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계’와 ‘사랑의 유형지’의 노출이 예술적인 이유

‘야한 것’과 ‘예술적인 것’은 상반된 것일까. 왜 똑같이 적나라한 성기 노출을 해도 어떤 것은 포르노가 되고 어떤 것은 예술이 될까. 그것은 ‘노출을 위한 노출’인가 아니면 ‘작품의 통일성 속에서 반드시 드러나야 하는 노출’인가의 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안 감독의 ‘색, 계’와 ‘실낙원’의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사랑의 유형지’는 분명 야하긴 하지만 후자에 속할 것이다. 이 두 영화는 정말 야하다. 예술적으로.

‘색, 계’의 노출, 합일될 수 없는 육체의 경계를 그리다
아무리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에 빛난다 해도, 또한 이안 감독의 작품이라 해도, ‘색, 계’의 무삭제 개봉은 지금까지의 우리네 상황을 두고볼 때 파격적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가위질 없이 제대로 볼 수 있게된 건 정말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색, 계’는 노출 신을 잘라내면 이해할 수 없는 영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살과 살의 부딪침만으로 가장 적확하게 표현될 수 있는 이 영화는 그 교접의 욕망을 나타내는 ‘색’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존재의 ‘계’를 그리고 있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수많은 ‘경계들’이다. 그것은 크게는 일본과 중국이라는 나라 사이의 경계이기도 하고, 홍콩이라는 동서양 문화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 배경으로 제시되는 경계 속에서 왕치아즈(탕웨이)와 이(양조위)는 스파이와 스파이가 제거해야할 남자로서 마주 서게 된다. 왕치아즈는 그 남자와 마주하기 위해 수많은 자신 속의 경계를 넘어선다. 정조를 버리고 막부인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의 경계를 넘은 왕치아즈는 자꾸만 이에게 빠져들면서 자기존재의 경계에서 서성댄다. 그러니 이 경계의 최전선은 왕치아즈와 이가 교접하지만 하나가 될 수 없는 살의 경계이다. 이로써 ‘색, 계’의 노출은 가장 파격적이면서도 가장 주제를 압축하는 예술로 승화된다.

‘사랑의 유형지’의 노출,  사회적 규범을 넘는 사랑을 그리다
‘사랑의 유형지’는 여러 모로 와타나베 준이치의 ‘실락원’을 닮았다. 사회적 규범을 넘어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드는 불륜남녀는 급기야 사랑의 파국으로 치닫는다. “날 사랑한다면 날 죽여줘요”라고 말하는 후유카(테라지마 시노부)는 결국 그녀를 사랑하는 키쿠지(토요카와 에츠시)의 손에 웃으며 죽음을 맞게된다. 영화는 이미 사회적 규범을 넘어 저질러진 안타깝고 아름다운 사랑과 그것을 법이라는 잣대로 난자해버리는 현실을 병치시킨다. 살인자로 기소된 소설가인 키쿠지는 후유카와의 불꽃같은 사랑을 문학적인 틀로 설명하지만 법은 끔찍할 정도로 그 사랑을 더러운 불륜과 살인으로 몰고 간다.

이미 벌어진 살인사건 후 키쿠지의 조서와 회고담으로 구성된 영화는 사회적 규범은 물론이고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사랑의 힘을 그린다. 따라서 사회적 잣대와 치열한 대결구도를 갖는 영화는 그 반대급부로서 거침없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두 남녀를 세운다. 이들의 안타까운 살들의 부딪침은 결국 이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의 끝이 죽음임을 암시한다. 결국 죽음으로서 사랑을 얻은 후유카는 그 어느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인간의 위대한 사랑을 그려낸다. ‘사랑의 유형지’의 정사 신은 절정과 죽음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조건을 상징적으로 담는다.

노출은 그것이 예술적인 맥락 속에서 보여질 때 가장 파격적이면서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몸이란 그저 생식과 정욕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한 사회와 긴밀하게 연관된 인간의 안타까운 존재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이 노출된 맨살이라 해도 어떤 경우 절망적이고 슬프게 다가오는 것은 몸이라는 유한한 틀이 가진 비극성 때문이다. 몸은 슬프고 그 안에 대부분의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것이 ‘색, 계’와 ‘사랑의 유형지’의 노출이 야하면서도 예술적인 이유다.

728x90

‘색, 계’, 관념의 속살을 뱀처럼 파고드는 영화

“그는 나를 뱀처럼 파고들었어.” 왕치아즈(탕웨이)의 묘사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살들이 마치 서로의 몸 속으로 파고들겠다는 듯이 꿈틀거린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걷어내고 하나가 되기 위한 몸부림은 에로틱하면서도 동시에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것은 적나라한 살점과 몸의 촉점(觸點)들이 서로의 빈틈을 파고드는 두말 할 것 없는 정사장면이지만, 또한 하나가 되기 위한 욕망 속에 안간힘을 쓰면서도 결국에는 경계지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친일파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를 암살하기 위해 막부인으로 위장하여 접근한 왕치아즈. 점차 서로에게 끌리게 되면서 파국으로 가게 된다는 이 영화의 스토리는 어찌 보면 단순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단순해 보이는 스토리 속에 이안 감독은 수많은 ‘경계’들을 만들어놓고 그것들이 서로를 침범하고 넘나드는 긴장감을 부여한다. 바로 이 수많은 경계들을 염두에 두었을 때 영화는 놀라울 만큼 다채로운 의미를 전달해준다.

배경으로 제시되는 2차 세계대전 상황 속에서의 상해, 홍콩은 국가들과 동서양의 경계가 부딪치는 시공간을 제공한다. 경계를 넘고자 하는 욕망은 한 남녀로 봤을 때는 아슬아슬한 정사가 되지만, 국가의 차원으로 보면 전쟁 혹은 문화의 침투가 된다. 일본인과 중국인 그리고 서구인들이 혼재된 거리는 그 자체로 경계를 풀어헤치면서 긴장감을 촉발시킨다. 그 공간 속을 걸어가는 왕치아즈는 양장과 치파오(중국식 복장)를 번갈아 입으며, 사천식 요리를 즐기면서 커피를 마신다. 상해라는 중국의 공간에서 서구의 고전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전쟁선전영화가 삽입되어 극장 밖을 나서는 왕치아즈는 바로 이 혼동의 시공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경계는 외부적 조건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외부적 조건은 왕치아즈라는 여인의 내부 속에 수많은 경계를 만들어낸다. 평범한 대학생이던 왕치아즈는 어느 날 경계를 넘어 연극부에 가입하고, 거기서 또 한 차례 경계를 넘어 친일파 정보부 대장인 이를 암살하기 위해 막부인으로 가장한 스파이가 된다. 이 과정을 이안 감독은 막연한 스토리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왕치아즈의 육체를 통해 그려낸다. 왕치아즈는 담배를 배우고, 술을 마시며, 처녀를 스스로 깬다. 왕치아즈가 세워놓았던 경계는 조금씩 무너진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연극부 동료들도 선을 넘는다.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다.

경계를 넘어서자 왕치아즈는 스파이로서의 자신과 자꾸만 이에게 끌리는 막부인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전쟁이라는 국가적 경계의 해체라는 상황 속에서 촉발된 이 한 여인의 욕망과 경계 사이의 갈등은 그녀와 이의 정사장면을 통해 정확히 그려진다. 초반부 폭력적인 정사장면에서 이가 보여주는 몸의 언어는 그녀를 끌어들이기보다는 밀쳐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정상위가 아닌 후배위의 정사장면은 그 누구에게도 경계를 풀지 않으려는 이의 심리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믿지 않았기에 생존할 수 있었다”는 이의 대사는 그러나 경계를 풀어내자 파국으로 치닫는다. ‘믿었기에, 경계를 넘어섰기에’ 생존할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은유이면서 동시에 인간 삶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라 할 만하다. 제목 자체를 불교용어에서 따온 것처럼 영화는 ‘탐하지만 얻을 수 없는 인간존재’를 그려낸다. 그것을 육체의 부딪침으로 포착한 이 영화의 가장 파격적인 정사신이, 자극적인 충격 이상의 정신적인 충격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