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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짜3’, 신출귀몰한 진짜 타짜들의 ‘밑장빼기’는 어디로 갔나

 

영화 <타짜:원 아이드 잭(이하 타짜3)>은 화투 대신 카드를 들고 나온다. 도박 종목(?)의 차이 때문일까. 화투가 가진 토종적인 맛은 없고, 대신 카드 게임이 갖는 ‘돈 놓고 돈 먹는’ 하드코어적 도박의 풍경이 전면에 나오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엄청난 판돈과 손목, 발목이 잘려나가는 살벌한 룰이 전편을 압도한다. 물론 복수극과 속고 속이는 사기와 반전의 묘미를 넣고 있지만, <타짜>를 원작만화로, 두 편의 영화로, 또 드라마 리메이크로 봐온 관객들로서는 그다지 짜릿한 새로움을 찾기는 어렵다.

 

본래 <타짜>는 제목에 담긴 것처럼 도박기술로 상대방을 속이는 그 묘미가 압권이었던 작품이다. 그래서 지금도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심심풀이로 화투를 치면 농담 삼아 나오는 말이 “밑장빼기”가 될 정도였다. 바로 그런 타짜라 불리는 이들의 신출귀몰한 도박기술이 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였던 것.

 

게다가 빼놓을 수 없는 건 돈을 거는 도박판이 점점 커지면서 손목을 걸고 나아가 목숨을 거는 도박판으로 긴장감을 높이는 서사의 점층 구조다. 결국 도박의 긴장감은 ‘판돈’에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목숨을 담보로 하거나 신체 일부를 담보로 할 때만큼 강렬한 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짜>는 도박판 이야기처럼 시작되지만 마치 조폭 누아르 같은 색깔을 더한다.

 

하지만 <타짜3>에서는 카드로 바뀌어서인지 ‘밑장빼기’ 같은 기술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셔플링을 현란하게 하는 정도가 볼거리다. 이런 기술이 나오지 않는 이유로 제시되는 건 기술 자체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서다. <타짜>라는 작품에서 마치 이니셜처럼 등장하는 기술이 소개되거나 등장하지 않는다는 건 조금 아쉬운 대목이다.

 

이렇게 카드 게임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누군가를 속이는 데 집중하다 보니 영화는 도박 이야기라기보다는 여러 인물들이 모여 작당을 하는 ‘케이퍼 무비’ 같은 느낌을 준다. 오랜만에 류승범이 ‘원 아이드 잭’이라는 캐릭터로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건 이런 케이퍼 무비적 성격을 이 영화가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토속적인 맛이 사라지고, 도박 자체에 좀 더 깊게 들어가기보다는 도박판을 둘러싼 속고 속이며 복수하고 복수당하는 이야기로 흐르면서 <타짜3>에서는 어딘가 카드게임 자체는 하나의 도구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남게 되는 건 보다 큰 판돈이나 걸게 되는 손목, 목숨 같은 도박의 결과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끝없이 담배를 피우고 욕을 해대는 인물들 속에서 잘려나간 손목, 발목은 많은데 그다지 인상적이라는 느낌은 별로 없다. 다만 류승범의 아우라와 박정민의 안정적인 연기 정도가 인상적이랄까. <타짜3>는 그래서 원작 만화와 첫 번째로 영화화 된 <타짜1>의 후광효과 정도를 가진 작품처럼 보인다. 워낙 허영만 화백의 원작 만화와 최동훈 감독과 백윤식·조승우·김혜수 등 명배우들이 협업한 영화 <타짜1>이 완성도가 높았던 탓일까 아니면 후속 작품들이 너무 안이한 탓일까.(사진:영화'타짜:원 아이드 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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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열의 음악앨범', 실속은 못 챙긴 까닭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시작 전까지만 해도 올 가을 극장가를 촉촉이 적실 기대작으로 손꼽혔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동명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자극하는 추억과 향수가 적지 않다. 1994년부터 전파를 탔던 ‘유열의 음악앨범’. 당연히 당대의 음악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 음악을 배경으로 이 작품에 캐스팅된 정해인과 김고은이 차곡차곡 시간을 채워 넣어 만들어내는 멜로라니. 기대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기대는 생각만큼의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후 현재까지 스코어가 100만 관객을 조금 넘고 있어, 손익분기점인 180만 관객을 넘길 수 있을 지도 미지수다. 추석 시즌을 맞아 극장가는 새로운 라인업이 채워지고 있다. <타짜: 원 아이드 잭>, <나쁜 녀석들: 더 무비>, <힘을 내요, 미스터 리> 등이 개봉하면서 <유열의 음악앨범>은 이제 상영관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사실 조금 심심할 순 있어도 <유열의 음악앨범>은 그리 나쁘지 않은 멜로영화라고 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사랑과 얹어 놓으면 괜찮은 질감이 만들어진다는 걸 정지우 감독은 잘 알고 있다. 엄마가 남긴 빵집에서 일하는 미수(김고은)와 어느 날 불쑥 그 빵집으로 들어온 현우(정해인)의 엇갈리는 만남과 헤어짐의 이야기. 그 이야기 구조는 다소 단조롭지만 관객들은 ‘시간의 흐름’을 관조하며 삶과 사랑의 의미 같은 걸 떠올릴 수 있었을 게다.

 

특히 변화하는 공간과,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에 안도감과 위로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즉 이들의 사랑과, 그 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음악들은 그 변화들 틈바구니에서 변화하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제시된다.

 

라디오라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가진 매체가 주는 따뜻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인간에게는 목소리에 대한 기억이 가장 오래 남는다고 하던가. 라디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바로 내 귓가에 속삭이는 그 느낌을 전해주는 매체다. 그러니 유열의 목소리와 그가 전하는 음악들이 순식간에 그 때의 시간대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것을 게다.

 

하지만 괜찮은 잔잔한 영화이긴 해도 <유열의 음악앨범>이 모두가 감탄하고 감동할 만큼 특별한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의외로 부진하게 된 이유를 개봉 전부터 너무 과하게 느껴졌던 홍보에서 찾게 된다. <유열의 음악앨범> 개봉 전부터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정해인과 김고은의 출연과 노골적 홍보가 부쩍 잦았다. JTBC <비긴어게인3>에 한 회 분량으로 출연한 건 그래서 이 프로그램의 팬들에게는 적지 않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실 <유열의 음악앨범> 같은 영화는 과한 홍보보다는 내버려 둠으로써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는 ‘입소문’이 훨씬 나은 방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과한 홍보는 오히려 반감을 일으키기도 하는데다가, 이 영화가 가진 어떤 순수한 사랑의 이야기에 너무 돈 냄새를 풍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홍보도 영화의 성격에 따라 달리해야 효과가 나기 마련이다. 블록버스터도 아닌 잔잔한 영화에 너무 상업적 색채를 드리운 건 아니었을까. 그냥 조용히 보게 놔뒀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사진:영화'유열의 음악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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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 유해진이 외치는 독립에는 남다른 울림이 있다

 

영화 <봉오동전투>에 대해 주인공 유해진은 “반일감정보다 영화의 힘으로 굴러가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그렇게 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영화는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을 대패시킨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그걸 담는 방식에서 마치 <삼국지>의 한 대목을 보는 듯한 전략과 전술이 등장하고, 이를 구현해내는 액션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오동전투>는 만일 일제라는 부분을 떼놓고 보면 하나의 액션영화로 볼 수도 있을 게다. 일단 주인공 3인방이 액션영화에 등장하는 저마다 다른 능력을 가진 히어로들이다. 황해철(유해진)은 항일대도를 휘두르며 총으로 공격하는 적진에 들어가 일본군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리는 영웅이고, 독립군 분대장 이장하(류준열)는 빠른 발로 종횡무진 적들을 교란시키는 영웅이며, 해철의 오른팔인 마병구(조우진)는 백발백중의 저격수다.

 

그러니 이들 3인방의 캐릭터는 그 자체로 <봉오동전투>가 보여줄 액션의 스타일들을 담아낸다. 즉 황해철이 대도를 휘두를 때는 마치 중국 무협영화를 보는 듯 하고, 이장하가 산 속을 달려 나가는 풍경은 추격 액션이 더해진다. 마병구의 저격 장면은 스나이퍼들이 대결하는 총기 액션을 보는 것만 같다.

 

이처럼 액션이 분명한 <봉오동전투>지만, 이런 3인방의 캐릭터는 그냥 설정된 건 아니다. 그것은 실제 역사에 기록된 <봉오동전투>가 어떻게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 정규군을 아군의 손실을 거의 최소화한 채 무너뜨렸는가 하는 대목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봉오동전투는 화력에서도 군대의 수에 있어서도 절대 열세였던 독립군이 봉오동이라는 지형지물을 제대로 이용하는 전력과 전술을 써 대승하게 된 전투다.

 

그런데 그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방식이 이들 세 캐릭터가 가진 능력과 연관된다. 즉 일본군 주력부대를 항아리처럼 생긴 봉오동이라는 지역으로 유인해내는 것이 이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일이 되고, 그래서 발 빠른 이장하가 적들을 계속 자극하면서 퇴각해 그들을 봉오동으로 끌어 들이며, 그 과정에서 숨어 적을 사살하는 저격수와 결국 맞붙게 됐을 때의 백병전에서 항일대도를 휘두르는 인물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 특이한 봉오동 주변의 지역을 마치 지도처럼 찍어내 보여주며 그 능선과 협곡을 오르내리며 벌이는 전투 장면들은, 그것이 독립군이 일제에 맞서 거둔 성취라는 걸 빼놓고 봐도 충분히 흥미롭다. 하지만 유해진이 “반일감정보다”라고 표현했어도, 지금의 대중들에게 이 감정을 빼놓고 영화를 보기는 어려울 게다. 영화 속에서 독립군들이 외치는 “대한독립만세!”에서 ‘독립’의 의미가 지금 상황과 겹쳐져 ‘경제 독립’으로 들리는 건 그래서다.

유해진의 말처럼 꼭 “반일감정”만으로 이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거기에는 충분한 액션 서사가 주는 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밀어 오르는 ‘반일감정’을 억누를 필요도 없을 게다. <봉오동전투>를 통해 보이듯 독립군들의 그런 숭고한 희생들이 있어 지금 대등하게 경제 전쟁을 벌이는 우리가 있는 것이니.(사진:영화'봉오동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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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사제복 입은 슈퍼히어로 과한 건 득일까 실일까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사자>는 개봉 첫 주에 1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적은 수치는 아니지만 여름 블록버스터 시즌을 겨냥한 텐트폴 영화로서 그렇다고 많은 수치도 아니다. 같은 날 개봉한 <엑시트>는 벌써 290만 관객을 넘기고 300만 관객을 앞두고 있다.

 

<사자>가 <엑시트>만큼의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먼저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장르적 색깔이 뒤로 갈수록 애매한 지점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엑시트>도 재난에 가족드라마, 코미디가 뒤섞여 있지만 그 균형이 꽤 괜찮다. 하지만 <사자>는 오컬트 장르와 슈퍼히어로물을 섞어 높았지만 어딘지 과한 느낌이 있다.

 

아마도 <사자>를 보려는 관객들은 이 작품이 <검은사제들> 같은 오컬트 장르일 거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격투기 챔피언 용후(박서준)라는 캐릭터가 바티칸에서 온 구마사제 안신부(안성기)와 함께 구마의식을 하는 장면에 이르면 이 영화는 순간 <아이언 피스트> 같은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실체를 드러낸다.

 

<검은사제들>의 구마의식이 액션이 아니라 오컬트 장르가 주는 오싹한 악령들과의 영적인 대결이었던 걸 떠올려보면, <사자>는 오히려 액션이 전면에 등장한다. 실제로 이 영화의 장르 구분을 보면 미스터리, 액션, 판타지, 공포가 혼재되어 있다. 그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영화가 어느 순간 톤을 넘어 과한 판타지로 넘어가는 지점이 되면 현실감을 잃어버리는 단점이 생겨난다.

 

용후가 점점 자신의 특별한 힘을 알아가고 키워가는 동안, 안신부가 잡으려 하는 악을 퍼뜨리는 검은 주교 지신(우도환)의 힘도 덩달아 커져간다. 그래서 결국은 이 거대한 두 힘이 맞붙게 되는데, 그 장면은 영락없는 ‘철권’ 같은 액션으로 채워진다. 인간의 모습을 뛰어넘는 괴물로 변신한 지신과 완벽한 슈퍼히어로의 한 판 액션.

 

영화의 과한 설정을 그나마 누그러뜨리고 끝까지 이어가는 힘은 배우들에게서 나온다. 김주환 감독의 전작에서도 함께 했던 박서준은 그 바르고 조금은 둔감한 모습으로 이 영화가 오컬트의 공포로 빠져드는 걸 막아준다. 보기에도 섬뜩한 악령들의 모습 앞에서도 “그게 뭐?”라고 할 법한 무감한 반응은 관객을 충분히 안심시켜주는 면이 있다. 그래서 영화가 오컬트에서 액션으로 넘어가게 해주는 건 전적으로 박서준의 안정적인 그 표정연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너무 과해 현실성을 넘어서는 상황과 설정들을 끝내 끌어당겨 땅바닥에 붙여 놓는 안성기의 안정적인 연기가 더해졌다. 실로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툭툭 농담을 던지는 생활연기(?)를 선보이는 안성기의 존재는 <사자>가 가진 약점들을 상당부분 누그러뜨린 중요한 요인이 됐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다. 퇴마사와 격투기 선수를 붙인 캐릭터는 흥미로울 수 있었지만, 어째서 반전이 있는 이야기에 공을 들이기보다 액션 볼거리로 나갔을까. <사자>는 엔딩에 사제로 돌아올 용후의 이야기가 또 이어질 거라는 여운을 남겨 놨다. 혹여나 후편으로 올 것이라면 좀 더 이야기를 치밀하게 꾸려나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화려한 볼거리는 물론 여름 블록버스터에 어울리는 것이긴 하지만.(사진:영화'사자')

Posted by 더키앙

‘엑시트’,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눈물과 웃음의 롤러코스터가 있다

 

이 영화 심상찮다. 재난과 코미디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싶지만, 의외로 웃음과 눈물의 공존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엑시트>다. 그 중심에는 역시 울면서 웃기는데 이보다 잘 할 수 없는 조정석이라는 배우가 있다. 그는 영화 내내 뛰어다니고 억울해하고 두려워 떨고 심지어 울지만, 그걸 보는 관객들에게는 시종일관 웃음을 안긴다. 바로 이 눈물과 웃음이 자연스럽게 교차되는 지점이 바로 <엑시트>가 가진 가장 큰 묘미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 조정석이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유독가스로 뒤덮인 도시를 탈출한다는 그 상황은 전형적인 재난영화의 틀을 갖고 오지만, 그 속의 인물들과 그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가 지극히 우리식의 공감대를 한껏 머금고 있다는 건 한편의 가족드라마 혹은 멜로드라마 같은 느낌을 준다. 게다가 영화는 재난영화가 갖고 있는 그 무거움만큼 이 상황을 살짝 비틀어 만들어내는 웃음의 지점들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관객들은 너무나 공감 가는 용남(조정석)네 가족 구성원이 쏟아내는 대사 하나에도, 이들이 칠순잔치를 하며 보이는 풍경 하나에도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그 웃음은 청년 백수로 구박받으며 살아온 용남이 재난 상황 속에서 보여주는 용기와 인간애 앞에 뭉클한 감동으로 바뀐다. 게다가 그와 함께 하는 대학동아리 후배 의주(임윤아)는 용남이 짝사랑했던 여인으로 그가 두려워 눈물까지 흘리면서도 바른 선택을 하게 만든다. 산악동아리를 하며 몸에 익은 클라이밍 기술은 유독가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위로 오르고 또 올라야 하는 용남과 의주의 유일한 생존방법이 된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아슬아슬한 밧줄 하나로 넘어가고, 마치 절벽을 오르듯 건물을 맨 손으로 오르는 과정은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또한 용남이라는 청춘이 보여주는 짠내와 웃음은 그가 보여주는 용기 있는 행동들로 반전을 보이며 아무 것도 하지 않아 잉여로 취급받는 이 청춘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의 존재인가를 드러내준다. 도시를 가득 채운 유독가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위로 오르고 또 오르기 위해 상처투성이가 되는 그의 손은 그래서 마치 지금의 청춘들의 단상을 담아내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물론 <엑시트>는 저 드웨인 존슨이 출연했던 <스카이스크래퍼>식의 스펙터클과 폼나는 액션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친숙한 공간과 인물들과 상황들이 너무나 우리 식으로 맞춰져 있어서인지 <스카이스크래퍼>보다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스카이스크래퍼>가 가짜 이야기 같다면 <엑시트>는 바로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현실감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물 하나 넘어가는 일이나, 한 층 위로 올라가는 일 하나만으로도 <엑시트>는 <스카이스크래퍼>가 주지 못하는 흥미진진함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이 긴박하고 아슬아슬한 순간들은 마치 남사당패 줄타기가 그러하듯이 그 긴박한 상황을 슬쩍슬쩍 무너뜨림으로써 웃음을 터트리게 만든다. 물론 조정석과 임윤아는 내내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의 진지한 연기를 선보이지만, 그것이 웃음으로 전화된다는 점에서 기막힌 희비극의 묘미를 선사한다.

 

임윤아는 이 작품을 통해 확실한 연기 변신을 선보인다. 지금껏 가녀린 선을 통한 멜로 연기 등을 주로 보여 왔던 임윤아는 <엑시트>를 통해 액션 또한 가능하고 나아가 코미디 연기도 조정석 못지않게 해낼 수 있다는 걸 확인시켜준다. 조정석이야 이미 <질투의 화신> 같은 작품을 통해서 울면서 웃기는 연기의 정점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임윤아에게는 <엑시트>가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비약적으로 넓혀준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이번 여름 블록버스터 시장에서 <엑시트>는 분명 일을 낼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웃을 일 없는 지금의 현실에 잠시 시원하게 웃을 수 있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따뜻하고 훈훈한 기분을 가질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해외의 그 어떤 화려한 블록버스터보다 확실히 <엑시트>는 우리의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거기에는 눈물과 웃음의 롤러코스터가 있으니.(사진:영화'엑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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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세종대왕 폄훼 아니라고 하지만

 

영화적으로만 보면 <나랏말싸미>는 꽤 잘 만든 영화다. 그것은 이 영화가 지금까지 세종대왕을 다루는 많은 콘텐츠들이 깊게 들어가 보지 않았던 한글의 창제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어서다. 무에서 유를 창출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제목에 담긴 것처럼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훈민정음’의 서문처럼, 우리는 우리말을 하고 있는데 글자는 한자를 쓰는 당대 언어생활의 어려움은 세종대왕이 그 말을 소리 나는 대로 글자로 만들려한 중요한 이유다.

 

소리글자를 만들기 위해 하나하나 발성을 해가며 그 소리가 입안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내기 위해 손가락을 집어넣고 소리를 내는 과정들을 반복하고, 그 일관된 규칙을 찾아내며 나아가 점과 선만으로 다양한 글자의 조합을 만들어내는 그 한글의 창제 과정 속에는 그래서 자연스레 세종대왕의 뜻과 마음이 얹어진다. 그 뜻은 모든 정보들을 민초들도 공유하게 하여 특정권력자들이 정보를 독점해 나라가 망하는 걸 막겠다는 것이고, 그 마음은 좀 더 민초들이 편리하게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애민정신’이다.

 

그러니 세종대왕이 주도적으로 이 한글 창제를 하는 과정을 온전히 담았다면 박수 받아 마땅한 영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랏말싸미>는 박수는커녕 역사왜곡 논란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것은 출처도 불분명한 신미 스님의 한글창제설을 덜컥 영화의 중심으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신미는 세종대왕이 홀로 고민해온 연구들을 보고는 한 마디로 ‘헛짓’을 했다고 일갈하고, 소리문자를 만들기 위해 본인이 능숙한 산스크리트어를 참조하며 한글을 만들어나간다.

 

신미가 한글 창제의 중심부에 서게 되자 자연스럽게 세종대왕은 뒤편으로 물러난다. 물론 이를 지시하고 그 과정들을 검수하는 건 세종대왕의 역할이 되지만, 실제로 우리의 소리를 정리하고 점과 선으로 이어 만든 글자를 만들며, 심지어 그 한글을 쓰는 법을 정리한 것도 모두 신미의 몫이 된다.

 

물론 <나랏말싸미>가 이처럼 다소 도발적인 시도, 즉 신미가 한글 창제의 중심에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왕과 대등한 스님이라는 그 구도가 지금의 대중들에게 어떤 카타르시스를 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일 게다. 과거 <광해> 같은 영화가 광해라는 왕과 광대를 병치시키면서 만들어냈던 카타르시스와 유사한 어떤 것.

 

하지만 신미가 세종대왕을 ‘주상’이라 부르고, “왕 노릇 똑바로 하란 말입니다!”라고 일갈하는 장면에서 지금의 대중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보다는 어떤 불쾌함을 느끼는 면이 더 컸다. 역사는 세종대왕이 주도적으로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우리의 문화유산인 한글을 창제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어디서 갑자기 스님 한 명이 나타나 그걸 자신이 했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세종대왕에게 면박을 주는 대목이 어딘가 잘못됐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역사왜곡 논란이 점점 커지자 <나랏말싸미> 조철현 감독은 신미를 세운 일이 역사를 왜곡하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밝혔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 때 가졌을 내면의 갈등과 고민을 ‘외면화’하기 위해 영화적 인물을 만들어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신미가 실존인물이며 여러 문헌에 기록이 나와 있어 충분히 ‘역사 공백을 개연성 있는 영화적 서사’로 만들만한 근거가 있는 인물이라고도 했다. 세종대왕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 <나랏말싸미>는 시작부분에 ‘다양한 훈민정음 창제설 중 하나일 뿐이며 영화적으로 재구성했다’고 자막으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한 인터뷰에서 “나로서는 넣고 싶지 않은 자막일 수 있다”며 “어째 됐든 그 누구든 역사적인 평가 앞에서 겸허해야 된다는 판단에서 넣게 됐다”고 한 말이 그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세종대왕이 주도적으로 만든 한글을 신미가 주도해서 했다고 하는 영화의 이야기는, 창작물로서의 상상력의 허용을 어느 정도 감안한다 하더라도 대중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다. 외국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특히 일본 같은 나라에서 이 영화의 신미 한글창제설을 보게 된다면 또 엉뚱한 말들을 늘어놓지 않을까 우려된다. 역사왜곡을 의도하려 한 건 아닐 수 있어도 <나랏말싸미>는 지금의 대중들의 정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것이 이 영화가 끝내 무너지게 된 진짜 이유다.(사진:영화'나랏말싸미')

Posted by 더키앙

디즈니 월드, 그 움직임이 심상찮다

 

지금 극장가는 디즈니 월드다. 지난 5월 개봉한 <알라딘>이 1천만 관객을 돌파했고, 지난 6월 20일 개봉한 <토이스토리4>도 320만 관객을 돌파했다. 7월2일 개봉한 <스파이더맨:파 프롬 홈>은 700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고, 새로이 개봉한 <라이온킹>도 단 하루만에 30만 관객을 돌파하며 디즈니 열풍을 이어가고 있다. 이 정도면 디즈니 영화 보러 극장에 간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걸까.

 

그간 디즈니가 그간 끊임없는 인수합병을 통해 그 캐릭터 왕국의 영토를 무한 확장해왔기 때문이다. 디즈니는 방송사 ABC, 스포츠채널 ESPN은 물론이고, 2006년에 픽사, 2009년에는 마블코믹스, 2012년 루카스 필름, 2017년 20세기폭스, 2018년 21세기폭스까지 인수했다. 이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무수한 캐릭터들, 예를 들면 픽사 애니메이션 캐릭터들과 마블 캐릭터, 스타워즈, 엑스맨까지 모두 디즈니 소속으로 편입됐다.

 

이러니 웬만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시리즈물들은 대부분 디즈니 영화가 되었다. 중요한 건 이 시리즈물들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또 스핀오프 되거나 ‘어벤져스화’되면서 무수한 콘텐츠들을 쏟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극장가를 장악한 디즈니 영화들을 보면 그 디즈니 월드의 확장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가를 실감할 수 있다.

 

<토이스토리4>의 경우, 기존 <토이스토리> 시리즈의 연작이지만 그 세계관을 바꾸면서 확장성을 갖게 됐다. 장난감의 세계에 머물던 이야기가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으로 넓혀지게 나가게 된 것. 이것은 디즈니의 시리즈들이 기존 공고한 캐릭터를 활용하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로 변주해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알라딘>과 <라이온킹>은 디즈니가 그간 애니메이션으로 해왔던 세계를 실사화하려는 그 야심이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워낙 애니메이션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인데다, 디즈니 특유의 뮤지컬 형식의 음악들이 가미한 방식은 뛰어난 CG 기술이 더해진 실사판을 더 실감나는 재미로 만들어주는 이유들이다. 익숙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스토리를 음악과 더불어 실사로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관객들을 잡아끄는 요인이 되고 있다.

 

<스파이더맨>은 마블과 루카스 필름 그리고 20세기 폭스까지 인수함으로써 하나의 캐릭터 군단을 만들어낸 디즈니가 그려나갈 캐릭터를 기반한 콘텐츠 사업의 면면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어벤져스> 그 이후의 세계를 다시금 그려가며 스파이더맨을 세워 놓은 이 작품은, 마치 과거 아이언맨에서부터 비롯되어 거대한 <어벤져스>의 세계가 그려졌던 그 과정의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1927년 탄생한 미키 마우스의 성공으로 세워진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했지만, 캐릭터 비즈니스, 테마파크 비즈니스에 이어 실사 영화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게다가 끊임없는 인수합병을 통해 그 캐릭터 왕국은 점점 더 확장되었다. 또한 디즈니는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 훌루의 경영권을 확보함으로써 넷플릭스에 이어 애플, 아마존 등 글로벌 기업들이 뛰어들고 있는 OTT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오는 11월 출시를 앞두고 있는 ‘디즈니+’에 OTT 시장이 긴장하고 있는 이유다.

 

과연 디즈니는 영화관에서부터 OTT까지 장악하는 콘텐츠 공룡이 될 것인가. 지금 현재 극장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디즈니 영화들의 움직임은 그래서 영화의 다양성 측면이나 우리네 작은 영화들을 떠올려 보면 무감하게 바라보기가 어렵다. 디즈니 콘텐츠들로 가득 채워진 극장가의 풍경은 그만큼 어두운 그림자 속에 가려지는 무수한 콘텐츠들을 만들어낼 테니 말이다.(사진:영화'라이온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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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공간 대비만으로도 빵빵 터지는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

 

정말 오랜만에 깔깔 웃었다. 첫 장면으로 등장하는 반지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만으로도 웃음이 터졌다. 그것이 봉준호 감독의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취를 한 작품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시작부터 이 영화가 너무 정곡을 콕 찔러서였다. 그 반지하에서 간만에 가족이 모여 맥주 한 잔을 하려 할 때 마침 취객이 나타나 토악질을 해대고 노상방뇨를 하려는 모습을 보며 기택(송강호)이 짜증을 확 내는 장면에서 터지는 웃음. <기생충>은 그런 영화였다. 무언가 비극적 상황의 꼬질꼬질함이 오히려 웃음으로 터져 나오는 블랙코미디.

 

봉준호 감독이 ‘봉테일’이라 불리는 게 허명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되는 대목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공간, 경계, 침범, 파국 같은 것들이 공간과 빛 같은 시각적, 미술적 장치들만으로도 고개가 끄덕여지기 때문이다. 기택의 가족이 사는 반지하라는 공간은 그래서 자본의 양극화가 만들어낸 계급사회의 한 계급을 상징한다. 영화가 그 반지하 공간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는 건 그 시점을 따라 우리 사회의 비극적이지만 우습게도 보이는 계급적 특성을 해부해 보이겠다는 의지처럼 읽힌다.

 

햇볕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반지하라는 공간은 그 경계가 애매하다. 그래서 이 지점이 어떤 다른 계층으로 침범해 들어올 때 그건 ‘계급의 충돌’을 만들어낸다. 이것을 봉준호 감독은 바퀴벌레에 비유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 없는 것처럼 치부하며 살아가지만, 분명 저 지하에 존재하는 바퀴벌레가 문제를 만들어내는 건 그 경계를 넘어 지상으로 튀어나왔을 때다.

 

<기생충>은 이러한 평시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자본의 양극화가 어떤 선을 넘어갈 때 만들어내는 마찰음을 특유의 블랙코미디식 유머로 담아낸다. 기택이 사는 반지하에 마치 왕좌처럼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화장실 변기마저 웃음이 터지는 상징처럼 다가오고, 그 집과 비교되는 글로벌 IT기업 박사장의 대저택은 그 비교점만으로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표징하는 지적 웃음을 준다.

 

그 공간들을 우 몰려 올라갔다가 우 몰려 내려오는 인물들의 모습은, 마치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위 아래로 넘나드는 사회구조 속으로의 모험담처럼 보이게도 만든다. 냄새처럼 분명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경계를 침범해 들어온 흔적이 주는 긴장감이나, 물을 뿌리면 숨어있던 바퀴벌레들이 튀어나오듯, 폭우 속에서 인물들이 도망치는 장면은 절박하고 비극적이지만 이상하게도 웃음이 터진다. 높은 지대에 있는 대저택에 사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비는 아이가 텐트를 치고 놀 정도로 낭만이 되기도 하지만, 그 시간에 낮은 지대에 사는 이들은 물난리를 겪는 곳. 그곳이 우리가 사는 사회라는 게 하나의 살아있는 블랙코미디처럼 떠오르기 때문이다.

 

<기생충>은 ‘계획’이란 걸 세워봐야 그 구조 때문에(누구는 높은 곳에 살고 누구는 낮은 곳에 사는) 폭우 하나에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그 양극화된 세상에서 ‘무계획’이 최선의 계획이 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기생’을 선택한다. 저들 옆에 달라붙어 그들이 던져주는 무언가를 받아먹거나, 혹은 몰래 훔쳐 먹는 삶. 이토록 비극적인 현실을 이토록 웃음 터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역시 봉테일이라는 별명에 걸맞는 거장의 여유로운 손길이 느껴지는 작품이다.(사진:영화'기생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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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가 블랙유머로 해부해낸 우리네 사회, 세계에도 통했다

 

제 72회 칸 영화제 폐막식의 주인공은 봉준호 감독에게 돌아갔다. 영화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것. 아직 개봉된 작품이 아니라 그 내용은 잘 알 수 없지만 현지 언론들의 폭발적인 반응들을 염두에 두고 예상해보면 역시 봉준호 감독 특유의 사회를 해부하는 블랙유머가 들어간 작품일 것으로 보인다. 작품 소개를 보면 <기생충>은 전원백수인 기택(송강호)네 장남 기우(최우식)가 박사장(이선균)네 집 고액과외면접을 위해 찾아가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봉준호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이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분명 실현될 일이었다는 기시감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지금껏 여러 작품을 해오면서 일관되게 추구해온 것들이 있었고, 그것이 어느 순간에는 그의 영화 세계로 구축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심은 그의 첫 단편 작품이었던 <지리멸렬(1994)>에서부터 현재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까지 이어졌다.

 

대학교수와 조선일보 논설위원 등의 허위의식을 발랄한 유머로 담아낸 <지리멸렬>로 주목받은 봉준호 감독은 첫 장편영화 <플란다스의 개>로 한 중산층 아파트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아낸 바 있다. <살인의 추억> 역시 연쇄살인사건을 통해 우리가 겪었던 한 시대의 암울함을 담아냄으로써 그가 사회성 짙은 진중한 메시지와 더불어 대중성 또한 겸비한 감독이라는 걸 보여줬다. 이 작품은 봉준호를 국내만이 아닌 해외에서도 주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괴물>로 그는 칸영화제에서 화제가 된 감독으로 급부상했다. 미군부대가 방출한 화학약품이 원인이 되어 한강에서 출몰한 돌연변이 괴물로 인해 사투를 벌이게 되는 가족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장르적 색깔을 가져오면서도 봉준호 특유의 사회성 짙은 블랙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괴물의 출몰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그간 벌어졌던 무수한 재난과, 그 재난에 대처하는 무능한 콘트롤 타워의 문제를 통렬한 유머로 담아냄으로써 이 작품은 1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작이 되기도 했다.

 

<마더>는 한 장애를 가진 아들을 돌보는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네 사회가 가진 모성애의 살벌한 이면을 들춰낸 문제작이었다. 아들을 위한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아들의 잘못을 지워내기 위해 자행되는 범죄들은, 이른바 ‘치맛바람’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비뚤어진 모성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충격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안겨준 작품이기도 하다.

 

<설국열차>는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달리는 설국열차에서 벌어지는 꼬리칸에서 머리칸으로 가는 투쟁의 여정(?)을 담은 작품으로 자본주의의 동력시스템을 해부하는 성취를 보여줬다. 자본주의라는 궤도를 달리는 열차를 멈춰 세우고 그 동작의 무한순환을 깨는 길을 마치 하나의 완결성 있는 상황극으로 담아낸 수작이다. 넷플릭스에서 투자해 동시 상영된 <옥자>는 그 달라진 영화 유통의 시대를 화두로 끄집어낸 작품으로, 식량과 환경이라는 문제를 슈퍼돼지라는 가상의 존재를 통해 풀어냈다.

 

이처럼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은 사실상 대부분이 우리네 사회에 대한 진지하고 통렬한 탐구를 담아낸 영화들이었다. 그 진지함을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풀어내는 그의 작품 세계는 그래서 형사물이나 괴수물 심지어 가족극 같은 익숙한 장르들을 가져와서도 독특한 그만의 세계관으로 구축시켰고, 치열한 문제의식은 ‘봉테일’이라 불릴 정도로 그 작품에 놀라운 디테일을 부여했다.

 

따라서 이번 봉준호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그가 일관되게 해온 우리 사회에 대한 탐구가 이제 세계에서도 통했다는 걸 말해준다. <기생충>에 대한 외신들을 보면 그것이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지만, 저마다 자국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어느 한 사회에 대한 디테일한 분석은 결국 어느 사회에나 비슷하고 또 통할 수 있다는 걸 봉준호 감독은 보여주고 있다.(사진:영화'기생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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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마니아들부터 보통 관객까지 매료시킨 캐릭터의 전시장

 

열풍이라기보다는 광풍에 가깝다. 모이면 영화 <어벤져스:엔드게임> 이야기를 한다. “봤냐?”는 이야기로 시작된 영화 이야기는 그간 이 시리즈가 채워 넣은 무수한 캐릭터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10여년 가까이 쏟아져 나온 마블의 슈퍼히어로물들을 꾸준히 챙겨봤던 사람이라면 한 챕터를 끝내는 이 작품에 대한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시리즈의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이토록 우리네 대중들에게도 깊게 여운을 남기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의 무엇이 우리 대중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것일까.

 

영화 시작 전부터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사전 예매율이 치솟았던 건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그 하나는 이번 편이 이 시리즈의 마지막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난 ‘인티니티 워’의 타노스에 의해 슈퍼히어로들이 재처럼 사라져버리는 충격적인 엔딩과 그로 인해 지금껏 무수히 쏟아져 나왔던 마지막 편에서의 반전에 대한 추측들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요인이 겹쳐지자 대중들 입장에서는 안보고는 못 배기는 작품이 되었다.

 

이 정도 되면 <어벤져스:엔드게임>에 대한 기대감은 최고조로 올라왔다고 볼 수 있다. 때로는 이런 기대감이 자칫 영화를 망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즉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시작부터 빵빵 터트리며 시선을 잡아끌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 같은 걸 만들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놀라운 건 <어벤져스:엔드게임>은 이러한 부담감 자체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듯, 평소대로의 편안한(어찌 보면 오히려 더 평온한) 시작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게다가 영화는 시각효과의 과잉을 담기보다는 마치 ‘마지막’이 갖는 어떤 쓸쓸한 정서 같은 걸 담아내면서 관객의 마음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한다. 물론 마블 슈퍼히어로물에서 빠질 수 없는 유머들도 곳곳에 채워진다. 그래서 관객들은 볼거리의 자극이 아니라 ‘마지막’이 주는 울컥하는 감정들과 동시에 이를 깨치기 위해 애써 노력해 던져지는 유머가 주는 웃음의 정서 속에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물론 이건 뒤로 갈수록 점점 거대해지는 스펙터클한 영상들을 위한 밑그림 같은 것이지만.

 

<어벤져스>라는 기획 자체가 그렇지만 이번 마지막 시리즈에는 무수히 많은 마블의 캐릭터들이 거의 ‘융단폭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쏟아져 나온다. <아이언맨>이나 <헐크>, <캡틴 아메리카>, <토르> 같은 시리즈는 물론이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캡틴 마블>, <블랙팬서>, <스파이더맨> 등등 마블이 그간 해왔던 시리즈의 캐릭터들이 거의 이 한 작품 안에 꽉꽉 채워져 있다. 전부를 보지 못했어도 그 중 한두 작품에서 캐릭터의 매력을 느꼈던 관객이라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저마다 시공간 자체가 다른 캐릭터들이 한 작품 안에 녹아들 수 있었던 건 마블의 독특한 세계관 덕분이다. 시간을 뛰어넘고 지구와 지구 반대편의 우주라는 공간을 뛰어넘는 상상력의 세계는 이 모든 캐릭터들의 공존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저마다 한 세계씩을 평정하고 있는 슈퍼히어로들의 이야기를 싱겁지 않게 만들어주는 건 인물들이 가진 결함들과 그로 인해 그들끼리 갈등하는 이야기 구조 덕분이다.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에 이어 지난 <어벤져스:인피니티 워>에서도 등장한 것이지만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대결구도는 이번 마지막편으로까지 이어지고 그것을 해결해가는 과정 또한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무엇보다 이 거대한 전쟁을 가능하게 만든 건 슈퍼히어로들의 총합인 어벤져스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타노스라는 절대적인 캐릭터를 창조해낸 점이다. 세계를 파괴하는 존재지만 단 한 번도 ‘사적인 감정’이 들어간 폭력을 휘두른 적이 없다는 이 캐릭터는 그래서 희대의 빌런이지만 마치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이는 신화적 존재처럼 그려진다. 이 막강한 빌런이 세워지면서 <어벤져스:엔드게임>의 슈퍼히어로들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가능해졌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네 대중들은 마블의 세계에 이토록 열광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영화 자체가 주는 재미와 더불어 지금의 중장년층들이 가진 키덜트적인 취향에 마블의 세계가 조응한 면이 있어서다. 그래픽 노블이 보여주듯이 이 만화적 세계는 결코 유치하지 않고 또 너무 뻔한 권선징악의 구조로 되어 있지도 않다. <캡틴 마블>의 여성 슈퍼히어로와 <블랙팬서>의 흑인 슈퍼히어로처럼 무엇보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상징하는 인물군들의 이야기가 새로운 시대의 생각들까지 잡아넣는다. 그러니 아이부터 젊은 세대는 물론이고 중장년까지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세계가 된 것. 열풍을 넘어 광풍이 부는 이 현상이 공감가는 대목이다.(사진:영화'어벤져스:엔드게임')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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