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시기에 아이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 아이의 하루를 생각해보는 것은 불안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아이의 생활을 파고드는 위해한 환경들이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광우병의 위험이 의심되는 미국산 쇠고기가 아이들의 급식으로 올려지는 건 아닐까.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걸리지는 않을까. 대량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유전자 변형 옥수수를 모르는 사이 먹고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한편 급증하고 있는 아이 성폭력 사건 사고에 재수 없이 휘말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회적인 불안감까지 걱정은 끝이 없다.
어른들이라고 해서 나은 것은 없다. 삶의 기본 조건이라는 의식주를 두고 볼 때, 나아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양적인 측면에서 볼 때, 먹거리와 집의 수가 늘어난 것은 맞지만 그 질적인 측면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엄청난 대량 소비의 길 위에서 가축들은 광우병 소, 구제역 돼지, AI 닭으로 땅에 묻히고 있으며, 채소들은 유전자 변형 옥수수, 농약 투성이 야채들로 식탁을 위협하고 있다. 아파트로 대변되는 주거생활은 오히려 서민들의 터전을 빼앗고 사는 집을 살(구매) 집으로 전락시켰다. 의복은 일견 과거보다는 그 상황이 낫다고 보일 수도 있다. 허나 옷이 그 실용적인 측면을 넘어서 과시의 대상으로 변질되면서 외면에만 치중하는 정신적인 공백 상태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길은 없다.
이처럼 의식주에 있어서 그 질적인 저하를 피부에 실감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오히려 부족하고 가난했던 시절의 풍족함(?)을 그리워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개발이란 본시 그 초반에는 풍요를 가져올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부족을 초래한다는 걸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불편한 집들이 불도저로 말끔하게 밀어내어지고 그 위에 지어지는 아파트의 편리함이 주는 대가는 의외로 크다. 그 대가는 대부분 자연의 파괴에서 비롯된다. 과거라면 어디서나 쉽게 밟을 수 있던 땅을 밟기가 어려워진 현대인들은 그 딱딱한 아스팔트 위에서, 시야를 저 끝까지 트이게 만들었던 낮은 집들 대신 세워진 고층건물들에 포위되어 있다. 아파트 한 채를 짓기 위해 들어가는 자재들은 또한 다른 곳에서 포획된 자연 채취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대가는 인간이 자연보다는 인공을 더 편안하게 생각하는 자연 외적인 존재가 되어간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자연과 유리된 사고방식이 초래하는 착각은 인간 자체를 포획 혹은 소비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인 이상, 개발 논리의 그물을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편리함은 다른 누군가의 불편함 때론 죽음이 되기도 한다. 즉 개발 논리의 끝은 결국 그 대상을 거기 살아가는 사람으로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 숙고되어져야 할 사안이다. 자연적인 흐름의 강줄기를 개발자의 입맛대로 바꾸겠다는 사고방식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 생명을 담보로 하겠다는 쇠고기 수입 문제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거기 사는 생명들에 대한 고려가 부재하다.
환경과 생명에 대한 장기적 안목 없이 눈앞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벌이는 정책적 결정이란 이제 밖을 나돌아다니기조차 불안해진 아이들의 현재처럼, 앞으로 아이들의 미래까지 불안하게 만들지 않을까. 그것은 지금도 이미 그렇지만 앞으로도 점점 생활을 생존으로 만들어 삶의 질을 끝없이 떨어뜨릴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란 그저 먹고 잠자고 거리를 마음껏 다닐 수 있는 대단할 것 없는 생활이 아닌가.
아파트 개발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주거의 양극화를 경험한 것처럼, 위생이 불분명한 먹거리의 무분별한 수입허가는 먹거리의 양극화 나아가 건강의 양극화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 양극화를 육체화시키는 이 과정은, 이제 개발의 논리가 우리네 몸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베트남에 와서 처음 눈에 띈 것은 오토바이였다. 베트남 하면 시클로라지만 이제 시클로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대신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는 개미집에 물을 부은 것처럼 끝없이 골목길에서 튀어나오고 사라지고를 반복했다.
가만히 그것들을 보고 있거나, 자동차를 타고 그 길에 서 있거나, 혹 그 오토바이들이 무차별로 달리는 그 도로를 건너야 할 때마다 삶은 죽음과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움직였다.
그래도 그 무질서 속에 질서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용케도 차들은 오토바이를 피해달리고, 오토바이들도 저마다 잘 가는 걸 보면...
그리고 바오밥 나무를 보았다. 뿌리가 온통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은 그 나무는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가지들과 둥치가 달라붙어 있었다.
메콩강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배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데 그 곳이 도대체 어딘지 모를 정도로 오지였다.
길도 없고 강도 미로처럼 휘어져 나가있는 이 도시에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
저것이 자연이다. 무질서해보이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는 흐름 같은 것. 사람이 가끔씩 차에 치이고 오토바이도 도로 밖으로 튕겨져 나가지만 몇 시간 뒤면 그 길 위로 수백 대의 오토바이가 다시 지나가고 그 흔적조차 사라지는 그것이 바로 자연이었다.
때로 자본주의는 생태주의와 정반대 개념이 되곤 한다. 인공적인 세계를 만들려 하는 자본주의는 늘 자연을 파괴한 연후에야 안심한다... 인간이 치르는 전쟁은 때론 자연이라는 변수와 부딪친다. 자본주의의 돈으로 전쟁을 치르는 인공의 힘, 무기들은 자연 속에서 때론 무기력했진다.
길도 보이지 않고, 지나갈 틈도 주지 않는 바오밥 나무 사이로 걸어나가면서 끝없이 개미들처럼 나타나는 적 앞에서 덩치 큰 이국의 병사들은 절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 자체를 폭탄으로 불질러 버리거나 고엽제로 고사시키려 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이기지 못했다. 자연 앞에서 그들은 한갓 미천한 인간일 뿐이었다.
베트남은 여전히 북적대고 자연은 자연 그대로 더러우면서도 생명력이 넘치고 있다. 그들은 져도 철저하게 진 것이다.
고단한 도시생활에 지쳐 며칠 쉬러 내려간 시골집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었나. 시간이 멈춰버린 듯 늘 그 자리에 앉아 언젠가는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묵묵히 한 때의 밥을 차려주시던 어머니에게서 당신은 무엇을 느꼈나. 허진호 감독의 영화 ‘행복’은 바로 그 때 느꼈던 포근함, 피폐해진 몸을 다시 되살려놓던 창조적인 힘, 잔뜩 중독된 생활 속에서 날카로워진 신경을 보듬는 해독의 손길, 그런 것들로 인해 충만해지는 생명감 같은 걸 느끼게 해주는 영화다.
클럽이 망하고, 술 담배에 몸도 망가진(간경변이다) 영수(황정민)는 도시생활에 지쳐 시골 요양원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거기서 자연을 닮은 은희(임수정)를 만난다. 그녀는 폐 질환 환자로 8년 째 요양원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사랑을 한다. 허진호 감독이 캐릭터들의 몸을 병으로 망가뜨리고 이토록 먼 길을 떠나 시골 한적한 곳에서 둘을 만나게 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 직전에 가서야 순수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욕망이 아닌 사랑을 하곤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가까이 있어 두려우면서도 살아있다는 것 자체 하루 하루가 소중해지는 시간, 영수는 도시에서는 잊고 있었던 사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종종 도시적 삶의 재미로서의 쾌락과 혼동되어 왔던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 은희가 주는 자연의 사랑 속에서 영수는 회복된다. 그리고 회복된 몸은 제멋대로 소비적이고 중독적이며 파괴적인 도시의 삶을 욕망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된다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욕망의 존재가 가진 얄궂은 운명으로 제시된다.
시골에 눌러앉아 이제는 시골 일도 하면서 살아가던 영수(황정민)는 어느 날 아저씨가 일당을 주면서 권하는 맥주를 단번에 비워내고는 말한다. “술 담배 어렵게 끊었는데.” 그러자 아저씨가 담배까지 권하며 말한다. “건강에는 좋은데 재미가 없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영수는 그 순간 자신이란 존재의 가벼움에 픽 웃어버린다. 도시에서 찾아온 친구 동준(류승수)은 사랑과 행복감이 깃든 영수와 은희의 보금자리를 “한 평에 얼마냐”고 재단해 놓는다. 함께 온 옛 애인 수연(공효진)은 은희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예쁘시네요”라며 “오빠는 복도 많다”고 함부로 말한다. 그래도 영수는 그들에게 뭐라 대들지 않는다. 그저 함께 웃으며 유희적 삶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시골집 자연처럼 질박하지만 정성스런 사랑을 담아 낸 어머니의 밥 한 끼에 원기를 회복한 철부지 아들들이 다시금 뒤편에 자연을 두고 무정하게 도시로 떠나가듯 영수도 은희를 떠난다. 그리고 비로소 시골집과 자연과 사랑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는 것은 파괴된 몸에서 욕망의 끝을 보았을 때이다. 도시에서 옛 애인인 수연(공효진)과 동거하면서 방탕하게 살던 어느 날, 영수는 수연에게 말한다. “이렇게 사는 게 넌 재밌냐?” 재미를 좇던 삶이 파탄날 즈음, 영수는 그때서야 저 시골집이 주었던 진정한 행복감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게 된다.
영화 ‘행복’은 도시적 삶을 살아온 남자, 영수와 자연적 삶을 살아가는 여자, 은희의 사랑을 통해 단순한 남녀간의 멜로의 틀을 넘어선다. 영수와 은희는 사람을 피폐하게 하는 욕망으로서의 술, 담배와 그것을 회복시키는 약초처럼, 도시와 자연, 소비와 생산, 중독과 해독, 욕망과 사랑, 남성성과 여성성, 그리고 쾌락과 행복을 대변하는 캐릭터가 된다. 영화는 이로써 욕망하는 남자와 사랑하는 여자의 전형적 멜로드라마를 통해 “당신의 삶은 진정으로 행복한가”하고 묻는다.
도시로 친구와 애인을 만나러 왔을 때 영수에게 친구가 말한다. “우리 나이에 노후자금이 얼마가 필요한 지 알아? 4억 7천만 원이래.” 그 이야기를 은희에게 전하자 그녀가 말한다. “난 내일 없어.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면 안돼?” 감독은 아마도 이 대사를 통해 행복이 어디 있는가를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일이란 이름으로 경박한 수치의 돈 액수만큼의 두려움과 욕망을 부추기는 세상 속에서, 하루 하루를 그 자체로 행복하게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그것은 어쩌면 죽음을 달고 살기에 본질에 가까워져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은희 같은 이들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닐까. 왜 우리는 결국 대지모(大地母)에 한 점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