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 계급 대결부터 팀워크, 먹방까지 다 잡은 음식 오디션

흑백요리사

이건 마치 음식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오마카세라고나 할까.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 ‘흑백요리사 : 요리계급전쟁(이하 흑백요리사)’의 탑8 결정전은 이른바 ‘레스토랑 미션’으로 펼쳐졌다. 팀을 나눠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들(?)에게 어느 팀이 더 매출을 높게 올리는가에 따라 1등은 전원 생존, 꼴찌는 전원 탈락 그리고 그 중간팀들은 미션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본 심사위원들의 판단에 의해 일부가 생존하는 팀 미션이었다. 

 

이 미션은 지금껏 요리 대결을 펼치는 여타의 음식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는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음식만 잘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고, 레스토랑 운영 또한 잘 해야 살아남는 미션이다. 메뉴 선정에서부터 가격 정책 같은 경영적인 마인드 또한 필요한 미션이라는 것. 백종원이 심사위원으로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으로 보이는 이 미션에서 그 승자는 최현석 셰프가 이끄는 팀이 가져갔다. 그런데 그 승리의 이유를 들어가보면 애초 이 곳을 찾을 손님들을 예상하고 그 성향을 분석한 후 레스토랑의 콘셉트를 잡은 것에서부터 이미 승패가 갈렸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제작진이 음식을 주문해 먹을 수 있는 돈을 줄 거라는 사실에 착안해 최현석 셰프는 이 레스토랑이 일반적인 음식점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이 미션에 걸맞는 ‘플렉스’할 수 있는 메뉴를 구상했고 가격정책도 고가를 선택했다. 물론 이를 받쳐주는 음식의 퀄리티가 담보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이러한 정책적 결정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건 결과가 알려주었다. 

 

‘흑백요리사’가 보여준 이러한 레스토랑 운영에 관련된 미션을 보면 이 프로그램이 얼마나 다채로운 재미를 추구하고 준비했는가가 느껴진다. 애초 흑백을 갈라 계급 구조를 만들어냄으로써 백수저 요리사들의 동기부여를 강력하게 만든 것도 신박한 선택이었지만, 미션이 진행되면서 지나친 계급 갈등으로 가기보다는 마치 바둑대결처럼 특정 미션에 따라 백수저도 떨어질 수 있는 상황들을 보여준 것도 언더독을 응원하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건드린 지점이었다. 

 

이를 테면 철가방 요리사와 여경래 셰프가 1:1 대결을 벌여 결국 흑수저인 철가방 요리사가 승리하는 장면은 이 흑백 대결의 계급 갈등이라는 것이 동기부여의 차원 그 이상으로 첨예해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줬다. 철가방 요리사는 넙죽 여경래 셰프에게 예우의 마음을 담아 절을 했고, 여경래 셰프는 선선하게 “후배들이 잘 해야 한다”며 이번 상황에서는 후배가 더 잘해서 이긴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이 흑백이 바둑 게임 같은 의미의 흑백이라는 걸 드러내줬다. 이보다 더 훈훈한 대결이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제작진이 훈훈한 상황만을 염두에 두는 건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건 탑8 결정전에서 팀을 3팀으로 나눠놓고는 각 팀에서 한 명씩 투표를 통해 방출해 또 하나의 팀을 꾸리라는 새로운 룰을 더해 놓는 장면이다. 물론 자발적으로 자신이 나가겠다고 말하고 나간 팀원들이 있었지만 투표에 의해 방출되어 새로 꾸려진 팀은 언더독으로서의 투지를 불태우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제작진이 얼마나 출연자들을 룰을 통해 쥐락펴락 하고 있는가가 실감나는 대목이었다. 

 

또 레스토랑 미션에서 주목되는 건, 그 곳을 찾은 손님들을 유명 먹방 크리에이터들로 채우고 그들을 길다란 한 테이블에 앉혀 놓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니 자연스러운 먹방이 연출된다. 어떤 이가 먹으면 그 먹는 모습을 보고 다른 이들이 주문을 하거나 하지 않는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먹방에 먹방을 이어붙여 만들어낸 시너지라고 볼 수 있다. 한 편에서는 주문에 따라 희비가 갈리는 쿡방이 이어지고, 때론 잘못된 음식을 바로잡아 손님의 마음을 다시 끌어내는 백전노장들의 노하우가 시전되기도 한다. 

 

그렇게 톱8이 결정됐고, 이제 톱2를 결정하기 위한 두 가지 미션 중 하나인 ‘인생의 요리’가 펼쳐졌다. 여기서 ‘흑백요리사’는 이제 톱8의 인생 스토리가 곁들여진 음식을 접하게 되고, 스토리텔링이 갖는 재미와 더불어 이들의 캐릭터가 가진 매력을 보다 명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모카세의 칼국수집 이야기나, 나폴리 맛피아의 할머니 게국지 이야기는 이들의 요리는 물론이고 이들 인물들을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먹방이니 쿡방이니 요리 서바이벌이니 하는 프로그램들이 이제는 지나간 트렌드처럼 여겨져왔던 건 사실이다. 워낙 많이 나왔기 때문에 새로운 게 있을까 싶었던 것. 하지만 ‘흑백요리사’는 실로 다채로운 맛의 미션들을 다양하게 내놨다. 1대1 흑백대결은 물론이고, 팀워크와 팀불화가 명확히 보이는 팀미션, 편의점 재료로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요리 대결에, 레스토랑 운영 미션을 통해 쿡방과 먹방의 시너지를 극대화해 보여주는 미션 등등. 그 하나하나의 미션들이 정성스럽다. 마치 코스로 하나씩 내놓는 오마카세 같은 음식 서바이벌의 재미가 아닐 수 없다. 

 

이러니 잘 될 수밖에 없다. 넷플릭스 비영어 부문 2주 연속 1위는 물론이고 이미 SNS에는 여기 나온 요리사들의 영상들이 화제가 되고 있다. 아무리 많이 나와 흔해졌다고 해도 어떻게 요리해내느냐에 따라 그 맛은 또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흑백요리사’는 보여주고 있다. (사진:넷플릭스)

‘서진이네2’, 추운 아이슬란드라서 뜨끈한 뚝배기의 훈훈함이 더 크다

서진이네2

“도움을 주신 분들. 여기 공사해 주신 분, 다른 곳 섭외해 주신 분...” tvN ‘서진이네2’에서 ‘초대의 날’이 뭐냐고 묻는 최우식에게 제작진은 그 취지를 설명해준다. ‘서진뚝배기’가 개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던 분들을 초대하는 날이란다. 

 

사실 기존 ‘윤식당’이나 ‘서진이네’에서 이처럼 현지 개업에 도움을 주신 분들은 손님으로 찾아온 바 있다. 그래서 맛난 한 끼를 드시는 와중에 자신이 현지 식당을 위해 어떤 걸 했다는 걸 깜짝 알려주는 것으로 반가움을 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아이슬란드에서 펼쳐진 ‘서진이네2’는 첫 날부터 오픈런하는 손님들 때문에 그런 분들이 문앞에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생겼다. 굳이 ‘초대의 날’이라고 이름 붙여서 그 하루를 도움 준 분들만 받는 날로 한 건 그런 이유였다. 

 

‘윤식당’부터 ‘서진이네’까지 거치며 이들 현지에서 한식을 만들어 손님들에게 내놓는 어찌 보면 단순해보이는 서사가 지금껏 여러 스핀오프들까지 만들어지며 성공해왔던 데는 이들 프로그램만이 갖는 독특한 지점이 있어서다. 그건 그저 출연자들이 만든 한식이 얼마나 맛있었나를 확인하는 즐거움만이 아니다. 오히려 손님들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 아낌없이 노력하는 모습이 불러 일으키는 흐뭇한 감정 같은 것들이다. 

 

음식이 주는 포만감이 기본이지만, 그 음식에 담긴 정성이 전해주는 마음의 포만감 같은 게 ‘서진이네’에는 있다. 그래서일까. ‘서진이네2’가 추운 아이슬란드에서 뜨끈한 뚝배기를 내놓는 그 광경은 음식 그 이상의 정서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추워 종종 걸음으로 걷는 사람들이, 서진뚝배기를 찾아와 뜨끈한 국물과 지글지글 소리를 내는 돌솥비빔밥을 먹는 그 광경이 주는 훈훈함이라니. 

 

도움을 주신 고마운 분들을 위한 ‘한 뚝배기’는 그래서 더더욱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끈다. 찾은 손님들 중에는 출연자들이 머물 숙소를 제공해준 셰프도 있고, 현지 코디와 통역울 도와준 분들도 있으며, 서진뚝배기를 예쁘게 장식한 식기들을 제공한 분들은 물론이고 운전 담당으로 촬영에 도움을 준 분도 있다. 현지인도 있지만 그 곳에서 살아가는 한국인도 있다. 그러니 이들의 면면은 보는 것만으로도 대접해드리고픈 마음이 절로 생겨난다. 

 

이 날의 셰프는 정유미가 맡았고, 그가 내놓을 특별 메뉴는 ‘육전비빔국수’다. 맛있게 뽑아낸 국수를 달콤 새콤한 장에 비벼 그 위에 보기에도 먹음직한 계란 입힌 육전을 얹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도는데, 그걸 맛볼 손님들이 얼마나 그 맛을 즐기며 행복감을 느낄지 기대가 될 수밖에 없다. 또 이 가게의 시그니처처럼 되어 있는 ‘돌솥비빔밥’을 시킨 한 손님은 지글지글 내는 소리가 너무 좋다며 조용히 그 소리를 듣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뜻한 음식들이 뚝배기 안에서 온기를 잃지 않고 끓는 것처럼, 전해지는 마음들도 더 따뜻해진다. 

 

마침 최우식의 생일을 맞아 깜짝 이벤트로 마련된 생일상도 조촐한 미역국에 카레 그리고 케이크지만 일찍 일어나 음식을 준비한 정유미와 케이크, 선물 등을 사온 박서준의 마음이 담겼다. 너무나 추운 아이슬란드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 따뜻해지는 마음들. 이것이 ‘서진이네2’가 시청자들에게 주는 정서적 행복감이 아닐까. 추운 날들이어서 오히려 더 아름답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오로라와 눈송이들 같은 그런 행복감 혹은 포만감. (사진:tvN)

‘오늘은 좀 매울 지도 몰라’가 먹방, 쿡방 시대에 던지는 질문

오늘은 좀 매울 지도 몰라

아마도 요리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나 프로그램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이 드라마는 낯설 수 있다. 탕수육 하나를 만드는데 이틀이 넘게 걸린다면 그 누가 그 과정을 보려 할 것이며, 그러한 레시피를 따라하려 할 것인가.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 과정을 촘촘히 따라가며 보여주고, 시청자들은 그 과정을 보는 내내 먹먹해진다. 도대체 이러한 마법의 레시피는 어떻게 가능해진걸까. 

 

왓챠 오리지널 시리즈 <오늘은 좀 매울 지도 몰라>가 그 드라마다. 6회에 등장한 ‘띄엄띄엄 탕수육’을 보면 이 드라마가 어떻게 이 지리한 과정조차 먹먹한 감동으로 만드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말기암 환자인 아내 다정(김서형)을 위해 매일 건강식을 차려 내주는 남편 창욱(한석규). 그런데 갈수록 입맛이 없어지는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탕수육이 먹고 싶다고 한다. 그것도 파인애플이 소스로 들어간 탕수육을. 

 

창욱은 무엇이든 아내가 먹고 싶은 요리가 있다는 사실에 반가워한다. 그래서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하겠다며 탕수육에 남다른 욕심(?)을 낸다. 일부러 황학동 시장까지 찾아가서 중식용 웍을 구입하고 중식도도 마련한다. 마트 직원(양경원)이 마침 자신이 탕수육 장인을 찾아가 1년 동안 설거지만 하면서 받은 비법을 알려준다. 탕수육은 겉바속촉의 튀김옷이 전부라며, 다리부터 리듬을 타서 웍 돌리는 법도 가르쳐준다. 

 

그저 한 끼 탕수육을 뚝딱 먹을 줄 알았던 아내는 남편의 부산이 괜히 번거롭게 한 것 같아 미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행복해한다. 그건 그냥 탕수육이 아니라 남편의 정성과 마음이 담기기 때문이다. 옥수수전분, 감자전분, 찹쌀가루, 통밀가루를 섞어 따뜻한 물로 익반죽을 해 걸쭉하게 농도를 만들고 현미유까지 한 국자 넣고 이제 거의 다 한 줄 알았던 창욱은 그 반죽을 24시간 이상 숙성해야 ‘겉바속촉’이 된다는 레시피에 허탈해한다. 

 

겨우 하루가 더 지나 이제 본격적으로 탕수육을 만들기 시작하지만, 안타깝게도 마침 아내가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져 응급실로 이송된다. 그 정신없는 과정 속에서 탕수육은 실패로 돌아간다. 다음날 병원에서 아내를 간호하는 아들을 위해서 탕수육을 만들려 하지만, 반죽의 숙성이 지나쳐 엉망이 되어버리는 것. 그러면서 창욱은 이런 생각을 한다. “욕심을 버리고 하루만 일찍 만들었다면 아내가 탕수육 맛을 보지 않았을까?”

 

사실 이건 실패담이다. 요리를 다루는 콘텐츠들은 그 많은 쿡방이 증거하고 있듯이 실패담보다는 성공담을 그리기 마련이다. 게다가 요즘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요리 레피시들은 대부분 ‘간편함’과 ‘쉬움’을 강조한다. 심지어 몇 분 만에 뚝딱 만들어 그만한 맛을 낼 수 있는 레시피가 있다는 걸 은연 중에 강조한다. 그래야 시청자들도 따라하고픈 욕구가 만들어지기 때문일 게다. 

 

먹방 같은 프로그램들은 요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가 보다는 얼마나 많이, 빨리 또는 맛있게 먹을 수 있는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한 요리를 다루는 콘텐츠들을 통해 음식은 간편하고 쉬우면서도 빠르고 많이 만들어내 먹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생겼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우리는 음식을 너무 가볍게만 보고 있는 건 아닌가. 

 

물론 음식과 요리에 지나치게 신성성을 부여해 그 노동을 ‘엄마들’에게만 부여하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오늘은 좀 매울 지도 몰라>가 보여주는 것도 엄마가 아닌 남편이자 아빠의 요리니까. 누가 하느냐의 성역할 구분을 떠나서 이 드라마는 그 많은 음식을 다루는 콘텐츠들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슬쩍 잊고 있었던 음식 나아가 삶에 대한 예의를 묻고 있다. 

 

사실 창욱이 이토록 음식에 정성을 다하는 건 아내가 말기암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전에는 아마도 무엇이든 대충 사서 먹곤 했을지 모르지만, 말기암 투병을 하는 아내 앞에서 창욱은 음식과 요리의 진짜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거기 들어가는 정성들이 단지 말초적인 맛이 아니라 몸을 위한 것이고, 그래서 그 음식 하나하나가 몸을 살리기도 하는 소중한 가치를 갖는다는 걸 그는 알게 된다. 또 음식에 더해지는 정성은 맛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을 사람에 대한 마음이 더해지는 것이고, 그래서 그건 나아가 그 누군가의 삶 하나에 대한 예의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은 좀 매울 지도 몰라>가 주는 잔잔하지만 먹먹한 감동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사진:왓챠)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매운 드라마에 지쳤다면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아이를 키울 때 보리차를 다시 만났다. 열이 나고 많이 아프면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갓 지은 밥에 보리차를 잔뜩 붓고 두 시간 약한 불에 끓였다. 그 밥물을 먹였다. 하루나 이틀 그러고 나면 다시 식욕이 도는 지 제대로 먹기 시작했다. 곁에서 기다리고 서 있어야 한다. 넘치면 안 되니까....”

 

한석규의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가 먼저 마음을 잡아 끈다. 너무 담담해서 레시피를 설명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지만, 그가 정성을 들이며 이렇게 만드는 음식에는 아내에 대한 깊은 마음이 담겨있다. 창욱(한석규)의 아내 다정(김서형)은 대장암 말기다. 수술을 원치 않는 다정은 창욱에게 자신을 챙겨달라고 요청한다. 두 사람은 별거 중이었지만, 사정을 듣게 된 창욱은 기꺼이 집으로 들어와 다정의 식사를 챙긴다. 건강식으로.

 

왓챠 오리지널 시리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가 갖고 있는 서사는 최근 OTT들이 내놓고 있는 자극적이고 매운 맛과는 거리가 멀다. 지극히 담담하고, 일상을 담백하게 담아낸다. 서사라고 하면 말기암 때문에 다정을 챙기는 창욱이 만드는 음식들을 통해 두 사람이 나누는 결코 뜨겁지는 않지만 따뜻한 부부애가 중심에 서 있고, 별거해 집을 나갔던 창욱에 대해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던 아들 재호(진호은)와 창욱이 조금씩 마음을 여는 이야기가 더해져 있다. 물론 재호와 여자 친구 사이에 벌어지는 풋풋한 사랑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한석규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는 이 드라마를 대하는 마음부터 다르게 만든다. 편안한 마음으로 한껏 어깨의 힘을 빼고 드라마가 보여주는 담담한 일상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그런데 그 담담해서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에 드라마는 깊은 삶의 통찰을 심어 놓는다. 예를 들어 ‘그리운 설날 떡국’이라는 부제를 단 4화의 경우, 떡국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리움’이라는 삶의 본질을 통찰한다. 

 

오래도록 운영해왔던 출판사 일을 더 아프기 전에 후배에게 물려주려 하는 다정의 마음은 헛헛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12월31일 굳이 회사를 찾아가는 길이 새삼스럽다. 그 길에 운전대를 잡아준 남편에게 이 길이 “그립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굳이 남양주에 있는 동생 같은 저자에게 책을 직접 갖다 주겠다고 한다. 사실은 남편과 그렇게 함께 드라이브 하며 데이트  기분을 좀더 내고 싶어서다. 

 

남양주에게 저자를 만나는 사이 다정은 창욱에게 젊어서 갔었던 장칼국수집에서 점심을 먹으라 한다. 그 곳을 찾아가는 창욱의 마음이 또 새삼스럽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다. 주문한 장칼국수를 기다리며 창욱의 심사가 내레이션으로 깔린다. 그런데 그 내용은 ‘금식’과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다. 

 

“금식은 금식할 때보다 먹기 시작할 때가 더 힘들다. 몸이 받아내지 못할 먹을거리를 머리는 끝없이 기억으로부터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가벼운 병이라면 한두 주쯤 금식하고 다시 먹기 시작할 때 잘 조절하면 씻은 듯이 낫기도 한다. 하지만 암과 싸우는 사람이라면 일 년이나 혹은 그 이상을 몸은 그리움과 싸워야 한다.” 먹었던 기억이 만들어내는 그리움. 결국 그리움은 굳이 아플 걸 알면서도 쌓아가는 아름다운 기억들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그 시각에 여자친구와 서해에 일몰을 보러 온 재호는 “남들은 해맞이 하러 정동진 간다는데 우리는 거꾸로 왔네”라고 한다. 그러자 여자친구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가는 해 보내주는 사람도 있어야지”라고 툭 던진 말에 재호는 눈물을 쏟아낸다. 암 투병하는 엄마 생각 때문이다. 오래도록 엄마와 가졌던 그 좋은 기억들은 재호에게 더 깊은 그리움으로 남을 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정은 창욱에게 설날에 먹을 떡국거리를 사자고 한다. 그러면서 창욱의 어머니가 해주셨던 떡국을 먹고 싶다고 한다. 굴을 넣어 국물을 낸 떡국의 그 맛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기억으로 살아있다. “배고픈 만큼이나 그리움은 간절함을 불러일으킨다. 누가 그리움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까. 간절히 그리던 것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는 불안은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그리움만으로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일 매일 그리워할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강창래의 동명 에세이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인 만큼, 문학적인 서사가 압권인 드라마다. 지치고 힘든 현실 앞에서 더 큰 자극 속으로 들어가 그 현실을 잊고픈 마음이 크지만, 이 드라마는 더 채워 넣기보다는 덜어내고 그 빈자리를 담담한 생각들로 채워 넣는 것으로 지친 마음을 다독여준다. 그러고 보면 이 드라마는 앞서 내레이션에 담긴 밥에 보리차를 넣고 끓인 ‘밥물’을 닮았다. 자극에 너덜해진 속을 차분히 가라앉혀 보이지 않던 일상 속에 담긴 삶의 비의를 바라보게 해주는 그런 드라마. 매운 드라마들에 지쳤다면 이 슴슴함에 반드시 빠져들 거라 확신한다. (사진: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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