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과 한소희 주연의 영화 <인턴>은 

2015년 상영됐던 로버트 트니로와 앤 헤서웨이 주연의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시니어 인턴과 한 성공한 신세대 CEO.

세대가 다른 두 사람이 업무적으로 얽히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그 소재는 같지만 원작과 리메이크 사이에 변화된 지점들이 있다. 

인턴

먼저 원작은 디지털과 아날로그,

빠른 속도의 성장과 느려도 워라밸을 지키는 성장 사이의 부딪침과 상생이 주로 그려진다. 

즉 디지털을 상징하는 인터넷 회사에 들어간

아날로그의 시니어 인턴이

오히려 그 속도감에 지쳐버린 대표와 직원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고속 성장만이 아닌

속도를 늦춘 워라밸 성장으로 가는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인턴

하지만 리메이크에서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관점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시니어 인턴이라는 나이든 세대가 

젊은 세대들의 일터에서 때론 배제되기도 하고 투명인간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특유의 포용력과 경륜으로 그들의 마음을 하나하나 얻어가며

회사에도 도움을 주는 과정을 그린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 시니어 세대가 젊은 세대를 바라보는 부성애 같은 관점이다. 

아빠로서 마치 자식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인턴

관객에 따라서는 이 관점이 호불호를 불러 온다.

원작이 갖고 있는 세대를 달라도 위아래가 없는 영어권의 쿨한 정서가

리메이크에서는 부성애 관점으로 보다 질척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찌보면 한국적인 정서가 들어간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건 나이든 아저씨와 젊은 CEO 여성이 만들어가는 관계가

자칫 부성애적 관점이 아니면

부적절한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한국적 정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턴

그래서 애초에 존칭이 없는 영어에서는 

그 쿨한 관점이 서로를 성장시키는 이야기로 그려지지만

리메이크에서는 순간 존칭이 깨지는 어떤 순간이 주는

아버지와 딸 같은 관계의 등장이

눈물을 자극하는 장면으로 그려진다. 

 

호불호가 갈리는 어느쪽이든 틀린 건 아니다.

그건 그런 느낌을 갖는 자신의 취향이나 생각에 따라 달리 나올 수 있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결과가 어떨지는 궁금하다. 

추석 명절을 맞아 이 부성애를 강조하는 <인턴> 리메이크는 얼마나 관객들의 마음을 끌어낼 수 있을까. 

그 결과는 어쩌면 한국 사회가 취향이나 생각에 있어

어떤 변화의 지점에 도달해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일 수도 있을 게다.(사진 : 영화 '인턴') 

2026년 9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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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가 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문을 열어 그들을 들이고, 밥 한 끼를 대접하고 나아가 하룻밤 지낼 잠자리를 제공하는가.

사극을 보면 '이리 오너라'하고 부르고,

'지나가는 과객이온데 하룻밤 묵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나그네를

선선히 재워주는 주인도 등장하지만

지금 그런 광경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제 아파트를 들어가는 일도 주민이 아니면 갖가지 보안절차를 거쳐야 하는 일이 되지 않았나.

하나의 아파트 단지는 그래서 그들만의 요새처럼 여겨진다. 

누구도 쉽게 발을 들일 수 없는. 

오디세이

우리에게 트로이 목마로 잘 알려진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이 관점으로 바라보면 흥미롭다. 

오디세우스의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 성벽의 단단히 닫힌 문 앞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낸 끝에 트로이 목마라는 지략으로 드디어 문을 연다.

이로써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 되지만

과연 그가 한 행위는 영웅으로 칭송받을 일이었을까. 

 

아니다. 그는 '아테나 여신에게 바칠 제물'이라는 거짓말로

문을 열고 트로이 목마를 받아들인 트로이 사람들을

약탈과 살상의 비극에 빠뜨린 장본인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는 바로 이런 '환대'의 관점이 투영된 오디세이아를 그리고 있다. 

오디세이

영화가 시작되면 모두가 트로이 목마의 전쟁 영웅담이 먼저 펼쳐질 걸 기대하게 되지만

실상 영화는 이타카의 궁 연회장을 가득 메운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는 장면으로 문을 연다.

이들은 승전 소식을 알려왔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은 오디세우스가 죽었을 거라고 단정한 채

페넬로페와 결혼하려는 자들이다. 

그들은 '대접 받고 싶은대로 대접하라'는 제우스의 법에 따라

페넬로페의 환대를 받는 자들이지만

사실상 음식이나 축내는 걸인들과 다름 없고

페넬로페와 결혼해 권력을 쟁취하려는 승냥이 같은 자들이다. 

즉 영화는 손님으로서 환대의 정신을 보여주지 않는 자들과

그럼에도 주인으로서 저들은 환대하는 이를 대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트로이 목마에 대한 스펙터클한 이야기는

기억을 잃은 채 어느 섬에 갇힌 채 칼립소와 나누는 대화와

아버지를 찾아나선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를 통해 들은 이야기로 그려진다. 

오디세우스와 함께 트로이 목마에 타고 싸웠던 메넬라오스는 

그 전쟁을 영웅담으로 텔레마코스에게 전하지만

정작 오디세우스는 그 트로이 목마가 지우고 싶은 상처처럼 남아있다. 

그건 '대접 받고 싶은대로 대접하라'는 제우스의 법을 어기고

트로이인들을 속여서 얻은 승리였고

그로 인해 무수한 트로이인들이 도륙당하고 도시가 불타는 지옥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오디세이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라는 고전이

10년 간의 그리스연합군과 트로이의 전쟁을 그린 '일리아드'와

승전 후 무려 10년 간이나 걸린 귀향의 과정을 그린 '오디세이'를 담었다면

이를 현재적으로 재해석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는

그 10년간의 귀향을 사실상 '참회의 시간'으로 그려낸다.

그는 이 영화에서 전쟁영웅이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고 이를 반성하는 참회자다. 

 

그래서 결국 그 트라우마처럼 깊은 상처를 남겨

지워버렸던 기억을 되찾은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와 보여주는 건

손님을 가장한 채 주인행세를 꿈꾸는 자들에 대한 단죄다. 

오디세우스는 마치 '트로이 목마'처럼 자신을 걸인으로 위장한 채

이타카성에 들어가는데, 저 걸인이나 다를 바 없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 

그를 환대하지 않는 걸 겪는다. 

자신이 깼던 '제우스의 법'으로 10년간 바다를 떠도는 형벌을 받고 깨달음을 얻은 오디세우스는

저 '제우스의 법'을 깬 자들을 도륙한다. 

오디세이

어째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오디세이'라는 고전을 가져와

굳이 '환대'의 관점으로 재해석했을까.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뭐든 하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그 승리한 이를 영웅이라 일컫기도 하는 세상을 꼬집기 위함이다. 

오늘은 종전을 선언했다가 내일은 다시 '잔혹한 대가' 운운하며 협박을 일삼는

우리 시대의 비극을 저 수천 년 전 고전을 통해 상기 시키는 것.

우리는 과연 문밖의 낯선 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대하고 있는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사진:영화'오디세이')

202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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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사의 완결성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나홍진 감독의 신작 영화 '호프'는 어딘가 아쉬운 후반부를 남긴다.

그건 시즌2를 겨냥한 것일 수 있지만

만일 시즌2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 엔딩이 이 '미친 영화'를 괴작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호프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이창동 감독은 GV를 통해 이 작품을 '미친 영화'라고 했다.

'미친 영화'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로도 들린다.

미쳤다는 뜻이 진짜 미쳤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으면서

동시에 너무나 재밌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 표현은 역시 소설가 출신 감독 답게 적확하다 여겨진다.

호프

'호프'는 미친 영화다. 

이 말도 안되는 실험을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서 끝까지 밀어부쳤다는 점에서 미쳤고

그 실험의 엔딩을 이토록 괴작에 가깝게 끝내버렸다는 점에서 미쳤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액션의 과정들이 미칠 정도로 재밌다는 점에서 미쳤다. 

호프

그러니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이 작품을 보러 가는 관객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다.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

대신 과정을 즐겨라. 

그렇다면 충분히 즐기고도 남을 도파민 액션의 끝판을 볼 수 있을 테니. 

 

과정의 재미에는 스릴러, 크리처물 심지어 SF까지 나가는 장르의 무한 하이브리드와

한국의 시골마을과 서구의 외딴마을을 겹쳐 놓은 듯한 문화적 하이브리드

엄청난 속도감과 타격감

미칠 듯이 달려나가면서도 간간이 웃음이 터지는 유머까지

한마디로 다채롭게 뒤섞여 있다. 

호프

그런데 이런 하이브리드는 한국인들에게는 이미 익숙하다.

비빔밥이 산채만 들어가는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어묵도 들어가고 햄도 들어가도 별 문제가 없다는 걸 알고 있고,

경복궁에 서서 저편을 보면 고궁과 빌딩이 독특하게 어우러진 풍경을 

우리만큼 익숙하게 매일 바라보며 사는 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이브리드가 현재 K콘텐츠가 가진 저력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거다. 

뭐든 섞어서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맛을 내는 게

K콘텐츠의 특징이 아닌가. 

호프

이방의 존재가 들어와 벌어지는 마찰을 줄곧 그려온 나홍진 감독은

그런 점에서 일찍부터 비빔의 민족 다운 실험들을 계속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추격자', '광해', '곡성'에 이어 '호프'까지 그 실험을 끝까지 밀어부치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조인성과 정호연의 액션은 상상 이상이다.

조인성이 말을 타고 달리며 보여주는 액션이나

차와 말 사이에 양발을 얹고 달리며 보여주는 액션은

정말 '미쳤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극장에서 봐야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뜨거운 여름, 시원한 극장에서 서늘한 공포와 짜릿한 속도감의 세계를 경험해보길 권한다.

끝을 기대하지 말고 과정을 즐기면서.(사진 : 영화 '호프')

2026.7.20

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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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에는 '상자 속의 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막에서 만난 비행사에게 양 한 마리만 그려달라는 왕자에게

비행사가 양을 여러 차례 그려주지만

마음에 들어하지 않자 상자 하나를 그리고는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는 양은 이 안에 있어."라고 말하자

왕자가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라고 하는 대목이다. 

상자 속의 양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상자 속의 양'은 

바로 그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다. 

사고로 아들을 잃은 오토네(아야세 하루카)와 켄스케(다이고) 부부가

아들 카케루(쿠와키 리무)의 얼굴과 기억을 가진

휴머노이드를 집으로 들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진짜 아들이 아니라 휴머노이드지만

오토네는 그를 점점 아들 카케루처럼 대하기 시작하고

애써 그건 로봇에 불과하다고 부정하던 켄스케 역시

아들의 기억을 가진 휴머노이드를 아들처럼 대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상자 속의 양

하지만 그 휴머노이드가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부는 

휴머노이드가 몰래 집을 나가 낯선 무리들과 어울리는 걸 보게 되면서 알게 된다. 

그 무리들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버려진 휴머노이드들이다. 

그들은 자신들끼리 살아가려 하고 

카케루 휴머노이드에게 다 함께 살 집을 설계해달라고 요청한다. 

 

카케루 휴머노이드가 집을 설계하게 된 건

함께 사는 오토네와 켄스케 부부가 집과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오토네는 누군가 살 집을 디자인 하는 일을 하고 있고

켄스케는 나무를 다듬어 가구 같은 걸 만드는 일을 한다. 

카케루 휴머노이드는 부부에게 재료들을 요청해 휴머노이드들이 살 집의 모형을 만든다. 

상자 속의 양

영화는 오토네와 켄스케 부부가 

휴머노이드를 통해 사실 자신들의 욕망을 풀어내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들의 죽음으로 오토네는 자신의 상실감을 휴머노이드로 채우려 하고

켄스케는 자신의 죄책감을 휴머노이드로 풀어보려 한다. 

그 상처와 아픔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그들의 욕망일 뿐이다.

휴머노이드는 그저 그 욕망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부부는 자신들이 휴머노이드를 그저 욕망의 도구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휴머노이드가 집을 나가 버려진 그 존재들끼리 새로운 터전을 꿈꾸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오토네는 말한다. "상자 속에 있었던 건 엄마였구나." 

'상자 속의 양'이란 결국 그 안에 있는 걸 양으로 상상해서 가능한 일이다. 

오토네가 어찌 보면 영혼이 없는 빈 상자기계에 불과한 휴머노이드를 아들로 생각한 건

자신의 욕망이 만들어낸 상상일 뿐이다. 

상자 속의 양

결국 부부는 이 휴머노이드들을 자신들만의 터전으로 보내주기로 한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 지는 알 수 없지만

카케루 휴머노이드가 그린 거대한 나무에 둥지처럼 마련한 터전으로

그들을 데려다 준다. 

 

'상자 속의 양'은 이미 AI 시대에 들어온 우리들이

이 텅빈 상자에 불과할 수 있는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상상할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인간의 욕망을 투영해 마음대로 쓰고 버리는 도구로 상상할 것인지

아니면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상상할 것인지를 묻는다. 

상자 속의 양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이 부부의 직업이 은유하는 '상자 속의 양'에 대한 것들이다. 

집을 디자인하는 오토네는 텅빈 땅 위에 나무로된 목재와 유리 그리고 실제 나무를 심어

가족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을 상상한다. 

나무와 목재, 유리는 저 자연물로부터 인간에 의해 옮겨지고 변형된 것이지만

그걸로 오토네는 예쁜 집을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것이다. 

켄스케 또한 수백년 된 나무를 연마해 

아름다운 문양의 목재를 만드는데

그것으로 지어질 집이나 가구를 상상한다.  

 

즉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무언가를 가져와 상상해온 것들을 만들어낸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떤 상상을 할 것인가다. 

상자 속은 그래서 무한한 가능성이자 미지수가 된다. 

그건 판도라의 상자일 수도 있지만

아름다운 양이 들어 있는 상자일 수도 있다. 

여러분들은 그 빈 상자 속에 무얼 상상할 것인가. (사진 : 영화 '상자 속의 양')

2026.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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