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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정작 배우지도 못하고, 소처럼 일만 해온 가난한 엄마. 딸만은 다른 삶을 살게 해주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준 엄마. 냉수로 굶주린 배를 채우며 거짓 트림을 하면서 딸에게 밥을 덜어주고, 심지어 욕을 해대는 딸에게도 “나 아니면 누구에게 하소연 하겠냐”며 오히려 감싸주었던 엄마. 엄마는 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새끼, 보고 싶은 내 새끼. 너한테는 참말 미안허지만 나는 니가 내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 니가 허락만 한다믄 나는 계속 계속 너를 내 딸로 낳고 싶다. 아가, 내 새끼야. 그거 아냐?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제일 보람된 것은 너를 낳은 것이다.”

그 엄마에게 딸이 찾아온다. 암에 걸려 남은 마지막 시간을 부여잡고. 떠나기 전 딸은 그때야 엄마라는 존재를 알아채고 이렇게 말한다. “나를 제일 사랑해주는 사람. 내 맘을 제일 잘 아는 사람. 나를 제일 잘 이해해주는 사람. 나를 제일 이쁘다고 하는 사람. 내 얘기를 제일 잘 들어주는 사람. 나를 믿어주는 사람.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돌아가도 반겨줄 사람. 바로 엄마라는 거, 나 이제야 알고 떠나요. 엄마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그리고 엄마보다 앞서간 딸은 엄마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이승을 맴돌며 이런 말을 남긴다. "다음 세상에선 제 딸로 태어나 주세요. 제게 주신 크신 사랑을 되돌려 드릴 방법은 그 길밖에 없습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을 저미는 이 단순한 스토리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것은 <친정엄마와 2박3일>이라는 2009년 상반기 최고의 히트작으로 꼽히는 연극의 한 부분이다. 강부자가 어머니 역을 전미선이 딸 역을 맡아 호연을 펼친 이 연극은, 이 땅의 무수한 엄마들과 딸들(심지어 남성들까지)의 심금을 울렸다. 막 눈물이 와락 쏟아질 것 같은 전미선의 얼굴이 찍혀진 포스터는, 연극을 보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끌어당긴다. 그 표정 하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수많은 말을 우리들에게 건넨다. 그 앞에서 눈물은 무기력할 정도로 흘러내린다. 어째서 그럴까. 눈물은 정말 이다지도 상투적인 어떤 것일까.

또 다른 풍경 하나. 한 해상구조대원이 여행 온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 여자는 남자에게 “당신은 3시 같은 남자”라고 말한다. 뭘 시작하기엔 늦은 거 같고, 뭘 끝내기엔 너무 빠르다는 뜻. 그런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억지로 끌려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게 되고, 마침 쓰나미가 몰아닥친다. 그 사실을 안 '3시 같은 남자'는 그들을 구하러 헬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고, 여자는 구했지만 또 다른 남자를 구하는 도중, 헬기 레펠이 고장이 난다. 한 사람만 올라갈 수 있는 상황. 3시 같은 남자는 시계를 그 남자에게 풀어주며 말한다.  “이거 꼭 좀 전해주이소. 그리고 괜찮아요. 아직 3시 안됐어요!”  3시 같은 남자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바다로 떨어져 죽는다.

1천만 관객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영화 <해운대>의 한 장면이다. 어찌 보면 뻔해 보이는 이 스토리는 그러나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구하는 그 행위와 사랑하는 한 여인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머 같은 유언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며 눈물샘을 자극한다. 시종일관 웃음을 터트리게 했던 영화는 후반부에 와서 쓰나미라는 죽음의 그림자를 세워두고 그 유쾌한 관계를 비극적인 스토리로 바꾼다. 객관적으로 그 스토리 구조를 살펴보면 유치할 정도로 단순하지만, 그렇다고 어쩌랴. 바보처럼 눈물이 쏟아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드라마를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나는 경험을 하고는, “나 왜 이러는지 몰라”하고 자책한 적이 있을 것이다. 눈물은 늘 그렇게 주책없는 구석이 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나, 그저 그런 시시한 유행가에도 쉽게 넘어가는 이 감상적인 놈. 그래서 어떤 눈물은 흘리게 되면 도리어 기분이 나빠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를 운운하지 않아도 눈물은, 우리 마음에 찰랑찰랑 채워지는 감정의 수위를 범람하게 하고 그를 통해 마음을 정화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신파라고 부르는, 늘 뻔한 눈물범벅의 이야기를 보면서 과거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는 어르신들이 계신 것은.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이른바 쿨한 시대다. 눈물 같은 축축함은 이 시대에서는 숨겨져야 할 그 무엇으로 치부된다. 우리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이 실생활에서는 아니다. 우리의 생활을 둘러보면, (물론 그만큼 감동 없는 안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극단의 상황에 처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예외적인 사건으로 인식하는 우리네 삶은 그만큼 안전하다. 눈물의 상황 자체를 구질구질한 것으로 여기는 우리들이 하는 것은 바로 이 타인의 상황을 회피하거나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틀로 매몰되는 것이다. 나와 남의 명확한 구분. 그리고 타인의 불행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명백한 금 긋기. 심지어는 스스로의 불행마저 불행으로 여기지 않으려는 안간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몸부림.

현실에 없는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는 문화 콘텐츠들의 판타지적 속성상, 이 현실에 없는 눈물은 이제 그 콘텐츠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영화관에서 TV 앞에서 연극을 보러 간 극장의 객석에서 콘서트장에서 그 어둠 속에 앉아 비로소 숨기고 숨겨왔던 눈물을 끄집어낸다. 무언가가 눈물샘을 건드리면 이미 수위에 도달해있던 눈물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마치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을 흘린 것에 대해 변명하듯, 그렇게 흘린 눈물의 정당성을 찾아내려 한다. 작품이 너무 감동적이었어. 이런 정당성을 얻는다면 그 눈물은 주책이 아닌 의미를 찾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 정당성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흘린 눈물에 대해 복수하듯, 작품을 저질 신파로 처분한다. 이제 눈물에도 어떤 격을 구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눈물에 격이 어디 있으랴. 그것은 작품을 평가할 때나 그런 것이지, 우리의 눈에서 실제로 떨어지는 눈물에는 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아무리 신파적이고, 식상하고, 그저 그런 시시한 이유라고 해도, 우리가 실제 생활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눈물에는 저마다 진정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현실에서조차 어떤 잣대를 내세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건 쿨한 게 아니라고. 눈물이 나와야 할 때조차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이 시대가 우리에게 음으로 양으로 강요하는 모습이다.

눈물이 버려져야 할 그 무엇이 된 것은, 또 눈물이 구질구질한 인생의 대명사로 치부된 것은 어찌 보면 과도한 긍정론이다. 슬픈데도 웃으라니! 삶이 힘겨운데도 웃으면서 버티라니! 외부에 의해 가해지는 고통을 바라보고 솔직하게 반응하기보다, 그것을 내면화하고 숨기는 것. 우리에게 눈물은 약자의 징표처럼 여겨지는, 따라서 때로는 식상해져버린 상투가 되어버렸다. 모든 이들이 웃고 있거나, 무표정하게 있는 것.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강요받은 것 같은 그 풍경. 저 밑바닥에 분명히 존재하는 눈물을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해온 생활의 훈련. 그래서 이제는 어둠 속에서나 가상의 스토리 속에서나 슬쩍슬쩍 눈물을 찍어내야 하는 얼굴. 그것이 우리네 삶의 얼굴이 아닐까.
(이 칼럼은 Yes24의 문화웹진 나비(nabeeya.yes24.com)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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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더키앙

우리에게 스타란 무엇일까. 젊은 시절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연인이자, 언제나 피곤한 몸을 기댈 수 있는 넉넉한 어깨를 가진 친구 같은 존재일까. 우리와는 다른 별세계에 있으면서 가끔 우리에게 그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꿈의 존재일까. 아니면 도무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우리와는 다른 신적인 아우라를 가진 존재일까. 그저 냉정하게 바라봐 자본주의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만들어낸 신을 대체하는 인간상품의 하나일까.

스타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처럼 극에서 극으로 달린다. 한없이 찬사의 대상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끝없는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한없이 동경의 대상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그곳에는, 또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충격적인 자살 소식과 거의 폭력에 가까운 근거 없는 끔찍한 루머들이 떠다닌다. 스타와 소속사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면 종종 발견되는 노예계약의 징후들은 대중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 신적인 존재가 노예였다니. 신과 노예의 사이. 지금 스타가 서 있는 자리다.

그들은 실제의 삶과 비춰지는 삶이 다르다. 그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콘텐츠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따라서 그 콘텐츠가 캐릭터로 구현해내는 판타지나 가상성은 사실상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들의 실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실제 삶과는 유리되어 있다. 드라마 속에서 누구나 꿈꾸는 신데렐라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속사에 계약되어 하기 싫은 일이라도 웃으면서 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을 수도 있다. 이 실제의 삶과 비춰지는 삶 사이에 혼란이 오게 되면 그 존재는 파탄으로 몰릴 위험이 있다. 자살은 꿈꿔왔던 삶과 현실 삶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스타란 기본적으로 이 극한의 정체성의 혼란과 존재의 괴리감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다.

이렇게 된 것은 스타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통해 물질화된 상품인간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삶과 상품으로서의 삶. 이것은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단지 스타만이 겪는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들은 저마다 집에서는 한 아이의 부모이고, 한 부모의 자식이며, 한 아내의 남편이자, 한 남편의 아내이지만, 집을 나서서 자본의 세상으로 출근하게 되면 연봉 얼마로, 회사 이름으로, 또 직함으로 구획되는 상품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 스타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의 삶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상하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스타에게서 갖는 동경과 동정은 사실상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갖는 감정과 다르지 않다. 스타는 우리에게 그것을 대리하는 존재로 서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타를 꿈꾼다. 그것이 딱히 저 TV 속의 인물들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스타가 되기를 누구나 바란다. 주목받고 싶고,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문제는 그 가치를 평가내리는 기준이 돈으로 수치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질적인 가치가 양적인 가치로 등급 매겨지는 그 지점에 현대인들의 비극이 있다. 질적인 가치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양적 가치가 부여되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주목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양이 질을 담보하는 시대다. 일단 양을 채워라! 그러면 질은 따라올 것이다!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한 희구는 우리의 본능이다. 이미 주목받고 있는 스타들은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드러나지 않는 삶 속에 묻혀 있는 이들은 거꾸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스타를 꿈꾼다. 변신 욕구는 우리의 본능이지만 팍팍한 현실에서 변신은 그다지 용이하지 않고 때론 용납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대체하는 존재로서 스타를 희구하게 된다. 스타에 대한 열광과 현실에 대한 낙담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렇다면 스타를 희구하는 우리네 삶은 늘 그 자리에 머물러 현실을 낙담하면서 변신욕구를 스타를 통해 자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스타와는 다른 배우라는 존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 시대가 낳은 명배우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김명민의 목소리부터 들어보자. “제 이름이 아니라 캐릭터만 쭉 올라오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 작품을 했던 사람이 이 작품을 했다는 게 의심 갈 정도로 캐릭터의 차별화가 확실했으면… 사람들이 제 이름을 제대로 모르고 못 알아봐도 제가 배우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하죠.”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저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아무리 스타라는 딱지를 갖다 줘도 저는 그거 거절하려고 그랬어요. 저는 그냥 배우로 불리고 싶었고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도 ‘저놈은 정말 연기 잘하는 놈’ 이렇게 인정받고 싶은 게 제 꿈이었어요.”

김명민은 이미 스타다. 하지만 그는 왜 그다지도 스타를 거부하고 배우를 고집하는 것일까. 스타와는 달리 배우란 실체이기 때문이다. 김명민이라는 연기자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MBC스페셜'의 타이틀은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에 김명민은 없었다'이다. 아마도 이 표현은 연기자라면 최고의 찬사라고 여겨질 것이다. 작품 속에서 연기자가 배역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이름을 지움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들, 바로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다. 그러니 김명민이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작업은 그 직업이 가질 수 있는 스타로서의 욕망을 덜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온전히 실체로 세워둘 수 있는 배우라는 길을 걸어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한 인간의 존재로 봤을 때, 양적 가치의 세상에서 질적 가치를 고집함으로써 그 존재를 실체로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김명민의 경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이미 스타로서의 삶을 욕망하도록 강요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끝없이 수치로서 환산되는 자신의 양적 가치를 높여나감으로써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새 물질적 욕망으로서 우리 속에 들어와 있다. 이것이 생존이기에 우리는 경쟁을 해야 하고, 누군가 스타가 될 때, 누군가는 낙오되어 그 위를 부러움의 시선으로 올려다봐야 한다. 낙오되면서도 그 시스템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탓하며 오히려 자신을 밟고 성공한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스타라는 존재를 통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교육시켜온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타는 허상이다. 그래서 그 존재는 좀체 변신하려 하지 않는다. 스타로 만들어준 그 신적 이미지를 왜 스스로 부수려 하겠는가. 그들은 스타로 군림하며 가짜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지우는 짐 또한 혹독하다. 실체를 잃어버린 삶이나, 실제와 가상을 혼동하는 삶은 늘 파탄으로 우리를 내몰기 마련이다. 하지만 배우들은 다르다. 스타가 가진 고정된 가짜의 신적 이미지는 배우라는 무한히 변신을 해야 하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거꾸로 부담으로만 작용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변신함으로써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아낸다.

우리는 각자의 삶이라는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들이다. 우리는 그 위에서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을 꿈꾼다. 스타라는 자본주의가 마련한 시스템 위의 허상을 좇을 것인지, 아니면 배우라는 본연의 실존을 좇을 것인지는 모두 우리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흔히 가십 정도로 치부하며 입에 오르내리는 스타 혹은 배우. 이 두 존재가 우리네 삶에 던져주는 질문은 이처럼 의미심장하다.
(이 칼럼은 Yes24의 문화웹진 나비(
nabeeya.yes24.com)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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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

Posted by 더키앙

그 때 우리는 동해안의 어느 바닷가에 있었다. 도시의 폭염을 피해, 도시의 돈 냄새를 피해, 달아난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은 잔뜩 찡그린 채 빗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텅 빈 백사장 위에 설치된 천막 옆에서 우리는 비에 젖은 생쥐마냥 떨면서 빗물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다. 집으로부터 3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외딴 곳에 잘 곳도 없는 우리들에게, 주머니에 마지막으로 남겨진 돈을 톡톡 털어서 마시는 소주 맛이란, 막막함과 설렘이 뒤섞인 기막힌 맛이었다.

그 대책 없는 상황은 오히려 즐거움이었다. 천막 안에서 흘러나오는 쿵쿵 대는 음악에 맞춰 우리는 천막 바깥에서 춤을 추었다. 소주에 취해 빗물과 바닷물에 취해. 자연 속에 적당히 자신을 방치해버린 듯한 그 기분. 그것은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눈을 깜박이면서도 “어떻게든 되겠지”하고 낙관할 수 있었던 청춘의 기분이었고 그것은 여행이라는 단어가 갖는 그 느낌 자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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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그때 갔었던 그 동해안의 바닷가는 이미 사그라져버린 청춘의 모래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천막이 있던 자리는 말끔하게 차려진 건물에 카페가 자리했다. 남미풍의 음악이 바다의 백사장까지 침투하는 그 곳에 앉으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저 편의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비라도 내릴라치면 묘한 감상에 젖어 비와 바다가 만들어내는 축축함을 쳇 베이커의 ‘마이 퍼니 발렌타인’에 버무려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앉아 부르고뉴 피노누아 정도가 글라스에 채워져 있다면 금상첨화. 우리의 여행은 20년의 세월만큼 달라져 있다.

자연에 가까웠던 청춘의 우리들은 어느새 문화라는 이름 속에 둥지를 튼 인공적인 안전함 속에서 안락함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나이든 우리들에게 온 변화이면서, 동시에 나이 먹어버린 우리네 환경의 변화이기도 하다. 우리와 분리되면서 자연은 우리의 안식처이면서 도전이 되었다. 자연 속에 있을 때 우리는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불안함을 느낀다. 우리에게 여행이란 끝없는 이 양가감정 속에 놓여져 있다. 도시 속의 안전함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문화라는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훌쩍 그 도시를 떠나고 싶은 마음은, 그러나 자연 속에서의 야생적인 하룻밤을 버텨내기가 어렵다.

TV라는 매체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속성은 대리체험이라는 점에서, 여행은 바로 이런 양가감정에 놓여있는 우리들을 흔들어놓는 소재다. 우리는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갈 수도 있고, 범인들은 갈 수 없는 히말라야의 ‘산’에 오를 수도 있으며,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오지에서부터, 물 속 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들을 대리체험할 수 있다. 맥루한이 매체가 감각의 확장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TV를 통해 실제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의 세세한 순간들을 목도할 수 있고, 인간의 능력으로는 버텨낼 수 없는 심해로 들어갈 수도 있다. 대리체험을 가짜라 치부하는 것은, 영속하는 진짜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플라톤적 사고방식일 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분명 감각적으로 체험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지금은 여행을 낯선 세상과의 만남이라고 할 때, TV가 매개하는 여행 역시 그 여행의 한 부분이 되는 시대다.

'원격현전'이 TV가 가진 가장 놀라운 경이라는 점에서 TV의 공간을 포착하는 대부분의 영상들은 여행과 다르지 않다. '이 곳에 앉아 저 곳을 본다는 것'이 이 여행의 특징이자 가장 큰 매력이다. 따라서 날 것의 여행을 보여주는 것은 TV로서는 일상적인 일이다. 그러니 여행 자체가 쇼의 소재가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섯 남자들이 1박2일 간 떠나는 여행을 오락적인 쇼의 형식으로 포착한 '1박2일'은, 여행 그 자체를 대리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여행이 환기하는 어떤 기억을 대리해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생고생의 기억이다.

도시생활에 길들여진 여섯 명의 캐릭터는 바로 우리들의 분신이고, 그들이 저 야생에 나가서 복불복 게임을 하며 노숙을 하는 건 우리들이 잊고 있던 야생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한 겨울에 텐트에서 잠을 자거나, 계곡의 얼음물 속에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여행을 앞두고 갖게 되는 혹은 자연을 앞에 두고 갖게 되는 그 불안감과 편안함의 양가감정을 담고 있다. 이것은 저 20년 전 갖고 있었으나 이제는 잃어버린, 청춘의 대책 없는 낙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 힘겨움과 고통스러움이 웃음과 즐거움으로 화하는 것. 그것이 이 쇼가 주말 밤 떠나지 못한 자들을 이끌고 그들과 함께 떠나게 만드는 치명적인 유혹의 실체다.

한편 20년 전과는 달리 현재 나이 먹어버린 우리가 하는 여행이란 고작 자연 속에서도 편안한 도시의 인공 속으로 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산과 바다에 자리한 고급 펜션들과 호텔들은 자연을 찾은 이들이 다시 인공으로 들어감으로 해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 이율배반적인 여행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산 속에서 길을 잃어 오랜 시간 동안 헤매다 겨우 발견한 대형마트의 불빛에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 우리네 도시인들의 삶이 아닌가. 그러니 여행의 또 한 가지 측면은 단지 자연과의 일체감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서의 다른 생활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그 생활은 본질적으로는 떠나온 도시와 다를 것이 없지만, 이질적 공간이 주는 변주의 즐거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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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사시는 어르신들을 여행 보내드리고, 대신 그 곳에서의 하룻밤을 지내는 컨셉트의 '패밀리가 떴다'는 바로 이러한 여행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쇼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도착해서 짐을 풀고, 놀다가 밥을 함께 차려먹고, 함께 자고 일어나 다시 밥 차려먹고 놀고 하는 것의 반복이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주는 판타지는 의외로 크다. 일과 욕망에 점철되어 살아가는 도시생활 속에서의 우리네 삶이 일하고 일하고 일하는 그 연속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밥 한 끼 제대로 가족들과 차려먹는다는 것이 하나의 로망이 되어버린 삶 속에서 이런 여행이 갖는 평범함(삼시 세 끼 먹고 놀다가 푹 자는)은 때론 강력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 같은 프로그램은 그 내용에 있어서 여행의 양상을 보여주는 접근방식이 다르지만, 그 형식과 외형은 동일하다. 그것은 모두 TV라는 매체를 통해 보여주는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형식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1박2일'이 야생을 외친다고 해도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야생의 여행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인공적인 대리 체험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야생으로 떠나자"고 프로그램은 소리치고 있지만, 바로 그 소리침으로 인해 우리는 TV 앞에 앉아있다는 것. 우리에게 어쩌면 여행이란 이제 이런 것으로 변해 있는 지도 모른다. 가끔씩 오지에 떨어졌을 때, 우리는 그 곳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TV의 채널을 만지작거리며 안도감을 갖곤 한다. 이곳도 내가 떠나온 곳과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 매개된 체험이 일상이 되어버린 사회 속에서 우리의 감각은 어쩌면 이미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칼럼은 Yes24의 문화웹진 나비(nabeeya.yes24.com)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관련 글 : '마더', 우리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인가

Posted by 더키앙

우리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일까. 그 실체를 한 손으로 잡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수많은 엄마의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에게 엄마란 한 때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자식 빼앗기고 길바닥에 버려지기도 했던 그 분이고, 갖은 시어머니의 구박 속에서도 부엌 한 켠에 서서 행주로 눈물을 훔치는 것으로 핍박을 참고 살아오셨던 그 분이기도 하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며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셨던 "자장면이 싫다"고 하신 그 분이기도 하며, 남편을 위해 제 머리카락을 팔아 손님 대접을 하더라도 내색 한 번 하지 않으시던 바로 그 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엄마라는 존재를 떠올릴 때 우리가 갖게 되는 이미지의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엄마란 너무나 자식을 사랑한 나머지 배우자의 자식을 빼앗고 핍박하던 바로 그 시어머니고, 가족을 위해서는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지만, 다른 가족의 것을 모성의 이름으로 빼앗기도 하는 이율배반적인 그 분이기도 하다. 엄마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탄생시키고 보듬어준 신적인 존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부과된 신적 책무의 뒤틀림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약점을 가진 한 인간이기도 하다. 엄마라는 소재가 늘 우리네 문화의 중심축에 서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우리네 정서 속에 숨겨져 있는 양가적인 속성이 갖는 파괴력 때문이다.

하여 우리에게 지금 봉준호 감독이 '마더'라는 영화를 통해 들고 온 엄마가 자못 충격적이라 여겨지는 것은 실로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엄마라는 존재가 가진 이 양면적인 얼굴을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무수히 봐왔고 또 여전히 지금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드라마 '에덴의 동쪽'의 양춘희(이미숙)를 통해서, 막장에서 남편을 잃고도 억척스럽게 자식들을 키워내는 전형적인 개발시대 엄마들의 표상을 보기도 하지만, 드라마 '카인과 아벨'의 나혜주(김해숙)를 통해서, 자신의 친 자식을 위해 입양된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빗나간 모성을 보기도 한다.

가족드라마와 멜로드라마가 우리 드라마의 주축이었던(이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 드라마는 한 마디로 엄마들의 세상이라고 단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족 간의 결혼이야기를 중심 모티브로 가져가는 가족드라마의 경우 그 결혼을 허하는 위치에 선 엄마라는 존재는 늘 드라마의 극성을 높이는 역할을 해왔다. 이것은 역시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을 다루는 멜로드라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가족드라마는 엄마와 엄마가 부딪치지만, 멜로드라마는 엄마와 결혼 당사자가 부딪치곤 한다는 점이다.

'마더'의 김혜자가 출연했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 김한자(김혜자)는 딸 결혼문제를 두고 삶의 방식 자체가 상이한 고은아(장미희)와 불꽃 튀는 대결을 보인다. 자식을 앞에 두고 벌이는 기 싸움. 이것은 가족드라마로 포장되고, 교양인으로 포장되지 않았다면 말 그대로 볼만한 야생의 싸움판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잔뜩 품위를 지키면서 실은 살벌한 싸움구경을 보여주는 가족드라마가 재미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모성의 대결이 아닌가.

이러한 대결구도는 가족드라마의 틀에 박힌 클리쉐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거기에는 엄마라는 신성불가침의 존재, 즉 자식에 대한 끝없는 희생으로서 갖게 된 이른바 면책특권이 자리하고 있다. 엄마의 싸움은 늘 정당하다.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한 것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면죄부는 여기까지다. 엄마가 '자식을 위한, 혹은 가족을 위한' 같은 수식어를 떼어버리게 되면 그 부여된 면죄부 또한 흔들리게 된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한 때 논란이 된 김한자의 독립선언은 대중들의 엄마를 바라보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엄마가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났을 때, 대중들은 그 엄마의 행동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뜻 지지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엄마가 뿔났다'는 사실 바로 이 엄마라는 존재를 똑바로 바라보려는 김수현 작가의 도발적인 시선이 있었지만, 드라마라는 한계 속에서 끝까지 그걸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하긴 가족드라마라는 견고한 틀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도 엄청난 실험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엄마가 뿔났다'가 슬쩍 보여주었던 바로 그 '똑바로 바라본 엄마라는 존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도발을 보여주었다. 우리에게 엄마라는 존재에서 억압되어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된 이미지는 두 가지다. 그 하나는 그 엄청난 사랑 이면에 숨겨진 끔찍할 정도로 질깃질깃한 에너지(때론 폭력적으로까지 드러나는)이고, 또 하나는 자식에 대한 사랑 이면에 숨겨진 여자라는 존재로서의 엄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때로는 하나로 연결되면서 더 폭발적인 힘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더' 속에 등장하는 도준(원빈)의 엄마는 위기에 빠진 자식을 위해 동물적인 모성을 발휘한다. 그 모성은 우리가 지금껏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발견한 것처럼 잘 포장된 그런 것이 아니다. 도덕이나 법적인 선을 넘어서 무조건 제 자식을 살리기 위해 뭐든 하는 모성은 끔찍스럽고 충격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영화는 이 엄마라는 존재 위에 여자로서의 한 부분을 포착해낸다. 섹스를 하는 진태(진구)와 여자 친구를 숨어서 바라본다거나, 고물상 주인의 배에 올라타 둔기로 내려칠 때 피가 터져 나오는 장면은 상징적이지만, 늘 엄마로서만 자리해온 한 여자의 본능을 그려낸다.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대중들에게 있어서 엄마의 이런 모습들을 동정적인 시선으로 직시하는 것은 꽤나 불편한 일이다. 만일 '마더'의 시점이 도준의 엄마가 아니라 진태나 형사 같은 타인의 시선이었다면, 우리는 쉽게 이 엄마를 우리가 흔히 드라마 속에서 보아왔던 악역으로 치부하며, 편안하게 영화를 바라봤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대중들에게 그런 편안함을 제공하지 않았다. 우리는 국민엄마로 각인되어 있는 김혜자의 기성 이미지를 갖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그렇게 동정적인 시선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뒤통수를 맞았다. 엄마의 또 다른 실체를 바라봐야 하는 충격, 불쾌감은 대중들이 늘 소비해왔고 앞으로도 소비하고픈 엄마의 이미지를 배반했다.

'마더'의 엄마가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간 문화가 엄마를 다루는 시선이 단선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엄마는 늘 모성애의 존재로서 이편 아니면 저편으로 나뉘어졌고, 이편이 우리가 봐왔던 진짜 엄마의 실체이며, 저편은 실체이기는 하나 결국에는 응징되는(그럼으로써 실체가 아니라고 말해지는) 그런 존재라고 주장되어 왔다. 하지만 '마더'는 이 두 가지가 모두 모성의 실체라는 것을 아프게도 보여준다. 우리에게 엄마는 세상 모두가 믿지 않아도 자식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어주는 그런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바로 그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자식이자 내 자식의 반려자를 핍박할 수도 있는 존재다. 또한 그녀는 한 자식의 엄마이지만 또한 한 사람의 아내이기도 하고, 자신 또한 핍박받았던 한 시어머니의 며느리이기도 하다.

이처럼 엄마라는 이름 속에 부과된 수많은 관계들을 생각해보면, 엄마가 얼마나 자신을 분열시킬 정도로 힘겹고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엄마라는 이름에 부과되어 당연하게 여겨지는 희생이라는 책무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지어야 될 짐을 대신 그녀들이 지고 있는데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트라우마처럼 엄마란 존재를 늘 고결한 모성으로 떠받드는 이면에는 어쩌면 그 희생을 당연한 어떤 것으로 기정사실화하려는 우리의 이기심이 숨겨져 있는 지도 모른다. (*)
(이 칼럼은 Yes24의 문화웹진 나비(nabeeya.yes24.com)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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