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왕 루이>, 현실의 리트머스지 된 멍뭉이 서인국

 

중고책방 앞에서 자신이 외국어에 능통했다는 사실을 안 루이(서인국)는 문득 한 책에 손이 간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기억상실로 과거의 시간을 잃어버린 루이. 그 책이 자신의 처지 같다는 루이는 그러나 잃어버린 시간도 찾고 싶지만 새로 시작된 시간도 좋아. 따뜻하고 즐거워.”라고 복실(남지현)에게 말한다. 그러자 복실이 루이에게 묻는다. “새로 시작된 시간 중 좋았던 시간은 무엇인가요?”

 

'쇼핑왕루이(사진출처:MBC)'

문득 루이의 기억 속으로 복실을 만나 그녀의 집에 기거하게 되면서 하염없이 그녀만을 기다리던 자신을 떠올린다. 옥탑방 평상에서 시간을 보내고 옥상에서 복실이 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던 자신. 또 비오는 날 우산을 챙겨들고 버스 정류장에서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던 자신. 그는 새로 시작된 시간 중 하루 종일 너를 기다리던 시간들이 가장 좋았다고 말한다.

 

MBC 수목드라마 <쇼핑왕 루이>의 주인공 루이(서인국)에게 대중들은 멍뭉이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멍뭉이이란 강아지를 귀엽게 부르는 말. 루이가 멍뭉이라 불리게 된 건 이 드라마에서 기억상실이 된 채 복실에게만 의지해 그녀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그 캐릭터 때문이다. 출근길에 마치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따라다니고, 퇴근해 돌아오는 복실을 계단 밑까지 따라 내려와 반갑게 맞아준다.

 

밥을 앞에 놓고도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복실을 기다리고, 역시 강아지처럼 주인이 집을 비우면 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는다. 뭐든 다 시켜먹으려는 루이에게 설거지라도 하라며 그 보상으로 500원을 주자 그는 그것이 마치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인 양 소중하게 간직하려 한다. 심지어 삼겹살 굽는 프라이팬에 떨어져 뜨거워진 동전을 맨손으로 집어 올릴 만큼.

 

하지만 이 멍뭉이는 의외로 주변 사람들을 메이드나 집사로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 당연하다는 듯이 집 주인과 그 아들에게 이것저것 시키고, 그러면 왜 그러는지 모르면서 그들은 그 말을 듣는다. 임시로 차중원(윤상현)의 집에 머물게 된 루이는 그를 집사처럼 부려먹는다. 마치 강아지를 키우다보면 점점 주인이 메이드가 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처럼.

 

이처럼 이 드라마의 루이란 존재는 마치 인간 멍뭉이의 면면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그런데 이 멍뭉이 캐릭터가 의외로 우리의 마음을 잡아끈다. 아무런 사심도 없고 숨김도 없이 그 감정과 욕망 그대로를 드러내고 그저 사랑받기를 원하는 존재. 그리고 절대 주변 사람들에게는 눈조차 주지 않고 오로지 한 사람을 향해 있는 마음. 우리에게도 이런 존재들이 주변에 있었던가.

 

그런 순수함은 오히려 삭막한 현실을 비추는 하나의 리트머스지가 된다. 실종된 루이를 죽었다 치부하고 자신의 욕심만을 추구하는 백선구(김규철)나 그의 딸 백마리(임세미) 같은 인물들이 루이라는 순백의 멍뭉이를 통해 오히려 도드라진다. 반면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아 여전히 루이를 찾으려 애쓰는 그의 할머니 최일순(김영옥)이나 집사 김호준(엄효섭)은 그래도 남아있는 인간적인 정 같은 걸 느끼게 한다. 또 멍뭉이 루이와 복실에게 일도 주고 은근한 정도 느끼는 차중원은 스펙이나 간판보다 그 사람의 진가를 들여다보려는 인물로 부각된다.

 

현실에서는 찾기 힘든 멍뭉이 같은 존재. 그래서 그는 현실에서 벗어난 이상한 존재처럼 치부된다. 그런 그를 유일하게 알아봐주고 이해해주는 이는 복실 뿐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시골에서 갓 올라와 이 살벌한 현실에서 이방인으로 여겨지던 인물이었다. 그녀가 세상에 나를 알아봐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괜찮다고 루이에게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독백처럼도 들린다. 루이와 동병상련의 복실이 만들어가는 그 사랑이 더욱 애틋해지는 대목이다. 그것이 세상엔 없는 존재로서의 멍뭉이 같은 루이에게 빠져드는 이유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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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의 그림자 악역, 그들에게 박수를

드라마의 반은 그 몫이 악역이다. 드라마라는 갈등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주인공의 반대편에 선 악독한 인물이 있어야 하기 때문. 쉽게 이겨낼 수 있는 적을 두고 무슨 재미로 드라마를 볼까. 특히 대결구도가 관건이 되는 사극엔 화끈하게 욕먹고 확실하게 힘을 만들어주는 악역이 주인공보다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주인공만큼 사극을 장악해나가는 소문난 악역이 있으니, KBS ‘대조영’에서 신홍 역할을 맡고 있는 김규철과, MBC ‘주몽’에서 금와왕의 부인, 원후 역할을 맡고 있는 견미리다. 이 관록의 연기파 배우들은 공교롭게도 과거 ‘불멸의 이순신’과 ‘대장금’에서 확실한 악역을 소화해낸 바 있다.

몸을 아끼지 않는 명연기, 김규철
연극무대를 고집했던 그의 연기는 애초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서편제’에서 오정해와 공동주연을 했던 것 이외에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04년부터 드디어 ‘불멸의 이순신’과 ‘부활’로 악역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악역 연기는 음모에 능한 모사꾼. 주로 나라를 팔아먹고 배신을 일삼는 그의 연기에 걸려들면 제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욕이 나올 정도로 뿜어내는 카리스마가 강하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임천수 역할로 분한 그는 청소년기를 이순신과 함께 보내던 선량한 역할에서부터 아비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결국 이순신을 배신하는 역할까지 소화해낸다. ‘대조영’의 신홍 역할 역시 희대의 간웅이자 매국노. 신홍은 부모가 적진에 잡혀있는 부지광을 회유해 요동성의 문을 열게 하는 인물로 시작해, 지금은 연남생의 책사로 역시 당나라와 연남생을 손잡게 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향후에는 부씨 집안의 장자인 이해고를 도와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대조영을 괴롭힐 작정이다.

그의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는 이미 정평이 나있다. 2005년 KBS 수목 드라마 ‘부활’에서 악역, 최동찬 역을 소화해내며 악역도 갈채를 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특히 사고로 골절 수술을 받았지만 끝까지 휠체어 연기 투혼을 펼치며 시청자와의 약속을 지킨 그에게 시청자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다.

표독 연기 물오른 견미리
견미리의 악역 이미지는 대개가 ‘대장금’ 최상궁에서 나온 것. 수랏간 최고상궁을 두고 한상궁, 대장금과 벌이는 대결구도에서 확실한 악역을 선사했다. ‘대장금’의 힘은 온전히 견미리가 펼친 표독스런 악역이 반이라 할 정도로, 그녀는 출세에 대한 무서운 집념을 가진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최상궁 역을 확실하게 소화해냈다.

최근 ‘주몽’에서 활약하고 있는 견미리는 궁궐 내에서 자식을 앞에 둔 팽팽한 대결구도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주몽’이 좀체 부여를 벗어나 나라 건국에 일찍이 앞장서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자식들을 앞세운 원후 역의 견미리와 유화부인 역의 오연수의 대결이 볼만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녀의 악역은 대개가 ‘자기 사람’을 성공시키려는 욕망에서부터 비롯된다. ‘대장금’에서 금영을 앞세워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했다면 ‘주몽’에서는 자식 대소와 영포를 앞세운다. ‘주몽’에서 다른 점은 금와의 유화부인에 대한 사랑을 보며 살아온 질투심과 자식에 대한 모성애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스타’가 아닌 ‘연기자’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이제 중견 탤런트의 길을 걸어가는 그녀는 어떤 역할이 주어져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녀의 연기 결은 폭이 넓다. 하지만 이 어쩔 수 없는 악역의 매력은 그 중 백미가 아닐까.

사극에서는 칼을 휘두르는 사람보다 칼에 맞고 쓰러지는 사람이 더 잘해야 한다고 한다. 늘 빛만 보다 보면 그 빛이 사실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는 깜박 잊는 경우가 많다. 김규철이나 견미리 같은 드라마 깊숙이 그림자를 만들어 빛을 강조해 주는 악역들이 없다면 사극은 결코 빛날 수 없다. 그들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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