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잠시 내려서 자신이 달려온 쪽을 바라본대요. 

그건 자기가 쉬려는 것도 아니고 말을 쉬려 하려는 것도 아니고

혹시라도 걸음이 느린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기다려주는 배려였대요.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대요."

파반느

나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싶다는 경록(문상민)의 고민에

미정(고아성)은 의외의 인디언 이야기를 해준다. 

그러면서 말한다. 

"세상의 속도에 맞추지 말고 나의 속도로 살아가면 좋을 거 같아요."

파반느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파반느>는 바로 이 속도에 대한 영화다. 

세상의 속도와 나의 속도. 

세상이 맞다고 주장하는 삶과 나의 삶.

모든 이들이 가는 길과 내가 가고 싶은 길.

세상의 잣대와 나의 가치관...

이런 것들을 이 영화는 대결시킨다. 

파반느

경록과 미정 그리고 이들 사이에 큐피트처럼 들어온 요한(변요한)은

그 세상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청춘들처럼 보인다. 

경록은 배우가 된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린 어린 시절의 상처를 겪으며

세상의 잣대를 혐오하고 경멸하게 된 청춘이다. 

미정은 못생겼다는 이유로(그것도 저들의 잣대이지만) 백화점 동료들의 멸시를 받는 청춘이다. 

요한 역시 데이비드 보위를 추종하며 저들 똑같이 살아가는 이들을 냉소하는 청춘이다. 

 

세상의 속도와 다른 나의 속도는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내 속도가 맞고 세상의 속도가 틀리다 여기며

나만이 진짜고 저들은 다 가짜라 생각하지만

모두가 그 세상의 속도로 달려가게 되면서

나만이 가짜이고 저들이 진짜는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파반느

경록이 그렇게 흔들릴 때

미정이 해주는 인디언 이야기는 그래서

그를 진짜이게 해준다. 

그의 속도가 맞다고 얘기 해준다. 

파반느

사랑이 나를 진짜이게 해주는 어떤 것이라면

경록과 미정은 그런 사랑을 시작한다. 

세상의 속도에서 비껴나 가짜라 손가락질 받던 청춘들은

그래서 서로의 속도를 바라봐주며 

서로가 진짜라는 걸 알게 해주는 사랑을 한다.

그렇게 서로에게 빛이 되어 주는 사랑을 한다. 

파반느

인디언의 말 달리는 이야기에서 등장하듯

이 영화에서 '달린다'는 이미지는 중요한 의미로 반복된다.

서로가 서로를 부르고 원했을 때  

그들은 상대를 향해 달려간다. 

그렇게 숨가쁘게 달려온 서로에게 그들은

"왜 달려왔어요? 걸어와도 괜찮은데."라고 말한다.

걸어와도 되는데 달리게 되는 그 초조한 마음에서

청춘의 서투름과 그래서 더 비극이 될 수도 있지만

절절히 빛나는 마음들이 눈송이처럼 따뜻하게 피어난다.  

파반느

청춘의 사랑을 그린 청춘멜로지만

삶의 속도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여러 번 복기하면 할수록 깊은 맛이 느껴지는.

너무도 아련한.

(사진: 영화 '파반느')

2026.2.26

스파이물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 이들이 사람 같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 같지 않다...

그건 그만큼 임무에 집중해 사적 감정 같은 것들이 개입하지 않는 쿨함을 보인다는 의미이면서

임무 도중 죽어도 그 정체나 존재 자체가 지워지기도 하는 쓸쓸함이 느껴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임무를 띠고 정보를 파내는 일을 하는 그들도 사람이다. 

총에 맞으면 뜨거운 피를 흘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마음 아파하는 사람.

휴민트

류승완 감독의 영화 <휴민트>는 바로 이 쿨함과 쓸쓸함이 교차하는 세계를 그렸다.

휴먼과 인텔리전스를 합성해 만든 <휴민트>라는 제목 자체가 그렇다.

정보원으로 일하는 이들이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휴민트

블라디보스톡을 배경으로 북한 식당 종업원 채선화(신세경)를 정보원으로 세워

국정원 조과장(조인성)은 국제 인신매매 범죄를 추적한다.

한편 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이 블라디보스톡에 오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국경에서 발생하는 북한 인민들의 실종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갑자기 모질게 흔적도 지우고 떠나버린 연인 채선화를 만나기 위해서다. 

휴민트

채선화를 통해 조과장은 사건의 배후에 북한 총영사 황치성(박해준)이 연루된 걸 알게되고

박건 또한 채선화가 위험한 상황에 놓인 걸 알고는 그를 도우려 한다. 

남과 북으로 나뉜 두 사람이지만

채선화를 구해내기 위한 공조가 펼쳐진다. 

"내 휴민트"를 구하기 위해

또 "내 사랑"을 지켜내가 위해.

휴민트

스파이물로 시작한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면 거의 <첩혈쌍웅>에 가까운 짜릿한 액션으로 바뀐다.

역시 류승완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타격감 있는 액션들이 펼쳐진다.

물론 본격 액션이 그려지기 전까지 

스파이물 특유의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스릴러의 묘미도 빼놓을 수 없다. 

휴민트

여기에 남북한이라는 분단 상황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독특함이 더해지고

현재 가장 주목되는 대세배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박정민과

총만 들고 서 있어도 화보 같은 조인성

그리고 대사 한 번만 들어도 진짜 타락한 북한 총영사 같은 능구렁이 같은 살벌함을 보여주는 박해준

또 이 작품의 귀결점이자 보는 이들로 하여금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만드는 신세경이 보여주는

미친 연기의 향연이 펼쳐진다. 

 

액션의 향연에 시간순삭 몰입되는 영화의 묘미도 묘미지만

결국 '인간애'로 귀결되는

스파이물과 액션의 메시지도 울림의 여운이 적지 않다. 

오랜만에 보는 극장에 걸맞는 영화의 맛이랄까.

휴민트

명절에 즈음해 개봉한 사극 <왕과 사는 남자>와 더불어

<휴민트>는 분명 이 연휴를 책임져줄

극장의 '첩혈쌍웅'이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스파이물과 액션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두 시간 내내 꽉 채워진 짜릿함을 느낄 수 있을 게다. 

2026.2.16

왕과 사는 남자

우리네 역사에서 단종만큼 비극적인 왕이 있을까.

부왕인 문종을 일찍이 여의고 겨우 10살의 나이에 보위에 올랐다.

하지만 즉위 1년만에 숙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잃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단종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이 모두 처형되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너구리도 졸도하는' 오지의 섬 청령포로 유배를 갔고

그 곳에서 죽음을 당했다. 

 

역사에서 패자는 주목받지 못하는 법.

단종 역시 역사의 뒤안길에 안타까운 패자로 보여졌을 뿐,

새롭게 재조명되지는 않았다. 

<관상> 같은 영화에서도 오히려 주목된 건

"내가 왕이 될 상인가?"라는 명대사를 남긴 수양대군이 아니었던가.

 

장항준 감독의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왜 이토록 어린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이야기를 다시 가져왔을까. 

그건 이 인물이 현 시대의 청춘들을  대변하는 듯 보여서였을 게다. 

결국 단종의 비극은 권력욕에 눈이 먼 수양대군이나 한명회 같은 간신들이 저지른 반역으로

그 피해를 온통 남은 청춘들이 겪게 된 사건이다. 

영화는 그래서 단종(박지훈)은 물론이고 그가 유배됐던 청평포 광천골의 청년 태산(김민)의 고초를 담는다.

사리사욕에 눈먼 잘못된 정치가 후대에게 어떤 비극으로 돌아가는가를 이들을 통해 보여준다. 

왕과 사는 남자

유약한 인물로만 막연히 그려지곤 했던 단종의 모습과 달리

<왕과 사는 남자>에서 단종은 때론 위엄있고 때론 자애로우며 때론 용맹한 왕으로 그려진다.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는 호랑이와의 에피소드가 상징적인데

아마도 수양대군을 표징하는 듯한 호랑이 앞에서도 "네 상대는 나야"라고 나서는 단종을 보고

사람들은 "역시 왕은 왕"이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단종만이 아니다.

그의 마지막을 지킨 실존인물 엄흥도(유해진)가 또 한 명의 주인공이다. 

엄흥도는 단종이 사사된 후 버려진 시신을,

삼족을 멸한다는 수양대군의 엄포에도 굴하지 않고 수습했던 인물이다. 

역사에 단 몇 줄로 남은 이 인물을 장항준 감독은 유쾌하고 사람냄새나는 어른의 모습으로 그려낸다. 

유배된 단종을 감시하라는 명을 받지만

그는 살뜰히 단종의 밥상을 챙기며 안위를 걱정하고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위하는 것처럼 따뜻하게 보살핀다.

왕과 사는 남자

역사가 이미 스포인 비극이지만,

영화는 엄흥도라는 민초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인물을 세워

해학과 웃음 또한 빼놓지 않는다.

아마도 장항준 감독은 이 안타까운 청춘의 마지막 순간을

엄흥도와 그 마을 사람들의 사람냄내 나는 정으로

꼭 보듬고 싶었던 모양이다. 

단종의 비극을 보듬어주는 엄흥도의 희극이 보는 이들을 웃다가 먹먹하게 하고

끝내 비극 앞에 눈물을 짓게 만든다.

왕과 사는 남자

그래서 영화는 두 개의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왕은 누구인가"가 그 첫번째 질문이다.

이것은 현재에도 우리가 단종을 강등된 호칭인 노산군이 아닌 단종으로 부르고

대신 세조를 '수양대군'으로 부르는데서 그 답이 있다. 

우리에게 진짜 왕은 단종이다. 

 

두번째 질문은 "진정한 어른은 누구인가"다.

권력에 눈이 먼 한명회 같은 간신이 아닌

가난해도 가치있는 삶을 선택한 엄흥도가 바로 그 어른이다. 

 

역사에 상상력을 살짝 더한 작품이지만

과거가 아닌 현재를 환기시키는 작품으로 그 울림이 적지 않다. 

2026. 2.6

이상한 동물원

동물원만큼 우리의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드러내는 곳이 있을까.

존 버거는 '왜 동물들을 구경하는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동물원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실망시킨다.

동물원의 공적인 존재 목적은 관람객들에게 동물을 구경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원에 처음 들어선 사람이 그 곳에서 동물다운 동물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는 장소란 어디에도 없다.

고작해야 깜박이며 스치듯 외면해 버리는 동물들의 시선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존 버거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동물원이 근대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로

인간과 동물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무너뜨리는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제국주의시대에 본다는 것은 '지배한다'는 권력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당대의 동물원에는 동물들만이 아닌 식민지 원주민들도 전시되어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으니까. 

이상한 동물원

하지만 우리의 익숙해진 동물원 경험들은

그 진짜 '동물다운 동물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동물들조차

진짜 동물처럼 여기는 인식의 오류를 불러 일으킨다. 

그만큼 인간중심적으로 바뀐 세상에 타자로서 동물들의 위치는 딱 그 철창 안의 모습 정도라고 우리는 착각한다. 

실로 요즘 세상에 맹수에 물려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 일은 거의 사라졌으니

맹수란 저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우리는 인지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동물원들은 눈속임을 한다. 

늘상 동물원을 찾으면 맥없이 늘어져 있는 맹수들을 보며 실망하는 구경꾼들 때문이다.

병들고 나이든 동물들이 잘 안보이게 된 건 그래서다. 

 

SBS 2부작 다큐멘터리 '이상한 동물원'은 바로 이 지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이상한 동물원은 청주동물원이고

그 동물원을 이상하게 운영하는 사람은 수의사계의 이국종이라 불리는 김정호 수의사다. 

이 동물원은 병들고 나이든 동물들이 가득하다.

이상한 동물원

죽어서야 나올 수 있다는 좁은 철창에 갇혀 지내다 겨우 살아나온 반달곰.

흙도 풀도 없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지내다 삶의 의지 자체를 잃어버린 사자.

도시에서 발견됐지만 보낼 곳이 없어 안락사 직전까지 간 여우.

선천적으로 부리에 장애를 가진 독수리.

백내장에 걸린 수달...

다른 동물원들이 기피하거나 숨기려 하는 동물들이 이 이상한 동물원에는 가득하다. 

 

"그 전에는 동물원에서 부상을 입어서 장애가 생기면 뒷공간에 있었어요.

보여주기 좀 어렵다. 사람들이 불편해한다? 

영구 장애 동물들을 데려오면서 사람들이 공감을 어느 순간부터 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동물원에는 어리고 건강한 동물들만 있을 수는 없다."

 

김정호 수의사는 장애동물과 약자동물들에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된 건 형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장애 때문에 바보라 놀림받다 끝내 실종된 형을 보호해주지 못했다는 회한이 그에게 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야생으로 갈 수 없는 야생동물들은 동물원으로 와서 생을 이어간다.

그들이 구조되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동물원에 온 아이들이 보고 듣게 될 것이고

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선 우리 형은 더이상 바보가 아닐 것이다.'

 

동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가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겹쳐진다.

과거 동물 프로그램들이 구경의 차원에서 인간화의 방식으로 그리고 반려와 공존의 차원으로 

계속 관점이 바뀐 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타자를 보는 시선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이상한 동물원

 

그래서 김정호 수의사의 이런 질문과 관점은 

우리 사회의 '정상성 담론'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과연 장애인이나 노인, 어린이, 여성, 외국인 근로자 등등의 사회적 약자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그들이 혹여나 약자라는 이유로 세상에도 없는 존재 취급을 하는 건 아니냐고 질문한다.

동물원은 그래서 어쩌면 거대한 시스템으로 통제되어 있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거꾸로 말해 동물원을 구경의 공간이 아니라

동물의 진정한 안식처인 생추어리로 변화시키는 일은 

우리의 삶과 사회를 좀더 살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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