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중계보다 재밌는 스포츠 예능의 세계

“얘네가 미들 공격이 없다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 빨리 한 쪽으로 와서 투 블로킹 해야지.”
김연경 감독은 정관장 레드스파크스와의 경기를 준비하며
선수들에게 상대팀이 중앙 공격이 없으니
우리쪽 중앙 수비수가 양 사이드로 들어가
두 명이 블로킹을 하면 승산이 있다는 걸 강조했다.
그리고 10대2로 지고 있는 상황에 이 전략은 그대로 먹혀들었다.
투 블로킹으로 점수를 따내며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
이 한 포인트가 기점이 되어 점수는 11대11까지 바짝 따라붙었다.

MBC 배구 예능프로그램 <신인감독 김연경>의 이 한 장면은
이 스포츠예능에 최근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아마도 중계방송이었다면 이 블로킹 장면은 흔하디 흔한 1점 포인트를 얻는 장면으로 지나갔을 게다.
하지만 <신인감독 김연경>은 그 포인트가 그냥 나온 게 아니라
김연경 감독의 전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이 한 수로 인해 팀 분위기가 상승세를 가져왔다는 걸 보다 디테일한 편집을 통해 보여준다.
그건 마치 <슬램덩크 더 퍼스트>나 <하이큐> 같은 스포츠를 소재로 하는 애니메이션의 편집 방식과 유사하다.
경기를 보여주지만, 중간 중간 어떤 한 포인트를 내는 순간에
그 점수가 나기까지의 준비 과정들을 플래시백으로 편집해 보여준다.
그러니 그 한 점의 타격감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시청자들은 김연경의 작전이 바로 바로 선수들의 경기를 통해 들어맞는 순간을 접하며 열광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여자배구가 이렇게 재밌는 스포츠였나.

올해 은퇴한 김연경은 선수 시절 ‘언더독의 해결사’로 불렸던 인물이다.
일본 최하위팀 JT마블러스에 입단해 창단 사상 첫 우승을 안겼고,
배구 최강국 튀르키예의 만년 하위팀 페네르체바에 들어가 창단 최초 유럽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6위 성적의 중국 상하이 유베스트, 튀르키예 엑자시바시에서도 모두 우승을 이끌었다.
<신인감독 김연경>은 바로 그 김연경이 여러 이유로 은퇴하게 된 여자배구 선수들로 팀을 꾸려
신인감독에 도전하는 과정을 담은 스포츠예능이다.
예능이라고 하면 대충 은퇴 선수들의 방송 도전 정도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이 프로그램은 목표 자체가 다르다.
2부리그가 없어 팀에서 밀려나면 기량이 있어도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선수들이다.
그래서 이들의 목표는 다시 프로팀이나 실업팀에 복귀해 선수로 뛰는 것이다.
프로 제8구단을 목표로 ‘언더’에서 ‘원더’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담아 팀명을 ‘원더독스’라 정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김연경의 지도 하에 성장을 거듭한 원더독스는
2024-2025 시즌 프로통합 준우승팀인 레드스파크스까지 꺾으며
팀의 목표였던 50% 승률을 달성했다.
또한 선수들의 목표였던 프로팀과 실업팀에 실제 복귀하는 사례도 이어졌다.
은퇴했던 이나연 선수가 핑크스파이더스에 입단했고,
김현정 선수 또한 지난 9월 수원시청 배구단에서 실업 배구선수로 뛰게 됐다.
리얼 성장담이 갖는 남다른 몰입감 때문일까.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으로서는 놀라운 무려 4.9%(닐슨 코리아)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특히 광고의 지표가 되는 2049 시청률은 4주 연속 주간 방송 프로그램을 통틀어 1위를 기록했다.

<신인감독 김연경>이 보여주고 있는 건 실제 스포츠 중계보다 더 재밌는 스포츠예능의 강력한 영향력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여자배구에 관심을 갖게 된 팬층이 급증했다.
실제 이번 시즌의 마지막 경기로
V리그 최다 우승팀이자 2024-2025 시즌 프로통합 우승팀인 핑크 스파이더스와 치러진 직관 경기에는
3일 만에 약 1만 명이 신청해 전석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원더독스의 팬들은 시즌2 제작은 물론이고
나아가 MBC가 프로배구팀을 창단해 제8구단이 되어달라고 요구하고 있을 정도다.
무엇이 스포츠 자체에도 변화를 만드는 스포츠예능의 시대를 열게 한 것일까.

과거 스포츠예능은 스포츠 자체보다 예능에 초점이 더 맞춰진 가벼운 경향이 있었다.
KBS <천하무적 야구단>이나 <우리동네 예체능> 같은 프로그램이 그 사례다.
하지만 KBS <씨름의 희열>이 방영되면서 스포츠예능은 실제 스포츠까지 변화시키는 묵직한 힘을 발휘했다.
점점 저변이 사라지고 있는 씨름을 마치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연출하고,
다각도의 카메라로 연출된 박진감 넘치는 장면들을 보여주면서 팬층이 생겨났다.
마침 코로나 때문에 마지막 직관 경기가 실제로 치러지진 못했지만,
순식간에 전석이 매진되는 놀라운 결과도 만들어졌다.
스포츠예능의 변화는 방송에 진출하는 스포츠스타들에게도 변화를 일으켰다.
강호동이나 서장훈처럼 방송인으로서 출연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자신이 뛰었던 스포츠를 중흥시키기 위한 진정성을 갖고 출연하기 시작했다.
김성근 감독이 출연해 프로야구의 막강한 저변을 만든 JTBC <최강야구>는 단적인 사례다.
또 축구 스타 최용수가 감독이 되어 꾸린 팀으로 K3, K4 리그 팀과의 실전을 벌이는 <슈팅스타>도 마찬가지다.

스포츠예능이 스포츠중계보다 재밌는 이유는 촬영과 편집에 있어서 보다 자유도가 넓기 때문이다.
<신인감독 김연경>에서 선수들은 저마다 마이크를 달고 경기에 들어간다.
경기를 찍는 카메라도 선수 한 명 한 명을 따라다닐 정도로 세분화되어 있다.
그러니 스포츠중계가 포착해내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와 동작들 하나하나를 이 마이크와 카메라는 잡아낸다.
<슈팅스타>에서는 축구경기에 레이싱 드론이 띄워지고,
선수들 유니폼에 소형 카메라가 부착되어 박진감 넘치는 영상과 음향이 담겨진다.
게다가 생방송이 아니기 때문에 보다 효과적인 편집이 가능하다.
마치 경기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디테일한 장면들이 가능해지는데,
이건 지금의 팬들이 원하는 것들이다.
이제 스포츠중계는 스포츠예능에 배워야 할 상황이 됐다.
경기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중계를 팬들이 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진: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