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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에서 배종옥과 박진희, 그리고 한효주까지

이윤기 감독의 카메라는 늘 여자와 그녀의 일상을 따라간다. 그것이 여자의 섬세한 감정을 포착해 켜켜이 쌓아놓는 것으로 영화적인 성취를 이루어내는 감독의 능력 때문인지, 아니면 감독이 다룬 영화의 이야기가 여자 주인공들의 감정변화를 따라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이윤기 감독은 지금까지 찍은 영화 세 편에서 모두 여자 주인공들의 섬세한 감정선을 잘 잡아냈고, 그것이 성공적이었다는 점이다. 그 여자 주인공들의 계보는 ‘여자 정혜’의 김지수에서, ‘러브 토크’의 배종옥과 박진희로 이어져 이번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 한효주로 이어진다.

그의 카메라에 잡히면 여성 캐릭터들은 전에 보지 못했던 혹은 숨겨져 있던 독특한 페르소나를 보여준다. ‘여자 정혜’에서 그전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김지수의 페르소나가 생겨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신비로운 식물’ 혹은 ‘깨질 듯 투명하고 아름다운 유리조각’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극중 여자 정혜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는 반짝거림과 동시에 외로움, 따뜻함을 숨겨놓은 차가움 같은 외면과 내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긴장감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윤기의 카메라와 연출력 때문이다. 그의 카메라는 늘 주인공 옆에서 서성댄다. ‘여자 정혜’는 영화 전체를 핸드 핼드 카메라로 찍어 고정된 화면을 볼 수가 없다. 이 서성대는 시선이 관객들로 하여금 정혜라는 여자의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들여다보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그 불안하지만 친근한 시선에 관객의 시선이 맞춰지는 순간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 일상적인 소소함을 지루할 정도로 잡아내는 이윤기의 연출력은 영화 속 캐릭터인 여자 정혜의 내면은 물론이고 심지어 연기자 김지수 속에 존재하는 여자 정혜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윤기라는 감독이 연출한 ‘여자 정혜’라는 접신의 영화를 통해 김지수라는 연기자를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해외영화제 수상과 국내 언론들의 호평 등, ‘여자 정혜’가 얻은 뜻밖의 성과는 이윤기 감독에게 어떤 변화를 요구했을까. 한 인물 주변에서 배회하던 카메라는 ‘러브 토크’로 와서는 굳건히 땅에 정착한다. 이것은 핸드 핼드 카메라가 갖는 단편영화 혹은 작가주의 영화적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대신 카메라는 장르영화처럼 더 세련되게 움직이며 인물들을 포착한다(특히 자동차의 움직임과 그 속의 인물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발견이라고 할 정도로 세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전작의 흐름을 그대로 타고 있는데 그것은 그 시선 속에 역시 배종옥과 박진희라는 여성 연기자들의 감정선을 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이들과 이들 주변의 남자친구 혹은 연인들에 대한 ‘러브 토크’로 이루어져 있지만 감독은 이 두 여자의 심리와 감정의 부딪힘 같은 것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여자 정혜’가 개인의 아픔과 상처를 좀 폐쇄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다면, ‘러브 토크’는 대화하는 두 여자를 통해 그 상처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다시 이윤기 감독은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 다시 예전의 서성이는 카메라로 돌아간다. 그 카메라 속으로 들어온 인물은 한효주다. 우리에게는 윤석호 PD의 ‘봄의 왈츠’라는 드라마 속에서의 박은영이란 인물로 익숙한 한효주는 이 영화를 통해 자신 속에 숨겨진 아픈 영혼과 접신한다. 한효주는 어느 날 우연히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하룻밤동안 죽어 가는 한 남자의 딸 역할을 하게 되는 한 여자, 보경을 연기한다. ‘여자 정혜’가 폐쇄적인 상황에 놓인 한 여자의 아픔을 그려냈다면 ‘아주 특별한 손님’의 보경은 그 아픔과 화해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따라서 보경을 연기한 한효주의 페르소나는 좀더 적극적이고 솔직하다.

아쉽게도 이윤기 감독의 영화는 대중적으로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고 저예산 영화의 성공작 정도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영화 속에 등장했던 여자 주인공들이 모두 성공적인 행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 정혜’로 데뷔한 김지수는 ‘가을로’에서 그 돋보이는 연기를 보여주었고, ‘러브 토크’에서의 박진희는 드라마 ‘돌아와요 순애씨’를 통해 섹시 발랄한 캐릭터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이번 영화의 여주인공을 맡은 한효주는 또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인물 주변의 일상들을 섬세하게 잡아내는 것으로 그 인물의 감정을 통해 영화를 끌어가는 이윤기 감독의 영화는 전체적으로 화면의 움직임이 적고, 파격적인 이야기가 별로 없어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기존 장르 영화적 관성에 싫증을 느끼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독특한 여행을 제공해줄 지도 모른다. 새벽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문득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 여자의 마음에 알 수 없는 슬픔의 공감을 가질 지도 모른다. 거기서 우리는 한효주가 가진 감성의 속살을 살짝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Posted by 더키앙

시대장소는 달라도 우리를 매료시키는 멘토들

요즘은 선생님, 스승이란 말 이외에 ‘멘토’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다. 그것은 선생님이나 스승이란 말이 ‘먼저 나신 분’ 혹은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의 의미를 갖는 반면, ‘멘토’는 친구이자 선생님, 상담자, 때로는 부모 같은 포괄적인 위치를 점하면서, 무언가를 가르치기보다는 ‘지혜와 신뢰로 인생을 이끌어주는 사람’이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단지 연장자란 의미도 아니고 학교에서 쓰이는 선생님의 의미 이상의 것이 들어 있기에 ‘멘토’는 보다 친근하며, 보다 삶에 밀착된 지혜를 가르쳐준다. 이러한 스승보다 더 가까워진 멘토는 영화나 TV 속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하고 있다.

이 시대의 멘토, 백윤식
무언가를 배우고 싶지만 그것은 금지된 어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는 너무나 절실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찾아가는 멘토가 있다. 바로 백윤식이다. ‘파랑새는 있다’와 ‘서울의 달’에서 새롭게 주목받은 이 배우는 낮고 진중한 목소리로 밉지 않은 사기꾼 역할을 해내며 제 2의 전성기를 맞았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준 백윤식은 ‘범죄의 재구성’으로 과거 멘토 자리를 다시 꿰어찬다. 그는 사기꾼 역할을 맡았지만 사기꾼들로 득시글대는 영화 속에서 단연 한수 위의 모습을 보여주며 묘한 멘토의 냄새를 풍겼다(호칭마저도 김 선생이다).

그 후 그는 ‘싸움의 기술’에서 병태에게 싸움을 가르쳐주는 은둔 고수로 등장한다. 제목에서 보면 그가 단지 싸움의 기술만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은둔 고수는 병태에게 인생을 가르친다. 사실 병태가 더욱 이 고수에게 빠져드는 건 사실 부재하기까지 한 아버지의 존재를 거기서 찾아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백윤식은 또 한번 멘토 기질을 제대로 발휘한 셈이다. 그 후 그는 이제 자연스럽게 이 시대 멘토 자리를 차지한다. 영화가 있고, 멘토가 등장한다면 바로 백윤식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진다. ‘천하장사 마돈나’의 백윤식은 씨름감독으로 등장하지만 실상 씨름은 별로 가르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작전지시가 화장실에서 이루어질 정도로 이 엉뚱한 씨름감독은 마돈나가 되기 위해 천하장사대회에 나가려는 오동구의 든든한 멘토 역할을 해준다.

아무래도 그가 맡은 가장 빛나는 멘토 역할은 ‘타짜’의 평경장 역할일 것이다. 그는 우스꽝스럽고 장난끼 많은 도박꾼처럼 보이나 사실 그는 도박이란 중독적 세계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깨달은 현인에 가깝다. 우리네 삶의 축소판이 도박판이라는 지점에서 공감을 불러낸 이 영화 속에서 평경장은 바로 그 도박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는 멘토이다. 그가 고니에게 가르친 것은 단지 도박의 기술만이 아니다. 그는 살아가는 법과 살아남는 법을 가르친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백윤식은 확실히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호감을 살만하다. 그 가르침이 단지 기술이 아닌 인생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황진이를 키워낸 멘토, 백무
드라마 ‘황진이’는 과거로 거슬로 올라가는 우회적 방법으로 이 시대의 멘토를 보여준다. 그 시대의 운명의 틀 속에서 금지된 것을 넘어서는 방법을 인물들이 하나씩 황진이에게 가르쳐줌으로써 현대여성들의 마음 속에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 인물들은 황진이의 마음 속에 들어왔다가 하나씩 사랑과 상처를 남기고 감으로써 황진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인간의 길’에 진한 깨달음을 남긴다.

그 첫 번째 멘토는 바로 죽은 은호이다. 친구처럼 연인처럼 지내왔지만 도무지 현실적으로는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을 깨닫게 해준 은호는 황진이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한 인물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 은호의 자리를 차지할 새로운 인물들이 준비하고 있다. 김정한(김재원 분)이 지금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나 이것은 또 어떤 인물로 바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황진이의 진짜 멘토는 바로 백무(김영애 분)이다.

백무는 황진이를 예인으로 키워내기 위해 심지어 자신의 경쟁자인 매향의 수제자로 보내는 것도 마다치 않는다. 때론 자신을 적으로 세우고 자신을 넘어보라며 황진이를 도발하는 백무의 모습은 어찌 보면 더 강한 자식을 키워내기 위해 벼랑 아래로 새끼를 밀어내는 사자의 그것과 닮았다. 그녀는 때론 악의 구렁텅이에 황진이를 몰아넣는 악마처럼도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마치 부모 같은 안타까운 마음과 자애로움이 숨겨져 있다.

헐리우드에서 찾아낸 워킹우먼들의 멘토
악마처럼 보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지혜 같은 걸 깨닫게 해주는 인물을 우리는 저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도 발견한다. 바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미란다(메릴 스트립분)가 그 멘토이다. 촌닭 같은 앤드리아에게 자신이 하는 이 패션 일이 우스꽝스럽고 의미 없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미란다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넌 니가 꽤나 유식한 줄 알겠지만, 실상은 니가 뭘 입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어.” 미란다는 앤드리아가 입고 있는 옷의 색이 수많은 브랜드와 상점을 거쳐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단 한 번의 멘트로 그녀의 사고방식을 뒤집어놓는 것이다.

미란다는 앤드리아에게는 악마 같은 존재지만 그걸 통해 앤드리아는 일과 성취에 대한 값진 교훈을 얻는다. 미란다는 앤드리아의 양면성(욕망과 함께 지켜내고 싶은 순수)을 거침없이 공격한다. 자신의 성공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지기까지도 버리는 그녀에게서 앤드리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되지만 거기에 대해 미란다는 이렇게 말한다. “웃기지마. 누구나 다 이런 삶을 원해.” 이 말은 앤드리아뿐만 아니라 여기 이 땅의 워킹우먼들에게도 꽂히는 말이었을 것이다.

백윤식 같은 금지된 것의 멘토이든,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현재를 말해주는 백무같은 멘토이든, 저 바다 건너온 미란다 같은 멘토이든, 그들은 모두 이 시대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멘토들이다. 그들이 우리의 마음을 잡아끄는 이유는 과거적 의미의 스승들보다 친근하고, 보다 솔직하며, 핵심을 찌르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불안함 속에서 질문을 해대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가르치지 않으면서도 알게 해주는 이 시대의 멘토들이다.

Posted by 더키앙

달라진 방송환경과 붕괴되는 아나운서라는 직종

그들은 연예인인가, 아나운서인가. 혹은 아나운서 출신의 연예인인가, 혹은 연예인인 아나운서인가. 최근 들어 끊이지 않는 아나운서의 정체성 논란은 마치 겉으로 보기엔 아나운서 자신들만의 문제처럼 보인다. 대부분 아나운서들의 연예활동(물론 그 영역을 어디까지 봐야할지 알 수 없지만)에 대해 그것이 적절하냐 아니냐에서 논란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신력이라는 도덕적인 잣대만을 아나운서들에게 들이대는 이러한 접근방식으로는 지금 상황의 해결책을 제시하진 못한다. 사실 이 문제의 핵심은 아나운서들의 문제라기보다는 달라진 방송환경의 탓이 크기 때문이다.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달라진 것
먼저 아나운서의 위치에 있어 과거와 비교해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달라진 것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아나운서를 뉴스진행자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그 활동영역을 터무니없이 축소시킨 착각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아나운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쇼 프로그램에도 나왔고, 교양프로그램에도 나왔으며, 오락 프로그램에도 나왔다. 오래도록 ‘가요무대’를 진행했던 김동건 아나운서, 오랜 세월 ‘아침마당’을 이끌어온 이상벽 아나운서, ‘명랑운동회’로 유명한 변웅전 아나운서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아나운서의 연예오락 프로그램 출연은 최근에 있었던 일이 아니고 이미 과거부터 죽 진행되어 왔던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달라진 것이 있다. 진행자로서의 아나운서가 프로그램에 미치는 영향력이 좁아졌다는 점이다. 아나운서는 이제 프로그램 전체를 장악하고 조정하는 역할보다는 프로그램의 한 부분으로서 기능한다. 심지어는 진행자가 아닌 출연자로서 프로그램에 나오기도 한다. 이 현상은 마치 아나운서들의 활동영역이 더 넓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더 많은 분야에 투입되고 그 분야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그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이것은 아나운서가 특정 분야에 전문적인 진행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나운서들은 여기저기에서 등장하지만 그들의 이미지가 과거 김동건이나 이상벽, 변웅전 만큼 명료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일관된 이미지 구축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퓨전 프로그램으로 비롯된 정체성의 혼란
그들이 전문 진행자가 될 수 없는 환경을 제공한 것은 달라진 프로그램의 정체성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은 프로그램들이 융복합을 통해 다양한 퓨전의 양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느낌표’는 연예오락 프로그램 같지만, 다분히 교양 프로그램의 성격을 갖고 있고 ‘비타민’은 교양 프로그램 같지만, 다분히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상상 플러스’의 ‘올드 앤 뉴’나 ‘말달리자’, ‘스펀지’, ‘도전 골든벨’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교양과 오락의 중간 지점에 방점을 찍고 어느 순간에는 오락쪽으로 어느 순간에는 교양쪽으로 손을 뻗는다.

이러한 인포테인먼트 경향의 프로그램들이 야기한 것은 아나운서의 연예인화이며, 동시에 연예인들의 아나운서화이다. 이 중간지대는 이제 치열한 아나운서와 연예인들의 각축장이 된다. 그러면서 생겨나는 것은 아나운서가 가진 이미지의 혼란이다. 과거 전문화된 아나운서들이 특유의 공신력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장악했던 것에 비교하면 지금의 아나운서들은 연예인과 동격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과거 김동건 아나운서가 ‘가요무대’를 진행하던 모습과, 노현정 아나운서가 ‘올드 앤 뉴’를 진행하는 모습을 비교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연예인화된 아나운서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방송사들은 분명 이렇게 달라진 방송환경에 연예인과 같이 끼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끼가 있는 아나운서를 필요로 한다. 엄청난 경쟁률이 말해주듯 이들 아나운서들은 말 그대로 팔방미인이다.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외모와 지성과 교양을 두루두루 갖춘 이들은 이렇게 달라진 방송환경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해야 한다. 시청자들에게 믿음을 주는 공신력 있는 아나운서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 같은 아나운서로 갈 것인가.

그 한 가운데 놓여진 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인기를 끌고는 일찌감치 줄에서 내려온 아나운서가 바로 노현정이다. 노현정은 과감하게도 저 연예오락 프로그램이라는 공신력을 잡아먹는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 연예인 같은 인기를 끌면서도, 끝끝내 아나운서의 줄을 놓지 않고 동시에 뉴스 프로그램도 진행한 아나운서다. 방송사는 그가 연예인이든 아나운서든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인물을 최대한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내보낼 의무(?)가 있으므로, 스타 골든벨에 유사한 방식으로 노현정을 출연시켰다. 노현정의 줄타기는 점점 더 위험해졌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인기는 더 높아갔다. 최정점에서 줄을 내려온 노현정은 시청자들을 위해서나 그녀를 위해서나 잘된 일이었다.

프리랜서 아나운서, 어떻게 봐야 하나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행운아인 것은 아니다. 이미 공신력의 선을 넘어 연예인화 되어버린 아나운서들은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아나운서의 생명이 공신력에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방송사에 소속되어 아나운서로서 계속 있어야할 명분을 무색하게 만든다. 아나운서는 급격한 인기를 얻지 못하더라도 공신력을 바탕으로 좀더 오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연예인은 그 생명력이 더 짧아질 수밖에 없다. 강수정 아나운서나 임성민 아나운서의 프리 선언은 그들이 이제 아나운서의 길보다는 연예인의 길로 들어섰다는 걸 말해준다. 따라서 이들을 아나운서로 부르기에는 어색한 감이 있다. 성경환 문화방송 아나운서국장의 말대로 그들은 ‘방송인’이라는 어정쩡한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 더 어울린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건 이들의 전직 아나운서라는 꼬리표는 그들의 이미지로서 연예인이 되어도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착각에 빠져들기 쉽다. 쇼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출연하는 그들을 보며 “어 아나운서가 이젠 연예인 다 됐구만”하는 오해를 하게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변화의 바람을 보고 아나운서의 길을 선택한 후배 아나운서들이다. 그들은 달라진 방송환경에 아나운서도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양한 시도를 추구한다. 문화방송 이정민, 한국방송 김경란, SBS 김지연 아나운서의 남성잡지 모델 출연이나, SBS 김주희 아나운서의 미스 유니버스대회 참가 등은 이렇게 달라진 아나운서들의 인식을 말해준다.

떨어지는 공신력, 생존경쟁의 시작
이것은 또한 아나운서들의 생존경쟁이 시작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나운서’는 누가 어떤 일을 하든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닌 ‘아나운서’라는 이름으로 싸잡아 말이 나오는 직종이다. 한 아나운서의 행동이 전체 아나운서의 위상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이것은 심지어 전직 아나운서로서 현재는 연예인의 길을 걷는 이들에 의해서도 그러하다. 이로써 원하든 원치 않든 이미 아나운서들의 공신력은 떨어지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몇몇 뉴스 프로그램에 남은 아나운서들을 제외하고는 이제 연예인들과 똑같이 아나운서들도 생존경쟁을 해야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쇼 진행자가 되기도 하고, 교양 프로 진행자가 되기도 하며 때론 연예인이 되기도 하는 모습에서 아나운서의 길이 넓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거꾸로 아나운서라는 본래의 직업이 점차 붕괴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개그맨이나 가수가 프로그램 진행자가 되고, 아나운서가 연예인이 되는 상황은, 아나운서만의 고유영역이 가진 공신력이라는 힘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나운서들은 이제 ‘좀더 넓어져 보이는 길 위에서 점점 좁아지는 자신의 입지’라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점점 아나운서들의 선택을 강요하는 방송환경, 기회처럼도 보이고 위기처럼도 보이는 이 달라진 방송환경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Posted by 더키앙

김래원표 액션 드라마,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말 그대로 딱 정해진 공식을 걸으며 조금치의 곁길을 넘보지 않는 전형적인 장르영화다. 과거에 엄청나게 악명 높았던, 그래서 감옥에 가야했던, 그리고 감옥에서 후회하고 나와서는 ‘술 마시지 않고, 싸우지 않고, 울지 않겠다’며 바보처럼 행세해야 했던, 그러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는 현실 속에서 다시 과거의 그 길을 걸어가야 했던 한 사나이의 이야기. 이 정도면 영화 ‘해바라기’에 대한 대충의 설명은 끝이다.

하지만 그런 뻔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눈물을 흘리거나, 어떤 뭉클함을 받았다면 그것은 오로지 김래원의 몫이다. 이 영화에서 김래원은 정말 김래원표의 드라마와 김래원표의 액션을 섞어 공식적인 신파 속에서 어떤 반짝거림을 발견하게 만든다.

감옥에서 나와 옛 동네로 돌아온 오태식을 연기하는 김래원의 모습에서는 노틀담의 꼽추가 떠오른다. 엄청난 괴력과 악마성을 그 속에 품고 있으나 그로 인해 주변사람들이 더 이상 상처받는 걸 원치 않는 내면. 자신 속으로 틀어박혀 누가 때리기라도 하면 그 속을 들킬까 더 움츠러드는 몸. 맞는 것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죗값이나 되는 듯 무덤덤해지는 얼굴. 그것들은 저 노틀담의 꼽추의 비극적인 존재를 닮았다.

김래원의 눈빛은 늘 초조하게 상대방의 시선을 바라보지 못하고 몸짓 또한 잔뜩 상처 입은 짐승 마냥 위축되어 있다. 그가 왜 그런 상태를 보여주는지 영화가 설명하기도 전에 우리는 그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슬픔에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그저 동물적인 울림이지만 그것만으로 영화는 관객들을 그에게 이입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제 김래원이 사회에서 받는 굴욕과 아픔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며 마지막 숨겨졌던 괴물의 분노가 드러나는 그 순간까지 관객의 마음 속에서 감정은 켜켜이 쌓여간다.

영화는 특별히 오태식이라는 괴물의 탄생과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평범한 인간이 되려하는 오태식이라는 괴물을 다시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자가 조판수라는 두목이라는 것이다. ‘부동산 활극’이라 불리는 ‘짝패’, ‘비열한 거리’의 조폭들처럼 조판수 역시 바로 그 재개발에 뛰어든 작자다. 보통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밀어버리고 자신들의 건물을 올려 이권사업에 뛰어드는 그들이 최소한 오태식이란 괴물을 다시 불러낸 장본인이다.

‘해바라기 식당’과 그 식당 주변에 심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불도저에 사라져버린 해바라기들은 이 영화의 제목이 발원한 곳이기도 하고, 또한 영화가 말하려는 소박한 주제(사실 이 영화는 주제의식보다는 장르적 재미에 치중한다)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화 속의 해바라기들은 단지 그런 배경만이 아니다. 바로 김래원과 그의 엄마를 자청하는 덕자씨(김해숙 분), 그리고 그녀의 딸인 희주(허이재 분)가 바로 해바라기들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해바라기들을 짓밟아버린 그들에게 오태식이 괴물로 돌아오는 장면은 설득력을 얻는다.

폭발적인 라스트신에서의 김래원의 모습은 따라서 그간 숨겨온 악마성이 드러나는 장면이지만, 또한 관객들이 마음 속에 쌓아온 감정이 터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불길을 뒤로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야차처럼 걸어가며 주먹을 휘두르는 장면에서 우리는 또 한번 보게 된다. 노틀담의 꼽추. 그 비극적인 몸을 가진 존재를.

김래원은 광기와 감성의 양면을 적절히 가진 배우다. 어떨 때는 한없이 소년 같다가도(청춘, ...ing, 어린 신부) 어느 순간에는 악마 같은 눈빛을 뿜어낸다(미스터 소크라테스). 이런 감성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 ‘해바라기’의 오태식이란 인물이다. 김래원은 소박한 일상이 어색하기만 한 상처받은 짐승이 작은 행복을 찾았을 때 보여주는 순진무구한 얼굴(심지어는 바보 같은)을 보여주면서도 그 이면의 야수성을 연기한다. 아마도 김래원은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으며, <투사부일체>의 각본을 쓴 강석범 감독이 찾던 바로 그 인물이었을 것이다. 두 작품이 보여준 가족애를 찾는 드라마성과 액션물이 모두 가능한 그 인물.

다소 장르 관습적인 장면들의 과다와, 신파적 구도, 몰입을 방해하는 장르의 혼선 등이 눈에 거슬리지만 이 영화는 김래원의 그 굵직한 연기를 통해 액션 너머의 드라마성과 드라마 이상의 강렬한 액션을 보여준다. 언뜻 보이는 김래원의 쓸쓸한 얼굴 속에서는 심지어 ‘희망노트’에 작은 소망을 적어가며 살아가는 소박한 우리네 서민들의 신산함마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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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트라우마를 찾아 나선 멜로들

2006년 가을을 시작으로 우리네 멜로는 한 가지 흥미로운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에서 슬쩍 그 감성을 내보이더니, ‘가을로’에서는 얼굴을 드러냈고, 이제 ‘그해 여름’에 와서는 그것을 완성해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멜로드라마가 사회적인 문제와 만나는 지점, 멜로라는 개인적인 사건이 사회라는 거대담론 속에서 파괴되는 지점, 아픔을 안고 있는 현재가 그 아픔의 진원지인 과거를 쫓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멜로 영화들은 왜 그 사회적인 문제를 혹은 그 아팠던 시대를 찾아가고 있는 것일까.

당신을 울린 것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고 이별하고 아파하는 기본적인 멜로의 틀은 부단히도 실험을 거듭했다. 눈물을 빼기 위한 최루성 멜로를 그려냈던 우리 식의 신파들이 비판에 직면했을 때, 우리에게 일본식의 멜로드라마는 그 자체로 참신함을 주었다. ‘러브레터’로 대변되는 이 일본식 멜로드라마는 이른바 ‘가면을 쓴 멜로’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일본식 정서에 부합하는 ‘감정 숨기기’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토로식의 신파 멜로에 식상해진 관객들에게는 세련된 멜로로 보여졌다. 물론 최루성 멜로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또 한 갈래가 헐리우드식의 로맨틱 코미디이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눈물보다는 웃음에 방점을 찍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들 멜로드라마들은 사회극과의 퓨전을 통해 전혀 새로운 형식을 도출해내고 있다. ‘우행시’에서 보여주었던 신파와 사회극 사이에서의 줄타기는 ‘가을로’에 와서는 절제된 멜로드라마와 사회극 사이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 와서는 다시 신파와 사회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우행시’에서의 실험을 좀더 멜로로 완성시킨다. 사회적인 아픔과 개인적인 아픔이 교차되면서 발생한 것은 눈물의 층위가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멜로드라마 속에서 눈물을 흘리다가 갑자기 시대의 아픔 같은 것을 공유하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

사회는 그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엮어 가는 사랑의 특징은 그것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인해 장벽을 맞이한다는 데 있다. ‘우행시’에서 그것은 가난과 사형제도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고, ‘가을로’에서 그것은 재난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해 여름’은 이제 60년대 말 사회적 상황을 그 장벽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은 사랑하지만 사회는 그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는다(이것도 역시 넓게 보면 신파의 한 틀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자 관객들이 가지는 감정은 단순한 슬픔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데서 오는 눈물 속으로 울컥 치솟아 오르는 무언가를 느낀다. 바로 분노이다. 분노의 감정과 슬픔이 교차하면서 멜로가 주는 눈물의 강도는 높아진다. 특히 시대적 아픔을 함께 살아왔던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아팠던 과거를 쫓는다
영화는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 아팠던 시간으로의 동행을 시작한다. 현재의 나는 과거 그 시간 속에서 잠시 잊고자했던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낸다. ‘우행시’에서의 과거가 달동네와 가난 같은 것에 있었다면, ‘가을로’는 구체적인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이것은 단지 삼풍백화점뿐이 아니다. 당대 있었던 각종 재난사건들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를 총체적으로 상징한다)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또한 ‘그해 여름’에 와서는 간첩사건과 학생운동이 치열했던 60대 말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시대적 아픔은 그 자체로 눈물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영화가 일단 시대상황을 살짝 보인 후에 그것을 더욱 극적으로 하는 방법은 최대한 시대적 상황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우행시’는 보다 신파쪽에 무게를 둠으로써 이런 방식을 채택하지 않지만, ‘가을로’와 ‘그해 여름’은 바로 이런 ‘가리는 방식’으로 멜로를 극대화시킨다. ‘가을로’가 백화점 붕괴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장면이 잠깐 나온 연후에 바로 로드무비 형식으로 그 사건을 빠져나와 아픔을 얘기하는 방식을 채택한 반면, ‘그해 여름’에 와서는 첫사랑이라는 이야기로 흘러가다가 시대적 아픔이라는 장벽을 맞닥뜨리게 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렇게 해서 두 영화는 모두 무거운 사회극이라는 외피를 벗고 멜로의 옷을 입는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감정 선을 따라가는 멜로 영화의 특성상 이 영화들 내내 지속되는 감정의 힘은 바로 그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돌아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이 영화들이 과거(혹은 현재도 지속되는 과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현재에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알게 모르게 깊이 각인된 시대적 트라우마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누구도 닦아주지 않았던 그 아픔을 누군가 끄집어내 주었을 때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감정에 젖게 된다.

아픔을 겪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트라우마에 대한 강한 거부감은 멜로라는 외피를 입었을 때는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그 느슨함 속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상처를 다시 보면서 눈물 흘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들 영화들이 취하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멜로적인 접근(사회문제의 개인화)은 비판의 소지가 있지만, 또한 그것은 최소한 외면했던 트라우마를 마주보게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기능을 하기도 한다. 문득 돌아보면 쏟아질 것만 같은 눈물에,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점점 표정 없는 얼굴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게 이 영화들은 잠깐 돌아보라고 말한다. 그해 여름의 아픔이 지워버린 아름다운 추억까지 다시 돌아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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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적 감수성과 드라마의 만남

‘풀 하우스’, ‘궁’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만화와 드라마와의 공생 관계는 이제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올드 보이’, ‘타짜’, ‘아파트’, ‘다세포소녀’, ‘데스 노트’ 등의 성공은 만화가 가진 상상력의 힘과 탄탄한 드라마성, 그리고 캐릭터에다가 그 자체로서 영상화가 가능한 비주얼의 힘이 더해져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원작 만화의 매니아들이라면 이러한 작품들이 원작만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화를 보지 못한 대부분의 시청자, 혹은 관객들은 영화, 드라마를 통해 그 존재를 알게 되고 만화를 찾아보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런 작품들의 성공이 단순히 만화가 가진 그런 장점들 때문만일까.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에게 만화적 감수성이 하나의 장르적 틀로서 자리잡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원작 만화를 드라마화 한 게 아니지만, 만화만큼 재미있는 ‘환상의 커플’의 성공이 그 단초를 제공해준다.

더 이상 부정적 의미가 아닌, ‘만화 같은 이야기’
과거 드라마 작가들이나 영화 감독, 시나리오 작가들에게는 조금 난감한 말이 있다. 그것은 ‘만화 같은 이야기’라는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에 대한 과도한 엄숙주의와 진지함이 배제하려 했던 이 말은 이제는 제작자나 기획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발굴해야할 그 어떤 의미가 되었다.

과거 그들은 만화보다는 소설에서 그 모티브를 찾아왔던 것이 사실이며 이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만화와 소설의 달라진 위상이다. 독자를 찾지 못하던 문단 중심의 소설들은 최근 독자를 찾아 나서면서 만화적인 가벼운 감성들이 무거운 주제로 엮어지는 실험적인 시도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만화의 상황은 정반대다. 가벼운 만화의 특성은 이제 진지함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만화의 진화와 소설의 독자 찾기는 어떤 접점을 만들어내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만화 같다’는 말은 부정적 의미가 아닌 긍정적 의미로 작용한다. 이제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든가, 완성도가 떨어진다든가 하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상상력과 캐릭터가 독특하며, 이야기 진행이 유쾌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진지성이 있는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만화 같은 드라마, ‘환상의 커플’
그런 면에서 ‘환상의 커플’은 정말 ‘만화 같은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만화 같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싸가지 귀족녀, 안나 조의 일거수 일투족과 그녀의 “맘에 안 들어”라는 말 한 마디에 확확 바뀌는 화면 구성은 의도된 만화적 설정들이다.

기억상실로 인해 나상실(이름 역시 만화적이다)이 되고 장철수의 집에서 살아간다는 설정 자체도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다. 살짝 정신이 나간 강자나 빌리 박의 옆에서 나름 모사를 꾸미는 공실장 역시 현실에서 약간은 허공으로 들린 인물들이다. 이들의 연기는 과장되어 있고 대사는 말풍선만 달면 그대로 만화가 될 정도이다.

이 드라마가 선택한 코믹이란 장르는 이러한 만화적 설정들을 더 잘 공감하게 만드는 장치다. 우리는 그 대책 없는 유쾌함 속에 개연성이라든지, 진정성 같은 복잡한 생각들을 접어놓고 드라마에 빠지게 된다. 마치 잠깐 만화를 볼 때 그 만화적 재미에 푹 빠져드는 것처럼.

진지한 트렌디 드라마가 더 만화 같다
‘환상의 커플’은 그러므로 각각의 에피소드가 갖는 허구적인 놀이를 하면서 그 놀이 이면의 어떤 이야기를 포착하는 드라마다.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만화 같지만 그 만화적 전개 속에는 진짜 하려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말이다. 이 최악의 커플이 ‘환상의 커플’이라는 반어법으로 읽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다툼과 부딪침이 아닌 그 이면에서 생기는 사랑의 감정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아마도 기존 트렌디 드라마들이 하는 진지한 척 하는 태도가 지겨워진 것 같다. 드라마 속의 사랑이라고 하면 무언가 운명적이고 비극적이며 진지한 것이라는 태도가 갖는 상투성이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때론 그런 트렌디 드라마가 더 만화 같다(과거의 부정적 의미로서의)고 생각되는 건, 그만큼 그들이 수많은 드라마를 보면서 더 이상 드라마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데 있다. 드라마는 이제 하나의 게임이며 현실에서 잠깐 벗어나고픈 편안한 환상이기도 하다.

‘환상의 커플’은 이러한 만화적 편안함과 유쾌함을 안겨주었다.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들과 그들의 상황들, 그런 장면들을 역시 만화적 배치로 맛을 살린 연출은 누구나 한번 보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재미를 유발한다. 한예슬을 스타덤에 올린 것은 기대 이상 보여준 그녀의 호연 때문이지만, 또한 이 드라마만이 갖는 만화적 캐릭터가 그녀에게 잘 어울렸던 탓도 있다. 이 드라마로써 우리의 주말 밤은 상큼 발랄 유쾌해졌다. 굳이 만화방에 가지 않고도 채널 하나만 돌리면 그 안에 만화보다 더 재미있는 드라마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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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 삼국지 정착이 가져온 개그맨의 어려움

‘개그 콘서트’의 간판 프로그램, ‘마빡이’는 그 설정이 단순하다. 그저 몇몇 개그맨들이 차례로 무대에 나와 이마를 치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다. 특별한 스토리도 없다. 있는 스토리라고는 고작 ‘그 이마를 치는 동작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에 대한 항변 정도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가진 웃음의 파괴력은 크다. 그 공감의 기저에는 복잡다단한 우리네 삶에 대한 어려움을 단순화시키는 명쾌함이 자리잡고 있으며, 자학적 동작이 가진 우스꽝스런 모습을 통해 자신이 겪고 있던 힘겨움을 웃음으로 털어 버리게 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러한 현실에 공감을 느낄 이들이 있다. 바로 개그맨 자신들이다.

정착 단계에 들어간 공개 개그 프로그램
‘개그콘서트’로 촉발된 국내 개그 프로그램들의 변화는 이제 방송 3사가 모두 같은 색깔의 옷을 입음으로써 그 형식이 이 시대의 대세임을 증명했다. , 스탠딩 개그, 무한정 투입되는 아이디어, 새로운 얼굴들, 끊임없는 경쟁체제... 이 파고를 넘어 이제 이러한 형식의 개그 프로그램은 정착단계에 들어선 것 같다. KBS ‘개그콘서트’에 도전장을 내밀며 등장한 SBS의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 양대 산맥으로 가르던 개그전쟁에 뒤늦게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MBC의 ‘개그야’가 등장해 ‘개그 삼국지’의 안정적인 형세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공개 방송류의 개그 프로그램들의 끝없는 경쟁와 아이디어 산출이 가져온 것은 시청률 상승과 함께, 개그맨의 단명이다. 이런 류의 프로그램들은 한 마디로 엄청난 개그의 인해전술을 방불케 한다. 양이 많아지면 그만큼 주의력은 흩어지게 마련.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뜬 개그맨들은 하나둘 그 아이디어 전쟁에서 밀려나 새로운 분야(방송진행,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을 보라!)로 떠날 수밖에 없다. 이들 공개 개그 프로그램들의 성공은 어찌 보면 개그맨들의 살을 깎는 경쟁과 대전을 통해 이룬 것이다.

짧은 개그만큼 짧아지는 개그맨의 수명
‘개그 삼국지’가 전성기를 맞은 것은 이제 공개 개그 프로그램이 하나의 시스템을 온전히 갖추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 시스템은 우리가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기 힘든 이 사회의 경쟁 시스템과 유사하다. 제작자들에 의해 걸러진 개그가 바로 TV에 담기던 과거 가족 경영식의 개그시대는 지났다. 한번 방송사에 소속되면 평생직장이 보장되던 요순시절은 갔다. 이제 그들은 밀폐된 세트를 빠져나와 무대 위에 올려지고 그 즉시 관객들에게 판정을 받는다.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면 그들은 자동 퇴출 된다. 편집에 의해 TV에 담기지 조차 못하는 것이다. 개그는 독해졌고 처절해졌다. 짧은 시간 내에 관객을 사로잡아야 하는 그들의 개그는 분명 촌철살인의 번뜩임과 아이디어로 충만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만큼 웃음의 파장은 짧아졌다. 그들은 그 짧은 웃음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러한 경쟁 시스템 속에서 부속화된 개그맨들은 스스로를 처절한 개그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편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그맨들은 스스로를 한없이 무너뜨렸다. 갈갈이는 무를 갈았고, 옥동자는 바보짓을 했으며, 세바스찬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먹었다. 그렇게 생존하려 했지만 지금 그들의 형편이 나아졌을까. 여전히 갈갈이는 괴상한 복장의 옷을 입고 나와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옥동자는 마빡이로 등장해 시종일관 자신의 이마를 때리며, 세바스찬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전쟁 속에서 처절하게 생존하거나 퇴출 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시스템 밖으로 나온 개그맨들은 나을까
이러한 시스템에서 벗어난 개그맨들은 버라이어티쇼, 토크쇼 같은 예능프로그램으로 편입되었다. 몇몇 개그맨들은 그 프로그램의 MC로서 자리잡았으나 게스트도 아니고 MC도 아닌 장기출연자들(그들은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고정출연자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의 상황은 저 시스템 속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프리랜서의 어려움은 그것이 안정적이지 않으며, 자칫 소속 밖에서 섭외가 안 들어오는 고립의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데 있다.

또한 이들 버라이어티쇼나 토크쇼 자체가 가진 ‘출연자 중심의 방송’ 특성상 개그맨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기가 쉽지 않다. 그들이 부여받은 임무는 출연자를 띄워주면서 쇼를 재밌게 만들라는 것이다. 이 상황은 ‘무너지기 개그’의 기본 전제를 깔아준다. 초기 상상플러스 고정출연자들의 ‘바보놀음(?)’이나, 각종 짝짓기 프로그램에서 개그맨들의 무너지기 설정은 바로 거기서 비롯된다. 유재석의 성공은 바로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프로그램의 특성과 자신의 개그스타일이 잘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이것은 진화에 진화를 거쳐 ‘무한도전’까지 오게 되는데 이 상황이 되면 이제는 시청자와 출연자 사이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누가 더 심하게 무너지며, 심지어 굴욕을 느끼는가’의 재미를 추구한다.

이렇게 점점 제 살을 깎아야 타인을 웃길 수 있는 상황에 몰리는 개그맨들에게, 그들 보다 더 웃기는 가수, 영화배우, 탤런트들의 출연은 심지어 위기의식까지 느끼게 만든다. 쇼 프로그램의 특성이 그들 출연자에게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개그맨들은 스스로의 입지를 좁혀 가는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 좁혀진 입지 속에서 저 시스템 밖으로 나와 쇼 프로그램에 편입된 개그맨들은 똑같은 시스템에 직면한다. 자신에게 오는 짧은 순간 순간의 촌철살인의 순발력이 없다면 역시 마찬가지의 편집이란 칼에 난자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차마 쳐다보기 민망한 처절함
가끔 예능프로그램을 보면서 너무나 보기가 껄끄러워 고개를 돌리곤 하는 것은 그 처절함을 순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개그맨들은 슬프다. 무너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나, 그것이 여러 갈래길 중 하나가 아닌 오직 한 가지 길일 때 비극이 발생한다. ‘개그콘서트’와 ‘웃음을 찾는 사람들’ 그리고 ‘개그야’의 정착은 프로그램 제작자나 방송사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나, 개그맨들에게 더 많은 어려움을 예고한다. 개그 코너와 개그 프로그램은 남아도 개그맨은 남지 않는 시스템 속에서, 그들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시스템이 강화되면 개인들의 자유는 줄어들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개그맨들은 그 어느 정치인들보다, 경제인들보다, 의사보다, 더 존경받을 만하다(물론 가끔 개그맨들을 능가하는 정치인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마빡이의 고단함이 마치 개그맨들을 위한 퍼포먼스처럼 느껴지는 요즘의 개그계에, 그네들의 건전한 살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처절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개그맨들을 안정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이 요구된다. 그것은 또한 신인 개그맨의 발굴보다 이미 발굴된 개그맨의 보다 효과적인 활용이 경제적이라는 측면에서도 방송사에 결국 유리한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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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주몽'의 연장 논란에 대하여

50%대 최고의 시청률을 바라보고 있는 MBC 창사특집드라마, ‘주몽’이 방송연장을 놓고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MBC측은 일찌감치 연장발표를 해놓고 제작진들과 출연진들을 설득하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최완규 작가의 연장불가 발언이 불거져 나왔고 정형수 작가 단독체제로의 결론이 도출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몽 역을 맡은 송일국이 거부의사를 들고 나왔다. 뉴스에 의하면 MBC 부사장이 송일국을 직접 만나 설득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이번 상황은 MBC측의 성급한 결정과 발표에 먼저 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잘 되는 드라마의 연장방영에 쉽게 동조를 얻을 수 있으리라 판단한 MBC측은 만만찮은 저항에 직면한 셈이다.

연장방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시청자
일방적인 연장방영이 가져오는 폐해는 제작진과 출연진은 물론이고 시청자들까지 그 파장이 크다. 제작진들과 출연진들은 우리네 드라마 제작현실의 특성상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계속 강행군을 해야하는 부담이 있다. 실제로 송일국은 쉴 틈 없는 촬영으로 인해 이미 심신이 피폐한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최완규 작가의 연장불가 이유에서도 드러났듯이 이들 제작진과 출연진들은 이미 세워진 차기 프로젝트의 진행에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게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시청자들에게 보다 밀도 높은 드라마의 완결성을 제공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총 제작비 300억 원대에 60회나 되는 이 드라마는 기획하면서 분명 나름대로의 60회 분량의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85회로 늘려진다고 해서 늘어나는 횟수만큼의 새로운 스토리가 추가될 것으로는 기대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 51회를 맞고 있는 ‘주몽’이 걸어온 길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현재 주몽은 전체적 완결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에피소드 중심의 스토리 진행을 하고있다. 굳이 그 사례를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고 최근의 것만 끄집어내도 그 증거는 쉽게 드러난다. 드라마 ‘주몽’은 갑자기 소서노가 보낸 비밀지도로 인해 한 회가 온전히 궁에 들어가 예소야를 만나는 에피소드로 흘러갔다. 소서노가 가진 비밀지도에 대한 아무런 복선이 없었다는 점과 굳이 어머니와 아내를 구하러 들어간 주몽이 그냥 혼자 돌아오는 점은 이 드라마가 앞으로도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는 걸 정확히 말해준다.

60회에 못한 완성도, 85회라고 가능할까
이러한 질질 끄는 스토리 진행을 볼 때, ‘주몽’의 연장방영은 아무런 명분을 주지 못한다. 이것이 명분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현재 ‘주몽’의 고구려 건국 상황이, 지금 방영된 51회 같은 내용이 아닌, 본래 60회 분량에서의 51회 내용처럼(물론 그런 것들이 사전에 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긴박하고 숨가쁘게 돌아갈 때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본래의 목적대로의 60회 이야기를 다 끝내고도 더 할 이야기가 남았다는 것으로 연장은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MBC 부사장이 말하는 것처럼 드라마의 완성도를 위한 연장으로 보기엔 어려움이 많다. 오히려 60회 분량에 완성도를 채워 넣지 못한(혹은 그걸 방조한) 자신들의 잘못을 시청자들에게 전가하는 측면이 강하다.

문제는 이러한 연장방영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주몽’은 그 이외의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데 있다. 현재 51회까지 방영한 상황의 ‘주몽’이 60회에 끝나게 되면 남은 9회 안에 고구려 건국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지금까지 봐와서 알겠지만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드라마의 전개상 급격한 결론은 오히려 완성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주몽’이 처한 딜레마이다. 연장으로 가자니 무리가 따르고 종전대로 끝내자니 전개가 어려워진 것이다.

주몽의 딜레마가 말해주는 것
이 딜레마가 말해주는 건 여러 가지다. 먼저 그간 ‘주몽’이 시청률에 기대어 방만한 태도를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시청률이 30%를 넘어서면서 벌써부터 ‘주몽’은 연장을 생각하고 있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이런 상황에 직면할 수 있을까. 또한 미봉책이나마 연장을 생각해야 드라마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상황으로 볼 때, 이 드라마의 시청률이 드라마의 완성도를 말해주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전체적 흐름을 타고 가는 완성도 위주의 드라마가 아닌 에피소드 중심의 드라마를 애초부터 생각했다면 왜 시즌제 드라마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물론 시즌제 드라마라는 것이 드라마의 성공과 함께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생각은 지금에나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지금에라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될까. 그나마 매력 있는 캐릭터에 훌륭한 소재, 게다가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가능한 이 드라마를 시즌 드라마로 할 수는 없는 걸까. 많은 문제점들을 보강한 ‘주몽 시즌2’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건 ‘주몽’이란 좋은 소재가 이런 식으로 묻혀지고 끝나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Posted by 더키앙

‘누나’, ‘환상의 커플’, ‘눈의 여왕’의 여성들

요즘 드라마를 보면 여성 캐릭터들의 변신이 눈에 띈다. 그 중 주목을 받는 캐릭터는 이른바 ‘싸가지 귀족녀’들이다. 도대체 돈 걱정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이들은 온갖 명품들을 마치 아바타 놀이하듯 줄줄이 입고 나와, 돈 자랑을 해댄다. 게다가 그녀들은 주변인물들을 하인 다루듯 하며 뭐든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해결하려는 싸가지를 보인다. 재미있는 건 이 현실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분노마저 일으킬 캐릭터들이 TV속으로 들어오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도 그들을 꿈꾼다
MBC 주말연속극 ‘누나’의 승주(송윤아 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전형적인 귀족의 삶을 살았다. 온갖 명품들로 치장된 옷을 입고 리조트 사업을 하는 아버지와 함께 공식행사에 돌아가신 어머니 역할을 해내는 그녀에게 두려움이란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작은 아버지, 작은 엄마를 마치 하녀처럼 대하면서도 당당했다.

한편‘환상의 커플’의 안나조(한예슬 분)는 기억상실을 당하기 전까지 뭐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다. 오죽 했으면 그녀의 입에 붙은 말이 “꼬라지하고는”과 “맘에 안 들어”일까. 그녀의 한 마디에 그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그녀를 위해 바뀌었다.

어마어마한 부를 가진 집안에서 태어난,‘눈의 여왕’의 김보라(성유리 분) 역시 도도함을 지나쳐 싸가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하인처럼 고순자(장정희 분)와 그녀의 딸 박득남(정지안 분)을 대한다. 자기 몰래 득남이 자기 명품 스카프를 했다고 그 자리에서 가위로 잘라버린다. 하지만 이런 그녀들의 싸가지 없는 행동들에 대해 어느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왜? 부자니까.

사실 누군가 욕을 한다 해도 명품을 입고 싶고 좋은 차를 타고 싶고 좋은 집에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살고 싶은 건 누구에게나 있는 욕망이 아닌가. 이 싸가지는 없지만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캐릭터에 잠시 감정이입을 하면서 그 욕망을 대리충족하는 것이 무에 이상하다고 할 것인가.

신데렐라 벗어나기
중요한 것은 과거 트렌디 드라마에서 단골악역으로 등장했던 이 캐릭터들이 이제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트렌디 드라마에서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평범한 여성들이 왕자 같은 남자들을 만났다면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것은 이제 시청자들이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너무나 순진한 발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인 사람들은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는 사회 속에서, 부가 그렇게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타난 왕자님에 의해 얻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오히려 세습되는 것이며, 변할 수 없는 운명의 벽처럼 쉽게 편입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런 인식 속에서 TV 드라마는 어떤 방식으로 여성들의 욕구를 풀어주고 또한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까. 그것은 평범한 캐릭터의 신데렐라 되기가 아니라 거꾸로 부자들의 보통사람 되기가 될 것이다.

부자들의 보통사람 되기
삶에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하던 그녀들은 어떤 계기를 만나게 된다. ‘누나’의 승주는 졸지에 가난이라는 낯선 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거기서 그녀를 지켜주는 평범한 남자 건우(김성수 분)를 만난다. ‘환상의 커플’의 안나 조는 기억상실을 통해 장철수(오지호 분)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된다. ‘눈의 여왕’에서 김보라는 어린 시절 만났던 한태웅(현빈 분)을 만나면서 얼음의 궁전 속에서 지내며 얼음처럼 차가워졌던 마음을 녹이게 된다.

이 그녀들의 하향곡선은 시청자들의 TV 속 환상과 TV 밖 현실 간의 미묘한 타협으로 인하여 공감의 틀로 만들어진다. 드라마를 통해 현실에는 도저히 꿈꿀 수 없는 귀족적 삶을 꿈꾸면서도 또한 TV를 끄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안도감을 줄 수 있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란 인식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들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것은 화려한 세계일지 모르나 이들 드라마가 하려는 얘기는 그러한 부가 인간의 행복에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부자 길들이기 혹은 현실
부자들이 이렇게 부의 세계에서 현실로 내려올 때, 발생하는 것은 그네들보다 우리가 현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이다. 그들이 먹어보지 않았던 자장면과 막걸리에 대해서, 그들이 살아보지 않았던 단칸방에 대해서, 그들이 경험해보지 않은 저잣거리의 재미에 대해서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이들 문제 있는 캐릭터들에게 바로 이 작은 현실의 행복감을 보여주고 변화를 촉구한다.

하지만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현실은 가난에 다름 아니다. 현실은 더 팍팍하고 각박하다. 드라마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지만 사실 이 사회는 부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싸가지 귀족녀들의 보통사람 되기가 갖고 있는 재미는 저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정 반대편에 서 있는 또 다른 환타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우리가 저네들보다 더 잘 알고 있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이란 우리 스스로의 위안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시적 환상이라도 해도 그 위안이 그토록 간절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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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시대에 이은 또 다른 사랑의 해석, ‘썸데이’

‘연애시대’로 명품 드라마 시대를 연 옐로우 필름의 ‘썸데이’는 다시 ‘사랑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들고 시청자를 찾았다. 어찌 보면 이것은 흔하디 흔한 질문, 수많은 드라마에서 다루었던 주제가 아니던가. 만일 그래서 “또 사랑타령인가”하고 넌덜머리를 치는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를 볼 자격이 있다. ‘썸데이’는 자극적이고 관습화된 사랑 이야기로 가득한 드라마들의 먹구름 속에 한 조각 떨어지는 햇살과 같은 드라마다.

사랑 따윈 없어! - 야마구치 하나
드라마는 시작부터 ‘사랑 따윈 없다!’는 화두를 던진다. 사랑은 호르몬의 장난이며 모든 이에게 상처와 배반감만을 안겨준다는 야마구치 하나(배두나 분). ‘멜로의 해부학자’란 별명이 말해주듯 그녀의 사랑에 대한 불신이 이 드라마의 전체를 장악하는 힘이다. 이것은 아마도 드라마를 시청하는 시청자들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야마구치 하나가 앞으로 걸어갈 길과, 그 길 위에서 만날 사람들과, 그들과의 사랑, 이별 등이 어찌 남의 일 같을까.

그러니 이 드라마의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야마구치 하나가 믿지 못하던 사랑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결론이 중요하지 않다. 모든 길의 끝이 정해져 있지만, 그 길을 가는 여정이 우리네 인생이듯이,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그 도정에 있지 끝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멜로의 해부학자’는 과연 어떤 감정의 화학변화 속에 빠져들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이 이 드라마라는 유기체가 중추로 세우고 있는 뼈대이다.

그 사랑이 궁금하다 - 고진표
그 사랑이라는 실험실을 잔뜩 호기심을 갖고 기웃거리는 남자가 고진표(김민준 분)다. 그의 호기심은 자신이 좋아하던 만화가, 야마구치 하나가 만화를 그리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그가 그녀의 만화의 광팬이란 점은 ‘사랑 따윈 없다’는 그 사랑관에 스스로도 동조하고 있었다는 걸 미루어 짐작케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녀가 만화를 그리지 않게 됐다는 사실은 그에게도 어떤 변화를 요구한다.

최소한 그녀에게 도움을 주어 계속 만화를 그리게 하는 어떤 것. 그 간섭에서부터 그의 사랑은 시작된다. 그 자신이 그녀의 사랑관을 바꾸고 싶게 되는 것이다. 그의 직업이 의사, 그것도 정신과 의사라는 점은 그가 가진 캐릭터의 양면성을 잘 말해준다.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자신의 직업이기도 하지만, 그 일과 사람에 대한 관심은 종종 그 경계가 모호해지기 마련이다. 그는 마치 의사처럼 하나에게 접근하지만, 쉽게 그 경계를 넘어서 버리며 그런 자신을 또한 그 스스로 알아차린다.

사람, 혹은 사랑을 찾는다 - 임석만
고진표가 그 경계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이라면 임석만은 거침없이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이다. 이 드라마의 큰 줄기는 야마구치 하나가 한국에 와서 구미코의 행방을 쫓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임석만의 직업은 드라마의 또 한 축이 된다. 그는 흥신소라고는 하나 사람을 찾아주는 일을 한다. 사람을 찾는 일은 때론 사랑을 찾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 사람이 과거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상처를 갖고 있는 경우에는.

그는 터전 없이 떠돌아다니는 인생이다. 그는 늘 길 위에 서 있고 그 길에서 사람들을 찾는다. 임석만이라는 캐릭터의 삶은 자못 상징적이다. 인생이란 길을 걸으며 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의미를 찾는 건 우리네 삶을 그대로 상징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그의 상황은 그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 인해 사랑을 찾아다녀야 하는 인간의 운명적 순환을 예감케 한다. 그리고 그 길 위로 야마구치 하나가 동행하게 된다.

삼각, 사각, 시한부, 출생의 비밀 따윈 버려! - 윤해영
이 길 위에 또 한 명의 인물이 서성댄다. 그 인물은 어찌 보면 야마구치 하나와 유사하다. 사랑을 주제로 만화를 그리는(물론 사랑은 없다는 주제이지만) 야마구치 하나와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 PD인 윤해영은 사랑을 주제로 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하나가 ‘사랑은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윤해영은 ‘사랑 이야기’가 갖는 상투성을 혐오한다. 삼각관계, 사각관계, 시한부 인생, 출생의 비밀 따윈 집어치라는 그녀의 말 속엔 저 하나가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 존재한다.

사랑하는 여자를 쫓아다니며 병원에 입원까지 한 사장이 ‘연애는 본래 그런 것’이라며 그녀에게 말할 때, 그녀는 그 상투성에 고개를 젓는다. 그런 그녀에게 위안을 주는 인물은 고진표다. ‘사랑은 없다’는 쿨한 모습으로 상투성을 벗어 던진 그의 몸에 밴 호기심과 배려는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그녀는 상투적인 사랑보다는 쿨한 배려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석만의 출연은 새로운 변화를 예고한다. 애니메이션이든 그녀의 삶이든 분석적인 사랑의 접근을 해오던 그녀가 맞닥뜨리는 것은 살아있는 사랑의 이야기다.

실재하는 운명적 사랑의 이야기
고진표라는 캐릭터를 빼놓고,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모두 사랑을 믿지 않는다. 이러한 캐릭터들은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를 잘 대변한다. 드라마는 상투적인 사랑 이야기의 혐오에서 비롯되고 그 사랑의 실체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이끄는 것은 영길과 구미코의 운명적 사랑이다. 야마구치 하나는 어느 날 갑자기 텅 빈 골목처럼 스산한 마음에 들려오는 빗자루 소리를 듣게되고 그 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새벽에 그 운명적 사랑과 조우한다.

길을 떠나는 네 사람. 사랑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은 결국 이 운명적 사랑 이야기의 커다란 강물 위에 흘러가고 녹아버린다. 드라마 상으로 그것이 단지 이야기 속이 아닌 실재라는 측면에서 이 드라마는 관습적이며 자극적으로만 그려져 왔던 사랑이라는 소재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맨살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자극 없는 정제된 화면과 스토리를 끌어가는 것이 아닌 감정의 흐름을 담담히 밀고 나가는 듯한 연출은 이러한 실험적인 시도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기존의 자극에 길들여진 분이라면 조금은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극이 지겨워진 분이거나, 그 자극으로부터 무언가 정화되길 원하는 분들이라면 이 드라마는 한 사발의 정화수가 기꺼이 되어줄 것이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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