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연기자가 좋은 캐릭터를 만난다는 것은 '시티홀'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티홀'은 정치 풍자가 담겨진 코미디에 멜로가 섞여 있는 드라마다. 따라서 정치적인 면을 보일 때는 가벼운 듯 하면서도 진지함을 유지해야 하고, 본격적인 멜로에 들어가면 행복감과 절망감을 오가는 웃음과 눈물 연기를 해내야 한다. 연기자로서 '시티홀'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드라마는 아니다.
하지만 차승원이나 김선아처럼 준비된 연기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오히려 밋밋한 캐릭터보다는 이처럼 복합적인 면을 소화해내야 하는 연기가 그들에게는 도전이면서도 또한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시티홀'은 그들에게 바로 그 무대를 마련해주었고,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복합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캐릭터라는 옷을 입고 마음껏 춤을 추었다. 그 결과 이 드라마를 통해 차승원은 재발견되었고, 김선아는 삼순이의 옷을 벗어버리고 신미래라는 새로운 옷을 입음으로써 건재함을 과시했다.
차승원이 연기해낸 '시티홀'의 조국이라는 캐릭터는 겉으로만 봐서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판타지남의 계보를 잇는 것처럼 보인다.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에서 '내조의 여왕'의 태봉씨(윤상현)를 잇는 인물로 조국을 거론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캐릭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국이 이들의 계보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준표나 태봉씨는 드라마 속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는 전지전능한 캐릭터지만, 조국은 그렇지 않다. 그의 앞에는 늘 난관이 겹겹이 쌓여 있고 그는 사랑하는 여인 신미래를 보호하면서 그 난관을 넘어서야 하는 입장이다.
이것은 조국이 이들 판타지남들보다는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의 계보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조국은 탁월한 정치적 능력을 갖고 있고, 신미래라는 여성을 만남으로 해서 그 힘을 낮은 자들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 즉 조국이라는 캐릭터는 그저 멜로의 판타지뿐만 아니라 서민들을 꿈꾸게 하는 판타지까지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그 특유의 카리스마를 갖게 된다. 게다가 그 카리스마는 코믹함을 가미하면서 강마에가 가졌던 괴팍하면서도 친근한 인상을 덧붙인다.
차승원은 사실 코미디와 정극 양쪽을 오간 경력의 소유자다. 코믹의 웃음은 그의 장기이고, 정극의 우수와 슬픔은 그의 특기다. 그런 면에서 '시티홀'의 조국은 이 양면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였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차승원은 지금껏 상대적으로 보여주지 못했던 카리스마를 조국을 통해 얻었다. 정치 소재가 갖는 강인한 리더십의 면모를 조국을 통해 갖게 된 것이다.
한편 김선아가 연기한 신미래는 처음 삼순이 캐릭터에서 시작했다. 10급공무원으로서 밴댕이 아가씨 대회가 나가고 거기서 조국을 만나는 과정 속에서 김선아의 연기는 여전히 삼순이에 머물러 있었다. 캐릭터가 그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미래가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 행보를 하게 되고 시장 선거에 나가게 되면서부터 김선아는 조금씩 삼순이의 아우라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신미래는 돈키호테적인 신념을 가진 순수 정치초심자로서의 강인한 모습과 함께, 사랑 앞에서는 가녀린 한 여성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다. 게다가 신미래 역시 조국처럼 코믹을 바탕에 깔고 있는 캐릭터. 그러니 이 인물의 스펙트럼은 저 삼순이가 갖는 단순함에 비할 바 없이 넓다 할 수 있다. 김선아는 신미래라는 캐릭터를 통해 굳이 삼순이를 넘어설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신미래를 통해 삼순이의 캐릭터를 가지면서도 다양한 폭의 새로운 면모들을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시티홀'이 재발견한 연기자는 차승원과 김선아에 머물지 않는다. '온에어'에서 엔터테인먼트 대표로 등장해 강인한 인상을 주었던 이형철은 이 드라마를 통해 유하고 귀여운 면모를 갖게 됐으며, 지적인 이미지의 추상미는 이 드라마를 통해 귀여운 악녀의 면모를 갖게 되었다. 이밖에도 주목할 만한 연기자는 강인한 정치인의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던 최일화, 신미래의 가장 친한 친구인 정부미를 연기한 정수영, 그리고 국장삼총사들인 류성현, 신정근, 임대일이 될 것이다. 특히 지국장으로 분했던 신정근은 코믹 연기 속에서도 독특한 개성적인 힘을 갖고 있는 연기자로 주목된다.
좋은 드라마는 좋은 연기자들을 발견해낸다. 그만큼 캐릭터가 좋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시티홀'은 좋은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믹을 바탕에 깔고 정치와 멜로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하나의 드라마를 구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티홀'은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서 마음껏 준비된 연기를 보여준 연기자들에게도, 또 그 연기가 뿜어내는 행복과 슬픔을 공감한 시청자들에게도 '시티홀'은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차승원이 이토록 눈에 띈 적이 있을까. '시티홀'의 조국이라는 캐릭터를 만난 차승원은 여성들의 마음을 뒤흔들 만큼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최근 드라마의 한 경향으로까지 보이는 능력있고 잘생기고 부자인 판타지남들의 출연은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에서부터 시작해 '내조의 여왕'의 태봉씨(윤상현)로 이어졌다. '시티홀'의 조국은 겉으로만 보면 이 계보를 잇는 판타지남처럼 보인다. 하지만 구준표에서 태봉씨로 또 조국으로 이어지는 진화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조국이 가진 판타지가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준표가 주는 판타지는 말 그대로 물질적인 판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무지 가늠이 안되는 부가 그 판타지의 실체가 된다. 하지만 태봉씨로 넘어오면서 그 판타지는 부와 함께 인간미를 포함시킨다. 태봉씨는 한 여성을 숨어서 사랑하는 한 남자이면서 동시에 줄이 아닌 능력에 따라 사원들을 등용할 줄 아는 판타지 속의 사장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약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이(태봉씨가 30대 구준표라 불렸듯) 어떤 한 부류의 캐릭터라 여겨지는 것은 드라마가 이들에게 부여한 신적인 힘 때문이다. 이들은 드라마 속에서 거의 신처럼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하지만 조국은 다르다. 그는 능력있고, 잘 생기고, 돈도 있지만 뭐든 다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존재는 아니다. 항상 적들과 대치하는 상황 속에 서 있고, 심지어 자기 여자를 위해 뭔가를 해주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처해 있다. 현장에서는 특유의 능력을 발휘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한 여자 앞에서는 코믹스러울 정도로 엉뚱한 면모를 보여준다. 겉으로 보기엔 까칠해보이지만 속은 한없이 다정다감하다. 이 즈음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다.
이 능력있는 남성들은 모두 처음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자리에 서게 된다. 강마에는 시향의 지휘자로 서는 것이고 조국은 인주시의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서는 것. 하지만 이 둘은 모두 거기서 서민들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 중의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내기 위해 이제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게 된다. 강마에처럼 조국도 이러한 낮은 자들의 지킴이로서 갖는 판타지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 두 드라마는 현실과의 맥락을 갖게 된다. 판타지가 현실과의 맥락 없이 등장할 때 그저 마취적이고 도취적인 자극으로 함몰될 수 있는 반면, 현실의 반작용으로서 등장하는 판타지는 그 자체로 현실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강마에는 꿈꾸지 않는 현실을 꿈꾸게 만드는 존재이며, 조국은 이미 실종되고 포기된 시민들을 위한 정치를 다시금 꿈꾸게 만드는 존재이다.
따라서 이들 드라마에 등장하는 멜로 역시 그저 멜로에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사랑 그 이면에 어떤 희망이나 꿈같은 것을 등장시킨다. 강마에와 조국이 내포한 판타지가 단지 여성들의 판타지가 아닌 우리 모두의 판타지가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강마에를 닮은 조국이라는 판타지가 서민들을 위한 정치가 부재한 현실에 작은 꿈을 꾸게 만드는 것은 남녀의 차원을 넘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배우들이 수목 드라마에서 한 자리에 모였다. '그저 바라보다가'의 황정민, '신데렐라맨'의 권상우, '시티홀'의 차승원이 그들이다. 영화에서 각각 자신들만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수목극의 경쟁이 자존심 대결이나 다름없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연기대결은 말 그대로 불꽃튀는 양상을 보인다.
황정민은 팔색조 같은 연기자. 때론 비열한 악역(달콤한 인생)을 보여주다가 때론 바람둥이 같은 자유로운 남자로(행복), 또 부패한 형사(사생결단)로 껄렁껄렁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아주 순박한 시골청년(너는 내 운명)으로 변신하며 그 연기 영역을 넓혀왔다. 그런 그가 '그저 바라보다가'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바보처럼 순수한 우체국 영업사원이다.
톱스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어색하다가도 어떤 진지한 상황이 오면 고지식하고 고집불통일 것 같은 완고한 얼굴을 들이미는 구동백이라는 캐릭터는 사실 이 드라마의 주제나 마찬가지. 모든 것이 거래로 환산되는 세상에 관계를 희망하는 구동백은 현실적으로는 약자의 위치에 서면서도 오히려 잘못 돌아가고 있는 세상을 꾸짖는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다.
그 순수한 모습은 자못 '너는 내 운명'의 석중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캐릭터와는 차별화되는 점이 많다. '너는 내 운명'의 석중은 사랑에 순애보적인(심지어는 신파적인) 캐릭터에 불과하지만, '그저 바라보다가'의 구동백은 그 사랑의 차원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있다. 인간에 대한 어떤 예의 같은 것을 감지하게 하는 그 캐릭터를 황정민은 어눌하면서도 촌스럽고 때론 듬직한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신데렐라맨'의 권상우는 이 작품을 통해 연기논란에 대한 종지부를 찍으려 작정한 듯 하다. 그간 일련의 흥행실패(드라마 '못된 사랑'과 영화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로 절치부심한 듯 이 1인2역의 도전적인 작품을 꽤 능수능란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동대문 시장에서 장삿군으로 뼈가 굵은 오대산은 늘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낙천적인 인물인데 반해, 소피아 어패럴의 차남인 이준희는 모든 걸 다 갖고 있지만 가족사로 인해 어두운 인물이다.
'신데렐라맨'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이 드라마는 신데렐라(남자 신데렐라)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왕자와 거지 모티브를 첨부했다. 신데렐라, 왕자와 거지, 어느 쪽이든간에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변신욕구다. 그 변신한 인물들이 거기서 체험(새로운 삶을)해보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 이 고전적인 모티브를 가진 이야기들의 핵심이다. 권상우는 극과 극의 상황에 있는 두 인물을 연기하면서 동시에 그 인물들이 반대 편 역할을 연기하는 것 또한 연기하고 있다. 그간 보여주지 못했던 그의 연기세계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차승원은 일련의 코미디 장르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안정된 코믹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그의 코믹 이미지는 '차선수'라고 불리는 닉네임에서 알 수 있듯, 프로의 위치에 서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선생이라는 역할(선생 김봉두)을 맡아도 어딘지 "아마추어처럼 왜 이래?"하고 말할 것 같은 때묻은 모습을 먼저 보여준다. 그 선수이미지의 캐릭터는 엉뚱하게도 순수한 인물들을 만나(선생 김봉두에서는 시골사람들과 어린 학생) 무너지며 웃음을 준다. 그 웃음의 끝에는 선수가 순수한 마음을 찾아가는 변신의 흐뭇함이 덧붙여지기 마련이다.
'시티홀'은 초반부 신미래(김선아)라는 인물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조국(차승원)보다 큰 편이지만, 결국 조국의 변신과정이 멜로와 코믹으로 버무려진다는 점에서 차선수의 역할은 실로 중요하다 할 수 있다. 드라마 초반 내내 지속된 밴댕이 아가씨 선발대회 이야기는 그 '밴댕이'가 주는 우스꽝스런 뉘앙스를 미인선발대회라는 지방행사의 엄숙함과 대비시켜 웃음을 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차승원이 가진 캐릭터 그대로라고 할 수 있다. 어이없는 상황 속에서의 진지함은 차승원의 장기다.
물론 드라마는 대본과 연출 연기가 삼박자를 이루어야 빛을 발하는 것이지만 이번 수목드라마에서는 유독 그 비중은 연기자들에게 쏠리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황정민과 권상우와 차승원이 보여주는 연기의 세계는 어느 한 분야에서 자리매김한 연기자만이 가질 수 있는 능수능란함이 돋보인다. 불황으로 영화 제작편수가 줄어들어 드라마로 외유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로서는 이런 명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저 바라보다가'가 잔잔한 재미를 주고 있습니다. 연기자 데뷔 후 14년만에 처음으로 드라마에 출연한 황정민의 호연과 2년만에 복귀한 김아중에게 모아진 관심 덕분에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시청률은 '시티홀'과 '신데렐라맨'에게 다소 밀리는 양상이지만 평가 등 체감 인기는 오히려 앞서는 듯이 보입니다. 황정민은 역시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합니다.'그저 바라보다가'의 초반 줄거리의 핵심은 정치인의 아들과 염문으로 곤경에 처한 극중 톱스타...
새로 시작한 두 편의 수목극, ‘그저 바라보다가(이하 그바보)’와 ‘시티홀’은 비슷한 구석이 많은 드라마다. 모두 코믹극인데다가 공교롭게도 둘 다 영화배우들이 출연한 드라마. ‘그바보’에는 황정민과 김아중이 등장하고, ‘시티홀’에는 차승원이 나온다. 영화배우로서 이미 자신들만의 색채를 확실히 갖고 있는 이들이기에 드라마는 첫 회부터 흥미진진하다.
‘그바보’는 한지수(김아중)라는 톱스타와 구동백(황정민)이라는 우체국 직원의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로맨틱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너무나 순수해 심지어 바보 같은 남자 구동백 역할을 연기하는 황정민은 이 드라마에 확실한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시티홀’은 시청 공무원인 신미래(김선아)와 부시장으로 새로 부임한 조국(차승원)이 엮어 가는 지금까지 드라마로서는 좀체 접하기 힘들었던 정치라는 소재를 로맨틱 코미디로 풀어낸 드라마다. 코믹 연기로 정평이 나 있는 두 사람의 호흡이 드라마를 톡톡 튀게 만든다.
눈에 띄는 것은 이들 작품들에 출연하는 배우들에게서 전작의 향기가 묻어난다는 점이다. ‘그바보’의 황정민은 영화 ‘너는 내 운명’의 석중을 닮았고, 김아중은 ‘미녀는 괴로워’의 한나를 닮았다. 그래서인지 이 드라마는 어찌 보면 ‘너는 내 운명’과 ‘미녀는 괴로워’가 하나로 엮어진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분명 다른 점도 있다. 황정민은 ‘너는 내 운명’에서 자신보다 낮은 곳을 바라보며 한 여자를 죽어라 사랑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어쩌면 내게 이런 일이!”라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의 톱스타를 사랑한다. 반면 김아중은 ‘미녀는 괴로워’에서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자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오히려 한 남성을 신데렐라로 만드는 존재가 된다. 이 역전된 캐릭터의 상황이 한 드라마에서 엮어지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그바보’는 충분히 흥미를 끄는 작품이다.
한편 ‘시티홀’에서 김선아는 ‘내 이름은 김삼순’의 삼순이를 떠올리고 하고, 차승원은 그가 해왔던 많은 코미디 영화의 캐릭터들을 떠올리게 한다(차승원은 코믹 작품 속에서 어떤 일관된 캐릭터를 갖고 있다). ‘시티홀’에서 이들의 캐릭터는 ‘그바보’와 달리 전작의 캐릭터들이 가졌던 위치를 고수한다. 즉 김선아는 여전히 신데렐라를 꿈꾸고, 차승원은 폼생폼사를 지켜려다 망가진다. 이 부분은 이 드라마를 꽤 안정적인 느낌으로 바라보게 한다. 기대했던 부분을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채워주는 것이다.
아마도 영화 속에 등장하던 이들이 공교롭게도 같은 시간대에 드라마에 나오게 된 것은 영화계에 떨어진 불황의 그늘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영화 제작 편수는 줄어들었고, 톱스타들마저도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상황. 하지만 이들의 드라마 출연은 시청자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들의 등장이 막장으로 치닫거나, 혹은 늘 안전한 틀에 머물고 있는 드라마에도 어떤 자극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 영화 속에서 아버지들은 고군분투 중이다. 아버지들은 ‘파란 자전거’에서는 손이 불편한 아들에게 희망을 넣어주고, ‘눈부신 날에’에서는 딸을 만나 잃었던 가족애를 찾아가며, ‘날아라 허동구’에서는 IQ 60인 아들을 향한 뜨거운 부성애의 모습을, 그리고 ‘우아한 세계’에서는 가족들의 우아한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은 전혀 우아하지 않은 진창에서 뒹굴어야 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가부장적 가치관의 퇴조, 여성성이 중요해진 사회, 경제적으로 더 힘겨운 상황에 몰린 남성들, 그리고 무엇보다 권위 있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런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된 이 시대의 아버지. 최근 들어 이른바 ‘아버지 영화’라고 불릴만한 아버지에 대한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문화가 포착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들 영화들 속에서 아버지는 과거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희생하는 존재다. 모성애의 빈 자리는 이제 부성애가 차지한다.
아버지 영화가 가진 미덕과 한계
물론 어떤 영화는 아버지를 내세운 신파의 구조를 따라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들 ‘아버지 영화’들의 미덕은 그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비껴나 있던 아버지들이 그 중심에 서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것은 사라진 모성애의 뒤를 채워줄 부성애로서 아버지가 등장했지만 이것이 자칫 과거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신(新)가족중심주의’로 흐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이다.
‘가족의 탄생’과 ‘좋지 아니한 가(家)’가 해체되어가고 있는 가족에서, 어떤 새로운 가족에 대한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면 이들 아버지 영화들은 과거의 가치로 회귀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아버지 영화는 과거 ‘어머니의 눈물’로 대변되던 가족영화의 아버지 버전이 될 가능성이 짙다. 장 진 감독이 들고 온 가족영화, ‘아들’은 그런 면에서 여타의 ‘아버지 영화’들과는 맥을 달리한다. 어찌 보면 아버지 영화로 착각될 수 있는 이 영화는 바로 그 착각을 의도함으로써, 극적인 반전을 도모한다. 반전의 이유는 명확하다. 위에 언급한 대로 ‘아버지 영화’가 갖는 버전만 바꾼 가족영화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내레이션이 주는 난감한 유쾌함
15년 간, 단 하루도 생각이 떠날 수 없었을 아들, 준석(류덕환)을 만나러 가는 강식(차승원)의 마음은 짠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관객이라 해도 그 설정의 거미줄에 일단 걸리면 왠만해선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아기의 손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손에서 시작한 영화는 곧바로 인터뷰로 이어지는데 강식의 멍한 표정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 거미줄에 잡히는 것은 충분하다. 그런데 장진 감독은 그것도 모자라 내레이션이라는 형식으로 강식과 준석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것은 마치 일기장에 써내려 가는 듯한 이야기들이다. 거기엔 관객을 울리는 그들의 진정어린 속내에서부터 관객을 웃기는 엉뚱한 속내까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따라서 내레이션은 그저 절절한 그네들의 사연만을 전하는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그 장치를 통해 장 진 감독은 특유의 유머를 구사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다. 장 진 감독 특유의 화법을 통해 관객은 울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는 자신을 느끼면서 ‘이거 참!’하는 난감한 유쾌함을 경험하게 된다.
기대가 배반되는 순간, 새 패러다임이 열린다
차승원의 아버지 연기와 류덕환의 아들 연기는 장 진 감독의 전략에 딱 들어맞는다. 손짓 하나 표정 하나에서 그들의 감정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고, 내레이션은 그 감정들을 극대화하면서도 동시에 관조적인 입장에 서게 만든다. 그것은 일기 같은 내레이션이 갖는 상황 정리의 속성이 장 진 감독 특유의 쿨함과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15년 간 만나지 못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단 하루’라는 어찌 보면 심각한 이 영화에 난데없는 철새들의 삽화가 만화처럼 끼여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장 진 감독의 이런 스타일 덕분이다.
그런데 클라이맥스에서 던져지는 반전은 우리가 “이건 장 진 감독이니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전반부의 이야기들을 모두 뒤집는다. 그 모든 것들이 철저한 계산에 의한 의도적인 것이었다는 걸 느끼며 기대가 배반되는 순간, 한창 감정에 젖어있던 관객은 불현듯 고개를 쳐드는 이성을 느끼게 된다. 관객들 중에 어떤 분들은 이 당혹스런 반전을 불쾌함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감정을 두들기는 동안 우리는 지금까지 전개되어 왔던 영상들이(심지어는 날아다니는 철새들까지) 모두 복선이었다는 걸 알게된다. 우리가 기대했던 아버지 영화의 환상이 깨지면서 장 진 식의 가족영화가 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겪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은 이 정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영화의 핵심이 바로 이 반전에 있기 때문이다. 이 반전을 드러내야 영화가 가진 진짜 메시지를 잡아낼 수 있지만, 그 순간 영화의 매력은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 글로 전달될 수 있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장 진 감독이 제목에서부터 관객들이 선입견으로 갖고 있는 자신의 스타일까지 모두 반전의 장치로 활용해 의도한 ‘아들’의 메시지를 충분히 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좋은 영화에 대한 편견이나 평가절하가 두려워 한 가지 정도는 밝혀둬도 되겠다. 물론 ‘아들’은 아버지 영화가 주는 절절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영화지만 그렇다고 그저 아버지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 영화가 갖는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