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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접할 수 없는 경지 보여준 <유나의 거리> 김운경 작가

 

요즘 드라마 중견작가들에게는 찬사보다는 비난이 더 가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갈고 닦아온 실력을 어느새 부턴가 시청률 좇는데 쓰고 있는 중견작가들이 많아진 탓이다. 특히 최근 들어 하나의 트렌드처럼 자리한 이른바 막장드라마들의 전면에 나선 작가들이 다름 아닌 중견작가들이라는 점은 씁쓸하다. 임성한, 문영남, 서영명은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임성한 작가는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드라마 문법 자체를 파괴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유나의 거리(사진출처:JTBC)'

중견 작가 중에서도 김수현 작가는 거장이다. 확실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김수현 작가도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여러모로 김수현 작가답지 않은 아쉬움을 남긴 작품이다. ‘세 번째 결혼은 나와 한다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문학적일지는 몰라도 드라마로서는 너무 작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래도 김수현 작가는 지킬 것은 지키는 작가다.

 

사실 중견 작가로서 오랜 세월 자리하면서 현 세대와 소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또한 그 정도의 공력을 쌓아왔다면 자기만의 세계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세계가 여전히 지금도 통한다는 것 역시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종영한 <유나의 거리>는 김운경 작가의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보여준 작품이면서 동시에 지금의 세대와도 소통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나의 거리>를 쓴 김운경 작가를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라 부르는 건 그의 작품이 그 어떤 작가도 따라할 수 없는 세계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나의 거리>는 그저 소소한 가족드라마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난 하나의 사건으로 흘러가는 극적 구조도 아니다. 또 우리가 흔히 봐왔던 재벌가 이야기나 그저 그런 신데렐라 이야기는 아예 찾아보기도 힘들다. 바로 우리 옆에서 살아갈 것 같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일상적인 수준에서 다루는데 이처럼 흥미진진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김운경 작가가 가진 사람을 바라보는 예리한 관찰력에서 비롯된다. 제목이 유나가 아니라 <유나의 거리>가 된 데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거리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포착하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엿보인다.

 

우리는 <유나의 거리>를 통해 보기 드물게 건실한 청년 창만(이희준)은 물론이고 한 때 소문난 조폭두목이었지만 인간적인 정이 느껴지는 만복(이문식), 과거엔 잘나가던 건달이지만 마지막엔 치매를 앓으며 기초수급생활자로 살아가는 장노인(정종준), 그밖에도 개장수 홍계팔(조희봉), 칠쟁이 변칠복(김영웅) 등등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들로 우리의 마음에 남았다.

 

다세대주택에서 이들이 서로 부대끼고 살아가는 이야기는 그저 돈이나 성공에 대한 욕망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우리네 삶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누구나 고민 한 자락씩은 갖고 있고 그럼에도 서로서로 기대며 보듬고 사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라는 걸 드라마는 부지불식간에 우리에게 느끼게 해준다.

 

이런 것이 어쩌면 우리가 중견작가들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일 게다. 중견이라면 적어도 삶을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이 생길만한 위치다. 그렇다면 이들이 그리는 드라마는 무언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살생부를 휘두르며 비상식적인 드라마 전개로 시청률만을 노리는 중견이라면 없느니만 못할 것이다.

 

김운경 작가는 확실히 문학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이번 <유나의 거리>에도 곳곳에서 느껴지는 문학적 상황들을 마주할 수 있다. 마치 소설가 이문구의 소설을 읽는 듯한 해학적인 상황들이 <유나의 거리>에서는 번뜩인다. 한창 잘나갈 때 서로 구역 다툼으로 으르렁대던 주먹들이 나이 들어 병원에 나란히 누운 채 서로의 몸을 걱정하는 장면 같은 건 인생이 갖는 시간의 무게감을 느껴보지 못한 젊은 작가에게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김운경 작가는 <유나의 거리>를 통해 중견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를 지금 세대와 소통하려 애쓰는 그 모습에서는 중견의 품격이 느껴진다. 모쪼록 많은 중견들이 이런 노력을 보여주기를. 그것은 우리네 드라마를 제대로 빛내주는 일이고 또 후배들을 위한 길을 열어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Posted by 더키앙

다른 듯 같은 94<서울의 달>2014<유나의 거리>

 

1994년 김운경 작가가 쓴 <서울의 달>은 파격적인 드라마였다. 상류층의 삶을 주로 다루던 당시 드라마 분위기에서 달동네 서민들의 삶을 소재로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했다. 드라마가 상류층 삶의 선망에 머물던 것을 서민들의 현실 공감으로 바꾸어주었던 것이 <서울의 달>에 시청자들이 열광한 이유. 당시 이 드라마는 5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유나의 거리(사진출처:JTBC)'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14, 김운경 작가는 또다시 서민들의 이야기, <유나의 거리>로 돌아왔다. <서울의 달>이 달동네 하숙집을 배경으로 했다면, <유나의 거리>는 다세대주택이 배경이다. 각자 떠돌다가 어찌 어찌 흘러들어와 한 공간에 머물게 된 이들이 엮어가는 따뜻한 사람 사는 이야기가 20년 차를 가진 두 드라마의 공통된 주요 스토리다.

 

김운경 작가 스타일 그대로, <유나의 거리>는 특별히 자극적인 설정 없이 마치 본격 소설을 읽는 듯한 잔잔한 흐름을 보여준다. 막장드라마들이 주로 하는 빠른 전개에 대한 강박이나 억지 스토리 같은 건 아예 보이지 않는다. 대신 <유나의 거리>의 매력은 보는 이들을 푸근하게 만드는 인물의 캐릭터에 있다.

 

소매치기를 소매치기하는 유나(김옥빈)는 감옥에 수시로 들락거리는 아버지처럼 배운 손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가끔씩 길거리의 행인들 지갑을 넘본다. 본인은 벗어나고 싶지만 마치 중독처럼 거리로 이끌린다. 그 단점을 빼고 나면 그녀는 어느 날 우연히 만나게 된 건실하지만 집도 없이 살아가게 된 설명하자면 긴딱한 사정을 가진 청년 김창만(이희준)을 챙겨줄 정도로 정이 많다.

 

유나가 사는 다세대주택의 주인 한만복(이문식)은 과거 잘 나갔던 건달이지만 지금은 한 풀 꺾인 콜라텍 사장이다. 여전히 건달 행세지만 한때 자신이 모셨던 낭만건달 장노인(정종준)을 여전히 모실 정도로 정은 있는 인물이다.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그를, 그저 사람 좋은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그래도 한 때는 쌍도끼로 불렸던 장노인이 돕는다. 후배의 개업식에 건달의 역사를 운운하며 계보를 나열하고, 한국어를 잘 모르는 일본인에게 문신을 해서 쌍도끼산토끼문신으로 바뀐 장노인은 기막힌 코믹 캐릭터를 보여준다.

 

김창만은 유나의 소개로 이 다세대주택에서 비관 자살한 여자의 빈 방으로 입주한 인물로 별로 잘 하는 게 없어 보이지만 뭐든 척척 해내는 인물이다. 드라마는 이 다세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코믹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려낸다.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들이 어떤 사건 속에서 서로를 도와가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훈훈한 느낌을 전한다. 여기에 김창만과 유나의 심상찮은 멜로가 덧붙여진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들이 숨기고 있는 진짜 삶, 이를테면 유나의 소매치기 습관 같은 것들이 하나의 장애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워질 것으로 보인다.

 

사실 김운경 작가의 <서울의 달>을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를 20년이 흐른 후에 다시 볼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20년이 흘러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서민들의 신산한 삶을 드라마를 통해 확인한다는 건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남긴다. <유나의 거리> 첫 회에 잠깐 보여지는 서울의 달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여전히 쓸쓸하고 처연한 그 느낌. <유나의 거리>를 보며 <서울의 달>을 보던 20년 전 그 가슴 한 구석에 느껴지던 그 따뜻함을 여전히 느낄 수 있다니.

Posted by 더키앙

극적 전개보다 인물들의 묘사가 뛰어난 '짝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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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패'(사진출처:MBC)

'짝패', 이 사극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첫 회에 같은 날 태어난 아기들이 뒤바뀌는 장면에서는 역시 '출생의 비밀'인가 했다가, 그렇게 다른 환경에서 한 명은 양반집 자제로 또 다른 한 명은 거지로 자라난 천둥과 귀동이 서로 "짝패 먹자"고 하는 장면에서는 그런 운명 따위는 개척하기 나름이라는 성장드라마의 일면을 보게 된다. 성장한 천둥(천정명)이 동녀(한지혜)와 상단을 꾸려나가는 이야기는 '상도'를 떠올리게 하고, 포교가 된 귀동(이상윤)이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장면에서는 '별순검'류의 조선법의학 드라마나 '다모'류의 조선형사물이 떠오른다. 물론 갓바치나 거지패들의 이야기에서는 민초들을 다룬 '추노'류의 민중사극이 연상된다. 도대체 이 사극은 정체가 뭘까.

시대적 배경도 전통적인 사극이 주로 다루던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그 시점에 걸쳐있다. 칼 대신 총을 쏘고, 서양의 문물들이 시장으로 들어온다. 민중봉기의 열기가 피어나고 있는 이 시대는 양반제라는 틀이 서서히 균열을 드러내는 시기다. 바로 이런 시대적 배경이 깔려 있기 때문에 각기 출신이 다른 천둥과 귀동, 그리고 여성인 동녀가 서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내는 장면들이 개연성을 갖는다. 사극이라면 늘상 등장하는 멜로보다, 우정이 더 많이 느껴지는 관계들도 이 사극의 독특한 위치를 보여준다.

드라마의 극적 구성도 기존 우리가 흔히 보던 현대 사극의 틀과는 상당히 다르다. 최근의 퓨전사극으로 주로 다뤄지던 성장드라마나, 장르사극으로 다뤄지던 극적인 전개는 이 사극에서는 그다지 발견하기 어렵다. 물론 그런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지만 그 자극이 강하지가 않다는 얘기다. 대체로 사극이 그리는 한 회의 흐름은 전회에 이어지는 강한 사건의 연속과 함께 중간에 새로운 이야기의 국면이 전개되고 그것이 조금씩 마지막의 극적 갈등으로 이어지다가 다음 회로 넘어가는 구조를 갖는다. 하지만 '짝패'는 그런 전형적인 구도를 벗어나 있다. 어찌 보면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이 사극은 담담하다. 마치 일일드라마를 보듯, 인물들 간의 담담한 이야기가 무리 없이 전개되어 나갈 뿐이다.

물론 이 사극도 극적으로 상승하는 어떤 폭발적인 지점이 있다. 예를 들어 스승의 원수를 갚으려고 현감을 저격하는 장면이 그렇고, 참다못한 민중들이 봉기해 관아를 점령하는 장면들이 그러하며, 스승의 원수지만 친구 귀동의 아버지라는 이유 때문에 김진사(최종환)를 살려주는 장면이 그렇다. 즉 '짝패'는 극적 장면이 있지만, 그것을 통해 의도적으로 다음회를 낚시하는 식의 억지 구성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담담하다.

사극의 정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을 쓰고 있는 김운경 작가의 필모그래피다. 81년 '전설의 고향'으로 데뷔한 김운경 작가는 '한 지붕 세 가족(1986)', '서울 뚝배기(1990)', '서울의 달(1994)', '파랑새는 있다(1997)' 등으로 잘 알려진 베테랑 작가다. 작품의 면면에서 알 수 있듯이 김운경 작가의 작품에는 늘 서민들이 어른거린다. '짝패'는 그래서 어쩌면 이 작가가 고집하는 서민들, 민중들의 이야기에서 그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사극이다.

천둥이 본래는 양반집 자제지만 거지로 성장하고, 귀동이 본래는 거지로 자라야할 운명이지만 양반집 자제로 자라나는 그 상황에서, '출생의 비밀'로 빠져들지 않고 서로 상생하는 성장드라마로 넘겨올 수 있었던 건 김운경 작가가 늘 쥐고 있는 이 서민 코드 덕분이다. 그들은 뒤바뀌어진 운명 속에서도 자신이 갈 길을 간다.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지점은 서민들을 향해 걸어가는 그 길 위에서 있다. 그들은 다른 신분에서 출발하지만 같은 길을 걷는 짝패가 된다.

따라서 '짝패'라는 사극을 즐기는 법은 저 성장드라마의 끝없이 치고 달리는 욕망의 흐름이 아니라, 조금은 차분하게 운명을 관조하며 그 속의 인물들이 따뜻하게 서로를 감싸안아주는 그 흐뭇한 장면들을 바라보는 그 지점에서 생겨난다. 천둥과 귀동이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신분이 아니라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런 장면들이나, 동녀를 찾아온 귀동이 친구처럼 같이 술을 나누는 장면들이나, 어딘지 정이 가는 거지 도둑 장꼭지(이문식)의 배꼽빠지는 면면을 보게 되는 장면들 속에서 '짝패'의 진가가 묻어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어딘지 수더분해 보이면서 정이 가는 이 사극은 우리가 막연히 부르는 민중의 이미지를 닮았다. '짝패'는 그런 사극이다.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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