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작가가 직물처럼 짜낸 인간 증명의 대서사시
‘다 이루어질지니’, 사탄 김우빈과 사이코패스 수지가 그려낸 천년의 사랑
이건 마치 김은숙 작가가 모래로 쌓아 만들어낸 거대한 세계 같다. 태초와 현재, 고려와 아라비아, 한국과 두바이, 현실과 상상... 같은 무수한 씨실과 날실을 엮어 짠 이야기의 직물 같다. 그것이 모래 같은 상상의 이야기를 재료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기처럼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야기는 구체적인 물질이 아니어도 보는 이의 가슴을 파고든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샤흐라자드가 그 힘을 보여줬듯이.
아무 것도 없이 바람에 서걱거리는 모래만 가득한 사막에 모래바람을 타고 나타나는 지니의 이야기가 탄생한 것도 그래서일 게다. 김은숙 작가의 넷플릭스 드라마 <다 이루어질지>는 바로 그 지니의 이야기를 가져와 시공을 뛰어넘는 대서사시로 재해석했다. 마술램프에서 나타나 무엇이든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주인공이니 일단 일상과 맞닿아 있는 평범한 이야기일 수는 없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시공을 초월하며 마법을 부려 누군가를 부자로 만들어주기도 하고 때론 젊어지게 해주기도 하는 존재가 주인공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중요한 건 이 상상의 세계로 빚어진 이야기가 우리의 삶에 어떤 비의를 전할 것인가다. 그건 알라딘의 마술램프 이야기로 익숙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에 의해 역설적으로 파멸하는 인간들을 통해 전하는 욕망의 허망함에 대한 것이다. 마술램프의 정령 이블리스(김우빈)는 그래서 소원을 이뤄지게 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그 세 가지 소원을 통해 인간을 시험대에 올리는 존재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 욕망에 의해 파멸에 이른다. 이블리스가 신이 창조해낸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하찮게 여기는 이유다.
하지만 고려시대 아라비아까지 노예로 끌려왔다가 이블리스를 만나게 된 소녀는 오히려 그를 시험대에 올린다. 세 가지 소원을 죽어가면서도 모두 타인을 위해 빌었던 것. 이블리스는 이제 환생으로 다시 태어난 소녀를 통해 자신이 하찮게 여겼던 인간과 또다시 내기를 벌여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그 소녀는 바로 기가영(수지)이다. 사이코패스로 개구리의 배를 가르고 또 가르면서도 아무런 감정이 없던 소녀. 그래서 엄마도 그녀를 일찌감치 버렸지만, 괴물이 될 수도 있었던 그녀를 사람으로 만든 건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다.
“니가 누구를 안아 주모 내도 니를 안아줄 끼고 니가 누구를 칼로 끄으모 내도 니를 칼로 끄을 끼다. 니가 누구를 직이모 내도 니를 죽일 끼다. 이게 내랑 니 규칙이다, 알았나?” 할머니가 내건 규칙과 더불어 가영은 닭 잡는 낫으로 글을 가르쳐주고 개를 향하던 끌로 나무를 파 장승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날 선 칼로 요리를 하게 해준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감정 없는 돌멩이 같은 가영을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보석처럼 키워줬던 것.
인간은 하찮은 존재라는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려는 지니 앞에 기가영은 의외의 인간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이기 때문에 욕망 자체가 별로 없다. 시험에 빠뜨리려는 이블리스와 시험 자체가 무소용인 기가영의 대결은 그래서 팽팽해진다. “우리 할머니가 인간은 선한 존재랬어. 세상에서 나쁜 건 나 하나야.” 그렇게 말하며 네가 틀렸다는 기가영 앞에서 이블리스는 수천년 간 자신이 봐왔던 인간의 파멸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기가영은 첫 번째 소원을 그 증명의 내기에 쓴다. 길에서 만나는 5명의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고 그들이 과연 파멸하는지 아닌지를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이코패스인 기가영이 순수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증명을 해낼 대표자로 나선다는 설정은 흥미로운 면이 있다. 인간적 관점에서는 감정 없는 사이코패스가 연쇄살인마로 주로 그려지지만, 영겁의 세월 동안 삶과 죽음을 무수히 목격하고 경험한(영생 혹은 환생을 통해) 그 전지적 신의 관점에서 보면 사이코패스는 감정이 없이 욕망도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건 마치 이블리스의 시선과도 비슷하다. 죽이고 살리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는 이블리스나 기가영이나 그리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 이블리스와 사이코패스 기가영의 대결은 흥미진진해진다.
그 대결은 일종의 수수께끼다. 과연 그런 순수한 인간이 존재하는가를 두고 벌이는 정령과 인간의 ‘세 가지 소원’이라는 룰을 갖고 벌이는 도박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지적 신의 관점으로 흘러가는 서사는 그래서 보통의 드라마들과는 다른 진입 통로를 갖고 있다. 일상적 서사 안에서 극적 사건이 벌어지며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수천 년의 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일이고, 그것도 고려와 아라비아, 한국과 두바이, 천국과 지옥 등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반 판타지 서사의 진입 통로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이블리스와 기가영이 사막 한 가운데서 만나 티격태격하며 벌이는 초반의 이야기는 일상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때론 황당하고 때론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진입 장벽을 넘어서면 이제 이야기의 무한한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정령과 인간의 대결과 사랑 그리고 그 안에 담겨진 운명과 슬픔, 그리움 같은 것들을 통해 작품이 건네는 기막힌 위로와 감동 그리고 깨달음 같은 것을 경험할 수 있다.
13부작으로 넷플릭스 드라마로서는 꽤 긴 호흡처럼 초반에는 여겨졌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13부작도 부족할 지경의 폭발적인 상상의 세계들이 계속 펼쳐진다. 그러면서 이 모래폭풍처럼 다가와 인간들을 시험에 빠뜨리다 자신도 시험에 빠져버리는 이블리스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과 삶의 비의를 슬쩍 들여다보게 된다. 인간은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13부를 다 들여다보고 나면 이런 질문이 가슴 한 켠에 남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김은숙 작가는 특유의 은유적 표현들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를 작품 속에 담았다. 사탄이라 불리지만 더할 나위 없이 선해 보이는 이블리스나, 사이코패스지만 그 차가움으로 누구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기가영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렇고, 영원한 삶을 욕망하는 인간이지만 정반대로 불멸자가 되어 고통받는 반인반령의 존재도 등장한다. 특히 모든 걸 다 이루어지게 해주는 전지전능해보였던 이블리스가 정작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 앞에 무력해지는 상황이나, 금은보화를 원하는 욕망 속에서 파멸하는 한 도시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삶의 아이러니를 기막히게 표현해낸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손아귀에 쥐어진 것처럼 여겨지다가도 어느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로 형상화된 지니의 모습은 그 자체가 이러한 욕망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진흙으로 빚어진 인간은 그래서 그 모래를 끝없이 갈망하며 손아귀에 쥐려 하지만, 결국은 죽어 그 모래 같은 한 줌의 재로 사라지는 운명을 뒤늦게야 깨닫지 않던가. 결국 인간의 증명은 그런 가진 것에 의한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가진 것을 잃었을 때 갖게 되는 슬픔과 눈물 같은 것일 수 있다고 김은숙 작가는 이 드라마를 통해 말하고 있다. 모래알처럼 그저 억겁의 세월 동안 부서지고 스러질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누군가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슬퍼하는 감정들이 더해져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사진: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