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한방', 희비극이 잘 엮어진 예능드라마

짠한 데 웃음이 나고, 우스운데 짠하다. KBS <최고의 한방>은 희비극이 무엇이라는 걸 제대로 보여주는 드라마다. 최우승(이세영)이 사귀던 남자친구가 자신의 룸메이트와 바람을 피우는 걸 박스 안에 숨어서 보다 들키는 시퀀스는 이 드라마가 가진 웃음과 짠함의 정체를 드러낸다. 자존심 상하고 창피한 우승이 박스를 뒤집어쓴 채 집밖으로 나가려 하고 그걸 막으려는 남자친구와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은 짠한데 웃음이 난다. 코미디가 가진 양면성, 즉 비극 속에 담겨진 희극적 요소가 주는 페이소스가 이 드라마에는 도처에 묻어난다. 

'최고의 한방(사진출처:KBS)'

힘겨운 공시생의 삶을 살아가는 우승은 일 년 간의 노력 끝에 들어간 시험장에서 갑자기 배탈이 나 결국 시험을 포기하게 된다. 그 상황 자체가 주는 절망감은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비극적 상황을 웃음으로 풀어낸다. 배탈을 애써 버텨내려는 우승에게 시험 문제지의 글자들, 즉 ‘고비, 폭발, 쏟아지는, 산사태, 배출, 터져 나온다’ 같은 단어들이 그녀를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만든다는 설정은 웃음이 난다. 

매달 평가와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일상으로 살아가는 기획사의 독종 연습생 혜리(보나)를 지훈(김민재)이 자꾸 자살하는 줄 알고 오해하는 장면이 반복되는 시퀀스들도 코미디적으로 처리되어 있지만 사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죽도록 연습을 해도 앞이 보이지 않는 그 청춘들의 땀과 눈물이 느껴진다. 그러니 그 연습생을 하도 오래해 ‘조상’으로 불리게 된 지훈이 월말 평가에서 대놓고 떨어지라 요구받은 랩에 자신의 심정을 담아내는 모습은 그토록 짠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엉뚱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버텨내고, 눈물이 흘러도 눈물샘이 막혀 생긴 질환이라고 말하며 넘어가는 이 청춘들이 어느 날 가로등 아래서 진짜 힘겨움을 슬쩍 드러낼 때 그 무표정이 사실은 온통 세상의 무게를 버텨내고 있는 얼굴이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이런 청춘들에게도 한 방의 기회는 과연 올 것인가. 

<최고의 한방>은 여기에 특별한 판타지 설정을 집어넣었다. 그것은 1990년대의 아이돌 스타 유현재(윤시윤)가 그 시대에서 갑자기 20년을 뛰어넘어 현재로 타임리프한 것이다. 유현재는 당시 최고의 스타로서 화려한 청춘을 구가했지만, 20년을 뛰어넘은 현재의 그는 어쩌다 지훈의 옥탑방에 얹혀 지내는 신세가 된다. 왜 <최고의 한방>은 최근 드라마에 많이 등장해 자칫 식상하게 느껴질 우려가 있는 타임리프 설정까지 굳이 집어넣어 90년대의 청춘과 현재의 청춘을 연결시킨 걸까.

그것은 아마도 현재의 청춘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 과거 한 때는 청춘이었던 지금의 중년들이 살아왔던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일 게다. 지금의 현실은 과거들이 중첩되어 만들어진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과거의 청춘 유현재가 현재의 청춘 지훈과 가까워지고 소통하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려는 그 과정은 이 드라마가 그려내려는 ‘한방’의 실체가 되지 않을까.

짠한 상황 속에서도 웃음으로 그것을 전하려는 이 드라마는 그래서 힘겨워도 웃으며 버텨내려는 청춘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닮았다. 그 웃음을 따라가다 보면 그 밑에 깔려 있는 청춘들의 절망감이 공감된다. 유현재는 이제 중년이 된 시청자들의 시선이 되어 현재를 다시 돌아보게 해주고, 지훈과 우승은 지금의 청춘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그 유현재와 지훈이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은 청춘이라는 공유점으로 세대 간의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최고의 한방>은 ‘예능 드라마’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어 전면에 드러나 있는 건 코미디적 상황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시트콤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자잘한 코미디적 상황들이 숨기고 있는 ‘한방’이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청춘의 아픈 현실에 대한 공감과 위로라는 묵직한 메시지다.

<도깨비>,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을 동시에 껴안고 걸어가는

 

tvN 드라마 <도깨비>는 그 앞에 쓸쓸하고 찬란하신이라는 수식어를 달았을까.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지점에 서서 다시 처음을 돌아보니 도깨비라는 캐릭터는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쓸쓸하지만 또한 찬란하게 스러진다. 그의 가슴에 꽂힌 검이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살면서 가슴 한 켠에 꽂고 살아가는 쓸쓸함과 찬란함을 표징하는 것일 게다. 그래서 그 검이 뽑히는 날 누구나 쓸쓸하고 찬란하신 죽음을 맞이하기 마련이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사진출처:tvN)'

여타의 드라마였다면 죽음은 그 이야기의 끝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도깨비>는 죽음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이미 그들은 여러 차례 죽었었다. 김신(공유)과 김선(유인나)은 이미 왕여(이동욱)의 지시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바 있고, 그들은 다시 태어나 새로운 관계로 얽혀진다. 전생의 삶은 그렇게 이생의 삶으로 인연을 이어간다. 이 이야기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도 하다. 김신의 죽음은 도깨비로의 부활로 이어지고 그 부활은 다시 도깨비신부를 만나 무()로 돌아가는 또 다른 죽음의 길을 걸어간다.

 

하지만 그렇게 사라져버린 도깨비는 그것으로 끝일까. 마치 마지막 회처럼 몰아친 한 회였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한다. 도깨비가 캐나다의 한 레스토랑에서 봤던 지은탁(김고은)이 누군가를 부르는 그 장면은 그래서 그 시작을 알리는 복선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다른 남자인 듯 질투를 보이는 도깨비의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어쩌면 그녀가 부르는 그 남자는 다시 시작된 삶을 살게 된 도깨비 자신이 아닐까.

 

<도깨비>가 흥미로운 건 쓸쓸하고 찬란하신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수식어를 달은 것처럼 희극과 비극이 겹쳐져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시 살아나고 도깨비 신부를 만나는 그 과정은 삶의 행복이 묻어나는 희극이지만, 그 행복의 끝은 결국 도깨비의 가슴에 꽂힌 칼을 신부가 뽑아내는 비극이다. 여기에는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투영되어 있다. 삶이 찬란할 수 있는 건 어찌 보면 그 끝인 쓸쓸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몇 차례의 죽음이 드라마 속에서 반복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드라마의 극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도깨비>의 시청률이 15.5%(닐슨 코리아)까지 상승할 수 있었던 건 이 드라마의 이런 독특한 이야기 구조 덕분이다. 시청자들은 그들의 밝고 경쾌한 이야기에 매료되면서도 거기에 서서히 드리워지는 죽음의 그림자에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도깨비의 죽음이라는 극적 상황을 보여주지만 또한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상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여지를 남겨 놓는다.

 

해피엔딩과 새드엔딩. 드라마 시청자들은 그 끝이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 민감하다. 그래서 엔딩을 암시하는 무언가가 등장할 때마다 기대감과 불안감을 드러낸다. 그런데 <도깨비>는 이 둘을 동시에 껴안고 끝을 향해 걸어간다. 도깨비의 죽음은 과연 새드엔딩일까. 그건 다시 벌어질 해피엔딩의 시작은 아닐까. 이 둘 사이에서 줄타기 하듯 걸어가는 <도깨비>에 시청자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다. 다시 살아 돌아오길 더더욱 간절히 기원하며. 이러니 다음을 기다리는 한 주가 900년 같다는 말이 나올 밖에.

김은숙 작가, 그 많은 경계들을 능수능란하게 넘나드는

 

가슴에 칼이 박힌 채 바로 그것 때문에 영겁을 살아가는 존재. 간단해 보여도 이런 캐릭터를 도깨비에 부여한 건 tvN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이하 도깨비)>가 참신해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깨비의 이미지는 상당히 다른 무게감을 이 캐릭터에 안겨주기 때문이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사진출처:tvN)'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깨비의 이미지가 뭔가. 혹부리 영감에게 속아 혹과 도깨비 방망이를 바꿀 정도로 아둔한 존재로 그려지기도 하고, 도토리 깨무는 소리에 집 무너지는 줄 알고 줄행랑을 치는 겁많은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토대로 보면 도깨비는 인간을 살해할 만큼 악독하지 않고, 인간의 꾀에 넘어가 초자연적 힘을 이용당하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신이지만 조금은 희화화되어 인간적인 면면을 가진 캐릭터가 바로 도깨비다. 김은숙 작가가 다른 시도 아닌 도깨비를 선택한 건 실로 탁월했다고 보인다. 도깨비라는 존재는 서구로 보면 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캐릭터일 수 있지만 또한 우리네 고유의 개성을 가진 신이라는 점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갖고 있다. 이 점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이 콘텐츠가 보편적으로 먹혀들 수 있는 틈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가슴에 박힌 칼로 인해 영겁을 살지만 그것이 또한 죽지 못하는 것으로서 축복이자 저주가 된다는 희비극 설정은 자칫 허황될 수 있는 이야기에 무게감을 실어준다. 설화 속의 도깨비는 그래서 희화화된 존재지만 이 드라마 속의 도깨비는 비극성을 껴안은 진중한 면면과 동시에 도깨비 특유의 장난기와 가벼움도 갖고 있는 캐릭터가 된다. 이 설정을 통해 김은숙 작가는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그것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걸 캐릭터로 구현해낸다.

 

<도깨비>는 고려시대의 전쟁의 신이었던 김신(공유)의 이야기가 현재로까지 이어진다. 김신은 죽지 않는 존재로 계속 살아 현재까지 무려 9백년을 넘게 살고 있지만 그를 둘러싼 지은탁(김고은)이나 써니(유인나), 유덕화(육성재) 같은 인물들은 현생에 태어나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여기에 연기설 같은 것들이 끼어들면서 과거 고려시대의 김신과 그를 질투해 죽인 어린 왕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역시 죽음을 당한 왕비(김소현)가 현재 어떤 인물로 태어났는가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 <도깨비>는 자연스럽게 사극과 현대극을 뛰어넘는 장르적 퓨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설정이 더 흥미로워진 건 과거의 악연이 현재의 악연으로 이어지는 단순구도가 아니라 과거에는 악연이었지만 현재는 인연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구도가 예고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저 도깨비 캐릭터가 가진 희비극적 요소가 어른거린다. 즉 인연은 설렘을 동반하지만 그렇게 가까워진 사랑은 동시에 비극이 될 때 그 강도도 커지는 법이다.

 

이런 선택은 김은숙 작가가 마치 신데렐라 구박하듯 지은탁을 괴롭히는 이모네 집 사람들을 도깨비 김신이 벌주는 독특한(?) 방식에서 슬쩍 드러난다. 도깨비는 엉뚱하게도 벌이 아닌 금덩어리를 준다. 그래서 이모네 집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금덩어리에 좋아하지만 그것은 금세 지옥으로 바뀐다. 욕심이 상황을 비극으로 만드는 것.

 

이런 소소한 데까지 뻗어있는 이야기들의 면면들은 다름 아닌 김은숙 작가가 이제 인생을 좀 아는 고수라는 증거다. 행복은 비극과 연결되어 있고, 슬픔은 또한 행복이 되기도 하며 그래서 악연으로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굉장한 진중함이 사실은 가벼움과 공존할 수 있고, 시간이나 공간의 한계는 이야기라는 장치 안에서는 쉽게 그 경계가 무너진다.

 

물론 이런 것들은 이론적인 말일 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도깨비>라는 작품을 보다보면 너무나 쉽게 희극이 비극으로 또 비극이 희극으로 이어지고, 어떤 즐거워 보이는 욕망이 순식간에 지옥으로 바뀌어 버리며, 사랑이 주는 설렘이 다가오는 비극의 불안감으로 변화하는 걸 느끼게 된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삶의 진짜 양태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는 것. 멜로 한 장르를 깊게 파왔던 김은숙 작가가 그간 꽤 많은 작품들과 세월을 통해 어떤 경지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심증이 드는 대목이다.

<도깨비>, 희비극을 공유한 매력적인 캐릭터들

 

정말 제목처럼 도깨비 같은시청률이다. tvN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이하 도깨비)>의 시청률이 무려 12.471%(닐슨 코리아)까지 치솟았다. 첫 회 6.322%에서 단 3회만에 두 배로 치솟은 이 시청률은 아마도 케이블 사상 기록적인 수치일 게다. 이 수치는 <도깨비>에 대한 입소문과 열광적인 반응이 폭발적인 수준이라는 걸 말해준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사진출처:tvN)'

어찌 보면 황당한 판타지다. 고려시대에 전쟁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전장에서 전공을 쌓았던 무장이 왕의 질투를 사 가슴에 칼이 박히고, 들판에 버려지지만 그를 따르는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에 의해 부활하지만 그건 축복이자 저주. 영원히 죽지 못하고 그 아픈 기억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이 도깨비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칼을 빼내줄 도깨비 신부를 만나야 이 영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의 간절한 기도 앞에 그들에게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하기도 하는 도깨비는 죽어야할 운명이었던 지은탁(김고은)을 살게 해주고 그 과정에서 그를 거둬가야 할 저승사자(이동욱)와도 인연이 얽힌다. 도깨비의 집에 저승사자가 들어와 함께 살게 되고, 도깨비는 도깨비신부라 여겨지는 지은탁과 얽히고, 저승사자는 삼신할매의 주선으로 써니(유인나)와 얽힌다. 도깨비와 저승사자, 그리고 그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멜로와 브로맨스라니.

 

그런데 이 황당할 수 있는 이야기에 볼수록 빠져든다. 가벼울 수 있는 이야기가 진중한 느낌마저 준다. 그건 이 판타지의 비현실이 현실의 아픔과 슬픔 같은 것들을 기반으로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도깨비의 캐릭터를 보라. 그는 불사의 존재지만 가슴에 자신의 검이 박혀져 있다. 즉 불사라는 능력은 어쩌면 그 가슴에 검이 박혀 있다는 고통을 전제로 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건 축복이자 저주가 된다. 그를 사랑하는 도깨비신부가 나타나 가슴의 검을 뽑아 주어야 그 저주가 끝나지만, 그건 또한 그의 영원한 죽음을 뜻하는 일이기도 하다. 희비극이 이처럼 캐릭터 하나에 온전히 얹어져 있기 때문에 이 캐릭터는 비현실적 판타지라고 해도 현실감을 준다. 즉 아픔이나 고통, 상처 같은 인간적 감각들이 신적 캐릭터에게서도 비춰지는 것.

 

그러고 보면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희비극을 공유한 캐릭터들이다.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떤 슬픔 같은 게 느껴지는 저승사자의 면면을 보라. 이 캐릭터는 써니를 마주하는 순간 느닷없이 눈물을 흘린다. 저승사자의 눈물이라니. 그리고 써니가 손을 내밀고 다가오려 하자 그 손을 피한다. 혹여나 그녀에게 죽음의 기운이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내미는 손을 피해야 하는 존재. 저승사자가 갖고 있는 놀라운 능력과는 상반되는 비극성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스스로를 도깨비신부라 부르는 지은탁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죽은 자들을 보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건 능력이 아니라 그녀를 특이한 사람으로 만들어 왕따 시키는 저주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저주는 아무 것도 아닌 더 큰 고통을 신탁으로 받고 있다. 그것은 점점 사랑하게 되는 도깨비의 가슴에 꽂힌 검을 스스로 뽑아내야 하는 고통이다. 그것이 그의 저주를 풀어주는 것이지만 자신은 사랑을 잃게 되는 일.

 

이 희비극을 공유한 캐릭터들은 그래서 그 운명으로만 보면 엄청난 비극의 무게감을 갖지만 <도깨비>는 그 비극 속에서도 희극적 상황들을 연출한다. 부모가 죽고 이모집에 얹혀살며 신데렐라처럼 구박받는 삶을 살아가는 지은탁은 도깨비의 보호를 받으며 웃음을 잃지 않는다. 간절한 기도와 촛불로 도깨비를 부른다는 설정이 오징어를 굽다 불이 붙어 그걸 끄자 나타나는 도깨비의 에피소드로 그려질 때 그 기도와 촛불의 절절함은 슬쩍 희극 속에 감춰진다.

 

무슨 과거의 인연인지 알 수 없으나 삼신할매가 내놓은 반지를 집으려는 순간 나타난 써니를 보자마자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는 저승사자의 그 장면은 어떤 슬픔이 깃들지만, 그 순간 써니가 던지는 반지 하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냐는 말 한 마디는 그 슬픔을 희극으로 감춰준다. 마법을 사용해 사람들에게 기적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다며 진중하게 말하는 도깨비에게 지은탁은 그런데 왜 말투가 사극 톤이에요?”라고 묻는 것처럼 드라마는 판타지를 현실과 버무린다. 드라마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운명적인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이런 희극적인 순간순간의 반짝임들이 있어 <도깨비>는 결코 그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는다.

 

좋은 캐릭터들은 배우들의 좋은 면들을 끄집어낸다. <부산행>에 이어 <밀정>으로 조금씩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던 공유는 <도깨비>로 과거 <커피 프린스 1호점> 이후 제대로 된 캐릭터를 만난 느낌이다. 비극적인 신의 모습이면서도 때론 너무나 지질한 모습까지 담겨진 인간적인 캐릭터는 공유라는 배우의 조각 같은 면과 털털한 면을 모두 포착해낸다. 이동욱의 차가우면서도 쓸쓸한 이미지는 저승사자란 캐릭터와 만나 독특한 매력으로 피어나고, 유인나는 그 당찬 이미지 그대로 멋진 언니캐릭터로 거듭난다. 평범해 보이지만 소녀 감성이 묻어나는 김고은의 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중요한 건 이 희비극을 담은 캐릭터들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 캐릭터 속에 상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삶이란 희비극이다. 살아가는 건 즐거운 일일 수 있지만 또한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다. 죽음은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지만 또한 영겁의 고통스런 삶을 상정해보면 오히려 행복일 수 있다. 결국 그래서 의미는 그 순간에 남는다. 삶의 희비극 속에서도 마법처럼 다가오는 어느 짧은 순간이 주는 의미. 그래서 쓸쓸하고도 찬란할 수밖에 없는.

<밀회>, 사랑과 욕망의 완벽한 변주곡

 

너는 어쩌다 나한테 와서 할 일을 다 해줬어. 사랑해줬고, 다 뺏기게 해줬고, 내 의지로는 못 했을 거야. 그래서 고마워. 그냥 떠나도 돼.” 스스로 죗값을 치르러 교도소를 선택한 오혜원(김희애)이 이선재(유아인)에게 건네는 이 말은 <밀회>라는 드라마가 무엇을 그리려 했는지가 드러난다. 그것은 사랑과 욕망의 완벽한 변주곡이었다.

 

'밀회(사진출처:JTBC)'

자기 자신까지도 욕망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오혜원의 법정 최후진술 속에는 젊은 날의 순수와 열정과 사랑을 잃어버리고 욕망의 끝단을 달렸던 자의 참회가 들어 있다. 그녀는 피아노에 대한 열정마저 접어버렸고 대신 상류층의 삶에 동화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 그런 그녀 앞에 이선재가 나타났고 그가 들려준 피아노와 사랑의 속삭임은 그녀를 욕망으로부터 깨어나게 했던 것.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모든 욕망을 털어낸 후 그녀는 비로소 진짜 사랑과 자기 자신의 삶을 얻었다. 허름한 죄수복을 입고 교도소 한 귀퉁이에 기대 있는 그녀가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곤 떨어지는 햇살 한 조각뿐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했다. 작은 행복이지만 그것은 욕망의 것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밀회>격정멜로라는 수식어로 시작했지만 치정극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사랑으로 시작해 욕망으로 변질되는 치정극들은 넘쳐나지만, 거꾸로 욕망 속에 있던 인물이 사랑으로 변화하는 이야기는 흔치 않다. 이 과정에서 상류층의 부조리나 추악한 욕망의 이야기와 사랑 이야기가 동시에 다뤄질 수 있었다. 비리로 점철된 학교 재단의 이야기는 마치 치열한 사회극을 보는 듯 했지만, 그 비리를 부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과 순수의 힘이었다.

 

피아노와 음악은 사랑과 순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비리로 얼룩진 음대에서는 음악도 일종의 거래처럼 이용되었고 전시되었다. 학교로부터 버려진 친구들과 함께 이선재가 5중주를 준비하고 굿바이콘서트를 하는 에피소드는 그래서 리히테르가 말했듯 음악은 허영이 아닌 진정으로 즐기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선재의 표현대로 끝까지 즐겨주는 것그것이 장땡인 것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해부해내면서, 동시에 스무 살 차이 연인의 미세한 심리적 변화와 떨림을 포착해내고, 또 그 위에 피아노라는 아름다운 예술의 진정한 맛을 드라마 한 편 속에 모두 담아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냉정과 열정을 오가는 정성주 작가의 놀라운 필력과, 조명의 농담과 피아노 선율만으로도 인물들의 감정을 담아내는 안판석 감독의 연출력, 그리고 그 위에서 물오른 연기를 보여준 연기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성적으로 울리거나 이성적으로 깨우는 드라마들은 많지만 이처럼 감성적이면서 이성적인 드라마는 흔치 않다. 섣부른 해피엔딩을 말하는 드라마나 충격적인 새드엔딩을 말하는 드라마는 많지만 그 둘 다를 아우른 희비극은 많지 않다. <밀회>는 욕망의 끝장이라는 새드엔딩을 그리면서 동시에 사랑의 시작이라는 해피엔딩을 담아냈다. 욕망을 벗어버리고 사랑으로 가게 하는 힘. 그것은 어쩌면 예술의 힘인지도 모른다. <밀회>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웃다가 짠해지는 김병욱표 희비극의 묘미

 

<감자별>에서 홍혜성이라는 역할을 연기하는 여진구는 좀체 웃지 않는다. 늘 진지한 표정에 때로는 곧 눈물이 터질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 엄마가 돌아가시고 보육원에서 자란 그는 어쩌다 보니 노씨네 집안의 잃어버린 막내아들 행세를 하고 있다. 빈 집을 전전하며 떠돌던 그에게 생긴 인생 대역전이지만 착한 심성의 그는 늘 불편한 마음이다. 노씨 가족들이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면 줄수록 그곳이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 생각하며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

 

'감자별(사진출처:tvN)'

바로 이 홍혜성이라는 인물의 입장과 그래서 연기로 보여지는 여진구의 무표정은 <감자별>이라는 시트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김병욱 감독표 시트콤이 지금껏 줄기차게 보여줬던 희비극이 이 인물의 상황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웃을 때 웃지 못하는 상황이 있고, 모두가 심각해질 때 비로소 웃음이 터지는 상황도 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희극과 비극은 종이 한 장 차이로 나타난다.

 

21년 만에 처음으로 해주는 생일이라며 온 가족이 준비한 특별한 생일파티에서 홍혜성은 좀체 웃지 못한다. 가족들은 모두 박수치고 좋아하지만 그는 그것이 과연 자신이 누려도 되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것. 이 상황에서 할아버지 노송(이순재)이 준비한 슬픈 곡(?)잃어버린 30이 흘러나온다. 21년만의 생일파티라는 상황과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다소 과장된 상황이 부딪치면서 희극과 비극이 동시에 연출된다. 그들은 웃으면서도 어딘지 슬픈 정조를 동시에 보여준다.

 

아버지의 묘소에서 잃어버린 아들 홍혜성을 찾았다며 그를 안고 과거를 회상하다 눈물까지 흘리던 왕유정(금보라). 이 다소 진지한 상황에서 민망하게 터져 나온 방귀소리는 마치 우리네 삶의 무게를 비웃는 듯하다. 뭐 그리 심각할 필요 있느냐는 것. 하지만 이 민망한 상황 때문에 그녀가 껄끄러워하는 걸 알게 된 홍혜성이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일부러 연달아 방귀를 뀌는 모습을 연출하고 그 진심을 알게 된 그녀가 감동하는 장면은 웃음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는 걸 잘 보여준다.

 

집도 없어 노씨네 가족 주차장에서 살아가는 나진아(하연수)는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알바 인생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늘 밝은 얼굴이다. 섹시댄스 경연대회 상금을 타기 위해 안되는 섹시댄스를 연습하는 나진아의 이야기는 우스우면서도 슬프다. 또 꽃등심을 먹는 것이 소원이라는 그녀에게 노수동(노주현)이 준 카드로 고기를 사주면서도 더 시킬 때마다 전화를 걸어 허락을 받는 홍혜성의 모습 역시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는 웃음을 선사한다. 고기 한 점에 이토록 쩔쩔 매는 청춘이라니.

 

결혼기념일에 이벤트를 준비하는 김도상(김정민)이 눈치 빠른 아내를 속이기 위해 교통사고를 위장하자, 응급실로 달려온 노보영(최송현)은 그것이 결국 이벤트였다는 걸 알고 나서도 결코 웃지 못한다. 응급실까지 달려오며 그녀가 느꼈을 끔찍함은 이벤트를 이벤트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결국 화가 난 노보영에게 쫓기던 김도상은 계단에서 굴러 진짜로 부상을 당하게 된다. 비극이었다가 희극이 되더니 이내 다시 비극으로 끝나는 이러한 희비극의 반복은 바로 김병욱 감독 시트콤에서만이 발견할 수 있는 특별한 지점이다.

 

이번 <감자별>에서 특히 주목받고 있는 장율(장기하)과 노수영(서예지) 커플의 에피소드에서도 이런 희비극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모두가 고개를 젓지만 장율이 작곡한 CM송이 좋다며 이곳저곳 기획사를 전전하던 노수영이 카스테레오에서 그 음악이 나오자 저도 모르게 꺼버리는 장면이 그렇다. 장율의 예술가적인 삶과 잉여로서의 삶은 그렇게 순식간에 희극과 비극을 반복한다. 모두가 거품키스니 사탕키스니 하는 것을 비인간적이라고 말하며 쓰레기 국물 키스를 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래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쓸쓸함이 묻어난다.

 

물론 김병욱 감독의 희비극은 이미 <지붕 뚫고 하이킥>의 다소 충격적인 엔딩 논란에서부터 그 전조를 보인 바 있다. 시트콤을 정극의 하위 장르로 바라보는 고정관념을 아마도 김병욱 감독은 깨고 싶었을 것이다. 즉 그가 보여주는 희비극적 상황은 희극과 비극이 늘 동전의 양면이라는 뜻이며, 그렇기 때문에 희극이라고 해서 정극과 비교해 낮은 가치로 폄하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걸 잘 보여준다.

 

아마도 <감자별>이라는 제목은 바로 이 희비극적인 상황이 만들어지는 이상한 분위기를 표현한 것이리라. 마치 보름달이 뜨면 그 기운 때문에 사람들이 로맨틱해지거나 멜랑콜리해진다고 하는 것처럼, 감자별이 뜬 상황 속에서 이 시트콤 속 인물들은 웃다가 슬퍼지고 슬프다가 웃게 되는 기묘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경험은 고스란히 시청자에게 웃음과 눈물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시트콤 <감자별>의 희비극은 이토록 정극이 절대 주지 못하는 지점에 닿아있다. 무표정한 여진구의 얼굴에서 우리는 이 희비극의 웃음과 눈물을 함께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이킥3', 이 희비극의 마법은 어떻게 가능할까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사진출처:MBC)

김병욱 감독의 하이킥 시리즈가 다시 돌아왔다. 이번엔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시트콤 역시 김병욱 감독 특유의 희비극이 녹아있다. '짧은 다리'는 비극적인 요소지만, 그것을 하이킥으로 날려버리는 유쾌한 역습이 희극적으로 다뤄진다. 즉 상황은 비극 그 자체지만 이것을 과장하거나 비트는 것으로 비극은 희극이 된다. 말 그대로 '역습'인 셈이다.

하루아침에 부도로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 안내상의 가족. '동행' 같은 다큐멘터리에서나 나올 법한, 안내상 가족의 봉고차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소재적으로 보면 절망적인 사건이다. 또 취업이 되지 않아 고시원을 전전하며 학자금 대출에 허덕이는 백진희도 전형적인 청년실업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비극은 '하이킥3'의 시점으로 비틀어 보면 유쾌한 풍자를 담아낸 희극이 된다.

길바닥에서 조촐하게 치러지는 안내상의 아내 윤유선의 생일 풍경은 전형적인 홈리스들의 비극을 담고 있지만, 그 장면은 갑자기 터져버린 폭죽이 안내상의 엉덩이를 때리고 마치 ET의 한 장면처럼 하늘을 날아가는 과장된 장면으로 희극이 된다. 당숙에게 도움을 받으러 갔지만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 안내상이 자살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고 이를 막기 위해 가족들이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도 진지하게 바라보면 비극 그 자체다. 하지만 갈아입을 옷이 없어 배꼽티를 입은 안내상의 모습에 가족이 웃음을 터트리는 장면은 비극 속의 희극을 포착해낸다.

이런 현재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이 시트콤의 첫 회에서 잠깐 미래의 이적이 회고담 형식으로 2011년을 얘기하면서 스케치된 적이 있다. "2011년은 유별난 해는 아니었다." 이렇게 내레이션은 시작되지만 그 장면에는 대조적으로 대지진, 천재지변, 아프리카의 민주화열풍으로 죽고 싸우는 사람들이 흘러나왔다. 그 중 우리나라는 "고물가, 트위터, 현빈, TV오디션 프로그램, 안철수, 그리고 여전히 돈 돈의 해였다"로 묘사되었다. 결국 2011년의 풍경을 담아낼 이 시트콤이 뒤틀어 보여줄 현실들을 나열한 셈이다.

도대체 이 결코 녹록치 않은 힘겨운 2011년의 풍경들은 어떻게 웃음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이 시트콤이 미래의 한 시점에서 이제 할아버지가 된 이적이 과거를 회고하는 관점으로 2011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닥친 현실은 비극이지만 지나고 나면 하나의 희극 같은 추억이 될 수 있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닌가. 이것은 저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회자되었던 채플린의 명언,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구절과 상통하는 얘기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은 여타의 하이킥 시리즈가 그래 왔던 것처럼 현실의 비극적인 한 단면을 가져와 그것을 한바탕 웃음으로 바꿔놓는다. 겨우 20분 남짓의 짧은 한 방이지만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이 짧은 한 방의 하이킥이 던지는 통쾌함이 어찌 적다 할 것인가. '하이킥3'의 매력은 바로 이 절망조차 웃음으로 돌려놓는 희비극의 마법에 있다.


'로열패밀리', 그 인간과 괴물의 증명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을까. '인간의 증명'이라는 원작을 갖고 있는 '로열패밀리'의 질문이다. 이 드

'로열패밀리'(사진출처:MBC)

라마는 '로열패밀리'라는 자본의 기계가 되어있는 정가원 속에 스스로를 괴물로 치부하는 이질적인 존재를 통한 화학실험을 선보인다. 이 화학실험의 목적은 그 안에서 진정으로 누가 괴물이고 누가 인간인가를 추출해내는 일이다.

구박받는 며느리에서 18년 간을 절치부심 반전을 준비해온 김인숙(염정아)의 행보는 숨겨져 있던 정가원 사람들의 실체를 드러낸다. 가족관계라기보다는 하나의 기업을 연상시키는 정가원의 자본으로 말끔한 표면 아래 숨겨져 있던 더러운 비밀들이 김인숙이라는 촉매제에 의해 마구 밖으로 끄집어내진다. 가족이 아닌 그저 관계로서 아무런 감정조차 없이 살아가는 자본 기계로 전락한 정가원 사람들은 때론 목적을 위해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사이코패스의 면모까지 드러낸다.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인간 냄새를 풍긴 김인숙의 남편 조동호(김영필)가 의사였다는 사실은 그래서 우연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그나마 남아있던 정가원의 온기를 빼앗아버린 셈. 남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금치산자로 몰아 아들까지 빼앗으려하는 공순옥 회장 앞에서 김인숙의 변신은 시작된다. 무표정하게 감정을 숨기며 살아오다 어느 날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는 김인숙을 정가원 사람들은 '괴물'이라 부르지만, 이것은 어쩌면 반어법인 지도 모른다.

즉 감정 없이 사이코패스처럼 살아가는 정가원 사람들은 김인숙에게서 인간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을 지도.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존재하는 한 인간은 결국 그 괴물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괴물로 보게 만드는 위험한 존재가 아닌가. 결국 조니의 죽음을 김인숙의 살해로 몰아 그녀를 끌어내리려던 공순옥 회장이 백기를 들게 된 것은, 그녀가 들고 온 자술서가 사실은 정가원이 괴물들이 사는 나라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스스로 괴물이라 하지 않지만, 자술서까지 들이대며 스스로 괴물임을 밝힌 김인숙은 그래서 인간임을 증명하는 마지막 한 자락을 손에 쥐게 된 셈이다. 드라마는 김인숙이 불행한 과거를 지우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조니마저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해 몰아가고, 스스로도 자신이 조니를 죽였다고 밝히게 만들지만, 바로 그것이 그녀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대목이 된다. 사실은 자해한 조니를 살리려 노력했지만 살리지 못했다는 그 자책감이 스스로를 살인자로까지 인정하게 만들었다는 그 사실. 그것이 김인숙이 괴물이 아니라는 증명이다.

결국 마지막 헬기에 한지훈(지성)과 함께 올라 그에게 자신을 구원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김인숙은 그래서 이 드라마의 승리자가 된다. 그것이 죽음인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인지 모를 열린 결말로 드라마는 끝나고 있지만, 그 끝을 받아들임으로써 김인숙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셈이고, 반대로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혼자 갈 수 없다"며 김인숙을 헬기에 태워 죽음으로 내몰려는 공순옥은 괴물임이 증명된 셈이니까. '로열패밀리'의 희비극은 바로 이 죽음 앞에서 어떤 선택이 인간임을 증명하고, 또 어떤 선택이 궁극적인 승리자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시크릿 가든'의 엔딩, 새드일까 해피일까

노트에 비가 올 날짜를 적고,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모습을 그대도 똑같이 봤으면 좋겠다고 편지를 쓰는 김주원(현빈)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시리게 만든다. 그는 뇌사 상태에 있는 길라임(하지원)과 영혼 체인지를 통해 그녀를 살리고 자신이 대신 죽으려 한다. 저 앞에서부터 밀려오는 검은 구름과 섬뜩하게 내리치는 번개. 그 속으로 길라임과 함께 차를 몰고 달려 들어가는 김주원. 비가 오기 직전, 하늘이 어둑해지고 쿠르릉 천둥소리가 울리는 그 전조만으로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처럼, '시크릿 가든'은 어떤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전조의 드라마'다.

사실 이 전조는 첫 회에서 길라임이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는 스턴트우먼으로 등장했을 때부터 이미 예고된 것이다. 왜 하필 스턴트우먼인가. 이런 질문을 던져본 시청자라면 그 직업이 갖는 위험성에 앞으로 그녀에게 벌어질 사고의 전조를 예감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스꽝스럽게 시작된 영혼 체인지라는 상황 역시 후반부에 김주원이 빗속을 뚫고 뛰어드는 장면의 전조가 된다. 두 사람의 영혼이 서로 묶여버리는 이 상황이 주는 코믹한 스토리들은, 그 영혼 중 하나가 죽음 앞에 서게 되면서 순식간에 비극으로 돌변한다.

이 희비극을 넘나드는 사랑의 이야기 역시, 김주원이 길라임을 만난 뒤, 자꾸만 자기 주변을 서성대는 길라임의 잔상을 느끼는 장면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지만 거기 분명히 늘 존재하는 그녀. 그것은 축복이면서 비극적이다. 그리고 이건 사랑의 본질이다. 사랑은 기억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영원히 물질적인 세계에 남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후반부에 길라임 대신 뇌사에 빠졌던 김주원이 깨어난 후, 엘리베이터 사고 이후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건 이 드라마가 결국 가야됐던 숙명처럼 여겨진다. 그들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분명 만났던 것 같은 기시감은 있지만, 마치 처음처럼 시작되는 사랑같이.

'시크릿 가든'의 엔딩에 쏠린 지대한 관심과 다양한 해석들은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 때문이지만, 또한 이 드라마가 '전조의 드라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언가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역력한데다, 그 벌어지는 사건이 늘 시청자들이 기대했던 어떤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도 아니다.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도망가는' 김주원과 길라임의 관계는 핑크빛으로 물들다가 핏빛으로 변하는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인다. 그러니 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스토리에 언뜻언뜻 보이는 전조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엔딩은 그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

아마도 이 사랑스런 커플의 해피엔딩을 요구하는 건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통상적인 해피엔딩은 자칫 이 드라마가 구축해온 세계를 훼손할 수도 있다. 이 드라마는 신데렐라 이야기가 늘 그러하듯, 결혼에 골인하고는 "그래서 왕자와 신데렐라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그런 스토리를 그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자와 신데렐라가 만나 완전한 소통에 이르는 길, 그래서 궁극의 행복에 도달하는 그 과정을 그리려 한 것이 '시크릿 가든'이다. 영혼 체인지는 바로 그 역지사지의 과정을 겪기 위해 동원된 방법이 아닌가.

만일 김주원이 길라임에게 몸을 내주고 대신 뇌사 상태가 되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면 어땠을까. 그것은 과연 새드엔딩일까. '타자가 만나 완전한 하나가 되는 길'. '시크릿 가든'이 추구하는 이 주제의식을 두고 본다면, 김주원의 몸에 길라임의 영혼이 깃든 상태는 반드시 새드엔딩이라 치부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 길라임의 영혼이 차츰 세월을 겪으며 김주원의 몸과 완전히 동화되어갈 때, 그들은 비로소 완전한 하나가 될 테니까.

물론 이 드라마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김주원을 살려내고 청년 시절의 기억으로 되돌려 다시 길라임과의 사랑을 이어간다. 도대체 어떤 엔딩이 최선이 될까. 양자가 서로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거나 결혼에 골인했다는 식의 통상적인 엔딩이 과연 최선일까. 아니면 충격적일 수 있지만 오랜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새드앤딩 속에서 어떤 긍정을 찾아내는 게 최선일까. 이 '전조의 드라마'는 엔딩에 대한 어떤 전조를 미리 보여주었을까. 귀추가 주목되는 지점이다.

현빈의 눈빛이 저토록 깊은 줄 몰랐습니다. 장난기와 슬픔이 함께 깃들어 있는 그 눈빛은 마치 '시크릿 가든'이라는 드라마가 보여주듯, 희극과 비극은 같은 몸의 다른 표정이라는 걸 말해주는 듯 합니다. 통렬한 웃음이 결국은 깊은 슬픔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한없는 슬픔 속에서 오히려 헛헛한 웃음이 배어나오기 마련이죠. 희비극은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우리네 삶을 가장 리얼하게 포착하는 면이 있습니다. 웃다가 울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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