 어떤 아픔을 주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각자 다른 방법으로 해결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카메라 밖에서(사회) 상처를 입고 카메라 안으로 들어온 인물들은 서로 아파서 부둥켜안으면서 상처를 핥아준다. 이것은 치유라기보다는 위안이다. 대신 그 위안 뒤에 작가가 하는 말은 사회(혹은 제도)에 대한 강한 비판과 사람에 대한 강한 신뢰이다.

둘 다 다큐멘터리 같은 드라마를 보여주지만
다중 스토리가 얘기하는 세계는 수평적이다. 어느 한 인물에 의해 드라마가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는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들과 그 부딪침으로 움직인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다큐멘터리 같다. 이런 수평적인 얘기를 하는데 있어서 작가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관계에 개입하기보다는 사회의 문제를 대변하는 인물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창조된 인물들에게 생명을 넣어 사회라는 다큐멘터리의 세계 속으로 투입한 후 벌어지는 드라마를 관전하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의도는 억지로 짜진 스토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물 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물론 드라마가 가진 길이와 영화가 가진 길이의 차이가 이런 결과를 낳았을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2시간 남짓의 <크래쉬>라는 영화가 인종의 용광로로 상징화시킨 LA라는 거대한 지역을 배경으로 한 반면, 16부작에 걸친 <굿바이 솔로>의 배경은 서울의 어느 작은 한 동네라는 것이다. 보다 포괄적인 사회문제를 포착하기 위해 거대한 지역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많은 인물들을 억지로 얼기설기 엮는 부작용을 낳을 가망성이 높다. 반대로 축소판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 <굿바이 솔로>는 깊이라는 선물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위의 비교는 그 이야기가 제공하는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배제한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낫고 무엇이 그르다고 하기 어렵다. <크래쉬>가 처한 미국의 현실은 <굿바이 솔로>가 보여주는 우리네 현실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어쩌면 <크래쉬>의 이 억압적이고 강박적인 드라마의 등장(과 그 적극적인 수용)은 미국 사회가 가진 병리적인 상태를 모두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더키앙

웰메이드 드라마, <연애시대>

‘영화인들이 만든, 영화인들의 드라마’라는 타이틀이 걸렸을 때, ‘그래도 드라마라는 특성이 있는데’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연애시대>를 ‘개봉’해보자 ‘이거 진짜 장난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TV 앞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서 자꾸만 팝콘과 콜라가 생각나는 건 그것 때문일까.

유치한 악역이 없다
‘드라마(drama)[명사] 1.극(劇). 연극. 2.방송극. 3.각본. 4.‘극적인 사건이나 상황’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 네이버 국어사전
뜻 그대로 드라마 속의 극적인 사건이나 상황은 극중 캐릭터들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드라마 작가들은 갈등 없는 장면은 드라마에서는 쓸모 없는 설명이 된다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갈등’이라는 말을 잘못 해석하면 마치 선악 같은, ‘마치 적이 있고 우리편이 있어서 서로 싸우는’ 그런 단순한 대결구도를 떠올리게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 헐리우드 영화들이 저 숱한 액션영화에서 답습한 결과, 시청자들의 눈을 멀게 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선과 악이 분명한 단순한 대결구도는 이제 유치한 설정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드라마들은 여전히 이 쉬운 방식에 사로잡히곤 하는 게 현실이다. 요는 그것이 재미가 있지는 않을 지라도 여전히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연애시대>가 재미있는 건 이러한 유치함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인물 하나하나에 정이 간다
<연애시대>에는 악역이 없다. 인물 하나하나 보면 볼수록 정이 간다. 능구렁이 같지만 자상한 면을 갖고 있는 감우성, 당차고 드센 듯 보이지만 여린 구석을 갖고 있는 손예진, 자신이 가장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지도 모르고 남 걱정만 하는 공형진, 다시 되살아난 김삼순 이하나, 재수 없는 황태자를 위장한 상처 많은 남자 이진욱, 섹시함 뒤에 숨겨진 모성애 오윤아, 늘 앙 다물고 있지만 한번 웃기만 하면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그녀의 딸 전지희, 과격한 프로레슬러지만 왠지 정이 가는 손예진의 친구 하재숙, 용서보다는 화를 내라는 엉뚱한 신부 김갑수... 그 누구하나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인물이 없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시종일관 우리를 웃게 만드는 것은 ‘공감’이다. 그 사랑스런 인물들의 진정성에 대한 이해는 보는 이들을 따뜻하게 또는 안타깝게 만드는 힘이다.

갈등은 밖이 아닌 안에서 생긴다
그렇다면 이런 인물들 간의 갈등은 어떻게 벌어질까. 그 갈등의 원인은 인물들 밖이 아닌 안에 있다. 그들이 화를 내는 건 상대방 때문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을 때이다. 왜 화가 났을까. 상대방의 의도하지 않은 말 몇 마디, 혹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상황이 내 속에 있던 상처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손예진의 상처는 어린 시절 엄마의 죽음과 최근 사산된 아이이다. 이로서 그녀는 스스로 ‘엄마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녀가 이혼한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손예진을 쫓아다니는 황태자, 이진욱 역시 엄마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오윤아는 남편의 폭력에 대한 상처(아이에 대한 것이 더 큰)가 있다. 그래서 엄마 자질이 없다며 스스로 자책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붙들어줄 자상한 아빠를 희구한다.
이렇게 보면 이 드라마의 문제는 엄마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문제의 반일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상처가 ‘불쌍한 엄마’때문이며, 그 불쌍한 엄마를 만든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아빠’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손예진은 엄마가 죽어가는데 기도만 하던 아빠를 이해할 수 없고, 이진욱은 버려져 아빠만을 기다려왔던 엄마를 한번도 찾아와 보지 않은 아빠를 증오한다. 오윤아는 스스로 엄마이기를 포기하게 만든 남편을 미워한다.

헤어져봐야 안다
이 상처 많은 이들은 이제 드라마에서 서로 중첩되면서 서로를 보듬는다. 같은 엄마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는 손예진과 이진욱은 그 기억 앞에서 서로 몸을 기댄다. 오윤아가 남편에게 당하는 모습을 본 감우성은 그녀를 위해 남편에게 ‘애인’이라고 말한다. 이건 연애일까, 동정일까, 혹은 동감일까.
재미있는 것은 이 드라마 상에서 헤어져봤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의 대비이다. 즉 엄마 아빠가 됐었던(혹은 됐을 뻔했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에는 사랑을 보는 시각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진욱의 아빠는 사실 찾으려 해도 아내를 찾아갈 수 없었던 것이고, 아내의 죽음 앞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기도했던 김갑수는 사실 가장 큰 상처를 입었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여기서 오윤아는 예외적인 인물인데, 그것은 스스로 헤어지는 걸 원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래서 모두 자식들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진짜 사랑을 보여주려 한다. 반면 이진욱의 손예진에 대한 사랑은 사실은 아빠에 대한 보복심리가 더 크며, 오윤아의 감우성에 대한 사랑은 모성애가 더 강하다. 감우성과 손예진은 그 중간에 서서 갈등하게 된다. 엄마 아빠가 되어 현실을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하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복잡해진 드라마 관계 속에서 자꾸만 발견되는 것은 감우성과 손예진의 사랑이다. 헤어짐(아픔)을 경험했던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사랑 혹은 동감과, 남녀로서의 사랑(연애)을 동시에 다 아우른다. 그들은 아픈 만큼 조금씩 성숙해간다. 마음 속에 남겨진 앙금이 걷히는 과정이 이 드라마가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헤어진 후에 다시 만나는’ 이들은 ‘성숙된 남녀’로서 서로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웰메이드 드라마의 전형될 듯
이 드라마는 연기자나 연출, 촬영 어느 모로 보나 웰메이드 드라마의 전형이 될 가능성이 높다. 수많은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과 장면들이 사실은 그냥 들어가는 것이 없을 정도로, 꽉 짜진 이 드라마는 보면 볼수록 ‘아 그 때 그랬었지’하는 동감을 이끌어낸다. 드라마 처음부터 등장했던 물 속에 들어가 허우적대던 한 사내(서태화 분)는 전혀 쓸모 없는 인물처럼 느껴졌지만 6회분에 와서야 그 진면목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 한 번의 출연을 위한 충분한 사전포석에 놀라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손예진의 상처를 치유해줄 비법을 전수해주는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매번 출근길에 감우성이 확인하는 손예진의 자전거, 청혼과 이혼 선언을 했던 단골 카페 등등 계속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은 후에 벌어질 어떤 사건 같은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좋은 영화는 함부로 버리는 것이 없다. 이것은 거꾸로 얘기해 슬쩍 들이민 캐릭터도 다 분명한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경제적이라는 뜻도 되지만, 진짜 의미는 군더더기가 없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드라마들은 시청률과 맞물려 갑작스런 캐릭터의 등장과 퇴진 등의 소모적인 방식을 취했던 것이 사실이다.
영화인들이 흔히 하는 말로 “덜컥거린다”는 말이 있다. 이건 드라마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끼워 넣은 듯한 느낌을 준다는 말이다. <연애시대>, 이 덜컥거림 없으면서도, 뻥튀기된 근육질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쩍 마른 앙상함도 아닌, 숨은 근육들이 잘 균형 잡힌 드라마를 보면서 팝콘이 먹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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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드라마에 나타난 성향들

요즘 드라마들이 때아닌 가족 열풍에 휩싸이고 있다. <별난 여자 별난 남자>, <하늘이시여>, <소문난 칠공주>, <불량가족>, <연애시대>, <굿바이 솔로> 등 가족의 문제를 다룬 드라마들이 TV시청률을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렇게 가족이 화두가 된 것은, 아마도 파편화되고 해체되어가는 가족들이 늘고 있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삶을 버겁고 힘들게 만드는 것도, 또 그 힘든 걸 견디고 이겨내게 만드는 것도 가족이라는 점에서 많은 시청자들은 드라마 세상 속의 가족을 꿈꾼다. 그래서일까. 가족을 다루는 드라마들은 그 시각에 있어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의 기본 단위는 가족이고, 따라서 그 가족들을 보는 시각은 보수든, 중도든, 진보든 정치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 집구석은 어떻게 살아가나, <별女별男>, <소문난 칠공주>
주간시청률 부동의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별난 여자, 별난 남자>가 보여주는 가족은 과연 현실적일까. 매일 매일 지친 일상 속에서 집으로 돌아온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를 엿보며 자신들만의 가족을 꿈꾼다. ‘도대체 저 집구석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채널을 고정시키게 만드는 요인이다. 물론 그 집구석을 바라보는 시각은 시청자들에 따라 다르다. 함께 모여 단란한 저녁식사를 하며 드라마를 시청하는 가족은 아마도 “저 집구석도 우리랑 참 비슷하네”하는 공감을 가질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이미 해체된 가족들은 과거의 단란했던 기억들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그 땐 툭탁거리면서도 모두 함께 있었는데...”하며 순간 드라마가 주는 달콤한 최면에 빠질 것이다.

최근 시작된 주말드라마 <소문난 칠공주>도 이러한 보수적인 중산층의 시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전통적인 ‘딸 부잣집’이야기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고전적인 연애담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곡절도 많고 사건도 많은 딸 부잣집’은 일단 그 이야기가 풍부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 많은 딸을 ‘어떻게 좋은 배필을 만나게 해서 결혼시키는가’ 하는 연애담으로 집중된다. 여기서 딸들은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면서 가족 간의 드라마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삶은 힘들어도 가족이 있어 좋다구?
이들 드라마는 어찌 보면 바람잘 날 없는 많은 가족 간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어, 마치 ‘세대간의 부딪침’으로 그 이야기를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 드라마가 다루는 가족이라는 의미이다. 그 의미는 전통적인 시각, ‘아무리 힘들어도 역시 가족은 가장 중요하다’는 보수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들 드라마가 지향하는 바 역시 가족 구성원을 만드는 ‘결혼’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적인 문제 같은 것들은 가족 바깥의 일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가족 안에서도 그 징후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런 드라마들이 요즘 시청률이 좋은 이유는 강력한 환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거기 만들어져있는 여러 군상으로 이루어진 가짜 가족구성원들은 시청자들에게 투망식 감정이입의 그물을 펼쳐든다. 왠만한 사람은 그 드라마 인물들 속에 자신을 투영하게 되고, 그는 30분에서 1시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현실을 잊고 빠져드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매일 기다려지는 몇 분이 갖는 의미이다. 몇 분간의 환상은 사람들을 현실사회의 모순에 저항하기보다는, 잊고 버티게 하는 태도를 만든다. “삶은 힘들지만, 그래도 가족이 있어 좋다”는 말속에는 삶을 힘들게 하는 사회의 부조리를 무화시키고 “가족이 있기 때문에 힘들어도 살아가야 한다”는 체념이 숨어 있다. 이것은 그 문제를 제공한 자들이 줄곧 내세우며 참으라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아예 한 발 더 나가버린 <하늘이시여>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하늘이시여>에 비교하면 순진하기까지 하다. <하늘이시여>가 갖는 보수성은 가족 논리를 넘어서 혈연, 피의 논리까지 다다른다. 행복을 위해 자신의 친딸과, 재혼해 갖게 된 아들을 결혼시킨다는 이 비상식적인 구도가 대대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그 속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혈연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 했던 우리네 어머니들과, 그런 어머니들에 의해 그건 당연한 것으로 길들여진 우리네 자식들은, 이 놀라운 조합의 드라마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왕지사 혈연을 드러낸 바에야, 드라마의 쿨함 같은 것은 애초부터 기대하기가 어렵게 된다. 우리는 쿨한 가족들의 침묵이 갖는 그 여운을 읽기보다는, 머리끄댕이 잡아당기고, 뺨을 올려부치는 장면 속에서 낯설지 않은 풍경을 잡아낸다. 어머니의 과도한 사랑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비정상적 애증을 확인하며 부르르 몸을 떨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길 때, 그 머리는 자경의 머리가 아닌 시청자의 머리였고, 뺨을 맞았을 때, 그 뺨은 한혜숙의 뺨이 아닌 시청자들의 뺨이었던 것이다. 시청자들은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이 성장하면서 가져왔던 애증을 이 드라마를 통해 다시 떠올린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어떤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무화시키는 혈연과 애증의 틀이다. 도대체 현실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유아적인 분노를 끄집어내서 뭘 하겠다는 건가. 특별한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는 자극적 설정으로 시청자와 애증적 관계를 추구하는 이 드라마는 애초부터 끝없는 연장방영이 예고된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평상시에는 바꿔야 한다고 소리치다가도 매번 선거 때만 되면 연장 방영되는 지역 색과 닮아있다.

가족에 대한 불온하지만 참신한 생각들
최근 시작된 <불량가족>과 <연애시대>는 가족에 대한 불온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불량가족>은 제목에서부터 암시되듯 우리네 해체된 가족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묶어낸다. 가족이 모이는 것은 돈 때문이며, 유지되는 것 역시 돈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억지로 엮인 가족을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은 TV밖의 세상을 더 많이 보여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억지로 엮인 가족들도 한 집안에 담기면서 제법 가족 같은 분위기를 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해체된 가족을 보여주면서도, 또 그 가족이라는 패러다임이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보여준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지면 생겨나는 이기주의와 유사애정 등이 우리에게 끝없이 웃음을 만들어내지만 그 웃음 끝에는 단란한 가족이라는 허구에 대한 통렬한 풍자가 달려있다.

‘헤어지고 시작된 이상한 연애’라는 카피로 소개된 <연애시대>는 마치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보는 것처럼 발랄하면서도 그 깊은 내막 속에 결혼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아내고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가진 틈바구니 속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연애감정을 이혼 후에 느끼게 되는 이 드라마에서는 가족이라는 무게가 빠져버린 중년 남녀들이 출연한다. 그들은 결혼을 했다가 이혼했거나, 이제껏 결혼을 하지 못했거나,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결혼이 아닌 연애이다. 또다시 결혼이라는 늪으로 빠져들지 않으려 애쓰는 그들은 서로를 미워해 이혼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결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 헤어진 후에 다시 만날 밖에. 그들은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 이로써 사랑=결혼이라는 등식은 자연스럽게 깨져버리면서 드라마를 연애담에서 사회극으로 끌어올린다. 능동적인 연애와 수동적인 결혼이라는 양자구도 속에서 이 이야기의 도발은 가족이라는 사회적 구성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해야하는 결혼과 반드시 하지 말아야할 이혼을 거꾸로 뒤집어보게 만든다는 데 있다.

집밖으로 나온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굿바이 솔로>
<굿바이 솔로>는 여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해체된 그 후의 세계, 혹은 대안을 다루고 있다. 기존 드라마와는 다르게 7∼8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고 했을 때부터 이 드라마는 이미 해체된 가족을 전면에 드러낸 셈이다.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가족이 해체되어 홀로 살아가는 솔로들이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상처를 안고 홀로 살아간다. 그 상처는 다름 아닌 가족의 해체의 원인이기도 하며, 혹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집밖으로 나온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이웃을 만나고 가족보다도 더 따뜻한 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들은 모두 해체된 가족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이기에 그 이해는 남다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 서로 부딪치고 그러면서 거기에 따스한 온기를 만든다. 그들을 여전히 괴롭히는 것은 자신이 도망쳐 나왔던 바로 그 가족이다. 가족의 망령이 그들의 아물려 했던 상처를 뜯어낼 때 강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쿨한 척 했던 그들은 울부짖는다. 그러나 그 울부짖음의 옆에는 항상 자신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웃이 있다. 그들은 어떤 조언도 해주지 않으나 홀로 남은 그들에게 위안이 된다. 상처 입은 짐승이 이웃을 찾았을 때 그들이 해주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고(이건 가능하지도 않다) 단지 얘기를 들어주며 안아주는 것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노희경 작가는 말한다.

노희경 작가가 보여주는 이 솔로들의 상처 보듬기는 차라리 아나키즘적이고 히피적인 냄새까지 풍긴다. 그 안에는 지위의 높고 낮음도 없고, 빈부의 격차도 없다. 온통 상처뿐인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복수하러 갔는데 그 사람도 역시 상처를 갖고 있더라”는 식의 드라마 구조는 묘한 감동의 골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격렬한 부딪침 속에, 침묵 속에, 스쳐지나가듯 던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 한 마디에 촌철살인의 감동이 묻어난다. 그들이 가족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비로소 이웃의 존재를 깨닫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듯이, 이 낯선 드라마가 전통적인 가족 중심 드라마의 틀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우리는 드라마가 가진 환상의 틀을 벗어나 가족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카메라 앵글 바깥쪽에서 상처받고, 카메라 앵글 안쪽으로 들어온 솔로들은 이웃들과 만나 ‘솔로’를 ‘굿바이’한다. 카메라 안에서 연실 저 바깥에서 받은 상처를 핥고 보듬는 인물들을 보다보면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상처 입게 했나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드라마가 가진 가장 큰 사회적인 메시지다.

현실은 멀고 환상은 가깝다
이들 드라마들을 편의상 보수와 혁신의 잣대로 나눈다면, <하늘이시여(극보수)>-<별난 여자 별난 남자, 소문난 칠공주(보수)>-<불량가족(중도보수)>-<연애시대(중도혁신)>-<굿바이 솔로(혁신)>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가족에 대한 시선이 보수로 가까이 갈수록 시청률이 높아지고 혁신으로 갈수록 시청률이 낮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적어도 TV에서는 피곤한 하루의 끝에 현실을 보기보다는 강력한 진통제로서의 환상을 요구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시청률이 드라마의 질을 답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드라마의 질은 정반대의 순서로 흘러간다. 이 시청률과 드라마 품질의 반비례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왜 좋은 드라마가 좋은 시청률을 기록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답은 아무래도 TV라는 매체 스스로 사회적 영향력을 낮춤으로써(대신 시청률을 얻었다) 자초한 결과이거나, 가족이라는 품으로 돌아와서는 다시는 보고싶지 않을 정도로 답답하고 울화통 터지는 사회에서 그 책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TV 스스로 정치적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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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왈츠> 그 인물의 변화

봄은 왔다. 드라마 초반부 청산도에서 얼핏 보였던 봄의 기억은 오스트리아의 긴 겨울의 터널을 거쳐 서울 한 복판으로 그 기운을 조금씩 퍼뜨리고 있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마음들이 그 봄의 기억에 조금씩 녹아 내리면서 <봄의 왈츠>는 눈물 방울방울들이 모여 봄비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자 얼음처럼 쿨했던 그들의 얼굴에는 이제 어색하지만 낯설지 않은 미소와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의 샘이 솟아나고 있다. 그들의 얼굴에도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윤재하, 얼음왕자에서 스위트 보이로
상처가 속살이 되어버린 윤재하. 또 다른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잔뜩 보호막을 치고 있는 이 가녀린 짐승에게 던져지는 박은영의 미소는 봄의 햇볕 그것이다. “그녀를 보면 왠지 마음이 아픈” 그는 그것 때문에 박은영의 존재가 자신의 가슴속에 서서히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작은 바늘 같은 그 봄의 전령은 그러나 순식간에 얼어붙은 윤재하의 마음을 녹여낸다. 누군가를 새롭게 그리워할까 봐 숨어들었던 피아노. 상처를 보듬고 이겨내기 위해 그의 손은 늘 피아노 위에서 고통스런 연주를 거듭했다. <클레멘타인>은 늘 그의 손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상처를 지우기 위해 대신 상처를 짊어진 그의 손은 어느 다른 사람의 손을 잡지 못하고 늘 혼자였다. 건반 위에서도, 허공을 두드리는 손짓에서도.
그런 그의 손이 박은영의 손을 찾는다. 박은영의 손과 함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오랜만에 온기를 느낀 손은 마법이 풀리듯 그의 몸과 마음을 풀어낸다. 웃음이 피어난다. 모든 걸 다 걸어도 좋을 봄의 기억을 그는 어렴풋이 찾았다. 박은영의 존재가 그 어린 시절 그의 마음 속에 들어왔던 소녀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그 순간, 그는 이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그제서야 알아차릴 것이다.

박은영, 캔디의 실체를 드러내다
본래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는 캔디의 노랫말 속에는, 외롭고, 슬프고, 울고싶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박은영의 명랑 쾌활한 얼굴이 가능했던 것은 끝없이 상처뿐인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힘든 건 꿈일 거야. 깨어나기만 하면 난 특별한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그녀는 이렇게 생각함으로 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던 삶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현실이 다가온다. 꿈속에서 던졌던 그녀의 미소는 윤재하의 얼음을 녹였다. 얼음왕자와 캔디의 만남은 얼음왕자가 현실로 돌아옴으로 해서, 캔디 스스로도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현실은 그녀에게 가시밭길의 연속이다.
그녀는 이제 초라한 자기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 사랑하는 한 사람 윤재하, 아니 어린 시절의 이수호를 위해서. 그것은 그녀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녀가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은 어린 시절 아무도 찾지 않는 그녀에게 불현듯 찾아와 봄의 기억을 남기고 떠나버린 이수호가 준 것이다. 그녀가 현실을 부정하면서까지 현재를 살아가는 이유도 언젠가 수호천사가 나타날 거라는 막연한 꿈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꿈이 아닌 현실 속에서 그를 만날 것이다.

필립, 쿨가이에서 자상한 남자로
상처 같은 것은 절대 받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은 사실은 가장 많은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그것은 그가 실제로 상처를 받는다해도 그 쿨함으로 인해 스스로 상처를 보듬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아픈 어린 기억, 윤재하라는 천재를 만나 스스로 피아노를 접었던 기억, 그의 그림자로서 살아왔던 기억들은 그를 더욱 쿨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가 윤재하의 그림자로 기꺼이 살아온 것은 그들이 어떤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필립은 윤재하가 모든 걸 다 가졌다고 하지만, 이수호로서의 윤재하는 모든 걸 다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모두 박은영의 잃어버린 미소에 집착하는 것은 그들 삶 모두 추운 겨울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꼭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사랑인 것은 아니다. 그는 박은영이 “친구로 돌아가자”는 말에 “친구가 아닌 좋은 사람”으로 남길 원한다. 키다리 아저씨처럼 필립의 사랑은 숨어서 할 수밖에 없다.

봄은 왔지만 꽃샘추위는 거세지고
윤재하와 박은영, 필립은 이렇게 이제 봄을 맞으며 변화하고 있다. 겨우내 나지 않을 것 같던 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 변화의 봄바람 속에 굳건히 겨울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있다. 송이나와 윤재하의 어머니 현지숙, 그리고 아버지인 윤명훈(정동환 분)이 그들이다. 그들이 붙잡고 있는 과거, 겨울의 기억은 봄볕 속에 거세지는 꽃샘추위를 예고한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어차피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을. 저 에스진이 부른 <수호천사>의 가사처럼.
‘내겐 슬픈 겨울이 너를 만난 뒤 꿈처럼 사라져 / 나에게도 봄이 아주 천천히 /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고 있어 / 마음에 새겼던 사랑의 기억을 줄게’
<봄의 왈츠>는 이제 축축한 봄비를 재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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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가수와 얼굴만 있는 가수

1997년 12월 저녁. 논현동의 한 스튜디오. 스텝들은 모두 녹음실 안쪽에서 열창하고 있는 한 가수에 집중되어 있었다. 반쯤은 넋이 빠진 듯한 그들은 가수의 노래가 끝나자 마치 멈춰졌던 시간이 다시 흐른 것처럼 멋쩍어했다.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이 그 정도였으니 아마추어였던 내가 오죽했을까. 온몸에 감전을 당한 듯 소름이 돋은 나는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무조건 됩니다!” 이것이 내가 우연찮게 ‘사이버 가수 아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던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사이버 가수 아담은 탄생했다.

사이버 가수 아담의 멀티 플레이어 전략
사이버 가수 아담은 예상대로 잘 나갔다. 일본에 사이버 가수 1호 교코 다테가 있었지만 그것 역시 한일전 대결양상을 이루면서 오히려 아담에게 득이 되었다. 아담의 노래는 라디오를 타고 전국에 메아리쳤다. ‘세상엔 없는 사랑’은 가요톱텐에 올라갔고, 음반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당시 아담의 캐릭터와 스토리 제작 및 홍보를 전담했던 나로서는, 홍보마케팅에 있어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방송 3사의 연예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드라마(베스트 극장 등), 뉴스에서는 연일 아담을 소개했다. CF가 들어왔고 라디오 인터뷰는 물론이며 잡지 인터뷰가 쇄도했다. 아담은 가수이자, 연기자이자, 게임 캐릭터이자, CF 및 캐릭터 비즈니스의 모델이었다. 아담은 만들어진 존재였기 때문에 멀티 플레이(One source multi use)에 강했다. 그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이론이 현실의 장벽에 부딪힌 것은 아담의 입을 몇 번 놀리기 위해서는 무려 몇 일이나 걸리는 CG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만큼의 비용도 들어갔다. 방송출연 제의가 봇물을 이뤘지만 아담은 점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아담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아담의 얼굴 없는 가수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잘 생긴 외모를 가진 얼굴만 있는 가수였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과 동작은 부자연스러웠다. 어설픈 아담의 동작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를 든든히 받쳐준 것은 얼굴 없는 가수의 노래였다. 호소력 짙은 가사에, 뛰어난 가창력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녹음실에서 처음 가졌던 그 전율은 이제 라디오를 타고 전국의 청취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도대체 가수가 누구냐”는 추측이 난무했고, 한 유명한 음악평론가는 “신승훈에 버금가는 가창력”이라고 아담의 얼굴 없는 가수를 추켜세웠다. 이제야 밝힐 수 있지만 아담의 목소리를 대신했던 친구는, 박성철이라는 이름의 학생이었다.

아담의 성공이 박성철에게도 성공적이었을까.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후에 그는 가요계에 데뷔하겠다고 했지만 아담의 매니저(당시 아담은 전담 매니저도 있었다)는 단칼에 그의 의욕을 꺾었다. 네가 나오면 너도 죽고 아담도 죽는다는 것이었다. 딱히 둘러댈 것이 없어서였는지 그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얼굴 때문이라고 했다(사실 내가 보기에 그는 아주 괜찮은 미소년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박성철은 얼굴 없는 가수로 살아야 했다.

반면 얼굴만 있는 가수, 아담의 목적은 음악이 아닌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정도 돈을 번 회사는 더 이상 투자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것은 경제법칙, 투자대비 수익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아담의 프로젝트가 해체되면서 박성철과 만나 마지막으로 소주를 나누던 날, 그가 해준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아예 노래를 못하는 가수들도 많아요. 몇 번 코러스로 불러준 적이 있는데 나중에 녹음돼서 나온 걸 들어보니까, 그 가수 목소리는 없더라구요.” 그것이 현실이었다.

기획된 가수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에 음반 기획사들은 시장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그것도 몇 백만 장씩 소비되는)을 보았다. 가창력이나, 좋은 노래를 가진 가수들이 중심이 되어 흘러가던 가요계에 기획사들의 바람이 일었다. 기획사들은 모든 것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시장을 분석하고 거기에 맞는 상품을 고르듯, 가수를 골라내고(어떨 때는 조합을 하기도 한다), 노래를 붙이고, 댄스를 붙여서 음반을 찍어냈다.

사이버 가수 아담이 나왔던 시점은 바로 음반 기획사들이 태동하던 그 시기로 가수로는 HOT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기획사들은 그만큼 리스크를 줄이고 판매유인을 더 많이 끌어냄으로써 승승장구했다. 이미 소비자들은 영상세대로 불리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가수의 노래도 중요했지만 거기에 곁들여진 댄스와 무엇보다도 잘 생긴 외모가 더 중요했다. 그러자 기획사들은 얼굴과 춤을 먼저 보았다. 노래는 점점 그 다음 문제가 되었다. 노래는 몇 달간의 합숙과 연습, 그것도 안되면 녹음 과정에서 코러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됐다.

가수로서의 어떤 포부라든가, 꿈이 있다기보다는 성공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든 감수한다는 이 얼굴만 있는 가수들 뒤에는 역시 얼굴 없는 가수들이 있었다. 그게 많아지자 얼굴 없는 가수도 기획사에서 끌어안고 하나의 전략처럼 사용되었다. 이른바 신비주의 전략이었다. 진짜 얼굴 없는 가수들은 이제 조용히 스포트라이트 밖에서 자신의 음악세계만을 묵묵히 해나가야 했다. 아티스트들은 더러운 세상 뒤로하고 청산으로 들었고(사실은 등 떠밀린 것 같지만), 경박한 얼굴과 몸짓들만 세상을 가득 메웠다. 요는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과연 돈이 되었을까
물론 기획사들은 돈을 챙겼을지 모른다. 또 그 한 때를 함께 풍미했던 가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국내에 잘 나간다는 연예기획사들을 차린 이들은 대부분이 가수 출신이라는 것이다. 음악성으로 당당히 ‘넘버1이 되었던’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연예경험을 살려 ‘넘버1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들도 가수이니 가수들이 돈을 벌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가수로서 벌어들인 수익이 아니다. 그 수익은 연예기획사의 사장으로서 벌어들인 것이다. 가수들은? 끊임없이 시류에 맞게 재생산되었다. 아마도 그들 본인이 실감했을 것이다. 돈을 버는 것과 음악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생각하게된 일이지만 기획사에서 기획되어진 많은 가수들은, 사이버 가수와 다를 게 별로 없었다. 합성하지 않아도 성형을 통해 얼굴은 완벽해졌다. 노래는? 여기저기 시류에 맞게 다른 곡에서 샘플링된 상품으로 짜진 노래들을 죽어라 연습해 소화해내면 되는 것이었다. 춤은? 완벽하게 짜진 안무대로 움직이면 됐다. 춤추며 노래하기? 립싱크가 있으니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노래 못하는 가수는 용서해도, 얼굴 못생긴 가수는 용서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양적인 팽창이 일어났다. 너도나도 가수 명함을 내밀었다. 기획사는 더 많은 재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재료들이 많으니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고, 전보다 더 좋은 상품들을 시장에 내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포화된 시장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었다. 많다보니 특별한 상품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졌고, 좋은 상품을 가려내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업친 데 덥친 격으로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MP3 열풍은 음반 판매고에 치명타를 먹였다.

얼굴만 있는 가수들
음반판매는 되지 않았다. 가수는 음반이 팔리지 않으면 다른 노래를 부르던가, 아니면 자신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면 된다. 그러나 기획사들은 다르다. 회사는 당연히 이윤추구가 제 1의 목표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고, 적어도 본전을 챙겨야 했다. 가수들은 쇼프로가 아닌 각종 예능 프로그램을 장식했다. 토요일, 일요일 저녁만 되면 수많은 이름 모를 가수들이 시청자들을 웃기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리고 중간 중간 장기자랑 하듯이 노래와 춤을 홍보한다. 가끔씩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수인지, 개그맨인지, 탤런트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지경이니 노래는 더더욱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얼굴만 있는 가수들이 TV를 채우는 것이 요즘의 일이다. 기획사들은 멀티 플레이어 전략을 제대로 썼다. 음반 판매가 어려운 가수들은 일찌감치 각종 프로그램과 드라마 속으로 투입되었다. 음반 기획사로 출발했던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이제 드라마나 영화 제작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이유는 그 자체로도 돈이 되지만, 자신들이 양산한 가수들을 한류의 흐름에 계속 태우기 위함이다. 그들은 드라마가 가진 한류의 힘을 톡톡히 느낄 수 있었다. 드라마에 삽입된 곡들은 한류를 타고 잘 팔려나갔다.

그 한류의 언저리에서 박성철씨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이 아닌 ‘제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담에서 제로라니 그의 가수생활이 그다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재야에 있던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최지우, 이병헌, 류시원이 출연한 드라마 <아름다운 날들>에서였다. 이 드라마는 일본에서 붐을 일으켰고, 이것이 박성철씨가 제로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얼굴 없는 가수가 얼굴을 드러낸 곳은 그가 노래했던 이 땅이 아닌 이국땅이라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국내에서는 얼굴 없는 가수였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최근 들어 립싱크니 표절이니, 퍼포먼스니 하는 단어들이 부쩍 많이 늘었다. 여기에 우리네 음악계의 거장이라는 전영혁, 신중현씨의 쓴 소리가 떨어졌다. 전영혁씨는 “가수는 노래하고, 댄서는 춤추고, DJ는 음반을 틀면 된다”고 했고, 신중현씨는 “무대에 노래하러 나온 거냐 뛰어다니러 나온거냐”고 했다. 이걸 성철 스님식으로 표현하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가수는 가수고 댄서는 댄서고 DJ는 DJ다.

얼굴 없는 가수와 얼굴만 있는 가수는 어찌 보면 지금의 가요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병적인 현상이다. 기획상품으로 만들어진 가수는 한 때 반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금세 잊혀진다. 기획이란 시류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들 빨리 모이고 빨리 은퇴하는 가보다. 그들은 사이버 가수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계속해서 양산되는 이 사이버 가수들은 노래는 뒷전이면서도, 가수는 노래만 잘 해서는 안 된다는 부담스런 이미지를 만들어놓았다.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면 가수는 더 이상 가수가 아닌 탤런트가 된다. 탤런트가 낸 음반이 잘 팔리라는 기대는 아예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기획상품이 아닌 신중현, 조용필, 서태지 등의 계보를 잇는 가요계의 진정한 아티스트들이 나오길 바란다. 그들의 열정이 음반을 사는 이들의 마음 한 켠을 온전히 설레임으로 채우길 바란다. 얼굴 없는 가수, 제로 아니 박성철씨를 비롯해 많은 재야에 묻혀있는 진정한 실력자들이 가요계에서 활동하는 날들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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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의 일본진출, 그 의미  

<개그콘서트>의 일본공개공연을 앞두고 박준형은 “개그의 한류를 위해 일본 열도에서 무를 갈겠다”고 했다. 드라마와 가수에 이어 개그에서도 한류바람을 일으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일본의 개그맨들이 우리네 프로에도 등장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KBS의 <개그사냥>에 일본 니혼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활약하고 있는 개그지망생, 묘짱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니혼TV에서 방영 중인 <아시아 개그를 정복하라>는 프로그램 출연자로, 일본이 아닌 해외 개그프로그램에서 데뷔하라는 프로그램의 미션을 수행 중에 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본격적으로 시작된 개그의 한일전인가. 혹은 우리네 개그가 가진 한계를 넘기 위한 자구책인가.

우리는 일본에 민감하다. 한일전은 그 종목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이겨야 된다.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맞닥뜨린 일본을 일본 본토에서, 그리고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서 연달아 이기는 것만으로, 그동안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WBC의 주가는 급상승했다. 경기는 한일전을 기점으로 국가전의 양상을 띠면서 전례 없는 야구거리응원까지 펼쳐졌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4강 위업을 달성했고, 우승은 우리가 두 번이나 꺾은 일본에 돌아갔으니 그들도 체면은 차린 셈이었다. 그럼 갖은 수모를 다 겪은 미국은 뭘 챙겨갔을까. 그들은 돈을 챙겨갔다. 비용 4500만∼5000만 달러, 순익은 1000만∼1500만 달러. 게다가 이 대회를 통해 당초 목표로 했던 메이저리그의 세계화도 이루어졌다고 하니 이건 주최측이 한일전을 조장한 건 아닌가하는 기분까지 든다. 한일전은 돈이 된다.

그렇다면 개그의 한일전은 벌어질 것인가. <개그콘서트>가 등장하면서 국내의 정통 개그 프로그램은(쇼 프로그램이 아닌) 모두 같은 색깔의 옷을 입게됐다. 공개방송. 스탠딩 개그, 무한정 투입되는 아이디어, 새로운 얼굴과 끝없는 물갈이... 그러나 끝없는 아이디어 산출이 가져온 것은 시청률 상승과 함께, 개그맨의 단명이다. <개그콘서트>는 한 마디로 엄청난 개그의 인해전술을 방불케 한다. 양이 많아지면 그만큼 주의력은 흩어지게 마련.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뜬 개그맨들은 하나둘 그 아이디어 전쟁에서 밀려나 새로운 분야(방송진행,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을 보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개그콘서트>의 성공은 어찌 보면 개그맨들의 살을 깎는 경쟁과 대전을 통해 이룬 것이다. 그렇게 피를 말려온 개그맨들이 일본이라는 생소한 국제무대에 서서 당당히 일본인들을 웃기는 모습을 본다면 마음이 어떨까. 라면 먹고 한 개그에 눈물이라도 흘릴 것인가.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WBC가 끝나고 야구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이 국내야구경기로 옮겨왔는가 하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국내경기를 마치 동네야구처럼 생각하게 되지는 않았는가. 야구하면 메이저리그라는 등식이 더 공식화된 건 아닐까. 탄탄한 지원이나 확실한 기반 없이 해외에서 한번 보여주는 선방은 분명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구석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통해 우리네 사정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개그콘서트의 무대에서 주목을 끌었다고 해서 그 개그맨의 실제 사정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 것과 같다.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개그맨들은 그 어느 정치인들보다, 경제인들보다, 의사보다, 더 존경받을 만하다(물론 가끔 개그맨들을 능가하는 정치인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저 <왕의 남자>에서 조선시대 개그맨, 장생과 공길을 통해 보았듯이 그저 ‘웃기는 잡놈’이 아닌 예술가에 가깝다. 그네들의 건전한 살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네 개그가 어느 한 권력에 잡혀 획일적으로 흐르지 않고, 다양한 정통 개그 프로그램의 시도를 통해 이미 발굴된 개그맨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웃음을 찾는 사람들(개그맨들)은 많다. 그런데 그들이 설자리는 왜 장생이 섰던 외줄 밖에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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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어느 별에서 왔니> vs <봄의 왈츠>

<넌 어느 별에서 왔니>를 보고 있으면 정말 묻고 싶어진다. “너희들 외계인이니?” <소림축구>에서 주성치가 만두가게 처녀 아매에게 했던 말을 빌려, “네 별로 돌아가”라고 농담이라도 걸고 싶어진다. 그리고 진짜 묻고 싶은 건 드라마 제목처럼 “도대체 넌 어느 별에서 온 거니?”하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묻고 싶은 또 한 사람이 있으니 같은 별에서 왔으나 지금은 서로 다른 입장에 서서 경쟁하고 있는 다니엘 헤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 핸섬가이는 떠듬떠듬 서투른 우리말 몇 마디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외계인으로 돌아간 정려원과는 정반대로 한국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들이 온 별은 어디?
정려원이 처음 그 몸을 숨긴 곳은 27살 유희진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맑게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스마일페이스였지만, 그 속에는 끔찍스러운 아픔이 남아 있었다. 암으로 인해 위를 절제했던 것처럼 그의 첫사랑 진헌과의 관계도 도려내졌고, 다시 돌아온 자리에는 김삼순이라는 어마어마한 공력의 소유자가 떡 하니 앉아있었다. 김삼순의 엉뚱함과 서글서글함에 맞서는 인물로, 정려원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얼굴의 화장을 해야했다.

그때 그녀의 무거움을 덜어주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같은 별에서 온 다니엘 헤니라는 인물이다. 김삼순과 진헌을 두고 경쟁한다는 절망적인 설정에서 그녀를 끄집어내준 다니엘 헤니는 여러모로 그녀와 같은 과였다. 유창한 외국어에, 이국적인 쿨한 이미지, 보고만 있어도 마냥 기분이 좋아지는 맑은 얼굴... 그들은 진헌을 두고 김삼순과 경쟁한다는 드라마 속 구도에서 자꾸만 벗어나 같은 별 출신 특유의 더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별에서 정려원은 본래 호주의 맑은 하늘같은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그녀가 나온 그리피스 대학이 있는 골드코스트의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볕, 그 볕에 적당히 달구어진 바다의 열정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아무리 무거운 얼굴의 화장이라 해도 그걸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두 번째로 그 몸을 숨긴 <가을 소나기>의 박연서라는 인물은, 유희진이었을 때보다 더 심각했다. 다니엘 헤니도 없던 그녀는 절친한 친구를 사랑하는 남자를 옆에서 짝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통해 정려원은 그저 대책 없이 맑기 만한 것이 아닌 눈물을 펑펑 흘려도 잘 어울리는 새로운 이미지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좀더 심플하면서도 강력한 명랑함, 그 명랑함의 뒤편에 남는 우수... 마치 찰리 채플린의 슬랩스틱에서 한껏 웃은 뒤에 남는 애잔한 감정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가 망원경으로 새로운 얼굴을 찾던 정려원은 이제 제대로 된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복실이의 얼굴이다.

웃겨야 산다
<넌 어느 별에서 왔니>에서 정려원은 먼저 혜수(김래원의 옛 애인)라는 과거의 이미지를 교통사고로 지워버린다. 그리고 복실로 태어난다. 착하게도 자신의 사고로 죽은, 과거 이미지를 가진 정려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김래원은 차츰 복실로 다시 태어난 정려원의 이미지에 빠져든다. 처음 몇 번은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지만 이제 과거는 묻혀지고 현재의 모습에 더 빠져드는 것이다. 복실을 만난 정려원은 제 물 만난 고기처럼 거침없이 순수한 모습(심지어는 바보스러운)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사실 제 별에서 놀던 그 모습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모습은, 어른들의 세계인 도시에 와서 오히려 빛을 발한다. 그녀의 거칠 것 없이 터져 나오는 촌스러움에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은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이상하게도 웃을수록 마음에 애잔함을 남기는데, 그것은 그녀가 비판하고 있는 대상, 그녀가 웃음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바로 우리네 도시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한참 웃다가 한숨이 나온다.

울어야 산다
한편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같은 과라는 것을 확인했던 또 다른 별에서 온 다니엘 헤니는 정려원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정려원은 시골소녀로 환골탈태, 웃다가 울리는 진정한 개그의 길을 가고 있는 반면, 다니엘 헤니는 <봄의 왈츠>를 통해 절대로 울 것 같지 않던 조각 같은 얼굴에 조금씩 슬픔을 담아낸다. 아직 그 얼굴이 완전히 드러난 건 아니지만 “이러다가 다니엘 헤니가 우는 걸 보게 되는 거 아냐?”하고 생각할 정도로 드라마의 분위기는 그의 아픔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기구한 운명의 장난으로 정려원은 웃겨야 살고, 다니엘 헤니는 울려야 사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다니엘 헤니가 그 외계인의 이미지에서 점점 우리네 정서에 맞는 한국인의 모습(정스러운)으로 다가가는 반면, 정려원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외계인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드라마는 땅과 하늘의 모습으로 진전되었다. 땅에는 봄이 만연하고, 하늘에는 별이 반짝였다. 땅을 보나 하늘을 보나 쳐다보기만 해도 즐거운 그 얼굴들이 있기에 월화가 아름답다.

Posted by 더키앙

<봄의 왈츠> 상처에 대한 변주곡

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상처와 그 아문 흔적들이 있는 걸까. 지금 웃고 있는 저 얼굴 뒤에는 얼마나 많은 아픔들이 숨어있을까. 상처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의 얼굴은 또 얼마나 많은 걸까. <봄의 왈츠>는 이제껏 보여줬던 트렌디한 등장인물들이 사실은 그렇게 단순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긁을수록 점점 커져만가는 딱지처럼 이 치유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상처들은 윤재하, 박은영, 필립, 송이나는 물론이고 그 주변인물들, 윤재하의 어머니와 아버지, 박은영의 어머니와 필립의 어머니에게까지 번지고 있다. 이제 상처들은 조금씩 몸을 간질이며 봄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봄의 왈츠를 추기 전에 먼저 해야될 일이 있다. 마음 속 깊숙이 너무나 깊이 숨겨두어서 마치 애초부터 없었다고 믿고 있었던 과거의 상처, 그 상처와 마주하는 일이다.

윤재하, 나는 누구인가
윤재하가 가진 상처는 마치 인간 존재 깊숙이 내재된 원죄의식에 가깝다. 윤재하는 본래 이수호였다. 그런데 그 이수호의 아버지는 그의 삶은 물론이고 그가 사랑하는 박은영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이수호는 그 깊은 죄의 공모자라는 원죄의식과 함께,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였다는 것에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게된다. 그는 박은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이수호를 죽이고 윤재하로 태어났다.

윤재하는 피아노를 닮아버렸다. 어쩌면 그가 피아노를 두드리며 자라온 그 세월은 이수호의 흔적을 지우고 윤재하라는 새로운 인물을 자신 속으로 박아 넣는 아픔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그런데 자신이 스스로 죽였다고 생각했던 이수호가 깨어난다. 그의 눈앞에 박은영의 실루엣이 자꾸만 어른거리는 것이다. 그가 다시 대면하게된 상처에서 그는 머뭇거린다. 박은영을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이수호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그 상처를 덮고 자신을 윤재하로 믿고 사랑하는 송이나를 받아들일 것이냐.

자꾸만 거울 앞이나 유리창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때의 애잔함, 피아노 건반 위에서가 아니라 가끔씩 허공을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의 절망감, 마치 어떤 얘기도 꺼낼 수 없다는 듯이 악다문 입술, 고개를 가로젓거나 방을 뛰쳐나갈 때의 쓸쓸한 어깨... 그것들은 모두 그의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이수호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기 위한 위장술이다. 박은영이 과거의 박은영으로 드러나는 그 지점이 윤재하 속의 이수호가 깨어나는 날이다. 그것이 봄의 왈츠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박은영과 필립, 그 대책 없는 미소 뒤의 아픔
도무지 참아낼 수 없는 깊은 상처는 오히려 얼굴에 행복의 가면을 씌우는가. 참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건들을 겪은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다못해 맑기까지 한 대책 없이 발랄하고 명랑한 현재의 얼굴을 한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우는’ 캔디와, 씩씩함의 대명사 김삼순의 캐릭터가 반쯤 섞인 박은영의 얼굴은 그래서인지 웃는 순간, 한숨을 내쉬는 순간에 저릿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자신이 사랑했던 이수호의 아버지로 인해 죽게된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병 때문에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해야 했던 그녀가 사랑한 이수호, 그럼에도 다시 나타난 이수호의 아버지의 꾀임에 넘어가 겪게되는(그녀는 어느 여관에 버려진 것이다. 혹은 팔렸거나.) 지울 수 없는 상처... 윤재하가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남으로 해서 그 묻어두었던 상처들이 다시 떠오른다. 저 외딴 섬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던 소녀는 이제 낯선 서울까지 너무나 멀리 오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그녀 옆에 강력한 환상, 행복에로의 몰핀이 자리하고 있으니 그가 바로 필립이다. 이 유쾌한 친구는 드라마 전체의 무거움을 일순간 날려버릴 만큼 가볍다. 하지만 저 밀란 쿤데라가 말했듯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 자체로 무거움을 내포한다. 그의 과거는 철저히 가려져 있으나 그가 은영 모의 무덤가에서 자신의 어머니도 돌아가셨다는 말을 할 때 그 어둠이 얼핏 드러난다. 굳이 혼혈의 아픔 운운하지 않더라도 그 쾌활한 웃음이 어린 시절의 어떤 상상하기 어려운 아픔을 예고하게 한다. 그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보려고만 한다. 그런 그가 은영을 사랑한다. 윤재하(과거)와 필립(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은영은 갈등한다. 아프지만 진정한 사랑인 과거로 갈 것인가,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아름답고 행복하기 만한 현재와 미래로 갈 것인가. 허공에 발이 1센티 정도 떠 있는 듯한 필립과 은영의 만남, 사랑의 드라마는 그래서 유쾌하면서도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송이나와 현지숙, 자기기만이 불러오는 아픔
어느 날 사랑했던 이가 떠났을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랑하는 이가 돌아올까. 송이나와 현지숙이 잡고 있는 과거 한 자락의 추억은 그래서 안타깝다. 그 둘은 똑같이 과거의 윤재하(죽은 실제 윤재하)의 영혼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그들은 모르고 있는가. 송이나는 다시 오스트리아에서 윤재하를 만났을 때부터 그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 어딘가 달라 보여. 하지만 그게 더 좋아”라고 말하는 송이나 속에는 자신이 그리워했던 그가 아니지만, 그를 지금 눈앞의 윤재하와 묶어두려는 강력한 소망이 자리하고 있다. 송이나가 그럴진대 윤재하의 어머니인 현지숙은 오죽할까. 20년의 세월을 살면서 그녀의 환상은 과연 한번도 깨지지 않았을까. 그는 진짜로 지금의 윤재하를 죽은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을까.

송이나와 현지숙이 붙들고 있는 윤재하의 영혼은 그러나 박은영이 나타남으로 해서 조금씩 위기를 맞고 있다. 그들은 절망적으로 윤재하의 영혼에 매달리지만 그것은 사실 끝없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윤재하의 존재론적 고민의 끝은 그들에게 끝없는 절망이 될 수도 있다. 윤재하가 윤재하를 포기하고 이수호가 되는 순간, 그들이 잡고 살아왔던 20여 년의 세월은 무화되고 마는 것이다. 온통 윤재하로 채워왔던 그 나날들 속에서 그가 빠져나간 후, 남게되는 커다란 공백을 그들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매달림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아픔과 치유의 변주곡
피아노는 자신을 두드림으로 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겪는 아픔은 그래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피아노곡으로 흐르는 ‘클레멘타인’이 아프면서도 승화와 치유로 변주되는 것처럼, <봄의 왈츠>는 인물들이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소리들의 변주곡이다. 작고 가녀린 영혼들이 내는 작지만 반짝이는 그 소리들을 들어보자. 혹 우리들 삶 속에서 숨겨왔던 우리네 상처들을 거기서 만날지도 모르니까.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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