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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사진출처:MBC)

정형돈의 패션 감각은 누가 봐도 꽝이다. 먼저 그 주체할 수 없는 뱃살이 망할(?) 패션의 종결을 선언한다. 그런데 이 패션 꽝의 정형돈이 누가 뭐래도 연예계 패션 리더로 지목하는 지드래곤에게 지적질을 한다. 패션이 영 아닌 것 같다며 그는 자신의 엉망진창 옷차림을 자랑한다. "지드래곤 보고 있나? 이게 패션이다." 이런 도발적인 선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것만이 아니다. ‘무한도전-조정특집’에 출연한 조인성에게 정형돈은 몸매 관리를 조언하는 망언(?)을 일삼는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도발이 의외의 반향을 만들어낸다. 대중들을 정형돈의 이른바 ‘보고 있나’ 지적질에 열광하며 각종 패러디를 쏟아낸다. ‘무한도전-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에서 정형돈과 듀엣을 이뤘던 정재형은 이 정형돈의 역발상 개그를 그대로 패러디해 보여줌으로써 똑같은 반향을 일으켰다. 정형돈의 개그를 그대로 이용해 "유희열은 나부랭이, 김동률은 조무래기, 자신은 신"이라고 표현한 정재형은 후에 유희열 팬 페이지에 "유희열 보고 있나..."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도대체 이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무엇이고, 여기에 쏟아지는 대중들의 열광은 또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가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미친 존재감’이라는 단어다. ‘웃기는 것 빼고는 다 잘하는 개그맨’, ‘무존재감’을 캐릭터로 만든 정형돈은 이 역발상을 좀 더 공격적으로 활용한다. 즉 ‘무존재감’을 거꾸로 무기 삼아 존재감 있는 이들을 도발하는 것. 이것은 이 변화된 시대의 요구다. 주연이 중심에 서고 조연들은 그 그늘에 가려지던 과거에서 이제는 조연들도 각각의 미친 존재감으로 주연 이상의 주목을 끄는 시대가 아닌가. 그러니 정형돈의 조금은 과장된 자신감은 웃음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쾌함을 준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감의 소유자들 앞에 당당하게(어찌 보면 무모하게) 자신을 내세우는 모습이 웃음 이상의 공감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정형돈이 보여준 것은 바로 이 미친 존재감의 시대가 요구하는 역발상이다.

미친 존재감은 어떻게 탄생했나
최근 들어 TV나 영화를 보다보면 의외의 발견(?)에 즐거워질 때가 있다. 주연이 아니지만 절로 "어 저 친구 대단한 걸!"하고 감탄사가 나오게 만드는 조연을 보게 될 때다. '넘버3'에서 송강호가 그 유명한 자장면 먹는 장면을 보일 때 그랬고, '왕의 남자'에서 유해진이 육갑이 역할을 진짜 이름에 딱 맞춘 듯 질펀하게 풀어낼 때 그랬다. '방자전'에서 변학도 역할로 방자, 춘향이 혹은 이몽룡보다 더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주고는 '부당거래', '해결사', '시라노 연애조작단'에 연달아 조연으로 출연한 송새벽은 대표적인 씬 스틸러(scene stealer)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씬 스틸러는 '추노'의 성동일이었다. 장혁, 오지호, 한정수 같은 멋진 사내들이 그것도 식스팩을 드러내며 시청자들을 매료시켰지만 그 와중에서도 이 불룩 튀어나온 원 팩(?)에 칫솔질 한 번 안했을 것 같은 누런 이를 하고 머리는 산발한데다가 하는 짓도 영락없는 악당인 성동일에게 우리는 매료되었다. 왜? 그에게서 우리네 민초들의 정서를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드라마 속에서 죽었을 때, 우리는 주연의 죽음 못지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어쩌면 주연보다도 더.

사람들은 그래서 주연도 조연도 아닌 그들만의 왕관을 씌워주었다. 이른바 '미친 존재감'이라는 왕관이다. 기존의 주연과 조연으로 나뉘던 구분은 이로써 '존재감이 있는' 배우와 '존재감이 없는' 배우로 나눠지게 되었다.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그 역할을 해낸다면 이제는 그걸 바라봐주고 인정해주는 대중들이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작금의 달라지고 있는 대중심리이기도 하다. 과거의 대중들은 주목받는 것에만 지나치게 쏠리는 경향이 있었다. 또 내가 가진 것보다는 타인이 가진 떡을 더 크게 보는 심리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중들은 수평적인 시선으로 나와 타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친 존재감'은 바로 이 변화된 대중심리에서 탄생한 것이다.

당신만의 미친 존재감을 찾아라
왜 꼭 1인자만 성공한다고 믿어온 걸까. 과거를 되돌아보면 거기에 늘 주인공에 집착하던 시절을 발견한다. 학교에서도 반장을 해야 하고, 또래들 사이에서는 골목대장이 되어야 하며, 하다못해 연극을 하더라도 꼭 주인공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며, 명문대학을 가지 못하면 주인공이 못되고 낙오되는 것으로 알았던 시절, 심지어 얼굴도 개성보다는 이미 정해진 미적 기준에 맞춰 순위를 매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모두들 주인공만 되려고 안달일밖에.

하지만 어디 세상이 1인자만 존재하는 것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1인자를 받쳐주는 2인자도 필요하고 묵묵히 3인자의 역할을 하는 이들도 소중한 존재들이다. ‘무한도전’에서 1인자인 유재석을 견제하는 2인자 박명수는 호시탐탐 1인자의 자리를 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 자리에 앉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즉 그는 2인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박명수가 1인자보다 더 주목되는 2인자의 역할을 해내는 이유다.

그토록 교육열이 뜨거웠던 시대, 우리는 오로지 주연의 자리만을 원했다. 주연의 자리는 딱 하나 밖에 없는데 전부 주연이 되려고만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았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주연이 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엘리트라고 불리는 주연들에 의해 세상이 움직이는 것처럼 오인되었으니까. 수직적인 사회 체계의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참 많이도 바뀌었다. 사람들은 주연만큼이나 조연들을 주목해주었다. 주연 조연으로 나뉘는 '높고 낮고'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각자의 역할을 바라봐주는 그런 세상. 세상은 그런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맡은 것을 해냄으로써 움직이는 것이었다.

'미친 존재감'을 발견하게 된 대중들은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삶의 가치도 바꿔가고 있다. 즉 우리 사회는 중심에서 주변으로 시선을 넓혀가고 있고, 이미 '만들어진' 삶에서 차츰 '만들어가는' 삶으로 가치가 이동되어 가고 있다. 그러니 '미친 존재감'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저 길거리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무도 없는 새벽에 거리를 청소하시는 분들이나, 한 자리에서 몇 십 년 동안 구두수선을 해가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해오신 분들이나, 시장통 한 구석에서 현재는 힘들어도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런 분들 모두는 이 사회의 '미친 존재감'들이다. 그러니 멀리 볼 것 없이 바로 당신 속에 있는 그 미친 존재감을 찾아야 할 일이다. 그 누구도 갖고 있지 못한 당신만의.

Posted by 더키앙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이런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주인공들은 TV 속에 있었다. 그들은 우리와는 확실히 다른 종족이었고 주인공으로 살아갈 운명을 부여받은 인물들이었다. TV 바깥에서 그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는 그 주인공들을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추종할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틱한 세계는 바로 거기 있었지만 그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정말 특별한 사람들의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 시대는 많이도 바뀌었다. 어제까지 나와 그다지 다른 생활을 했을 것처럼 보이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스타가 되는 시대다. 오디션 프로그램 열풍은 이제 TV 저편과 이편 사이에 그다지 큰 이물감이 없어진 작금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그 곳은 연예인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주인공인 무대다. 그들은 당당하게 저마다 각자 자신이 가진 개성과 기량을 마음껏 뽐내고 경쟁하며 그 과정을 통해 스타가 된다. 백청강이라는 연변 총각이 그 이국땅의 멀고 먼 거리를 돌아 ‘위대한 탄생’이라는 무대의 최종 승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불과 몇 개월 전만해도 누가 알 수 있었을까. 허각이라는 환풍기 수리공이 그 힘겨운 삶 속에서도 노래하며 살아갈 때, 그가 지금의 ‘슈퍼스타’가 될지 누가 알았을까. 5살 때 부모에게 버려져 거리에서 껌을 팔며 살아가다,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된 음악에 빠져들어 검정고시로 중학교까지 나오고 결국 음악 고등학교에 진학해 성악을 배운 후, ‘코리아 갓 탤런트’라는 무대에 올라 저 영국의 폴 포츠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울려버린 최성봉씨 같은 스타는 또 어떻고. 지금 우리 눈앞에는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스타들이 등장하고 있다. 변방에 놓여졌던 이들의 삶을 중심으로 옮겨 놓은 그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리얼 스토리의 시대, 달라진 주인공들
이 시대 문화의 핵심적인 키워드 두 개를 꼽으라면 ‘리얼리티’와 ‘스토리’라고 말할 수 있다. ‘리얼리티’란 물론 완전한 현실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그 진정성이 느껴지는 상황이나 소재를 말한다. 억지로 어떤 의도를 갖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실의 한 부분을 대중들은 더 신뢰한다. ‘1박2일’ 같은 리얼 예능이 종종 다큐멘터리와 혼동되는 것은 바로 이 진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박2일’의 제작진은 리얼 예능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짜여진 대본에 의해 만들어진 웃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상황 속에서 기다림에 의해 발견된 웃음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제 아무리 ‘리얼리티’가 있는 영상이라고 해도 거기에 아무런 맥락이 없다면 대중들에게 감흥을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중요해지는 게 ‘스토리’다. 흔히들 ‘스토리’라면 대본을 떠올리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스토리’는 ‘리얼리티’와 만나서 자연스럽게 발견된 ‘리얼 스토리’를 말한다. 가짜가 아닌 진짜 이야기. 이른바 각본 없는 드라마는 이 시대 문화의 키워드가 되었다.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바로 이 리얼 스토리, 즉 각본 없는 드라마를 갖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을 열광시킨다. 무대에 오르는 경쟁자들은 저마다 자신들만의 스토리를 갖고 있다. 마치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오르는 듯한 백청강의 스토리, 밑바닥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정상을 향해 달리는 허각의 스토리. 그들이 대중들을 매료시키고 결국 그 꿈을 이루게 해준 것은 바로 그들이 가진 스토리의 힘이다. 노래 실력이나 스타성이라면 다른 후보들이 우승을 했을지 모르지만 이 무대는 대중들이 직접 투표해 그들의 스타를 뽑는 자리라는 점에서 그 스토리의 위력은 발휘된다. 그 스토리에는 대중들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금 능력은 떨어져도 그래도 공감하고 함께 가고픈 스토리를 가진 자에 대한 지지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일상화된 매체로 인해, 더 이상 특별한 사람만이 특별한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깨진 데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제 주인공은 대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진 자이다.

자기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라
리얼 스토리의 시대를 잘 읽어보면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지가 드러난다.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하고 추종하는 삶이나, 외부에 의해 주어진 삶을 그저 수용하기만 하는 삶, 그 속에서 자기는 결국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패배감은 자기만의 성공 스토리를 결코 그려낼 수 없다. 또한 주어진 삶을 불행하다며 한탄하거나 좌절한다고 해서 그 스토리는 결코 나아질 수 없다. 즉 자기 삶의 스토리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는 온전한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스토리의 시각으로 보면 현재의 어려운 삶은 극복한 후에 남겨질 영광스런 통과의례로 바라볼 수 있다. 즉 스토리는 현재 상황을 결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해준다. 꿈이나 목표를 버리지 않고 꿋꿋이 버텨낸다면 이 흐름의 끝에 해피엔딩이 기다릴 것이다. 물론 이것은 혼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삶을 타인들과 공감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고 감동적인 스토리라고 해도 그것이 전해지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허각과 백청강이 용기를 내서 무대에 오른 것처럼 우리들도 어느 시점에서는 자신만의 무대에 올라야 한다.

흔히들 허각과 백청강 같은 인물들의 스토리를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기적이라는 표현은 우연적인 사건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기적 같은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스토리가 대중들과 깊은 마음으로 공감하는 그 순간. 이것이 바로 기적이다. 이제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우리 역시 바로 이 기적의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적의 스토리는 또 다른 사람들이 쓸 스토리의 전범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빈 원고지 하나씩을 갖고 태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원고지 위에 저마다 스토리를 써나간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스토리를 따라가지만 누군가는 자기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이 시대가 주목하는 스토리는 후자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가.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하고 노래하기 보다는 이제 스스로의 노래를 찾아 자신만의 원고지에 써보는 건 어떨까. 스토리의 시대는 당신만의 스토리를 기다리고 있다.

 

Posted by 더키앙


'내 마음이 들리니'와 커뮤니케이션

'내 마음이 들리니'(사진출처:MBC)

흔히들 농담 삼아 "회사 일은 참 회의적이야"하고 말하곤 한다. 여기에는 회의에 대한 조직원들의 두 가지 시각이 들어있다. 그 하나는 회사 일에서 회의가 너무 많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회의가 참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농담이지만 그 속에는 뼈가 들어 있다. 본래 회의란 놈이 서로 소통하고 의견을 나누고 아이디어를 모으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 기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정반대의 결과로 흘러가곤 하기 때문이다. 소통은 웬걸? 일방적으로 누군가는 떠들고 나머지는 듣기 일쑤며, 이미 결정된 사안을 가지고 괜스레 확인하고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의견을 묻기가 다반사인데다, 그래서인지 회의를 하고나면 더 심사가 복잡해지는 경우도 많다. 말은 엄청 많이 한 것 같은데, 별로 남는 것도 없고 유쾌하지도 않다면 회의를 해서 무슨 소용일까. 하지만 회사는 어쨌든 같은 뜻을 모아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회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은 정말 중요하다. 제 아무리 능력 있는 인재들이 모여 있다고 해도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는다면 그 조직은 모래알처럼 부서져 내릴 테니까.

드라마와 커뮤니케이션. 어찌 보면 상관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밀접하다.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보면 '드라마는 인물과 인물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다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 인물의 갈등은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혹은 오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갈등이 해소되는 드라마의 결말은 이 커뮤니케이션이 재개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때로는 이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드라마의 소재이자 주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내 마음이 들리니'는 그런 드라마다.

진짜 장애는 누구 갖고 있는 걸까
'내 마음이 들리니'에는 두 개의 인물군이 등장한다. 그 하나는 봉영규(정보석)를 중심으로 있는 인물들이고, 다른 하나는 최진철(송승환)로 대변되는 인물들이다. 봉영규는 정신지체를 갖고 있는 반면, 최진철은 영악할 정도로 두뇌회전이 빠르다. 이들은 삶에 대한 목적 자체도 상반되어 있다. 봉영규는 어린 시절 집을 나간 아들(사실 친아들도 아니다), 봉마루(남궁민)를 찾는 게 소원인 반면, 최진철은 자신의 사업 확장을 통한 욕망의 추구가 삶의 목적이다. 이런 대비는 이 두 사람의 주변인물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봉영규네 집안사람들, 즉 봉우리(황정음)는 아무리 힘들어도 늘 밝고 맑은 소녀이고, 봉영규의 어머니인 황순금(윤여정)은 치매인데다 겉으로 보기엔 괴팍해 보이고 욕쟁이 할머니처럼 보여도 속은 따뜻한 사람이다. 반면 최진철의 아내인 태현숙(이혜영)은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생활하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최진철에게 복수를 꿈꾸는 인물이다. 또 최진철의 정부인 김신애(강문영)는 지독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인 인물로 최진철의 아내인 태현숙을 밀어내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 이 두 인물군은 선과 악, 혹은 동심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상을 대변한다. 이 드라마는 이 두 세계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흥미로운 건 이 두 인물군 중 선을 대표하는 이들이 장애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봉영규는 정신지체이고, 그가 결혼했던 미숙(김여진)은 청각장애를 갖고 있던 인물이다. 또 봉영규의 어머니인 황순금은 치매를 앓는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봉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차동주(김재원)는 사고로 청각을 잃는다. 이들의 중심에 봉우리가 서 있다. 어찌 보면 정상적인 소통을 가로막는 이 장애들은 커뮤니케이션을 어렵게 할 것처럼 보이지만, 봉우리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녀에게 주변인물들의 이런 장애는 그녀로 하여금 말이 아니라 대신 마음을 듣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똑똑한 머리로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지만 속셈은 딴 데 가 있는 최진철과 그 주변인물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과연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보면 누가 진짜 장애를 갖고 있는 걸까.

커뮤니케이션,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내 마음이 들리니'라는 드라마의 제목이 물음표인 것은 이 드라마가 현대인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 질문은 당신은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 마음을 듣고 있는가를 묻는다.

미디어 혁명의 중심부에 서 있는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수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 말들은 미디어가 열어놓은 네트워크를 통해 이러 저리 흘러 다닌다.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다면 그저 컴퓨터를 켜거나 휴대폰을 열기만 하면 된다. 이제 옛날처럼 종이가 꼬깃꼬깃 해질 정도로 꾹꾹 눌러 편지를 쓰고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집어넣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와 얘기하기 위해 굳이 발품을 팔기보다는 스마트폰을 열고 대화를 신청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연 소통하고 있는 걸까. 말의 홍수가 덮어버린 건 그 속에 담겨진 마음이다. 그래서 '내 마음이 들리니'는 오히려 귀를 먹게 하고 어딘지 정신을 놓게 한 캐릭터들을 통해 그 잊고 있던 마음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말하기 편해져서 오히려 전달이 어려워지고, 너무 똑똑해서 진심이 흐려지는 이 아이러니는 우리의 '회의 많은' 회사 생활 또한 되돌아보게 한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아는 사람이라면 회의는 말이 아니라 서로 간의 신뢰나 믿음, 공감대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소통되는 회의는 회의 바깥에서부터 시작된다. 서로가 동료로서 서로를 바라볼 때에야 비로소 말은 그저 말이 아니라 그 속에 마음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끔 회의가 회의적으로 다가올 때라면 이렇게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너는 얼마나 저들의 마음을 듣고 있는가.
(이 글은 현대 모비스 사보에 연재되는 글입니다.)

Posted by 더키앙


'로열 패밀리'로 보는 조직에서의 자기계발

'로열패밀리'(사진출처:MBC)

모든 로열 패밀리들이 다 그런 것인지 어떤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드라마 '로열 패밀리' 속에 등장하는 정가원은 가족이라기보다는 기업에 가깝다. 시어머니인 공순호(김영애) 회장을 위시해, 첫째 며느리 임윤서(전미선), 둘째 며느리 김인숙(염정아), 그리고 셋째 며느리인 양기정(서유정)과 공순호 회장의 딸 조현진(차예련)이 한 자리에 모여 앉으면 그것은 영락없는 중역 회의를 연상시킨다. 대화도 가족 간의 살가운 이야기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JK그룹이 지주회사를 설립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그러기 위해 차기 대통령 감으로 지목되는 국회의원의 안주인을 공략할 계획을 세운다.

정가원의 분위기를 가족보다는 회사로 더 여겨지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공순호 회장의 가족을 대하는 태도다. 그녀는 끊임없이 이 며느리들과 딸을 경쟁 선 상에 올려놓고 상벌을 준다. 결국 후계 구도를 위한 치열한 싸움은 가족의 선조차 넘어버린다. 며느리가 며느리를 감시하기 위해 도청장치를 하고 자신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력자를 끌어들인다. 첫째 며느리 임윤서는 자신의 친정인 구성 그룹을 끌어들이고, 정치인의 딸인 셋째 며느리 양기정은 집안 인맥을 동원해 로비를 벌인다. 공순호 회장의 딸, 조현진은 알게 모르게 공순호 회장의 비호를 받는다. 즉 이 기업형 가족(?)은 모두 저마다의 인맥을 갖고 있다. 단 한 사람, 둘째 며느리 김인숙만 빼고. 인맥이 없는 김인숙은 그래서 로열 패밀리의 일원이 아니다. 이름이 아닌 K로 불리며 살아온 그녀는 남편마저 잃고 나자 금치산자로 내몰려 아들마저 잃게 될 위기에 처한다. 그런데 이 김인숙이라는 여인이 낯설지가 않다. 그녀는 어떻게 이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조금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조직에서 살아남았을까.

그녀가 괴물로 불리는 이유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로열 패밀리를 다루고 있지만 이 드라마가 낯설지 않은 건 왜일까. 잘 보면 알겠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가 늘 회사에서 겪는 그 시스템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로열 패밀리는 우리가 겪는 조직의 다른 이름이고, 그 안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공순호 회장은 그 조직의 수장이며, 그 밑에서 끝없는 경쟁을 통해 생존하는 가족 구성원들은 조직원들이다.
모두가 갖고 있는 인맥이 없어(남편이 죽으면서 그녀의 인맥은 끊긴 것이다), 내쫓길 위기에 몰린 김인숙에게서 '구조조정'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되는 건 실력이 아닌 관계로 돌아가는 우리네 조직의 한 병폐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늘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던 김인숙이 섬뜩한 이빨을 드러내며 싸늘하게 웃기 시작한다. 그녀는 사실 수십 년 간을 조용히 준비해왔던 것. 심지어 괴물처럼 보이는 그녀의 이 와신상담은 그 괴물이란 호칭마저 찬사로 만들어버린다.

그녀는 안에 없는 인맥을 바깥에서 만들어낸다. 자원봉사를 하면서 고위층 사람들과 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해놓은 것이다. 자신이 계속 후원해온 한지훈(지성) 변호사는 거의 무조건적인 로열티를 그녀에게 보내고,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돕는 정가원의 집사인 엄기도(전노민)는 이 집안의 모든 정보들을 그녀가 손아귀에 쥘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그녀는 이 정가원이 굴러가는 시스템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어떤 중대한 결정을 할 때마다 찾는 점쟁이까지 매수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낸다. 내부적인 정보와 외부적인 네트워크, 그리고 충성어린 팀원, 그리고 완벽히 시스템을 이해하는 그녀는 사실상 모든 것이 준비된 조직원이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보이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 태생으로 신분을 계층화하는 그들 속에서 그녀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 바로 그 무섭도록 자기 자신을 준비해온 세월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괴물로 불릴 정도로 속내를 보이지 않은 철저한 준비.

조직에서의 생존, 그래도 괴물은 되지 말자
'로열 패밀리'라는 드라마의 스토리는 조직을 살아가는 일들이라면 대단히 매력적으로 읽힐 것이다. 매일 같이 던져지는 경쟁 시스템 속에서 인맥 하나 없는 이라면 더더욱 김인숙이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다소 허황되더라도 자신의 이야기처럼 여겨질 것이다. 모든 게 네트워크로 움직이는 시스템 속에서 일천한 네트워크를 가진 이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실력은 기본이고, 인맥은 필수다. 아니 인맥도 실력인 세상이다. 그러니 뭐 하나 없는 조직원들은 저마다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조직의 살얼음판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서점가를 둘러보면 작금의 샐러리맨들의 불안감이 어디서 나오고 있는 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각종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나 심리학 서적, 이른바 자기계발 서적들이 베스트셀러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 책만 읽으면 없던 실력이나 인맥이 마구 생겨날 것 같은 기분. 그 책을 쥐는 손끝의 절망감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준비하고 준비하고 또 준비하라! 세상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자기계발 서적의 봇물.

그런데 자기계발이라는 말에는 착각이 들어있다. '자기'라는 단어가 붙어서 마치 스스로를 준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외부의 보이지 않는 강요에 의한 것이란 점에서 그 자발성은 의심된다. 물론 진짜 스스로 자신을 위해 준비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또 그런 의미에서의 자기계발은 긍정적인 것들도 많다. 하지만 집착적으로 어떤 미래의 목적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벌이는 자기 계발은 과도해지면 자칫 자신을 괴물로 만들 수 있다. 조직은 목적을 갖고 있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해 끊임없이 구성원을 독려하고 경쟁시킨다. 하지만 조직원들이 모두 정가원 사람들처럼 괴물이 된 조직은 미래가 없다. 조직의 목적과 개인의 목적이 분명하고, 그 만나는 지점을 찾아내게 해주며 그걸 이루기 위해 준비하게 하는 것. 이것은 개인을 위해서나 조직을 위해서나 모두 필요한 생존의 가치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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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에 목매는 드라마들과 자기 운명 극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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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패'(사진출처:MBC)

자기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출생이다. 그런데 이 출생이 운명을 결정해버린다면 너무나 허무하지 않을까.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른바 '출생의 비밀' 코드를 담은 이야기들이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이목을 붙잡아 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재벌가의 회장쯤 되는 인물이 찾아와 당신이 사실은 자신의 자식이라고 말할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될까. 아주 없진 않겠지만 확률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작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우리네 드라마 세상에만 오면 이 확률은 한없이 커져서 거의 100%에 근접한다. 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어느 정도 리얼리티를 추구한다면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욕망의 불꽃', '웃어라 동해야', '호박꽃 순정', '신기생뎐', '폭풍의 연인', '마이 프린세스', '드림하이', '프레지던트' 같은 현재도 방영중이거나 아니면 최근 방영되었던 드라마들에는 어김없이 출생의 비밀 코드가 들어가 있다. 물론 사극이나 심지어 시트콤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짝패'는 같은 날 양반의 자제와 천민의 자제가 동시에 태어나는데, 양반 자제의 모친이 죽게 되자 천민 자제의 모친이 양반 자제의 유모가 된다. 그 유모가 자신의 아들과 양반 자제를 바꿔치기 하면서 서로 엇갈리는 운명이 펼쳐진다. 시트콤, '몽땅 내 사랑'에도 잃어버린 딸을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는 김원장(김갑수)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출생이 로또가 된 이유, 혈연과 연루된 신분상승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설정이지만 '출생의 비밀' 코드가 점점 드라마 전체에 사용되게 된 것은 이만큼 시청률을 끌어올리는데 좋은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작년 국민드라마의 반열에 올랐던 '제빵왕 김탁구'는 대표적이다. 회장님의 아들이지만 어린 시절 내쳐져 스스로 제빵왕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다뤘다. '자이언트'는 물론 출생의 비밀을 그대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변형된 형태의 이 코드가 등장한다. 즉 어린 시절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성장한 후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 드라마는 가족이 상봉하는 그 지점부터 시청률이 상승곡선을 그렸다. 이처럼 '출생의 비밀' 코드 밑바닥에 깔려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흩어졌던 가족의 만남'이다. 즉 '출생의 비밀' 코드 밑에는 우리네 특유의 혈연의식이 깊게 깔려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 혈연과 함께 깊게 연루되어 있는 것이 신분상승이다. '마이 프린세스' 같은 드라마는 공주병을 가진 이설(김태희)이 사실은 조선 마지막 공주였다는 게 밝혀지고 궁으로 들어와 공주가 되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폭풍의 연인'에서 별녀(최은서)는 우도에서 자라난 장애까지 가진 여자로 서울 부잣집에 얹혀사는 인물로 등장하지만, 사실은 굴지의 재벌기업 회장인 유대권(정보석)의 숨겨진 딸로 밝혀지면서 하루아침에 삶이 바뀌어버린다.

물론 출생의 비밀이라는 소재는 스토리텔링의 역사에서 거의 본연적이다. 유리왕이 아버지 동명성왕을 찾아가는 이야기, 성서에 무수히 등장하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이 스토리의 원형이 우리 유전자 속에 오랜 세월 동안 각인된 것이라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작금의 우후죽순 생겨나는 '출생의 비밀' 코드들은 이것을 그저 인간의 본능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여기에는 현재의 현실과 맞물리는 사회적인 맥락이 읽혀진다. 즉 가족 같은 혈연에 대한 집착, 마치 로또처럼 출생 하나로 인생을 역전시키겠다는 욕망, 그만큼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 이런 것들이 그 속에서는 꿈틀거린다.

'출생의 비밀' 아닌 '성장스토리'를 꿈꿔라
'출생의 비밀' 코드에 가장 핵심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알 수 없는 운명 속에 허우적대고 있지만, 그걸 시청자들은 내려다보고 있다는 그 '신적인 시선'이다. 저들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는 운명. 이 시점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마치 운명을 자신의 손안에 쥔 듯한 권력을 부여한다. '출생의 비밀' 코드는 이처럼 달콤하다. 누구든 전혀 다른 삶을 꿈꾸지 않는 이가 어디 있으랴. 자기 운명이 어느 순간 단번에 바뀌어진다는 그 쾌감은 강력한 판타지다. 하지만 어디 인생이 드라마인가.

최근 들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는 '출생의 비밀' 코드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들이 많은 것은 이 코드가 가진 지나친 삶에 대한 냉소적 시선 때문이다. 결국 태생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될 뿐, 내가 운명을 개척하는 것 따위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패배주의적 시선이 거기에는 담겨져 있다. 왜 아닐까. 작금의 냉혹한 현실은 실제로 태생에서부터 삶이 판가름 나는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왜 바꿀 수 있는 현실을 바꾸려 하지 않고 바꿀 수 없는 것(출생)을 바꾸려 하는 지에 대한 의구심은 남는다. 어찌 보면 이 전해 내려오는 스토리들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라며 교육시켜온 사회 시스템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스토리가 머금고 있는 메시지들, 그것들의 싸움이 그저 스토리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인 변화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작금의 '출생의 비밀' 코드 속에 숨겨진 지배 시스템의 비밀을 바라봐야 될 시점이 아닐까.

드라마에는 '출생의 비밀'이 아닌 '성장스토리'도 있다. 전자가 이미 정해진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후자는 적극적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해가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출생의 비밀'이 수동적인 판타지라면, '성장스토리'는 능동적인 판타지다. 수동적으로 로또 같은 '출생의 비밀'이 내포하는 허황된 인생역전을 꿈꾸기보다는, 어려운 현실에도 스스로 운명을 열어가는 이야기, '성장스토리'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꿈꿔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은 현대 모비스 사보에 연재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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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 능력만 좋으면 뭐해? 마음이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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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사진출처:SBS)

회사로 치면 기술력, 개인으로 치면 능력이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럴까. 능력 있는 그가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는 것이 과연 그에게 이익으로 돌아갈까. '정의'는 이익과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제동장치가 고장 난 기차가, 아무 것도 모르고 철로 일을 하고 있는 인부들 네 명을 향해 돌진한다. 당신은 지금 기차의 노선을 바꿀 수 있는 레버를 손에 쥐고 있다. 그 다른 노선 위에는 한 인부가 일을 하고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네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희생시킬 것인가."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라는 주제의 강의를 이런 예시로 시작한다. 강의실을 가득 메운 학생들 중 대부분이 레버를 당기겠다는데 손을 든다. 그러자 샌델 교수는 되묻는다. "그게 과연 정의로운 일일까. 네 명의 생명만큼 그 한 명의 생명도 소중한 것이 아닐까." 이 첫 강의는 우리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문구로 기억하고 있는 벤담의 공리주의가 가진 허점을 꼬집는다. 강의를 듣다보면 처음엔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전혀 당연시할 일이 아닌 '정의'라는 선택과 판단의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된다. 즉 '정의'라고 하면 어딘지 거대한 일일 것만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매일 매일 숨 쉬고 선택하며 살아가는 일 자체가 '정의'와 연관된 것이라는 걸 샌델 교수는 깨우쳐준다.

작년에 분 이른바 '정의 신드롬'은 샌델 교수의 영향이 컸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정의'라는 단어에 대한 우리네 대중들의 갈증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정의 실종 시대. TV만 켜면 쏟아져 나오는 각종 권력형 비리들. 다수의 행복이라는 지상과제로 당연하다는 듯 짓밟히는 소수들. 멀리 볼 것도 없이 조직생활 속에서도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져가는 '정의'의 편린들을 우리는 거의 매일 보고 있지 않은가. 다만 그 추상명사를 조금 먼 나라 얘기처럼 치부하고 있을 뿐이다. 샌델 교수가 환기하는 것처럼. 그래서 권선징악이라는 다소 식상한 주제들이 과거는 물론이고 지금도 문화 콘텐츠 속에서 맹위를 떨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그런 점에서 보면 드라마 '싸인'은 그 극단에 서 있다. 이 드라마에서는 산 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죽은 자는 진실을 말하니까.

과학기술만으로 과연 충분한가
'싸인'을 보면서 과거 우연한 기회로 만난 국내에서 꽤 권위 있는 법의학자를 떠올렸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체를 통해 사인을 밝혀내는 일은 오히려 쉬워. 진짜 어려운 건 도덕적인 문제야." 그 말은 과거 꽤 빈번하게 벌어졌던 의문사 사건들을 떠올리게 했다. 권력과 민감하게 연결된 그 사안들 앞에서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싸인'의 대결구도를 이루는 윤지훈(박신양)과 이명한(전광렬)은 이 갈등의 두 축처럼 보인다. 학교 분교를 재건축한 듯 보이는 초라한 남부지원의 윤지훈과, 'CSI'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장비와 시설로 무장한 이명한의 부검실은 확실한 대비를 만든다. 몇 백 억을 들여 만든 장비로 사체를 부검하고 사인을 분석하는 이명한은 과학수사의 대명사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학수사만으로 과연 충분할까. 몇 백 억 투자를 정부로부터 받아내기 위해 혹 사체 부검을 쇼처럼 하고 있지는 않은가. '싸인'은 그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UV조명장치가 없어 노래방 조명을 떼다가 사인을 분석하는 윤지훈은 과학수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도덕적인 문제'라는 저 법의학자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인권의 사각지대처럼 여겨져 온 강압수사가 횡행하던 시절, '과학수사'는 모든 걸 투명하게 해줄 것처럼 여겨져 왔지만, 과연 과학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었을까.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법의학의 기본정신인 인권을 다루는 법의학자들의 도덕성이다. 그래서 '싸인'은 'CSI'처럼 쿨해 보이지 않는다. 보험금을 받기 위해 한 가장이 저지른 자살을 '과학적으로' 규명해내는 것보다, 그 가장이 왜 그런 자살까지 시도하면서 가족들을 챙기려 했는지에 더 주목한다. 즉 과학수사만으로는(물론 과학수사는 중요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도덕적인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얘기다.

여전히 기술력과 능력? 심성!
혹자들은 '정의'가, '도덕'이 밥 먹여 주냐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옛날 얘기다. 과거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몰두하던 시절, 기술력은 한 회사의 사활을 좌우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개개인이 가진 능력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되는 덕목이었다. 물론 바로 이 능력이 모여 극대화될 이익이 회사의 목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

물론 이익은 회사의 목적이다. 하지만 이익 창출만을 위한 능력집단으로서의 회사는 미래가 없다. 회사는 이제 소비자들과 비전을 공유해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상품의 사용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상품이 가진 비전의 공유가 되었다. 우리는 상품을 통해 환경을 나누고, 나눔을 나누고, 보다 나은 미래를 나눈다. 따라서 중요해지는 것은 회사의 기술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회사가 가진 심성(?)이다. 그 회사는 어떤 회사인가. 도덕적인가. 미래 가치가 있는가. 이런 점들은 이제 소비자들의 중요한 선택기준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게 어디 회사만의 문제인가. 그 회사를 구성하는 개인들도 회사와 가치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제 개인의 능력만큼 중요해진 것이 그 사람이 가진 도덕적 판단능력이다. 심지어 한 사람의 잘못된 부도덕이 한 회사를 위험하게 만드는 상황을 우리는 종종 보고 있지 않은가. 도덕이니 정의니 하는 것은 우리가 고리타분하게 치부할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기성장은 물론이고 회사 같은 조직의 성장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가치로 다가오고 있다.
(이 글은 현대 모비스 사보에 연재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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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로 보는 여성들의 일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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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사진출처:태원엔터테인먼트)

왜 일과 사랑 사이에서 여성들은 늘 고민해야 할까. 멜로드라마의 단골소재인 이 여성들의 일과 사랑은 최근 들어서 더 많이 드라마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많아지면서 그만큼 늘어난 워킹우먼을 반영하는 것. 2005년도에 방영되었던 '내 이름은 김삼순'의 파티쉐(제빵기술자), 2007년도에 방영된 '커피 프린스 1호점'의 바리스타, 올해 방영되었던 '파스타'의 쉐프 같은 직업을 가진 여자주인공들은 워킹우먼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왜? 거기 자신들이 현재 직장에서 겪고 있는 일이 있고, 그것과 마치 병행할 수 없는 것처럼 치부되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판타지 속에서나마 그 둘을 함께 하고픈 워킹우먼들의 욕망은 이들 드라마 속에서 꿈틀댄다.

그런데 어디 이런 말랑말랑한 감성을 자극하는 직종만일까. 여성들의 일과 사랑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어떤 현장에서든 늘 드라마의 소재가 된다. '아테나'라는 어딘지 하드보일드해 보이는 액션 드라마도 예외는 아니다. 총알이 날아다니고 칼과 도끼가 허공을 갈라놓는 장면 속에서도 여성들의 판타지로서의 일과 사랑은 여전히 드라마의 메인테마다. 거기에는 조각상 같은 멋진 남자들이 즐비하고, 감정이입되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여성캐릭터들이 존재한다. 그러니 이들 사이에 로맨스가 없으랴. 설마.

총칼이 난무하는 일터에서 매력적인 남자를 만났을 때
"이건 규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아테나'의 남자 주인공 이정우(정우성)가 같은 국정원 요원인 윤혜인(수애)에게 사적으로 접근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조직은 원천적으로 사내 연애가 금지되어 있다. 이유는 당연하다. 국가의 일급정보를 다루고 있는 요원들은 최대한 감정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 조직에 효율적이다. 이것은 누군가 납치되거나 했을 때를 가정해보면 분명해진다. 작전에 사적인 감정이 끼어든다는 건 이런 조직에서는 조직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이것은 여전히 기업의 조직관리 속에 스며있는 테일러식 시스템의 잔상이다. 물론 시대가 변해 이제 기업은 조직원들을 하나의 생명체로서 저마다의 창의성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최적화되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효율성이라는 측면을 여전히 버릴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여성 노동력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데 있어서 사내에서 벌어지는 연애나 결혼은 조직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취급되기도 한다. 사내 커플이 되면 여성이 일을 그만두게 되는 상황은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아테나'는 어쩌면 이러한 사회의 조직시스템을, 좀 더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국가비밀조직이라는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어디 기계인가. 조직의 부품처럼 살기에는 뜨거운 피를 가진 존재가 사람이 아닌가. 이정우와 윤혜인 사이에 벌어지는 사랑의 화학작용은 그래서 이 기계적인 조직에 위협을 준다. 윤혜인은 사실 아테나라는 비밀조직의 요원으로 국가대테러조직인 NTS로 잠입한 스파이다. 그러니 이 둘 사이의 관계는 멜로처럼 보이다가도 보이지 않는 스파이들 간의 대결처럼 보이기도 한다. 윤혜인이 이정우에게 접근하는 건 정보를 캐내려는 아테나 조직의 명령 때문이지만, 그 과정에서 윤혜인은 이정우에게 사적 감정으로 흔들린다. 일과 사랑의 부딪침.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과 사랑, 왜 둘 다 가지면 안 돼?
먼저 조직을 되돌아봐야 한다. 과연 일과 사적인 감정을 분리하고 구분하는 조직이 작금의 경제 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사적인 감정은 과연 일의 효율성을 가로막는 방해물일까.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일과 사적 감정을 구분하던 사고방식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기계적으로 바라봤던 시대의 산물이다. 지금은 사적 감정의 만족감이 오히려 일의 창의력으로 이어지는 시대가 아닌가. 가정생활 같은 사적인 생활들의 자잘한 경험들이 조직의 자양분이라 생각하지 않는 그런 조직은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만일 그런 조직에 있다면 조직의 경쟁력을 위해서라도 변화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

회사에 대한 개념은 과거, 모든 일의 1순위에서 이제 2순위로 바뀌어가고 있는 중이다. 우선 먼저 중요한 것이 나이고, 그런 나를 잘 받아주고 인정해주는 조직으로서 회사가 공존하는 것이다. 나와 조직 간의 이 조화로운 공존을 위한 노력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조직의 경쟁력을 위해서도 중요하게 되었다.

가끔 '아테나' 같은 거대 조직 사이에 끼어 있는 사적인 인물들을 볼 때마다, 이것이 마치 과거적인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조직에게 보내는 사적 인물들의 저항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조직이여! 그들의 사랑을 허하라. 그리고 개인들은 절대로 일과 사랑 사이에서 선택하려 들지 마라. 그 하나를 포기할 때, 결국은 다른 하나도 결코 성공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 글은 현대모비스 사보에 연재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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