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인물

김혜자, 변화무쌍한 국민엄마의 여러가지 얼굴

D.H.JUNG 2025. 4. 2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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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아름다운’으로 손석구와 부부가 된 김혜자의 새 얼굴

천국보다 아름다운

“이러고 돈 버는 걸로 너네 부모 내복 사드렸니?” 험상궂은 조폭들이 빚독촉을 하러 온 집에서 해숙(김혜자)은 빚진 아들은 한강에 갔고 자신은 가진 게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강짜를 놓는다. 결국 “똥 밟았다”며 조폭들이 포기하고 돌아가자 해숙은 본색을 드러낸다. 조폭들은 해숙이 그 집에 사는 남자의 엄마라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해숙 또한 그 남자가 빌려쓴 돈을 받으러 온 일수꾼이다. 그 남자에게 자기가 “사람도 죽인다”며 칼을 뽑아 들자 남자는 가진 돈을 털어 놓는다. 

 

JTBC 토일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의 이 첫 장면은 김혜자라는 배우가 얼마나 변화무쌍한 얼굴을 갖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처음에는 저 조폭들이 그러했듯이 ‘엄마의 얼굴’로 모습을 드러내지만 금세 돈 받으러온 일수꾼의 냉혹한 모습으로 얼굴을 갈아 끼운다. 물론 목소리는 김혜자 특유의 나긋나긋한 톤 그대로지만, 측은했다가 화를 냈다가 자포자기 한 표정에서 험한 표정을 짓는 그 변화 속에서 이 인물이 주는 감정은 계속 바뀐다. 이것이 바로 김혜자라는 배우가 부리는 연기의 마법이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에서 해숙은 실로 여러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다. 험하게 일수일을 하며 평생을 살아왔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남편 고낙준의 병수발 때문이라는 건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빚을 받으러 갔다가 아빠에게 학대받던 영애를 빚대신 데려다 딸처럼 키워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코미디와 판타지도 뒤섞여있다. 해숙의 삶은 힘겹기 그지없고, 그래서 결국 남편도 죽고 자신도 죽게 되는 비극이지만 드라마는 이들이 천국에서 다시 만나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다. 그래서 처절한 삶의 비극은 가볍고 발랄한 희극과 겹쳐지고, 무겁디 무거운 삶의 현실은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죽음의 판타지를 오간다. “하루 같이 살면은 하루 더 정이 쌓여서 예쁜 건가? 지금이 우리 마누라 제일 예뻐요.” 죽기 전 남편이 했던 그 말 때문에 80의 나이를 선택한 해숙은, 천국에서 만난 젊은 나이를 선택한 고낙준(손석구) 앞에서 아연실색한다. 80의 몸으로 천국에서 젊은 남편과 함께 살아가게 된 해숙 앞에 갑자기 나타나 남편의 품에 안기는 젊고 예쁜 솜이(한지민)가 등장하면서 나이를 뛰어넘는 삼각관계(?)가 예고된다.

 

이처럼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희비극이 얽혀있고, 그래서 비극이 희극처럼 그려지는 드라마지만 그 웃음의 끝에는 묵직한 비극의 예감을 주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작품이 다름 아닌 김혜자가 연기하고 2019년작 ‘눈이 부시게’의 제작진인 이남규 작가와 김석윤 감독이 뭉친 작품이기 때문이다. ‘눈이 부시게’ 역시 20대의 나이에 시간여행을 하는 혜자(한지민)가 시간을 잘못 돌려 70대 노인이 되며 벌어지는 코믹한 해프닝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70대 노인 혜자(김혜자)의 치매 증상이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시청자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죽어서 천국에 간 혜자가 그 곳에서 만나게 되는 생전의 인연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참이다. 결국 죽음 이후의 천국의 삶을 그리지만, 죽음 이전의 삶에 담긴 애환 가득한 이야기가 채워질 것으로 보인다. 즉 천국의 삶은 웃음이 터지는 희극이지만, 거기서 환기되는 현실의 삶은 비극일 가능성이 높다. 

 

삶과 죽음, 희극과 비극,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이 작품은 그래서 김혜자에게도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벌써 팔순을 넘긴 나이지만 여전히 현역 최고의 배우로 살아가는 그녀는 마치 ‘변검’을 하듯이 여러 얼굴들을 순간순간 갈아끼우며 이 다양한 경계를 넘나드는 드라마를 종횡무진한다. 팔순의 나이에도 여전한 소녀 같은 얼굴을 드러내기도 하고, 그 나이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자애로운 엄마의 얼굴과 더불어, 때론 정반대로 냉혹하고 살벌한 얼굴로 변하기도 한다. 실로 김혜자가 지금껏 연기해온 여러 작품 속 인물들의 다양한 얼굴들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김혜자는 ‘국민엄마’라는 칭호를 얻은 배우였다. 그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은 바로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22년 간 방영됐던 ‘전원일기’다. 그 작품에서 엄마 역할을 하며 매주 얼굴을 내밀었으니 시청자들에게 김혜자가 국민엄마로 각인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배우에게 고정된 이미지만큼 큰 리스크는 없다. 김혜자는 그걸 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배우이기도 하다. 91년에 방영됐던 ‘사랑이 뭐길래’에서는 가부장적인 남편 때문에 기죽어 살면서도 소심한 복수를 하는 당대의 엄마 역할로 변신했고, ‘엄마가 뿔났다’에서는 가사노동 파업선언(?)을 하는 엄마의 파격을 보여줬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서는 광기어린 모습으로 모성애의 끔찍함을 드러내는 연기를 통해 ‘국민엄마’라는 칭호에 갇히지 않는 배우의 공력을 드러냈다. 이 작품으로 김혜자는 아시아 배우 최초로 LA비평가협회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디어 마이 프렌즈’의 기억을 잃어가는 노년의 희자 역할이나,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라는 엔딩 내레이션으로 유명한 ‘눈이 부시게’의 혜자 역할, 그리고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제주에서 기구한 삶을 살아온 동석 엄마를 소화하며 같은 엄마 역할도 다양한 결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김혜자는 손수 증명해 보였다. 그러니 ‘천국보다 아름다운’ 같은 다채로운 얼굴을 요하는 작품 속에서도 별다른 이물감 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연기는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간 연기로 쌓아온 이 많은 엄마의 얼굴들이 자유자재로 꺼내지고 있다고나 할까. 

 

사실 연기라고는 하지만 손석구와 부부 연기를 한다는 것이 쉬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석구 앞에서 토라지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는 소녀 같은 김혜자의 모습은 나이가 주는 편견 또한 깨주기에 충분하다. 나이 들면 여자가 아닌 아내나 엄마로 불리고, 또 남자가 아닌 남편이나 아빠로 불리는 그 역할이 당연하다 여기는 건 얼마나 큰 편견인가. ‘국민엄마’라 불려도 그것이 하나의 고정된 얼굴이 아닌 다채로운 얼굴로 떠올리게 만드는 김혜자를 보다보면, 누군가를 그저 하나의 역할로 고정시켜 바라보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글:국방일보, 사진: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