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빈, 한 발짝 물러나며 어른이 되어가는
‘하얼빈’의 안중근 의사로 돌아온 현빈의 어른이 되는 과정
영화 ‘하얼빈’은 끝없이 펼쳐진 꽁꽁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나가는 안중근(현빈)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영화 ‘듄’을 촬영했던 카메라 ARRI 65에 담겨진 광활한 압도적인 광경 속에 홀로 걸어가는 안중근의 모습은 너무나 외롭고 고독하며 힘겨워 보인다. 영화 속에서 안중근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큰 정신적인 고통을 감내하는 중이다. 신아산 전투에서 ‘만국공법’을 지켜야 한다며 풀어준 적장 때문에 동료들이 희생되는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하고픈 마음에 얼음바닥에 눕기도 하지만, 그는 끝내 일어나 다시 그 얼음 위를 걸어나간다. 그 때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오는 안중근의 목소리는 그가 무엇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는가를 드러낸다. “그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나는 죽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바로 먼저 간 동지들이 그를 계속 걷게 만들었던 거였다.
‘하얼빈’에서 안중근을 연기한 현빈은 그 두만강을 건너는 장면을 몽골의 홉스골이라는 호수에서 홀로 그 한복판으로 들어가 걷고 쓰러지고 누워버리다 다시 일어나 걷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찍었다고 한다. 영화만 봐도 그 촬영이 얼마나 힘겨웠을지 느껴지는데 이에 대해 ‘유퀴즈 온 더 블럭’에 나왔던 현빈은 의외의 말을 꺼내놨다. 힘들기보다는 그 “고립되어 있고 외로이 있는 상황들이” 오히려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는데 도움이 됐다는 거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얼음 위를 한 발 한 발 끊임없이 내디뎌야 되는 그 마음이 어땠을지 그 혹독한 촬영 현장 덕분에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얼빈’ 촬영 당시, 홉스골에서 있었던 이 이야기는 현빈이라는 배우의 현재를 잘 보여준다. 한때는 비현실적으로 잘 생긴 외모 이야기가 배우로서의 이야기보다 더 많았던 현빈이었다. 하지만 그의 필모를 잘 들여다보면 그가 배우로서 얼마나 노력해왔고, 그 결과 현재의 아우라를 갖게 됐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실제로 그를 스타덤에 올린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면 당시 그가 연기했던 현진헌이라는 인물이 가진 새로움이 느껴진다. 김삼순을 직원으로 둔 까칠한 연하남 사장이다. 그 까칠한 인물이 김삼순에게 점점 빠져들고 그래서 한라산 꼭대기에서 “누구 맘대로 김희진이야! 난 삼순이가 좋다고 그랬지?”하고 말하는 장면에서 시청자들이 울컥하게 된 건 현빈의 눌러주는 연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이 작품을 통해 현빈은 폭넓은 팬층을 확보한 배우가 된다.
그리고 김은숙 작가의 ‘시크릿 가든’으로 현빈은 스타 배우로서의 정점을 찍는데 이 작품 역시 쉬운 역할은 아니었다. 백화점을 소유한 재벌3세 역할이었지만 스턴트우먼인 길라임(하지원)과 몸이 바뀌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판타지가 들어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현빈은 무수한 광고의 모델이 될 정도로 신드롬급의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현빈은 이러한 초절정의 인기 속에서도 그 순간에 깊숙이 빠져들지는 않았다. 그건 평소 부모님이 현빈에게 “큰 거에 빠져 심취해 있으면 작은 것의 감사함을 모를뿐더러, 그것이 없을 때의 상실감도 클 수 있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의 이목이 다 집중되던 그 순간에 현빈은 해병대에 입대했고, 그래서 백상예술대상의 대상 수상소감도 군대에서 군복을 입고 찍은 영상으로 전해졌다.
‘유퀴즈 온 더 블럭’에서 그는 군대가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해줬다고 말했다. “제 일과 현빈이라는 사람을 떨어져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그 시기가 굉장히 좋았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내무반에서 TV를 보다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이 나오면 그게 어느 순간 하고 싶은 거예요. 내 직업을 내가 이만큼 좋아하고 있고 이걸 놓지 않고 있구나 하는 걸 새삼 느끼게 된 좋은 시간이었죠.”
이 시간들이 자양분이 되어 현빈은 전역 후 보다 성숙한 배우로서의 면모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 ‘역린’으로 첫 사극을 찍었는데, 단 한 줄로 ‘세밀한 등 근육’이라고 써 있는 그 몸을 만들기 위해 헬스가 아닌 맨 몸 운동으로 잔근육을 만들 정도로 그는 연기에 진심이었다. 드라마 ‘하이드 지킬, 나’에서는 이중인격을 가진 인물을 연기했고, 영화 ‘공조’에서는 임무를 받고 남한으로 내려와 남한 형사와 공조 수사를 진행하는 북한 형사를 연기했다. ‘협상’에서는 처음으로 악역에 도전했고,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는 실제 게임 속으로 들어가는 판타지 설정의 드라마에 그의 연기가 현실감을 부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사랑의 불시착’으로 또 한 번의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며 함께 연기했던 손예진과 세기의 결혼에 골인해 가정을 이뤘다.
이러한 일련의 성장 과정들이 있어서일까. ‘하얼빈’으로 돌아온 현빈은 어딘가 달라보인다.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보다 깊이있게 담아내고 있는데, 그건 그 서른 즈음에 죽을 걸 알면서도 그 길을 외면하지 않고 걸어간 안중근을 이해하려한 그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또한 ‘하얼빈’에서 현빈은 다른 배우들과의 앙상블에 있어서도 도드라진 면모를 보인다. 물론 그가 주인공이지만 함께 독립 투쟁을 한 다른 인물들이 똑같이 주목될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하얼빈’은 안중근 한 사람만이 아니라 우덕순(박정민), 이창섭(이동욱), 김상현(조우진), 공부인(전여빈) 같은 여러 독립군의 면면이 살아있는 작품이 됐다.
“내가 한발짝 뒤로 물러나면서 어른이 되는 것 같다.” ‘유퀴즈 온 더 블럭’에서 현빈은 가정을 꾸린 후의 변화를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점점 뒤로 가면서 이 상황들을 책임져가는 것. 내 중심에서 내가 중심이 아닌 사람이 점점 되어가는 것이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아마도 현빈의 연기에서 느껴지는 깊이는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한발짝 뒤로 물러남으로써 생겨나는 여유는 깊이를 만든다. 연기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현빈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글:국방일보, 사진:영화'하얼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