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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혁을 위한 변명

‘하얀거탑’은 결국 환타지보다 현실을 선택했다. 장준혁(김명민)에 대해 쏟아지는 애정의 근원은 바로 그가 우리네 3,40대 샐러리맨들의 자화상을 담고 있기 때문. 성공을 위해 밤낮 없이 달리던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픽 쓰러지는 장면들은 이제 낯선 장면이 아니다. “장준혁을 살려내라”는 거센 요구는 바로 그런 현실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시청자들의 욕구가 반영된 결과이다. 그렇다면 장준혁이 달려온 길은 이 시대 샐러리맨들의 자화상을 어떻게 대변했을까.

장준혁도 이주완(이정길) 과장이 딴 맘을 먹기 전까지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개원의도 아니고 종합병원에서 그것도 모두가 기피하는 외과에서 10여 년을 숨죽여가며 주는 봉급 받아가며 살아온 샐러리맨. 실력은 최고지만 조직의 생리가 어디 실력만으로 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바로 조직이 거탑의 모양새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위로 갈수록 숫자는 줄어드는 그 구조는 밑에서 올라가기는 힘들어도 위에서 올라오지 못하게 막기는 쉽다. 그러니 아직 현역인 이주완 과장의 눈밖에 난 장준혁의 선택은 생존을 위해 당연한 것이다.

거탑의 구조가 갖는 생리는 오르지 않으면 떨어진다는 것. 가만히 있는다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그런 구조가 아니다. 인사철에 누락된 자신을 현상유지로 받아들이는 샐러리맨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을 향한 질주는 사실 생존을 위한 강한 몸부림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어떤 면으로 보면 장준혁은 그래도 운 좋은 인물이다. 적어도 그런 상황에 접했을 때, 현실에서라면 그저 고개 숙이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에게는 뒤를 밀어주는 든든한 백(장인이나 아내 같은)이 존재했다.

그렇게 해서 오른 거탑의 꼭대기에 서면 더 많은 잔인한 결정들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 현실. 그의 위치는 윤리적 결정보다는 실리적 결정을 해야한다. 장준혁은 조직이 요구하는 대로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한다. 꼭지점에 존재하는 자는 앞만 보고 달려야지, 옆도 쳐다보고 또 뒤도 돌아보고 하면 조직 전체가 둔화된다. 문제는 어느 순간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혀 본분을 잊는 순간에 발생한다. 여기에 물론 극화되어 과장된 캐릭터지만 늘 조직이라면 존재할만한 염동일(기태영) 같은 인물이 엮이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이미 벌어진 사건은 조직의 차원에서는 최대한 막아야 한다. 그것은 조직의 차원이 들어감으로써 인간적인 판단은 결여된다. 윤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패한 장준혁이 가졌을 상실감의 깊은 근원 속에는, 단지 패했다는 사실 이외에도 조직이란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윤리적인 선택마저 해야만 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과장된 해석일 수 있지만 그가 가진 암은 그런 심적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몸의 반응처럼 읽힌다. 성공의 뒤안길에 나타나는 죽음의 그림자. 그것은 저 ‘성공시대’라는 영화에서 안성기가 그랬던 것처럼 욕망의 끝으로 나타나는 징후이다.

그러므로 장준혁의 죽음으로서 이 드라마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정의는 이긴다’같은 통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왜 그가 죽어야 했는가 하는 질문에서부터 왜 그토록 성공에 목말라 했나 하는 질문으로, 또 어째서 그런 비윤리적인 일까지 서슴지 않게 되었는가 하는 좀더 사회에 대한 질문으로 환원된다. 그것은 거탑의 구조 속으로 뛰어들어가야만 하는 사회, 그 거탑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별의 별 짓을 다해야 하는 사회, 그리고 그 결과로 돌아오는 것이라곤 갑작스런 사망선고 같은 허망함뿐인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다. 이것이 할 짓 못할 짓 다 해가며 거침없이 거탑을 향해 질주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장준혁에게 숙연해지는 이유다. 고인에게 명복을. 이 땅에 그처럼 살아가다 끝을 보아버린 모든 샐러리맨들에게도.

Posted by 더키앙

전문직 드라마의 이유 있는 선전

값비싼 스포츠카에서 내려 조금은 풀어진 듯한 모습으로 건물로 들어서는 남자. 그를 전날 길거리에 우연히 만났던 말단 여직원(하지만 늘 굳건하고 씩씩한 우리의 여주인공!)이 막 회사로 들어서는 남자에게 다짜고짜 말을 건다. 옆에서 수행하던 비서들이 제지하면서 여자는 그가 이 회사 총수의 아들이라는 걸 알게된다….

식상한 트렌디 드라마의 전형적인 구조. 한 때는 한류의 한 공식처럼 통용되던 이 구조는 작년 한 해 시청자들에게 철저히 냉대를 받았다. 이로서 제작자들은 알게 되었다. 적당한 삼각 사각구도의 멜로 라인과 몇몇 스타들을 캐스팅하면 무조건 된다는 안이한 방식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올해 들어 새롭게 선보인 것이 이른바 ‘전문직 드라마’.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외과의사 봉달희’, ‘하얀거탑’ 같은 병원드라마가 그것이다.

트렌디는 가고 전문직이 뜬 이유
이제 통상적이고 구태의연한 구조의 드라마에 왠지 눈이 가지 않게 된 것은 달라진 매체 환경의 영향이 크다. 그것은 바로 인터넷의 힘이다. 인터넷이란 매체는 무엇이든 그 속에 담겨질 때 매니아화되는 경향이 있다. 초창기 미드(미국드라마), 일드(일본드라마)를 접해본 몇몇 매니아들이 그 저변을 꾸준히 인터넷을 통해 퍼뜨리자 그 영향은 네티즌들 전체로 파급되었다. 방송과 인터넷이 공존하는 시대에 이런 영향은 곧바로 드라마 소비자들의 입맛을 바꾸어버렸다. 몇몇 식상한 국내 드라마에 대한 비판과 외면은 거세졌고 그러자 방송은 변할 수밖에 없었다.

전문직 드라마(진정한 의미의)가 등장했고 그 첫 번째 타석에 선 것이 병원드라마이며, 이것은 이어서 형사드라마 같은 분야로 영역을 넓혀갈 예정이다. 반응은 예상대로 뜨겁다. 미드와 일드를 보며 우리에게도 저런 드라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우리나라’라는 딱지가 붙은 전문직 드라마에 어찌 애정이 없을 수 있을까. ‘하얀거탑’ 같은 경우 실제 시청률은 15∼20% 사이에 머물고 있지만 인터넷을 통한 파괴력은 50%를 넘기고 종영했던 ‘주몽’에 못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이들 전문직 드라마들이 선전하고 있는 것은 이런 외적인 조건만큼 중요한 요인들이 있다.

‘하얀거탑’, 전문직 드라마로 조직을 말하다
장준혁(김명민)이란 천재 외과의사의 성공을 향한 무한질주를 담은 ‘하얀거탑’. 병원드라마의 뚜껑을 열어보니 거기엔 정치가 있었다. 병원 내에서 외과과장을 두고 벌어지는 권력다툼이 그것이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고 살아남는 놈이 강한’ 그 세계는 선도 악도 없는 곳. 바로 우리들이 사회에서 몸담고 매일 살아남기 위해 싸워나가야 하는 ‘조직’이라 불리는 곳이다. 병원이란 공간이 우리들이 경험하는 조직이란 공간으로 환치되자 거기 서 있는 장준혁은 모든 샐러리맨들의 욕망을 부여받은 캐릭터가 된다. 때론 비열하고 비정한 그의 무한질주는 그래서 용납된다. 스포츠카와 성공, 돈, 권력 같은 것을 추구하는 장준혁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조직에 몸담은 이들의 로망이 된 것이다.

이 드라마가 리얼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병원사회를 리얼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얀거탑’에서 그려지는 병원 사회의 모습은 오히려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단 한 사람 꼭지점에 있는 외과과장이 전체 병원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은 우리네 병원의 모습이 절대 아니다. 그래도 이 드라마에서 리얼함이란 바로 조직의 리얼함을 말하는 것. 바로 이 부분이 전문직 드라마로서 ‘하얀거탑’을 성공작으로 만든 주요인이다.

‘∼봉달희’, 전문직 드라마로 인간을 말하다
한 템포 늦게 시작한 ‘외과의사 봉달희’에 대한 초기 반응은 혹독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비판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이 드라마가 ‘하얀거탑과는 달리’ 멜로가 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미드 ‘그레이 아나토미’를 표절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첫 번째 비판은 ‘하얀거탑’의 영향으로 ‘멜로가 있는 전문직 드라마’라는 것이 과거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데서 발생했을 뿐 근거는 희박한 것이었다.

두 번째 비판은 아무래도 원작 없는 ‘토속 전문직 드라마’에 대한 성공 가능성을 의심한데서 비롯된 바가 크다. 그만큼 일드, 미드에 익숙한 매니아들은 우리가 그런 드라마를 순전 우리 원작으로 할 수 있을 거라는 데 의구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이 드라마는 우리 식의 멜로적 상황에, 의사라는 특정 직업이 갖는 고민, 여기에 보편적인 생명에 대한 질문들이 겹쳐지면서 어떤 면으로는 우리 식의 전문직 드라마를 보여주는데 성공했다고 생각된다.

이 드라마는 우리가 병원에서 통상적으로 보던 의사의 모습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의사의 모습을 조명한다. 그러자 환자의 생과 사를 다루는 인간이자 의사란 양면성이 부딪치면서 존재론적인 질문들이 던져진다.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의사인가 인간인가’, ‘의사로서의 선택인가 인간으로서의 선택인가’, ‘생명에 우선순위가 있나’ 등등 그 질문은 사뭇 진지하다. 그러나 자칫 무겁게 흐를 수 있는 드라마의 분위기는 정감 가는 캐릭터들이 엮어 가는 에피소드로 인해 경쾌해진다. ‘외과의사 봉달희’는 전문직 드라마가 결국엔 가야할 인간에 대한 이야기, 즉 본질에 접근하는 ‘본격 전문직 드라마’라 할만하다.

디테일을 통해 하는 현실이야기
이들 전문직 드라마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섬세해진 디테일이다. 이것은 과거 의사가운 입은 사람들의 멜로드라마였던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와 비교해서 말하는 그런 정도의 디테일이 아니다. 아예 알아먹기 힘들 정도의 전문용어들이 대사로 쏟아져 나오고 수술장면에 있어서는 실제 의사들이 참여해 리얼리티를 만들어낸다. 무엇보다도 그 에피소드에 있어서 병원이나 의사 같은 특정 상황 속에서 벌어질 수 있는 디테일들이 풍부하다. 이것은 새로운 전문분야의 재발견에 가까운 것이다.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의사라는 성역의 이면을 훔쳐보는 것에 어찌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놀라운 디테일이 말하려는 것은 그 전문직을 가진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바로 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 결국 전문직 드라마는 그 복잡하고 다양한 디테일을 파고들지만, 그것을 통해 결국 우리 사회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얀거탑’은 조직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의 로망을 다루고 있고, ‘외과의사 봉달희’는 인간으로서 선택 앞에 고민에 빠진 의사를 다룬다. 그러니 전문직 드라마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저네들의 세상’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디테일을 통해 보여주는 현실이야기. 이것이 전문직 드라마가 각광받는 이유다.

Posted by 더키앙

캐릭터공화국, ‘거침없이 하이킥’

왠만해선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도 거침없이 날아오는 웃음킥에 실실 웃다보면, 어느새 이 유쾌한 하이킥에 중독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중독의 실체는? 바로 캐릭터공화국이라 할 만큼 다채로운 웃음의 개성을 지닌 폭소유발자들. 따로따로 떼어놓고 봐도 영 웃기는 캐릭터인데, 이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는 이야기에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거침없이 하이킥’, 그 속의 캐릭터에는 도대체 어떤 마력이 숨어 있는 걸까.

세대를 잇는 이 시대의 아버지, 야동+순재
이전까지 젊은 세대들에게 그는 좀 재미있는 기성세대로서의 ‘대발이 아빠’ 혹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높은 영원한 스승으로서의 ‘유의태’였다. 그러나 그가 노트북 앞에서 “야동”이라 외쳤을 때, 젊은 세대들의 가슴속으로 그는 단박에 들어갔다. 다음날 인터넷에는 그의 이름과 ‘야동’이란 단어가 합쳐진 ‘야동순재’라는 검색어가 떴다. 그런데 ‘야동순재’는 전날 시트콤에 나온 에피소드를 줄여만든 단순한 단어의 결합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꺼이 젊은 세대의 마음 속으로 파고든 일흔이 넘은 어르신의 표상이 되었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이후에도 그의 이름 앞에는 새로운 단어들이 붙기 시작했는데 그 중 주목할만한 것은 ‘악플순재’이다. 인터넷 게시판에 독수리타법으로 계속해서 악플을 올리는 모습에서 비롯된 호칭.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순재라는 이름 앞에 붙은 ‘야동’과 ‘악플’이란 단어다. 이 단어들은 모두 인터넷과 연관된 것으로 네티즌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두 단어가 순재라는 이름 앞에 붙어버리자 이것은 순재와 네티즌 사이에 놓여진 길게는 오십 년, 작게는 사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버린다. 이 시대의 아버지의 초상, 이순재라는 놀라운 캐릭터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후에도 이순재라는 캐릭터는 당당하고 거침없어 보이며 자애롭기까지 해 도무지 이빨이 들어가지 않을 기성세대의 모습을 겉으로 내세우면서도, 그걸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방송에 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굴욕을 당하는 순재, 나문희에게서 S라인을 느끼는 순재, 멋진 골을 넣고 골 세레모니를 통해 나문희에 대한 사랑을 전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는 순재의 모습은 우리가 아버지는 권위적일 거라는 피상적인 편견을 깨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어르신이 솔선수범해서 마음을 열어주자 그 속으로 들어온 다채로운 캐릭터들은 마음껏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시집살이하는 시어머니 애교+문희
이 시대의 진정한 연기자 나문희. 다양한 스펙트럼의 어머니 연기로 정평이 난 그녀는 ‘거침없이 하이킥’에 와서는 ‘시집살이하는 시어머니’ 역할을 맡았다. 멋대가리 없는 남편과 제 주장만 펼치는 며느리 사이에서 제 영역이 불분명해진 요즘의 시어머니들을 대변한다.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하고 세상 놀랄 것 없는 나이의 그녀. 그러나 찬찬히 면면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수줍은 소녀 티가 묻어난다. 캐릭터 상 아들 준하와 함께 ‘괴력’과 ‘식탐’으로 한 세트를 이루는 그녀에게서 언뜻 보이는 이런 면모는 ‘애교문희’란 호칭을 얻은 에피소드에서 극대화된다.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줍기만 한 그녀가 자신의 나이 값을 하기 위해 취하는 의식적인 행동은 무뚝뚝함. 그런 그녀가 어느 순간 ‘애교’라는 닭살을 떨어보기로 한 것. 그것은 차마 보기 힘들 정도의 대변신이지만 한편으로는 앞치마에 휴대폰을 목에 건 채 늘 부엌떼기로 취급받는 자신에 대한 작은 반란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그렇듯이 그녀 역시 조그마한 일에서 기쁨을 찾아낸다. 자신을 왕 무시하는 며느리 앞에서 늘 입을 삐죽대다가도 며느리의 작은 실수에 쾌재를 부른다. 시청자들은 기꺼이 그녀의 작은 기쁨에 동참한다.

그런데 그녀의 ‘작은 기쁨’에는 묘한 페이소스가 숨어있다. 유난히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는 자는 슬프다. 울상의 얼굴을 하고 있다가 통닭 몇 마리에 환하게 웃는 얼굴에는 왠지 모를 가슴저림 같은 것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그녀가 괴력의 소유자라는 것과 기묘하게 어울린다. 마치 엄청난 힘을 가진 거인이 그 힘을 모두 타인을 위해 쏟아 부은 후, 자신을 위해서는 작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모습. 그것은 바로 생각하면 유쾌하게 웃다가도 뭉클해지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아귀가 되어버린 고개 숙인 가장, 식신+준하
그가 바보라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그건 그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니까. 그는 오히려 기꺼이 웃음 없는 사회에 웃음을 주기 위해 바보가 된 천재다. 바보가 주목을 받는 건 그만큼 사회가 각박하고 힘들다는 반증이다. 너도나도 잘난 사회에서 그가 늘 도맡는 역할은 어눌하고 바보 같은 캐릭터. 준하는 그 같은 캐릭터로 오히려 사람들에게 때론 진한 공감을 때론 희망을 선사한다.

늘 손에 무언가 먹을 걸 들고 있는 그를 보며 순재는 “동물이냐 사람이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그 질문은 “왜 버젓한 가장이 빈둥빈둥 집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늘 먹을 것만 찾는 동물이 되었는가”하는 사회적인 맥락으로 읽힌다. 그는 마치 자신을 끼워주지 않는 저 사회에 대해 반항하는 것 같다.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닌데도 밥벌이를 못한다는 주변의 질책에 대해 오히려 먹을 것만 찾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의 식탐은 못 먹어 죽은 귀신이 아귀로 태어나는 것처럼 어쩌면 밥벌이에 대한 갈증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아귀가 되어버린 고개 숙인 가장의 가족을 향한 마음은 애틋하기만 하다. 아내인 해미와 벌이는 닭살 애정행각은 ‘아내 자랑은 팔불출’이란 맥락과도 맞닿아있지만 또 한편으론 부부사이에도 쿨하기만한 세태에 가슴 뭉클한 따뜻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늘 인상을 쓰고 앉아 무언가를 먹으며 투덜대고 작은 것에 기쁨을 느끼는 괴력의 사나이. 그는 어머니인 나문희와 그대로 짝을 이룬다. 그래서 이 시트콤의 가장 억압받는 두 존재는 문희와 준하가 된다. 그래서일까. 그 둘이 함께 식탐에 빠지는 장면에서 늘 배꼽잡고 웃다가도 애잔한 감정이 남는 것은.

먼저 OK할 수 있는 그녀, OK+해미
‘하늘이시여’에서 자신의 딸에게조차 시어머니 역할을 했던 해미는 ‘거침없이 하이킥’에 와서는 자신의 시어머니에게조차 시어머니(?)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다만 확연히 달라진 것은 ‘하늘이시여’의 방식이 부정(NO)의 방식이었다면, ‘거침없이 하이킥’의 방식은 긍정(OK)의 방식이라는 것. 당당한 이 시대의 며느리들이라면 해미의 OK 방식에 마음을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거침없는 OK가 매력적인 것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있다. 사회생활을 하는 워킹우먼이라면 선택의 기로에서 그녀처럼 명쾌하게 답을 내려주는 자신이었으면 할 때가 얼마나 많을까. 해미 캐릭터의 핵심은 바로 ‘능력’이다. 그녀는 사회생활에서도 가정사에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여성의 표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이건 이상일 뿐 현실은 아닐 것. 그런 점에서 그녀는 이 시대의 여성상을 대변하는 동시에 여성들이 희구하는 하나의 환타지가 된다.

“남이 당신에게 OK라 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OK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그녀의 대사 속에는 누구에게 규정되기보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능동적인 여성상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적극적이고 심지어는 공격적으로 느껴져 사육해미가 되기도 하는 그녀의 캐릭터는 그녀 주변에 있는 소심한 캐릭터들(가장 중심에 있는 나문희와 준하 같은)과 명쾌한 대비를 이루며 웃음을 유발한다. 나문희와 준하 같은 소심한 우리네 소시민들에게 늘 시원시원한 해답을 내주는 그녀가 소중하게만 느껴지지 않을 까닭이 있을까.

이 시대가 요구하는 까칠남, 까칠+민용
요즘은 까칠한 남자가 뜬다는데, ‘거침없이 하이킥’에도 ‘까칠’하면 빠지지 않는 이민용이란 캐릭터가 있다. 까칠남이 이렇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과거의 이상적인 남성상으로서의 로맨티스트가 이제는 느끼남이 되어버렸기 때문. 즉 까칠한 건 참아도 느끼한 건 못 참는다. 물론 드라마 캐릭터로서(아마 실제는 다를 지도 모른다) 말이다. 까칠남의 매력은 늘 까칠하다가도 어느 순간 잠깐 보이는 부드러움에 있다. 본래는 부드러운 사람이지만 무언가 상처 같은 것이 그를 까칠하게 무장시킨 탓이다. 이민용은 이 복합적인 까칠남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까칠해진 이유? 그건 아마도 27살이란 젊은 나이에 이혼남에다 아이까지 갖고 있다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그 정도 되면 이제 현실의 각박함은 이미 벌써부터 겪어왔을 터이지만, 그럼에도 젊은 나이가 갖는 풋풋함 역시 갖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젊은 나이에 젊음을 누리지 못하게 된 상황을 자초한 그는 지금 자신을 벌주는 중이거나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잔뜩 웅크리는 중이다. 어찌 보면 배배 꼬여버린 성격의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런 사심 없이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밖에 없다. 바로 꽈당민정이다.

울면서 웃기는 그녀, 꽈당+민정
그녀는 왜 아무 이유 없이 ‘꽈당’ 넘어지는 걸까. 그 행위 자체는 바보스럽다 할 수 있겠지만 그 이미지가 민정과 연결되자 거기에는 순수함과 더불어 묘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구석이 생긴다. 작고 약하기만 할 것 같은 그녀. 하지만 그녀의 솔직함은 그대로 까칠한 민용의 마음에 꽂혀버린다. 그녀는 늘 진지하다. 좋다면 “정말 좋아요”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아이들을 꽉 잡기 위해 단호한 목소리로 사랑의 매를 들고 호통을 친다. 하지만 진지한 그녀가 하는 행동은 늘 어색하다. 이 마음을 몸이 따라가지 않는 상황이 그녀로 하여금 웃음을 유발시킨다.

그렇지만 그 어색함은 기분 좋은 어색함이다. 마치 어린이가 어른 흉내를 내다 들킨 것 같은 유쾌함. 그래서 그녀가 웃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웃게 된다. 또 그녀가 진지해질 때도 우리는 웃게 된다. 심지어 때로는 그녀가 울 때조차 우리는 웃음을 짓게 되는데 그것 역시 그 울음 속에서 과장된 응석의 귀여움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사정없이 귀여운 그녀. 넘어질 때도, 화를 낼 때도, 심지어는 울 때조차도.

모성애로 돌아온 철없는 이혼녀, 신지
신지란 극중 캐릭터는 억울하다. 그것은 최초 설정에서 얄팍하고 깨지기 쉬운 가족의 모습을 구성하다 보니, 신지란 캐릭터가 ‘자신의 꿈을 찾아’ 철없이 이혼하고 러시아로 떠나는 설정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러시아에서 얻은 것은 결국 사기. 그리고 돌아온 그녀의 모습에서 먼저 여타의 캐릭터와 달리 신지는 진지함이 사라졌다.

여기에 돌아온 이혼녀가 이제 막 러브라인을 만들어가는 민용과 민정 사이에 끼어 삼각관계를 이루자 캐릭터에 대한 호감마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신지란 신인연기자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애초 캐릭터 설정에서 생겨난 문제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신지는 러브라인에서 빠져나와 적극적으로 민용과 민정을 밀어주는 조력자가 되면서 캐릭터에 대한 존재감이 살아나고 있다. 또한 아무 대사는 없지만 늘 온 가족을 울리고 웃기는 아기, 준이의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다. 준이를 통해 신지는 철없는 이혼녀에서 모성애로 귀환하고 있다.

톰과 제리, 이윤호와 이민호
우리는 이윤호와 이민호, 이 두 캐릭터를 보면서 좀 헷갈리게 된다. 겉으로 볼 때 전교 꼴등에 오토바이를 몰지 않나, 툭하면 패싸움에 휘말리고, 툭하면 자습시간에 도망치는 윤호는 전형적인 꼴통이다. 반면 늘 일등에, 탁월한 언어능력과 논리력, 심지어는 여자친구까지 뭐하나 빠지는 게 없는 민호는 모범생으로 보인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아닌 속까지 이 두 캐릭터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본 시청자들이라면 이 전형적인 사고의 틀에 균열을 일으키게 된다.

모범생으로만 보이는 이민호는 사실 그 얄미울 정도의 똑똑함으로 철저히 이득만을 챙기는 인물이다. 청소년으로서의 풋풋함보다는 일찍 어른의 세계에 도달한 캐릭터. 그래서 그는 오히려 꼴통으로 보인다. 반면 완소윤호라는 호칭을 얻고 있는 윤호는 거칠고 때론 모자란 듯하지만 정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인물. 그런데 재미있는 건 힘으로는 형인 민호를 동생 윤호가 제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전형적인 톰과 제리의 재미가 이어진다. 힘은 세지만 어리숙해 매일 당하면서 “억울해”를 연발하는 윤호는 톰의 역할을, 힘은 약해도 비상한 머리를 굴려 윤호를 골탕먹이는 민호는 제리의 역할이다.

하지만 때론 제리의 영리함이 바보스러움을 만들기도 한다. 설익은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일약 ‘카리스마민호’란 호칭을 얻는 민호를 윤호를 위시한 가족들은 보기 좋게 한방 먹인다. 그래서일까. 공부만 잘했지 다른 방면에는 영 무지한 민호의 모습을 보면서 대학입시 교육의 희생자로서 윤호뿐만 아니라 민호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은.

가족보다 가족다운 그, 김 범
가족 바깥에 존재하지만 더 가족 같은 인물이 있다. 그는 신비롭기까지 한 김 범이란 캐릭터. 민호와 단짝을 이뤄 거의 매일 이 가족들 주위를 배회한다. 식신준하보다 민호네 냉장고 사정에 더 정통하고, 애교문희보다 더 가족사에 민감하다. 그러니 하숙범이란 호칭으로 불릴만하다. 그가 하숙범이라 불릴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 김 범이란 캐릭터가 그저 자주 놀러오는 친구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캐릭터가 배신범으로 불리기 시작하자, 갑자기 이 캐릭터에 매력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만큼 가족의 결속이 약해져만 가는 시대에 가족들보다 더 가족 같은 김 범의 존재 때문이다. 민호의 가족들이 김 범을 배신범으로 놀리는 장면들에서 ‘이건 너무 한다’싶은 마음이 들다가 그가 눈물을 흘리며 “그래요 전 가족은 아니에요. 하지만 단 한번도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라고 하는 장면에서는 왠지 모를 감정이 솟구쳐 오른다. ‘하숙생’이란 음악이 흘러나오며 리어카에 민호네 집에서 나온 자신의 물건을 싣고 떠나가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터지면서도 동시에 각박해진 현실의 씁쓸함이 느껴진다.

진지한 캐릭터들, 그 조합이 유발하는 웃음
이상에서 본 것처럼 ‘거침없이 하이킥’의 캐릭터들은 그저 희화화된 캐릭터로만 보기 어렵다. 그들은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틀 안에서 진지하다. 그들은 억지로 웃기기 위해 과장된 몸짓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특정 성격으로 극대화된 캐릭터들이 서로 조합을 이루면서이다. 캐릭터들의 수로 미루어보면 그 조합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웃음과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시트콤의 성공이 결국 그만큼 생산된 캐릭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보기만 해도 공감이 가고 웃음이 터지는 캐릭터들은 중요한 성공의 기반이다. 이것은 캐릭터 조합의 수를 1:1, 1:2, 2:2, 2:3…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변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이 시트콤은 지금까지 그 재미의 반도 보여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울한 시대, 불륜 코드까지 시청률이란 명목으로 방영되는 저녁 시간대, 가족이 둘러앉아 유쾌한 웃음을 웃게 해준 ‘거침없이 하이킥’의 롱런을 기대하게 하는 요인이 아닐까.

☆ 캐릭터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웃음들
▶ 야동순재 + 윤호민호 : 노트북을 사기 위한 윤호민호의 거짓말에 속은 순재가 노트북 앞에서 ‘야동’을 외치는 이야기.
▶ 순재 + 애교문희 : 모임에서 자신과 달리 애교를 떠는 여자(김애경)를 본 문희가 순재 앞에서 애교를 떨기 시작하는 이야기.
▶ 식신준하 + 문희 : 문희의 먹는 양이 줄자 울면서 “왜 밥이 줄어!”하고 준하가 오열하는 이야기.
▶ 순재 + 식신준하 : 늘 식충이로 순재의 주식만 날리던 준하가 갑자기 몇 일동안 계속 상한가를 치다가 결국 작전주로 밝혀지는 이야기.
▶ OK해미 + 까칠민용 : 사사건건 간섭을 하는 해미를 호시탐탐 노리던 민용이 해미의 실수(변기물이 막힘)를 찍기 위해 달리는 이야기.
▶ 까칠민용 + 꽈당민정 : 학생들에게 매일 당하기만 하는 민정에게 민용이 학생들 다루는 법을 가르쳐주지만 영 안 되는 민정의 이야기.
▶ 순재가족 + 배신범 : 민호의 여자친구 유미를 꼬드겼다는 사실로 순재가족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범이가 민호네 집에서 이삿짐만큼의 자기 짐을 챙겨 떠나는 이야기.
▶ 순재 + 준하 + 민용 + 윤호 + 민호 + 범 : 순재에게 쫓겨 민용의 옥탑방으로 들어간 그들이 오히려 거기 갇히는 이야기
▶ 이외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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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혁이란 환타지를 위해 버려진 캐릭터들

‘권력을 향한 이전투구 끝에 외과과장이 된 장준혁(김명민)의 무한질주를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처럼 느껴졌던 최도영(이선균). 그러나 최도영이란 캐릭터는 아직까지도 장준혁의 까칠한 눈빛 속에 가려져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소송을 포기하려는 고 권순일씨의 처를 막기 위해 변호사 사무실로 달려갈 때만해도, 또 거기서 장준혁에게 “왜 내가 네 말을 따라야 하는데? 나도 내 소신대로 해.”라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많은 기대를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법정에 선 최도영의 모습은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다.

장준혁 vs 최도영이란 대결구도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런데 최도영이란 캐릭터에서 느끼게 되는 ‘어떤 기대감 → 실망감’은 이번만이 아니다. 그것은 드라마 초기부터 내내 있어온 것들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김명민의 카리스마 연기가 더 돋보여서가 아니다. 한 회 분량에서 거의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김명민과 잠깐 잠깐씩 등장하는 이선균을 같은 선상에 놓고 연기력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것은 캐릭터의 성격이라든지 그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연기자 같은 캐릭터 내적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캐릭터의 비중을 설계할 때부터 의도된 결과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결과로 보면 최도영은 장준혁의 카운터 파트로 설정되지 않았다. ‘장준혁 vs 최도영’이라는 대결구도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말이다.

드라마가 캐릭터를 그려내는 과정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의 시작과 함께 모든 카메라의 시선은 장준혁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그 이유는 당연하다. 주인공이니까.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장준혁이 그냥 주인공이 아닌 ‘악역을 해야하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런 캐릭터의 경우, 그 주인공이 왜 그렇게 되었나가 드라마 전편에 깔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악마적인 캐릭터 중간에 간간이 인간적인 고뇌 같은 모습을 끼워 넣어 자신이 이런 이전투구를 하는 것이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고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대부분 범법자가 주인공인 드라마, 영화에서 캐릭터를 세우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러니 이주완(이정길) 과장과의 초기 대결구도는 장준혁의 이런 캐릭터를 형성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설정이다. 장준혁은 여러 번 “내가 왜 이렇게 외과과장이 되려고 하는 지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드라마는 가끔 시골에 사는 어머니에게 전화하면서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줄 뿐 속시원한 이유를 말해주진 않는다. 막연히 배경도 돈도 없는 집에서 어렵게 자라 성공을 위해 노력해왔다는 인상만을 줄뿐이다. 그러나 3대째 의사집안인 이주완이 장준혁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설정이 엮이자 이 막연한 설정은 힘을 발휘한다. 시청자들은 기꺼이 장준혁의 성공을 위한 무한질주에 동참하게 된다.

최도영이란 캐릭터를 비호감으로 만드는 것들
그런데 반면 최도영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었을까. 장준혁이 수술대 앞에서 생과 사를 오가는 위험하고 공격적인 수술을 하고 있을 때, 최도영은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초반 드라마에서 최도영이 맡은 최대의 역할은 소아암 환자 ‘진주’를 돌보는 일이었다. ‘하얀거탑’에서 환자가 보이지 않은 것은 보다 많은 환자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는 캐릭터였던 최도영을 초반부에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진주에게만 집착하는 최도영이란 의사 캐릭터는 비현실적이고 공감하기 어려운 캐릭터로 그려졌다. 이런 캐릭터가 진지한 얼굴로 생명이니 뭐니 하는 ‘공자님 말씀’을 하는 모습은 장준혁의 카운터 파트로서 ‘선한 의사’의 캐릭터를 구축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잘난 척하는’ 비호감 캐릭터의 면면을 형성한다.

최도영이란 캐릭터를 불리하게 만든 건 환자뿐만이 아니다. 이윤진(송선미)이란 또 다른 비현실적인 캐릭터와 엮이면서 그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진짜 운동가도 아니면서 운동하는 척 하는’ 이윤진은 직업도 없고 오지랖 넓은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로 그려졌다. 드라마의 한 편에서 벌어지는 숨가쁜 정치싸움이 시청자들의 두 눈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별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왜 이윤진이 진주라는 환자 때문에 병원에 나오고 그 옆에서 같이 눈물을 흘리는 지는 드라마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왜 이윤진과 최도영의 멜로가 사라졌나
게다가 드라마는 이윤진과 최도영 사이에 묘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함께 술을 마시고 얘기를 나누는 장면들을 삽입하는데 이것 역시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환자 때문에’ 시간이 없어 며칠에 한 번 겨우 집에 돌아와 아내와 얘기할 시간도 없는 최도영이 전혀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는 이윤진과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법정드라마로 변신한 지금에 와서도 계속 이어진다. 왜 이윤진이 갑자기 권순일 환자의 일에 뛰어들게 되었고 지금처럼 그를 위해 변호사 사무실을 전전하는 지는 여전히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이런 구도로 흘러갈 것이었다면 애초의 설정대로 이윤진과 최도영 사이에 멜로 라인을 끼워 넣었어야 옳다. 그렇다면 최도영을 쫒아다니는 이윤진이란 캐릭터에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윤진이란 캐릭터의 최초 설정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하지만 인술을 펼치는 학구파 의사 최도영을 만나게 되면서 그를 사모하게 된다. 그는 유치원에 다니는 딸이 있는 유부남. 이성적으론 그러면 안 된다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최도영에 대한 사랑은 점점 깊어만 간다.” 우리는 이윤진의 최도영에 대한 깊어만 가는 사랑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혐의는 찾을 수 있다. ‘하얀거탑’이 처음 방영되었을 때 나온 폭발적인 반응, ‘멜로 없이도 된다’는 포지셔닝이 그 둘 간의 멜로를 막아버린 건 아니었을까.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자 이윤진이란 캐릭터도 버려지게 되었다.

대결구도보다는 환타지에 집중하는 ‘하얀거탑’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할 것은 현재 법정드라마 속에서 장준혁에 맞서는 순일 처(김도연)라는 캐릭터이다. 그녀가 남편의 죽음이 의료사고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취하는 태도는 수동적이다. 그저 눈물로 호소하는 것. 하지만 이 드라마에 몰입되어 있는 시청자들에게 눈물은 그다지 호감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좀더 이성적인 대응이었다면 그녀의 캐릭터는 공감과 호감을 끌어냈을 것이다. 반면 그녀 앞에 ‘피도 눈물도 없이’ 선 장준혁이란 캐릭터는 점점 공고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런 싸움에서 누가 이긴들 그것이 드라마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게 된다. 만일 장준혁이 진다면 사필귀정의 의미보다는 그 캐릭터에 대한 동정심만 더 커질 것이다. 장준혁은 이겨도 이기고 져도 이긴다는 말이다.

‘하얀거탑’이 최도영이란 캐릭터에 비중을 주지 않은 이유는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윤리적인 선택을 강요하기보다는, 장준혁이라는 환타지를 통한 카타르시스에 더 초점을 맞춘 결과이다. 집안도 배경도 없는 장준혁이 성공을 향해 무한질주 하는 모습. 거기서 부서지고 망가지더라도 한번 끝까지 가보는 것. 우리 같이 매달의 생활을 걱정하는 소시민들이 선이든 악이든 한번 미친 듯이 해보고 싶은 그 상승욕구를 드라마 속에서 풀어보는 것에 더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치열한 대결구도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장준혁의 독주를 그리고 있다. 그 과정에 나타나는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그들을 싸워 이기든지 혹은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장준혁은 계속 높은 거탑을 향해 올라간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이 최도영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걸면서 대결구도로 드라마를 읽어보게 되는 이유는 속에서 불끈불끈 끓어오르는 권력에 대한 욕망 속에서도 ‘정말 이래도 되나’하는 자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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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봉달희’에서 최고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우, 이범수. 그는 극중 배역인 안중근의 캐릭터 때문에 ‘버럭범수’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입만 열었다 하면 ‘버럭’ 화난 듯한 말투 때문이지만 바로 그 점이 그의 매력포인트. 한치의 긴장감도 늦출 수 없는 의사라는 직업 속에서 그의 ‘버럭’은 결국 환자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될만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일까. 늘 굳어있을 수밖에 없는 그의 얼굴에서 잠깐 동안의 미소를 보는 것은 시청자들에게는 하나의 축복이다. 그런 그가 사랑에 빠졌다. 그것도 의사로서 어리숙하기 이를 데 없어 처음 보자마자 “넌 의사할 생각도 하지마”라고 말해버렸던 봉달희(이요원 분)에게. 그러니 요즘 드라마에서 아무리 멜로가 죄라지만, ‘외과의사 봉달희’를 보는 재미에 버럭범수의 사랑법을 뺄 수 있을까.

버럭범수 사랑법의 핵심은 ‘어색하다’는 것.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괜시리 늘 하던 대로 버럭대다가, 가고 나면 후회하는 그 미숙함이 오히려 순수하온다. 그는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듯 하다. 그가 봉달희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남들처럼 연애감정에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봉달희의 환자들에 대한 열정을 그가 목격하면서부터이다. 어쩌면 버럭범수는 그 모습에서 자신처럼 상처 입은, 그래서 의사가 되어야만 했던 또 다른 자신을 보았는 지도 모른다. 자기가 가장 잘 아는 의사라는 직업 속에서야 겨우 사랑을 찾을 정도니 그의 사랑법이 어색할밖에.

그래서 사랑에 어색한 그는 수동적이다. 그가 봉달희에게 하는 것은 고작, 멀리서 쳐다보거나, 환자의 처치법을 가르쳐주거나, 화를 안내거나, 그녀를 건드는 사람에게 버럭하는 정도다. 응급실로 실려온 살인용의자에게 봉변을 당할 뻔한 봉달희에게 기껏 하는 말이, “괜찮아? 됐어 그럼.”이다. 이건 겉으로 봐서 누가 봐도 사랑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수동. 하지만 극은 극으로 통한다고 그의 마음을 미리 읽고 있는 시청자들에게는 100% 반대의 묘미를 선사한다. 표현 못하는 그의 모습에 미소가 나오다가도 그의 숨겨진 아픔이나 심연 같은 것을 문득 엿보기도 하는 것이다.

버럭범수의 사랑법이 눈에 띄는 또 다른 이유는 삼각관계의 한 축이 되고 있는 이건욱(김민준 분)의 사랑법이 그와 너무나 대조를 이루기 때문. 이건욱의 사랑법은 안중근과는 정반대로 ‘매우 세련’되어 있다. 부드러운 듯 보이지만 적극적이고, 아프면 아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그 마음을 표현한다. 게다가 상대방을 배려하는 인내의 미학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이보다 완벽할 수 있을까.

이 능동적인 이건욱과 수동적인 안중근의 사랑법만 보아도 우리는 어느 쪽이 더 강하고 약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겉보기에 부드러워 보이는 이건욱은 사실은 굉장히 하드보일드한 캐릭터다. 그는 타인이라면 견뎌내기 힘들 마음의 고통(7년 간 살아온 자신의 아들이 사실은 타인의 자식이었다는 것 같은)을 웃는 얼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다. 반면 버럭대기 일쑤라 강해 보이는 안중근은 사실 상처투성이로 약하기 이를 데 없는 캐릭터다. 우리의 마음이 완벽해 보이는 이건욱보다 안중근에게 자꾸만 가는 이유는 버럭 이면에서 언뜻 보이는 약한 모습의 안타까움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버럭범수의 봉달희 사랑법이 드라마적으로 공감을 주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의사라는 직업과 잘 매칭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의사들의 사무적인 모습은 사실 안중근과 많이 닮아있다. 그 현실의 딱딱함은 그러나 드라마 속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의사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생과 사가 오가는 병원에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늘 긴장을 늦추지 않는 의사로 살아온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딱딱한 모습으로 굳어진 의사의 얼굴 이면을 비추는 드라마 속에서 따뜻한 의사의 작은 표현에도 반하는 것이 아닐까. 버럭범수는 그 시청자들의 욕구가 제대로 투영된 캐릭터라고 보여진다.

버럭범수의 봉달희 사랑법은 ‘외과의사 봉달희’를 보는 또 다른 재미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욕구가 반영된 의사의 사랑법이란 점에서 병원드라마와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멜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완전히 사랑에만 빠진 의사를 보는 것도 싫고, 사랑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기계 같은 의사를 보는 것도 싫다. 관건은 의사로서의 긴장감이 차츰 무장해제되어가는 과정과 수위에 달려 있을 것이다. 전문직 드라마 속에서도 제대로 엮어진 멜로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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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웃거나 분노하거나

요즘 시청자들의 욕구는 두 가지인 것 같다. 그것은 ‘웃고싶거나, 분노하고싶다는 것’. 멜로드라마의 퇴조는 바로 그 정조가 지금의 세태와 잘 맞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완성도를 떠나서 그 주인공이 질질 짜는 영상 자체에 시청자들은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실제 현실에서 ‘눈물의 가치’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평가절하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쿨(Cool)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눈물은 혼자 숨겨야할 어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TV 속에서 ‘눈물 흘리는 자’보다는 ‘힘겨워도 웃고 있는 자’를 더 리얼하게 생각한다.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각박해져만 가는 현실 속에서 매달 은행이자에 생활비에 아이들 학원비에 시달리고, 회사에서 구조조정의 칼날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오로지 입시를 위해 공부기계처럼 살아가고, 그렇게 들어간 대학에서조차 취업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멜로드라마가 보여주는 ‘사랑의 좌절로 인한 눈물’은 그다지 리얼한 공감을 일으키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이런 눈물보다는 ‘잠깐 동안의 도피’를 꿈꾼다. 케쎄라 쎄라. 눈물은 내일로 미루고 당장은 웃고 싶은 것이다.

웃고싶다, 생각하지 않고
공개개그 프로그램의 전성시대는 바로 이런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공개개그가 지향하는 호흡이 그다지 길지 않은 몇 분, 몇 초라는 것은, ‘잠시 생각은 접어두고 웃고싶은’ 시청자들의 입맛에 잘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이 촌천살인의 개그 속에는 현실에서 억압된 감정을 순간적으로 터뜨리는 폭발력이 있다. 마빡이의 단순한 동작 속에는 복잡한 현실을 무화시키는 강력한 웃음폭탄이 내재되어 있고, 죄민수의 막가파식 개그 속에는 사회와 권위의 억압을 해체하는 묘한 힘이 있다.

한편 이 마빡이나 죄민수 같은 소외되고 비천한 인물들은, 웃음을 찾는 시청자들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시키기에 딱 알맞은 캐릭터들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무한도전’의 힘은 바로 그런 캐릭터들에서 나온다. ‘리얼 버라이어티 개그’를 지향하고 있지만 ‘무한도전’이 주는 웃음의 원천은 연출되지 않은 리얼한 상황에 있다기보다는, 그 상황 속에 있는 캐릭터들의 힘에 있다. 소심하고 비굴하면서도 정이 가는 유재석, 호통을 치지만 어딘지 연민이 느껴지는 박명수, 쉴 새없이 떠들어대지만 순수함이 느껴지는 노홍철, 덩치만 큰 곰 같은 우직함의 정준하, 장난기 많은 막내 같은 하하, 방송에 적응 못한 듯해 연민을 일으키는 정형돈. 이 소외된 캐릭터들이 엮어 가는 실제상황이라서 공감이 가는 것이다.

분노하고 싶다, 거침없이
하지만 이 웃음은 그냥 웃음이 아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란 말이다. 개그의 두 가지 웃음 촉발인자는 이제 ‘굴욕과 풍자’가 되었다. 굴욕이 자신을 한없이 무너뜨리는 데서 웃음을 만든다면, 풍자는 상대방을 조롱하고 깎아 내리는 데서 웃음을 촉발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나타난 양태가 다를 뿐, 그 근본 유발인자는 한 가지에서 나온다. 바로 ‘분노’이다. 굴욕이 타인이 아닌 내 자신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자학)이라면, 풍자는 바로 그 타인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 분노를 마빡이는 자기 자신에게, 죄민수는 타인에게 터트리는 형태로 웃음을 유발시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풍자가 개그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요인이다. ‘형님뉴스’는 “∼가 ∼다워야 ∼지’하는 유행어를 흩뿌리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 ∼답지 않은”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죄민수의 “아무 이유 없어!”, “이 MC계의 쓰레기!”같은 말 역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권위에 대한 조롱이 아닐 수 없다. 우아한 자태의 사모님이 하는 일련의 ‘무뇌형 발언’은 ‘돈은 많으나 생각은 없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제로’의 졸부들을 비꼬는 말들이다. 웃음 속에는 이다지도 많은 분노의 칼날들이 숨어 있다. 그 칼이 정확히 시청자들의 가슴에 꽂히는 순간, 카타르시스와 함께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TV, 웃거나 분노하거나
이것은 단지 개그 프로그램의 얘기만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멜로드라마가 어려운 것은 바로 눈물이 이 사회에서 리얼한 해결방식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이제 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웃음과 분노’가 하나의 쿨한 해결방식으로 자리잡는다. 그래서 멜로드라마가 손잡은 것은 코미디다. 따라서 작년에 코믹한 설정으로 호평을 얻었던 ‘돌아와요 순애씨’의 연장선 위에 ‘달자의 봄’이 있는 것이고, ‘환상의 커플’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여전한 것이다. 일일드라마에 도전장을 내민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의 성공은 바로 이 웃음 코드를 공감 가고 리얼한 캐릭터들을 통해 잘 살린 데 있다. 눈물에 각박해진 시대에 드라마들은 웃어야 성공한다. 늘 웃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질질 짜지는 않아야 된다.

반면, 분노를 부추기는 드라마, 혹은 프로그램들이 TV의 또 한 축을 차지한다. 자극과 선정성을 무기로 들고 나오는 ‘논란드라마들’은 그 가장 강력한 무기로 ‘분노’를 사용한다. 폭력에 가까운 말들과 장면들이 오가는 화면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일종의 전이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 같다. 또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지나치게 자극적인 장면들을 포착하는 사회고발프로그램들의 영상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결이 가진 문제점은 중독이다. 자극을 통한 문제의 해결은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한다.

살기 어려운 시기에 웃음이 그 어려움을 위무해주는 코드로 나타난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자칫 분노로 일관되는 감정의 형태를 웃음이라는 긍정적인 형태로 변환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점점 떨어져만 가는 ‘눈물의 가치’이다. 삶에 있어서 웃음만큼 중요한 것이 ‘건강한 눈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단순한 최루성이나 구태의연한 설정으로 유발되는 눈물이 아닌, 이 시대의 감성코드와 공감할 수 있는 눈물이 어느 때보다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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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초부터 의학드라마의 새 장을 열고 있는 ‘하얀거탑’. 그 참신함의 진원지는 ‘멜로 없는 전문직 드라마’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멜로가 있는’ ‘외과의사 봉달희’에 대한 시선은 방영 전부터 곱지 못했다. 또다시 의사에는 관심 없고 사랑타령에만 관심있는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첫 선을 보인 ‘외과의사 봉달희’에서만큼은 그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많은 기사들은 두 의학드라마를 비교하면서, 그 초점을 ‘멜로의 존재여부’에 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과거 소위 ‘전문직 드라마’라는 포장을 한 드라마들이 영 시원찮았다는 반증이지만, 그렇다고 과연 ‘멜로가 있고 없는’ 것으로 진짜 전문직 드라마와 그렇지 않은 걸 예단할 수 있을까. 무조건 멜로가 있다고 해서 ‘전문직 드라마’가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전문직 드라마’라 칭할 수 있을까. 요는 그 멜로의 비중이 어떻게 되느냐의 문제이다. 전혀 초점이 다른 이 드라마들을 멜로를 기준으로 단순비교하는 것은 괜한 오해만 낳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려했던 ‘외과의사 봉달희’의 포장이 벗겨지자, ‘하얀거탑’이 과연 의학드라마였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아직까지 한번도 제대로 된 ‘의학드라마’를 본 적이 없으니, 남녀구도 없이 욕망을 향해 무한질주하는 이 매력적인 ‘하얀거탑’에 우리는 너무 쉽게 ‘의학드라마’란 호칭을 주었던 건 아닐까. 이제사 생각해보면 ‘하얀거탑’은 병원을 배경으로 하고, 의사가 나오지만 ‘의학드라마’라는 호칭보다는 ‘정치드라마’가 더 적절한 것 같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얀거탑’에 ‘의학드라마’라는 호칭을 부여하면서 ‘외과의사 봉달희’가 상대적으로 폄하되고 있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의사가 등장하는 드라마로서 ‘하얀거탑’만큼 시청자들의 숨을 턱턱 막게 한 드라마는 별로 없다. 그만큼 리얼리티가 살아있고 구성과 연출도 탄탄하며 연기자들의 연기 또한 흠잡을 데 없는 드라마다. 하지만 그 본질을 ‘의학드라마’로 보기엔 모자란 부분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병원 사람들의 이야기’다. 환자는 병에 고통받는 사람이고 의사는 그 사람을 치유하는 사람이며 이들이 함께 울고 웃는 곳이 병원이다. 즉 ‘의학드라마’라면 기본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이야기 속에 담겨 있어야 한다. 아무리 검증된 수술 장면이 리얼하고 의사들 사이의 힘 대결이 볼만해도 ‘하얀거탑’에는 바로 이 ‘사람 살리는 의사’이야기가 부족하다. 극중 캐릭터에서 최도영(이선균 분)이 그런 이야기를 분명 하는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드라마의 거의 90% 이상의 힘은 정치에 쏠려 있다. 장준혁(김명민 분)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생명을 구한다’는 의미보다는 ‘정치적인 입지’를 갖느냐 마느냐의 의미가 강하다. 마치 최도영이란 캐릭터는 ‘이 드라마가 의학드라마’라는 호칭을 붙이기 위한 마지막 양심처럼 보인다.

‘하얀거탑’엔 없고 ‘외과의사 봉달희’엔 있는 것은 바로 환자다. 병에 고통받는 환자의 이야기들이 그걸 고치려는 의사 이야기와 맞물렸을 때, 비로소 ‘의학드라마’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겨우 4회가 지난 ‘하얀거탑’과 첫 회를 끝낸 ‘외과의사 봉달희’를 두고 이처럼 단정하는 것은 무리한 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얀거탑’에서 최도영이란 캐릭터가 ‘의학드라마’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고, ‘외과의사 봉달희’에 형성되는 멜로 라인이 ‘무늬만 의학드라마’의 불안감으로 남기 때문이다. 이 두 드라마는 언제 어떻게 변신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이 전혀 다른 성질의 두 드라마에 대한 단순 비교들로 인해 정작 볼 것을 못 보는 상황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모처럼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는 두 드라마들이 제각기 가진 서로 다른 재미들을 편견 없이 만끽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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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 대결을 버리자 살아난 인물들

‘하얀거탑’이 여타의 드라마와 다른 점. 전형적 캐릭터가 거의 없고, 대신 입체적인 캐릭터들이 서로 이합집산을 거듭한. 어쩌면 ‘정치드라마’가 갖는 대결구도로서 당연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단 2주), 이렇게 변화무쌍한 캐릭터를 본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그 중심에는 장준혁 역의 김명민, 외과과장 이주완 역의 이정길, 그리고 부원장 우용길 역의 김창완이 있다.

선악 대결이 아닌 권력 다툼
먼저 전제해야할 것. 이 드라마는 캐릭터의 선악 대결이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만일 선악으로 나누어지는 캐릭터들이 등장했다면 그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뻔한 진행에 지금 같은 긴장감은 떨어졌을 터. 대신 드라마는 권력을 두고 치열하게 벌어지는 정치적인 대결, 갈등을 핵심에 두고 선악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이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두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건 전쟁이기에 무조건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한다.

그리고 결국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이전투구의 권력다툼 속으로 뛰어든다. 이렇게 되자 도대체 누가 이 게임에서 승리할 것인지 종을 잡을 수 없게 된다. 주인공인 장준혁조차 살아남기 위해 음모를 꾸밀 정도의 캐릭터이기에 우리는 이 권력다툼 속에서 장준혁이 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대결구도, 그것이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긴장감을 주는 이 드라마의 핵심요소이다.

장준혁 vs 이주완-우용길 → 장준혁-우용길 vs 이주완
드라마가 막 시작했을 때, 우리는 외과과장 이주완과 그가 키운 장준혁의 관계에서 어떤 미세한 틈을 발견한다. 그것은 청출어람 잘 나가는 장준혁에 대해,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버린 이주완의 질시와 굴욕감에서부터 비롯된다. 이 미세한 틈은 조금씩 벌어지면서 갈등을 만들고 여기에 부원장 우용길이 등장하면서 드라마는 복잡한 구도변화를 겪게된다. 핵심적인 인물, 부원장 우용길이 어느 쪽에 붙느냐가 이 첫 번째 대결구도의 관건이 된 것이다.

장준혁에 대한 감정으로 이주완과 손을 잡았던 우용길은 장인인 민충식(정한용 분)이 끌어들인 의사회 회장 유필상(이희도 분)에 의해 마음을 돌린다. 그만큼 우용길-이주완 콤비의 연결고리가 아주 약했다는 것. 단지 감정의 공감 정도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공조체계는 실질적인 이득이 끼어 들자 쉽게 무너진다. 장준혁-우용길 라인이 형성되면서 이주완은 두 번째 싸움에서 지게된다. 그러나 이런 구도가 얼마나 진행될 지는 미지수. 이주완이 데려온 노민국(차인표 분)과 투표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오경환(변희봉 분) 같은 인물들이 차차 이 대결구도에 어떻게 라인을 형성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입체적인 캐릭터가 주는 매력
이처럼 짧은 시간 동안 욕망을 향해 숨가쁘게 변해 가는 캐릭터들의 모습은 시청자들을 즐겁게 한다. 그것은 그동안 보았던 착한 캐릭터는 계속 착하고, 악한 캐릭터는 계속 악한 전형적 구도의 틀을 깨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입체적인 캐릭터가 주는 힘은 바로 그 리얼함에 있다. 실제의 인물들은 우리가 흔히 드라마에서 접하듯 한 가지 단면만을 갖고 있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실로 사악하다고 할 정도로 악한 면모를 보이다가도 또 어떤 면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천사 같은 면모를 동시에 보여준다. 때론 비굴해지고 때론 한없이 용감해진다. 기존 트렌디 드라마들이 갖고 있는 말 그대로 트렌디한 캐릭터는 이제 전혀 리얼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얀거탑’은 말해주는 것 같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이 입체적인 캐릭터를 세 배우, 김명민, 이정길, 김창완의 발군의 연기력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 먼저 김명민과 이정길은 캐스팅 자체부터 적절하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이 두 배우가 갖고 있는 연기의 선이 이 야누스적인 캐릭터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나라를 위하는 충심의 이순신에 개인적인 야망 등을 잘 버무린 김명민은 이미지로도 연기력으로도 이미 검증된 바가 있다. 물론 따뜻한 아버지 역할(프라하의 연인에서 대통령 역할 같은)에서부터 카리스마 넘치는 을지문덕(연개소문에서) 역할까지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는 이정길이라는 배우는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김창완이라는 조커는 드라마의 맛을 몇 배 높여놓았다. 김창완이 지금껏 맡아왔던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 역할에서 180도 변신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이 가진 느물느물한 연기가 역할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드라마는 선악 대결구도 같은 단순한 구조로는 시청자들에게 리얼함을 선사하기가 어려워졌다. 작년 내내 트렌디한 멜로드라마가 각광받지 못한 이유는 멜로드라마 자체의 매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 인물과 구도의 리얼함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악역 없이도 드라마적 긴장감을 결코 놓치지 않았던 ‘연애시대’가 리얼함을 주었던 이유 역시 그 입체적인 인물들 때문이었다. ‘하얀거탑’의 매력적인 야누스 캐릭터들을 기화로 앞으로는 드라마 속 캐릭터의 변화가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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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국이 별을 쏘고싶었던 이유

단 두 차례 방영됐을 뿐인데 이토록 관심을 받는 개그 코너가 있을까. 바로 ‘개그야’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있는 ‘최국의 별을 쏘다’이다. 이 코너로 이른바 가장 뜬 개그맨은 조원석. 그가 맡은 죄민수라는 역할 때문이다. 2003년 SBS 7기 공채 개그맨으로 시작해 ‘웃찾사’를 거쳤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다가 이 코너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것이다.

왜 뜬 건 죄민수 역할의 조원석인데, 코너 제목은 ‘최국의 별을 쏘다’냐고 이들에게 묻는다면 아마도 “아무 이유 없어!”할 것이다. 그래도 굳이 이유를 따져보자면 이 코너가 버라이어티 쇼를 패러디하고 있기 때문에 그 쇼의 제목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최국이라는 개그맨의 범상치 않은 이력을 보자면 그 제목이 더 심상찮게 느껴진다.

최국은 2001년 SBS 6기 공채 개그맨으로 시작했으니 벌써 방송에 몸담은 지 햇수로 7년째이지만 개그맨으로도 방송인으로도 스포트라이트를 별로 받아보지 못했다. 그는 ‘MBC 스포츠 매거진’, ‘MBC 찾아라 맛있는 TV’ 등에서 리포터로 활동했고, 개그로 돌아온 것은 2003년도 ‘KBS 개그콘서트’의 ‘미션 임파서블’이란 코너를 통해서다. SBS 공채개그맨으로 시작했지만 ‘KBS 개그콘서트’에서 개그맨으로 처음 활동했고, 드디어 ‘MBC 개그야’에서 주목받은 셈이니 7년 연예계 세월이 쉽지만은 않았을 터. 왜 별을 쏘고 싶지 않았겠는가.

이 코너는 최민수라는 과거 카리스마의 아이콘을 죄민수라는 우스운 캐릭터가 패러디하고 있지만 좀 넓게 보면 그 꼬집는 대상은 연예계라고 볼 수 있다. 얼굴로는 마빡이에 버금가는 죄민수라는 캐릭터가 등장해 다짜고짜 매력과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인 양 행동한다. 죄민수의 생김새와 행동거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예의 없고 거만한 행동들은 물론 실제 연예인과는 다른, 과장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차이에서 비롯되는 웃음은, 연예인이라는 이 시대의 새로운 권력을 꼬집을 때 나오는 유쾌함에서 비롯된다.

죄민수는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한다. “아무 이유 없어!”, “이거 이거 손짓 하나에 다 넘어가는구만.”, “스타가 되고 싶나? 그럼 나처럼 생기던가!”, “어머니 감사합니다. 남들보다 쉽게 먹고살아요.” 이 대사들은 기존의 연예인에 대한 관념을 모두 뒤집는 것으로 여기에 죄민수의 특출난(?) 외모와 과장된 연기가 곁들여지면 폭소가 유발된다. 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 이유가 없고’, 손짓 하나에 다 넘어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그들의 생각과 말이 우습게만 보인다. 게다가 실력은 뒷전에 외모 하나로 뜨기도 하는 연예계 세태를 꼬집는 데선 가히 넘어간다. 심지어 가끔씩 최국이 질문을 할 때 죄민수가 답변은 안 하고, “MC계의 쓰레기!”라는 엉뚱한 말을 할 때는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연예계의 스타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것은 바로 그들을 추종하는 팬들. 이것이 양희성이라는 과거의 카리스마를 좇는 여성 캐릭터의 존재 이유다. 코너 속에서는 헤어진 연인이지만, 이 팬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은 죄민수에게 “역시 여자를 갖고 놀 줄 알아.”, “여자의 마음을 얼렸다 녹였다 하는 이 삼한사온 같은 자식!”하면서 과장되게 추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거만하게 행동하는 죄민수를 보다 못해 “이 거지같은 놈.” 하고 무언가 결별할 것 같은 분위기를 띄우다가, “내가 더러워서 갖는다.”하는 식으로 다시 죄민수로 돌아간다. 이것은 팬과 스타간의 애증적 관계를 패러디한 것은 아닐까.

죄민수, 조원석이 일약 스타덤에 오른 현재도, 최국은 여전히 그 옆자리에서 묵묵히 ‘별을 쏘고’ 있다. 아마도 연예계에서 최국 같은 인물들은 이미 뜬 스타들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기꺼이 그림자 역할을 해주는 최국 같은 이들이 있어 스타들을 빛나게 한다. 변방이 있기에 중심도 있는 것이다. 저 영화 ‘라디오 스타’가 말하듯 별은 저 혼자 빛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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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쇼에서도 호흡 척척 맞는 마빡이와 갈빡이

‘상상플러스’에 출연한 마빡이 정종철과 갈갈이 박준형. 무를 갈고 이마를 때리는 몸 개그의 시조이자 달인인 이들은 무대가 아닌 토크쇼에서 개그맨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옥동자에서 마빡이로 한없이 망가지며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던 정종철. 그리고 갈갈이에서부터 시작해 현재의 갈빡이까지 수많은 캐릭터로 웃음을 주었던 박준형. 그러나 인생 자체도 웃음이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이 입을 연 것은 자신들의 실패담이었다.

“차마 스스로는 얘기하기 그럴 것”이라며 대신 박준형이 말해준 정종철의 외모에 얽힌 수난과 성공은 그것 자체가 개그맨의 존재를 말해준다. 외모 때문에 초등시절에는 짝에게, 중등시절에는 교회의 누나에게 수모를 겪고 심지어는 음식점에서도 외모 때문에 채용되지 않았던 사연을 공개했다. 결국 주방에서만 일한다는 조건으로 채용된 냉면집에서, 주방장이 되는 이야기는 악조건을 웃음으로 한 바탕 뒤집는 정종철의 타고난 개그맨 기질을 말해주었다.

이어진 박준형의 이야기는 8번 개그맨 시험에서 떨어진 사연. 모기 먹는 들쥐를 준비해간 박준형 앞에는 수달을 해버린 심현섭이 있었고, 수다맨 강성범의 수다를 이길 방법이 없었다고 박준형은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종철이 단 한 번에 시험을 통과한 것이 억울하다며 “그 시험을 볼 때 정종철이 문 열고 들어오자 심사위원들이 웃었다”는 사연을 털어놓기도 했다. 외모 이야기에서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한 정종철과 그런 정종철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개그로 풀어낸 박준형은 그들의 개그가 저 힘겨운 눈물과 노력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둘이 보여준 환상의 호흡. 토크쇼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저 혼자 떠들고 듣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무대개그처럼 호흡을 맞춰 얘기했다는 것이다.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의 남기남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마치 입을 맞춘 것처럼 척척 대화로 이야기를 재연해 보였다. 박준형의 상황 제시에 반사적으로 정종철의 성대모사를 통한 완벽재연이 척척 맞아떨어진 것. 왠만한 호흡이 아니면 맞추기 어려운 걸 마치 입에 붙은 것처럼 해나가는 이들에게서 무대개그에서 비롯된 팀워크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방학특집으로 기획된 이 날 ‘세대공감 읽기’게임에 들어가서도 이런 호흡은 여전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게재된 시를 정확한 발음에 따라 끝까지 먼저 읽는 이가 이기는 이 게임에서 정종철이 한 구절 한 구절 읽어나갈 때마다, 마치 버릇처럼 나오는 박준형의 “좋아, 좋아”하는 추임새는 이들 개그맨들이 최고 위치에 오르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정종철은 박준형 특유의 너스레가 만들어놓는 상황 속에서 무한히 자신의 기량을 만끽하고, 박준형은 끊임없이 거기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완벽한 호흡은 또한 무대개그가 갖는 어려운 현실을 반증하는 결과다. 칼날 같은 무대 위에서 혼자 서기보다는 함께 서로를 북돋으며 세우는 것은 어쩌면 개그맨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처음 마빡이를 할 때 2회 째가 더 부담이었다. 그것은 이 코너가 단명할 거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때 준형이 형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말하는 정종철의 눈이 축축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마빡이와 갈빡이의 꿈은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회사를 차리는 것. ‘옥동캅’을 준비하다가 ‘마빡이’가 뜨는 바람에 ‘마빡캅’을 생각하고 있다는 이들에게서 그 꿈이 멀지 많은 않게 느껴지는 건, 어려움을 오히려 장점으로 바꾸는 개그맨 특유의 기질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쪼록 꿈이 이루어져 웃음에도 철학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크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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