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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의 아이’의 흥행실패, 과연 시국 때문 만일까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전작이었던 <너의 이름은.>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이례적으로 370만 관객이라는 흥행을 거둔 감독이다. 국내에는 이미 그 작품 때문에 그의 전작들이었던 <언어의 정원>이나 <초속5센티미터> 등 또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에 투자한 영화사측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날씨의 아이>가 첫 주말에 약 33만 관객을 동원한 것에 적이 실망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관계자는 공식 입장문까지 내놨다.

 

공식 입장문의 주요 내용을 보면 <너의 이름은>에 비해 <날씨의 아이>의 성적이 저조한 이유가 지금의 냉각된 한일관계 때문이라는 것이고, 이에 대해 안타까운 심경이 토로되어 있다. 물론 지금의 이런 시국이 이 작품의 성패에 영향을 준 건 사실일 게다. 아무래도 일본 영화라는 사실이 주는 막연한 부담감(?) 같은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주말에 33만 관객을 동원한 것이 과연 실패라고 볼 수 있는지, 또 그 실패의 기준으로 <너의 이름은>의 흥행 성공을 내세우는 것이 온당한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작품으로만 보면 <날씨의 아이>는 전형적인 신카이 마코토 감독 스타일의 연출과 이야기 기법을 가져온 작품이다. ‘빛의 마술사’라는 지칭대로 빗방울 하나하나, 폭죽이 터지는 색감, 하늘의 풍경 등등이 만들어내는 감성들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색채로서 화려하게 표현해낸다. 그래서 그 색깔에 빠져들면 단지 눈만 건드리는 게 아니라 보는 이들의 감성까지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것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날씨의 아이>라는 날씨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든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 작품은 세계적인 기상이변 같은 지구적 위기의 문제를 특유의 판타지적 기법으로 들여다보고 머리만이 아닌 감성으로까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야망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그 기조에서 가장 중요해 보이는 건 날씨가 사람들의 감정을 좌지우지한다는 그 사실이고, 그것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아니면 색채로 표현해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감정 과잉 부분이 몰입을 오히려 방해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잔잔하게 흐르던 감정을 어느 순간 폭발시키고 그 상황에서 주인공들이 마치 구호를 외치듯 대사를 던지며 부감으로 거대한 도시나 자연으로 확장되는 그런 영상 연출과 음악이 이어지는 그 연출방식은 이미 <너의 이름은>에서도 충분히 반복되었던 것들이다. 그리고 그건 <너의 이름은>에서 큰 힘을 발휘한 연출이었지만, 이미 그것이 익숙한 관객들에게 비슷한 연출방식을 보이는 <날씨의 아이>가 그만한 효과를 발휘했을 지는 의문이다.

 

영화는 주관적 체험이고 그래서 그 반응은 상대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영화의 흥행이란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날씨의 아이> 영화사측이 첫 주의 결과를 보고 내놓은 공식 입장문이 과연 공감할만한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공식 입장문에 담겨진 것처럼 영화사측은 ‘2019년 전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감독 중 한 명의 작품’으로 <날씨의 아이>를 꼽고 있고 그래서 이 정도 성적은 일찌감치 실패이며 그 이유는 한일관계 때문이라 내놓고 있다.

 

물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대단한 감독인 건 사실이지만, 모든 대중들이 영화사측처럼 생각하는 건 아닐 게다. 또 첫 주말에 33만 관객 수를 실패로만 보지 않는 관객도 있을 수 있다. 안타까운 건 알겠지만 자신들의 생각을 객관적 사실처럼 얘기하며 생각한 만큼 관객이 들지 않았다고 시국을 가져오는 건 너무 성급한 판단과 행동이 아닐까. 반드시 관객 수가 그 작품 완성도의 바로미터가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사진:영화'날씨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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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슈와제네거, 제임스 카메룬 그리고 린다 해밀턴

 

1984년 처음 등장했던 제임스 카메룬 감독의 <터미네이터>는 이 레전드가 될 영화의 신호탄이었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미래에서 온 인간과 터미네이터의 대결이라는 이 흥미진진한 설정에 확실한 아우라를 부여한 건 터미네이터로 등장했던 아놀드 슈와제네거였다. 그 정도로 부서지고 깨지면 끝날 법한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계속 해서 공격하는 터미네이터라는 캐릭터는 당대의 전 세계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제대로 본 궤도에 오르게 된 건 1991년 제작된 <터미네이터2>였다. 레전드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놀라운 스케일의 액션이 CG와 더해져 풍부해졌고, 스토리도 탄탄해졌다. 무엇보다 1탄에서 압도적 존재감을 드러냈던 터미네이터가 이제는 유일한 미래의 희망으로 남은 존 코너를 지키는 수호천사로 미래로부터 날아온다. 더 강력한 액체 금속형 로봇 T-1000(로버트 패트릭)이 쉽게 파괴되지 않는 적으로 등장하고, 그와 무심한 듯 온몸을 던져 대적하는 T-101(아놀드 슈와제네거)의 압도적인 대결이 그려진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히어로가 합류하는데 그가 바로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다. 훗날 인류 저항군의 사령관이 될 존 코너를 지키기 위해 사라 코너와 T-101의 T-1000을 물리치려는 사투가 벌어진다. 사라 코너는 이 미래를 두고 벌이는 사투 속에서 또 한 명의 여전사로서 강력한 존재감을 만들어낸다.

 

그 후 <터미네이터>는 몇 편의 후속작을 내놨지만 이렇다 할 성적도 내지 못했고 작품으로서의 호평도 받지 못했다. <터미네이터3>,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터미네이터 제니시스>가 그 불운의 작품들이다. 거기에는 아놀드 슈와제네거가 출연했다는 걸 빼놓고 <터미네이터> 1,2편이 보여줬던 그 독특한 세계의 압도적 긴장감과 페이소스 같은 걸 느끼기가 어려웠다. 제임스 카메룬과 린다 해밀턴의 부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 작품들이다.

 

이 일련의 흐름을 봐왔던 <터미네이터>의 원조 팬이라면 이번에 개봉한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에 이 세 사람이 뭉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렐 수밖에 없을 게다. 물론 감독은 팀 밀러가 맡았지만 제임스 카메룬이 제작했고 스스로 “2편에서 이어지는 속편”이라며 원조의 계보라는 걸 명확히 했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사라 코너로 린다 해밀턴이 합류함으로써 이 영화는 <터미네이터> 골수팬들을 흥분시켰다.

 

이제 나이가 지긋하고 희끗희끗한 머리에 주름살이 가득한 아놀드 슈와제네거와 린다 해밀턴이지만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는 놀랍게도 이들의 액션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걸 보여준다. 물론 젊은 피로 미래에서 온 슈퍼솔져 그레이스(맥켄지 데이비스)가 합류하고 그가 지키려는 대니(나탈리아 레이즈)가 더해졌지만 영화의 아우라를 장악하고 있는 건 역시 아놀드 슈와제네거와 린다 해밀턴이다.

 

미래에서 온 새로운 터미네이터 ReV-9(가브리엘 루나)은 터미네이터 1탄과 2탄의 로봇이 결합한 듯한 형태다. 금속으로 이뤄진 터미네이터의 골격에 액체 형태로 형상이 마음대로 변환하는 T-1000이 분리됐다 결합했다 하며 대니를 제거하겠다는 목표하나로 앞뒤 재지 않고 공격하는 모습이 압도적인 액션으로 그려진다. 강력해진 적만큼 그와 대결하는 사라 코너와 T-800(아놀드 슈와제네거) 그리고 그레이스, 대니의 공조가 더 흥미진진해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번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를 흥미롭게 만드는 건 지금 시대에 걸맞는 젠더적 관점을 투영시켰다는 점이다. 린다 해밀턴은 노익장을 과시하는 걸 크러시를 여지없이 멋지게 보여주고, 미래에서 온 그레이스의 놀라운 액션과 대니와의 워맨스가 보는 내내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미래의 희망이 되는 자를 죽이려는 터미네이터와 그를 지키기 위한 여성들의 연대 그리고 이를 돕는 로봇 T-800의 구도는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액션에 더 큰 몰입감을 주는 요소다.

 

거의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거쳐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는 원조의 맥을 잇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멋진 아놀드 슈와제네거와 린다 해밀턴의 액션을 보는 것만으로도 원조 팬들은 반색할 수밖에 없다. 그 액션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고, 그 모습들이 중첩되어 불러일으키는 추억 게다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보이는 이들의 멋진 모습이 주는 기분 좋은 몰입감까지 느낄 수 있으니.(사진:영화'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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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극 같은 ‘82년생 김지영’, 그 담담함의 의미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게 평점 테러할 영화인가 하는 것이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개봉 전부터, 캐스팅 당시부터 쏟아져 나왔던 악플들과 비난들에 휩싸였던 작품이다. 이른바 남혐 여혐 갈등을 조장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어디서도 혐오나 갈등 조장의 연출이나 내용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물론 원작 소설도 ‘혐오’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영화는 더더욱 담담해졌다고나 할까. 마치 한 편의 가족극을 보는 듯한 담담함.

 

가족극의 시선으로 보면 <82년생 김지영>은 육아와 가사 그리고 경력단절을 겪는 김지영(정유미)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정신적인 문제를 갖게 되고, 이를 남편은 물론이고 온 가족이 나서서 해결하려 애쓰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잘 다니던 회사를 육아와 가사 때문에 그만두고 경력단절을 겪는 여성이라는 주인공의 상황과, 그가 시댁에서 겪는 혼자만 소외되어 있는 것만 같은 상황은 여러 모로 젠더적 관점이 들어있다 볼 수 있다.

 

이런 이야기가 어디 새삼스러운가. 종영한 MBC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같은 프로그램에서도 수시로 등장하는 이야기고, KBS 주말드라마에는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다. 시대는 바뀌고 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가부장적 체계 속에서 사회적으로도 또 심지어 가족 시스템에서도 김지영은 스스로도 자각하기 힘들 정도로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는다. 그래서 그는 어딘가 자신이 잘못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그냥 옛날 생각 자꾸 나고, 해 질 무렵에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데,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스스로도 괜찮다 말했던 김지영은 사실 전혀 괜찮지 않다. 어쩌면 그렇게 괜찮다고 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야 하는 상황이 오히려 그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갑자기 다른 사람에 빙의해 그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김지영은 하기 시작한다. 자신도 모르게 쌓이고 쌓인 문제들을 끄집어내놓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자, 그 억압을 빙의라는 형태로 꺼내놓기 시작한 것.

 

사실 <82년생 김지영>에서 가장 큰 사건은 바로 이 빙의사건 정도다. 나머지는 김지영을 걱정하는 남편과 그 누구보다 그를 이해하고 껴안아주는 어머니와의 공감이고, 빙의사건을 계기로 플래시백 되어 보여지는 과거 김지영이 살아왔던 삶 속에 저도 모르게 내재되어 있던 차별들이다.

 

<82년생 김지영>에는 딱히 두드러지는 악역이 없다. 김지영의 시어머니도 또 친아버지도 차별 섞인 말을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악의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모두가 함께 모여 담소를 나누는 명절에 며느리인 김지영에게 시누이가 귀한 만큼 며느리도 친정에 가게 해주는 배려 없이 “음식 좀 내와라”하는 시어머니는 물론 감정을 건드리는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악의적인 건 아니다. 또 밤늦게 다닌다며 김지영을 나무라면서 “바위가 굴러오면 피해야 한다”는 논리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피하지 못하는 걸 나무라는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이야기는 시대착오적이지만 그건 악의라기보다는 살아왔던 사회에서 오래도록 그 가부장적 시스템 속에서 학습된 결과라고 보인다.

 

이건 아내를 사랑하고 이해하려 애쓰며 또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는 남편이지만,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나선 김지영에게 “일 그만두게 한 것도 미안한데 그 딴 아르바이트나 하냐”고 말하는 남편 정대현(공유)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내를 누구보다 걱정하고 사랑하지만 그가 처한 세계와 환경은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다. 김지영을 돕기 위해서 필요한 건 자기 관점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입장에 들어가 보는 일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영화 개봉 전 마치 엄청난 일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평점 테러까지 이어졌지만, 심지어 가족극처럼 보일 정도로 담담하고 소소하다. 그런데 이것은 이 작품이 소소해서가 아니라 김지영이 겪는 차별의 문제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리네 일상에 내재되어 있는 이른바 ‘먼지 차별’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영화가 더 극적인 상황이나 사건들을 가져왔다면 그건 특정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차별의 문제로 오도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담담함과 소소함 속에 이 영화가 가진 진짜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족이 다 함께 봐도 될 법한 영화다. 우리의 어머니와 우리의 아내 그리고 당대의 아버지들까지 모두 같이 겪었을 힘겨움을 새삼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한 인간에 대한 휴머니즘의 관점으로 보면 당연한 공감대를 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마치 성별 갈등을 조장하기라도 할 듯 오도하는 일이다. 평점 테러? 영화를 보면 그런 일이 왜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사진:영화'82년생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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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가진 자들의 웃음과 못 가진 자들의 웃음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조커>의 흥행이 심상찮다. 우리에게는 배트맨의 적수로 알고 있는 조커라는 캐릭터의 탄생과정을 담은 영화지만, 이 영화는 결코 슈퍼히어로물의 단순명쾌한 선악대결을 담지 않는다. 또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둡다. 그건 조커라는 안티히어로가 되어가는 아서 플렉스(호아킨 피닉스)의 고통스런 삶이 전편에 공기처럼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단 4일 만에 170만 관객을 돌파했을 정도로 놀라운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높은 화제성과 평점을 통한 입소문이 급속도로 퍼져나가며 흥행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도대체 이 DC의 안티히어로를 다룬 영화에 어째서 우리네 관객들이 이토록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걸까.

 

먼저 이 영화는 슈퍼히어로물에서 캐릭터를 가져왔고 배트맨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도시 고담시를 소재로 쓰고 있지만 오히려 지극히 현실을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부터 ‘해피’라 불리며 세상에 늘 기쁨과 웃음을 주는 존재로 키워졌고 그래서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그의 조크는 세상 사람들을 웃기지 못한다. 정신 질환과 우울증으로 정신과 상담과 약물에 의존해 살아가는 아서라는 인물. 여기서 슈퍼히어로물의 비현실적 판타지를 찾기는 어렵다.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서의 모습은 그가 처한 현실을 상징화한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조크를 던지고 함께 웃음으로 공감하고 싶지만 웃음보다는 배려와 예의 없는 편견어린 시선과 심지어 아이들까지 조롱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세상에서 눈물을 웃음으로 애써 감추고 있다. 우울감을 약에 의지해 버텨내며 애써 웃는 그 모습은 그만의 현실이 아니었을 게다. 가진 자들은 우아하게 살아가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복지예산 삭감으로 정신과 상담도 받지 못하고 거리로 내쳐지는 게 고담시의 현실이니 말이다.

 

그런 아서의 유일한 낙은 피곤한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니로)의 TV코미디쇼를 보는 것이다. 그 쇼에 낄낄 대며 웃던 아서는 그러나 어느 날 자신이 어눌하게 클럽에서 했던 조크를 담은 동영상이 그 쇼에 소개되는 걸 보며 묘한 감정을 갖게 된다. 그건 사실 머레이가 웃기지 못하는 아서를 비웃고 모욕하는 것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이었지만, 아서는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감이 드러난 것에 놀라워한다.

 

늘 모욕당하면서도 그럭저럭 순응해가며 살아가지만 그가 우연히 저지른 살인사건은 그를 각성시킨다. 광대 분장을 했던 아서의 살인은 고담시에 커다란 화제가 되고 가난해 핍박받아온 이들은 조금씩 그를 영웅시하기 시작한다. 아서가 쏜 총은 그래서 자신만 각성시킨 게 아니라 그와 비슷한 처지를 살아가는 못 가진 자들을 각성시킨 게 되었다.

 

아서는 드디어 깨닫게 된다. 왜 자신의 조크에 저들이 웃지 않고 비웃었는지를. 그는 “당신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로 자신의 세계와 저들의 세계가 유리되어 있다는 걸 말해준다. 머레이의 쇼는 저들의 세계의 웃음을 던지며 저들 세계만이 세상의 모습이라 그려내고 있지만, 아서는 그 세계에 편입될 수 없다. 그는 매일같이 노트에 자신의 일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조크를 적어 놓고 들려주지만 저들은 그 조크는 이해하지 못한다.

 

저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이유로, 또 저들의 삶이 마치 진정한 삶이고 정상적인 삶이라 주장된다는 이유로 그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비정상으로 치부되고 모욕 받아 마땅한 삶으로 처분되는 것에 아서는 반기를 든다. 세상은 그를 비정상으로 취급하지만 그는 이제 거꾸로 세상을 비정상으로 취급하려 한다.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라며 먹이던 약물들을 끊어버린 아서는 제정신이 아닌 세상에 총알을 먹이기 시작한다.

 

<조커>는 사실 앞부분 내내 답답하고 무거운 감정을 지워낼 수가 없다.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 아서가 조커 분장을 하며 각성하기 시작하고 말미에 세상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는 장면에서 놀라운 해방감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가진 자들의 세상만이 정상으로 취급되는 현실에 못 가진 자들은 결코 정상적인 인물이 될 수 없다. 노력해도 그건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거리로 나온다.

 

여기서 저들의 시선으로 폭동이라 불리는 반사회적 행동들은 조커의 시선으로 보면 억압된 삶으로부터의 탈출로 그려진다. 이 부분은 아마도 이 이국의 낯선 영화가 우리를 열광하게 만드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가진 자들만의 웃음 속에 못 가진 자 조커의 거친 웃음이 만들어내는 카타르시스랄까.(사진:영화'조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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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이 작은 영화가 세계를 쏜 까닭

 

벌새는 현존하는 새 중 가장 작은 새들로 가장 작은 건 몸길이가 5cm에 몸무게는 2.8g에 불과하다고 한다. 가만히 보면 마치 헬리콥터처럼 정지해 서 있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가능한 건 엄청난 속도의 날갯짓 때문이다. 빠른 벌새는 초당 55회의 날갯짓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영화 <벌새>에는 벌새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제목을 단 건 아무래도 여기 등장하는 14살 중학생 은희(박지후)라는 인물과 그 인물을 들여다보는 카메라가 마치 벌새와 그 벌새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선을 닮아 있기 때문일 게다. 아주 작은 존재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날갯짓을 하며 세계와 대결하고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는 그런 위대한 존재.

 

<벌새>가 다루는 이야기의 시공간은 1994년 대치동이다. 이 영화에서 이 시공간이 중요한 건, 그 시점에 벌어진 성수대교 붕괴 같은 거대한 사건과 은희가 대치동 아파트에서 당대의 가부장적 집안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그 일상이 중요한 사건으로 다뤄지기 때문이다.

 

그 일상은 사실 영화가 주로 다루는 극적인 사건 같은 것들을 끌어오지는 않는다. 방앗간을 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때론 지나치게 권위적인 남편과 맞서기도 하지만 결국은 순종적인 어머니,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는 오빠와 그런 집안에서 탈출하듯 부모가 원하는 반대방향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언니.

 

어찌 보면 당대의 여느 집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 집안 풍경들은 그러나 은희라는 섬세한 인물의 시선으로 아주 자세히 천천히 들여다보자 무수한 감정들을 품어낸다. 관심 밖으로 밀려난 은희가 남자아이와 연애를 하고 유일한 친구인 지숙과 때론 탈선을 하기도 하며 자신을 따르는 여자 후배와도 연애 감정을 갖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자잘하게 보여진다.

 

그 평이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사건이랄 수 있는 건 힘겨워 하는 은희가 자신을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는 유일한 어른 영지 선생님(김새벽)을 만난 일이다. 마음을 다치고 찾아온 은희에게 항상 따뜻한 차를 대접해주며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라고 말해준 인물. 영지라는 인물의 존재는 이 평이해 보이는 일상과 대비되면서 그것이 평범하지 않은 폭력적인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준다.

 

디테일이 클리셰를 극복하게 해준다는 건 영화를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다. <벌새>는 평이한 일상들에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좀 더 오래도록 들여다봄으로써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 같은 인물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감정 같은 것들을 찾아내게 해준다. 그건 마치 멈춰서 있는 것 같지만 무수한 날갯짓에 의해 버텨지고 있는 것들이라는 걸 카메라의 ‘오래 들여다보는’ 시선이 보여준다.

 

이 부분은 <벌새>라는 작은 영화가 외국 영화제에서 20여개가 넘는 상을 받는 놀라운 성과를 보여준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한 사람의 작은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 하나의 세계가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는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세상에게 잔잔하지만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일 수 있다는 걸 영화는 은희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그래서 1994년의 성수대교 붕괴 같은 사건 또한 당대의 가족과 사회의 공기로 자리 잡던 가부장적 세계관이 만들어낸 결과처럼 여겨지게 된다. 그 거대한 사건이 사실은 우리의 이런 작은 날갯짓들이 전하는 항변과 버텨냄을 무시함으로써 생겨난 비극이라는 것.

 

요즘처럼 현란하고 빠른 속도감의 영상들이 마치 콘텐츠의 금과옥조처럼 되어 있는 시대에 <벌새>는 그래서 정반대로 가는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수하고 너무나 느려 심지어 정지된 영상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는 장면들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는 재미가 의외로 쏠쏠하다는 걸 이 영화는 보여준다. 여백이 많은 만큼, 그 영상을 통해 저마다의 추억과 생각들이 더해지면서 더더욱 풍부해지는 영화. 역주행하며 10만 돌파를 눈앞에 둔 <벌새>의 작은 날갯짓이 의외로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다.(사진:영화'벌새')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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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녀석들', 뻔한 데 웃기고 통쾌한 캐릭터 액션 통했다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로 돌아온 <나쁜 녀석들: 더 무비>는 어딘가 익숙한 캐릭터들로 채워져 있다. 이미 드라마를 봤던 시청자들이나, 보지 않았어도 김상중과 마동석의 캐릭터를 아는 관객이라면 <나쁜 녀석들>은 아무런 인물 설명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김상중이 오구탁 반장으로 등장해 첫 대사를 던질 때 관객들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한 대목을 지우기가 어렵다. “그런데 말입니다...”라는 대사가 나올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래서 그 낮게 깔린 자못 심각한 김상중의 대사는 의외의 웃음이 터지게 만든다.

 

이것은 마동석도 마찬가지다. 이미 일찌감치 극중 박웅철이라는 이름보다 마동석이라는 자신의 캐릭터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 있는 이 배우는 첫 장면에 거대한 덩치에 걸맞지 않게 재봉틀 수를 놓는 장면으로 빵 터지게 만든다. 그 곳은 다름 아닌 교도소이고 거기에 과실치사로 막 들어온 전직 형사 고유성(장기용)이 재소자들과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는 상황에 마동석이 등장해 해머 같은 주먹을 휘두르는 장면은 액션과 더해 웃음을 만든다.

 

마동석의 액션이 굉장히 강력한 파괴력을 보여주면서도 웃음을 주는 건 그것이 한층 과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주먹을 날리면 맞은 악당들은 몸이 날아가 버린다. 그 과한 리액션이 마동석의 액션을 폭력성보다는 만화적인 느낌을 부여하는 이유다. 폭력성의 불편함이 사라진 지대에서의 마동석의 액션은 그래서 마치 게임을 하는 듯한 통쾌함을 더해준다.

 

김상중과 마동석이 극중 캐릭터가 아니라 배우 자신의 캐릭터를 드러낸다는 건 연기로서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게다. 하지만 <나쁜 녀석들>은 오히려 이 캐릭터를 보다 적극적으로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온다. 마동석이 의도적으로 던지는 “그것이 알고 싶네?” 같은 대사는 <나쁜 녀석들>이 오롯이 통쾌한 액션과 웃음을 목적으로 하는 오락영화라는 걸 드러내준다.

 

<나쁜 녀석들>의 바로 이런 대놓고 2시간 정도를 즐기다 가라는 태도는 관객들이 부담 없이 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만든다. 어차피 이야기는 뻔하다. 나쁜 놈들이 더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다는 것. 그런데 그 설정 자체가 주는 카타르시스가 적지 않다. 정상적인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한다는 것이 요원해진 현실 속에서 ‘나쁜 녀석들’의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때려잡는 것’만이 목적인 그 행동들이 통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여기에는 자칫 폭력 미화라고 볼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하지만 이것 역시 <나쁜 녀석들>은 이들이 대적하는 적들을 과장함으로써 넘어선다. 한일관계를 의식한 것인지 이 영화는 일본에서 세력을 평정한 야쿠자들이 이제 우리나라에 들어와 거점을 만들고 중국 같은 대륙까지 진출하려는 야욕을 깔아놓는다. 그건 다분히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현재의 조폭 버전으로 바꿔 놓은 지점이다. 그들을 돕는 ‘친일파’까지 등장시켜서.

 

이러니 영화는 더더욱 오락물의 색깔을 확실하게 세우게 된다. 물론 영화가 단지 오락거리로만 치부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통쾌한 액션을 보며 웃는 일은 결코 무의미한 건 아닐 게다. 이것이 추석 명절에 <나쁜 녀석들>이 경쟁작들을 물리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이유다. 즐거움이라는 목적을 주기 위해 기존 배우들의 캐릭터 이미지를 활용하고, 일제강점기 상황까지 패러디하는 방식. 완성도나 메시지가 다소 떨어진다 해도 그 하나의 목적만큼은 충실했다는 것.(사진:영화'나쁜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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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짜3’, 신출귀몰한 진짜 타짜들의 ‘밑장빼기’는 어디로 갔나

 

영화 <타짜:원 아이드 잭(이하 타짜3)>은 화투 대신 카드를 들고 나온다. 도박 종목(?)의 차이 때문일까. 화투가 가진 토종적인 맛은 없고, 대신 카드 게임이 갖는 ‘돈 놓고 돈 먹는’ 하드코어적 도박의 풍경이 전면에 나오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엄청난 판돈과 손목, 발목이 잘려나가는 살벌한 룰이 전편을 압도한다. 물론 복수극과 속고 속이는 사기와 반전의 묘미를 넣고 있지만, <타짜>를 원작만화로, 두 편의 영화로, 또 드라마 리메이크로 봐온 관객들로서는 그다지 짜릿한 새로움을 찾기는 어렵다.

 

본래 <타짜>는 제목에 담긴 것처럼 도박기술로 상대방을 속이는 그 묘미가 압권이었던 작품이다. 그래서 지금도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심심풀이로 화투를 치면 농담 삼아 나오는 말이 “밑장빼기”가 될 정도였다. 바로 그런 타짜라 불리는 이들의 신출귀몰한 도박기술이 이 작품의 중요한 요소였던 것.

 

게다가 빼놓을 수 없는 건 돈을 거는 도박판이 점점 커지면서 손목을 걸고 나아가 목숨을 거는 도박판으로 긴장감을 높이는 서사의 점층 구조다. 결국 도박의 긴장감은 ‘판돈’에 있기 마련인데, 그것이 목숨을 담보로 하거나 신체 일부를 담보로 할 때만큼 강렬한 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짜>는 도박판 이야기처럼 시작되지만 마치 조폭 누아르 같은 색깔을 더한다.

 

하지만 <타짜3>에서는 카드로 바뀌어서인지 ‘밑장빼기’ 같은 기술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셔플링을 현란하게 하는 정도가 볼거리다. 이런 기술이 나오지 않는 이유로 제시되는 건 기술 자체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서다. <타짜>라는 작품에서 마치 이니셜처럼 등장하는 기술이 소개되거나 등장하지 않는다는 건 조금 아쉬운 대목이다.

 

이렇게 카드 게임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누군가를 속이는 데 집중하다 보니 영화는 도박 이야기라기보다는 여러 인물들이 모여 작당을 하는 ‘케이퍼 무비’ 같은 느낌을 준다. 오랜만에 류승범이 ‘원 아이드 잭’이라는 캐릭터로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건 이런 케이퍼 무비적 성격을 이 영화가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토속적인 맛이 사라지고, 도박 자체에 좀 더 깊게 들어가기보다는 도박판을 둘러싼 속고 속이며 복수하고 복수당하는 이야기로 흐르면서 <타짜3>에서는 어딘가 카드게임 자체는 하나의 도구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남게 되는 건 보다 큰 판돈이나 걸게 되는 손목, 목숨 같은 도박의 결과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끝없이 담배를 피우고 욕을 해대는 인물들 속에서 잘려나간 손목, 발목은 많은데 그다지 인상적이라는 느낌은 별로 없다. 다만 류승범의 아우라와 박정민의 안정적인 연기 정도가 인상적이랄까. <타짜3>는 그래서 원작 만화와 첫 번째로 영화화 된 <타짜1>의 후광효과 정도를 가진 작품처럼 보인다. 워낙 허영만 화백의 원작 만화와 최동훈 감독과 백윤식·조승우·김혜수 등 명배우들이 협업한 영화 <타짜1>이 완성도가 높았던 탓일까 아니면 후속 작품들이 너무 안이한 탓일까.(사진:영화'타짜:원 아이드 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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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열의 음악앨범', 실속은 못 챙긴 까닭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시작 전까지만 해도 올 가을 극장가를 촉촉이 적실 기대작으로 손꼽혔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동명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자극하는 추억과 향수가 적지 않다. 1994년부터 전파를 탔던 ‘유열의 음악앨범’. 당연히 당대의 음악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 음악을 배경으로 이 작품에 캐스팅된 정해인과 김고은이 차곡차곡 시간을 채워 넣어 만들어내는 멜로라니. 기대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기대는 생각만큼의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후 현재까지 스코어가 100만 관객을 조금 넘고 있어, 손익분기점인 180만 관객을 넘길 수 있을 지도 미지수다. 추석 시즌을 맞아 극장가는 새로운 라인업이 채워지고 있다. <타짜: 원 아이드 잭>, <나쁜 녀석들: 더 무비>, <힘을 내요, 미스터 리> 등이 개봉하면서 <유열의 음악앨범>은 이제 상영관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사실 조금 심심할 순 있어도 <유열의 음악앨범>은 그리 나쁘지 않은 멜로영화라고 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사랑과 얹어 놓으면 괜찮은 질감이 만들어진다는 걸 정지우 감독은 잘 알고 있다. 엄마가 남긴 빵집에서 일하는 미수(김고은)와 어느 날 불쑥 그 빵집으로 들어온 현우(정해인)의 엇갈리는 만남과 헤어짐의 이야기. 그 이야기 구조는 다소 단조롭지만 관객들은 ‘시간의 흐름’을 관조하며 삶과 사랑의 의미 같은 걸 떠올릴 수 있었을 게다.

 

특히 변화하는 공간과,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에 안도감과 위로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즉 이들의 사랑과, 그 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음악들은 그 변화들 틈바구니에서 변화하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제시된다.

 

라디오라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가진 매체가 주는 따뜻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인간에게는 목소리에 대한 기억이 가장 오래 남는다고 하던가. 라디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바로 내 귓가에 속삭이는 그 느낌을 전해주는 매체다. 그러니 유열의 목소리와 그가 전하는 음악들이 순식간에 그 때의 시간대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것을 게다.

 

하지만 괜찮은 잔잔한 영화이긴 해도 <유열의 음악앨범>이 모두가 감탄하고 감동할 만큼 특별한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의외로 부진하게 된 이유를 개봉 전부터 너무 과하게 느껴졌던 홍보에서 찾게 된다. <유열의 음악앨범> 개봉 전부터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정해인과 김고은의 출연과 노골적 홍보가 부쩍 잦았다. JTBC <비긴어게인3>에 한 회 분량으로 출연한 건 그래서 이 프로그램의 팬들에게는 적지 않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사실 <유열의 음악앨범> 같은 영화는 과한 홍보보다는 내버려 둠으로써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는 ‘입소문’이 훨씬 나은 방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과한 홍보는 오히려 반감을 일으키기도 하는데다가, 이 영화가 가진 어떤 순수한 사랑의 이야기에 너무 돈 냄새를 풍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홍보도 영화의 성격에 따라 달리해야 효과가 나기 마련이다. 블록버스터도 아닌 잔잔한 영화에 너무 상업적 색채를 드리운 건 아니었을까. 그냥 조용히 보게 놔뒀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사진:영화'유열의 음악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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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전투’, 유해진이 외치는 독립에는 남다른 울림이 있다

 

영화 <봉오동전투>에 대해 주인공 유해진은 “반일감정보다 영화의 힘으로 굴러가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그렇게 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영화는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을 대패시킨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그걸 담는 방식에서 마치 <삼국지>의 한 대목을 보는 듯한 전략과 전술이 등장하고, 이를 구현해내는 액션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오동전투>는 만일 일제라는 부분을 떼놓고 보면 하나의 액션영화로 볼 수도 있을 게다. 일단 주인공 3인방이 액션영화에 등장하는 저마다 다른 능력을 가진 히어로들이다. 황해철(유해진)은 항일대도를 휘두르며 총으로 공격하는 적진에 들어가 일본군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리는 영웅이고, 독립군 분대장 이장하(류준열)는 빠른 발로 종횡무진 적들을 교란시키는 영웅이며, 해철의 오른팔인 마병구(조우진)는 백발백중의 저격수다.

 

그러니 이들 3인방의 캐릭터는 그 자체로 <봉오동전투>가 보여줄 액션의 스타일들을 담아낸다. 즉 황해철이 대도를 휘두를 때는 마치 중국 무협영화를 보는 듯 하고, 이장하가 산 속을 달려 나가는 풍경은 추격 액션이 더해진다. 마병구의 저격 장면은 스나이퍼들이 대결하는 총기 액션을 보는 것만 같다.

 

이처럼 액션이 분명한 <봉오동전투>지만, 이런 3인방의 캐릭터는 그냥 설정된 건 아니다. 그것은 실제 역사에 기록된 <봉오동전투>가 어떻게 화력으로 무장한 일본 정규군을 아군의 손실을 거의 최소화한 채 무너뜨렸는가 하는 대목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봉오동전투는 화력에서도 군대의 수에 있어서도 절대 열세였던 독립군이 봉오동이라는 지형지물을 제대로 이용하는 전력과 전술을 써 대승하게 된 전투다.

 

그런데 그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방식이 이들 세 캐릭터가 가진 능력과 연관된다. 즉 일본군 주력부대를 항아리처럼 생긴 봉오동이라는 지역으로 유인해내는 것이 이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일이 되고, 그래서 발 빠른 이장하가 적들을 계속 자극하면서 퇴각해 그들을 봉오동으로 끌어 들이며, 그 과정에서 숨어 적을 사살하는 저격수와 결국 맞붙게 됐을 때의 백병전에서 항일대도를 휘두르는 인물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 특이한 봉오동 주변의 지역을 마치 지도처럼 찍어내 보여주며 그 능선과 협곡을 오르내리며 벌이는 전투 장면들은, 그것이 독립군이 일제에 맞서 거둔 성취라는 걸 빼놓고 봐도 충분히 흥미롭다. 하지만 유해진이 “반일감정보다”라고 표현했어도, 지금의 대중들에게 이 감정을 빼놓고 영화를 보기는 어려울 게다. 영화 속에서 독립군들이 외치는 “대한독립만세!”에서 ‘독립’의 의미가 지금 상황과 겹쳐져 ‘경제 독립’으로 들리는 건 그래서다.

유해진의 말처럼 꼭 “반일감정”만으로 이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거기에는 충분한 액션 서사가 주는 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치밀어 오르는 ‘반일감정’을 억누를 필요도 없을 게다. <봉오동전투>를 통해 보이듯 독립군들의 그런 숭고한 희생들이 있어 지금 대등하게 경제 전쟁을 벌이는 우리가 있는 것이니.(사진:영화'봉오동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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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사제복 입은 슈퍼히어로 과한 건 득일까 실일까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사자>는 개봉 첫 주에 1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적은 수치는 아니지만 여름 블록버스터 시즌을 겨냥한 텐트폴 영화로서 그렇다고 많은 수치도 아니다. 같은 날 개봉한 <엑시트>는 벌써 290만 관객을 넘기고 300만 관객을 앞두고 있다.

 

<사자>가 <엑시트>만큼의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먼저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장르적 색깔이 뒤로 갈수록 애매한 지점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엑시트>도 재난에 가족드라마, 코미디가 뒤섞여 있지만 그 균형이 꽤 괜찮다. 하지만 <사자>는 오컬트 장르와 슈퍼히어로물을 섞어 높았지만 어딘지 과한 느낌이 있다.

 

아마도 <사자>를 보려는 관객들은 이 작품이 <검은사제들> 같은 오컬트 장르일 거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격투기 챔피언 용후(박서준)라는 캐릭터가 바티칸에서 온 구마사제 안신부(안성기)와 함께 구마의식을 하는 장면에 이르면 이 영화는 순간 <아이언 피스트> 같은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실체를 드러낸다.

 

<검은사제들>의 구마의식이 액션이 아니라 오컬트 장르가 주는 오싹한 악령들과의 영적인 대결이었던 걸 떠올려보면, <사자>는 오히려 액션이 전면에 등장한다. 실제로 이 영화의 장르 구분을 보면 미스터리, 액션, 판타지, 공포가 혼재되어 있다. 그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영화가 어느 순간 톤을 넘어 과한 판타지로 넘어가는 지점이 되면 현실감을 잃어버리는 단점이 생겨난다.

 

용후가 점점 자신의 특별한 힘을 알아가고 키워가는 동안, 안신부가 잡으려 하는 악을 퍼뜨리는 검은 주교 지신(우도환)의 힘도 덩달아 커져간다. 그래서 결국은 이 거대한 두 힘이 맞붙게 되는데, 그 장면은 영락없는 ‘철권’ 같은 액션으로 채워진다. 인간의 모습을 뛰어넘는 괴물로 변신한 지신과 완벽한 슈퍼히어로의 한 판 액션.

 

영화의 과한 설정을 그나마 누그러뜨리고 끝까지 이어가는 힘은 배우들에게서 나온다. 김주환 감독의 전작에서도 함께 했던 박서준은 그 바르고 조금은 둔감한 모습으로 이 영화가 오컬트의 공포로 빠져드는 걸 막아준다. 보기에도 섬뜩한 악령들의 모습 앞에서도 “그게 뭐?”라고 할 법한 무감한 반응은 관객을 충분히 안심시켜주는 면이 있다. 그래서 영화가 오컬트에서 액션으로 넘어가게 해주는 건 전적으로 박서준의 안정적인 그 표정연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너무 과해 현실성을 넘어서는 상황과 설정들을 끝내 끌어당겨 땅바닥에 붙여 놓는 안성기의 안정적인 연기가 더해졌다. 실로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툭툭 농담을 던지는 생활연기(?)를 선보이는 안성기의 존재는 <사자>가 가진 약점들을 상당부분 누그러뜨린 중요한 요인이 됐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다. 퇴마사와 격투기 선수를 붙인 캐릭터는 흥미로울 수 있었지만, 어째서 반전이 있는 이야기에 공을 들이기보다 액션 볼거리로 나갔을까. <사자>는 엔딩에 사제로 돌아올 용후의 이야기가 또 이어질 거라는 여운을 남겨 놨다. 혹여나 후편으로 올 것이라면 좀 더 이야기를 치밀하게 꾸려나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화려한 볼거리는 물론 여름 블록버스터에 어울리는 것이긴 하지만.(사진:영화'사자')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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