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잡3’, 마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김영하의 여행

이건 소설가의 여행법이 아닐까. 피렌체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두오모 성당, 우피치 미술관이 있는 시내의 좁은 골목길과 오밀조밀한 집들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이지만, 김영하는 엉뚱하게도 ‘영국인 묘지’를 찾아간다. 여행을 하다보면 지치게 되기 마련, 그 때마다 이 소설가는 묘지를 찾아가곤 했단다. 그래서 피렌체에 와서 묘지를 검색해보니 ‘영국인 묘지’라는 게 있다 해서 가게 됐던 것. 

피렌체의 유서 깊은 레스토랑에서 벌어진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3>의 수다가 두오모 성당과 그 성당을 설계한 브루넬레스키 이야기 그리고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을 때 김영하가 꺼내놓은 ‘영국인 묘지’ 이야기는 생소하기 때문에 참신하게 다가왔다. “도시에 묘지가 있으면 꼭 한 번씩 가본다”는 김영하의 말에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재치있는 농담을 섞어 답한다. “일단 조용해요. 고요합니다. 산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실제로 김영하가 간 ‘영국인 묘지’는 생각보다 예쁜 조각공원 같은 분위기의 묘지였다. 아름답다고 하자 그 곳에 있는 수녀님은 4월에 오면 붓꽃이 만발해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알고 보니 영국인만 묻힌 묘지는 아니라고 한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외국인들이 묻혔다고 한다. ‘피렌체의 이방인’들을 위한 묘지라는 것. 그러면서 슬쩍 꺼내놓는 생각. “도시를 설계할 때 우리도 산자와 죽은 자를 공존하는 방법을 고민해봐야 해요.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게 아니니까.”

김영하의 여행을 들여다보면 그 흐름이 마치 소설을 읽는 것만 같다. 사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소재가 독자들을 사로잡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남들이 다 가는 곳이 아니라 가지 않는 곳을 찾아간다. 무엇보다 ‘영국인 묘지’라는 이름이 호기심을 이끌어낸다. 왜 영국인이 이 먼 곳에 와서 묻혔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소설이 끊임없이 궁금증을 이끌어내는 이야기들을 통해 독자를 몰입시키듯이 김영하의 여행은 그 흐름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간 곳에는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 발견된다. 영국인 묘지에 존재하는 시인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의 묘지. 그러면서 그와 그의 남편 로버트 브라우닝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펼쳐진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어 사회 비판시를 많이 썼던 이 시인은 40세에 로버트 브라우닝과 사랑에 빠지면서 유명한 사랑 시를 썼던 인물이라고 한다. 편지를 통해 이어진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스산해져가는 초가을에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봤던 묘지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묘지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 파리 시내에 있는 이 거대한 묘지에는 쇼팽, 짐 모리슨의 묘가 있다. 김영하는 이 묘지의 장점이 “아름답고 파리의 도시에서 가깝고 유명인들의 묘지이고 잘 가꿔져 있다”고 말한다. ‘묘지 투어’를 할 정도로 여행을 할 때 묘지를 찾는다는 김영하를 보며 유시민은 “역시 소설가는 다르긴 다르다”라고 말했다. 김진애 교수는 “작가에게 묘지가 중요한 건 죽음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이 생길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러자 이 이야기는 김진애 교수가 썼다는 ‘묘비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인생은 의외로 멋지다’라고 썼다는 묘비명에서 김진애 교수는 ‘의외로’에 꼭 인용구 마크를 넣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항상’이 아니라 ‘의외로’ 라는 것. 이 말에 빗대 김영하라는 소설가의 여행법을 들여다보면 그는 그 ‘의외로’ 멋진 것들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잠든 새벽. 아침 일찍 일어나 도보로 피렌체 도심에서 살짝 떨어져 있는 미켈란젤로 광장에 일출을 보기 위해 오르는 김영하는 여러 차례 피렌체를 방문하면서 느끼는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한다. 스무 살 남짓에 처음 찾아왔던 피렌체와 신인작가 시절 그리고 중년에 또 그 곳을 찾아오면서 변화한 건 자신뿐이라고 말한다. 그대로 변화하지 않고 있는 그 곳이 고맙게 느껴진다는 것. 그 와중에 시간이 흘렀고 그도 시간을 따라 흘러왔다. 그 흐름은 한 편의 소설 같다.

피렌체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김영하는 이렇게 말한다. “일출을 백 번 보든 천 번 보든 내 삶에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근데 먹고 사는데 아무 상관없을 지라도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동할 때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요.”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이고, 또 소설 같은 예술 작품을 보는 이유가 아닐까. 김영하라는 소설가의 여행법이 새삼 특별하게 다가온다.(사진:tvN)

소설보다 팩트, ‘검법남녀’ 정재영의 묵직한 존재감

좋은 인물 하나는 작품 전체를 살려낼 수도 있다고 했던가. MBC 월화드라마 <검법남녀>에서 “소설 쓰지 마”라고 습관적으로 말하는 백범(정재영)이 바로 그런 캐릭터다. 검사인 은솔(정유미)이 사건을 접하고 정황에 따라 추정을 하곤 할 때 백범은 그걸 ‘소설’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오로지 팩트만이 진실을 얘기한다고 믿는 법의관. 어찌 보면 직업적으로 당연한 태도라 생각되지만, 이 캐릭터는 <검법남녀>라는 드라마가 성공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냉철하게 오로지 팩트로만 판정해 진실에 다다른다는 그 캐릭터의 매력.

이를테면 백범의 라이벌인 법의조사과장 마도남(송영규)의 아들이 사체로 발견되고 자살보다는 타살을 의심하게 하는 정황증거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은솔은 그것이 늘 전교 1등자리를 빼앗겼던 친구들의 소행으로 단정 짓는다. 그리고 이것은 시청자들의 심증이기도 하다. 5명의 아이들이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고 내려올 땐 4명의 아이들만 내려왔으며 몇 시간 뒤 그 한 명의 아이가 아파트 아래에서 사체로 발견됐다는 건 누가 봐도 4명의 아이들이 저지른 타살을 의심하게 만든다.

여기에 4명의 아이들 중 전교 2등을 하던 아이의 아빠가 굴지의 로펌의 대표변호사라는 사실이 더해지고, 그 힘을 빌어 은솔의 수사에 압력을 행사하는 아이의 엄마가 등장하면서 그 심증은 점점 굳어진다. 이 사건에서 은솔이 그러한 것처럼 시청자들도 똑같이 학내 성적을 두고 벌어지는 아이들 간의 갈등과 왕따 그리고 힘 있는 부모의 개입 같은 이야기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추정들에 대해 백범은 쉽게 단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건 ‘소설’일뿐이라고 일축하고 사체가 얘기하는 팩트들을 모아 진실에 접근해간다. 사체 검시를 통해 사망 당일 하얀 음식물만이 있다는 걸 확인한 백범은 그 날 마도남의 아들이 급식을 먹지 않았고 대신 백설기와 우유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그 음식을 먹고 음식물의 이동시간을 체크하면서 사망 추정시간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다음 회 예고편으로 살짝 등장한 것이지만 결국 아이의 사망은 타살이 아닌 자살로 판정된다. 물론 자살의 동기로서 아이들이 저지른 왕따사건이 있을 거라 여겨지지만.

<검법남녀>의 특별한 점은 사건 속에서 단지 시청자들이 보고픈 걸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학내 왕따 문제와 자살사건 그리고 그 사건에 연루된 힘 있는 부모의 아이가 등장하는 사건에서 시청자들은 은연 중에 가해자로 추정되는 아이의 단죄를 욕망하게 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백범이 등장해 이를 가로막는다. 막연한 추정이 아닌 사체가 말해주는 팩트를 들고서. 

<검법남녀>가 흥미진진해지는 건 사건이 추정에 의한 소설들(?)로 인해 한 방향만으로 흘러갈 때 이를 뒤집는 반전의 이야기가 들어 있어서다. 그리고 그 반전은 다름 아닌 사체가 자신의 몸으로 남긴 메시지를 통해서 이뤄진다. 백범은 그 어떤 정황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체의 이야기에만 집중한다. 마치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믿을 수 있는 팩트를 전해준다는 것처럼.

법의학은 사체가 말하는 마지막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했던가. 사체들에는 저마다의 아픈 사연들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죽은 후라도 그 마지막 메시지를 성실하게 읽어내는 백범 같은 법의관의 존재는 그 냉정함 속에 인간적인 면모를 갖기 마련이다. 냉소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어쩌면 그 냉정함이야말로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는 신뢰감을 주고, 나아가 그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사체에 대한 예우라는 걸 보여주는 캐릭터. <검법남녀>의 이례적인 성공은 사건전개의 쫄깃함과 반전에 더해 인간적인 따뜻함까지 담아내는 백범이라는 캐릭터와 이를 제대로 연기해내고 있는 정재영의 존재감에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사진:MBC)

'버닝'이 담아낸, 청춘과 부조리 그리고 예술

(본문 중에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저는 뭐를 써야 될 지 모르겠어요. 세상은 수수께끼 같거든요.” 문득 벤(스티븐 연)이 무슨 소설을 쓰고 있냐고 묻자 종수(유아인)는 그렇게 답한다. 그는 알 수 없는 혼돈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느끼는 혼돈과 분노에 맞닿아 있다. 혼란스럽고 화가 나지만 도대체 왜 그런지는 잘 보이지 않는 안개 자욱한 길을 헤매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이 청춘들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과 그 감정을 만들어내는 부조리한 세상,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술은 얼마나 가녀리면서도 또한 희망을 주는 것인가를 담았다.

<버닝>의 첫 장면은 트럭으로 보이는 차 뒤에서 조금씩 피어나오는 담배연기로 시작한다. 누군가 그 뒤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 다만 한숨처럼 피어나는 담배연기가 그 존재를 증명하는 듯한 종수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트럭에서 짐을 꺼내들고 인파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시장통으로 보이는 그 곳에서 그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 그 곳에서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다. 바로 한 가게 앞에서 춤을 추며 호객을 하고 있는 나레이터 모델 해미(전종서)다. 어린 시절 종수와 파주의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해미. 그들은 그렇게 만나 그날 밤 함께 술을 마신다.

술자리에서 해미는 이야기를 하며 손으로 귤을 까먹는 듯한 마임 동작을 해보인다. 그냥 재미로 배우고 있다는 마임. 해미는 마임을 잘 하려면,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귤이 없음을 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건 해미라는 존재와 그가 살아가는 삶을 압축해서 설명한다. 그는 가진 게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고, 카드빚에 쫓겨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는 아프리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그 곳에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를 춤추는 원주민을 만나겠다는 것. ‘리틀 헝거’가 배고픈 자들이라면,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대한 허기를 느끼는 자들이란다. 그는 ‘리틀 헝거’지만 ‘그레이트 헝거’를 추구한다.

아프리카로 떠나 집이 빈 동안 해미는 종수에게 보일러실에 버려져 ‘보일이’라고 부르며 그 집에서 키우고 있다는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달라고 부탁한다. 상처가 깊이 방에 있다고는 하지만 모습을 보이지 않는 보일이. 그리고 북향이라 하루에 단 한 번 남산타워에 반사되어 빛이 들어오는 그 방은 모두 해미를 또 종수를 닮았다. 존재가 있지만 존재가 보이지 않고, 마치 청춘이기에 없는 희망을 꿈꾸긴 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손에 쥐지는 못하는 그들이다.

해미가 없는 사이 그 집에서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 보일이에게 밥을 주는 종수의 헛되어 보이지만 희망을 꿈꾸는 그 손짓은 그래서 처연하다. 아무도 없는 그 집에서 저 편에 거대하게 압도하듯 발기한 채 서 있는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자위를 하는 종수의 모습은 허망하다. 해미나 보일이처럼 그도 방 같은 세상에 누군가 던져주는 밥 한 끼가 없어 배고픈 이들이지만, 청춘이라는 아직도 한참을 더 살아야 하는 나이에 삶의 의미에 대한 헛된 허기를 느낀다. 그 간극은 너무나 커서 아직 세상의 이 비정함과 부조리함을 온통 이해하지 못한 이들을 알 수 없는 분노의 불길로 들끓게 만든다.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불꽃이 그 속에서 타들어간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해미가 거기서 만난 벤(스티븐 연)을 알게 되면서 종수는 점점 더 세상이 수수께끼 같다고 여긴다.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도 않고 번듯한 직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지만 포르쉐를 끌고 다니며 럭셔리한 집에서 비슷한 동류의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하고 클럽에서 춤을 추는 그들의 삶은, 북한의 대남선전방송이 들려오는 파주에서 소똥을 치우며 법정에서 선고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집나가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자신의 빚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를 마주하는 종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나라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다”는 말은 그래서 이 청춘이 마주하고 있는 단단한 세상의 벽을 실감하게 만든다.

그 파주에 있는 종수의 집을 어느 날 해미와 함께 찾아온 벤은 그 포르쉐가 주차되어 있는 냄새나는 집 마당에서 와인을 마시며 지는 해를 바라보는 언발란스한 풍경을 보여준다. 문득 대마초를 꺼내 함께 피운 벤은 자신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엄염한 범법행위가 아니냐고 종수는 말하지만, 벤은 그건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 어떤 선악의 의미가 들어있는 행위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곳에 온 것도 비닐하우스 하나를 태우기 위한 사전답사라고 말한다.

해미는 문득 그 파주에 있었던 자신의 집과 그 집 근처에 있던 우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은 사라져버렸지만 그 우물에 자신이 빠졌었고, 종수가 자신을 발견해 구해줬었다는 것. 종수는 그런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는다. 마치 지금 해미가 벤을 만나 처한 사정이 바로 그 우물에 빠진 상황과 같다고 느끼며 그를 자신이 구해냈으면 하는 욕망을 갖게 된다.

벤이 그렇게 말하고 떠난 후, 종수는 비닐하우스에 그리고 사라진 우물에 집착한다. 버려진 비닐하우스 하나가 불타버려도 경찰이나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그 말은 마치 종수 자신의 ‘있지만 없는 존재’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사라진 우물의 존재가 원래 없던 것이 아니라, 본래는 있었던 것이라는 걸 발견하는 일이 그 ‘있지만 없는 존재’인 자신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 날 벤과 함께 온 해미가 술에 취해 대마초에 취해 마당에서 지는 노을을 보며 상의를 벗고 저편 날아가는 철새들처럼 춤을 췄을 때, 그것은 도취된 해미에게는 하나의 마임 같은 ‘행위예술’로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음악이 사라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에 깨어난 해미는 그 갑작스런 현실에 당혹스러워하고 슬퍼한다. ‘없는 것을 잊으며’ 자신은 삶의 의미에 허기를 느끼는 사람이라 치부하며 살아온 그에게 갑자기 현실이 닥쳐온다. 사실은 그저 배가 고픈 청춘일 뿐이라는 것. 그런 그에게 종수는 아픈 말을 한다. 그렇게 옷을 마구 벗는 건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그 아픈 현실을 꺼내 놓은 후 종수 앞에서 해미는 마치 있지만 없는 보일이처럼 사라져버린다. 그것이 벤에 의한 것이라 의심하는 종수는 그를 미행하며 해미를 애타게 찾는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해미는 나타나지 않고, 대신 해미 같은 또 다른 배고픈 청춘이 벤의 옆에 나타나 해미가 걸어갔던 그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종수는 목격하게 된다.

가진 자들은 있는 것을 마치 제물처럼 즐기며 살아가고, 못 가진 자들은 없는 것을 잊으며 마치 있는 것처럼 살아가려 몸부림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알 수 없는 분노를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버닝>은 날카롭게도 우리네 청춘들이 처하고 있는 ‘없지만 있는 것처럼’ 치부하며 버텨내는 그 안간힘을 포착해낸다. 유아인이 당혹스러운 그 얼굴로 표현해내는 청춘의 초상이 못내 아프게 다가온다.

충격적인 엔딩은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 아니면 이 종수라는 인물이 또한 ‘없지만 있는 것처럼’ 그려낸 상상 혹은 소설의 일부분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엔딩이 담고 있는 예술의 허망함 혹은 그나마 존재하는 희망의 양면은 역시 이창동 감독다운 예술에 대한 깊이있는 시각을 드러낸다. 예술은 ‘없지만 있는 것처럼’ 하는 행위이고, 그래서 허망해보이지만 때론 그것이 세상을 인식하게 해주고 그래서 변화하게 해줄 수도 있는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이다. <버닝>이라는 영화가 그러하듯이.(사진:영화 '버닝')

‘시카고’, 시청률 아쉬웠어도 더할 나위 없는 수작인 이유

tvN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가 종영했다. 물론 시청률은 만족스러울만한 수치가 아니다. <시카고 타자기>는 한때 1%대 시청률까지 떨어지기도 했지만 평균적으로 2% 시청률대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 작품을 단순히 시청률만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작품의 완성도를 두고 볼 때 <시카고 타자기>는 최근 방영된 어떤 작품보다 높은 수준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타자기에 깃든 유령 유진오(고경표), 그리고 그 유령이 작가 한세주(유아인)와 함께 써나가는 소설, ‘시카고 타자기’. 그리고 그들 사이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지와 사랑으로서 운명처럼 들어와 있는 전설(임수정). 일제강점기라는 전생의 이야기가 2017년 현생의 이야기와 교차되며 어떻게 역사와 기억이 조응하는가를 ‘소설’이라는 틀로 보여준 진수완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 게다가 더할 나위 없는 연기로 이 상상의 작품에 생명력을 부여한 유아인, 임수정, 고경표라는 배우들의 아우라까지. <시카고 타자기>는 한 마디로 더할 나위 없는 수작이었다. 

<시카고 타자기>는 한 베스트셀러 작가의 소설 집필기로 시작하지만 그 이야기의 끝을 보면 놀랍게도 일제강점기에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한 청춘들에 보내는 헌사를 담고 있다. 그 소설이 사실은 전생에 독립투사들이었던 자신들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이었던 것. 당시 조국을 위해 싸우다 비극적인 끝을 맞이했던 그들은 통일된 조국의 후생을 기약했고, 그렇게 환생한 이들이 잊혀져 가는 당시 청춘들을 기억해나간다는 설정은 지금 현재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시카고 타자기>는 그래서 일제강점기라는 역사를 현재의 관점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역사적 시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들의 아프고 찬란했던 사랑 이야기까지 담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판타지 설정의 이야기들은 많았지만, 이처럼 재미적 요소만큼 의미 또한 남달랐던 작품도 드물 것이다. 

무엇보다 <시카고 타자기>의 완성도가 높다고 여겨진 건, 이 판타지가 그저 재미를 위한 인위적 설정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아가 문학적 상징으로까지 이해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작품은 그 안에 전생을 기억해나가고, 유령과 대화하고 교감하는 판타지를 담고 있지만, 그것은 ‘소설’을 쓰는 작가의 상상력을 상징화하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었다. 즉 이 작품 전체가 한세주라는 작가가 일제강점기의 청춘들을 상상하며 받은 영감으로 쓴 소설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카고 타자기’라는 소설을 끝내고 그 소설 속에 유진오를 영원히 봉인시킨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흥미롭다. 소설가들이 자신의 작품 속 인물을 마치 실제 인물처럼 몰입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영감을 주는 인물이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소설가 같은 창작자들에게는 마치 신비 체험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일이기도 하다. 

작품은 전생과 현생을 넘나들었던 것처럼, 새드엔딩과 해피엔딩을 동시에 묶어냈다. 즉 전생의 삶들은 결국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이었지만, 그 비극은 현생의 삶으로 이어지며 궁극적인 해피엔딩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카고 타자기>의 종영은 그 느낌이 독특하다. 새드엔딩과 해피엔딩이 겹쳐져 어딘지 쓸쓸하면서도 위로를 받는 듯한 행복감 또한 그 안에 담겨진다.

되돌아보면 현생과 전생을 넘나드는 청춘 멜로에 소설과 현실을 뛰어넘고, 판타지와 실제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내면서 하나의 굵직한 주제의식을 잃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인 <시카고 타자기>라는 드라마의 탄생은 실로 놀라운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전생과 현생의 인물들을 넘나들며 사실상 1인2역을 해낸 연기자들의 공적 역시 박수 받을 만하다. 시청률은 아쉬웠지만 그것만으로 평가받는 건 더욱 아쉬운 작품이 바로 <시카고 타자기>였다.

‘시카고 타자기’, 전생과 현생으로 그려낸 역사의 기억, 기록

과연 일제강점기 경성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tvN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 이야기의 관심은 온통 이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독립운동을 하는 청년단체의 수장 휘영(유아인)과 그의 절친 신율(고경표) 그리고 그 신율에 의해 저격수로 키워진 수현(임수정)은 알 수 없는 인연의 고리로 묶여져 있다.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수현은 휘영을 그리고 신율은 수현을 사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수현이 휘영과 신율 중 누군가에 총을 쏘았다.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이 전생의 인연은 현생으로 이어져 수현은 전설(임수정)이 되어 베스트셀러 작가 세주(유아인)와 다시 사랑으로 얽히고 갑자기 유령이 되어 나타난 신율(현생에서는 유진오, 고경표)은 세주와 함께 그 전생의 기억들을 소설로 써나간다. 한세주와 유진오가 소설로 과거를 기억하고 기록한다면, 전설은 그 소설을 읽으며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다. 

사실 전생과 현생을 잇는 사랑이야기를 할 것이었다면 <시카고 타자기>가 굳이 일제강점기까지 시간을 되돌려 그 때를 전생의 시점으로 삼을 이유는 별로 없었을 게다. 그리고 그들이 독립운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비극적인 어떤 사건을 겪었다는 것을 드라마의 중요한 모티브로 삼을 이유도 없지 않았을까. 어떤 식으로든 <시카고 타자기>의 이야기가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시점과 당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시간의 장벽 같은 것들이 있다. 그래서 간헐적으로 전생의 부분들이 떠오르지만 그 전부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유령인 유진오 역시 그들 인연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걸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다. 시간과 기억이 만들어내는 장벽. 그래서 이들은 그 기억을 되찾아가는 여행을 소설이라는 방법의 틀을 통해 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시카고 타자기>의 초반 이야기들은 베스트셀러 작가 한세주를 중심으로 그가 겪는 창작의 고통과 가족인 줄 알았던 백태민(곽시양) 가족으로부터의 배신 같은 개인사 그리고 무엇보다 유령이 깃든 시카고 타자기와 그가 얽히는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전생과 연관된 현생의 이야기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전개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것이 이 본격적인 전생과 현생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한 일종의 포석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시카고 타자기>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전생과 현생, 그것도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지점을 끌어온 것일까. 이런 질문을 통해 떠오르는 건, 이 드라마가 역사라는 것이 어떻게 기억되고 기록되는가를 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전생처럼 지워져버린 일제강점기의 기억들. 그래서 사료들이 남아 있다고 해도 교과서에 박제된 것이거나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것들로 채워져 있는 기록들. <시카고 타자기>는 그것을 소설 혹은 드라마라는 틀을 통해 생생한 살아있는 역사로 담아내려는 노력 자체를 이야기의 모티브로 쓰고 있다. 

그것은 한세주와 전설 그리고 유진오가 얽혀진 개인적인 사랑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우리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기억을 유예시킨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역사적인 시간들이었으면 전생처럼 지워버린 기억으로나 남게 되었을까. 게다가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당대의 권력과 재력을 가진 이들이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져왔다는 아픈 현실은 당대의 역사가 우리 손으로 왜곡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전설처럼 전생을 기억하는 그녀의 어머니는 20년 만에 그녀 앞에 나타나 세주와 엮여 전생의 비극을 반복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자 전설은 자신은 “어머니처럼 전생이 두려워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것을 직시하고 극복하겠다는 뜻이다. 세주와 유진오가 기억을 되새겨 다시 쓰는 일제강점기의 기록과 그것을 읽으며 전생의 잊혀진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가는 전설의 이야기.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역사란 무엇인가를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지니어스’, 우리에게도 맥스 같은 편집자가 있는가

사실 안타깝게도 문학의 시대는 이미 저물어가고 있다. 그러니 영화 <지니어스>에 등장하는 천재적인 소설가 토마스 울프의 소설 구절구절들이 우리네 관객에게 어떤 울림을 주기는 쉽지 않다. 물론 <동주>의 윤동주처럼 우리 관객이 누구나 알고 있는 인물이라면 또 모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름은 알아도 그 소설은 낯설기 이를 데 없는 토마스 울프가 아닌가. 삶에 대한 상징들로 가득 채워져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져버리는 그 순간을 무려 몇 십 장에 걸쳐 묘사해내는 토마스 울프의 넘쳐흐르는 문학성은 지금의 대중들에게는 낯설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사진출처:영화<지니어스>

하지만 바로 그런 낯선 정경과 정서가 주는 기묘한 느낌 같은 것이 <지니어스>에는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 점점 구술시대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그 묘미를 버리고 있는 문자의 마술 같은 것이다. 의미는 모호하지만 단어와 단어의 이질적인 조합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감흥 같은 것이 <지니어스>에는 전편에 흐른다. 그것은 1929년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시간적 공간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그 정도의 시간을 되돌려야 문학이라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나.

영화 <지니어스>는 토마스 울프(주드 로)라는 천재와 그는 물론이고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같은 전설들을 대중들 앞에 발굴해낸 맥스 퍼킨스(콜린 퍼스)라는 또 다른 천재 사이에 벌어진 실제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천재를 알아보는 천재의 이야기.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 교감해가며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접하는 명작이 그저 한 천재에 의해 우발적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제아무리 뛰어난 천재라도 그 가치와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전하기 위해 아낌없는 헌신을 다하는 맥스 같은 또 다른 천재가 없다면 그 천재가 꽃을 피우지 못할 거라는 것. 

마치 속 안에 써내지 않으면 폭발해버릴 것처럼 끝없이 쉬지 않고 글을 써내는 토마스 울프. 맥스는 무려 5천쪽에 달하는 그 글들을 울프와 함께 정제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갈등이 생긴다. 맥스는 결국 편집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울프 입장에서는 자신의 작품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울프는 맥스의 진심을 들여다보고 기꺼이 그 편집을 허용한다. 한편 맥스 역시 늘 작품은 작가의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때때로 자신이 하는 일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에 대한 고민을 한다. 

두 사람은 마치 불과 물 같은 서로 다른 성향을 보인다. 울프가 불처럼 천재성을 마구 뽑아내는 인물이라면 맥스는 물처럼 차분하게 아무 곳으로나 뻗어나가는 불길에 물길로 균형을 맞춘다. 완전히 다를 것 같지만 어떤 소통을 통해 합일점이 가능하다는 걸 영화는 두 사람이 재즈바에 음악을 듣는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재즈에는 관심이 없는 맥스가 재즈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곡을 선곡하지만 그 곡이 변주를 통해 재즈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맥스와 울프는 한 마음으로 음악을 즐기게 된다. 

<지니어스>가 특히 주목하는 건 맥스라는 편집자다. 영화의 첫 장면이 비 내리는 뉴욕 거리 한 귀퉁이에 비를 쫄딱 맞고 자신의 원고가 출판될지 안 될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토마스 울프의 발에서 시작하는 건 이런 영화의 주목점에 대한 암시다. 낮은 카메라의 시선으로 보이는 수없이 많은 발들 속에 토마스 울프의 발을 잡아내는 일. 영화는 자주 많은 뉴요커들이 쏟아져 나온 거리 속에서 맥스와 토마스 울프가 서로를 발견하는 장면을 반복해 집어넣는다. 천재를 찾아내고 그 천재성을 제대로 끌어내게 하기 위해 헌신하는 편집자 맥스라는 존재의 위대함. 

많은 이들이 작품은 온전히 예술가의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외국이나 우리나라나 혹은 1920년대의 뉴욕이나 2017년의 한국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그 예술가 뒤편에서 책이 대중들 앞에 도달할 때까지 헌신하는 편집자라는 존재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이국적인 영화가 우리에게도 주는 메시지가 적지 않다. 

우리에게는 과연 맥스 같은 편집자가 있는가.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해 작가가 쓴 것인지 아니면 편집자가 쓴 것인지 알 수 없는 책들이 나오는 건 우리네 출판가에 그리 낯선 일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그것 역시 편집자의 헌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지만 자칫 상업적인 선택들에 의해 책이 난자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맥스가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경계했던 것. 작품은 결국 작가의 것이어야 한다는 그 질문에 담긴 고민은 그래서 지금의 편집자들에게 적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알>, 어째서 현 시국을 악의 연대기라 명명했을까

 

이건 차라리 소설이나 영화여야 하지 않을까.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파헤친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 일가의 40년 고리는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다. 다만 그 영화가 평이한 드라마가 아니라 악에서 악으로 이어지는 사회극이자 스릴러 나아가 <곡성> 같은 오컬트 장르까지 연상시킨다는 게 시청자들을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사진출처:SBS)'

일제강점기에 일본 순사를 지낸 최태민이 독립운동을 위한 밀정이라 주장했다는 내용은 영화 <밀정> 이야기의 최태민식 해석처럼 보였다. 전문가는 시험도 안보고 순사 추천을 받았다는 건 그가 일제에 충성도가 높았다는 단적인 증거라며 그의 밀정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확인했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친일파들이 자기 친일 경력을 숨기기 위해 많이 한다며 해방 후 최태민이 개명을 한 걸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암살>의 염석진(이정재)을 떠올리게 했다.

 

최태민이라는 인물의 삶은 마치 <태양은 가득히>의 리플리처럼 거짓말과 사기로 점철된 삶의 연속이었다. 무려 7개의 이름과 6명의 부인. 훗날 만들 사이비 종교를 준비하려 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살다보니 교주가 된 것인지 각종 종교를 전전하다 박근혜와 인연이 되어 구국선교단으로 승승장구하게 된 삶. 그리고 그 인연의 고리에는 육영수 여사의 서거로 인해 생겨난 약해진 감정을 최면으로 파고들었다는 마치 <곡성>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의혹 제기도 들어 있었다.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끝장나고 청와대를 떠나 박근혜가 자리한 육영재단은 사실상 최태민 일가의 사적 축재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사적 조직에 가까웠다. 여기서 최태민에서 최순실로 이어지는 악의 연대기가 본격화됐고 10.26 사건으로 청와대를 나온 박근혜의 대통령 만들기는 마치 종교나 군사조직처럼 진행되었다.

 

황상민 전 연세대 교수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심리 분석은 이 영화 같은 이야기를 보다 쉽게 이해하게 해주었다. 그는 2년 전 60명을 상대로 조사한 이미지 분석 결과, 60명 중 40명이 박 대통령을 혼군, 즉 어리석은 지도자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 다음이 얼굴마담’. 황 전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대중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황 전 교수는 한나라당 대선 후보 당시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직 사퇴를 말실수해 대통령직 사퇴로 얘기한 사실이 중요하다고 지적하며 이는 “15년간 국회의원으로 있으면서도 그냥 대통령이라는 마음으로 지냈다는 것을 그대로 노출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의 심리가 내가 자라던 집에 돌아가서 우리 아버지의 나라를 내가 주인으로서 지키는 것, 거기에서 내 집을 뺏겨가지고 쫓겨났을 때 그 이후에 아버지에 대해서 상당히 욕되게 한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민주화 이후의 사회 작동 원리에 맞지 않는 박정희식 통치의 방식들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아주 최선을 다해서 사익을 추구했다, “권력을 가지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식의 시대에 맞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방식 때문에 결국 오늘의 이 사태가 터진 것 아니냐고 지적한 김윤철 경희대 교수의 이야기처럼 <그것이 알고 싶다>가 추적한 악의 연대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서 현재의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그 어두운 시기를 하나의 실타래로 꿰어냈다. 그건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다. 결코 영화가 돼서는 안되는 현실이기에 보는 내내 참담함을 금치 못하게 했지만. 우리가 살아온 한 시대가 어쩌면 한 사기꾼에서 사기꾼으로 이어지는 농단의 연대기였다니.

<열정 같은>, 심지어 원작과 정반대의 영화라니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는 현직 연예부 기자인 이혜린 기자의 동명의 자전적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이 소설은 열정같은 소리를 해대며 사실은 갖가지 기레기짓으로 제 밥그릇을 챙기는 스포츠지 연예부 기자의 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하며 작가 스스로는 반성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 영화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런 원작의 메시지는 영화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정반대의 주제의식이 드러난다. 그 주제의식이란 다름 아닌 대중들이 흔히 기레기라고 부르는 이들도 나름대로의 애환과 직업의식은 있고, 그것 역시 밥줄이 달린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거론하고 있듯이 이 작품은 여러 모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이야기구조와 유사하다. 인턴기자로 입사한 도라희(박보영)<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드리아(앤 헤서웨이)처럼 보이고 그녀를 압박하는 하재관 부장(정재영)은 미란다(메릴 스트립) 편집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품은 뒤로 갈수록 <미생>의 인물들로 바뀌어간다. 즉 도라희는 장그래(임시완)처럼 보이고 하재관은 오과장(이성민)처럼 보이는 것.

 

하재관이란 인물에 대한 동정적 시선을 만들어 언론 현실의 문제를 밥줄의 문제로 슬쩍 덮어버리자 영화는 진지한 문제제기보다는 발랄한 코미디를 따라간다. 그리고 사실 악이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라고는 해도 누군가의 사생활을 캐고 그것을 자극적으로 만들어내며 나아가 찌라시를 활용하기까지 하는 그 언론 자체와 그걸 만들어내는 자본의 경쟁논리에 있지만, 영화는 엉뚱하게도 한 기획사의 대표를 악의 축으로 세워놓는다.

 

이렇게 되자 내부의 문제는 가려지고 대신 외부의 강력한 적과 싸워나가는 기자정신(?) 이야기로 포장된다.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라는 제목이 가진 시니컬함은 사라지고 오히려 주인공이 마치 CSI처럼 밤새워 정황들을 모아 기사를 작성하는 열정이 부각된다. 그리고 그 열정은 원작과는 너무나 다른 정식 기자증이라는 훈훈한 결과로 이어진다. 내부 고발의 이야기가 힘겨워도 살만하고, 더러워도 그것이 먹고 살기 위함이라는 포장으로 채워지면서 원작의 메시지는 완벽하게 뒤집어진다.

 

이러한 훈훈한 성장담에 박보영 캐스팅은 아마도 최적이었을 것이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순수한 이미지의 연기자가 바로 박보영이 아닌가. 그러니 여기 등장하는 기자들의 말 그대로 먹고 살자고 하는 일들이 그녀가 인턴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상당부분 용인되게 만드는 힘이 생기는 게 사실이다. 기자라고 하면 막연히 떠오르는 그런 이미지도 박보영이 하고 있으니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것은 정재영 캐스팅도 마찬가지다. 꽉 막힌 것처럼 버럭대는 캐릭터지만 어딘가 마음 한 구석에 정이 느껴지고 때로는 그 버럭 댐이 오히려 우스꽝스럽게까지 보이게 만드는 역할에 정재영 만한 연기자가 있을까. 부하직원을 끔찍이 챙기고, 기러기 아빠로서 살아가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하재관이 그래서 심지어 구악처럼 보이기보다는 한 명의 가장이자 피해자처럼 보이게 된 건 정재영이라는 연기자의 이미지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도대체 어째서 이처럼 지옥 같은 경험을 담았던 원작이 훈훈한 직장생활 성공기로 변신하게 됐던 걸까. 물론 그것은 장르적으로 경쾌한 코미디가 훨씬 경쟁력이 있다 여겨졌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원작을 뒤집어 그저 웃고 넘기기엔 어딘지 아쉬움과 씁쓸함이 남는 리메이크가 아닐 수 없다. 그것 역시 자본의 논리에 의해 각색되고 포장된 것일 테니 말이다. 만일 연예부 기자들의 현실을 리얼하게 들여다보고 싶다면 영화보다는 차라리 원작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두근두근 내 인생', 죽음이 대수인가 두근대는 가슴이 있는 한

 

조로증에 걸려 몸은 이미 팔십 세 노인이 다 된 아름이의 나이는 열여섯 살. 공교롭게도 그의 부모인 대수(강동원)와 미라(송혜교)가 아름이를 갖게 된 나이도 열여섯이다. 열일곱에 낳았지만 그들이 만나 서로에게 두근대는 마음을 가졌던 건 열여섯. 이른바 우리가 흔히 이팔청춘이라고 말하는 나이다.

 

'사진출처:영화<두근두근 내인생>'

왜 하필 이팔청춘일까. 부모는 그 나이에 사랑을 했고, 한 번도 이성과의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아름이는 그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바로 이 이팔청춘이라는 설정은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영화에 중요한 메시지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팔청춘의 나이에 맞닥뜨리는 죽음이라니.

 

대개 병동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것도 아이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신파 구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마음만 먹는다면 영화는 관객들을 눈물 쏙 빼는 경험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하지만 <두근두근 내 인생>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이웃집 할아버지 장씨(백일섭)에게 조로증 소년이 같이 늙어가는 처지잖아요라고 말하듯이, 울기보다는 웃으려는 노력을 더 많이 보여준다.

 

어린 나이에 일찍 죽음을 실감하기 때문일까. 아름이는 어찌 보면 부모와 어르신들까지 오히려 다독이는 어른의 심성을 보여준다. 엄마가 일하는 것을 덜어드리기 위해 자신은 싫을 수 있는 방송을 선선히 하겠다고 나서는 아이다. 영 상태가 안 좋아져 언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걸 스스럼없이 토로하는 아이에게 오히려 아이처럼 발끈하는 건 칠순의 이웃집 장씨다.

 

영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나이에 대한 선입견을 기분 좋은 훈훈함으로 깨버린다. 아직도 게임기에 집착하는 대수는 여전히 아이 같고, 그 앞에서 아름이는 부모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웃집 장씨에게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PD가 아름이가 어떤 아이인가를 묻자 친구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수십 년의 나이를 순식간에 훌쩍 뛰어넘는 뭉클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름이 앞에서 짐짓 아이인 척 구는 대수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전히 이팔청춘의 목소리로 대하는 미라나 모두 아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어쩔 수 없는 부모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하지만 이들이 아름이 앞에서 눈물을 숨기는 것은 신파 구조로 눈물샘을 더욱 자극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다가오는 미래의 슬픔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함께 하는 순간의 즐거운 기억들이다.

 

김애란 작가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영화는 이야기가 가진 힘에 대해 역설한다. 나이 열여섯에 죽음을 맞이하든 아니면 팔십에 죽음을 맞이하든 결국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중요한 건 그 열여섯 이팔청춘에 가슴 설렘을 마음 한 구석에 품고 편안히 누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수와 미라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단 한 번도 이성과의 두근대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던 아름이는 아마도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부모가 느꼈던 그 이팔청춘의 설렘을 처음으로 공유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은 소설 같은 이야기의 힘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사라져도 이야기는 영원히 남는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결국 이 영화가 신파로 흐르지 않고 잔잔하게 우리네 삶을 얘기해줄 수 있었던 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눈물이 아닌 웃음의 기억으로 채워주려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름이의 기억 속에는 부모의 모습이 여전히 아이 같은 아빠 대수와 당찬 엄마 미라의 이팔청춘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죽음? 그게 대수인가. 당장 두근대는 가슴이 있는 한.

 

천안함 이슈,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MBC는 결국 <진짜사나이>의 이외수 강연 녹화 분량을 통편집 하기로 했다. 방송이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준다면 심지어 자그마한 피해라고 하더라도 이를 막기 위해 조치를 취하는 건 방송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어찌 됐건 천안함 사건의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그 아픔을 다시 끄집어내는 건 온당치 않은 일일 테니 말이다. 즉 방송이 유가족을 위해 통편집을 하는 건 방송 윤리로서 당연한 일이란 얘기다.

 

'진짜사나이(사진출처:MBC)'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씁쓸함이 남는 건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번 논란이 마치 천안함 사건에 대한 어떠한 의혹 제기도 마치 씻을 수 없는 주홍글씨가 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아예 이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폭침에 의한 것이라는 걸 기정사실로 못 박고 얘기하면서 유족을 내세워 감정적인 설득을 하려 했다. 하지만 이외수 작가가 당시 의문을 제기한 것처럼 아직도 국민들은 이 사건이 북한의 소행인지 아니면 사고였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미심쩍은 정부의 공식발표는 신뢰받지 못했고 국민들을 오히려 더 깊은 혼돈 속에 빠뜨렸던 게 사실이다.

 

그러니 이 의문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다큐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가 나온 것도 다르지 않다. 이 영화는 천안함 사건을 둘러싼 의혹들을 다양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통해 하나하나 제기하는 형식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성급히 어떤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의문이 소통의 시작이라는 의미심장한 주제의식을 던졌다. 이외수 작가의 소설이라는 표현이 과격한 느낌은 있어도 그 역시 사안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문을 제기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을 조롱이라고 표현한 하태경 의원의 진술 또한 부적절하기는 마찬가지다.

 

시선을 끄는 대목은 <천안함 프로젝트>처럼 훨씬 더 심도 있고 파괴력 있는 문제제기가 나왔을 때와 이번 <진짜사나이> 논란의 전개 양상이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천안함 프로젝트>에 대한 멀티플렉스 상영 중단 결정이 나왔을 때 야권에서는 여기에 대한 거센 반발을 드러냈다. 심지어 대중들은 공안 정국을 운운하면서 영화 한 편 볼 수 없는 현실을 개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사나이>는 천안함을 전면에서 다룬 것도 아니고 단지 과거 천안함 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이외수 작가가 해군에서 강연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방송 불가 운운하고 있지만 여기에 대한 반발은 <천안함 프로젝트>만큼 거세지 않다.

 

이것은 어쩌면 이외수 작가에 대한 대중들의 시선이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는 지난 해 대선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자택을 방문해 지지를 호소하자 과거사에 대해 사과를 하신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고 덕담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내용은 당시 박 후보의 선거 공보물에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니 트통령으로 불리며 정부와 집권 여당에 쓴 소리를 하던 이외수 작가에 대한 좋지 않은 시선이 생기게 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어쨌든 이외수 작가의 과거 발언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왜 현재의 <진짜사나이>의 이외수는 안되고 지난 해 대선 정국에서 박근혜 후보 선거 공보물에 사용된 이외수는 허용되는 것일까. 혹시 이 두 인물은 전혀 다른 인물일까. 결국 이것은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이외수 작가가 이리저리 이용되며 피해를 보고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대선 당시에는 그가 가진 트통령으로서의 엄청난 영향력이 필요했던 것이고, 현재는 천안함 사건이라는 바다 밑에 잠재워진 듯 보이던 초대형 이슈를 끄집어내는데 필요했던 셈이다.

 

아직까지 명쾌하게 그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천안함 사건이라는 민감한 이슈가 이외수나 <진짜사나이>가 연루되어 마치 북의 소행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호도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또 반드시 북한의 소행이어야만 안타까운 젊은 순국장병들의 명예가 지켜지는 식으로 전개되는 논리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들은 어쨌든 모두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다 안타깝게 희생된 우리네 자식들이다. 그러니 어쩌면 명명백백한 사건의 진실을 찾는 것은 먼저 간 분들의 인권이기도 할 것이다.

 

<진짜사나이>의 이외수 강연 녹화 분량 통편집은 그래서 천안함 사건의 진실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것은 방송이 단 한 사람의 불편함도 수용해야 한다는 측면에서의 통편집이지,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확증한다는 의미에서의 통편집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방송사의 이 같은 결정은 잘못된 것이 없다 여겨진다. 다만 씁쓸함이 남는 것은 이번 사안이 정부의 공식 발표에 대한 어떠한 의문 제기조차 허락되지 않는 한 사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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