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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마니아들부터 보통 관객까지 매료시킨 캐릭터의 전시장

 

열풍이라기보다는 광풍에 가깝다. 모이면 영화 <어벤져스:엔드게임> 이야기를 한다. “봤냐?”는 이야기로 시작된 영화 이야기는 그간 이 시리즈가 채워 넣은 무수한 캐릭터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10여년 가까이 쏟아져 나온 마블의 슈퍼히어로물들을 꾸준히 챙겨봤던 사람이라면 한 챕터를 끝내는 이 작품에 대한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시리즈의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이토록 우리네 대중들에게도 깊게 여운을 남기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의 무엇이 우리 대중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것일까.

 

영화 시작 전부터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사전 예매율이 치솟았던 건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그 하나는 이번 편이 이 시리즈의 마지막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난 ‘인티니티 워’의 타노스에 의해 슈퍼히어로들이 재처럼 사라져버리는 충격적인 엔딩과 그로 인해 지금껏 무수히 쏟아져 나왔던 마지막 편에서의 반전에 대한 추측들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요인이 겹쳐지자 대중들 입장에서는 안보고는 못 배기는 작품이 되었다.

 

이 정도 되면 <어벤져스:엔드게임>에 대한 기대감은 최고조로 올라왔다고 볼 수 있다. 때로는 이런 기대감이 자칫 영화를 망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즉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시작부터 빵빵 터트리며 시선을 잡아끌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 같은 걸 만들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놀라운 건 <어벤져스:엔드게임>은 이러한 부담감 자체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듯, 평소대로의 편안한(어찌 보면 오히려 더 평온한) 시작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게다가 영화는 시각효과의 과잉을 담기보다는 마치 ‘마지막’이 갖는 어떤 쓸쓸한 정서 같은 걸 담아내면서 관객의 마음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한다. 물론 마블 슈퍼히어로물에서 빠질 수 없는 유머들도 곳곳에 채워진다. 그래서 관객들은 볼거리의 자극이 아니라 ‘마지막’이 주는 울컥하는 감정들과 동시에 이를 깨치기 위해 애써 노력해 던져지는 유머가 주는 웃음의 정서 속에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물론 이건 뒤로 갈수록 점점 거대해지는 스펙터클한 영상들을 위한 밑그림 같은 것이지만.

 

<어벤져스>라는 기획 자체가 그렇지만 이번 마지막 시리즈에는 무수히 많은 마블의 캐릭터들이 거의 ‘융단폭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쏟아져 나온다. <아이언맨>이나 <헐크>, <캡틴 아메리카>, <토르> 같은 시리즈는 물론이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캡틴 마블>, <블랙팬서>, <스파이더맨> 등등 마블이 그간 해왔던 시리즈의 캐릭터들이 거의 이 한 작품 안에 꽉꽉 채워져 있다. 전부를 보지 못했어도 그 중 한두 작품에서 캐릭터의 매력을 느꼈던 관객이라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저마다 시공간 자체가 다른 캐릭터들이 한 작품 안에 녹아들 수 있었던 건 마블의 독특한 세계관 덕분이다. 시간을 뛰어넘고 지구와 지구 반대편의 우주라는 공간을 뛰어넘는 상상력의 세계는 이 모든 캐릭터들의 공존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저마다 한 세계씩을 평정하고 있는 슈퍼히어로들의 이야기를 싱겁지 않게 만들어주는 건 인물들이 가진 결함들과 그로 인해 그들끼리 갈등하는 이야기 구조 덕분이다.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에 이어 지난 <어벤져스:인피니티 워>에서도 등장한 것이지만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대결구도는 이번 마지막편으로까지 이어지고 그것을 해결해가는 과정 또한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무엇보다 이 거대한 전쟁을 가능하게 만든 건 슈퍼히어로들의 총합인 어벤져스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타노스라는 절대적인 캐릭터를 창조해낸 점이다. 세계를 파괴하는 존재지만 단 한 번도 ‘사적인 감정’이 들어간 폭력을 휘두른 적이 없다는 이 캐릭터는 그래서 희대의 빌런이지만 마치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이는 신화적 존재처럼 그려진다. 이 막강한 빌런이 세워지면서 <어벤져스:엔드게임>의 슈퍼히어로들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가능해졌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네 대중들은 마블의 세계에 이토록 열광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영화 자체가 주는 재미와 더불어 지금의 중장년층들이 가진 키덜트적인 취향에 마블의 세계가 조응한 면이 있어서다. 그래픽 노블이 보여주듯이 이 만화적 세계는 결코 유치하지 않고 또 너무 뻔한 권선징악의 구조로 되어 있지도 않다. <캡틴 마블>의 여성 슈퍼히어로와 <블랙팬서>의 흑인 슈퍼히어로처럼 무엇보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상징하는 인물군들의 이야기가 새로운 시대의 생각들까지 잡아넣는다. 그러니 아이부터 젊은 세대는 물론이고 중장년까지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세계가 된 것. 열풍을 넘어 광풍이 부는 이 현상이 공감가는 대목이다.(사진:영화'어벤져스:엔드게임')

Posted by 더키앙

'생일' 세월호 유가족의 고통, 과연 우린 알고 있었던 걸까

 

우린 과연 진정 세월호 유가족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 영화 <생일>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눈물 흘리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유가족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있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영화를 보며 느껴진 어떤 깨달음이 아닐까.

 

<생일>이 흘리게 만드는 눈물은 우리가 사실 그토록 분노하고 눈물까지 흘렸던 세월호 참사에 대해 진정 잘 모르고 있었다는 자책감이 더 크다. 영화가 베트남에서 일하다 사고가 나서 감옥까지 갖다 오는 바람에 세월호 참사 2년이나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오게 된 아버지 정일(설경구)의 시선으로 시작하는 건 이런 ‘알고 있다 싶지만 사실은 잘 모르는 외부자’의 시선을 공유하기 위한 의도적 설정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초인종을 누르지만 집안에 있는 아내 순남(전도연)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마트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딸에게 저녁을 챙겨주는 순남의 일상은 겉으로 보기엔 그다지 별 이상이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완전히 다르다. 오래도록 집을 떠나 있다 돌아온 남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그 행동에서부터, 여전히 과거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아들의 방과 여전히 아들이 살아있기라도 한 듯 옷을 사서 걸어두는 순남의 행동에서 조금씩 그가 갖고 있는 내적 고통과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드러난다.

 

정일은 아주 조금씩 딸에게 다가가 친근해지고, 밀어내는 순남 앞에서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 방외인이 되어버린 가족 속으로 들어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저 홀로 그 고통을 감당해온 순남은 그래도 공동체 안에서 그 고통을 공유하며 버텨내고 있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과도 소원하게 지낸다. 순남은 이 벼락같은 사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들을 보낼 수도 없다. 그래서 아들을 망자로 여기는 일이나, 보상금 운운하는 것들을 감정적으로 수긍해낼 수가 없다. 망자를 위한 생일을 챙겨주는 일을 끝내 거부해온 이유가 그것이다.

 

정일이 사고를 당한 아이의 아버지이지만, 외국에서 일을 겪어 사건과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던 인물이라는 건, 그가 아내 순남을 통해 조금씩 그 치유되지 않은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큰가를 알아가는 것처럼, 관객들도 알고 있다고는 여겼지만 실제로는 잘 모르고 있던 그들의 고통을 똑같이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우린 과연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고통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쉬지 않고 소리 내어 오열하는 순남의 절규 앞에 처음에는 공감했다가 어느 순간 “못살겠다”고 말하는 이웃들의 시선을 통해, 보상금 받았으니 사업에 투자하라는 멀지 않은 친척의 무감한 이야기에 과연 저래도 되는 걸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더욱이 이런 유가족들의 아픔을 오래도록 외면해온 국가의 무책임과 일부 정치인들의 “언제까지 세월호냐”는 식의 비수 같은 발언들은 살인에 비견하는 폭력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영화 <생일>은 그래서 생일이라는 특정일의 풍경을 통해, 공동체가 어떻게 이 문제를 진정으로 공유하고 조금이나마 함께 치유의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 곳에서 친구로서 또 친구의 엄마로서 또 같은 피해를 입은 유가족으로서 아니면 방외인이지만 그 사안을 좀 더 가까이서 느끼며 그 현장에 뛰어들어 이들을 도우려는 사람으로서 저마다 한 마디씩을 더하며 그 진심을 나누는 일이 어째서 지금 또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비행기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던 정일의 다소 침착해보였던 시선으로 시작한다. 그렇게 멀리서 보면 막연히 저 아래 세상의 이야기가 뭉뚱그려진 어떤 풍경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일이 점점 다가가 그 아픔의 실체를 마주하고 자신 속에서도 분명 존재했던 그 고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게 되는 그런 ‘애도의 과정’이 우리에게는 절실해 보인다. <생일>은 바로 그런 과정들을 자주 무시하고 생략해옴으로써 치유되지 않고 덧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아픈 자화상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영화다.(사진:영화'생일')

Posted by 더키앙

'어스', 이 미국 이야기에 우리네 관객들이 열광하는 까닭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조던 필 감독의 영화 <어스>에 대한 국내 관객들의 반응이 심상찮다. 개봉 후 3일 만에 70만 관객을 넘어섰고,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미 <겟아웃>으로 한국 팬들까지 갖고 있어 ‘조동필’이라고도 불리는 조던 필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 때문에 이미 개봉 전부터 기대가 몰렸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어스 Us>는 제목에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즉 ‘우리’라는 뜻이지만 다른 식으로 들여다보면 ‘미국 United States’의 약자로 보인다. 이런 중의적 의미처럼 <어스>는 미국 사회가 가진 흑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그 이야기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겟아웃>에서부터 조던 필 감독이 공포라는 장르를 통해 일관되게 갖고 온 세상에 대한 인식이다. 

 

<어스>가 그저 B급 공포영화 그 이상의 성취를 보여주게 된 건,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상징들이 담겨져 있어서다. 영화 시작과 함께 카메라가 아주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보여주는 작은 케이지 안에 갇혀 있는 여러 종류의 토끼들은 <어스>라는 제목과 어우러지며 이 영화가 그리려고 하는 미국사회가 이 풍경을 닮았다는 걸 암시한다. 영화 곳곳에 풍자적 코미디가 가득 찬 <어스>는 그래서 이 첫 장면에 으스스한 긴장감과 동시에 피식 피어나는 웃음을 담아낸다. <어스>는 소름 돋는 공포영화지만 풍자적 코미디가 강해 중간 중간 빵빵 웃음이 터지는 이색적인 경험을 하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어스>가 주는 공포는 ‘도플갱어’의 존재라는 이 영화의 세계관에 의해 만들어진다. 어느 날 휴가를 떠난 애들레이드(루피타 뇽) 가족은 자신들과 똑같이 생긴 이들의 공격을 받는다. 무단침입해 들어온 이들 중 애들레이드와 똑같이 생긴(하지만 목소리나 하는 행동은 완전히 다른) 여자는 숨겨진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겉으로 드러난 빛이 있지만 이면에 그림자처럼 사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누군가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그들은 토끼 생고기를 먹어야 했고, 누군가는 부드럽고 편안한 인형을 선물 받을 때 그들은 날카로워 피가 나기도 하는 인형을 받았다는 것. 

 

도플갱어들의 공격은 그 차별적으로 살아왔던 것에 대한 분노이면서 동시에 항변이다. 지하에서 그림자처럼 살아왔던 이들은 지상으로 나와 정반대로 빛으로서 살아온 이들을 공격한다. 그리고 손에 손을 잡고 빈곤층을 돕기 위해 1986년 미국에서 벌어졌던 ‘Handa Across America’ 캠페인을 그대로 본 딴 그들의 거대한 인간 띠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연대하며 함께 살아가자는 운동이었지만, 실제로는 지하 세계에 소외된 그림자 같은 존재들을 밑바탕으로 삼는 사회. 그것이 미국이고 ‘우리’라는 걸 조던 필 감독은 공포 장르를 가져와 통렬히 비판한다. 

 

진짜와 가짜, 빛과 그림자, 지상과 지하, 백인과 흑인 등등. 영화는 이런 대비되는 것들을 가져와 그 부딪침이 만들어내는 갈등을 통해 공포를 유발한다. 하지만 이 공포는 단지 표피적인 두려움에서 나오는 공포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이중적 차별이 가진 공포이고, 또 겉으로는 연대를 이야기하지만 이면에는 여전히 남겨진 차별들이 존재하고 있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충돌하고 폭발할지 알 수 없는 그 상황이 만들어내는 공포다. 따라서 영화를 한참 보고 있으면 미국사회가 가진 허위성 같은 면들을 새삼 발견하면서 그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 공포라는 걸 알게 된다.

 

대책 없는 낙관과,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힘을 기반으로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이 그래서 ‘지구의 연대’를 이야기하는 것에 조던 필 감독은 공포의 실체를 포착해낸다. 어두운 면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저 지하 밑바닥으로 숨겨두고 없는 것처럼 억누르며, 그들의 희생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가 주는 공포. 누군가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때 누군가는 그만큼의 희생을 치러야한다는 걸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대책 없는 낙관의 공포가 그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이 위기에 처한 애들레이드 가족은 놀랍게도 공포의 희생자가 아니라 마치 롤러코스터의 스릴러를 즐기는 이들이나, 액션영화의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이 상황을 심지어 즐기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영화는 마치 그런 상황들을 B급영화의 코드처럼 착각하게 만들지만, 영화 말미에 이르러 보여주는 반전은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 미국인들의 실체라는 걸 드러낸다. 낄낄 대고 웃으며 보다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한 충격을 느끼게 되는 건 그래서다.

 

흥미로운 건 미국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영화에 우리네 관객들이 열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아마도 조던 필 감독이 기막힌 공포영화의 새로운 장을 보여주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그의 공포의 기반이 되는 흑인사회가 가진 차별과 소외의 정서가 우리네 서민들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는 면이 있어서일 게다. 항상 겉으로는 밝은 사회를 이야기하지만 매일 같이 터지는 사건들을 통해 들여다보면 그 밑에 숨겨진 어두움과 소외된 존재들이 발견되는 우리 사회. 그래서 <어스>가 ‘미국’과 함께 중의적으로 담고 있는 ‘우리’라는 의미에 우리네 관객들도 동조하는 마음이 생기는 게 아닐까.(사진:영화'어스')

Posted by 더키앙

65억 들인 '극한직업', 코미디의 진수이지 진수성찬

제작비 65억을 들인 영화 <극한직업>이 157억을 투입한 <스윙키즈>나 160억을 쏟아 부은 <마약왕>보다 더 잘 나간다. <스윙키즈>는 기대와 달리 140만 관객에 머물렀고, <마약왕>도 180만 관객에 그쳤다. 하지만 <극한직업>은 단 6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항간에서는 1천만 관객 영화가 탄생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사실 영화의 완성도로 흥행이 갈렸다고 말하긴 어렵다. 장르 자체가 다르고 흥행에서는 저조했지만 <스윙키즈>나 <마약왕>도 꽤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건 지금의 관객들이 원하는 코드가 무엇인가다. 관객들은 웃음을 원했고, <극한직업>은 말 그대로 웃음을 주기 위해 대본, 연출, 연기 모두가 혼신의 힘을 다한 면이 있었다. 그러니 잘 될 수밖에.

<극한직업>은 일단 마약반 5인방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 어딘지 짠내 나는 가장 고반장(류승룡)은 뭘 해도 잘 안되는 그 현실감으로 웃음을 주고, 뭐 하나 잘 하는 것 없어 보이지만 의외로 다방면에 능력이 좋은 마형사(진선규)는 그 반전매력의 웃음을 준다. 미모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망가짐으로 지금까지 봤던 모습을 모두 잊게 만드는 이하늬가 연기하는 장형사 캐릭터나, 항상 진지한 모습으로 이 엉뚱한 팀원들을 황당해하며 바라보는 영호(이동휘) 그리고 열정만 좋은 막내 재훈(공명) 모두 웃음 폭탄이 준비된 인물들이다.

게다가 재기발랄하기로 이미 유명한 각본가이자 연출자인 이병헌 감독은 잠복수사를 위해 인수한 치킨집이 의외의 대박을 친다는 상황으로 빵빵 터지는 웃음을 제공한다. 마약반 형사로서 별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그들이 마형사의 집안 레시피라는 갈비양념을 더한 치킨으로 대박을 내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래서 형사인지 치킨집 종업원들인지 헷갈리게 되는 그 반전의 코미디를 그려낸 것.

수원의 왕갈비 레시피와 통닭을 섞어 ‘수원왕갈비통닭’이 탄생하는 것처럼, 영화는 언뜻 비슷한 듯 다른 것들을 섞음으로써 만들어지는 재미와 흥미를 뽑아낸다. 마약반이 등장하는 형사물에 치킨집을 소재로 하는 창업 성공담을 더함으로써 잠복근무하는 형사들이 가진 긴장감과 진지함은 번번이 이를 배반하는 멘트와 행동, 상황들로 반전의 코미디를 연출한다. 치킨집 프랜차이즈를 통해 마약을 전국적으로 운반하려는 이야기는 황당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맛있는 음식에 ‘마약 치킨’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의 풍자적 코드라는 걸 알아차리면 웃음이 나는 식이다.

빵빵 터지는 웃음에 후반으로 가면 액션이 더해져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극한직업>은 무엇보다 이 코미디 연기에 마치 목숨을 건 듯한 연기자들의 명연기가 더해져 엄청난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코미디 연기란 울면서 웃길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정확히 보여주는 류승룡이나, 웃길 수 있다면 미모 따위는 던져버린 이하늬, 무엇보다 이 작품을 통해 그 다양한 진가를 발견하게 만든 진선규, 진지한 실제 형사 연기로 웃음을 만드는 이동휘와 과장된 캐릭터를 선보인 공명이 그 주인공들이다.

참 웃을 일 없는 현실이라, 진지하기보다는 한 두 시간 정도 아무 생각 없이 웃고픈 관객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극한직업>은 이런 관객들의 정서를 정확하게 짚어냄으로써 남다른 ‘웃음의 강도’로 승부한 것이 주효했다고 보인다. 물론 영화 전편에 깔려있는 소상공인들의 ‘목숨 걸고 영업하는 절박함’이 경제도 어려운 지금 같은 시기의 관객들에게 따뜻한 공감대를 주고 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의 이유가 아닐 수 없다.(사진:영화'극한직업')

Posted by 더키앙

'말모이',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배우 유해진의 진가

우리는 조선어학회라는 곳이 있었다는 걸 교과서를 통해 한번쯤 본 적이 있다. 또 아무리 몰라도 주시경 선생이나 최현배 선생의 이름 정도는 알 것이다. 하지만 한글을 지킨다는 것이나 우리말 사전을 편찬한다는 일이 일제강점기에 어떤 의미인가는 크게 실감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직접적인 항일투쟁을 했던 김구 선생이나 김원봉 선생 같은 독립투사의 삶과는 조금 다르게 느낀다는 것.


이것은 아마도 ‘글’이 갖는 엘리트적인 선입견이 그 실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리기 때문일 게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영화 <말모이>의 주인공이 류정환(윤계상) 같은 뜻을 갖고 한글을 지키기 위해 사전 편찬을 해온 엘리트가 아니라, 극장 직원으로 일하다 쫓겨나 길거리에서 소매치기를 하기도 하는 전형적인 생계형 인물 김판수(유해진)라는 점은 굉장히 중요한 시점 선택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극본을 쓰고 연출을 한 엄유나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던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말모이>는 조선어학회 사건이라는 역사적 현장 속으로 들어가면서 김판수라는 평범하고 어찌 보면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인물을 중심으로 세운다. 김판수가 류정환의 가방을 소매치기하며 악연으로 시작된 이들의 관계는, 과거 감방에서 인연이 있던 조갑윤(김홍파)의 추천으로 김판수가 조선어학회에서 잡일을 도와주게 되면서 갈등과 화해를 이어간다.

김판수를 그저 그런 밑바닥 인생으로 바라보며 자신과 선을 그어온 류정환이 조금씩 그의 진심을 알게 되는 과정은 그가 한계를 드러냈던 엘리트주의가 깨져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관객들은 김판수라는 평범한 인물의 시선으로 당대에 한글을 지킨다는 일이 어떤 의미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사전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사투리를 모으고, 전국 교사들이 함께 모여 표준어를 정하는 그 지난한 과정들을, 일제의 감시와 폭력 속에서 해낸다는 건 그 어떤 독립투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이면서 동시에 중요한 메시지이기도 한 대목은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대사를 김판수가 길거리 사내들을 모아놓고 실연해 보이는 장면이다. 전국에서 올라온 그 길거리 사내들은 조선어학회가 사전편찬을 위해 사투리를 수집하는 일에 날개를 달아준다. 사전을 편찬하고 한글을 지키는 일은 결국 그 말을 사용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고, 그래서 함께 해나가야 하는 일이라는 걸 그 장면이 보여준다.

결국 류정환은 김판수를 통해 자신이 그토록 한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온 삶이 사실은 저들 민초들을 위한 일이고, 또 저들이 있어 자신이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김판수는 아이들을 위해 어떤 일이든 해온 사람이지만 차츰 류정환을 통해 ‘적어도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아간다. 그래서 김판수라는 이름 없이 민들레처럼 스러져간 민초들의 희생이 있어 역사적인 기록에 남은 조선어학회나 몇몇 선구자들 역시 존재했다는 걸 이 영화는 말해준다.

엄유나 감독이 “평범한 대사에도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배우”라고 칭찬한 유해진은 이 작품에서 절대적인 힘을 보여준다. 그것은 감독이 말했듯 이 영화가 “평범한 사람들의 귀한 마음을 다룬 작품”이기 때문이다. 유해진은 김판수라는 인물이 가진 평범하지만 귀한 마음을 지극히 보통의 서민들 입장에서 천연덕스럽게 연기해냄으로써 그의 진가가 어디에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교과서에서나 봤던 역사적 사실에 특유의 너스레로 숨결을 불어넣어준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그 거칠지만 선한 웃음이 선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유해진은 스스로가 얼마나 대단한 배우인가를 입증해냈다.(사진:영화'말모이')


Posted by 더키앙

전혀 기대 없었던 '내안의 그놈'이 의외의 선전한다는 건

연말연시 이른바 기대작으로 불리던 한국영화들은 줄줄이 흥행에 실패했다.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에 송강호가 주연으로 등장한 <마약왕>은 180만 관객(10일 현재)에 머물렀고, <과속스캔들>, <써니>의 연속 흥행으로 기대감이 높았던 강형철 감독의 <스윙키즈>도 140만 관객에 머물렀다. <더 테러 라이브>의 김병우 감독에 하정우가 출연한 <PMC:더 벙커>도 160만 관객에 그침으로써 대작 한국영화들은 모두 손익분기점도 넘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


물론 이런 작품들과 최근 개봉한 <내안의 그놈>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작품성이나 완성도, 주제의식 등등 모든 걸 비교해도 <내안의 그놈>이 이들 대작들에 미치지 못한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상업영화로서 영화가 주는 즐거움과 재미에만 포인트를 맞춰 비교해본다면 조금 다를 것 같다. 전혀 기대가 없이 한국영화가 그렇지 하며 <내안의 그놈>을 봤던 관객들은 그 뻔한 소재로 빵빵 터지는 의외의 재미에 당혹감마저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내안의 그놈>은 제목에 담겨 있는 것처럼 그 흔한 ‘영혼 체인지’를 소재로 삼고 있다. 왕따로 빵셔틀을 하며 살아가는 고등학생 동현(진영)과 잘 나가는 엘리트 건달 판수(박성웅)가 어느 날 추락사고로 인해 영혼이 바뀌는 설정. 너무 흔하고 뻔한 설정이라 그런지 그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지만, 바로 그렇게 기대감을 전혀 갖기 못하게 만드는 설정에서 의외로 빵빵 터지는 웃음은 강도가 더 세다.

뻔한 설정을 가져왔지만 <내안의 그놈>은 지금의 대중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억압된 정서를 그 코미디 설정 안에 콕콕 박아 넣어두었다. 이를테면 뚱뚱한 몸으로 학교에서 왕따 괴롭힘을 당하는 동현의 몸으로 건달 판수의 영혼이 들어감으로써 그간 당해왔던 그가 자신을 괴롭혔던 이들을 평정해버리고 여학생들이 하트를 보내는 인물로 거듭나는 과정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그렇다. 그 통쾌함이 더해지면서 코미디의 웃음은 미소를 넘어 폭소가 된다.

또한 고등학생과 중년 남자라는 나이 차가 영혼체인지로 뒤집어지고, 그래서 툭툭 나오는 반말이나 행동거지가 주는 웃음 속에도 묘한 나이의 위계를 뒤집는 카타르시스가 담긴다. 물론 이 세대 차이는 영혼체인지로 엮이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게 되는 단계로 넘어가지만, 그 과정에서 영화는 일관되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코미디에 집중한다. 판수의 영혼이 들어간 동현이 학교에서 잘 나가는 모습과 거꾸로 동현의 영혼이 들어간 판수가 겁쟁이가 되는 모습의 대비 또한 웃지 않을 수 없는 요소다.

하지만 여기에 더 코미디적 재미를 더하는 건 고등학생 동현의 몸을 갖게 된 판수가 과거 헤어진 판수의 첫사랑 미선(라미란)을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극이다. 동현이 좋아하는 같은 반 친구인 현정(이수민)의 엄마가 미선이었다는 설정은 그래서 후반으로 치달을수록 복잡 미묘하게 꼬이는 관계로 인해 빵빵 터지는 웃음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코미디를 완성하는 건 결국 박성웅, 라미란, 김광규와 더불어 이 영화로 연기자로서의 가치가 확실히 느껴지게 된 진영의 연기다. 이들은 뻔한 상황도(심지어 비극적 상황을) 리얼한 연기를 통해 웃음으로 바꿔내는 힘을 만들어낸다.

사실 <내안의 그놈>에 그다지 큰 주제의식이나 메시지 또는 영화적인 스타일의 성취 같은 거창한 것들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의미 과잉인 현실이 주는 피곤함을 잠시 벗어나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두 시간 동안 웃고 싶다면 이만한 영화가 없다. 웃음 자체에 처음부터 끝까지 천착하는 코미디가, 어째서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영화다.(사진:영화'내안의 그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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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칭 슈팅게임 같은 'PMC:더벙커'를 보는 상반된 시선

이게 게임이야 영화야? <더 테러 라이브> 김병우 감독의 신작 <PMC : 더벙커>를 본 관객이라면 이런 얘기가 나올 법하다. 마치 <배틀 그라운드>, <오버워치> 같은 1인칭 슈팅게임을 보는 듯한 시각적 체험이 영화의 전편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다.

<PMC : 더벙커>는 글로벌 군사기업(PMC)의 팀장 에이헵(하정우)이 CIA의 의뢰를 받아 군사분계선 지하 30미터 비밀벙커에서 북측 고위급 인사를 망명시키는 미션을 수행하다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서도 배우 하정우의 얼굴을 초근접으로 따라다니며 그 긴박감을 담아냈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카메라는 하정우가 연기하는 에이헵의 상황을 근접촬영하며 따라간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중국과 미국 사이, 그리고 미국 내에서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후보들 간의 입장들 속에서 이 벙커에 갇혀버린 에이햅의 상황도 변한다. 게다가 북측 고위급 인사 대신 북한의 ‘킹’이 등장하고 그를 납치하는데 성공하지만 또 다른 군사기업이 기습을 하게 되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아시아 최고의 현상금이 걸린 ‘킹’을 살리지 못하면 벙커 자체를 폭파시켜버리려는 CIA 측의 움직임 속에서 에이햅은 위기일발의 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

전개되는 상황들은 국제정세까지 연결되어 있어 다소 복잡할 수 있고 게다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어 도대체 저게 무슨 이야기일까 여겨질 수 있다. 게다가 벙커 안에서, 그것도 에이햅이라는 인물의 시점을 중심으로 담겨지는 영상들은 폐쇄공포증을 일으킬 만큼 답답함을 안긴다. 다만 그 안에 놓여진 에이햅에게 이중 삼중으로 더해지는 풀어나가야할 미션들이 숨쉴 틈 없는 몰입감과 긴박감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에이햅의 시점으로 담겨진 영화는 그래서 한 편의 1인칭 슈팅게임 속으로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흥미로운 건 이 전투 상황에서 적진에 먼저 투입되는 공모양의 무선으로 조종되는 카메라가 다양한 시점을 더해준다는 점이다. 바닥으로도 또 천정으로도 붙어 다니는 이 카메라는 에이햅이 이 벙커 여러 곳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상황들을 통제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이면서, 영화적으로는 360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시점 샷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답답한 벙커 속이지만 영화가 다채로운 장면들을 연출할 수 있는 중요한 장치인 셈이다.물론 1인칭 슈팅게임에 익숙한 유저라면 이 긴박감 넘치는 에이햅의 시선을 따라 끝없이 움직이는 영상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게다가 이 밀폐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1인칭 시점의 답답함은 영화 후반부에 가면 고공에서 벌어지는 클라이맥스 장면의 스펙터클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게임의 이러한 감각이 익숙하지 않은 관객이라면 너무 흔들리는 카메라와 쉴 새 없이 전개되는 영상들의 홍수가 엄청난 에너지가 아니라 받아들이기 힘든 복잡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 자칫 ‘정신 산만한’ 장면들로만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그래서 극명하게 나뉠 수밖에 없다. 게임의 감각을 수용해 만들어낸 압도적인 시점이 주는 몰입감으로 열광할 수 있지만, 동시에 답답함과 복잡함이 뒤섞인 정신없는 액션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 과연 관객들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까.(사진:영화 'PMC: 더벙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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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의 날’, 너무 아팠던 이 재난을 굳이 다시 꺼내보는 이유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재난영화처럼 보인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1997년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이던 그 때 상황을 이 영화는 소재로 가져오면서, 그 일주일 전 이 재난이 닥칠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 어떤 대처를 보여주는가를 담는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국가부도 사태라는 쓰나미 앞에 선 인간군상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인 한시현(김혜수)은 이 심각한 재난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윗선에 보고하고 그 보고는 경제수석을 거쳐 청와대까지 올라가지만 어쩐지 대처방식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재정국 차관(조우진)은 노골적으로 이 재난을 정부가 나선다고 막을 수 없다고 말하며, 국민들에게 알리지 말 것을 요구한다. 혼돈만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참에 우리네 경제가 완전히 뒤집어져 이른바 체질 개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선을 앞두고 있는 정국과 맞물리면서 결국 이 국가부도라는 초유의 재난상황은 알려지지 않고 피해자들은 속출한다. 이 영화가 재난영화처럼 보인다는 건, IMF 구제금융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이전부터 사업 실패와 생계 문제로 비관한 이들의 자살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런 재난에 직격탄을 맞는 작은 사업주를 대표하는 인물로 갑수(허준호)는 백화점에 물건을 공급하는 수주를 약속어음 하나 달랑 받고 계약서에 사인을 함으로써 위기상황에 몰린다. 집까지 내놓고 버텨내려 하지만 결국 버티다 못해 어음을 돌려버리자 협력업체 사장은 자살을 해버린다. 

반면 이 재난 상황을 미리 읽어내고 기회로 삼으려는 이들이 등장한다. 종금에서 일하다 위기상황을 감지하고 사표를 던진 윤정학(유아인)은 이후 투자자를 모아 달러를 매입하고 달러가가 치솟자 다시 부동산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역투자를 해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똑같은 재난상황이지만 이 재난을 알려 국민의 피해를 줄이려는 자가 있고, 아무 것도 모른 채 사업을 벌여 죽을 만큼 힘든 현실에 맞닥뜨리는 이들이 있다. 또 이 재난을 역이용해 부를 축적하고 신분까지 상승시키려는 이가 등장한다. 물론 IMF라는 국제구제금융을 내세워 한국 시장을 열고 쓰러지는 기업들을 싼 가격에 먹어치우려는 미국과, 이 와중에도 정치와 권력을 먼저 생각하고 이를 위해 재벌기업들만 살리는 것으로 일종의 커넥션을 만들려는 우리네 상황도 그려진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시원한 사이다를 보여주진 않는다. 시종일관 벌어지는 고구마 상황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이를 대책 없이 감당해야 하는 무고한 국민들의 희생이 이어진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영화는 깊은 몰입감과 카타르시스를 주며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이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그것도 굉장히 힘겨운 재난상황들을 보는 일이) 어째서 의외의 몰입과 카타르시스를 주는 걸까. 

그건 이 영화가 재난영화의 틀을 가져오면서 동시에 ‘폭로’의 성격을 더해놓았기 때문이다. 보라. IMF에 의존해야 하는 초유의 국가부도의 사태를 벌인 것이나, 그 사실을 은폐해 엄청난 피해자를 만든 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저들이 한 일들이다. 우리는 심지어 그것이 우리의 분수를 넘는 소비나 해외여행 때문이라 생각하며 ‘금 모으기’에 그토록 노력하지 않았던가. 

재난의 폭로는 ‘저들의 잘못’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우리를 시원하게 한다. 그리고 또한 이런 재난 사태가 또 벌어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교육적인 가치 또한 담고 있다. 재난을 마주했던 한시현이나 윤정학, 갑수는 당시에는 서로 다른 길 위에 서 있었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믿지 않는다”는 것.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런 재난 상황이 또 다시 벌어지지 않는 길이라는 걸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사진:영화'국가부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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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랩소디’ 흥행에는 사운드 특화관 효과도 있다

영화관에서 떼창을?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지금 현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이른바 싱어롱 상영회를 하며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이다. 스크린X가 시도한 이 상영회는 지난 6일부터 9일까지 진행된 데 이어, 호응이 이어지자 10일부터 13일까지 연장됐다. 

이런 독특한 관람 문화를 만들어내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아무래도 이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영화가 담고 있는 퀸의 명곡들일 게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활동하며, 글램록에서부터 하드록, 헤비메탈, 프로그래시브록까지 다양한 장르들을 실험하며 무수한 명곡을 쏟아냈던 퀸의 명곡들을 영화를 통해 다시 듣는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레디 머큐리부터 브라이언 메이, 존 디콘, 로저 테일러는 그대로 과거에서 데려온 듯한 캐스팅과 분장, 재연 연기는 영화를 관람하며 온전히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또 그간 음악으로만 듣던 퀸, 특히 프레디 머큐리의 이야기를 보다보면 그 독특한 음악적 색채가 어떻게 해서 탄생했는가를 들여다볼 수 있다. 자신이 가진 한계를 예술적으로 승화함으로써 뛰어넘은 퀸의 이야기는 국적과 세대를 넘어 이 영화가 공감을 주는 이유가 되고 있다. 

하지만 떼창까지 가능한 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시각적인 극대화를 추구해온 영화관이 이제 그 실감의 극점으로서 청각적 변신(?)을 이룬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멀티플렉스들이 경쟁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사운드 특화관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일면적으로 듣던 소리의 세계를 입체적으로 들을 수 있게 해주었다. 메가박스 MX관, CGV 사운드X, 롯데시네마 애트모스관이 그 사운드 특화관들이다. 

순수 국내 기술로 사운드X관의 음향시설을 담당하고 있는 소닉티어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면 스크린 뒤쪽과 천장과 측면 벽측에 입체적으로 설치된 스피커들이 여러 소리들을 분산해서 들려주기 때문에 소리의 공간감이 살아난다고 말한다. 소닉티어는 이 기술이 향후 게임 산업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사운드 특화관의 입체음향을 가장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장면은 영화의 시작과 끝을 채우고 있는 라이브 에이드 공연 실황이다. 1985년 에티오피아 기아 구제를 위해 세계적인 팝스타들이 기부 형태로 모여 했던 이 공연에서 퀸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다. 영화는 당시 공연 실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듯한 실감을 선사한다. 

특히 음향효과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건 카메라가 무대에서 스타디움을 꽉 채우고 있는 관객들의 환호와 떼창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다. 사운드 특화관에서 이 장면을 보면 실제로 공연 현장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 모여든 관객들의 떼창과, 이를 영화로 보고 있는 관객들이 함께 시간을 뛰어넘는 떼창으로 이어질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기술적 기반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네 관객들은 특히 음악을 좋아하고, 그래서 음악영화들에 환호하는 경향이 있다. <원스>, <비긴 어게인>, <싱 스트리트>의 존 카니 감독 마니아들이나, <위플래시>, <라라랜드>, <퍼스트맨>의 데미안 셔젤 감독 마니아들이 생겨난 건 그래서다. 이런 점은 ‘귀로 보는 영화의 시대’에 더 많은 음악 영화들이 그만한 흥행 가능성을 갖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헤미안 랩소디>가 심지어 떼창 같은 새로운 관람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처럼.(사진:영화'보헤미안 랩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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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궐', 시도는 참신하지만 남는 아쉬움들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NEW)가 내놓은 영화 <창궐>과 <부산행>은 닮은 점이 있다. 우리 식으로 해석한 좀비 장르라는 점이 그 첫 번째다. <부산행>은 좀비 장르의 마니아적인 특성을 훌쩍 뛰어넘어 1천만 관객을 넘어서는 놀라운 흥행을 기록했다. 두 번째로 비슷한 건 다소 폐쇄적인 특정 공간에 집중된 좀비 장르라는 점이다. <부산행>은 영화의 대부분이 부산까지 가는 KTX와 몇몇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창궐>은 제물포항과 궁이라는 두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점보다 더 흥미롭게 보이는 유사점은 서구의 좀비 장르와 사뭇 다른 좀비라는 존재에 대한 해석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좀비가 바로 민초라는 시선이다. <부산행>에서는 가족이 좀비로 변화해 결국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는 그 과정을 통해, 또 집단적으로 몰려다니며 공격하는 좀비들을 통해, 우리네 집단주의적인 문화와(나아가 군사문화가 더해진) 그로 인해 대립과 갈등이 가족 내에서도 존재하는 우리네 상황을 에둘러 담아낸 바 있다. 

<창궐>은 좀비를 ‘들에 있다고 하는 귀신’을 뜻하는 야귀로 해석했다. 그런데 야귀떼들이 보이는 습성이 흥미롭다. 야귀떼들은 갈증과 배고픔을 호소하며 눈이 시뻘개지고 결국은 가족을 포함한 사람을 습격한다. 굶주린 민초들의 생존본능이 이 야귀라는 존재의 특징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 

이들이 이렇게 된 건 영화가 처음부터 특별한 설명 없이 보여준 ‘헬조선’의 풍경들 때문이다. 왕 이조(김의성)는 힘이 없고 대신 권력을 농단하는 김자준(장동건)에 의해 휘둘린다. 그래서 그의 간계 속에서 심지어 자식마저도 역모로 몰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한다. 왕이 관심을 갖는 건 자신의 왕좌뿐이다. 그래서 야귀떼가 창궐하고 있는 제물포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야귀가 궁으로 들어오고 왕의 측근으로 있던 조씨(서지혜)가 야귀로 변하게 되면서 궁에도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조씨에게 물린 왕이 조금씩 야귀로 변해가고, 또 이런 상황들을 이용하는 김자준의 눈빛이 점점 벌겋게 물들어가면서 야귀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이 만들어진다. 굶주린 민초들의 생존본능으로서의 야귀가 조선을 위협하는 존재들로 보였지만, 알고 보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왕좌의 권력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진짜 야귀들’이 궁안에 있었다는 것. 

이렇게 권력욕이 탄생시킨 야귀와 그로인해 굶주린 민초들이 변한 야귀를 구분해서 보면 이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가 ‘헬조선’과 ‘국정농단’ 같은 최근 몇 년 전 우리네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걸 쉽게 읽어낼 수 있다. 청에서 돌아온 왕자 이청(현빈)이 조선 땅에 발을 딛고 민초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나라냐”하고 묻는 대목은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를 더욱 명쾌하게 드러낸다. 

사실 이런 이야기 구조와 좀비라는 상징의 우리 식 해석, 게다가 조선시대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 좀비 장르를 엮어 보여주는 액션이라는 기획 포인트들은 이 작품이 우리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주목하게 만든 요인들이다. 하지만 기획과 상징적 메시지만으로 영화가 되는 건 아니다. 영화가 주는 재미는 이러한 시대적 정서를 이야기와 액션 속에 응축했다 폭발시키는 그런 섬세한 장치들을 통해서다.

하지만 아쉽게도 <창궐>은 이런 영화적 재미를 장르적으로 구현해내는데 있어서 많은 허점들을 드러낸다. 그 첫 번째는 민초들의 피폐해진 삶에 대한 공감대를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신 좀비 장르의 특징들인 충격적인 장면들과 액션들이 채워진다. 주인공인 이청의 성장담은 이런 이야기들과 유기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어 본래부터 엄청난 무공을 지닌 ‘슈퍼히어로’의 밋밋한 이야기로 흘러간다.

“왕이 있어야 백성도 있다”는 이야기를 뒤집어 “백성이 있어야 왕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는 그 메시지는 결코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 아니지만, 이청이라는 인물이 그런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이 너무 급작스러워 큰 감흥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170억 원에 달하는 제작비, 그리고 현빈과 장동건 캐스팅이 화제를 모았고, 조금 색다른 좀비 영화를 보겠다는 그 호기심이 관객들의 발길을 잡아끄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입소문이 창궐할 지는 미지수다.(사진:영화'창궐')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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