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에는 '상자 속의 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막에서 만난 비행사에게 양 한 마리만 그려달라는 왕자에게

비행사가 양을 여러 차례 그려주지만

마음에 들어하지 않자 상자 하나를 그리고는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는 양은 이 안에 있어."라고 말하자

왕자가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라고 하는 대목이다. 

상자 속의 양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상자 속의 양'은 

바로 그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다. 

사고로 아들을 잃은 오토네(아야세 하루카)와 켄스케(다이고) 부부가

아들 카케루(쿠와키 리무)의 얼굴과 기억을 가진

휴머노이드를 집으로 들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진짜 아들이 아니라 휴머노이드지만

오토네는 그를 점점 아들 카케루처럼 대하기 시작하고

애써 그건 로봇에 불과하다고 부정하던 켄스케 역시

아들의 기억을 가진 휴머노이드를 아들처럼 대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상자 속의 양

하지만 그 휴머노이드가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부는 

휴머노이드가 몰래 집을 나가 낯선 무리들과 어울리는 걸 보게 되면서 알게 된다. 

그 무리들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버려진 휴머노이드들이다. 

그들은 자신들끼리 살아가려 하고 

카케루 휴머노이드에게 다 함께 살 집을 설계해달라고 요청한다. 

 

카케루 휴머노이드가 집을 설계하게 된 건

함께 사는 오토네와 켄스케 부부가 집과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오토네는 누군가 살 집을 디자인 하는 일을 하고 있고

켄스케는 나무를 다듬어 가구 같은 걸 만드는 일을 한다. 

카케루 휴머노이드는 부부에게 재료들을 요청해 휴머노이드들이 살 집의 모형을 만든다. 

상자 속의 양

영화는 오토네와 켄스케 부부가 

휴머노이드를 통해 사실 자신들의 욕망을 풀어내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들의 죽음으로 오토네는 자신의 상실감을 휴머노이드로 채우려 하고

켄스케는 자신의 죄책감을 휴머노이드로 풀어보려 한다. 

그 상처와 아픔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그들의 욕망일 뿐이다.

휴머노이드는 그저 그 욕망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부부는 자신들이 휴머노이드를 그저 욕망의 도구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휴머노이드가 집을 나가 버려진 그 존재들끼리 새로운 터전을 꿈꾸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오토네는 말한다. "상자 속에 있었던 건 엄마였구나." 

'상자 속의 양'이란 결국 그 안에 있는 걸 양으로 상상해서 가능한 일이다. 

오토네가 어찌 보면 영혼이 없는 빈 상자기계에 불과한 휴머노이드를 아들로 생각한 건

자신의 욕망이 만들어낸 상상일 뿐이다. 

상자 속의 양

결국 부부는 이 휴머노이드들을 자신들만의 터전으로 보내주기로 한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 지는 알 수 없지만

카케루 휴머노이드가 그린 거대한 나무에 둥지처럼 마련한 터전으로

그들을 데려다 준다. 

 

'상자 속의 양'은 이미 AI 시대에 들어온 우리들이

이 텅빈 상자에 불과할 수 있는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상상할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인간의 욕망을 투영해 마음대로 쓰고 버리는 도구로 상상할 것인지

아니면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상상할 것인지를 묻는다. 

상자 속의 양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이 부부의 직업이 은유하는 '상자 속의 양'에 대한 것들이다. 

집을 디자인하는 오토네는 텅빈 땅 위에 나무로된 목재와 유리 그리고 실제 나무를 심어

가족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을 상상한다. 

나무와 목재, 유리는 저 자연물로부터 인간에 의해 옮겨지고 변형된 것이지만

그걸로 오토네는 예쁜 집을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것이다. 

켄스케 또한 수백년 된 나무를 연마해 

아름다운 문양의 목재를 만드는데

그것으로 지어질 집이나 가구를 상상한다.  

 

즉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무언가를 가져와 상상해온 것들을 만들어낸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떤 상상을 할 것인가다. 

상자 속은 그래서 무한한 가능성이자 미지수가 된다. 

그건 판도라의 상자일 수도 있지만

아름다운 양이 들어 있는 상자일 수도 있다. 

여러분들은 그 빈 상자 속에 무얼 상상할 것인가. (사진 : 영화 '상자 속의 양')

2026.6.23

728x90

좀비만큼 시대와 맞물려 다양하게 은유되는 존재가 있을까. 

'살아있는 시체'인 좀비는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죽었지만 죽지 않았기 때문에 공포의 존재가 된다. 

바로 이 지점은 좀비가 시대의 은유가 되는 이유다. 

군체

이를테면 우리에게 군사 독재 시절

눈과 귀를 가린 채 자행된 폭력 앞에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이들은 

살아있다고 해도 살아있다 말하기 어렵다. 

또한 자기만의 주체적인 선택에 의한 삶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 몰려가는 풍조에 휩쓸려 사는 삶 역시 마찬가지다. 

군체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은 바로 이런 한국적인 상황을

좀비의 은유로 가져온 작품이다. 

지하철을 가득 메운 군인 좀비들의 질주나

300킬로가 넘는 속도로 달려나가는 KTX에서 벌어지는

좀비들과 생존자들의 사투

주식장에 몰려든 일반투자자들을 개미라 부르며

좀비 취급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나

아직 좀비가 되지 않았지만 자기만 살겠다고 

인간성을 상실한 채 아비규환의 현실을 만드는 사람들까지

이 작품은 좀비로 은유한다. 

군체

'부산행'의 후속작으로 나왔던 '반도'는

이를 한반도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확장한 블록버스터였지만

생각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부산행' 이후 10년이 지난 현재 나온

연상호 감독의 '군체'는 그간의 변화된 사회상을 통해

보다 진화된 형태의 좀비를 은유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면이 있다. 

군체

그 10년 간 어떤 변화가 있었던가. 

바로 AI 시대의 도래다. 

인공지능 챗봇이 일상이 되어 갖가지 정보는 물론이고

여행계획부터, 주식정보 하다 못해 심리상담까지 다 해준다. 

그런데 이 인공지능의 기반은 사실상 우리가 만들어 내놓은 데이터들이다. 

그 데이터들이 공유되는 것이고, 그래서 똑같이 소비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군체'는 바로 이러한 똑같은 정보의 공유가 일견 진화이자 도약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 그것 역시 누군가에 의해 보다 쉽게 조종될 수 있는 것으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사고를 오히려 방해하는 퇴화라는 걸 

군체라는 새로운 좀비군을 통해 그려낸다. 

군체

어느 특정 시간이 되면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 보며 정보를 공유하는 모습이나,

앤트밀처럼 뱅뱅 소용돌이를 치며 도는 좀비들의 모습,

무엇보다 서영철(구교환) 같은 빌런에 의해 조종되는 모습은

결코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좀비일 뿐이라는 걸 강조해 보여준다. 

'군체'는 바로 이 새로운 AI 시대의 은유를 통해

진화된 좀비를 내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목할만한 작품이다.

군체

좀비가 진화되자 그 표현도 진화한다. 

'부산행'이 브레이킹을 하는 춤꾼들을 투입시켜 

독특한 K좀비의 다이내믹한 동작들을 탄생시켰다면

'군체'는 이들의 군무를 더해 넣는다.

여러 명이 달라붙어 하나의 군체가 된 좀비의 형상들이 

마치 현대 무용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군체

사실 좀비라는 장르는 우리가 아니라 서구에서 등장한 것이지만

그걸 창의적으로 재해석해 끝없이 진화시킴으로써

이제는 우리가 그 좀비의 종주국이 된 듯한 느낌이다.

그 전면에 연상호 감독이 있다. (사진:영화 '군체')

2026.6.10

 

728x90

똑같은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영화 '살인의 추억(2003)'과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허수아비'는 그 접근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살인의 추억' 때만 해도 이 사건은 '화성연쇄살인사건'으로 불렸다.

범인이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수아비'가 방영되는 현재 우리는 이 사건을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으로 부른다. 

이 사건이 이춘재에 의해 벌어졌다는 사실은 2019년에서야 비로소 밝혀졌다. 

첨단 DNA 감식 기술을 통해서다. 

허수아비

그래서 '살인의 추억'이 당시 끝내 잡지 못했던 범인을 잡고 싶은

형사들의 지독한 열망(그래서 엇나가기도 하는)을 담았다면,

'허수아비'는 뒤늦게야 특정된 범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왜 그 때 그토록 많은 피해자들을 내면서도

범인을 잡지 못했던가에 대한 반성적 시선을 담았다. 

 

끝까지 범인을 추적하고 그 진실을 알기 위해 몸부림치는 형사 강태주(박해수)와

범인을 잡으려 하지만 목적은 개인적인 욕망(인정욕구)에 있는 검사 차시영(이희준)의

때론 공조하고 때론 갈등하며 때론 대결하는 혐관 수사는 

바로 그런 어째서 범인을 잡지 못했는가에 대한 단서들을 담는다. 

허수아비

어떻게든 범인을 빨리 잡아 세상의 질타로부터 벗어나고

개인적인 인정을 받으려는 차시영은 

강태주와는 다른 타락한 형사들의 고문 수사를 방조하면서까지

무고한 이들을 범인으로 둔갑시킨다. 

그 과정에서 강태주의 여동생과 사귀던 이기범(송건희)이 고문후유증으로

풀려난 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은 

당시 연쇄살인사건의 피해자들이 직접 살해당한 당사자들만이 아니었다는 걸 말해준다.

 

이 드라마는 그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차시영과 타락한 형사들이 포상을 받기 위해

발견한 어린 아이의 시신을 다시 매장해버리는 상황까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 상황을 숨어서 지켜본 진범의 시선까지. 

허수아비

드라마는 흥미로운 교차편집을 통해

타락한 형사들이 무고한 이들을 잡아 고문을 일삼는 장면들과

연쇄살인범이 피해자를 무참히 죽이는 장면들을

병치해서 보여준다. 

그건 그 야만의 시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암시한다. 

타락한 형사들이나 연쇄살인범이나 크게 다를 바 없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무너뜨리는 일을 해왔던 시대가 그것이다. 

 

최고 시청률 7.4%(닐슨 코리아)에 이를 정도로 

ENA 채널 사상 높은 관심과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이 작품은

다만 과거사의 새로운 구성이 가진 재미적 차원 그 이상의 사회적 정서들을 건드린다.

그것은 제대로된 공권력이나 사회시스템이 작동하지 못할 때

직접적인 피해자들은 물론이고 억울한 피해자들 또한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허수아비

그많은 재난과 사건사고들이 터지고 

그로 인해 많은 피해자들이 생겼지만

그 진상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또 다른 피해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허수아비'라는 제목은 그래서 여러 은유적인 느낌을 준다. 

허수아비 같은 시스템의 무력감이 느껴지는 제목이 아닌가. (사진:ENA)

2026.5.19 

728x90

박해영 작가의 신작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는

일단 그 긴 제목이 시선을 끈다. 

여기에는 '모두'라는 단어가 들어 있어서다. 

<나의 아저씨>, <나의 해방일지>가 그렇듯

이전까지 박해영 작가의 작품들은 '나'를 내세웠다. 

그러니 이 작품은 박해영 작가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나'의 차원에서 '모두'의 차원으로 넘어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게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전작들이 그러하듯이 

이번 작품에서도 사회에서 빗겨나 존재 소멸의 위기에 처한 인물이 등장한다. 

황동만(구교환)이 그 주인공이다. 

20년차 영화감독이라지만 아직 데뷔도 못한 그는

공식적으로는 '무직'이나 다름 없는 취급을 받는다. 

특히 같이 시작했던 친구이자 선배들이 모두 데뷔했기 때문에

그는 천덕꾸러기다. 

영화감독과 무직 사이의 괴리처럼

그는 소외되어 있고 그래서 존재 소멸의 불안을 겪는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남 잘 되는 거에 미쳐 죽고, 남 안 되는 거에 행복해 주는 모습은

주변인들에게는 민폐이자 극혐이지만

그 자신에게는 생존 투쟁에 가깝다.

존재 소멸의 불안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자신이 살아있다고 자꾸만 떠들어대게 되고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을 혼자서라도 뒷산에 올라 외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민폐와 짠함을 오가는 이 문제적 인물과

대척점에 서 있는  박경세(오정세) 감독은 

영화 다섯 편을 찍었다며 자신과 황동만은 급이 다르다고 말하지만

그 역시 존재 소멸의 불안 공포를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 한 편이 나락 가면 자신도 저 황동만처럼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그 역시 끝없는 인정투쟁을 하게 되는데

그가 황동만을 못잡아먹어 싸우려 드는 건

사실 자신이 그렇게 되고 싶지 않고 그래서 자신이 그와는 다르다는 걸

애써 강변하기 위함이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여기서 '나'의 개인적인 문제는 '모두'의 문제로 바뀐다. 

황동만이나 박경세나 그리 다른 처지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리고 드라마는 이 인정투쟁의 대열에 다양한 인물들을 끼워 넣는다. 

유일하게 황동만의 가치를 바라봐주는 변은아(고윤정)는

그렇게 된 이유가 자신 또한 존재 소멸의 불안 공포를 트라우마로 갖고 있어서다.

어려서 버려진 유기공포를 가진 그녀는

존재의 모멸감을 느끼게 만드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반응한다. 코피가 흐른다. 

한편 황동만의 형 황진만(박해준)도 한때 시를 썼던 문학인이지만 

지금은 건설현장에서 용접일로 입에 풀칠하며 살아간다.

꿈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황진만은 동생 황동만에게

생산성 있는 일을 하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가 희석되고 있다는 불안과 절망에 휩싸여 있다. 

하루하루 술로 버티며 간간히 자살 욕구까지 느끼는 그는

사실 황동만이 걱정해 함께 살 정도로 더 위태위태하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이 작품은 이처럼 모두가 저마다의 인정 투쟁의 장 안에서

존재 소멸의 불안감을 느끼는 광경들을 포착해낸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모두가 자신의 존재 증명을 하지 않으면 무가치하다 낙인 찍는 사회 시스템이 그 주범이다. 

그 인정 투쟁의 장을 동력 삼아 사회가 움직이고 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 모두는 끝없는 저마다의 인정 투쟁 싸움을 치러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과연 이 문제를 박해영 작가는 어떻게 돌파하고 뛰어넘으려 할까.

전작들에서는 망해도 괜찮다는 인식의 전환(나의 아저씨)이나

가짜 행복을 직시하고 진짜 행복을 추구하는 해방(나의 해방일지)을 얘기했다. 

하지만 아마도 이번 작품에서는 모두를 인정투쟁의 장에 올리는 시스템을 직시하라고 하지 않을까.

그래서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그 사실을 깨닫고

싸움의 대상이 우리들끼리가 아니라

우리를 그 인정투쟁에 몰아넣는 시스템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인물간의 역학으로 말한다면

황동만과 변은아의 관계처럼

서로가 서로의 불안을 키워내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그 불안을 지워주는 새로운 관계의 제시가 아닐까 싶다. 

2026.4.29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