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났다 안된다 이거. 데빌이다 이거.” SBS 예능 ‘신들린 연애’에서 타로 전문가 최한나는 처음부터 운명의 상대로 점찍었고 첫 데이트를 통해 더 심쿵한 순간들을 마주하며 더 마음이 기울었던 이홍조에 대한 타로점을 치면서 낙담했다. 그런데 그건 그저 낙담의 수준이 아니라 절망에 가깝다. 그만큼 자신이 치는 타로 점에 대한 믿음이 크기 때문이다.
자꾸만 이홍조에게서 ‘배신카드’가 뜬다는 최한나는 그 상황이 왜 자신을 괴롭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홍조님한테서 데빌카드가 떠버리는 거예요. 데빌카드가 떠버리면 이게 뭔가 안될 것 같은데도 끊어내지 못하고 계속 중독처럼 집착처럼 계속 생각이 나게 되는 그런 카드예요. 근데 그 카드가 떠버려가지고...” 계속 부정하듯 다시 타로 카드를 뒤집던 최한나는 결국 데스카드가 뜨자 이렇게 탄식했다. “데스... 정해졌습니다. 신의 뜻입니다.”
이 장면은 ‘신들린 연애’라는 색다른 연애 리얼리티가 가진 이색적인(?) 관전 포인트를 보여준다. 사실 이홍조는 변한 것이 별로 없다. 그 역시 처음부터 일면식도 없이 사주가 적힌 푯말만 보고 선택한 인물이 최한나였다. 하지만 최한나를 흔들리게 만든 건, 각자의 직업을 공개하는 순간부터였다. 이홍조가 무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최한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홍조가 갖고 있는 오색기로 최하나가 연애운을 점쳐봤는데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흰색, 초록색 같은 ‘부정적’ 의미가 담긴 깃발이 뽑힌 것이다.
사실 이런 점술에 대해 스튜디오에서 그 상황을 관찰카메라로 보고 있는 신동엽, 유인나, 가비, 유선호 같은 연예인 출연자들은 안타깝긴 해도 그 정도로 절망할 일인가 싶어한다. 그리고 그건 시청자들도 마찬가지 감정일 게다. 하지만 그 점술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느낌이 다르다.
이것은 여기 출연한 함수현이나 이홍조 같은 이들이 원치 않았지만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사연을 들어보면 금세 이해가 된다. 함수현은 무당이 되기 전 여의도의 은행에서 일하는 직장인이었고, 무병이 있었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무려 10년을 버텼다고 했다. 그러다 결국 신내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마찬가지로 이홍조 역시 어머니가 무속인이었는데 동생이 신내림을 받을 운명이라는 걸 알고 그게 안타까워 자신이 대신 받게 됐다고 했다.
이들 누구도 자신이 자청해서 무속인의 길에 들어선 게 아니다. 잘 나가던 직업도 포기하고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러니 이들에게 그 점술의 의미는 우리와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여성 출연자들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마음과 점사 사이에서 어떤 걸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기도 했다. 그 중에 누군가는 점대로 가면 재미가 없다며 마음을 선택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마음대로 가려다 “더 세게 맞았다”고 말했다.
무당인 함수현은 신이 말해주는 대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머릿 속의 생각과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 사이에서 갈등이 생겨날 수도 있다고 했다. 즉 기존 연애 리얼리티가 어떤 사람에 대해 호감을 느끼는가가 선택의 기준이 된다면 ‘신들린 연애’는 여기에 점술로 대변되는 운명이 또 하나의 변수로 작용한다. 관계가 조금씩 무르익어가면서 점술과 어우러지거나 혹은 반하는 선택들이 만들어낼 파장이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연애 리얼리티와 점술의 결합이 만들어낸 신박한 변주가 아닐 수 없다. (사진:SBS)
‘윰며들다’라는 표현이 생길만큼 tvN 금토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이 유발하는 ‘과몰입’은 기분 좋게 시청자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어딘가 <인사이드 아웃>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만, <유미의 세포들>은 더 다양하게 캐릭터화된 세포들이 등장하고, 남녀 관계에서 벌어지는 감정들에 따라 세포마을에서 벌어지는 판타지급 사건들이 <인사이드 아웃>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전개된다. 그래서 일단 이 ‘세포들’과 공존하는 유미(김고은)의 세계에 발을 디디면 마치 그 세계의 세포 일부분이 된 것처럼 그 감정을 공유하며 ‘시간순삭’을 경험하게 된다.
<유미의 세포들>에서 평범한 재무부 대리인 유미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사실 여타의 멜로드라마들과 비교해보면 그다지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어려서부터 이어진 인연의 운명적인 재회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계의 틀 속에서 벌어지는 밀고 당기는 로맨틱 코미디의 사건들도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은 첫 회만 봐도 단박에 드러난다. 첫 회 이야기는 유미의 어느 평범해 보이는 하루를 담는다.
3년 전 연애를 끝내고 그 후유증으로 사랑의 감정을 억누른 채 지내온 유미. 영업부 채우기(최민호)에게 관심이 가던 차에 그가 유미가 살고 있는 일산 갈 약속이 있어 같이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유미는 데이트를 기대하지만 역시 그에게 관심이 있는 루비(이유비)가 끼어들어 기대는 깨지고, 다음 날 초연해 보이려 했지만 루비가 채우기와 꽃 축제에 가기로 했다는 말에 흔들린다. 그런데 우기가 유미에게도 같이 가자고 제안하고 데이트가 무산된 루비가 남과장(정순원)까지 초대해 일을 키우면서 일정을 조율하다 꽃 축제 약속은 엉뚱하게도 유미와 채우기 둘의 데이트가 되어버린다.
어찌 보면 유미의 이 첫 회 이야기는 직장인의 평범한 하루에 불과하지만, 시청자들은 이 평범한 하루를 눈을 뗄 수 없는 드라마틱한 반전의 반전의 이야기로 보게 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유미의 세포들>이라는 드라마에만 존재하는 귀여움 한도초과 세포들의 세계가 있어서다. 빨리 일을 끝내고 채우기와 데이트를 하기를 기대하는 유미의 모습은, 맷돌을 열심히 굴리는 세포들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모든 감정과 생각을 무화시키는 직장인들의 출출함은 거대한 출출세포가 세포마을을 휘젓는 광경으로 묘사된다.
3년 전 연애를 끝낸 유미의 상심은 사실상 이 세포마을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세포’가 겪는 좌절로 극화된다. 헤어진 이후의 슬픔은 세포마을을 홍수로 휩쓸어버린 비로 표현되고, 채우기에 의해 설레는 감정을 갖게 된 유미는 산소호흡기에 유지한 채 깨어나지 못했던 사랑세포가 3년 만에 눈을 뜨는 장면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중간에 루비가 끼어들고 그래서 다음 날 만난 루비 앞에서 표정을 관리하는 유미의 모습 역시 세포마을에서 표정관리 레버를 힘겹게 붙들고 있는 세포들로 그려진다. 이처럼 <유미의 세포들>은 로맨틱 코미디에서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으로 드러내던 감정과 생각들을 구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 세포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풀어냄으로써 시청자들을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역시 멜로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일 게다. <유미의 세포들>에서도 채우기가 성 소수자라는 걸 밝히고 소개해준 구웅(안보현)과 유미가 다소 이상했던 첫 만남부터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고 나아가 첫 키스까지 하는 그 과정 역시, 유미의 세포마을에 어느 날 찾아온 개구리(사실은 구웅의 세포마을 사랑세포)가 마을을 복원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그 감동이 컸고, 첫 스킨십에 대한 욕망 역시 응큼이 세포와 응큼이 사우르스 세포라는 귀여운 캐릭터들로 그려져 빵빵 터지는 웃음을 만들었다.
<유미의 세포들>은 멜로 단계에서 벌어지는 감정과 생각들을 세포마을에서 벌어지는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퓨전화된 작품의 훌륭한 성공사례가 아닐 수 없다. 감정과 생각이 구체화됨으로써 멜로는 더 생생해진다. 특히 주목되는 건 영상 위에 덧대진 애니메이션이나 자막 같은 구성물들이 실사 멜로의 몰입을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몰입을 가능하게 하는 연출요소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마치 웹툰의 연출적 표현요소들이 이제는 드라마에서도 충분히 먹힐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미의 세포들>의 멜로가 효과적이라는 건, 유미와 구웅의 연기를 하는 김고은과 안보현이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마치 세포들이 이들의 연기를 든든히 지지해줘 200% 이 캐릭터들의 감정과 생각을 전해주고 있어서다. 시청자들은 유미의 표정 하나 손짓 하나가 그저 지나치지 않는 그의 감정과 생각을 담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건 또한 우리가 일상을 다시금 보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누군가 한 마디를 했을 때 그 안에 어떤 세포들이 움직였을까를, 이 드라마를 본 이들이라면 한번쯤 떠올려 봤을 게다. 내 안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하는 타인들의 마음까지 ‘세포들 차원’에서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 <유미의 세포들>은 그래서 유쾌하고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지만, 그것이 유발하는 ‘타자에 대한 감수성’은 그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tvN)
E채널 예능 <노는 언니>에서 생애 처음 캠핑을 간 언니들이 캠프파이어를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조심스럽게 스포츠 선수들의 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자리라면 보통 연애 이야기가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스포츠 선수이기 때문에 그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박세리가 한 마디를 툭 던진다.
"근데 선수생활들 오래 했잖아. 솔직히 남자친구 안 사귀어봤다 그러면 거짓말이겠지. 솔직히 (대중들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많지 (그런데) 선수들은 아니거든. 그런데 보는 시선들은 그렇게 생각 안하는 거지. 운동할 때 이성한테 관심 있으면 그만큼 운동하는데 집중 안되고 훈련하는데 지장 있고 그렇게 얘기하지만 절대 안 그렇잖아."
박세리의 이야기는 다른 언니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김은혜는 선수 시절에 이성을 만나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알아서 그 친구한테 직접적으로 돌려 헤어지라고 해서 결국 헤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들은 친구 한유미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박세리의 한 마디가 더해진다.
"스트레스가 많이 받는데 그게 반대로 서로 의지하면서 스트레스가 더 풀리게 되니까 집중하는데 있어서 더 좋지." 박세리는 연애가 선수생활에 더 이롭다는 자신의 소신 있는 이야기를 전한다. 어찌 보면 스포츠인들 그것도 여성들에게 특히 편견의 시선으로 보곤 했던 이성문제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그는 말하고 있었다.
<노는 언니>가 그저 언니들이 모여 노는 것만을 보여줬다면 이만한 대중들의 관심을 얻지는 못했을 게다. 하지만 박세리가 가끔씩 툭툭 던지는 말들 속에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스포츠인 특히 여성 스포츠인들이어서 겪어야 했던 일들은 이들이 '노는 행위'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박세리는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슬쩍 농담을 섞어 이 프로그램이 자신을 위해 그런 걸 해줘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건넨다. 만일 이것이 실제로 방송화 된다면 그것 또한 그저 연애를 담는 소재 그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더하게 될 것이다.
<노는 언니>는 못 놀아본 여성 스포츠 스타들이 이제 좀 놀아보자는 콘셉트로 '생애 최초의 캠핑' 같은 시도들을 담아내고 있지만, 여성이고 스포츠 선수들이었다는 공통점이 꺼내놓는 특별한 대화가 의외로 묵직한 울림을 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날이 왔을 때 운동 또한 병행해야 하는 그 고충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당당하고 솔직하게 꺼내놓는 이들의 모습은 여성 스포츠 선수들의 삶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또 늘 체중관리에 신경 쓰며 마음껏 먹지도 못했던 선수 시절의 이야기는, 이들이 캠핑에서 온전히 먹고 또 먹는 시간을 만끽하는 모습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애초 <노는 언니>는 처음 만나 고깃집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스포츠 선수로서 살아오며 보통 사람들처럼 하지 못했던 것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드러낸 바 있다. 곽민정은 늘 훈련이 일상이었던 자신의 삶이 '노잼'이고 그래서 친구가 없다고 했고, 정유인은 결혼하면 아예 수영선수들은 계약을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임신하게 되면 훈련을 받을 수가 없어서란다. 펜싱 선수였던 남현희 역시 자신이 결혼한 선수로는 처음이라 잘 해서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남현희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신이 갖지 못했던 "여유"를 가지라고 한다고 했고, 음료나 음주 역시 즐기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박세리는 선수 시절 탄산음료조차 먹지 못했다고 했다. 운동선수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게 당연한 선수시절의 분위기였다는 것. 하지만 박세리는 솔직히 음주가 괜찮다고 생각한다 말했다. 운동을 할 때는 하고 풀 때는 풀어야 더 오랫동안 자기 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란다.
<노는 언니>는 캠핑을 떠나 하루 종일 먹고 또 먹으며 말 그대로 노는 언니들의 시간들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 노는 행위가 남다른 가치와 의미로 다가오는 건 여성 스포츠선수들로서 겪어왔던 일들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박세리의 에둘러 말하지 않는 묵직한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그래서 <노는 언니>의 중요한 공기를 만들어낸다. 시청자들이 기꺼이 이 언니들의 놀이를 응원하게 만드는.(사진:E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