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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이야기, '개미와 베짱이'. 개미들이 월동준비를 할 때 음악이나 연주하고 있던 베짱이가 겨울에 개미들에게 손을 벌리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개발시대의 가치를 심어놓았다. 새마을 운동으로 대변되는 그 때의 구호들은 근면, 자조, 협동이었다. 흙먼지 나던 마을에 시멘트 향기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바뀌기 시작했다. 그 세상 속에서 우리는 개미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며 살아왔다. 베짱이는 나태함과 게으름의 상징이었다.

그렇게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세월은 그러나 어마어마한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변화는 그토록 외쳐왔던 개발의 가치가 고개를 숙이고 대신 분배의 가치가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그만큼 급속도로 달려온 개발의 속도에 우리는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시대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되고 있었다. 아날로그가 갖는 물질적인 속성은 디지털이 갖는 비물질적인 속성으로 바뀌었다. 육체적 노동의 시대는 정신적 노동의 시대로 바뀌었고, 이성이 물러간 자리는 감성으로 채워졌다.

우리는 저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 속에서 늘 소외받아왔던 베짱이를 다시 조명하게 되었다. 개미가 일을 할 때, 베짱이가 열심히 노래를 부른 것이 뭐가 잘못된 일인가. 이 시대의 감성은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에서 '프레드릭'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프레드릭'은 프레드릭이라는 이름의 작은 쥐가 주인공인 레오 리오니의 짧은 동화. 설정은 '개미와 베짱이'와 같지만, 그 이야기의 방향은 다르다. 겨울날 준비를 하기 위해 형제들이 모두 열심히 일할 때 프레드릭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형제들이 "너는 왜 일을 안하니?"하고 묻자, 프레드릭은 이상한 말을 한다. "햇볕을 모으고 있다"거나 "색채를 모으고 있다" 혹은 "이야기를 모으고 있다"고 말하는 것. 겨울이 오자 자신들의 집안에 꼭꼭 숨은 쥐들은 양식이 차츰 떨어져 갔다. 그러자 프레드릭에게 형제들이 묻는다. "네 양식은 어떻게 되었니?" 그러자 프레드릭은 눈을 감으라고 하고는 햇볕과 색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형제들은 프레드릭의 이야기에 행복감을 느꼈다는 이야기다.

'프레드릭'의 시대는 '개미와 베짱이'의 시대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과거 아무 쓸모없어 보이던 (베짱이의) 즐거움이라는 가치는 '프레드릭'에 와서는 양식과 마찬가지의 중요한 가치로 부상한다. 제 아무리 몸이 풍족하다고 해도 마음이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물론 아직도 하루 한 끼를 먹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는 분들이 있지만, 세상은 가진 자들에게 오히려 이런 분들을 위한 나눔을 실천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찾으라 한다. '프레드릭'의 시대에 희망과 행복은 가장 중요한 삶의 지표가 되고 있다. 무엇이 무채색 삶을 행복한 색감의 삶으로 바꿀 수 있을까. 한 겨울에도 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프레드릭'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
Posted by 더키앙
경제를 보는 두 개의 눈_한상완 지음

경제는 어렵다. 어려운 데다 어딘가 학문적인 뉘앙스까지 풍긴다. 경영이나 마케팅이라면 모를까. 그래서 경제서라고 하면 선뜻 손이 안간다. 무엇보다 경제서가 하는 말은 나와는 상관없는 먼 나라이야기 같은 경우가 많다. 이유는? 경제서가 대부분 국제경제나 국가경제, 기업경제 같은 거대담론에만 지면을 할애할 뿐, 가계경제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하루 벌어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 서민들이 나라경제가 어떠니 하는 경제서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다. '공자님 얘기는 개나 물어가라지'하는 냉소적인 시선까지 더하고 나면 경제서를 대중들이 손에 쥐는 것은 참 어려운 이야기처럼만 들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경제서는 무조건 다 어렵고, 또 나와는 상관없는 공염불만 외는 그런 종류의 책일까. 남의 경제 다 집어치우더라도 내 경제에 도움되는 그런 경제서는 없을까. 뭔가 거대한 흐름을 읽는 시선이면서도 그 시선이 바로 나와 직결된 이야기라는 것을 해주는 그런 경제서. 평소 이런 생각을 가졌던 분이라면 한상완 박사의 <경제를 보는 두 개의 눈>이라는 책을 권한다. 이 책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쉽게 경제적 상황을 거시적으로 설명하면서도, 그것이 바로 가계경제와 연결되는 지점을 포착해낸다. 저자는 현대경제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축적해온 분석 데이터를 활용해, 경제학자들이 좀체 건드리지 않는 투자 트렌드를 짚어낸다.

저자는 투자의 기회로서 이른바 디바이드(divide)라는 현상에 주목한다. 경제는 늘 균형상태를 추구하는데, 그 균형상태가 일시적으로 이탈하는 현상이 바로 디바이드다. 예를 들어 버블현상 같은 것이 대표적인 디바이드 상태인데, 이렇게 이탈된 격차가 커지면 디바이드는 거꾸로 균형상태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가 부의 기회라고 필자는 말한다. 결국 부라는 것은 어떤 변화의 물결이 새롭게 일어날 때 새롭게 탄생한다. 수렵에서 농경사회로 전환될 때 나타난 봉건 지주 계급이나, 산업혁명으로 나타난 부르주아 등은 바로 이 새로운 변화에 올라탄 집단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보는 현재 세계는 최소한 3개의 디바이드가 존재한다고 한다. 서구 국가들과 아시아 국가들 간의 컨트리 디바이드, 1차 산업과 2차 산업 간의 인더스트리 디바이드, 노년 세대와 청장년 세대 간의 제네레이션 디바이드가 그것이다. 이 책은 이 디바이드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고 또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 갈 것인가를 분석하면서, 그 기회를 어떻게 부로 만들어낼 것인지 가계경제의 입장에서 조언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 '경제를 보는 두 개의 눈'이고 그 부제가 '당신의 세상의 절반만 보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이 거시적인 시선과 실용적인 관점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즉 '세상의 흐름을 투자자의 관점에서 개인이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 된다. 이것은 저자가 깨려고 한 편견, 즉 다름아닌 '경제서가 나와는 상관없는 딴 나라 이야기'라는 생각을 깨뜨리는 방식이기도 하다. 쉽고 재미있게 쓰여져 있어 빠져서 읽다보면 어느새 투자의 눈을 가진 당신을 발견하게 되는 즐거운 순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더키앙

이계안의 '누가 칼레의 시민이 될 것인가?'

14세기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백년전쟁에서 프랑스 칼레를 점령한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1년 동안 끈질기게 저항한 칼레 시민들을 몰살하고 싶었다. 하지만 측근들의 만류와 칼레시의 탄원으로 한 발 물러선 에드워드 3세는 실로 잔인한 조건을 내건다. 모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시민들 중 처형될 6명을 뽑아오라고 한 것이다. 칼레 시민들이 고민에 빠졌을 때, 나선 인물이 당시 최대의 거부였던 생 피에르였다. 그는 스스로 희생양을 자처했고, 이어 칼레시의 부호, 귀족, 법률가 등이 손을 들었다. 결국 생 피에르의 자결과 칼레시 부호와 귀족들이 보여준 희생정신에 감복한 에드워드 3세는 사형을 포기하고 관용을 베풀었고, 이 이야기는 '고귀한 자일수록 먼저 책임을 진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원형이 되었다.

현대자동차 최연소 대표이사 사장을 지낸 이계안 전 국회의원이 펴낸 '누가 칼레의 시민이 될 것인가?'는 바로 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담론들을 담고 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지금 칼레의 시민들이 처한 상황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인식은 그가 말하는 우리 사회의 네 가지 개미지옥을 통해 보여진다. 그것은 10대의 사교육, 20대의 청년실업, 30-40대의 내 집 마련, 그리고 50-60대 정년퇴직 후 겪게 되는 노후문제가 그 4대 개미지옥이다. 이계안 전 의원이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4대 개미지옥이 가진 시스템적인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칼레의 시민들처럼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이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흔히 의원 출신 저자들이 쓰곤 하는 자서전류나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기 위한 홍보용 서적과는 결을 달리 한다. 이계안 의원이 평소 갖고 있던 소신이 들어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서울 곳곳을 다니며 현장에서 목격된 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들은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에 닿는다는 점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이계안 의원 특유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낮은 눈높이는 저자가 대기업 CEO 출신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까지 자아내게 만든다. 지배층에 속하면서도 늘 시선을 아래쪽을 향해 두고 있는 저자의 생각들을 대변하듯, 이 책의 추천사에서 '88만원 세대'의 우석훈 교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는 한국의 지배층, 그 속에서 처음으로 적정한 비용을 지불하자고 제안한 첫 번째 한국인이 바로 이계안이다.'

결국 문제는 성장의 뒤안길에서 만들어진 초양극화와 사회분열이라는 대가를 어떻게 해야 치유할 수 있는가이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선진국으로 길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물질적인 풍요에 걸맞는 문화의식, 선진의식이 부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배층의 의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그 자리에까지 오르는 것이 자신만의 공적이 아니라 그 사회가 부여한 것이라는 의식, 따라서 그것을 또한 사회와 약자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의식만이 지금의 문제를 넘어서게 하고, 또 앞으로 우리 사회가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칼레의 시민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4대 지옥 속에서 아비규환의 무한경쟁 속에 살아갈 것인가. 그 선택은 바로 우리들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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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주의 '쾌락의 옹호'

2> “플라톤의 이데아는 전혀 난해한 개념이 아니다. 증거는 그 말의 족보에 있는데 그것은 원래 ‘바라본다’라는 뜻을 가진 고대 그리스어의 일상어였다. 이 말에는 싸움에 이기기 위한 병법적 의미는 전혀 깃들여 있지 않다. 대신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판정하는 눈을 위한 풍부한 암시가 스며 있다.”

=> TV가 하나의 대상이 된 요즘, TV를 바라보는 행위는 TV를 보고 있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이 TV를 보고 있는 나를 보는 또 다른 나의 존재는 저 플라톤이 말하는 진짜와 가짜를 판정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준다. 우리는 TV를 보는 동안, 도마 위에 올라 저 칼날이 내 몸을 파고 들어와 회를 뜨는 장면을 보고 그 상태를 느끼는 제 3의 눈을 느끼게 된다.

Posted by 더키앙

이왕주의 '쾌락의 옹호'

1> “흙으로 되기도 전에 벌써 흙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살아 있는 동안은 ‘살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은 “너의 젊은 날을 기뻐하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더 나아가서 “살아있는 모든 날을 기뻐하라”고 충고한다.”

=> 욕망 없는 담담한 삶을 살라하지만 그것은 벌어지지도 않은 미래를 현재로 끌어들여 결국은 현재의 욕망을 무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실재하지 않는 욕망이 삶의 에너지라면 이것은 어찌 보면 삶을 포기하게 만드는 일이다. TV 속에 넘쳐나는 욕망은 그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의미 없는 욕망이 의미 없는 것이며, 그 욕망을 포식하기만 할 뿐 음미하지는 않기에 의미가 없는 것이다.

Posted by 더키앙

북핵과 양극화가 불가사리 이야기로 읽히는 이유

괴물이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 탄생과정 속에 분명한 목적의식을 드러낸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의 탄생이 미군부대에 포름알데히드를 무단 방류한 사건에서 비롯된 것은 이 영화의 목적의식이 바로 미국과, 미국의 이런 행동을 방치하고 자기 이권만 밝히는 정부에 대한 비판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괴물은 에둘러 말하기 위한 장치인 셈인데, 괴물담의 파급력은 ‘에둘러 말한다’는 그 장점에서 비롯한다.

이런 괴물담 중에 우리네 민담으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이 ‘불가사리’란 괴물 이야기다. 쇠를 먹고, 먹으면 먹을수록 몸집이 커지는 이 괴물이야기는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대중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온 ‘불가사리’란 이야기는 그 괴물이 그랬던 것처럼, 조금씩 변용되어 구술된다.

당연한 것이지만 이 변용은 구술자의 목적의식에 따라 달라진다. 작품으로 보자면 기획의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가 처한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북핵과 관련한 전쟁공포의 확산’과 ‘부동산으로 대변되는 양극화 현상’이 될 것이다. 최근 ‘불가사리’라는 텍스트가 다시 읽히는 것은 북핵이라는 것이 실제의 물리적인 핵 이외에도 불가사리와 같은 알레고리로 읽히기 때문이며, 한쪽은 한없이 작아지고 다른 한쪽은 한없이 커져만가는 양극화 현상이 불가사리 같은 헛된 미망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반전을 담은 불가사리
먼저 간략한 불가사리 그 본래의 이야기에 대한 환기. 때는 조선 초, 태조 이성계는 숭유억불정책을 내리고 이 때문에 승려들은 피신을 하게 되는데, 그 중 한 승려가 처남집 다락방에 며칠을 숨어 지내게 된다. 심심해서 밥알 찌꺼기를 뭉쳐 만든 괴물모양 인형이 처음엔 바늘을 먹더니 점점 못, 숟가락, 젓가락 등등 쇠붙이를 먹기 시작하고 그럴 때마다 점점 덩치가 커져만 간다. 괴물은 급기야 이 집을 뛰쳐나가 전국을 돌며 쇠붙이를 먹는다. 병사들의 창과 칼도 모두 먹어버리니 그 때문에 ‘불가사리(不可殺 : 죽일 수 없다)’란 이름을 갖게 된다. 이러자 왕이 명을 내려 불가사리를 없애는 자에게 벼슬을 내리겠다고 한다. 처남은 문제가 생겼을 때 펴보라며 승려가 남겨놓은 쪽지를 열어보는데 거기에는 불가살이(불可殺, 즉 불로 죽이는 게 가능하다)라 적혀 있었다. 결국 처남은 불가사리를 유인해 불을 지펴 그 몸을 녹여 없애 벼슬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본래의 이야기는 구전되거나 설화집으로 묶여 나오다가 1998년, 두 가지 서로 다른 편역을 한 동화로 탄생한다. 1998년은 북한이 NPT를 탈퇴한지 4년 만에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날렸으며, 우리는 1997년 맞은 IMF경제위기가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한쪽에서는 전쟁에 대한 위기감이, 또 한쪽에서는 자본주의의 위기감이 드러나고 있었던 이 시점에, 불가사리는 그 두 얼굴로 나타난다. 그 둘의 차이점은 괴물 불가사리의 탄생배경에서 극명하게 대비된다.

정하섭씨가 엮은 ‘쇠를 먹는 불가사리(길벗어린이)’에서 괴물은 한 아주머니가 밥풀로 인형을 만들어 불가사리라 이름짓고는, ‘죽지말고 모든 쇠를 먹어 치우라’는 소망을 통해 탄생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주머니가 남편과 아이들을 모두 전쟁에서 잃었다는 것이다. 즉 이 이야기는 ‘반전’에 포인트가 맞춰져 있다. 그 후 이 불가사리는 아주머니의 바람대로 쇠란 쇠는 다 먹고 치우고,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그 무기까지 다 먹어 치워 전쟁을 막는다. 인기가 높아 가는 불가사리가 불안해진 왕이 아주머니를 잡아 놓고 불가사리가 오길 기다렸다 불을 지른다. 그런데 불가사리는 녹아 내리는 몸도 아랑곳 않고 아주머니를 구해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 편역 속의 불가사리는 인간을 돕는 영물이며, 인간의 탐욕에 경종을 울리는 존재이다.

북한의 불가사리, 계급투쟁 이야기가 아니다
북한에서 만들어진 ‘불가사리’란 제목의 영화는 정하섭씨의 편역과 비슷한 반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정하섭씨의 편역에서 등장하는 아주머니 대신 농기구를 무기로 만들라는 명을 어기는 대장장이와, 그가 옥사하면서 만든 불가사리에 피를 떨어뜨리는 딸이 등장할 뿐이다. 고 신상옥 감독이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1985년 12월에 완성되었지만 외부에 공개된 것은 1998년 일본에서였다.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당시 헐리우드 괴수영화였던 ‘고질라’의 흥행을 앞질렀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기운을 타고 국내에도 상륙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당시 고 신상옥 감독은 “많은 사람들이 북한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며 “대부분의 남한 사람에게 북한 영화는 빨간 영화, 이상한 영화, 살벌한 영화, 촌스러운 영화 등의 느낌으로 남아 있다”는 김영훈의 ‘북한 영화 어떻게 볼 것인가’의 내용을 언급했다.

2000년 당시 화해무드가 조성되었지만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가 처음 공개된 1998년만 해도 북한은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날리며 긴장감을 조성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작에 북한을 비롯해,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까지 참여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이 영화는 우리의 고 신상옥 감독이 만들었고, 일본에서 특수촬영의 1인자인 나까노 감독과 고지라 역을 맡았던 배우까지 참여했다.

고 신상옥 감독은 당시를 회고하며 쓴 칼럼에서 ‘불가사리를 평론가들은 주로 계급투쟁의 측면에서 해석하려 하는 것 같다’며 그러나 “자신이 말하려던 것은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강대국들의 핵무기 경쟁에 대한 경고였다”고 밝힌 바 있다. 지금의 북핵 정세를 보면 아이러니로 느낄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러한 영화의 제작이 말해주는 것은 도리어 북핵을 바라보는 북한의 시각과 외부의 시각이 그만큼 다르다는 것이다. 전쟁도 핵도 원하지 않지만 북핵이라는 필요악, 불가사리가 점점 몸집을 불린 것은 외부의 제재와 압박, 전쟁의 공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당대의 희망 섞인 우려의 목소리를 담은 북한의 ‘불가사리’는 외부의 창과 칼을 먹고 지금까지 그 몸집을 불려온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 불가사리는 지금 남한으로 남하하고 있는 중이다.

욕망의 헛됨을 담은 불가사리
북한이 경제적인 피폐와 외부의 제재로 인해 북핵이라는 최악의 괴물을 만들어낸 반면, 남한은 급격한 경제 몸집 불리기의 끝자락에서 맞은 IMF 경제위기를 구조조정이라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넘어보려 했으나, 결과는 한쪽 몸을 더 키운 기형적인 불가사리를 만들어냈다. 1998년 같은 해 나온 김중철씨의 ‘불가사리(웅진출판)’는 이러한 남한의 문제를 알레고리화한다.

김중철씨가 엮은 ‘불가사리’에서 괴물의 탄생은 어떠한 원한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엉뚱하게도 어느 산 속에 사는 할머니의 때에서 비롯된다. 할머니가 뭉쳐놓은 때 뭉치가 방안을 굴러다니면서 바늘을 먹고는 괴물이 되는 것이다. 불가사리는 마을로 내려가 난장판을 만든다. 농기구를 다 먹어버리니 사람들은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밥도 먹을 수 없다. 관군이 나서 불가사리를 죽이려 하나 불가사리는 오히려 관군들의 창과 화살까지 먹어버린다. 구덩이를 파고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이나 불가사리는 구덩이를 빠져나와 온 동네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린다. 그런데 해결책이 또한 엉뚱하다. 할머니가 마을로 내려와 “장난이 심하구나!”하면서 부채로 불가사리의 등을 툭툭 치는 것이다. 그러자 불가사리는 먹었던 쇠붙이들을 다 토해놓고는 다시 때 뭉치가 되어버린다. 할머니는 그 때 뭉치를 갖고 산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그 후로 할머니를 본 사람은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 편역 속에 등장하는 불가사리는 탐욕스럽게 쇠붙이를 먹어치워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괴물이다. 그렇다면 이 편역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자본, 돈, 욕망의 헛됨에 대한 것은 아니었을까.

김중철씨가 편역한 ‘불가사리’는 좀더 불교적이며 심지어는 도가적인 색채까지 띠고 있다. 할머니가 부채로 불가사리의 등을 툭툭 치는 장면은 마치 인간들에게 부질없는 미망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우린 때 뭉치 만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김중철씨의 불가사리에 대한 해석은 여러모로 당대 버블경제의 끝자락에서 만난 IMF 경제위기라는 괴물을 떠올리게 한다. 경제개발로 마치 불가사리처럼 집어삼키며(이 불가사리가 먹어치운 것은 아마도 과거의 가치들이 될 것이다) 빅뱅해온 나라의 미망이 모두 헛된 부질없는 것이라는 질책으로 읽힌다. 그 징후들처럼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1998년)는 불가사리의 그 모습처럼 허망하기만 하다. 여기서 불가사리는 두 가지 뜻, 즉 ‘불+가살(可殺 : 불로써 죽일 수 있다)’과 ‘불가살(不可殺 : 죽일 수 없다)’중, 후자를 채택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자본주의의 욕망이라는 것이 채워질 수 없는 무한대의 증식을 예고하기 때문인 것 같다. 즉 욕망은 그 자체가 허망하다는 인식, 즉 내부에서의 자성을 통해 없어지는 것이지 외부적인 조건으로는 없앨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불가사리는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가. 참여정부 이후 난항을 겪고 있는 부동산 대책을 두고 볼 때 규제와 통제를 통해 줄이려 하는 불가사리는 도통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과거에 비해 불가사리는 약한 자의 것을 빼앗아 더 몸집을 불려 양극화 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정부는 부동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지 못했다.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접근이 아닌 그 때 그 때의 임기웅변적인 정책으로 정부에 대한 불신만 더 커지면서 불가사리는 이제 통제불능의 크기를 예고하고 있다.

불가사리를 없애는 유일한 길
북핵이든, 양극화 현상이든 그 기저에는 반드시 공포가 자리잡는다. 이 두 문제는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비롯되는 운명적인 전쟁의 공포와, 그 공포가 양산해내는 마구잡이식 성장이라는 포름알데히드를 먹고 자란 괴물이다. 괴물의 성장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공포를 걷어내는 일이다. 공포가 만들어내는 것은 외부에 대한 불신이며, 내부에 저 스스로 만드는  헛된 미망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저 스스로 공포에 휩싸이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모두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것들이다. 그 공포를 조장하는 그 누군가를 정확히 직시하는 것, 그것이 불가사리라는 괴물을 없애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Posted by 더키앙

숫자숭배에 지배당한 위험한 우리 사회

정지영 아나운서의 퇴진까지 가져온 밀리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는 숫자 놀음에 경도된 우리 사회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것은 출판계에서는 ‘판매부수’로 불리며, 영화에서는 ‘관객수’로, 그리고 TV 드라마에서는 ‘시청률’로 불린다. 그것들은 이름만 다를 뿐 그 역할은 비슷하다. 작품에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숫자들이 맡은 역할이다.

숫자들의 권력은 점점 커져서 언제부턴가 우리네 문화계는 콘텐츠 자체의 질에 승부하기보다는 이 숫자를 얻기 위한 무한경쟁에 들어서 있는 느낌이다. 스테디셀러보다는 베스트셀러를, 두고두고 꺼내보는 명작으로 남기보다는 최단기간에 최대의 관객을 끌어 모은 영화를, 그리고 시청자들과 호흡하는 완성도 높은 드라마보다는 욕을 먹더라도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를 추구하고 있다는 얘기다.

‘마시멜로 이야기’가 보여준 숫자놀음의 진수
‘마시멜로 이야기’는 작금의 출판계가 해온 기획 출판의 정점을 보여준다. 책은 작가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전문번역자가 아닌 아나운서 정지영씨의 얼굴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목적은 단 하나. 베스트셀러를 만들려는 것이다. 이러한 출판의 스타마케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부터 연예인들은 작가라는 또 다른 명함을 갖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 연예인들은 자서전에서부터 여행서, 수필, 어학교재, 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을 냈다. 일찍부터 출판사들은 스타마케팅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실제 출판사 얘기를 들어보면 비디오를 갖춘 선물세트의 성격을 띤 서적류에 있어서는 상당한 돈이 오간다고 한다. 그만큼 스타마케팅을 활용한 책에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러한 스타마케팅을 활용한 책들을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중 ‘마시멜로 이야기’가 모난 돌이 된 이유가 그 책이 추구했던 베스트셀러에 있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이러한 책들이 과연 출판계에 진정으로 도움이 될 것이냐는 점이다. ‘마시멜로 이야기’의 경우 원 번역자는 이 책이 “1만 부나 나갈까 싶었지 이렇게 많이 팔릴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내용은 좋지만 밀리언셀러감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 말은 책 자체의 내용보다 정지영씨의 이미지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걸 말해준다. 즉 이러한 책들은 스타들의 이미지를 포장한 ‘상품’의 성공이지 콘텐츠 자체로 승부한 ‘서적’의 성공으로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대리작가들과 얼굴마담 스타들만 늘어나는 출판계는 당장의 이익을 위해 미래의 독서군을 빼앗는 사태를 예고한다. 이 사건은 정지영씨의 윤리적인 문제보다 더 앞서, 이러한 베스트셀러라는 숫자놀음에 빠져있는 출판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

영화의 관객수와 드라마의 시청률
그런데 이러한 숫자 경도 현상은 출판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에서 관객수로, 드라마에서는 시청률로 대변된다.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최고의 수치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영화 ‘괴물’과 드라마 ‘주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괴물’은 개봉 그 자체부터 괴물다웠다. 칸느 영화제에서의 호평(수상이 아니다)을 통해 솔솔 불어온 괴물에 대한 기대감은 마치 괴물의 탄생처럼 저 한강 밑바닥에서부터 차츰차츰 커져갔다. 그리고 대낮에 버젓이 등장한 괴물에 대해 일제히 언론들은 호평을 쏟아냈다. 비평가치고 괴물 평 안 해본 사람 없을 정도로(이 영화는 실제로 비평가들의 비평 욕구를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홍보가 된 이 영화는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이 엄청난 속도로 관객몰이를 시작했다. 여기에 언론들은 ‘몇 일 만에 몇 만 돌파!’라는 식의 기사들을 쏟아냈다. 엄청난 정보의 홍수들로 범람하는 인터넷이라는 강물 속에서 뛰쳐나온 ‘괴물’은 일순간 ‘정보의 획일화’를 불러 일으켰다. 이제 어딜 가든 우리는 괴물에 대한 기사들을 보게 되었다. 그 숫자의 압력은 지대한 것이어서 우리를 극장 앞으로 가게 만들었다.

그런데 괴물이 사라진 지금까지 그 혼령은 여전히 인터넷을 떠돈다. 새로운 영화가 등장할 때마다 나오는 ‘○○, 괴물의 흥행 넘을까’류의 글들이다. 이러한 기사들은 괴물의 숫자를 다시 떠올리는 힘을 발휘하는 동시에, 새로 등장할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끄집어낸다. 그런데 엄밀히 생각해보자. 이 기사는 정보일까. 홍보일까. 정보라기보다는 홍보에 가깝다. 물론 ‘타짜’와 같이 19세 이상가 영화로서 500만 관객을 넘은 경우, 그것이 기사로 나왔다면 정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홍보로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대박 영화들에 조명이 집중되는 시각, 소외되고 있는 타 영화들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관객수는 TV로 오면 시청률로 변신한다. 드라마 ‘주몽’에 많은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위 40%대를 넘는 시청률을 유지하는 것은 드라마적인 재미 이외에도 시청률의 그 숫자가 한몫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제 시청률은 권력이 되었다. ‘주몽’에 대한 비판이 어려운 것은 그 40%라는 막연한 시청률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다. 이것은 ‘주몽’이외에도 수위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드라마들 모두가 갖고 있는 무언의 압력이다. 시청률이 권력이 된 상황은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무조건 시청률에만 올인하여 결국 시청률은 높으나 완성도는 떨어지는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드라마의 존재기반은 드라마 자체가 아닌 시청률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제는 ‘높은 시청률 = 완성도 높은 드라마’라는 등식은 깨지게 된다.

예술작품은 재미없다는 말은 옛말(?)
과거에 흔히 우리는 ‘예술작품은 재미없다’는 식의 자조적인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러나 이 얘기 속에는 예술성과 상업성은 별개라는 의식이 있었다. 또한 이 얘기는 상업적으로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예술적으로도 실패는 아니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문화계에서 이러한 얘기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듯 보인다.

영화 ‘괴물’에 대한 관심은 ‘재미있다’는 점에 ‘작품성이 있다’는 두 가지 요소를 함께 자극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칸느 영화제라는 작품성의 공간에서 벌어진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드라마 ‘주몽’에 대한 관심의 증폭 역시 ‘최초의 고구려사에 대한 접근’이라는 가치와 ‘퓨전사극’이라는 재미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물론 ‘마시멜로 이야기’ 역시 여타 연예인과는 다른 정지영 아나운서라는, 무언가 지적인 면모와 미모를 함께 갖춘 인물로 인해 가능했다(요즘 아나운서들의 전성시대는 바로 이 직업이 갖는 양면성에 비롯한 부분이 많다).

그렇다면 이제 예술작품(완성도 높은 작품)도 재미가 있다는 얘기인가.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보다는 거꾸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이 이제는 작품성이라는 부동의 지위까지 얻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좀더 대중과 가까워진 예술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으로도 읽을 수 있으나, 그럼에도 이제는 잘 팔리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 불리는 권력까지 부여한 혐의를 지울 수는 없다. 이로써 진정한 예술작품들은 예술로서도, 상업적으로도 소외 받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보다 다양한 콘텐츠를 즐기면 안 되는 것인가
우리는 현재가 다양한 콘텐츠의 시대라는데 이견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런 다양한 콘텐츠들을 실제로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은 마치 다양성이 보장된 사회로 가는 징후로 얘기됐으나, 실제 우리의 삶은 그 중 ‘선별된’ 몇 개의 정보를 누리는 정도의 삶을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은 콘텐츠와 정보들은 어떤 식으로든 선별되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가 된다. 그런데 그 선별과정은 과연 투명한가. 아니 공정한가. 이 정보들을 선별하는 순위 혹은 수치라는 근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부분에 우리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수치는 콘텐츠의 질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단순한 수치가 아닌, 다양한 작품들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는 그 속에서 독자들과, 관객들과, 시청자들의 제대로 된 선택이 가능해질 것이다.

Posted by 더키앙

‘마시멜로 이야기’사건으로 본 출판계의 문제

아나운서 정지영씨의 ‘마시멜로 이야기’ 번역을 둘러싼 일련의 발표들을 보다 보면 마치 ‘범죄의 재구성’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거기에는 밀리언셀러라는 돈 냄새가 물씬 풍기고, 속고 속이는 관계들이 난무한다. 출판사는 이중번역을 했다고 하고, 원 작가는 대리번역이라고 한다. 출판사는 정지영씨가 그 사실을 몰랐다며 죄송하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정지영씨는 정말 몰랐으나 그래도 물의를 빚은 데 대해 죄송하다는 입장을 보인다.

그런 대로 그림조각이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 만일 출판사가 정지영씨 모르게 이중번역을 하고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면 그건 정지영씨가 출판사에 의해 이용당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정작 정지영씨는 이 사태에 대해 출판사를 상대로 어떠한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일까.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보자. 그것의 진실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를. 진짜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말해주는 현 출판계의 대필 관행이 아닐까.

출판계측에서는 “터질 게 터졌다”는 미지근한 반응뿐이다. 이 말은 벌써부터 저 보이지 않는 곳에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폭탄이 있으면서도 그대로 방치었으며 그게 터졌다고 뭐 대수냐는 말이기도 하다. 상업적으로 과잉경쟁에 들어간 출판 환경에서, 책과 연예인 혹은 유명인의 공생관계 속에 작가(대필자 혹은 대리번역자)의 피해는 공공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늘 약자였기에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정지영이라는 연예인과 밀리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상업적 출판의 최정점에서 그 문제가 터졌다는 점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할 것이다.

골 깊은 출판계의 불황, 어디서 온 것일까
출판사 측은 이 문제에 대해 “골 깊은 출판계의 불황 속에, 나름대로 살길을 모색해보고자 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출판계의 불황을 가져온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마시멜로 이야기’의 원 번역자가 한 말을 떠올려보자. 그는 이 책이 “1만 부나 나갈까 싶었지 이렇게 많이 팔릴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내용은 좋지만 밀리언셀러감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가 책의 미래를 점칠 수는 없는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이 말은 밀리언셀러가 되는 데 있어서 책 이외에 정지영씨의 이미지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책은 이제 컨텐츠의 질로 팔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로서 팔리는 이른바 ‘문화상품’이 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가 상품으로 거래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은 없지만 혹시 여기에 출판계의 불황의 단초가 있는 것은 아닐까.

문화, 상품이라는 양날의 칼
작금의 출판계를 보면 과거 ‘문화’에 찍혀 있던 방점이 거의 ‘상품’쪽으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다. 서점에 가면 거의 비슷한 컨텐츠들을 가진, 포장만 다른 상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럴 듯한 제목과 뭔가 있어 보이는 포장을 가진 상품들은 각종 매체들을 통해 광고되고 홍보된다. 세일은 물론이고, 붙여 팔기, 심지어는 끼워 팔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팔려나간다. 이제 서점의 풍경은 대형할인매장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언제부턴가 책들은 총천연색에, 양장까지 하며 호화롭게 옷을 차려입기 시작했다. 굳이 소설에까지 불어닥친 양장본 열풍은 우리네 출판계가 현재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를 정확히 시사한다.

좋은 컨텐츠에 좋은 옷을 입히는 것을 굳이 욕할 수 있으랴.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소중한 한 가지를 잃었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컨텐츠의 질보다는 광고나 홍보 또는 상품 자체의 포장을 통해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로 책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혹자들은 독자들의 성향이 변하면서 책 또한 변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너도나도 상품을 내보내 성공을 맛본 출판계가 독자들의 입맛을 바꾸었을 혐의가 더 짙다(게다가 상품 제작에 들어간 비용은 고스란히 독자들이 부담하게 된다). 마치 저 패스트푸드가 우리네 먹거리를 침투하듯이.

작가의 소외
컨텐츠보다 상품의 이미지가 책 구매의 조건이 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의 소외 현상이 일어난다. 좋은 컨텐츠의 발굴보다는 어떤 포장을 할 것인가가 출판계 초미의 관심이 된다. “요즘은 뭐가 뜬다더라”하면 관련 서적들이 봇물을 이루는 것은 기획이 작가의 힘보다 더 중요해졌다는 걸 말해준다.

작가는 이제 기획에 종속되면서 기획의 입맛에 따라 컨텐츠를 ‘생산’해야 한다. 물론 확실한 상품성이 있는 작가들의 경우에는 다르다 하겠지만 이들 역시 큰 관점에서 보면 마찬가지의 처지에 놓여 있다. 작가가 대필작가(대리번역가를 포함하여)가 되는 것은 그래서 눈물겹고 처절하다. 작가가 내놓는 작품이 하나의 생명이라고 볼 수 있다면, 그들은 처절한 밥벌이를 위해 현대판 대리모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기가 내놓는 자식이 큰 성공을 이루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대리모의 입장에서는 모두 눈물나는 일이 된다.

따라서 대리모들이 대신 잉태하는 작품의 질이 좋을 까닭이 없다. 대충대충, 적당히, 돈 값만 치르는 것이다. 기획자들이 그걸 관리감독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치밀한들 진짜 낳고 싶어 낳은 자기 자식과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기획자들은 그걸 어느 정도 용인한다. 이제 작가의 시대가 아닌 포장의 시대라고 생각하므로. 출판계에는 온통 얼굴마담 저자들과 대리모들로 넘쳐난다. 책과 얼굴마담격의 저자들은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된다.

작가에 기생하는 출판사와 유명인들
노력의 대가가 작가에게 가지 않는 상황에서 좋은 컨텐츠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 같은 상황이 불러온 것은 인문학과 같은 진짜 컨텐츠를 담은 저작의 실종이다. 조금은 비뚤어지고 못생겼어도 개성이 넘치며 저마다 깊은 속내를 가진 인문학 컨텐츠들은 사라지고, 온통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화장, 그리고 화려한 옷을 입은 실용서들이 봇물을 이루었다. 비디오를 포함한 요가 실용서들은 그 엄청난 로열티에도 불구하고 몸 좋다는 연예인들을 마구 끌어들여 시장에 내놓았다. 물론 마케팅으로 무장한 이들 책들은 잘 팔려나갔다. 그런데 실용서가 무엇인가. 실용서란 ‘써먹는 책’이다. 그러니 그것은 읽는 책이라기보다는 보면서 따라하는 기능성이 강조된 책이다. 책의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지금의 출판계 불황을 만든 요인 중에는 분명 출판계 자체에서 야기한 부분이 상당부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읽는다’는 책의 본질을 ‘선물한다’거나 ‘써먹는다’는 기능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당장의 이익을 위해 책의 ‘읽는다’는 고유가치를 팔아먹은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책과 유명인들(실질적 저자가 아닌)의 공생은, 사실상 그들이 작가라는 모태에 기생하고 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글쟁이들이 작가가 되는 그 날이 오길
작가들은 흔히 자신을 ‘글쟁이’라고 폄하해 표현하곤 한다. 이 말에는 글이라는 창조행위를 하는 작가의 대접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사회 속에서, 그래도 지긋지긋한 밥벌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대리모 역할까지 해야하는 자기모멸감이 들어있다. 우리가 작가라고 부르는 모든 이들이 현재 처해 있는 소외 현상은 이다지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지영씨의 ‘마시멜로 이야기’ 사건이 말해주는 것은, 상업화가 극에 달해있는 우리 출판계 전반의 끔찍한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다. 작가가 대접받지 못하는 한, 출판계의 앞날은 절대로 밝을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은 다시 출판계의 불황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될 것이다. 출판계의 이러한 구조적 모순은 자체적인 노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정부의 손길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자신이 낳아놓은 아이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이 땅의 대리모들이 작가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 시대가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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