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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트렌드 읽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6.04 자연을 당신의 동반자로!
  2. 2008.05.23 예쁜 남자 뒤에는 강한 여자가 있다

웰빙과 로하스를 넘어 그린 노마드로

갑갑한 도시에서 살아가다 보면 문득 문득 자연의 품이 그리워지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그렇다고 도시를 떠나 산다는 것은 도시가 주는 혜택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떠나지 않고도 자연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을 찾게 되었다. 그린 노마드다.

‘1박2일’이 환기해주는 생각
도시에서 살아가던 사람이 갑자기 야생의 상황에 놓여진다면? 이것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 ‘1박2일’의 기본 컨셉트이다. 간단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 의미는 이중적이다. 즉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늘 도시를 탈출해 자연을 꿈꾸지만, 또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도시의 문명, 즉 인공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출발선상에 선 ‘1박2일’의 멤버들은 어떤 기대감에 차 있지만, 동시에 그들은 그 하룻밤을 지내야 한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 현지에 떨어져 1박2일을 지내는 그들은 잠을 자고 세수를 하고 밥을 해먹고 하는 기본적인 일들마저 도전이 된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다. 즉 문명이라는 안전한 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진 인간에게 자연은 그리움이면서도 동시에 도전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이율배반적인 자연에 대한 태도의 어떤 해결점을 제시하는 것이 ‘그린 노마드’다. ‘노마드’에 ‘그린’이 붙어 만들어진 이 용어는 그린(green)으로서의 자연과 노마드(digital nomad)인 문명의 결합을 시도한다. 노마드족이란 노트북이나 휴대폰 같은 디지털 장비를 이용해 언제 어디서든 외부와 접촉하면서 일정한 직장이나 주소에 얽매이지 않는 이들을 말한다. 즉 문명의 최첨단에서 그것을 이용해 시공간의 장벽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들은 ‘1박2일’의 멤버들처럼 야생 속에 던져진다 해도 디지털과 통신을 통해 여전히 문명과 접속해서 생활할 수 있다. 몽고의 평원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nomad)이라 하더라도 늘 디지털은 열려 있고 이 열려진 네트워크를 통해 그들은 지구촌의 일원으로 문명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노마드족이 자연 속에서도 문명을 연결한다면, ‘그린 노마드’는 거꾸로 문명 속에서도 자연을 느끼려 한다.

‘그린 노마드’, 문명 속으로 들어온 자연
푸른 잔디가 깔린 언덕처럼 편평하지 않고 굴곡이 있는 카펫이 있다면 어떨까. 등받이가 되어주는 불쑥 솟아오른 카펫에 누워 TV를 본다면? 정말 언덕에 누워 구름을 쳐다보는 그 기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스페인의 디자인 회사인 나니마르키나에서 선보인 ‘나는 카펫(Flying Carpet)’이다. 집안에서 즐기는 피크닉이라는 컨셉트로 만들어진 이 제품은 바닥은 늘 편평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자연의 굴곡을 그대로 담아 아파트 집안이라도 마치 야외 들판에 있는 듯한 느낌을 맛볼 수 있게 디자인되었다.

형태로 보면 나무처럼 만들어졌지만 기능은 냉장고인 캐나다 양코 디자인에서 개발한 나무집 냉장고(Tree House Fridge)는 과일을 꺼내 먹을 때마다 마치 나무에서 과일을 따먹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또 프랑스의 디자인회사 스마린의 ‘리빙 스톤’ 쿠션은 강가의 자갈밭 이미지를 그대로 잡아낸 쿠션으로 마치 부드러운(?) 자갈의 품속에 안겨있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이것은 분명 실제 자연이 아닌 인공이다. 인간의 손길이 닿은 것이거나 아니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점이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진 아파트에서 하는 화초재배 같은 것도 역시 그린 노마드의 한 부류로 볼 수 있는데 혹자는 이것이 자연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엄밀히 보면 자연이 아닌 인공이다. 자연은 자연 상태 그대로 있을 때만이 그 본래의 자연이며, 화분에 옮겨지는 그 순간, 인간의 의도 속에 놓여지게 된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인공이란 그 말 자체로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운명이 아닌가. 그러니 인공이라 하더라도 자연을 추구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린 노마드가 이런 자연을 닮은 인공 속에서 정신적인 안정을 추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조건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

웰빙과 로하스를 넘어 생활 속으로
바로 이 점 인공과 자연에 대한 희구가 서로 교차하는 지점이 생기는 것은 우리의 실제적인 몸은 욕망과 상관없이 자연 그 상태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웰빙이 병원에서만 얘기되던 건강을 생활 속으로 끌어내린 것은 바로 이 생활 속에서의 인공과 자연의 부조화가 결국은 몸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웰빙 문화가 환경과 건강의 문제를 제기했지만 그 ‘무한건강주의’ 에 머물렀다면 로하스 문화는 본격적으로 환경을 생각하는 생활로 차원을 넓혔다. 하지만 그린 노마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환경친화적 삶이 아니라 바로 그 자연을 삶 속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더불어 즐기는 문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자연 속으로 탈출하기 보다 ‘자연을 내 곁으로’ 끌어들인다는 발상의 전환은 노마드족의 키워드인 디지털적인 삶이 그 기반을 제공한다. 디지털이 시공간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그 공간으로 자신이 물리적인 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가상으로라도 내 눈앞으로 끌어들이는 ‘원격현전’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차가운 디지털의 인공은 그 속에서도 따뜻한 아날로그의 자연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린 노마드는 인공의 힘으로 무한한 시공간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얻은 디지털 노마드가, 이제는 정신적으로라도 사람냄새, 자연냄새를 찾게 됐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 시대의 징후다.

Posted by 더키앙

그루밍족, 성별구분 없는 사회의 징후

본격야생버라이어티쇼 ‘1박2일’의 한 장면. 야생과는 어울리지 않을 곱상한 외모의 이승기가 한 겨울 손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 정도의 물을 받아놓고 머리를 감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촬영 동안은 세수조차 하지 않는 부스스한 얼굴의 다른 멤버들은 감탄사를 늘어놓는다. 이 추운 날씨에 머리까지 감을 마음이 나느냐는 것. 처음 이승기가 이 야생에서의 하룻밤에 도전하는 프로그램에 합류한다고 했을 때, 의아해했던 대중이라면 차츰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트렌드였고 이승기라는 캐릭터는 그 트렌드가 아무리 야생이라 해도 지켜질 만큼 이제 일상이 되었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승기는 여성 못지 않게 몸을 가꾸고 미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남성들, 즉 그루밍족들의 표상으로서 이 걸맞지 않을 것 같은 프로그램 속에서 독보적인 인기를 끌어냈다. 그것은 남성들에게는 공감이었고, 여성들에게는 기호였다.

예쁜 남자, 강한 여자 신드롬
예쁜 남자, 즉 꽃미남 신드롬이 솔솔 불어오는 와중에 몸짱 아줌마가 등장한 사실은 사회적으로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왕의 남자’에서 동성애자 역할을 했던 이준기가 꽃미남 열풍을 이끌면서 여성들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CF(예를 들면 화장품 같은)에 남성들이 속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이 운동으로 다져진 몸짱 아줌마의 출연은 여성들의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이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이어트 비디오를 찍어왔던 그간의 연예인들이 주로 요가 같은 부드러움과 유연성을 강조하는 운동을 했다면, 몸짱 아줌마는 남성들의 전유물이라 여겨져 왔던 헬스클럽에서 근육으로 다져진 몸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과거 미스코리아는 미용실로 가고 미스터코리아는 헬스클럽에 모이던 시대에서, 이제는 남녀가 모두 헬스클럽이라는 공간에서 만나 똑같은 덤벨과 벤치프레스로 근육을 만드는 시대로의 이행을 표상하는 인물이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중년이라는 나이마저 거꾸러뜨림으로서 이 시대의 변화 속도를 종과 횡으로 뛰어넘었다. 즉 수명연장으로 인해 고령화되어 가는 사회의 속도를 그 문화가 뒷받침해주지 못하는데서 생겨나는 충돌과 함께, 성별의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 속도를 거꾸로 몸이 뒷받침해주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충돌을 모두 극복해냈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녀는 강한 여자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른바 미중년은 바로 이 두 속도 즉 달라진 나이와 성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는 교차점에서 등장한 새로운 종족이다.

동성애 코드 속에 숨겨진 성별의식의 변화
이러한 남성과 여성의 성별의식의 변화는 어떤 중간지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양상이다. 그리고 바로 그 중간지대에서 발견되는 것은 동성애 코드 컨텐츠들에 대한 달라진 시선이다. 국내에서도 어느 정도 지지층을 얻은 이안 감독의 동성애 영화, ‘브로크백마운틴’은 사실상 마초적인 남성성의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대표적인 영화였다. 마초의 상징이었던 카우보이들의 동성애를 다룸으로써 그 마초 이미지가 사실은 조작된 것이라는 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동성애 영화들에 대한 지지가 동성애 자체에 대한 시각의 수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동성애에 대한 선입견의 벽은 여전히 견고하며 따라서 본격적인 동성애 컨텐츠는 대중적인 기호와는 거리가 멀다. ‘브로크백마운틴’이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국내에서 동성애 코드(동성애를 직접 다룬 것이 아닌 그걸 차용한) 컨텐츠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은 분명하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동성애 컨텐츠는 아니지만 동성애 코드를 잘 활용해 대중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발견되는 것은 역시 예쁜 남자들이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말 그대로 프린스들이 커피를 파는(전적으로 여성들을 위해!) 공간 속에 여성을 포진시키기 위해 남장을 시킨 드라마다. 하나도 아닌 여럿의 프린스들과 동료로서 연인으로서 일한다는 이 설정이 수많은 이 땅의 달라진 성별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것이다.

여성들에게 간택받는 남자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남성들을 이렇게 변화시켜 놓았을까. 그 변화의 요인은 육체노동이 점점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정보화 시대 속에서 달라진 남녀의 위상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찰스 다윈은 성 선택 이론을 말하면서 ‘남자는 과시하고, 여자는 선택한다’는 말로 인류 진화의 비밀을 소개한 바 있다. 흔히 마초적인 사회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선택하는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여성은 늘 남성을 선택해왔고 단지 그 기호가 마초적인 강한 남성에서 부드럽고 아름다운 남성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덜 문명화되어 자연적인 위협 요소들이 많았던 과거에는 여러모로 여성을 보호해줄 수 있는 강한 힘의 남성이 선택되었지만, 이제 문명화된 사회에서 강한 남성은 시대착오적 유물이 되었다. 누군가에 의해 보호받을 필요가 없어진 여성들은 남성의 존재가치를 동등한 인간으로 보거나 아니면 유희의 대상이거나 심지어는 종족보존의 대상 정도로까지 축소시킨다. 최근에는 배우자 없는 출산을 하는 비혼모(결혼은 원치 않지만 아이를 원하는 미스맘)가 등장하면서 종족보존에 있어서조차도 남성의 필요성이 사라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의 기호에 맞춰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 여성들이 원하는 모습으로의 변화는 이 상황에서는 거의 생존이 되기 때문이다.

미디어에 의해 교육되는 성별 없는 사회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지나치게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본 결과일 것이다. 남성과 여성은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속박하는 관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이라는 공평한 눈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보는(혹은 바라보길 원하는) 존재가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 외적인 야생조건 속에서 그 균형이 깨져 있었다면 지금은 바로 그 균형이 맞춰지는 시기라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엘리자베스 바댕테르는 그녀의 ‘남성의 여성성에 대한 편견의 역사’에서 “남성이 된다거나 여성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일종의 지위, 사회적 위치, 문화적 역할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성별의식이란 사회적인 교육의 산물이지 태생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현재 미디어들이 보여주는 달라진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들은 그 자체가 성별 없는 사회를 향한 교육적 기능을 어느 정도는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카우보이들의 상징이자 전유물이었던 청바지가 이제는 남녀노소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이 되었듯이, 이제 성별 의식이란 점점 과거의 유물이 되어갈 것이 분명하다. 그루밍족은 바로 그 성별구분 없는 사회로 가는 변화의 징후를 보여준다.
<본 원고는 삼성홈페이지(www.samsung.co.kr) 미디어 삼성에 게재되었던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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