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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도 교과서도 편집이 조심스러워야 하는 까닭

 

인터넷으로 방영된 편집되기 전의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보지 못한 터라 이은결이 했다는 그 국정교과서 풍자 마술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기사에 나온 내용을 보면 이 마술이 직접적으로 국정교과서를 표적으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꽤 의미심장했다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사진출처:MBC)'

영국의 역사학자 케이스 젠킨스가 쓴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책을 들고 나와 방송작가에게 책의 페이지를 임의로 고르게 한 후 책을 덮는다. 그 때 옆에 있던 보조 마술사 두 명이 책을 펼쳤다 덮었다 하면서 그 와중에 작가가 고른 페이지를 찢으려 한다. 이은결은 이들을 제지하며 이런 거 함부로 바꾸면 안 된단 말이야라고 말한다. 나중에 다시 책을 확인한 작가는 자신이 골랐던 페이지가 찢겨져 보조마술사들의 오리가 낳은 알 속에 구겨진 모습으로 들어있는 걸 알게 된다.

 

이 편집된 방송분량을 새정치민주연합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풍자로 해석했다. 따라서 이런 편집이 현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공식 논평했고 국정교과서 풍자로 이은결의 마술이 편집된 것이라면 이제 정부는 시청자들이 보고 즐기는 예능 프로그램의 국정화에도 나서야 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MBC는 이런 주장이 근거 없는 정치공세라고 일축했다. MBC이은결 씨의 마술이 담긴 해당 영상은 책의 페이지를 알아맞히는 것으로, 보는 사람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하고 즐길 수 있는 장면이었고 따라서 유독 국정교과서 풍자로만 해석돼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영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MBC의 공식입장에도 애매한 점이 있다. ‘역사책이 아닌 이라고 표현된 점은 아무래도 이 마술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풍자로 비춰지는 걸 저어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MBC도 이 마술이 국정교과서 풍자로 비춰질 수 있다는 걸 단호하게 부정하지는 않는 모양새다. 즉 공식입장의 내용은 국정교과서 풍자가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라 유독 국정교과서 풍자로만해석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데 유독 국정교과서 풍자로만몰아가는 것에 유감을 표한 것이다. MBC의 입장대로 그 마술을 굳이 국정교과서 풍자로만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또 거꾸로의 논리도 타당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즉 왜 그 마술을 국정교과서 풍자로 보면 안 되는가. 그렇게 보면 큰 일 날 일이라도 있는가.

 

MBC는 편집의 이유에 대해서 시청자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느냐 아니냐에 따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 편집문제를 제기한 시청자들은 거꾸로 생각했을 수 있다. 그 편집된 부분이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장면을 통편집한 것이 의아해서 문제제기를 했을 수 있다.

 

 

결국 이것은 방송이 결국 누구의 것인가의 문제일 수 있다. 물론 <마이 리틀 텔레비전>MBC의 프로그램이니 그 편집권은 MBC의 고유권한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그런 권한이 주어졌다고 해서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편집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라고. 설사 그걸 원하는 시청자가 소수라 편집했고 그래서 그들의 문제제기가 나왔다고 해도 그것 또한 수용해야 하는 게 방송사가 해야할 일이 아니냐고.

 

그래서 사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이은결 방송 분량 편집 그 자체는 그리 중요한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편집에 의해 나타나는 반응들과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대중들의 우려, 그리고 나아가 편집이라는 권력이 어떻게 작동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더 중요하다.

 

흥미로운 건 이 사안에서 우리는 세 가지 종류의 편집에 대한 이야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 첫 번째는 이은결의 마술 속에 등장하는 특정 페이지를 사라지게 하는편집이다. 두 번째는 이 교과서 국정화를 풍자했다고 얘기되는 장면의 통편집이다. 세 번째는 이 사안의 밑바탕을 제공하고 있는 국정교과서가 갖고 있는 편집의 이미지다.

 

안타깝게도 인터넷 방송에서는 분명히 나왔던 그 역사책을 갖고 하는 이은결의 마술 분량을 많은 이들은 보지 못했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풍자를 어떤 방식으로 담은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자 오히려 이야기가 분분해진다. 왜 그걸 편집했냐는 말들이 나온다. 하나로 국정화하며 편집될 수 있는 어떤 것들은 결국 이번 <마리텔> 사안이 보여주는 것처럼 오히려 많은 말들과 대결들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이것은 방송 프로그램이든 교과서든 편집이 조심스러워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Posted by 더키앙

아이유의 ‘zeze’ 불편하지만, 출판사의 과잉도 불편하다

 

아이유의 노래 ‘zeze’의 가사에는 불편한 구석이 분명히 있다. ‘교활이라는 표현도 있고 더러워라는 다소 거친 해석도 있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읽었던 독자로서 이 가사가 등장인물인 아이 제제에 대한 아이유의 직접적인 평가이자 해석이라면 불편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갑작스레 불거진 이 논란에서 많은 대중들이 그토록 날선 비판을 하는 것일 게다.

 


'아이유 앨범(사진출처:로엔트리)'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사 측인 동녘이 직접 나서서 페이스북을 통해 아이유님.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라며 올린 글이 적절한가는 다른 문제다. 동녘측이 제기한 아이유가 제제를 성적 대상으로 봤다는 논리에는 비약이 들어있다. 그 첫 번째 이유로 든 인터뷰 내용에 대한 과잉 해석이 그렇다.

 

“zeze는 소설 속 라임오렌지나무인 밍기뉴의 관점에서 만들었고 제제는 순수하면서 어떤 부분에선 잔인하다. 캐릭터만 봤을 때 모순점을 많이 가진 캐릭터다. 그렇기 때문에 매력있고 섹시하다고 느꼈다.” 아이유의 이 인터뷰에서 동녘측이 주목하는 건 섹시하다라는 단어 하나인 듯하다. 그런데 섹시하다라는 표현이 반드시 성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섹시하다는 표현은 멋있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아이유는 인터뷰 내용에도 들어있지만 제제라는 아이 자체가 섹시하다는 의미로 말한 건 아니다. 오히려 순수하면서도 잔인한모순점을 많이 가졌다는 점, 그런 특성이 섹시하다고 말한 것. 이 모순점에 대한 매료는 이번 아이유의 음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스물셋이란 곡에서도 아이유는 다분히 상반된 이미지들을 나열하며 자신의 진짜 모습이 뭐냐고 대중들에게 질문하고 있다. 자신이 한 이미지로 해석되기보다는 다양한 이미지를 가진 존재로서 모순점 자체도 그대로 내보이는 것. 아이유는 지금 스물 셋의 나이에 이런 점에 매료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동녘의 아이유의 곡 ‘zeze’에 대한 해석은 그래서 일단 이 인터뷰 내용을 섹시하다라는 하나의 글자 그대로 해석함으로써 아이유가 제제를 성적 대상으로 봤다고 단언해버린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서 동녘은 가사를 문제 삼는다.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잎사귀에 입을 맞춰 장난치면 못써 나무를 아프게 하면 못써. 제제, 어서 나무에 올라와 여기서 제일 어린 잎을 가져가.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 해도 어딘가는 더러워 그 안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앞부분에 섹시하다라는 표현을 통해 아이유가 제제를 성적대상으로 봤다고 단언해버리자 가사들도 그런 뉘앙스로 읽히게 된다. 상징적인 표현들은 다양한 해석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 그것이 상징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녘이 오히려 한 가지 관점으로만 몰아세우고 있기 때문에 아이유의 곡 ‘zeze’는 다른 해석이 용납되지 않는 곡이 되어버렸다.

 

아이유의 곡에 나오는 제제라는 인물은 물론 그 모티브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나온 것이지만 반드시 그 인물이라고 단언하긴 어렵다. 왜냐하면 모티브란 말 그대로 모티브일 뿐 거기에 대한 해석은 확장되기 마련이고 다분히 가사를 쓰는 이의 개입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유의 ‘zeze’에 들어있는 제제는 저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제제 그대로라기보다는 그 캐릭터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유 자신일 가능성이 높다. 순진하지만 교활하고 투명한 듯 해도 어딘가는 더럽다는 건 제제를 지칭하기보다는 그 제제를 바라보고 있는 화자즉 아이유의 상태를 말해주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창작과 해석의 자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학대로 인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다섯살 제제를 성적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동녘은 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도 창작과 해석의 자유는 있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이 출판사는 아이유의 곡 ‘zeze’다섯 살 제제를 성적대상으로삼은 곡으로 단언하고 있다.

 

그리고 제제가 순수하면서도 심한 행동을 많이 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는 것도 결국은 심각한 학대에 따른 반발심과 애정결핍에 따른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닌 학대라고 하는 후천적 요인에서 나온 것이죠. 이를 두고 제제를 잔인하고 교활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 생각이 듭니다.’

 

동녘의 이런 지나치게 친절한 작품에 대한 해석과 타인의 작품에 대한 지나친 단정은 과연 올바른 일일까. 다시 말하지만 아이유의 곡 ‘zeze’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노래다. 거기에는 당연히 호불호가 나뉠 수도 있다. 필자의 개인적인 입장은 대중들이 느끼는 불편함에 공감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동녘의 이런 단정들과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나간 작품이 반드시 작가의 의도대로만 읽혀야 한다는 식의 관점이 더욱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최근 벌어지고 있는 국정교과서에 대해 그토록 거센 비판들이 쏟아지고 있는 건 그것이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관점들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팩트를 말하지만 팩트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승자들에게 팩트일 수 있는 것이 패자들에게는 팩트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팩트보다 더 중요한 것이 관점이다. 소수라도 그 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사회라면 그것은 폭력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물론 취향에는 맞지 않을 수 있어도 아이유의 곡 ‘zeze’는 나름의 자신의 관점을 투영시킨 자신만의 해석을 담고 있다. 그녀 역시 노래를 내놓는 순간 그것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이미 대중들의 것이 된다. 그러니 대중들이 그 노래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도 자유다. 이것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도 마찬가지다. 출판사가 나서서 타인의 작품을 맘대로 해석하고 단정하고 자신들의 작품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못내 불편하게 여겨지는 건 그래서다.



Posted by 더키앙

<육룡>의 시대, 진정한 역사 교육이란

 

SBS 사극 <육룡이 나르샤>에는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이라는 실존 역사적 인물 이외에도 이방지, 무휼, 분이라는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과거 같았으면 실제 역사의 왜곡이 아니냐는 질타를 받았을 수도 있는 인물설정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중들은 실제 역사와 가상을 구별할 줄 안다. 사극은 진짜 역사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대 하나의 허구로 꾸며진 드라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대중들이 이렇게 역사적 사실에 허구의 틈입을 허용한 건 단지 재미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거기에 깔려 있는 의도의 진정성 때문이다. 역사라는 건 완벽한 팩트일 수 없다. 그것은 기록하는 자의 시선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의 역사다. 그들의 관점이 담겨진 편향된 역사일 수 있다.

 

거기에 삭제되어 있는 건 다름 아닌 민초들의 역사다. <육룡이 나르샤>에 허구로 들어간 세 인물, 이방지, 무휼, 분이는 그 삭제된 민초들을 대변하는 인물이 된다. 조선을 개국한 건 몇몇 왕들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속에는 민초들 또한 있었고 그들의 희생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육룡이 나르샤> 같은 팩션 사극의 허구를 허용하는 이유가 된다.

 

<육룡이 나르샤>가 과거처럼 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극, 이를테면 <주몽>이나 <선덕여왕>, <태조 왕건> 등등의 사극과 달리 여러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세워 그 다양한 관점들을 포섭하려 하고 있는 데는 지금의 대중들이 생각하는 달라진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즉 역사는 몇몇 한두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 사람의 관점만이 투영된 사극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다른 관점들이 혼합된 사극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달라진 시대에 이제 대중들은 조선을 건국한 인물이 이성계다 라는 말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됐다. 그 이면에는 이방원도 있었고 정도전도 있었다. 또 정몽주라는 다른 생각을 가졌던 인물도 있었고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모른 채 스러져간 민초들도 무수히 있었을 것이다. 이제 역사는 그 다양한 관점들과 그걸 통한 토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역사의식을 제대로 가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이 시대의 역사를 다루는 교과서는 많은 사례들과 관점들을 하나의 재료로서 제공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다양한 관점들을 담은 다양한 교과서들이 담보되고 그것이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역사의식을 스스로 가질 수 있게 하는 단초이자 실마리가 되어야 진정한 역사 교육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국정교과서 논란이 갖고 있는 문제는 바로 이런 다양성을 해치고 한 가지 관점을 마치 정답처럼 제시함으로써 획일화의 길을 갈 수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 국가관이나 애국 같은 단어들이 덧붙여지지만 그것은 특정인들을 위해 역사를 호도하는 일이 된다.

 

본래 육룡이 나르샤는 조선창업을 노래한 용비어천가1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것은 태조의 6대 선조를 한 마디로 찬양하는 노래다. 그런데 왜 사극 <육룡이 나르샤>는 그 육룡을 조선창업을 했다는 태조의 6대 선조에 대한 찬양이 아닌 민초들이 함께한 조선 건국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을까. 그것은 역사 왜곡이 아니라 기록이 편향해 내놓았던 역사에 대한 재해석이다. 누군가 몇몇 사람들의 역사로 기록하려 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이처럼 가려진 것들은 어차피 재해석되고 새롭게 가치매김 된다는 걸 하다못해 <육룡이 나르샤> 같은 사극도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지금은 육룡의 시대. 역사의 주역은 왕만이 아니라 민초들도 함께 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 한 마리의 용의 관점을 정답처럼 제시하는 건 과연 옳은 일일까. 그건 과연 앞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올바른 일일까. 이러다 진짜 역사의식에 대한 공부는 교과서보다 <육룡이 나르샤> 같은 사극을 통해서나 배우는 지경에 이르는 건 아닐까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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