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인’, 몸 개그와 짧은 개그의 만남

방송 프로그램들 속에서도 이런 서론이 사라지는 징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분야가 개그 프로그램이다. ‘개그 콘서트’로 촉발된 이 새로운 경향은 무수히 많은 개그맨들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짧은 시간을 준다. 그리고 거기서 웃기지 못하면 가차 없이 잘라버린다. 물론 그 일차적인 가위질은 PD가 한다. 하지만 이차적인 가위질은 바로 시청자들의 리모콘에 의해 일어난다. ‘개그 콘서트’의 많은 개그 코너와 개그맨들이 ‘마빡이’같은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는 아이템을 들고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짧은 시간 내에 웃기지 못하면 시청자들의 기억에서 편집될 수밖에 없는 개그맨들의 강박증을 잘 보여주었다.
짧은 개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그맨들은 여러 가지 전략을 구사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몸 개그와 그 속에 드러나는 자학경향이다. 주목받지 못했던 임혁필이 땅거지로 등장하면서 후에 세바스찬으로 인기를 얻게 되는 과정은 그 자학개그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시기 박준형은 무를 갈았었고, 정종철은 옥동자로 못생긴 얼굴을 한껏 과장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초창기 ‘개그 콘서트’의 공신들이 보여준 개그에 서사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웃음은 ‘서사 속의 반전’이 주는 웃음이라기보다는 자극적인 장면과 함께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몸 개그(자학경향이 있는)에서 비롯됐다.

그런 점에서 이 사라져버린 ‘웃음충전소’의 코너들 중, 주목해야할 코너가 있다. 그것은 김병만이 선보인 ‘따귀맨’이다. 이 코너는 ‘웃음충전소’라는 프로그램이 사라지기도 전에 단 몇 회로 끝나버렸는데, 정확하게 몸 개그와 짧은 개그의 접합점을 모색했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의 주인공을 패러디한 복장의 김병만은 그 분장만으로 모든 서사의 설명을 지워버리고 곧바로 정의의 사도로서 악당들에게 무차별 따귀를 날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바로 이 단순함과 명쾌함은 김병만 개그가 가진 특징을 이루었다. “저거 개그야 무술이야?”할 정도의 몸 개그를 통해 단순하고 과장된 몸이 보여주는 순간적인 웃음을 포착해온 김병만이 ‘달인’이라는 짧은 개그에서 폭발력을 보여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코너와 코너 간에 잠깐 쉬는 시간을 활용한 듯한 이 코너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더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짧은 시간 속에 순간적 웃음을 전달하려는 노력은 그만큼 더 높은 집중도를 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꾸만 짧아지는 개그의 경향은 거꾸로 말하면 시청자들의 긴 서사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드라마 같은 기본적으로 짧으면 안 되고 길어야 성공하는 분야가 있지만 이것은 드라마가 가진 산업적인 성격과 그 요구되는 진정성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즉 드라마는 자못 진지한 마음으로 보지만, 개그는 쉬는(오락) 목적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진지한 접근이 거부감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논리적인 서사에 대한 거부는 상당부분 디지털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아날로그 문화가 가진 ‘처음부터 중간 과정을 다 봐야 끝을 볼 수 있는’ 서사의 특성은 디지털 문화로 오면서 ‘아무 곳에서나 중간 중간 끼어들어 볼 수 있는’ 하이퍼 텍스트적인 속성으로 바뀐다. 이것은 성향이 기술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술이 성향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그 프로그램으로 적용되어 ‘개그 콘서트’처럼 분절적인 구조의 개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개그 콘서트’로 촉발된 무대 개그 전성시대 이후에 방송 3사가 경쟁에 들어가고 현재 결과적으로 무대 개그가 하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개성이 잘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개성의 출현(너무 많은 캐릭터들) 때문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다지 눈에 뜨일 정도로 보이지 않는 개성들의 소소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분절된 구조를 분절된 느낌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코너들은 이제 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 덩어리 속에서 발 하나를 빼고 나온 ‘달인’의 돌출이 눈에 띄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개그 프로그램의 분절화는 시대의 요청이지만 지나친 경쟁구도로 인해 과도하게 생산되는 것은 문제다. 바로 이 아이러니를 해결하는 것이 앞으로 개그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숙제가 될 것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이올린에 추천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