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만큼 시대와 맞물려 다양하게 은유되는 존재가 있을까.
'살아있는 시체'인 좀비는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죽었지만 죽지 않았기 때문에 공포의 존재가 된다.
바로 이 지점은 좀비가 시대의 은유가 되는 이유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군사 독재 시절
눈과 귀를 가린 채 자행된 폭력 앞에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이들은
살아있다고 해도 살아있다 말하기 어렵다.
또한 자기만의 주체적인 선택에 의한 삶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 몰려가는 풍조에 휩쓸려 사는 삶 역시 마찬가지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은 바로 이런 한국적인 상황을
좀비의 은유로 가져온 작품이다.
지하철을 가득 메운 군인 좀비들의 질주나
300킬로가 넘는 속도로 달려나가는 KTX에서 벌어지는
좀비들과 생존자들의 사투
주식장에 몰려든 일반투자자들을 개미라 부르며
좀비 취급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나
아직 좀비가 되지 않았지만 자기만 살겠다고
인간성을 상실한 채 아비규환의 현실을 만드는 사람들까지
이 작품은 좀비로 은유한다.

'부산행'의 후속작으로 나왔던 '반도'는
이를 한반도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확장한 블록버스터였지만
생각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부산행' 이후 10년이 지난 현재 나온
연상호 감독의 '군체'는 그간의 변화된 사회상을 통해
보다 진화된 형태의 좀비를 은유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면이 있다.

그 10년 간 어떤 변화가 있었던가.
바로 AI 시대의 도래다.
인공지능 챗봇이 일상이 되어 갖가지 정보는 물론이고
여행계획부터, 주식정보 하다 못해 심리상담까지 다 해준다.
그런데 이 인공지능의 기반은 사실상 우리가 만들어 내놓은 데이터들이다.
그 데이터들이 공유되는 것이고, 그래서 똑같이 소비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군체'는 바로 이러한 똑같은 정보의 공유가 일견 진화이자 도약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 그것 역시 누군가에 의해 보다 쉽게 조종될 수 있는 것으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사고를 오히려 방해하는 퇴화라는 걸
군체라는 새로운 좀비군을 통해 그려낸다.

어느 특정 시간이 되면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 보며 정보를 공유하는 모습이나,
앤트밀처럼 뱅뱅 소용돌이를 치며 도는 좀비들의 모습,
무엇보다 서영철(구교환) 같은 빌런에 의해 조종되는 모습은
결코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좀비일 뿐이라는 걸 강조해 보여준다.
'군체'는 바로 이 새로운 AI 시대의 은유를 통해
진화된 좀비를 내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목할만한 작품이다.

좀비가 진화되자 그 표현도 진화한다.
'부산행'이 브레이킹을 하는 춤꾼들을 투입시켜
독특한 K좀비의 다이내믹한 동작들을 탄생시켰다면
'군체'는 이들의 군무를 더해 넣는다.
여러 명이 달라붙어 하나의 군체가 된 좀비의 형상들이
마치 현대 무용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사실 좀비라는 장르는 우리가 아니라 서구에서 등장한 것이지만
그걸 창의적으로 재해석해 끝없이 진화시킴으로써
이제는 우리가 그 좀비의 종주국이 된 듯한 느낌이다.
그 전면에 연상호 감독이 있다. (사진:영화 '군체')
202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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